성경주석강해/사도행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함축된 성령이해4

은바리라이프 2008. 4. 24. 20:44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함축된 성령이해4
-사도행전 2:1-4 주석-
조 동 천


D. 성령 강림의 결과

2:4    kai. evplh,sqhsan pa,ntej pneu,matoj a`gi,ou
      kai. h;rxanto lalei/n e`te,raij glw,ssaij kaqw.j to. pneu/ma evdi,dou avpofqe,ggesqai auvtoi/j)
사역 : 그리고 모두가 성령의 충만을 받았고
      그리고 성령이 그들에게 말하도록 주시는대로 다른 언어로 말하기를 시작했다.

  1. 성령의 충만 : 모두가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
                  (evplh,sqhsan pa,ntej pneu,matoj a`gi,ou)
   성령(pneu,matoj a`gi,ou)이라는 단어가 1-3까지 나타나지 않다가 이제 묘사된다. 앞 절들에서 소리, 혀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이 성령이 모두에게 충만했다(evplh,sqhsan pa,ntej). '충만했다'는 의미는 영구적인 수여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짧은 기간의 한정된 수여를 의미하는지 논의할 필요가 있다. F. F. Bruce는 4절의 현상을 요한에 의해 예언되고(눅 3:16), 예수에 의해 새롭게 약속된(행 1:5) 성령의 세례를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성령의 충만은 여러 번 반복 될 수 있는 것이고(4:8, 31, 13:9), 성령의 세례는 단번에 영구히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4절에서 충만했고, 다시 동일한 사람들이 4:31에서 충만한 것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이것에 대해 I. H. Marshall은 서구적인 논리적 개념을 가지고 영에 대하여 적용하면 오류를 범하게 된다고 말한다. pi,mplhmi는 이미 영으로 충만하여진 사람이 더욱더 충만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4:8, 31, 13:9 등은 성령이 충만해졌던 것이지 성령이 하늘에서 내려와 다시 그들 위에 임하여 있게 된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3절의 ꡐ그들 각각 개인 위에 임재하였다( evka,qisen evfV e[na e[kaston auvtw/n)ꡑ는 것은 눅 3:16과 행 1:5의 예언과 약속의 성취인 성령의 세례이고, 4절의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해졌다(evplh,sqhsan pa,ntej pneu,matoj a`gi,ou)는 것은 이제 증인으로서의 특별한 권능을 받도록 충만해졌다는 것이다. 1장 8절에는 ꡐ성령이 임하면ꡑ ꡐ권능을 받는다ꡑ고 이 두 가지를 구별하면서도 동시에 이루어질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 권능은 성령이 그들에게 주시는 다른 언어를 하는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2. 성령 강림의 효력 : 다른 언어로 말하기를 시작했다                                (h;rxanto lalei/n e`te,raij glw,ssaij)
   오순절 성령 강림의 효력은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질문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언어가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이다. 특히 고전 14:2에 나오는 그런 종류의 방언(glossolaia)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는 것이다. G. Ludemann은 4절의 e`te,raij glw,ssaij를 고전 14:2과 같이 황홀경 상태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glossolaia)으로 보고 있으며, 2:11에서 그것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나타나는 것은 누가가 그의 선교적 관심을 가지고 언어 기적으로 해석해서 기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W. H. Willimon은 8절을 근거로 천하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그들의 난 곳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4절의 e`te,raij glw,ssaij는 천하 각국의 다른 언어들이라고 주장한다. D. J. Williams는 3절과 4절의 혀(glw,ssai)는 언어라는 뜻의 단어인 6절과 8절의 diale,ktw와 바꾸어 쓸 수 있고, 말한 것이 분명히 이해되어졌기 때문에 4절의 언어를 인식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논증하고 있다. D. G. Dunn은 독특하게 말하는 기적이 아니라 듣는 기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제자들이 고전 14:2과 같은 그런 종류의 방언을 말하는데 듣는 자들이 활홀경에 빠져서 알아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받는 것이 제자들인데 청중들이 활홀경에 빠졌다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어쨋든 이 문제는 1-4안에서는 해결이 안되고 그 이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그 정체를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e`te,raij glw,ssaij의 정체 보다는 의미를 누가의 전체적인 신학적 관심과 본문의 흐름을 통해서 가능한 한 접근을 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오순절의 언어기적 사건이 바벨 전승의 역전이라고 보는 학자들로는 W. Neil, F. F. Bruce, R. H. Smith , W. Schmithals 등이 있다. 이들은 바벨 전승이 인간의 언어가 혼잡하게 되어 서로 안통하게 되고, 그래서 공동체가 깨어지고 흩어지게 되는 것이라면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인간의 언어의 장벽이 무너지고 서로 교제가 가능하게 되어 공동체가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누가가 이 바벨의 전승을 염두에 두고 오순절 사건을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W. H. Willimon은 누가가 바벨 전승을 염두에 두고 오순절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오순절 성령 강림 때에 ꡐ하나님의 큰 일ꡑ이 선포된 것은 오직 유대인들만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이 이야기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해소되지 않은 시점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 사건 보도에는 하나의 언어만이 있게 되었다고 언급되지 않고, 오히려 누가는 제자들이 많은 방언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W. H. Willimon은 이런 근거들로 해서 바벨 전승과의 연관성을 거부하고 있다.


   물론 W. H. Willimon이 반론을 제기한 것 처럼 바벨탑 사건과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조목조목으로 반대의 현상을 정확하게 이루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전혀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단정이다. 비록 언어의 혼란 문제가 근본적으로 오순절 사건에서 해결 된 것은 아니지만, 언어의 소통이 각 나라 방언의 차이로 불가능했던 것이, 이 때에 상징적으로 짧게나마 이루어진 것은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언어의 소통을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누가의 선교에 대한 세계사적인 비전이 투여된 것으로 보인다. 누가 공동체의 관심이 깊은 이방인 선교의 문제는 그들에게 있어서 각 나라의 언어의 차이라는 두터운 장벽이 두려움으로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바벨탑의 언어의 혼란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루어 졌듯이 초대교회 형성의 본원적 경험이었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선물로 언어의 장벽이 능히 극복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경험하게 한 것이라 여겨진다. 이를 통해 공동체 회원들이 성령이 인도하는 선교라는 자신감을 갖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그런 사건은 그들의 공동체만 은밀히 알도록 비밀리에 진행된 사건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많은 사람들의 반응이 있었던 객관적 사건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오순절이라는 많은 사람이 모여든 시기를 성령 강림의 시기로 설정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므로 앞에서 말한 누가의 다양한 목적들이 무리 없이 성취될 수 있었던 것이다. 


3. 성령의 주도권 : 성령이 그들에게 말하도록 주시는대로
                  (kaqw.j to. pneu/ma evdi,dou avpofqe,ggesqai auvtoi/j)
   4절의 언어의 능력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이루어진 것(kaqw.j to. pneu/ma evdi,dou avpofqe,ggesqai auvtoi/j))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다른 언어의 현상을 누가는 그 곳에 온 천하 각국의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각기 다른 나라 말로 해석하고 있으며(6, 8절), 그 내용은 하나님의 큰 일로 밝히고 있다(11절). 언어의 기적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으로 새 술이 취하였다고 비방하는 것(13절)을 보아서는 앞의 내용과 모순 된 듯하다.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는 이 현상을 예언으로 해석하고 있다(17, 18절). 누가는 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기록하면서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이해의 자리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 결국 2절의 소리는 3절에서 혀로 구체화되고, 4절에서는 다른 혀(언어)로 도구화되고, 6, 8절에서는 다른 나라 언어로 보편화 되고, 11절에서는 하나님의 큰 일로 특수화되어, 17, 18절에서는 예언으로 확대 해석되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누가는 성령 강림의 현상을 언어기적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이것을 선교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다시 이것을 예언의 성취로 귀결함으로 성령의 능력을 통한 선교의 필연성과 확실성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누가는 예수의 복음을 ꡒ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눅 24:47)ꡓ전파하려는 선교의 기본 계획(행 1:8)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 되는(눅 3:6) 궁극적인 희망을 보여 주고 있다. 누가는 이것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체와 개인의 특성과 그 연원적 힘 그리고 원대한 선교의 비젼을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농축적으로 기독 공동체에게 맛볼 수 있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