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함축된 성령이해2
-사도행전 2:1-4 주석-
조 동 천
Ⅵ. 본문 주석
A. 성령 강림의 시간적 배경
2:1 Kai. evn tw/| sumplhrou/sqai th.n h`me,ran th/j penthkosth/j
h=san pa,ntej o`mou/ evpi. to. auvto,)
사역 : 그리고 오순절 날이 완전히 채워졌을 때에
그들 모두가 함께(같은 장소에) 그 때까지 있었다.
1.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기한 : evn tw/| sumplhrou/sqai
성령이 임한 때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오순절 날을 설정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ꡐ온순절 날이 완전히 채워졌을 때ꡑ라는 표현에 사용되는 sumplhrou/sqai가 아주 특이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두 가지 상이한 견해가 있다. 그 하나는 F. F. Bruce의 견해로 누가가 자주 사용하는 시간을 나타내는 기능을 하는 구절을 표현하는 evn tw +부정사의 일부로 생각하여 별 의미를 안주는 것이다. H. Conzelmann도 정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단순히 날짜가 도달한 것이지 때의 기간이 완성되었다는 의미로 보지 않는다. 이런 입장은 sumplhrou/sqai가 단순히 오순절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견해로는 그 동사에 특별한 의미를 두는 것으로 H. B. Hackett는 그 날 자체 만이 아니라 그 날이 이르기 전에 ꡐ지나가야 할 기간ꡑ이 완전히 지나갔음을 의미 한다고 주장한다. J. Pillips는 sumplhrou/sqai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여 이 동사를 사용하여 누가는 옛 제의적인 유대교의 오순절이 끝나고 하나님의 교회의 시작을 알린다고 주장한다. 이런 두 번째의 견해는 단순히 날짜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누가가 어떤 의도된 기간을 설정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3번 나오는데, 모두 누가 저자가 사용한 것이다(누가에 2번, 행전에 1번). 누가는 눅 8:23에서 이것을 시각적으로 인식이 가능한 사건 속에서 표현하여 물이 ꡐ가득하게 되어(suneplhrou/nto)ꡑ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눅 9:51에 나오는 evn tw/| sumplhrou/sqai는 본문과 똑 같은 형태로 시간의 차원에서 사용되어 본문의 의미를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ꡐEge,neto de. evn tw/| sumplhrou/sqai ta.j h`me,raj th/j avnalh,myewj auvtou/ (눅 9:51a)ꡑ는 ꡐ그의 승천의 날들이 완전히 채워질 때가 되었다ꡑ는 의미이다. 여기서 누가는 evn tw/| sumplhrou/sqai를 예수의 승천할 때가 충족되어진 기간이라는 틀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가는 승천의 날이 단순히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날을 바라보고 기다린 듯이 다가가고 있는 예수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계획된 시간표에 의해 움직이는 인상을 주기 위해 묘사한 것이다. 이것과 똑 같은 단어를 성령 강림의 때를 표현하는 본문에서도 사용하여 성령 강림이 하나님의 계획한 때에 이루어 진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본문은 성령을 부어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때의 기한이 가득 찼다는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누가는 자연스런 시간의 흐름이나 인간이 의도하는 시간의 개념보다는 철저히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시간 즉 인간의 의지가 배제된 하나님의 주권적인 때를 강조하고 있다. 그 예로 행 1:4에서 ꡐ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ꡑ, 1:5에서 ꡐ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ꡑ, 제자들이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를 물을 때에 1:7에서 ꡐ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오ꡑ라고 분명히 못박고 있다. 누가는 재림의 지연 문제도 아마 이렇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시간 계획에 있는 것이지 인간의 원함이나 기대에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함으로 해소한 것 같다. 누가는 자기의 공동체 안에서 여러 가지로 기대되고 의문으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기적이나 성령의 임재 등과 같은 문제를 이런 방식으로 해소하고 있다.
2. 성령 강림의 때 : 오순절(th.n h`me,ran th/j penthkosth/j)
우리의 관심을 끄는 다른 문제는 왜 그 때를 오순절 날로 정했느냐는 것이다. 오순절은 칠칠절이라고도 하며 , 신명기 16:16에 의하면 유대인의 삼대 절기 중에서 두 번째에 해당하는 절기이다. 이 때는 일 년 중 여행하기에 좋은 시기여서 많은 순례자들이 오순절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모였다고 한다. 본문의 th.n h`me,ran th/j penthkosth/j는 문자적으로 오십 번째의(th/j penthkosth/j) 날들(th.n h`me,ran)이라는 뜻으로 토비트 2:1과 마카베오하 12:32에서 처음 나타나고 있으며, 레위기 23:15-16절에 근거해서 언급한 것으로 ꡐ곡식의 첫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안식일 후 다음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 십일을 계수하여ꡑ나온 것이다. 이처럼 원래는 농경적인 의미에서 지켜지던 절기였으나 후기 유대교에서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수여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오순절에 대한 이해들은 본문의 전승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R. P. Menzies는 누가의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기록인 2:1-13이 전승 자료들에 기초한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여기서 역사가로서의 누가가 전승을 다루는 문학적 기법과 신학자로서 그것을 정교하게 다듬고 해석하는 방법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제 전승에 대한 다른 해석들을 살펴 보도록 하겠다.
1)시내산 율법수여 전승
오순절 성령 강림이 구약의 시내산 율법수여와 관계 있다는 주장은 E. Haenchen , F. F. Bruce 등의 의견이다. 이들은 주로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질 때의 장면묘사와 성령 강림의 사건묘사의 유사성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다. 즉 시내산에서 심히 큰 나팔소리가 울렸고(출 19:16), 불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강림하셨으며(출 19:18), 70인 장로에게 신이 임하신 때에 예언하였던 것(민 11:25) 등이 오순절의 성령 강림 현상의 묘사와 평행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내산의 율법 수여 사건이 오순절에 이루어졌다는 성경의 구절은 나와있지 않다는 약점이 있다.
2)랍비전승
후대 유대교의 랍비들은 시내산에서 율법 수여의 장면들을 오순절 날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랍비들은 대하 15:10-12과 출 19:1에서 그 근거를 두는 것 같으나 거기에도 명확하게 오순절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H. Conzelmann은 유대인들이 시내산 율법 수여를 축하하는 축제와 하나님의 음성이 70개 언어로 들렸다는 이야기를 유대인들이 익숙히 알고는 있지만 오순절 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W. H. Willimon은 오순절 사건에 대한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시내산 계약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랍비전승에 관계되어 있다는 의견은 이처럼 율법을 수여한 날이 오순절이라는 명확한 근거가 없으므로 설득력이 없을 뿐 아니라 랍비들의 문헌이 누가의 기록 보다 더 후대의 것이라는 사실에 의해서도 거부된다.
3)쿰란공동체 영향
오순절이 계약의 갱신 축제로서 여겨져 왔다는 초기의 증거가 있다. 그것은 오순절이 특히 쿰란공동체을 포함한 유대교의 몇몇 분파에서 대단히 중요시 되어 온 것으로 알 수 있다. 최근에 H. C. Kee는 Jub. 7:34-37과 14:1-6에 근거해서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성령의 부어줌이 계약의 갱신과 참여에 연관 되어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쿰란공동체의 계약갱신의식의 규칙의 앞부분과 1QS 1:16-2:19에서 보여주는 것은 사제들과 레인인들이 함께 하나님의 구원 행동과 하나님의 신실하신 행동들을 찬양하면서 ꡐ계약의 입문ꡑ을 말한다. 그러면 모든 계약에 들어가는 자들은 아멘을 외친다. 그 다음에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고 그들에게 축복을 선언하고 사탄의 무리에 속한 자들을 저주한다. 이런 의식은 그들이 매 년 실시하고 있으나 불행히도 날짜는 나와있지 않다. Grundmann은 사도행전 2장의 기록과 쿰란의 계약의 갱신의 세 가지 측면이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위대한 행동의 선포(1QS 1:21; cf. 1:9), 둘째는 씻음에 의해 발생하는 어둠에 속한 종족과의 분리와 회개를 요청하는 것이다(2:5-6; 2:111-12). 셋째는 공동체 구성원 서로간의 하나됨을 강조한다는 것이다(1:9; 2:24). 그러나 이것이 종교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에 불과한지 쿰란 공동체에 누가가 영향을 받은 것인지 확연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오순절과 율법 수여의 날이 연관성이 없다는 것으로 성령 강림이 구약에 나타난 율법수여의 장면에서 영향을 안받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행 2:1-4에 나오는 소리, 불, 방언 등은 율법 수여시 나팔소리, 불 가운데 강림, 예언 등과의 비슷한 분위기와 현상을 부인할 수 는 없기 때문이다. 누가는 왜 율법 수여의 이미지를 성령 강림의 사건에 묘사하였을까? 이것은 율법적 요구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기능으로서의 성령의 부어주심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율법이 누가 공동체의 이방인 선교에 있어서 걸림이 되고 넘어야할 장벽이기에 이것을 초대교회의 형성의 뿌리가 되는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암시적으로 율법 수여의 사건의 대체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율법의 수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운 관계의 질서가 이루어졌듯이(출 19:6), 이제는 그 동일하신 하나님이 성령의 수여를 통해서 새로운 관계를 그의 교회와 이루시는 것을 누가는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 일어나는 성령의 임재는 율법에서 소외된 이방인과 유대인의 장벽을 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그 좋은 예가 고넬료의 집에 임한 성령의 강림이라는 사건이 베드로에게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이가 하나님에게는 없다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행 10:47, 11:9, 15, 17 등에 ꡐ우리와 같이ꡑ가 반복되어 강조됨). 또한 예루살렘 회의에서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한 것을 율법의 준수보다 더 상위에 두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리새파 중에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5절).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하게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8-11절).ꡓ
여기서 분명히 성령의 임재는 율법의 기능을 능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전면에 나오는 율법을 강조하는 부류의 사람들의 존재는 누가 공동체의 율법에 관한 문제가 심각함을 반영하고 있다. 그 해소를 위한 시도가 이미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3. 사람들의 기다림 : 그들 모두가 함께 그 때까지 있었다(h=san pa,ntej o`mou/ evpi. to. auvto)
누가는 성령 강림의 사건에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약속을 믿고 기다리며 기도하는 일로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1:4에서 ꡒ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ꡓ, 1:5에서 ꡒ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ꡓ, 1:7에서 ꡒ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오ꡓ라고 강조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인간의 역할이 과소 평가될 수는 없다. 누가는 1:14에서 ꡒ더블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ꡓ라고 성령 강림 사건 전에 사람들의 준비됨을 중요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 강림 사건에서 사람들은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는 것 뿐 다른 역할이 없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중요한 지점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시간을 제시하고 있다(눅 9:51, 행 1:7, 3:24, 4:28, 7:14 등). 거기에는 인간의 시간 계획이 끼어 들 자리가 없다(1:6-7). 이런 의미에서 오순절의 성령 강림의 시간적 배경인 1절은 ꡐ모두가 그 때까지 있었다ꡑ는 것에서 사람의 역할과 ꡐ오순절이 가득 차매ꡑ라는 것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시간이 조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A.하나님의 계획된 시간 : 오순절이 가득 차매
성령강림의 시간적 배경(1절)
B.인간의 기다리는 시간 : 모두가 그 때까지 있었다
1)기다리는 주체 : 모두가 함께(pa,ntej o`mou/)
성령을 받을 때 그 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함께 있었다. 그런데 ꡐ모두ꡑ가 가리키는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많은 의견이 있다. 우선, 바로 앞에 있는 1장 26절의 열 두 제자를 언급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와 비슷하게 1:14절의 열 한 제자와 여자들과 예수의 아우들을 지칭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성령의 임재를 제한 한 것으로 베드로의 설교에 나오는 19절(모든 육체에), 39절(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에 상반되므로 성립하기 어렵다. 다음으로 120명의 형제들 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을 상정하는 것으로 축제를 맞아 12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1:15에 근거하여 ꡐ모두ꡑ가 가리키는 범위는 120명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듯하다. 그 근거로는 1:11의 갈릴리 사람들(Andrej Galilai/oi)의 수가 1:15에 나오는 120명 정도 모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 사람들이 2:1과 같은 사람들임을 2:7(oi` lalou/ntej Galilai/oi)이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2)기다리는 기간 : 그 때까지(evpi. to. auvto)
기다리는 기간은 그 때까지이다. 여기서 그 때가 가리키는 것은 오순절 날이 가득 찼을 때를 의미한다. 그 증거로는 to. auvto가 중성 대명사인데, 이 문장 안에 이것을 받는 중성 명사로는 tw/| sumplhrou/sqai(중성관사 +부정사 = 중성명사)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1:15에 나오는 evpi. to. auvto라는 똑 같은 형태를 가지고 다락방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는 13절 중성 명사인 다락방(to. u`perw/|on)이 있어 evpi. to. auvto( evpi + 목적격)가 ꡐ그 위에ꡑ라는 뜻이 가능한 것이다. 또 다른 경우는 evpi. to. auvto가 함께 라는 경우로 많이 사용되고 있어서 1절에서도 ꡐ함께ꡑ라고 번역해야 된다고 생각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미 o`mou(함께)라는 말이 나오고 있으므로 자연스럽지 않다. 대부분의 번역들은 evpi. to. auvto를 ꡐ한 곳에(in one place)ꡑ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evpi. to. auvto라는 말에는 '한 곳'이라는 단어나 의미가 없다. 오히려 ꡐ그 때까지ꡑ라는 번역이 문법적으로도 정확하고 , 누가의 하나님의 때와 기다림이라는 사상이 반영된ꡐ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ꡑ(1:4)것과 ꡐ때와 기한이 아버지의 권한ꡑ(1:7)이라는 강조점에 부합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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