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선교사/성지 자료

<화려했던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

은바리라이프 2008. 4. 23. 20:09
<화려했던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쐐기처럼 좁고 긴 땅덩어리를 그리스 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라고 불렀다. 메소는 ‘사이’,포타모스는 ‘강’이라는 뜻이니,두 강줄기 사이에 있는 땅을 이른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4,500년 전에 이 땅에는 수메르·아카드·바빌로니아·아시리아가 차례로 번성해 훌륭한 문명의 자취를 남겼다.

그 중의 한 나라 아시리아. 기원 전 2500년 아수르에 세워진 이 도시 국가는 상비(常備) 시민군을 만들면서부터 강해져 기원 전 1200년에는 강대국 바빌로니아까지 지배했다. 기원 전 960년부터 350년간 아시리아는 세계에서 제일 크고 강했다. 그 세력이 동서로는 인도에서 이집트,남북으로는 아라비아에서 러시아에까지,그들의 말마따나 멀리 ‘산봉우리가 줄지어 선 곳으로부터 해가 지는 왼쪽 바다에까지’ 미쳤다.

기원 전 700년 아시리아의 수도가 된 니네베(니느웨)는 그 무렵 가장 위대한 도시로 떠올랐다. 웅장한 궁전과 사원들을 둘러싼 성벽은 그 위로 수레 3대가 달릴 만큼 두터웠고(너비 9.6m),23m나 솟은 성벽을 너비가 24m인 해자(방어용 연못)가 둘렀다.

‘상인의 수가 별보다 많을’ 정도로 번창하고,그 시대의 로마라고 하리만큼 세계의 중심지이던 니네베는 그러나 기원 전 612년 하루 아침에 사라졌다. 더 화려하고 더 오래 영화를 누린 도시가 많은데 겨우 89년을 번성한 니네베가 그처럼 성경에 많이 등장하고 2600년이 지나도록 자주 거론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바로 니네베 시절의 아시리아가 역사의 들머리에서 보기 드물게 잔학성을 떨친 데 있다.

아시리아의 제왕들이 오벨리스크(돌 한 개를 깎아서 높이 세운 기념탑) 따위를 만들어 저마다 새겨 놓은 무용담이나,궁전과 사원 벽에 새긴 글과 그림에는 왕에 대한 두려움을 자아내는 내용이 가득하다.

‘짐은 잔인하고…전쟁에서는 앞장서 달리는 온 천하의 왕이며…무릎 꿇지 않는 적들을 짓밟고 온 세상을 손아귀에 넣었노라.’(아슈르나시르팔 왕)

‘나는 들판을 피로 물들이는 무시무시한 태풍이로다.’(아슈르바니팔 왕)

포로나 반역자를 창에 꿰고 살갗을 벗긴 아슈르나시르팔보다 더 잔인한 왕은 니네베로 수도를 옮긴 센나케리브다. 그는 바빌론을 쳤을 때 도시 전체가 시체로 가득 찰 때까지 주민들을 하나하나 살육하고 집들을 남김없이 불태웠다. 피의 제왕은 니네베 신전에서 기도하다가 아들들에게 살해되어 자신의 주검도 피로 물들였다.

아시리아인들은 말과 법률과 생활 양식을 수메르와 바빌로니아로부터 배웠지만,돌을 다룬 솜씨만은 누구보다 빼어났다. 그들은 돌을 다듬어 아치를 세우고 수로를 팠으며 뛰어난 조각 예술을 후대에 남겼다. 제련술·상감술·도료술 같은 공업 기술에도 뛰어났다. 도서관은 수학·천문학·점성학 책으로 가득 찼으며 세계에서 처음으로 식물원·동물원과 사냥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무어니 무어니 해도 아시리아가 첫째로 내세운 자랑거리는 군대였다. 군대 조직에는 기병대·전차대·경보병대·중보병대·포병대·기술지원부대에다 첩보부대까지 있었다. 병력은 보병 170만,기병 20만에 전차 1만6,000대. 구약 성경은 아시리아 군대가 들이닥치는 모습을 ‘돌풍과 같다’고 했다. 예언자 이사야는 “그들이 사자처럼 바다처럼 으르렁거리며 달려와 지나는 곳마다 슬픔과 어둠을 남겼다”고 한숨지었다.

돌개바람처럼 서아시아를 휩쓸었던 아시리아는 기원전 612년 연기처럼 사라졌다. 사치와 게으름에 빠져 있던 아슈르바니팔 왕은,메디아×칼데아×스키타이 연합군이 바빌로니아를 앞세우고 쳐들어오자 궁에 불을 지르고,궁녀와 시종들 그리고 자신까지 불길에 내던졌다.

지상에서 가장 눈부시고 거대했던 도시 니네베는 폐허로 바뀌었다. 수천년간 사막 바람이 뜨거운 모래와 먼지 구름을 몰고 와 폐허를 덮자,왕성은 큰 둔덕으로 바뀌었다. 바람 타고 날아온 씨앗들이 봄비를 맞고 움이 터서 둔덕에 초록빛 융단을 깔았다.

‘니네베가 황폐하였도다.…누가 위하여 애곡(哀哭)하리오?’(구약 성서 나훔 3장 7절)

아시리아 것으로서 남은 것은 무엇 하나 없었다. 흐릿한 전설과 성경 속의 뜻 모를 구절들뿐.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눈부신 영화를 누리던 궁전이 있었다는 자취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스처럼 신전이 서 있지도 않았고 멕시코나 잉카처럼 피 묻은 제단도 없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 여기저기에 솟은 완만한 둔덕,아시리아의 궁전과 성벽이 묻힌 그 둔덕들에서 염소에게 풀을 뜯기며 사람들은 말해왔다.

“니네베는 정말 있었을까? 왜 그것을 증명할 유물이 단 한조각도 없을까?”

19세기 초까지도 고고학자들은 땅 속을 파헤쳐 옛 유물을 찾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으므로 그 둔덕들은 누가 보아도 그저 자연이 만든 낮은 산일 뿐이었다.

 폴 에밀 보타

1840년,지금은 이라크 땅이 된 티그리스 강변의 모술이라는 도시에 프랑스 영사관이 들어섰다. 영사로 폴 에밀 보타가 취임했다. 모술은 페르시아 만의 바스라와 터키를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그 무렵 서아시아를 다스리던 오스만 제국이 힘을 잃어가자 유럽 열강은 다투어 서아시아에 진출할 발판을 그 지역에 마련하려고 했다.

모술 시에서 강을 건너면 니느웨라는 마을이 있었는데,높다란 둔덕들이 띄엄띄엄 흩어져 있었다. 보타는 저녁마다 말을 타고 들판으로 나가 둔덕들을 둘러보는가 하면 집집마다 다니며 골동품을 수소문했다. 그가 가끔 화살촉 모양이 많이 새겨진 벽돌을 보고 어디서 났는지 물으면 그 지방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보타는 니느웨에 있는 퀸지크(양떼) 언덕을 파 보기로 했다. 그는 본디 의사였지 고고학자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둔덕을 파 보려고 한 까닭은,그가 프랑스를 떠나올 때 독일의 아시아학자 줄리우스 몰이 부탁한 말 때문이었다.

“대영박물관에 가면 메소포타미아에서 구해온 벽돌들이 전시되어 있는데,화살촉이나 못 모양을 한 설형문자(쐐기모양 문자)가 새겨져 있소. 아마도 수천년간 땅 속에 묻혀 있는 엄청난 문명을 풀 실마리가 될 겁니다. 그러니 모술에 가거든 설형문자가 새겨진 벽돌을 찾아보고 가능하다면 거기 널린 둔덕들을 파보시오. 니네베가 거기 묻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보타는 퀸지크 둔덕을 1년 가까이 팠다. 그러나 나온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라비아 사람이 모술에서 16㎞ 떨어진 코르사바드에서 찾아왔다.

“우리 마을에는 당신이 찾고 있는 벽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보타는 건성으로 들었으나 그가 하도 떠벌리면서 귀찮게 하므로 에멜무지로 일꾼 두세명을 딸려 보냈다. 1주일쯤 지나 일꾼 한사람이 헐레벌떡 돌아왔다.

“삽질을 하자마자 벽이 나타났는데 이상한 그림들이 새겨져 있더군요.”

보타는 허겁지겁 코르사바드로 달려갔다. 몇 시간 뒤 그는 그 때까지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유물들과 마주했다. 턱수염이 무성한 사람 얼굴에 날개 달린 짐승 몸뚱이. 그것은 이집트에서도 보지 못한 아주 새로운 조각 예술이었다.

보타의 가슴은 터질 듯했다. 니네베가 아니라 하더라도 아시리아 제국의 궁성 하나를 발견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얼른 파리로 알렸다. 그 날은 1843년 5월24일이었다.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아시리아 전성기의 조각들을 찾았다!”

신문마다 이 기사를 크게 다루었다. 현대 고고학 발굴의 효시가 된 에밀 보타의 ‘땅 파기’에 프랑스는 열광했다. 그 무렵 학문으로는 이집트가 인류의 발상지라고 알려져 있었다. 에덴동산은 다만 전설일 뿐이었다. 성경에 무려 152차례(‘니네베’라는 말은 신·구약 성경에 20군데,‘아시리아’라는 말은 132군데에 나온다)나 언급된 아시리아 제국 또한 전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아시리아가 정말 있었다면? 메소포타미아에 이집트보다 오래된 문명이 있었다면? 그렇다면 ‘창세기’ 이후의 성경 기록은 모두 옳다는 말인가? 학자들은 긴장했고,기독교 신자들은 흥분했다.

프랑스 정부는 거금 14만프랑을 모아 보내면서 발굴한 유물을 스케치할 화가까지 딸려 보냈다(아직 사진기가 발명되기 전이었으므로). 유젠 나폴레옹 플렁댕이라는 데생 전문가였다. 힘을 얻은 보타는 1843년부터 4년 동안 메마른 날씨와 말라리아에 시달리며 발굴에만 모든 힘을 쏟았다.

보타를 괴롭힌 것은 날씨와 질병만이 아니었다. 그 지방을 다스리는 오스만 제국 관리 파샤는 보타가 땅을 파는 것이 돈벌이를 위해서이거나,요새를 구축해 그 지방을 지배하려는 것이라고 보고 사사건건 간섭하고 훼방했다. 파샤는 원주민 일꾼들을 연행해서,보타의 비밀을 캐내려고 고문하기도 했다. 보타는 그같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끈질기게 발굴을 계속했다.

보타가 코르사바드에서 찾아낸 것은 기원전 709년 니네베 근교에 세워진 여름 궁전이었다. 성벽이 잇따라 나오고,방과 정원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옹기도 나왔고,무기도 나왔다. 조상(彫像:돌을 깎아 만든 사람이나 짐승 모습)과 부조(浮彫:편평한 돌 따위에 어떤 모양을 돋을새김한 것)도 쏟아져 나왔다. 거기에 새겨진 것들을 통해 사람들이 집안을 가꾸고,사냥을 즐기고,전쟁을 치른 모습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보타는 발굴한 유물들을 뗏목에 실었다. 그런데 뗏목이 티그리스강 상류에서 급류에 휘말려 빙빙 돌다가 가라앉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수천 년 만에 부활한 아시리아의 석조 신(神)과 왕들은 또다시 현실세계로부터 사라졌다.

그러나 보타는 낙심하지 않았다. 새로운 배를 띄워 더 많은 유물을 파리로 실어 보냈다. 2500년 전 역사에서 사라졌던 대제국의 자취들은 이렇게 해서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자리잡게 되었다.

 오스틴 헨리 레어드

니네베를 실제로 발굴한 사람은 영국인 오스틴 헨리 레어드이다. 그는 파리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보냈다. 그때 레어드는 ‘아라비안나이트’와 ‘바빌로니아 여행기’를 줄창 읽었고,아버지를 따라 미술관들을 돌며 미술품 보는 눈을 키웠다. 소년은 그림도 배웠는데,이것은 뒷날 그가 유물들을 스케치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레어드는 스물두살 때 런던의 법률사무소를 벗어나 무작정 아시아로 갔다. 뒷날 트로이를 발굴한 슐리만과,니네베를 발굴한 레어드의 인생은 정반대였다. 슐리만은 먼저 사업을 해 돈을 번 뒤에 트로이를 찾으러 나섰지만,레어드는 갓 스물을 넘긴 빈털터리인 상태에서 무작정 거친 곳에 뛰어들었다. 두 사람이 같은 점이라면,어릴 때 읽은 책에서 감명받아 그때 품었던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레어드는 콤파스·육분의와 측량기구 다루는 법은 물론 열대병 치료법과 페르시아어까지 배우고는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뭍길을 통해 1839년 7월10일 메소포타미아로 갔다. 그 무렵은 이집트와 중동 지역의 여러 민족이 오스만제국에 반기를 들어 몹시 어수선할 때였다. 자칫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여행이었지만,옛 문명을 보고 싶다는 그의 욕망은 강렬했다. 그는 뒷날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의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은,서양 지혜의 발상지인 유프라테스강 저편에 가 있었다. 거기에는 지난날 위대했던 국민과 거대했던 도시의 슬픈 그림자가 서려 있었다.”

1840년 4월10일 레어드는 모술에 닿았다. 강 건너에 니네베의 폐허일 것으로 짐작되는 거대한 둔덕들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날마다 벌판을 쏘다니며 둔덕을 어루만지는 일로 하루 해를 보냈다. 아무 데도 돌기둥이나 화려한 조각은 없었다. 둔덕들은 그저 메마른 땅에 밋밋하게 솟은 볼품없는 흙더미였다. 가끔 비가 그친 뒤에는 옹기 부스러기와 벽돌 조각이 드러날 뿐이었다.

레어드가 1주일이나 더듬은 퀸지크 둔덕은 높이가 28.5m나 되었다. 어림잡아 12만톤이나 되는 흙을 파헤치려면 일꾼 만명이 10년도 더 달라붙어야 할 만큼 어마어마했다. 빈털터리 청년 한 사람이 도전하기에는 아예 불가능한 대상이었다. 그럴수록 그곳을 파보고 싶은 마음은 더 뜨겁게 타올랐다.

1842년 레어드가 페르시아 지방에 갔다가 모술로 돌아가니 그 사이에 프랑스 영사관이 들어서 있고,프랑스 영사 에밀 보타가 퀸지크 둔덕을 발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레어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보타를 만나 보니 마음에 들었다. 그와 멋진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레어드로서는 발굴을 더 늦출 수 없었다. 그는 보타를 찾아가 퀸지크에 틀림없이 중요한 것이 묻혀 있을 것이라고 격려한 뒤 발굴 자금을 구하러 영국으로 떠났다. 가는 길에 콘스탄티노플에 들른 그는 영국 대사 스트랫포드 캐닝과 사귀느라 그곳에 눌러앉았다. 어느날 보타로부터 코르사바드라는 곳에서 옛날 궁전 한 군데를 발굴했다는 소식이 왔다.

1845년 11월18일 캐닝에게 외교관 신분증과 60파운드를 얻은 레어드는 다시 모술을 찾았다. 그는 님루드로 가서 유목민 부족 우두머리와 사귀었다. 님루드에도 그가 점찍어 둔 둔덕이 있었다. 그는 11월28일부터 유목민들의 도움을 얻어 님루드 둔덕을 발굴하기 시작했는데,삽질을 한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아 석판(石板) 여러 개가 나왔다.

“그 얇은 돋을새김은 전투 장면을 새긴 것이었다. 눈부시게 꾸민 전차 2대에는 각각 세 사람이 타고 있었다. 수염 없는 장수가 갑옷을 입고 활시위를 귀밑에까지 팽팽하게 당기고 있었다. 옆의 전사는 말고삐를 잡았고,또 한 전사는 방패로 장수를 가리고 있었다. 전체가 짜임새 있고,사람과 말의 근육까지도 세밀하게 새겨져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에는 이런 조각이나 부조를 책이나 박물관에서 쉽게 볼 수 있지만,그때에는 그런 것을 본 문명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 신선한 충격과 거센 흥분이 레어드의 온몸을 달뜨게 했다.

레어드가 님루드에서 니네베 유물을 찾았다는 소식은 슐리만으로 하여금 트로이 발굴에 더욱 힘을 쏟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슐리만은 “레어드가 성경 속의 니네베를 찾았다는데,나라고 전설 속의 트로이를 찾지 못한다는 법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느날 일꾼들이 구르듯이 달려왔다. 레어드가 뛰어가 보니,날개 달린 사람 머리가 흙 위로 나와 있었다. 아시리아인들은 사람의 뛰어난 머리와 사자의 힘센 몸뚱이,독수리의 날랜 날개를 숭상했다. 사람 머리에 날개 달린 사자는 신전 입구를 지키는 수호신이었다.

조상과 부조는 끊임없이 쏟아져나왔다. 머리는 사람이고 몸통에는 날개가 달린 사자와 황소 조상은 열세 쌍이나 나왔다. 님루드 둔덕의 북서쪽 폐허는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궁전이었다. 이 발굴로 레어드의 명성은 보타를 앞지르게 되었다.

레어드는 다음 발굴지를 퀸지크로 정했다. 파볼 만한 곳이 많았는데도 그는 보타가 1년을 파헤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곳을 다시 파들어갔다. 그는 둔덕의 겉모습만 보고도 어디를 파야 할지 알았고,그 판단은 정확했다.

  앗시리아 문명

레어드가 예상한 대로 퀸지크는 니네베 궁전터였다. 1849년 가을 그가 땅 속 6m에서 찾아낸 궁전은 피의 제왕 센나케리브의 궁전이었다. 레어드는 여기에서 엄청난 유적을 발굴했다. 센나케리브의 아들 아슈르바니팔이 세운 기록보관실(도서관). 거기에는 진흙을 구은 점토판에 쐐기 모양 글자를 새긴 책이 2,500개나 묻혀 있었다.

점토판은 아슈르바니팔 왕이 서아시아 방방곡곡에서 거두어들인 자료였다. 거기에는 철학·천문학·수학·의학은 물론 왕의 계보와 역사 기록,문학·가요도 있었다. 문학 자료에는 서아시아 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설화도 있었다. 거기에서 나온 세계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는 뒷날 그 내용이 해독(解讀)된 뒤 인류의 문명과 종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레어드의 조수였던 호르무즈드 라삼이 발견한 ‘길가메시’는 우주 창조와 대홍수 이야기가 담긴 바빌로니아의 영웅 이야기다. 오늘날 일부 학자들은 ‘길가메시’가 고대에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널리 퍼진 대홍수 이야기 등을 집대성했다는 점을 들어 유태교의 구약 ‘창세기’ 내용도 여기에 근거를 두었으리라고 주장한다. 앗시리아와 이집트 이야기가 구약에 많이 나오는 것도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 노예와 포로생활을 한 유태인들이 두 곳의 신화와 종교를 배워 자기네 종교를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레어드는 비명에 새겨진 설형문자의 탁본을 뜨기 위해 손수 로프를 타고 암벽을 내려가기도 했다. 온전한 상태의 점토판과 비문이 쏟아져 나오자 설형문자 연구에 가속도가 붙었다. 설형문자는 처음에 페르시아 지역에서 발견된 벽돌에 새겨진 것을 1802년 독일인 교사 게오르게 그로테펜트가 실마리를 푼 뒤 한동안 주춤했다. 그러다가 레어드의 엄청난 발굴에 힘입어 1857년 영국인 헨리 롤린슨이 완벽하게 풀어냄으로써 앗시리아 문명의 2500년 전 모습을 현대인 앞에 드러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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