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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희 목사의 성서 속 도시 이야기] 하맛과 두라 유로포스

은바리라이프 2008. 4. 23. 23:34
이원희 목사의 성서 속 도시 이야기] 하맛과 두라 유로포스
2008/02/12 오후 6:13 | 성서의 고향을 찾아서

[이원희 목사의 성서 속 도시 이야기] 하맛과 두라 유로포스

하맛(Hamath·삿 3:3)은 오늘날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다메섹)에서 북쪽으로 214㎞ 지점에 있는 오론테스 강변의 나흐르 엘 아시(Nahr el Asi)이다. 에블라 문헌에서는 에마투(Ematu)로,시리아-히타이트 설형문자 비문에서는 아마투(Amtu)로 표기되고 셀루시드 왕조 때(BC175∼164년)에는 에피파네이아로 개칭되었는데 현재 지명은 하마(Hama)이다.

시리아의 북부 알렙포에서 출발하여 하맛까지는 146㎞지만 시리아에서 가장 잘 닦여진 4번과 5번 고속도로를 이용했기 때문에 중간에 있는 에블라 유적지에 들르고도 점심시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서시대에 하맛은 오랫동안 독립 왕국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지경을 정탐할 때 최북단의 정탐도시였다(민 13:21). 다윗 때에는 하맛 왕국의 수도였으며 다윗은 이 왕국과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그래서 소바 왕 하닷에셀을 물리칠 때 하맛 왕 도이(Toi)의 도움을 받았으며 다윗은 소바와 동맹을 맺었다(삼하 8:3∼12 참조). 이후 솔로몬은 이곳까지 진출하여 요새를 세웠는데 성전 낙성식 때는 이곳 사람들까지 참여했다(왕상 8:65). 오늘날의 풍요로운 모습을 보면서 솔로몬이 국고성을 세울 만한 입지적 조건을 일찍부터 갖추고 있었음을 짐직할 수 있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맛에 남아 있는 백성들까지 돌아올 것이라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했다(사 11:11).

하맛에 대한 발굴은 1931∼38년에 인골트(H Ingholt)가 이끈 덴마크 발굴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발굴 결과 12개의 주거층이 드러났는데 최초의 거주시기는 신석기 시대까지 거슬러올라 간다. 가장 오래된 지역은 왼쪽 강둑이며 그 규모는 높이 45m,넓이 12㎢의 성채 마운드이다. 그리고 3세기쯤 골짜기에 세워진 신전터에서 출토된 유물은 현재 대사원에 보존돼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곳에서는 여호와 신앙과 관련된 특별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오늘날 직물산업의 주요 도시인 하맛은 오론테스 강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해 있는데 시내 중심가에 고대 수차가 있는 아름다운 도시로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물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은 생존에 관계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고대에는 물을 도시로 끌어오기 위해 지하터널을 만들기도 하고 로마의 수도교처럼 공중에 수로를 건설하기도 했으며 하맛에서 처럼 수차를 이용하기도 했다.

두라(Dura·단 3:1)의 위치에 대해 제기되는 장소들 가운데는 두라 유로포스(Dura Europos)와 하볼,유프라테스강이 만나는 바벨론 남쪽 툴룰두라(Tulul Dura)가 있는데 아마 텔 데르(Tell Der)를 말하는 것 같다. 텔 데르는 바벨론 남쪽 9.6㎞,바그다드 남서쪽으로 27㎞ 떨어진 곳이다. 두루라고 불리는 바벨론식 이름의 지역들이 있는데 두라라는 말은 바벨론어로는 벽(wall),아카드어로는 ‘경계선으로 둘러싸인 부분’ ‘벽으로 둘러싸인 곳’을 의미한다.

두라 유로포스는 오늘날 시리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곳을 찾으려면 다메섹에서 북부 시리아 사막을 동서로 횡단한 후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다드몰에서 1박한 나는 사막을 지나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내려갔다. 강가를 끼고 평야가 있었지만 농촌은 무질서해보였다. 두라 유로포스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신상을 세웠던 곳으로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두라(단 3:1)로 언급된다. 이곳은 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막료 셀레오쿠스 1세에 의해 전형적인 그리스 도시로 건설됐다. 그러나 기원전 256년 야밤에 지하터널을 뚫고 급습한 페르시아(성경의 바사)군의 공격으로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그후 이 도시는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

두라에 도착하자 평지로 이루어진 메소포타미아의 전형적인 지형 속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육중한 철문 하나와 동쪽 성벽의 일부분이 남아 있었다. 찾는 이가 없어서 그런지 성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나는 일행과 함께 낮은 곳의 성벽을 넘어들어 갔다. 특별한 유적은 없고 초기 교회와 회당터만이 있었고 나머지는 아직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 옛날 느부갓네살 왕의 금신상이 세워졌던 곳. 그러나 지금은 죽음의 도시로 버려진 채 인적이 끊긴 두라의 유적을 바라보며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페니키아 지역의 시돈과 사르밧
시돈(Sidon)은 두로 북쪽 약 40㎞ 지점. 오늘날 레바논의 수도인 베이루트 남방 약48㎞ 지점의 지중해안에 있는 항구도시다. 지금은 사이다(Saida)라고 부르는 이곳을 찾아가기 위해 베이루트를 떠난 차는 지중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달렸다.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지중해안은 그 옛날 조선술과 무역으로 유명했던 페니키아(베니게)인들을 상기시켰다. 이들은 땅끝이라 불리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지역까지 무역을 확장시켰다. 차는 출발한지 1시간도 채 못돼 성경에는 수로보니게 지역으로 알려진,십자군 시대의 성채가 있는 시돈에 도착했다.

시돈은 북쪽의 곶과 내륙으로 이어지는 낮은 암석지대로 둘러싸였으며 성읍 남쪽에는 큰 만(灣)이 있다. 이 도시 뒤쪽에는 비옥한 평야가 있고 오늘날에는 오렌지 밀감 재배가 성행하고 있으며 해안으로 연결된 곳에는 절벽이 있어 도시를 보호하고 있다. 또한 남북으로 거의 연결된 항구가 있는 셈인데 앞바다에 여러 개 작은 섬이 있어 큰 파도를 자연히 막아준다. 현재 시돈 항구 북쪽에는 바다 한가운데 십자군 시대의 성채가 남아 있다. 육지에서 제방을 따라 70m 정도 걸어가 성채 위에 올라가자 오늘날 항구가 한 눈에 들어왔다.

시돈 항구는 성경에 언제나 두로와 같이 소개되기 때문에 페니키아의 쌍둥이 항구라고 부른다. 그러나 훨씬 오래 전부터 소위 두로의 어미 시돈이라고 해왔으며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시돈은 노아의 증손 시돈에 의해 건설되었다며 이 도시의 태고성을 주장한다(창 10:15∼19). 그러나 저스틴에 따르면 트로이가 멸망하기 1년 전 시돈은 바다 사람들로 불렸던 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블레셋 지역의 아스겔론에 패한 후 이들이 다시 두로를 건설했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에 꼭 한 번 두로와 시돈을 방문했는데(마 15:21,막 7:31∼37) 이때 귀신이 들려 고생하는 딸을 고쳐 달라고 애원하는 가나안 여자를 만나 그 여자의 신앙을 시험한 후 그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었다. 또 고라신과 벳새다를 두로와 시돈에 비교하시며 두로와 시돈이 더욱 빨리 회개했을 것이라고 단정하여 말씀하셨다(마 11:21∼22,눅 10:13∼14). 그리고 바울은 가이사랴를 출발하여 로마로 호송돼가던 중 잠시 이곳에서 머무르는 동안 백부장 율리오의 선대로 친구들에게 대접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행 27:1∼3). 이를 기념하는 바울기념교회가 골목에 세워져 있다.

옛날 이곳 주민들은 주로 농업 목축업 어업 무역업에 종사했다. 지금도 어업 선단들이 이 항구를 이용하고 있다. 특히 절벽 근처에서 발견된 수많은 뿔고둥 껍질의 거대한 패총(貝塚)은 자색 염료 공업이 고대 시돈의 중요 산업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고대에 자색 염료는 이 지역 바닷가에 사는 뿔고둥을 통해 채취되었는데 약 1만개의 뿔고둥을 벗겨야 1g 정도의 염료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자색 염료는 금값보다 비싸 이집트로 수출되었다. 또 이곳에는 규석성분이 많은 모래가 있어 세계 최초로 유리를 만드는 기술이 발명돼 유리제품 수출로 번영을 누렸다. 이는 모세가 ‘바다의 풍부한 것,모래에 감추인 보배를 흡수하리로다’(신 33:19)라는 스불론 지파에 대한 축복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을 할당받은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에 의해 정복되지 못하고 이 지역에 살던 가나안 족속과 함께 살았다고 사사기 1장 31절에 기록되었다.

시돈에서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왼쪽으로 사르밧이 산 중턱으로 자리잡고 있다(왕상 17:9). 시간이 허락지 않아 현장까지 가지는 못했으나 다행스럽게 사르밧이 보이는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게 돼 사르밧 전경을 여유있게 볼 수 있었다.

사르밧은 지중해 북쪽,오늘날 레바논 해안 항구인 시돈 남쪽에 있는 소도시다. 옛 이름이 사르밧이었던 것을 헬라인들은 사라판드라고 불렀다. 이곳은 선지자 엘리야가 아합왕 때 이방신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이 저주를 받아 비가 오지 않는 3년반 동안 한 과부의 집에서 신세를 진 곳이다. 당시 이곳의 과부는 가난하여 굶주린 상태였으나 엘리야를 공궤한 인연이 있었다. 엘리야가 표적을 행하여 가루통과 기름병에서 가루와 기름이 계속 나오게 하는 기적을 베풀어 이곳 과부의 생활을 해결해 주었다. 그후 엘리야는 병들어 죽은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려주었다(왕상 17: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