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드온(4) 참된 지도자 | ||||
비록 유약하나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랑하는 헌신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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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에봇을 만든 기드온(삿 8:22-35) 전쟁이 이스라엘의 완승으로 끝나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와서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합니다.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아들과 손자가 대대로 우리를 다스려 주십시오.” 그러나 기드온은 사양합니다. “나나 내 후손이 여러분을 다스리는 왕이 되지 않을 것이요. 다만 여호와께서 여러분들을 다스릴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한 가지 청이 있으니 들어주시오. 여러분들이 노획한 물건 중에 금 귀걸이를 내게 주시오.” 백성들은 흔쾌히 금 귀걸이와 그 외에 많은 패물과 왕의 자색 옷도 내 놓았고 기드온은 그것으로 에봇을 만들어 집에 두었습니다. 웃고 넘어갈까요? 손가락을 빠는 버릇을 고쳐주려고 엄마가 아이에게 겁을 줍니다. “손가락을 빨면 작은 벌레가 뱃속으로 들어가서 배가 뚱뚱해지고 아프게 된단다.” 어느 날 엄마들의 모임에 따라간 아이가 만삭의 임산부를 보고 다가가 말합니다. “난 아줌마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아요!” 백성들이 기드온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대대로 그들의 왕이 되어달라고 하는 모습이 숙곳이나 브누엘 사람들보다 훨씬 나아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면 여러 가지 웃기는 평가가 나올 수 있습니다. 여기 기드온 사건은 일관된 하나님의 의도가 있는데, 그것은 이번 전쟁의 승리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역사하셨다는 것을 이 백성들이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은 기드온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하면서 ‘당신이 우리를 구원’하였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의도에서 벌써부터 빗나가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이야 알지만 '기드온이 나서서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으니 기드온이 구원하였다고 해도 되지 않겠느냐'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네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고도 말씀하셨으니까요. 그러나 기드온에게 왕이 되어달라는 말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삼상 8:4-8).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사무엘의 아들들의 비리를 지적하면서 다른 나라처럼 왕을 세워달라고 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이렇게 해석하십니다. ‘그들이 왕을 세우겠다는 말은 너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면 하나님은 그들의 왕이십니다. 사무엘에게 왕을 달라고 하는 것은 사무엘의 아들들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왕을 요청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드온에게 왕이 돼달라는 말은 하나님을 왕좌에서 밀어내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리려는 하나님의 의도는 좌절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기드온만이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고 말합니다. 기드온은 자기가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셔야 한다고 단언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겸손하면서도 위대한 모습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왜 금 귀걸이를 달라고 하였으며 에봇은 왜 만들었을까요? 에봇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을 섬길 때에 입는 옷으로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정교하게 짜서 겉옷 위에 조끼같이 입었습니다. 이 에봇의 어깨에 경찰 견장(肩章) 같은 것을 달되 그 견장에 큼직한 보석 두 개에 12지파 이름을 새겨 양쪽 어깨에 하나씩 붙였고, 가슴에는 12개의 각기 다른 보석에 12지파의 이름을 새긴 판결 흉패를 달고, 그 흉패 안쪽에 우림과 둠밈을 넣어두게 하였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 다닐 때에 대제사장의 아들 아비아달이 에봇을 가지고 왔는데, 다윗은 어떤 결정을 할 때마다 에봇을 가져오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하나님께서는 답을 주셨습니다(삼상 23:9, 30:7). 사무엘이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섬겼고(삼상 2:18) 다윗도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오면서 베 에봇을 입었습니다(삼하 6:14) 여기 에봇은 베나 세마포로 만든 것으로 대제사장이 입는 에봇과는 다른 것입니다. 사무엘은 에브라임 지파이고 다윗은 유다 지파 사람입니다. 레위 지파가 아닌 사무엘은 나실인이기에 하나님을 섬겼으며, 다윗이 베 에봇을 입은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자세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에봇을 만든 이유는 하나님이 이 나라를 다스리시는 왕이시기 때문에 왕이신 하나님의 뜻을 여쭙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비록 유약한 사람이었지만 그 속에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과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는 헌신된 마음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고, 그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직임을 맡기셨고 기드온의 시험을 기꺼이 용납하셔서 큰 용사가 될 수 있도록 도우셨으며, 끝내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적을 물리쳤습니다. 에브라임이 시비를 걸어올 때에도 겸손히 자신을 낮춤으로 싸움을 피하였고 숙곳 장로들을 징계하고 브누엘 망대를 헐어버린 것도 그의 헌신된 마음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의 주석에는 기드온이 마음이 변하여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거두고 우상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런 해석이 나온 배경이 기드온이 만든 에봇을 백성들이 그것을 음란하게 섬겼고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었다는 기록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오히려 이렇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드온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통치자이시기 때문에 에봇을 만들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려 하였고, 또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여쭙겠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이 기드온의 그러한 뜻을 외면하고 마치 무당에게 길흉을 묻듯 에봇을 우상처럼 섬겼기 때문에 그것을 만든 기드온과 에봇을 보관한 그의 집에 올무가 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 세마포 에봇이나 베 에봇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입을 수 있는 옷이지만, 대제사장이 입는 에봇은 모세와 솔로몬처럼 하나님의 명을 받은 사람에 의해서만 만들어졌으며, 그 에봇은 늘 대제사장과 함께 있어야 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마다 대제사장에게 에봇을 가져오라고 했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기드온은 에봇을 만들어서도 안 되고, 그것을 집에 보관해서도 안 되는 사람인데 그것을 만들어 보관하였기 때문에 화를 자초하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고 소가 끄는 새 수레에 싣고 가려 했던 사건과 비슷합니다. 법궤를 수레에 싣고 가다가 소가 뛰는 바람에 법궤가 쓰러질 것 같아 웃사가 법궤를 붙들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셨습니다. 다윗은 웃사를 죽이신 하나님이 이해되지 않아 마음이 분하여 법궤를 그대로 놓고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오는데 이번에는 수레가 끌지 않고 레위인들이 메고 옵니다(삼하 6장). 하나님의 법궤는 짐승이 끄는 수레에 싣고 운반하는 궤짝이 아닙니다. 법궤는 레위인들이 임금의 연을 메듯 메어야 하는 것인데(출 25:14), 다윗이 몰라서 수레로 운반하려 한 것이 문제였고, 웃사는 넘어지는 것 같으니 붙잡았지만 하나님의 궤는 만지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몰랐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민 4:15). 다윗이 성물(聖物)에 대하여 부지중에 범한 죄도 벌하신 것처럼, 기드온도 선한 뜻으로 한 일이지만 성물에 대한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올무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드온이 우상을 섬겼다고 하지만 아닙니다. ‘그가 죽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이켜 바알을 음란하게 섬겼다’는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가 생존한 동안에는 백성들도 우상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생애를 ‘그가 사는 날 동안 40년에 그 땅이 태평하였다’고 평가해 주시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생애를 그 누구도 트집 잡지 못하도록 ‘사는 날 동안 40년’이라고 하시면서, 사사로서의 역할을 완수하여 그 땅이 태평성대를 누렸음을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하시는 것입니다. 7. 결론 : 하나님과 기드온과 백성들 애매한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기드온의 생애는 기드온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을 만나 어떻게 살았으며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드온의 전쟁을 통하여 어떤 변화가 있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통하여 어떤 일을 하시려고 하셨으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아 이런 제목을 달았습니다. 기드온에게 자식이 많은 것을 문제 삼기도 하지만, 이 정도는 꼬집지 않아도 괜찮다고 봅니다. 당시에는 자식이 많은 것이 복이고, 여러 아내를 두는 것이 허용되었기 때문인데,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신 17:17)는 말씀에 저촉될 수도 있긴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이렇게 많은 70명이나 되는 아들들을 한 반석에서 죽였다는 사실을 통하여, 은혜를 원수로 갚은 점을 꼬집기 위함으로 보는 것이 더 성경적 관점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드온이 기생에게서 난 망나니 아들 이름이 아비멜렉 즉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뜻인데 기드온이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만이 왕’이기에 왕이 되라는 청을 거절한 사람이, 자식 이름을 통해 ‘내가 왕이다’라고 했다면 너무 앞뒤가 맞지 않을 뿐더러 정말 그랬다면 그렇게 유치하고 교활한 기드온에게서 얻을 교훈이 전혀 없으며, 그런 기드온을 길러내신 하나님도 헛수고를 하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의 말째 아들 이름이 요담인데 ‘여호와는 완전하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만이 왕이시다’했다가 ‘내가 왕이다’했다가 ‘여호와는 완전하시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정상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살지 않습니다. 또 아비멜렉이란 이름을 기드온이 지어줬다면 아들 70명중에 그 이름을 지어주지, 하필이면 기생의 아들이겠습니까? 아마도 기생이 욕심으로 자기 자식에게 이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잘 나가다가 중도에 타락하는 사람들을 성경에도 많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그런 인물이 아닙니다. 기드온을 그런 시각에서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통하여 나타내시려 하신 모든 뜻이 묻히게 되고, 우리는 아무 교훈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다음에 전개되는 아비멜렉과 요담 이야기를 해석할 길이 막힙니다. 기드온은 유약한 사람이지만 그 속에 하나님을 향한 또 백성을 향한 선한 마음이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르셔서 그 속에 감추인 선한 의지를 드러내 성취토록 해주셨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유능한 인물을 찾지 않으시고 자기 같이 유약한 사람을 부르셨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서 양털뭉치 시험까지 하면서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전쟁에 뛰어들었으며 나중에는 적의 잔당을 추격하여 진멸하는 진정한 ‘큰 용사’가 되었고, 이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아는 참 백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미디안과의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이 기드온에게 인정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책망하시는 근거를 가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약한 기드온을 큰 용사가 되게 하는 데는 성공하셨지만, 이번 미디안과의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리는 데는 실패하십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실패처럼 우리 눈에 보인다’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실패를 하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모든 능력을 가지신 분이 실패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실패하시는 것처럼 보여주시는 경우가 있으십니다. 그 실패의 원인이나 대상이 바로 사람인 경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실패로 표현을 합니다만, 인간의 배반이요 무지요 완악함으로 인한 인간의 실패로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애굽 왕 바로에게 10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내시지만 광야에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데는 실패하십니다. 홍해를 건넌지 사흘만에 물이 쓰다고 원망하기 시작하여 40년 동안 끊임없이 원망하였으며, 모세가 율법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산에 있는 동안에 금송아지를 만들었으며, 가데스 바네아에서는 가나안 땅을 거민(居民)을 삼키는 땅이라 혹평하면서 가나안 정복을 거부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반기를 드는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무리를 이끌고 여호수아를 앞세워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지만, 여기 사사기에서 이미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데 실패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사사시대의 이런 상황을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꼬집습니다(삿 17:6, 21:25). 왜 왕이 없습니까? 하나님을 왕위에서 밀어냈기 때문에 왕이 없는 것입니다. 이후에 왕정시대에도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시며 셀 수 없는 이적을 베푸셨지만 끝내는 그 백성들에게 버림받아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가시는 참담한 모습까지 보여주십니다(겔 10:18, 11:2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전쟁에 이긴 후에 135,000명의 적군을 32,000명으로 이겼다고 할까봐 22,000명을 돌려보내고 10,000명을 남기셨고, 그래도 안심이 안 되셔서 9,700명을 보내고 300명만을 남겨서 450:1의 말도 안 되는 싸움을 붙여 사람이 이겼다는 소리가 안 나오게 하려고 하셨는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기드온에게 당신이 우리를 구원하였으니 우리의 왕이 되어달라고 합니다. 얼마나 기가 막힐 노릇입니까? 더욱 기가 막힐 노릇은 오늘 우리들까지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기드온’ 하면 연결하여 ‘300 용사’가 붙어 나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보통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용사’칭호를 붙이고 나오는 겁니다. 그 말은 기드온과 300명에게 135,000명의 엄청난 적을 물리칠만한 용사로서의 위대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평가를 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경계심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오늘까지도 기드온의 전쟁을 통해 얻으려는 당신의 위대하심에 대한 대접을 못 받고 계시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우려하신 대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도구인 기드온을 구원자라며 그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하였고, 끝내는 그 기드온도 배반하여 그 집안을 쑥밭으로 만들고 우상에게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런 백성들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꼬집습니다. “사면 모든 원수들의 압제에서 자기들을 구원해주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잊었으며, 또 기드온이 이스라엘에게 베푼 모든 은혜를 기억하여 그대로 그의 집을 후히 대접하지도 않았더라.” 하나님을 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토록 미워하시는 우상에게로 돌아가 그 우상들을 섬겼으며, 자기들의 왕이 되어달라고 했던 기드온의 70명이나 되는 아들들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다 죽이는 배은망덕한 일을 저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들을 통하여 인간의 배은망덕과 죄악상을 신랄하게 고발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서도 그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에게로 돌아가는 구제불능의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끌어안으시는 한없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이 백성은 고칠 수 없는 중병에 걸려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애간장이 녹아나도록 부르시지만 목이 곧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 백성은 돌아올 줄을 모릅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의 탄식이십니다(사 1:3). 하나님께서 구하려고 백방으로 애를 쓰시지만 구해낼 길이 없습니다. 이쯤 되면 하나님도 포기하실 만한데 그러하질 못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하나님의 사랑 고백이십니다(사 49:15-16). 지칠 줄 모르는, 멈출 줄 모르는 하나님의 사랑은 마침내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그리고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들의 배역의 죄악을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사 53:8). 주께서 대속의 피를 흘리실 때에 그 사랑도 함께 쏟으셔서 마침내 그 백성들의 불치병을 고치시고 그들의 사랑을 받아내십니다. 비로소 하나님이 성공하십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 19: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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