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성경인물

무명의 사사 (3) 야일

은바리라이프 2008. 4. 23. 19:54
무명의 사사 (3) 야일
자신을 기념한 야일의 모습 통해 듣는 하나님의 음성
입력 : 2003년 03월 31일 (월) 00:00:00 / 최종편집 : 2003년 03월 31일 (월) 00:00:00 [조회수 : 81] 이용대
3. 야일 - 기념할 이름
그 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니라 그에게 아들 삼십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두었었는데 그 성들은 길르앗 땅에 있고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칭하더라 야일이 죽으매 가몬에 장사되었더라(삿10:3-5)

돌라 사사 후에 야일이 일어나서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지냈답니다. 야일도 자기 삶의 기록을 남깁니다. 야일은 30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나귀를 타는 고귀한 신분으로 주위의 부러움을 살만큼 잘 키웠습니다. 게다가 성읍을 30이나 가졌다니 이재(理財)에 밝은 경영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30개 성읍을 하봇야일 즉 ‘야일의 마을’이라고 자기 이름을 기념하여 불렀다니, 그는 확실하게 이름을 남긴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자식 둘을 가르치기도 벅찬 세상에, 야일이란 사람은 이렇게 30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나귀를 타는 고귀한 신분으로 훌륭하게 키웠으니 훌륭한 아버지요, 자기 이름으로 일컫는 성읍 30이나 두었으니 유능한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사사가 되었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야일이 일어나서’ 라는 말은 그가 스스로 사사가 되었다는 말 같은데 사사로서 한 일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생략할 수도 있지 않겠나 싶지만 그럴만한 자료가 없으며, 사사와 관계없는 자식과 재산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아 사사로서 남길만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는 사사가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원하여 사사라는 직분을 감당한 일이야 백번 칭찬하여야 할 일이지만, 사사가 되었다면 사사로서의 역할을 하고 직분을 감당한 흔적을 남겨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얼마 전만해도 목사는 고생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들은 목사보다는 장로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었습니다. 목사는 굶기를 밥 먹듯 하니 존경스럽기는 하지만 자식이 그 고생길로 가는 것은 차마 못 보겠다는 생각에서겠지요. 장로는 돈을 잘 벌어서 어려운 목사도 돕고 인정도 받으며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니 목사보다는 장로를 선호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사(士)자 들어가는 인기 직업 중에 목사(牧師⇢牧士?)도 끼었다는 이야기가 돌더니, 문제를 일으킨 재벌 2세들 틈에는 예외 없이 유명 목사의 자녀들이 끼어있더라는 이야기가 어느새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목사라는 직분을 자랑해야 할지 부끄러워해야 할지 고민될 때가 많습니다. 분명 자랑스럽긴 한데 어느 쪽으로 자랑하여야 할지를 잘 몰라서...

요즈음 유명 목사의 이름을 딴 기도원이나 교회 이름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과연 그만한 기념비를 세울 만큼 큰일을 해냈고 이름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야일처럼 사사로서 한일도 없으면서 자기 이름으로 성읍을 세우고 호사스런 삶을 살았던 것에 비하면 이 목사님들은 큰 교회도 세웠고 기도원도 세웠고 많은 일들을 하였기 때문에 기념관을 세워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기념교회 이야기가 나오니까 성경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후에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운 것이 아마 성경이 말하는 기념비의 기원일 것 같습니다.(삼상15:12) 아말렉을 쳐서 대승을 거두었고 많은 노획물을 빼앗은 큰 전과를 올렸기에 세운 기념비입니다. 그렇지만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버림 받는 계기가 됩니다.

기념비를 세운 사람이 또 하나 있는데, 아버지의 왕위 찬탈을 노렸던 다윗의 셋째아들 압살롬입니다.(삼하18:18) 그는 자기 이름을 전할 만한 아들이 없음을 한탄하여 ‘압살롬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반란이 북 왕조 이스라엘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통일왕국에서나 남 왕조 유다에서는 아주 드문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버림받은 왕과, 형을 죽이고 아버지를 반역하여 난을 일으켰다가 비명횡사한 왕자가 기념비를 세웠기 때문에, 불길하고 부끄러워해야하는 것이 기념비 같은데, 왜들 성경을 가장 잘 아시는 목사님들이 그런 기념비(교회나 기도원이긴 하지만)를 세우려고 하는지 이해가 잘 안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을 기념하여 두 개의 큰 보석에 새겨서 대제사장의 에봇의 어깨에 달았고, 12개의 각기 다른 보석에 각 지파의 이름을 새겨 가슴에 품게 하셨습니다.(출28:12,29) 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여 찬송하며 경배하였는데,(시102:12) 기념교회는 누가 누구를 기념하겠다는 것인지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두지파를 귀히 여기셔서 보석에 그 이름을 새겨 힘의 상징인 어깨에 짊어지심으로 이스라엘을 지키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셨고, 이스라엘 각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각기 다른 보석에 그 이름을 새겨서 가슴에 품으시는 것입니다. 물론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인물이고요. 또 마리아가 1500만원을 홋가하는 향유를 부어 주님을 섬긴 행위를 기념하기를 원하신 분은 예수님이시지 마리아나 그 가족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7-8)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야일은 ‘빛을 주는 사람’이란 뜻의 이름입니다. 참 좋은 이름입니다. 과연 그는 자신의 가족들에게 빛을 주는 사람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가 사사가 아니었더라면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만 사사라는 중책을 맡은 사람으로서는 문제가 있는 이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일은 사사란 귀한 직분과 ‘빛을 주는 사람’이란 멋진 이름을 가졌지만, 그의 삶은 직분을 외면하였고  이름과 다른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주님은 사데 교회를 향하여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름은 삶과 어우러질 때에 비로소 삶도 이름도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다.

‘그가 죽으매 가몬에 장사되었더라.’ 그는 사사로 있는 동안 ‘사사(士師)다운’ 족적은 하나도 남기지 못하고 자식 호강시키고 사유재산 늘리고 자기 이름을 날리는 ‘사사(私事)로운’ 일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그가 비록 잘 나가다가 아무 고통도 없이 평안히 죽었는지 모르지만,(시73:4,12) 아삽이 깨달은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주님 앞에 ‘서는 날’이 있겠지요.(시73:20) 가몬은 ‘서는 곳’이란 뜻입니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시7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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