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2/칼럼

세계의 창세신화 신화

은바리라이프 2008. 3. 17. 12:19
세계의 창세신화 신화

2005/01/21 20:46

복사 http://blog.naver.com/shinade/60009476093

창세신화를 통해서 태초성이 가지는 의미에 관한 내용이 여러 신화를 예로 들어가면서 나와있는 글입니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신화인 에누마 엘리쉬의 예를 가장 많이 들고 있는데요..

읽어보시면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글이라고 생각되어서 올립니다.

참고가 되길 바라며..


? 말들은 그 이야기가 이루어지는 시점에 관계없이 언제나 '옛날에'라는 식으로 고정되어 있으므로 꽤 상투적으로 보입니다.

분명 과거의 어느 시기를 지칭하면서도 그 시점이 언제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고 또 밝혀보려고 시도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류의 표현으로 '태초에(in the beginning)' 혹은 '처음에'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요한 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는데 그 말씀은 신과 같이 있었다."로 시작합니다. 또 굴원의 <초사(楚辭)> [천문(天問)] 에는 "묻노니, 아득한 옛날, 세상의 시작에 대하여 누가 전해줄 수 있을까?…"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태초' '아득한 옛날' 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언제일까요.가령 고조선의 건국이 이루어진 기원전 2333년이나, 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한 기원전 57년이나,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기원전 37년과 같이 구체적인 연대를 밝힐 수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옛날에' '태초에' 라는 것은 소위 상식으로 통하는 연대기적 시간관으로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태초 혹은 처음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무언가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종종 우리는 존재의 기원에 대해 의문을 가져봅니다. 가령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등의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이런 의문은 고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제기되는 존재론적인 물음으로서 그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대답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것은 '처음에' '태초에' '아득한 옛날에' 라는 식으로 서두를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처음과 시작에 관한 이야기들의 예를 들자면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신화, 이집트의 헬리오폴리스 신화, 그리스의 신통기, 구약의 창세기, 중국의 반고 신화, 한국의 <천지왕본풀이> 등 모두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메르 신화에서는 "옛날에 낮이 하늘과 땅에서 생겨난 후에, 옛날이 밤이 하늘과 땅에서 생겨난 후에, 옛적에 해(年)의 운명이 결정된 후에, 아눈나키 신들이 태어난 후에..." 라 하였고, 이집트 신화에서는 "태초에는 눈(Nun)이라고 불리는 바다가 있어 여기에서 아툼(Atum)이 태어났다..."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 신화에서는 "태초에는 가이아와 광대한 혼돈의 바다밖에 없었다. 카오스에서 밤과 에레보스가 나왔고 다시 밤에서 창공과 낮이 나왔다. 땅은 바다를 만든 다음 대양을 만들고 히페리온, 레아, 크로노스, 므네모시네, 포이베 같은 티탄들을 낳았다...." 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였고, 제주도 무가(巫歌)인 <천지왕본풀이>에서는 "태초에 천지는 혼돈으로 있었다.

하늘과 땅이 금이 없이 서로 맞붙고 암흑과 혼합으로 시작했다. 갑자년 갑자월 갑자일 갑자시에 하늘의 머리가 자방으로 열리고, 을축년 을축월 을축일 을축시에 땅의 머리가 죽방으로 열려 하늘과 땅 사이는 금이 생겨났다..." 라고 전승하고 있습니다.

흥미있는 것은 현대과학에서 조차 " 처음에 무한한 허공에 어떤 원소로 된 기체의 큰 덩어리가 있었는데, 약 200억년 전 마치 원자탄이 터지듯이 그것이 폭발하여 지금도 계속되는 끝없는 변화를 시작하고 있으며, 이 변화의 과정에서 하늘의 모든 천체와 땅과 그 밖의 모든 것이 생겨났다..." 는 식의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이 갖는 상징성이와 같이 창조신화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태초'나 '처음'의 의미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신화와 제의의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개 창조 신화의 내용은 제의를 통해서 주기적으로 재연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신화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는 바빌론의 신년제의인 아키투 축제(Akitu Feastival)에서 주기적으로 음송되었습니다.

<<에누마 엘리쉬>>는 바빌론의 수호신인 마르두크(Marduk)와 그 일파를 굴복시킨 후 다른 여러 신들 위에 우뚝 올라서서 왕권을 차지한 다음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고 바빌론을 건설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빌론인들은 매년 유태력 니산(Nisan:춘분에 해당)달이 되면 12일 동안 아키투 축제를 벌이면서 <<에누마 엘리쉬>>를 낭송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의를 통해서 창조신화의 마르두크 신의 창조 행위가 반복적으로 재연됩니다.
창조 행위의 재연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과거의 사실이 현재화 된다는 것입니다. 즉 창조신화에서 태초에 행해진 신의 완전한 행위가 지금 인간의 삶 속에서 재연됨으로써 태초의 행위가 현재적 삶의 모델로 기능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태초의 시간으로 삶을 조명함으로써 직선적 시간의 변화를 극복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흔히 시간의 불가역성을 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 없는 사실에 비유하곤 하는데, 창조행위의 재연을 통해 불가역적인 일상적 시간을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창조신화에서 '옛날에' '태초에' '처음에' 란 것은 연대기적 시간(chronological time)상에서의 제일 처음에 발생한 사건 또는 사실을 표현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본질 혹은 만물의 근원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그것은 존재의 의미 혹은 존재의 아이덴티티를 밝혀주게 됩니다.
이렇듯 처음이라는 것의 각별한 의미는 비단 창조신화를 재연하는 고대인들의 제의에서만 별견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생활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인간은 모든 종류의 처음을 특별히 의미있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가령 우리나가가 처음으로 개국한 날을 개천절로 매년 반복적으로 기념한다든지, 개인적으로는 인간으로 처음 시작하는 생일을 특별히 의미 있는 날로 기념하는 것이 그러합니다. 무엇이든지 처음의 것은 그것이 속해 있는 종(種)의 기원이며 그 종 전체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우리 국가가 처음으로 등장한 사건, 나의 존재가 처음 시작한 날은 우리 혹은 나에 관한 모든 사건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이 신년축제를 통해서 우주창조의 행위를 재연함으로써 신의 완전성을 획득하듯, 건국일이나 생일을 기념하면서 나의 조국 혹은 나의 존재의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종교학자 엘리아데(M. eliade)는 '처음에'(in illo tempore:아득한 그때)일어난 것은 원형(prototype)으로서 일상적인 행위의 범례가 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태초에'라는 것은 일상적인 시간이 아니라 신화적인 시간(mythtime)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일상적인 시간관과는 전혀 다른 시간관을 표현라고 잇는 예르 ㄹ한 창조신화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그리스 신화 가운데 크로누스 이랴기는 시간 개념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던져 줍니다. 제우스의 아버지인 크로누스(Cronus)는 영원한 시간을 의미하는 크로노스(Chronos)를 상징적으로 표상합니다. 크로누스를 인격화된 시간으로 간주하게 돈 것은 다음과 같은 신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티탄의 왕 크로누스는 우라누스(하늘신)와 가이아(땅신)의 아들입니다. 우라누스는 자식들이 태어나면 가이아의 몸속으로 밀어넣습니다. 가이아가 이러한 장기간의 임신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어했을 때 그의 아들 쿠로누스는 낫으로 무장하고 아버지를 거세합니다. 우라누스의 생식에에서 흐른 체액은 바다로 떨어지고 그 거품에서 아프로디테(풍요의 여신)가 탄생합니다. 크로누스는 누이 레아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만 태어나는 즉시 삼켜버립니다. 막내인 제우스가 태어나자 레아는 아이대신 음경 모양의 돌을 천으로 싸서 줍니다. 제우스가 성인이 되자 크로누스는 삼켰던 아이들을 모두 토해냅니다. 즉 하데스, 포세이돈, 헤스티아, 헤라, 데미테르 그리고 델피 신전의 제단석이된 남근 모양의 돌을 토했습니다.

크로누스가 자식을 삼켰다가 토해내는 행위의 상징성을 통해서 마치 양극을 오가는 진자운동과 같은 시간 경험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시간관은 창조신화의 처음이라는 것이 일회적인 그때에 국한되지 않고 반복적으로 재연되는 점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세계와 인간을 비롯한 만물의 기원을 설명하는 다양한 내용의 창조신화는 몇 가지로 유형화 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신적인 존재의식 또는 말에 의한 창조를 설명하는 경우로, 대표적인 것은 <요한복음>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무질서나 혼돈, 분화되지 않은 물질에서 천지가 창조되는 것으로 중국의 반고신화, 일본의 천지창조 신화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바다의 괴물 또는 태고의 인간이 해체되어 세계가 생겨나는 것으로, 대표적인 신화는 타이마트라는 괴물의 몸을 갈라 천지를 만들었다는 고대 근동의 <<에누마 엘리쉬>>입니다. 또 인도신화에서 원인(原人) 푸르샤의 몸이 해체되어 세계와 만물이 생성되었다는 것이나 중국의 반고나 혼돈(混沌)의 죽은 몸이 변형되어 우주와 만물이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바로 태고의 인간이 해체되어 세계가 생겨났다는 유형에 속합니다.
이 가운데 두 번째와 세 번째 유형은 대부분의 창조 신화에서 나타나는 창조 이전의 혼돈에 관한 상징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앞서 간단히 소개한 <<에누마 엘리쉬>>에 나오는 원초적 물 상징, 창세기에 나오는 어둠의 상징, 그리스 신화의 광대한 혼돈의 바다, 이집트 신화에서 눈(Nun)이라고 불리는 혼돈의 바다, <<장자>>에 실려있는 혼돈 신화, 제주도 무가인 <천지왕본풀이> 등이 그것입니다. 특히 <<장자>>에서는 남해의 천제(天帝) 숙( )과 북해의 천제 홀(忽)은 중앙의 천제 혼돈(混沌)에게 자주 놀러갔는데, 혼돈이 그들을 대접하는 것이 매우 은근하고 치밀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에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끝에 혼돈에게 인간처럼 감각기관을 만들어 주자는데 합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도끼와 끌 등을 가지고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어 이레만에 일곱 개의 구멍을 다 뚫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혼돈은 결국 죽어버리고 맙니다. 여기서 혼돈은 천제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카오스(chaos)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 숙과 홀이 빠른 시간을 상징하는 것에 반해 혼돈은 시작도 끝도 없는 죽음과 재생이 연결되는 시간을 상징 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창조하려면 혼돈스러움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창조신화의 내용을 통해서 터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혼돈에서 질서(cosmos)로 전이하는 것과 관련하여 창조신화에서는 죽음과 재생이라는 모티브가 발전 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줍니다. 즉 신 혹은 인간의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탄생이 이루어진다는 것과 혼돈은 창조적 질서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 나바호(Navajos)족은 우주창조신화를 음송하는 가장 중요한 때가 치유와 관계된 경우라고 합니다. 이 치유제의에는 모래 위에 복잡적인 무늬를 그리는 절차가 있습니다. 그것은 천지창조의 여러 단계와 신, 조상, 인류 등의 신화적인 역사를 상징화하는 것입니다. 즉 이 무의들은 아득한 그때 일어난 사건들을 하나하나 재현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주 창조신화를 경청하고 모래 위에 그려진 그림을 명상하면서 환자는 속(俗)의 시간으로부터 원초적인 시간의 충일성으로 투입됩니다. 그는 세계의 근원으로 되돌아간 것이고 우주창조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환자는 창조이야기를 읊고 모래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바로 그 날 목욕을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문자 그대로 그의 삶을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시간을 무효화 시킴으로써 주기적으로 자기 자신들을 재생하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신화의 문법이상에서 창조신화의 시간적 태초성이 가지는 의미를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비단 창조신화뿐 아니라 신화는 일상의 언어로 단순화할 수 없는 독특한 어법이 있습니다. 편의상 이러한 신화의 특성을 일러 신화의 문법이라고 말하기로 하겠습니다. 신화의 문법에는 앞에서 밝힌 시간의 태초성외에도 사건의 원형성, 주인공의 초월성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건의 원형성이라는 것은 태초에 행해진 신의 완전한 행위가 지금 인간의 삶 속에서 재연됨으로서 태초의 행위가 현대적 삶의 모델로 기능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에누마 엘리쉬>>에서 티아마트 일파를 굴복시킨 후 다른 여러 신들위에 우뚝 올라서서 왕권을 차지한 다음,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고 바빌론을 건설했다는 마르두크의 행위가 그러합니다. 또 다른 예로서 고구려 건국신화인 주몽신화가 있는데, 주몽 신화는 한편으로는 영웅신화라고도 합니다.
그 이유는 주몽이 출생해서 성장하여 나라를 세우기 까지의 일련의 과정이 비범하면서도 삶의 모델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의 비범한 능력 때문에 형제들의 질투와 시기를 받으며 역경을 겪게 되는데, 이러한 시련을 이겨낸 끝에 건국에 이른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삶의 귀감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주인공의 초월성 이라는 것은 일상적 행위와 다름을 보여준다는 점을 포괄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가령 앞서 예로 든 마르두크가 신들 사이의 투쟁에서 승리한 것을 바빌론인들이 거룩한 행위로 여기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또 주몽신화에서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는 알을 낳았는데, 그 크기가 닷 되들이 만했습니다. 금와왕은 그것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아, 길에 내다버리게 했더니 소와 말이 모두 그 알을 피해서 지나갔고, 들에 내다버리니 새와 짐승이 덮어주었다고 합니다. 이에 왕이 알을 쪼개보려고 했으나 깨뜨릴 수 없어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알을 물건으로 싸서 깨끗한 곳에 두었더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고 합니다. 이러한 주몽의 탄생과정은 신비롭기도 하고 기이하기도 합니다. 일상의 언어로 단순화시킬 수 없는 이러한 내용들이 바로 신화의 초월성을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경험자의 주관에 따라 실로 다양합니다. 거룩한 것, 신성한 것, 괴이쩍은 것, 망측한 것 등 경험자의 가치판단에 따라 다양한 충위를 가집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일상의 언어로 단순화할 수 없다는 것은 공통적입니다. 이상에서 신화가 일상적인 언어 문법과 구별되는 점을 살펴봤는데, 특히 시간적 태초성이라는 특징은 창조신화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일 것입니다. 일상적인 시간 개념은 우주가 시작되기 이전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기원을 탐구하면서 '태초에' '처음에' 누가 무엇을 행했는지에 골몰합�. 태초의 초월적인 존재의 행위는 현재의 일상적 삶의 본질을 설명해 줌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확보하게 됩니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이러한 사실은 인간 스스로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의 처음의 자리에 집착하고 있다는 현상을 해석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래서 '국내 최초' '세계 최초' 라는 수식어가 상투적으로 들리면서도 끊임없이 화제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 모릅니다.실례로 세계 최고봉(最高峰)에 처음으로 올라간 것, 또 최연소의 나이로서 최고봉에 올라간 것, 또는 그 봉우리에 최단 시간에 올라간 것 등 다양한 최초의 사건들이 기네스북을 끊임없이 장식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다양한 분야에서 최초의 사건 혹은 최초의 인물이라는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발분하고 있는 이들의 삶의 모습 역시 창조신화의 의미를 통해 설명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청년사 종교 다시읽기. -하정현 (기타출처:삼룡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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