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자가 부자이어도 되나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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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형제가 제가 쓴 책, <공격적 책읽기>(SFC출판부)를 읽고 교회를 방문했다가 등록을 했습니다. 그 책 중에서 ‘돈’에 관한 글이 제일 좋았다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도 기도에 관한 글과 함께 그 글이 제일 마음에 든답니다. 자신 말로는 중학교 1학년 때 친구의 인도로 교회를 다녔는데, 뜨뜻미지근했답니다. 대학에서 신앙적 고민과 갈등도 하고 그만큼 자라기도 한 것 같습니다. 왜 그 글이 좋았느냐고, 돈에 관한 고민을 하는 이유나 상황이라도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고등학생일 때 교회 친구 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친구 아버지가 장로님이시고 의사였답니다. 상당히 고급스러운 좋은 집과 몇 대의 자동차,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것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이 부유한 생활을 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그러면서 김영봉 목사님의 청빈론이 더 마음이 끌린다고 했습니다. 돈 문제는 신앙의 핵심 사안 그렇다면 신자가 부자이어도 되나요? 먼저, 돈의 문제는 신앙의 핵심 사안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돈은 신앙과 영성의 가늠자입니다. 그의 믿음을 알기 위해 성경을 얼마나 읽고 암송하는가, 기도를 몇 시간 하는지, 전도를 몇 명하는지도 눈여겨보아야 하지만, 가장 확실한 척도는 돈입니다. 그가 돈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를 보아서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인지, 그리고 어떤 제자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돈 빼면 설교할 것이 없다는 김동호 목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돈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도 돈에 관한 비유입니다. 탕자의 죄는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허비한 것입니다. 종말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달란트를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그분 앞에 놓고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돈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신앙 따로 돈 따로는 우리가 만들어낸 허구일 뿐 성서와 그리스도의 복음과 일절 무관합니다. 돈은 ‘신앙’입니다. 돈은 윤리 문제 다음으로 돈은 윤리의 문제입니다. 돈을 다루는 학문이 경제학 계통입니다. 수십 혹은 수만 년 동안 인류는 돈을 윤리학에서 다루었습니다. 그러니까 돈은 인생사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논하는 도덕의 영역이었습니다. 우리가 돈을 사용할 때, 그 돈이 내 것이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 돈이 윤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것이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경제학이 윤리학에서 따로 떨어져서 독립합니다. 오늘날 황금만능주의가 도래했습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있는 집 자손이면 좋은 대학 진학하고, 돈 있으면 얼굴도 예쁘게 고치고, 근사한 집에서 살면서 멋진 사람 만나 결혼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격과 일생, 그리고 성공이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는 단 하나의 잣대로 평가합니다. 행복도 살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앞에서 하나님은 돈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두고 각인의 삶을 심판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돈은 ‘경제’ 이전에 ‘윤리’입니다. 그러면 신앙과 윤리의 차원에서 신자가 부자가 될 수 있나요? 대답은 이렇습니다.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될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되면 자기도 모르게 돈의 노예가 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는 부자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러니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자가 되어서도 여전히 자기 인생의 주인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실제적으로, 구체적으로 실천한다면 그는 여전히 신자이고, 그런 한에 있어서 그는 신자이면서 동시에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요점은 무엇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부자들인 아브라함·이삭·야곱, 심지어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부자가 되려고 산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구했습니다. 욥을 보십시오. 그는 그 많은 재물을 일순간에 잃고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돈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돈을 의지해 살지 않았습니다. 욥은 재물은 버릴지언정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합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제자답게 살라 신약에는 어떤 부자들은, 대표적으로 부자 청년이 그랬지만, 예수를 따르는 것보다 돈을 쫓다가 영생의 길에서 멀어집니다. 돈으로 자신의 인생의 보호막과 안전지대를 확보하려다가 그날 밤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의 무덤으로 예수님이 부활에 이르기 전 안식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제공했고, 부유한 여인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재정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삭개오도, 고넬료도, 바나바도, 빌레몬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물질로 하나님을 잘 섬겨 인정받았습니다. 신구약 성경에는 의로운 부자들이 참 많습니다. 돈에 대해 급진적이었던 자크 엘룰조차도 의로운 부자들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신자는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엘룰은 우리에게 부자와 부를 구분하라고 조언합니다. 부는 언제나 우리에게 하나님의 절대성에 도전하게 합니다. 현대에서 거의 돈만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위험한 영적 세력이자 권력입니다.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해서 부의 위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부자는 선할 수 있으나 부는 선하지 않습니다. 저는 목사와 평신도의 재물관이 조금은 다를 수 있다고 봅니다. 거칠게 말해 자발적 가난을 강조하는 청빈론은 목사에게, 자발적 나눔은 평신도에게 더 어울립니다. 평신도들은 목회자들과 달리, 그리고 목회자들보다 돈을 벌어야 하는 필연성과 현실성이 더 강합니다. 저는 대개의 신자들에게 가난하라고 설교하기보다는 정직하게 벌어서 즐겁게 나누며 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많이 벌고, 잘 벌어서 교회에 헌금도 많이 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평신도들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벌어서 고넬료처럼 헌금도 많이 하고 착한 일도 많이 해야 하지만, 돈은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기필코 그 놈은 우리를 후려내려고 안달복달합니다. 하여 실질적인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 지혜를 로날드 사이더가 제시해 줍니다.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에서 그는 ‘누진 십일조’를 통해 돈의 유혹을 피하고, 돈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방안을 열어줍니다. 이것이 성경의 규범도 아니고, 가장 좋은 모델도 아니지만, 큰 도움이 됩니다. 그 원리는 간단합니다. 누진세가 많이 버는 사람은 많이 내고, 적은 수입의 사람은 세금을 적게 내는 것이듯이, 누진 십일조도 수입이 늘어나는 대로 기계적으로 십일조를 내는 것이 아니라 누진적으로 헌금과 구제·선교를 더 많이 하는 것입니다. 기실 수입이 많이 늘어나도 생활비가 그만큼 증가하지 않습니다. 사이더는 정말로 온건한 것이어서 성서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시행만 한다면 신자와 교회의 삶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신자가 부자로 사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거나 그렇다고 비방할 일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성서의 일관된 가르침은 부자되려하지 말고 제자답게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상하셔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알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부자가 될 수 있는지를 묻기 이전에, 신자가 신자답게 되는 것을 묻고 또 물어야 하겠습니다. 부자가 되던, 빈자가 되던 나는 신자가 되겠습니다. 아멘! 김기현 / 수정로침례교회 목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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