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묵상] 운명도 바꾸시는 하나님 | ||||
| 운명은 바뀔 수 있는 것…좌절하지 말고 끊임없는 도전하고 노력해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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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살면서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을 선택합니다.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에 입을 옷을 고르거나 점심때 무슨 음식을 먹을 것인지 고민합니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전공이나 직업, 직장이나 주거지, 배우자의 선택과 같은 중요한 일에 이르기까지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선택과 관계없이 정해진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조국과 인종, 부모 형제 등은 사람이 선택할 수 없으니 이런 것들이 운명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미래의 길흉화복과 그 시기까지도 사람마다 이미 정해져 있어서, 선택을 한들 노력을 해 본들 별 수 없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주팔자나 토정비결·운세·점 등을 보면서 알게 모르게 그것들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경속의 신앙인들도 운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은 고백을 하였습니다. 구약에 있는 잠언 및 시편기록자, 욥 및 예레미야의 신앙고백을 보겠습니다. “사람은 속으로 제 할 일을 계획해도 그것을 하나하나 이루시는 분은 야훼시다.”(공동번역, 잠 16:9) “야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며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일이다.”(공동번역, 시 127:1) “그가 허물으시는데 누가 다시 세우며 그가 가두시는데 누가 풀어 놓겠는가? 그가 수문을 닫으시면 말라버리고 그가 물을 쏟으시면 땅은 온통 결딴나는 것을”(공동번역, 욥 12:14~15) “주님, 사람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이제 깨달았습니다. 아무도 자기 생명을 조종하지 못한다는 것도, 제가 이제 알았습니다.”(렘 10:23) 이들은 모두 하나님이 모든 것을 결정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운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했던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저 사람의 한계를 인정하였고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가졌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만사와 인생들의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다면 애써서 무슨 일을 선택하고 노력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운명도 바꾸시는 하나님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사회적 변혁이나 천재지변은 그 개인에게는 운명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운명이 바뀔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에 그렇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운명을 바꾸시는 분이시라고 구약시대의 선지자 호세아와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습니다. “내가 내 백성의 운명을 바꾸어주고자 할 때마다”(호 7:1)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을 바꾸어 옛날처럼 세워주리라.”(공동번역, 렘 33:7) 창조주의 존재를 믿고 그분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신자들은 운명이나 사주팔자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운명도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늘 올바른 선택으로 자신의 새 역사를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신자라고 하여도 일상의 모든 일이 다 만사형통인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선택의 결과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에서인지 신자에게도 현실의 삶에서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야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괴롭습니다. 울다 지쳐 눈은 몽롱하고 목이 타며 애간장이 끊어집니다. 괴로워서 숨이 넘어갈 것 같으며 한숨으로 세월을 보냅니다. 더 견딜 수 없이 기운은 다하였고 뼈 마디마디가 녹아납니다.”(공동번역, 시 31:9~10) “나는 가난하고 불쌍합니다. 하나님 빨리 오소서. 야훼여 더디 마소서. 나의 구원자, 나의 도움이시여.”(공동번역, 시 70:5) “내가 고통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고, 나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려달라고 부르짖었더니”(시 18:6)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경우에 다 응답하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 전도자 바울 자신도 육체적인 질병을 가지고 있었으나 고치지 못했고, 종교적인 이유로 탄압과 고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의 신자들 중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고난을 겪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의 제자 바울과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편지한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사람이 흔히 겪는 시련 밖에 다른 시련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십니다.”(고전 10:13)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약 1:2~4) 이렇게 신자에게도 보통의 인생들 누구나에게 있을 수 있는 세상사의 시련이나 시험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처지의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위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롬 8:28)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은 결국 선한 결과를 위한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신자의 선택이 혹시 잘못되었더라도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열매를 맺도록 인도하여주실 것입니다. 승리를 향한 달음질 그러므로 신자는 암담한 고통의 현실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가는 길이 막혔다면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합니다. 그분은 다른 길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신자라면 몸을 돌려 다시금 힘차게 달음질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희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재난의 날에 나를 불러라. 내가 너를 구하여 줄 것이요.”(시 50:15)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나리라. 날개 쳐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하리라.”(공동번역, 사 40:31) 조규철/ 한국오토모티브컬리지 자동차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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