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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 위해 세상을 정복한다고?

은바리라이프 2008. 2. 10. 18:51
하나님의 영광 위해 세상을 정복한다고?

 

장경애 jka9075@empal.com

 

<십자가와 칼>중에서
그레고리 A. 보이드 지음/ 신선해 옮김 / 한언 펴냄

의로운 지도자가 권력을 사용한다면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 의로운 사람들이 사회를 의로운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힘을 거머쥐는 것이라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다. 하지만 ‘위에 서는 힘’은 역사를 통틀어 수많은 기독교인과 이슬람인의 사상을 지배해 왔고 파멸을 낳았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는 마태의 보수주의적 계획이나 시몬의 급진주의적 계획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세상이 개혁될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도 퍼질 것이라고 믿는다.

세속주의자들이 이러한 전제를 수용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그보다 더 멋진 비전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물론 사회문제는 민주주의건 마르크주의건 이슬람이건 기독교건 간에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는 기본적으로 주 하나님의 권세를 부정한다. 뿐만 아니라 이 전제는 그리스도의 종들에게 부여된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알리라는 특별한 소명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정복한다는 전제는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할 때 내밀었던 조건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전제가 매력적인 이유는 그것이 아주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아는 기독교인이 사회를 우리 뜻대로 만들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는데 사회가 훨씬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내 말의 요지는 아주 명확하다. 미국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국가의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과 초기 교회가 기독교 국가를 세우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위에 서는 힘’의 사고방식 안에서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꽤 그럴싸하다. 우리가 ‘아래에서 섬기는 힘’의 사고방식 안에서 생각한다면 이것은 터무니없는 소리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아들이 ‘위에 서는 힘’을 행사하실 수 없었다? 예수님은 충분히 하실 수 있었다. 마귀가 이미 그분에게 제안하지 않았는가. 마귀의 제안이 아니더라도 예수님에겐 고갯짓 하나로 부를 수 있는 천사군단이 있었고 전지전능한 신의 힘이 있었다. 그분이 원하셨다면 문제없이 승리의 군주가 되셨을 것이다. 박해받는 구세주가 아니고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사들을 부르지 않으셨다.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당시의 권력자에게서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분이 세우러 오신 나라를 폭력으로 얼룩지게 하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신성을 드러내기 위해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종의 형태가 되셨으며 기꺼이 박해를 받으셨다. 존 하워드 요더는 이렇게 썼다. ‘그리스도는 역사를 다스릴 권리를 버리셨다.’ 오히려 희생과 사랑으로 복종함으로써 세상에서 승리하기를 택하셨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핵심가치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마음에 품으라고 명하신 그분의 마음이다(빌 2:5).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종에게 칼의 힘은 마귀의 유혹일 뿐, 기도교인 만이 사용할 수 있는 해결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위에 서는 힘’을 움켜쥐라는 이 오래된 유혹은 다른 나라보다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더 치명적이다. 정부가 미국이라는 세상 나라를 운영하는데 기독교인들의 참여를 끌어내려 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나 전체주의 정권 하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선택의 유혹을 받을 일이 없다. 내가 보기엔 국가를 운영하는 데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은 세상 나라의 시민이 가진 특권이다. 어쩌면 모든 세상 나라가 국민들에게 부여할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그것이 가치 있는 만큼,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정부 기관에 투표하고 정부 기관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유혹을 과감히 뿌리쳐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인 우리의 특별한 권위로 말이다. 기독교인들은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아가게 되었지만 그러한 권리는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지녀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정부 안에 있는 누군가에게 섬기는 자가 되라고 명하실 수도 있다. 그러면 그들은 정부 안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소명을 이루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사람으로서의 특별함은 그들이 정부에 행사하는 권위나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와 동등할 수 없다. 희생적인 사랑으로 사람들 아래에 임하겠다는 의지와 능력 안에만 하나님 나라 사람의 권위가 존재한다. 또한 이 특별한 권위는 정부의 권력자로부터 부여받았거나 물려받은 것이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 나라 사람들의 특별한 영향력이나 소명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이다. 통치자이거나 일개 노동자이거나, 미국에 살거나 북한, 이란 혹은 스웨덴에 살아도 모두 마찬가지다. 그 권위와 소명은 백만 가지 다른 형태를 취할 수 있지만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 자신을 박해하던 사람들을 위해 사랑으로 돌아가신 그분 말이다.

어시스트 장경애/ 빛과소금교회 최삼경 목사 사모

 

2008년 02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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