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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운철 목사의 개척교회 이야기 4 제 발로 찾아온 세 명의 낯선 사람

은바리라이프 2008. 2. 10. 18:58
제 발로 찾아온 세 명의 낯선 사람
장운철 목사의 개척교회 이야기 4

 

장운철 kofkings@amennews.com

 

지난 주중에 예배 단상 위치를 바꾸었다. 공간 활용도가 비효율적이라 보여서 옮겼던 것을 다시 제자리에 놓은 것이다. 이전 교회가 인테리어 해 놓은 모습대로다. 그저 의자의 위치만 바꾼 것이니 비용은 든 게 없다. 위치를 바꿔 기존의 인테리어된 모습과 어울려서인지 훨씬 더 ‘폼’이 나는 듯했다. 단순한 새로움 때문만이라도 가끔 크든 작든 변화를 주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상 위치 변경에 대해 교인들에게 미리 광고만 해 놓았다. 다음 주일에 교회 왔을 때 당황하지 않도록 말이다.

처녀 마음만 흔들어 놓고

예배 단상 위치를 바꾼 이유는 ‘낯선 이의 방문’ 때문이다. 새로운 사람이 예배에 참석했을 때 그에게 보다 편안한 마음을 제공해 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새로운 사람이 등록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단상 위치 변경은 오히려 낯선 이로 인해 얻게 된 아픔을 스스로 치유하려고 하는 자구책인지도 모르겠다.

   
   ▲ 강대상 위치를 바꾼 예배당 모습
개척교회 3개월째다. 그 동안 3명의 낮선 사람이 예배 시간에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 달에 한 명꼴이다. 주일 저녁 예배(오후 7시)와 수요예배(오후 8시)에 각각 방문한 것으로 보아 기존 신자였음이 분명하다. 새로운 지역 교회에 대한 궁금함이나 자신이 섬기는 교회가 멀기 때문인지 우리 교회를 찾은 이유를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새로운 사람이 제 발로 개척교회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예배를 드렸다는 것은 아니다. 맨 처음 한 명(청년이었다)은 수요예배 직전 문을 열었다. 그리고 고개를 내 밀고 내부를 힐끗 쳐다보았다. “어서오세요. 들어오세요”라는 아내의 말에 “아, 네~”라는 말을 남긴 채 그냥 문을 닫고 되돌아갔다. 순간 아내와 필자는 서로 눈을 쳐다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럴 수밖에.... 손바닥만한 예배당 때문일까, 아니면 예배 시간에 사람들이 너무 없어서일까 등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작은 교회인 줄 모르고 문을 열었나?’는 등의 내면의 소리가 솟구쳤지만 그냥 삭혔다. 앞으로 이러한 일이 적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두 번째 찾아온 분은 주일 11시 예배에 참석했다. 30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예배 시간이 가까워 올 때 여러 교인들과 함께 들어왔기 때문에 교인 중 한 사람의 인도로 왔다고 생각했다. 예배가 파한 후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통성명을 하고 연락처를 나누고자 했으나 그는 “다음에~”라는 말을 남기며 예배당을 나섰다. 그 후 몇 주간 그분의 남긴 말이 뇌리에 맴돌았다. ‘그때 말한 다음이 이번 주일까?’ 등의 기대감과 함께 꼭 다시 올 것 같은 마음이 필자를 사로잡았다.

그런 후 한 달쯤 지났을까 필자의 마음 한 구석에 멍이 들었다. 마치 사랑으로 상처받은 처녀의 마음과도 같았다. ‘괜히 마음만 흔들어놓고···.’ 잊으려고 했으나 쉽게 잊히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고, 또 슬프기도 하다. 이런 게 ‘사랑’일까. 우리 주님도 이런 마음이실까.

지난 주일 저녁예배 때 한 분이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왔다. 20대 후반의 남자였다. 3번째 사람이었다. 저녁 7시, 예배 시간 ‘땡’하는 순간 들어왔다. 그를 보는 순간 필자는 그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두 번의 상처(?)가 낳은 결과 때문이었다.

만나교회에는 몇 가지 특징 아닌 특징이 있다. 주일 낮 예배를 제외하고 필자는 의자에 앉아서 예배를 집례한다. 찬양과 기도 그리고 설교 등 모든 순서를 성도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조금 더 친근함을 추구하려고 한 것이다. 아직 피아노도 없다. 피아노보다 반주가가 없다는 게 더 정확하다. 그래서 필자가 직접 기타(guitar)를 치며 찬양을 인도한다. 그때 앉아서 하는 게 편안하기도 하다. 복음성가(gospel song)와 찬송가를 모두 예배 시간에 혼합해서 사용한다. 주일저녁, 수요, 금요예배 때는 복음성가 사용의 비중이 훨씬 크다.

개척교회 문을 열면서 성경과 찬송가를 바꾸었다. 한국교회가 새로 받아들이기로 한 개역개정판과 새찬송가로 말이다. 또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도 새로 번역된 것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능동적인 결정과 빠른 행동은 개척교회의 특징이자 강점일 것이다. 필자는 수요예배와 주일 저녁예배를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교적인 마음을 갖고 가족들과 친인척들과 또 친구와 이웃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도록 권장하고 있다. 틀에 박힌 예배 참석보다 이웃을 돌보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수요예배와 주일 저녁예배 참석자는 대체로 3명이다. 필자와 아내 그리고 필자에게 지도를 받고자 하는 청년 한 사람 등이다.

3번째 예배에 참석한 사람은 이러한 교회 분위기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예배 인도자가 의자에 앉아서, 기타를 치며, 익숙치 않은 복음성가를 부르고 또 처음 접해보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접해야 하는 상황 속 말이다. 예배 시작부터 그의 모습이 적지 않게 불편해 보였다. 찬양 시간이 그에게는 침묵의 시간이 되었다. 게다가 성경봉독 시간에 아내가 “이 성경으로 보세요”라며 교회 비치용 개역개정판 성경을 내밀었는데, 그에게는 그것이 ‘다른 성경’으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른다. 순간 적지 않게 당황한 듯 보였다. 또한 예배를 파할 때 같이 드렸던 ‘주기도문’에 그는 손에 들었던 주보도 내려놓고 그냥 나가버렸다.

“좀 센스가 있어야 했어요.”
아내가 아쉬움을 전했다. 그렇다. 잠깐의 설교 시간을 이용해서라도 처음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불편하지 않게 예배의 특징과 이유들을 설명하는 것이 필요했었다. 앞선 두 건의 낯선 이의 방문으로 ‘나에게 상처를 남기고 떠나지 마시오’라는 마음이 순간 포용력을 잃게 했던 모양이었다.

“제 발로 오는 사람에게 큰 기대 버려라”

   
   ▲ 주보와 헌금함
며칠 전 한 선배를 만났다. 그는 교회 개척 후 7년 째 목회를 하고 있다. 열정적인 목회로 이제는 어느 정도 최소의 성장의 궤도에 오른 상태다. 큰 은혜 받은 한 성도가 헌물한 것이라며 몰고 온 신형 승합차가 이를 잘 증명해 준다. 개척 후배를 위로한다며 시간을 내어 찾아온 것이다. 맛있는 점심 대접도 받고 과거 친했던 이들의 소식도 전하는 등 이런 저런 대화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그때 필자는 ‘3명의 낯선 이들의 방문’ 이야기를 했다. 낯선 사람이 제 발로 예배당에 찾아왔다는 것에 대한 흥분과 기대 그리고 이내 바뀌게 된 실망에 대해서 거침없이 속내를 털어놨다. 그러자 그 선배는 “정말 많은 사람이 찾아왔구나”라며 알 수 없는 말로 응수를 했다. 그는 곧이어 “우리는 7년 동안 딱 한 사람이 그렇게 찾아왔었다”며 오히려 부러운 듯 말을 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제 발로 찾아오는 사람에 대한 기대를 버리라고 충고했다. 그들을 무시하거나 소외시키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에 기대를 하면 목회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수동적인 것보다는 능동적인 성도의 돌봄과 전도를 통해 교회를 바라보라는 말이었다. 그것이 옳다. 그분의 말을 들으며 마치 앉아서 감 떨어지길 기대했던 소극적 목회가 들통이라도 난 듯 죄스러웠다. 다시 내 자신이 새로워져야 했다. 또 다시 찾아올 낯선 사람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이처럼 개척교회 목사는 여러 번 부서졌다 다시 맞추어져야 하는 모양이다.

예배 단상의 위치를 바꾸는 것과 동시에 몇 가지 변화를 더 주기로 했다. 예배 인도를 모두 일어서서 하기로 했다. 필자 스스로 마음 가짐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작은 나무 강대상도 구입하기로 했다. 내친 김에 피아노(운송 및 관리 문제로 디지털 피아노가 좋다고 생각했다)도 포함시켰다. 문제는 비용이다. 일단 교인들에게 알리기로 했다. 조금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에 모든 교인이 동참하는 것이 옳다고 보아 지난 주일 예배 때 광고도 했다.

교육관 학생의 변화

   
  ▲ 교회 명함 겸 전도지
약 한 달 전 교회 앞에 작은 방을 하나 얻었다. 각박한 교회 살림이지만 교육관이 절실했기 때문에 단행한 것이었다. 그 방이 주일을 제외하곤 평일엔 빈공간이어서 다시 재 임대를 했다. ‘주일학교 선생님으로 봉사하는 이에게 방을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조건으로 두 여학생이 들어왔다. 멀리 여수에서 올라온 학생이다. 사정상 2월까지 두 달만 있겠다는 것을 그대로 수용했다. 그들 중 한 학생은 어려서 교회를 다녀 본 적이 있다고 했고 다른 학생은 ‘전혀’였다. 주일학교 선생님보다는 예배 후 어른 성경공부 시간에 약 2시간 보모 역할을 부탁했다. 그리고 주일 예배 참석이 방을 무료로 제공하는 조건인 셈이었다.

그들에게 주일 예배는 잠을 보충하는 시간이었다. 알지 못하는 내용이 찬송으로 설교로 이쪽저쪽에서 왔다갔다 하는데 왜 안 그러겠는가. 그래도 방을 공짜로 쓰려고 예배 시간을 잘 지켜 참석했다.

지난 주부터 그들을 위해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다.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큰마음을 가지려고 한 것이다. 물론 그들이 처음 들어올 때부터 선교적인 마음을 갖기는 했지만, ‘3명의 낯선 이의 방문’ 사건이 진행되면서 그 마음이 소원해졌었다. 주일에 그 방에서 발견된 술병과 담배 냄새가 ‘아차, 실수다’는 생각과 함께 실망감이 들었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지난 주일에 작은 변화가 감지됐다. 어려서 교회를 다녀봤다는 한 여학생이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었다.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찬송할 때도 적극적으로 임하는 듯했다. 오히려 순간순간 졸고 있는 옆의 친구를 깨우기까지 했다.

“그 여학생들과 함께 한 번 식사를 해볼까요?”
주일 저녁 예배 후 돌아가는 길에 아내가 의견을 냈다. 그렇지 않아도 그와 같은 무슨 일을 한 번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아내와 텔레파시(?)가 통한 모양이다. 목표가 하나 생겼다. 그들이 방을 사용하는 기간은 2월 말까지다. 교회 출석하는 시간도 마찬가지다. 한 달 남았다. 그때까지 반드시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을 만난 이유이며 또 계속해서 찾아올 낯선 방문객을 기다리는 마음 자세이지 않을까?

 

2008년 02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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