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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푸스 증언과 빌라도 보고서

은바리라이프 2008. 2. 4. 19:49
 

요세푸스 증언과 빌라도 보고서

답변자 : onechu67     l    2006-12-06 18:50 작성 태클달기    l    신고하기     


성경이외에도 예수에 대해서 그의 행적을 증거하는 역사적 사료가 존재하는가?

그러나 이상스러운점은 예수생존시기에 수많은 저술가의 저술에서 예수에 대한 자료를 전혀 찾을수가 없다는 점이다.


예를들어,유대인 역사학자로서 많은 저술을 남겼던 필로 (Philo of Alexandria. BC 20~AD 50)는, 그 당시 결코 주류를 이룰 수 없었던 미미한 종교 분파인 '떼라퓻' 또는 '에세네'파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한 바 있는데, 그의 온 저서를 통하여 예수가 언급된 곳은 없다는 것이다.


4복음서에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시에 수많은 군중들이 "호산나"를 외쳤고, 예수의 오병이어 기적때에는 모인 남자만 하더라도 5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수만명이 될 것이다)

이렇게 대중의 지지를 받은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해서 어째서 기록이 없는 것인가?

저스투스(Justus of Tiberia), 노인 플리니(Pliny the Elder)등, 그 외 수십명의 예수와 동시대의 유대인 저술가 들이 있는데, 그들의 저술은 현대의 한 도서관을 채우기에 충분한 양 이었지만, 모두 예수에 관한 언급에는 실패 하고 있다.

예수가 로마의 저술가들에게 언급되고 있는 것은 그의 사후, 수세기가 지나서 크리스트교도들이 로마인들의 사회이슈가 되면서 예수에 대해서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대표적인 그런 저술로서는 로마의 역사가 타시투스 (Tacitus)의 저서 'Annals'에서 기독교인들에 대해 언급을 들수 있다.

AD 64년의 로마의 대 화재 발생시,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에게 책임을 돌린것에 대한 언급중, 기독교인(Christian)이라는 단어가 '티베리우스' 황제 통치시 '빌라도'에게 처형 당한 '크리스투스(Christus)'라는 인물에게서 비롯 되었다는 것을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저술은 AD 112년에 저술된 것이므로, 그가 시중의 기독도들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 적었을 따름이다.

또한 그는 '크리스투스'외 에도 많은 이방 신들에 대 해서 마치 그 들이 실체로 존재한 양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역시 예수의 실존성에 대한 자료는 불충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에 대해서 불충분한 자료와는 달리 주목받고 있는 저술이 하나있다.

바로 유대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Flavius Josephus. AD 37년 ~ AD 101 년)의 저술이다.



(1) 요세푸스 증언의 실체


요세푸스의 첫 번째 저서로는 '유대 전쟁사'가 있으며, 여기서 그는 AD 66~73 년에 일어난 독립 투쟁사를 기록 하고 있다. 이 기록이 아주 세밀한 것은, 본인 자신이 그 전쟁의 와중에 중요 인물로 활동 했기 때문이다.

이 책중 어디에도 예수에 대한 언급은 없다.


두 번째로 그의 자서전이 있다.

자신의 출생 배경 부터 시작 해서 로마에 항복하고 그들의 세력에 포섭된 자신의 합리화와 미화를 꾀하고 있다.


세 번째의 책으로 '유대 고대사(Jewish Antiquities)'가 있는데 예수에 관한 유일한 자료가 이 책의 복사본들에 들어 있다.

이 책은 아담과 이브로 시작되어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 시대, 출애굽을 망라하며 독립 전쟁 직전 (AD 66) 까지의 유태인 역사를 서술 하고 있다.


책 뒷 부분에 문제가 되는 예수 인용구가 있는데 그 것 들을 보기로 하자.

첫 번째의 구절이다.

"유태 지방의 행정 장관 "페스투스"의 사망 소식을 들은 황제는 "알비누스"를 그 후임으로 파송 한다. 그 와중에 "아그립파" 왕이 "조셉"의 대 제사장 직을 박탈하고 "아나누스"의 아들 또 다른 "아나누스"를 그 자리에 임명한다..... 그는 "사두개"파로 범법자를 다루는 데 매우 엄하였다. ............


그는 지금이 기회라 생각하여 "산헤드린" (Sanhedrin - 바빌론 유배 이후 생겨난 제사장, 법관들의 회의로 종교적 문제, 사법, 형법을 다루는 최고 기관)을 소집 한다. "페스투스"는 죽었고 "알비누스"는 아직 노상에 있음을 기회로, 그는 즉 구세주라 칭함 받는 예수의 형제, "제임스 (야고보)"와 몇몇 다른 인물들을 산헤드린 앞에 소환한다.


그들을 정죄하여 돌에 맞아 죽게 한다. 의식 있는 시민들이 이를 못마땅히 여겨 왕에게 탄원하고, 그중 몇은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오고 있는 "알비누스"에게 마중을 나가, 그에게 행정 장관의 동의 없이 소집 된 산헤드린의 불법성을 고한다. .....


"알비누스"가 대노하여 서신을 보내자, "아그립파" 왕은 "아나누스"의 대 제사장 직을 박탈하니 그가 대 제사장 직을 수행 한 지 3 개월 만이다. 그 뒤로 "댐네우스"의 아들 "예수"(다른 예수임 - 당시 예수라는 이름은 상당히 흔한 이름 이었음)가 대 제사장이 된다" ['유대 고대사' 20번째 책 9장 1절]


문제의 구절만 다시 본다

"즉 구세주라 불리는 예수의 형제 제임스 (.... brought before them the brother of Jesus, who was called Christ, whose name was James)"

이 짧은 구절 속에 나타나는 예수는 성경 상에 나타나는 예수를 지칭 하고 있는 것 같다.

"구세주라 불리는" 구절과 "...형제 야고보" 의 구절이 그것을 입증 하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또 하나의 두 번째 구절을 보자,

'유대고대사'를 통 털어 예수 인용구는 이 두 구절 뿐 이다.


"그 무렵에 예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워낙 이적도 많이 행하고 훌륭한 선생이어서, 사람이라고 여길 수 가 없을 것 같다. 만약에 사람으로 분류 될 수 있다면 그는 분명히 현인이었다. 많은 유태인과 이방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에 심복 하였다. 그는 구세주 였던 것이다. 우리가 빌라도 총독을 움직여 그를 십자가에 매 달았지만, 그는 3일만에 부활하여 그를 따르는 무리 앞에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다.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이 예언한 그대로 이루어 졌다. 크리스토의 이름에서 연유된 크리스찬이라는 무리들이 이런 연고로 오늘날까지 소멸되지 않고 있다." [유대고대사 18 번째 책 3장 3절]


성경에 나타나는 예수와 얼마나 정확히 부합되는 묘사인가?

하지만 그 구절들은 중세부터 현대에까지 끊임없는 조작시비를 불러일으킨 부분이다. 원래에 없었던 구절이 필사본으로 전해지는 동안 덧붙여 진 것이다. 이 구절들에 대한 끊임없는 논란의 역사적 배경을 골드버그"의 서술로 먼저 간단히 훑어보자.


AD 93: '유대고대사'가 로마에서 발간되다.

93년에 발간된 원본들에도 문제의 구절이 들어 있었을까? 유대고대사는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원본들의 권말에는 "티투스" 황제가 직접 서명을 해 주었고, 발간을 윤허 하였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이 원본들이 아니다. 원본들은 한 권도 남아 있지 않다. 우리 세대에 전해 내려 온 것은 이 원본을 베껴 쓴 복사본들이다. 그나마 가장 오래된 복사본도 10 세기경의 것으로 추산 되고 있다. 거의 1000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손을 거쳤는지, 얼마나 충실되게 우리에게 전달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과연 1 세기 말의 연대기와 10 세기에 만들어 진 복사본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을까? 복사기가 없었던 시절 이었음을 명심 하라.


220~250년경: 유명한 초기 기독교 변론자인 오리겐(Origenes. '오리게네스'라고도 불림)은 헬라적 신화를 차용해서 예수신화를 만들어 냈다고 비판하는 이교도들에 대항해서, 그리스도의 변증적(辨證的) 저술로서 '첼수스에 대한 반론(反論)'(Contra Celsus)을 썼다.


이책에서 그는 요셉푸스의 첫번째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두번째 구절은 아예 언급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요세푸스는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서술 한다.


324: 추기경 '유세비우스'가 처음으로 두번째 구절을 인용하는데, 이 내용은 현존하는 복사 본들의 내용과 거의 다름이 없다.


10 세기: 아랍 역사 학자이자, 아랍 기독교인이면서 추기경인 '아가피우스'가 두번째 구절을 인용 한다. 그런데 그의 인용구는 '유세비우스'의 인용 내용과는 조금 다르다.

기독교 취향이 훨씬 제거된 그의 인용 구를 쉽게 풀어서 다시 보자.


"유대인 통치에 관한 저술에서 유대인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이즈음 예수라 불리는 현자가 있었다. 그의 행실은 의로웠으며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빌라도'가 그를 처형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제자 직분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예수는 3일만에 부활 해 그들 앞에 나타내 보이셨다. 따라서 그는 아마도 선지자들이 예언 했던 구세주였던 것 같다"


16 세기: 1500 여년 동안 아무도 의심 하지 않아 오다, 16 세기에 들어 와서야 '조셉 스칼리거'라는 인물이 두 번째 구절의 진위를 의심하기 시작 하였다.

너무나도 기독교 색채가 짙다는 것이었다.


17 세기: '리차드 몬테규' 추기경이 '그는 구원자였다'라는 구절이 훗날 기독교인이 복사 과정에서 덧 붙여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1737: '위스튼'이 '요세푸스'의 저술들을 번역하면서 '요세푸스가 유대인 기독교인이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두 번째 구절 전체가 원래 그에 의해 쓰여 졌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18 세기~ 20 세기 초반: 많은 학자들이 상기 구절이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위조 되었다고 주장한다.


1929: '대커리'가 위조설을 지지하면서, 또 '누가 복음'과 '유대 고대사'에 공통점이 많음을 지적하고 '누가'와 '요세푸스'의 상면 가능성을 주장한다.


1931: '아이슬러'가 기독교 검열 하에 많은 부분의 삭제가 있었다며 그 나름대로 재수정 복구된 구절을 제시한다.


1941: '마틴'이 부분적인 위조를 지적하고 나머지 부분은 정확하다고 주장한다.


1954: '폴 윈터'가 위조된 곳은 세 곳 뿐이며 나머지는 정확하다고 주장한다.


세 군데 위조는 "그는 구원자였다",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의 두 구절과 뒷 부분의부활과 예언에 관한 구절이었다. 이 주장은 당시 많은 공감을 샀다.


1960: '콘젤만'이 누가 복음과 사도행전에 내포된 신앙관과 문제의 두 번째 구절간에 공통성을 발견하고, 두 번째 구절 전체가 기독교인에 의해 위조 됐다고 주장한다.


1963: '펠드만'이 거의 모든 부분이 정확하다고 단정한다.


1971: '파인스'가 9~10 세기 아랍 및 시리아 본을 (상기한 '아가피우스'의 구절)발견하고, 이들 사본에는 "구원자" 운운의 구절과 "인간이라 부를 수...." 두 구절이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들어 이것이 위조되지 않은 원본 기록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1973~1983: '렝스토푸'가 '요세푸스'의 저술을 집대성 재구성하여 용어 색인 체계를 만듦으로 학자들의 연구에 편리한 도구로 쓰이게 한다.


1984: '버즈올'이 '렝스토푸'의 색인 체계를 이용 하여 두 번째 구절의 문체를 분석하면서, '요세푸스'의 문체와 너무 다르므로 두 번째 구절 전체가 위조라고 주장 하다.


1991: '마이어'가 '폴 윈터'의 설을 지지 하다. 즉 세 군데 만 위조 됐다는 것이다. 그의 연구는 현재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 하고 있다.


1995: '골드버그'가 두 번째 구절과 누가 복음의 엠마오 노상의 이야기 (예수가 부활 해서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에게 나타난 이야기) 에 신기한 공통점을 발견한다. 따라서 두 번째 구절과 "엠마오 이야기"는 이제는 잃어 버린 어느 초대 기독교 문서에 공통적으로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다. 결론으로 그는 "구원자" , "사람일수..." 구절 두 개만 빼고는 전부 원본에 있었다는 것이다.


골드버그는 컴퓨터를 동원하고 통계학의 개념들을 이용 하여 흥미로운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다. 물론 그의 연구 결과는 예수 신화설과 상치된다.

두 곳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원본 그대로 라면, 그 자체로 예수의 실체적 존재는 객관적인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해 증거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거의 모든 학자들이 부분적이건 전체적이건 위조가 있었다는 사실에는 동의하고 있다.


신화파에서는 전체가 다 위조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먼저 께름직 한 것은 '유대고대사' 복사 본들이 전부 기독교인들의 관리 하에 전수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초대 교부들과 기독교 변증가들은 왜 요세푸스의 저술을 인용하지 않았는가?

초대 기독도들은 그들의 교리에 대하여 각 종파로 부터 많은 도전을 받았다.

예수의 실존과 그의 놀라운 기적들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받았고, 이러한 과정은 본인들의 저술에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도 이 좋은 증거물을 제시 하지 않았다.


두 번째 구절은 324 년이 되어서야 '유세비우스' 추기경에 의해 처음으로 인용 되었다. 첫 번째 구절은 그전에 '오리겐'에 의해 230~250년 사이에 와서야 처음으로 인용 되었다. 유대고대사가 발간된 게 93 년경이니까 거의 140~250년이 흐른 셈이다. 그 사이에 기독교 변증가들은 연대기를 읽지 않았을까?


유대고대사는 초대 기독도들에게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그들은 열광적으로 그 책을 읽었고 소중히 여겼다. 초기의 기독교는 이방종교에 의해서 수많은 도전을 받아왔다.

무수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인용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읽었던 사본에는 문제의 구절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2백년이 넘도록, 요세푸스의 저술을 잘알고 있던 초대 교부들은 상기의 증언 귀절을 모르고 있었다. 만약에 동 구절이 요세푸스의 저술에 있었다면 그들은 도전자들과의 논쟁에서 그것을 재빨리 인용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동 구절은 그 저술에 없었다. 요세푸스의 저서를 읽어 본 오리겐도 요세푸스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고 서술했다. 동 구절은 기독교 최초 역사가 유세비우스 추기경에 의해 언급 되었다. 동 구절은 그의 조작으로 사료 된다.


"유세비우스는 신앙의 명분 아래 문서 변조를 지원 하였고 요세푸스외의 여러 저술가들의 책들도 변조 시켰다"[마샬 거빈 (Marshall J. Gauvin)]


그리고, '오리겐'은 첫번째구절은 읽었는데 두 번째 구절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 따라서 두번째 구절은 그 후에 첨가 되었다고 보여진다. 또한, '요셉푸스'의 책 '유대전쟁사'는 '안티오코스'의 예루살렘 점령 부터 AD 70 년의 예루살렘 함락 까지의 내용을 '유대고대사'책에서 그대로 복사하고 있다.

'빌라도'가 군중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 등 다른 부분들은 거의 동일하게 서술 되었는데 '유대전쟁사'에서는 유독 상기의 예수 인용구들만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유세비우스' 추기경이 처음으로 인용한 두 번째 구절은 '조셉 웰레스'에 의하면 유세비우스 본인 스스로의 작품 이었다고 한다. '조셉 웰레스'는 많은 연구 끝에 당시 교부들 사이에 유행하던 문서 변조의 행태를 캐어 낸 인물이다. 그는 문서 변조의 대표자로 '유세비우스' 추기경을 꼽았다.


유세비우스 자신도 그의 저서 복음적 증명(Evangelical Demonstration)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구세주에 관하여, 내가 이미 생산(?) 해낸 이 증거들 만으로도 충분 하다. 하지만 유태인 '요세푸스'를 여분의 증인으로 이용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Eusebius, Evamgelical Demonstration, Book III. p.124)


유세비우스 자신도 그것이 조작이었음을 솔직히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요세푸스는 장황설을 늘어놓는 작가였다. 그는 보다 중요성이 적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광범위하게 썼다. 예수에 대한 이 구절이 이토록 짤막한 것은, 따라서, 이것이 거짓된 것이라는 강한 논증이다. 예수에 대한 부분만큼은 선행한 구절이나 뒤따르는 구절과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그 구절은 유대인들에게 닥친 재앙에 관한 이야기들의 모음들 가운데에 나온다.

즉, 그부분의 위치는 그 역사가의 글에 공간을 만들기 위한 개작의 손길에 의해 나뉘어졌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요세푸스는 성서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므로 일정한 계시의 기간에만 이루어 진 것이다. 즉 모세로 부터 아닥사스(Artaxerxes, 465 ~ 424 B.C.)왕 때까지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한 철저한 유대교인이었으며, 유대교의 제사장이었다.

요세푸스는 그의 저술에서 그 당시에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많았다고 기술했으며, 철저한 유대교인이었던 그는 그들을 모두 사기꾼으로 간주했다.


"파두스가 유대의 총독이던 시대에, 튜다라는 이름의 어떤 사기꾼이 많은 수의 대중을 선동했다. 그는 대중들에게 소유물을 가지고 요단강으로 그를 따라오라고 선동했다. 그는 그가 예언자이며, 그의 명령에 따라 그 강이 갈라지고 그들을 쉽게 건너게 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유대고대사 20,97]

"이집트에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 와서 자기가 예언자라고 선언하고, 대다수의 대중들에게 그를 따라 예루살렘에서 5퍼얼롱(furlongs) 떨어져 있는 올리브 산으로 나가자고 선동했다. 그는 그곳에서 그의 명령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여 줄 것이며, 그 때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대고대사 20,169~70,유대전쟁사 2,261~62.]


유대교의 사제였던 요세푸스는 메시아를 자칭했던 그들에 대해 사기꾼들로 평가했다. 그런데, 예수와 관계된 문제의 구절은 그가 예수의 신성과 기적,부활을 인정한 것으로, 요세푸스가 마치 기독교인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 정도이다. 다시 말하자면, 독실한 유대인이 기독교를 믿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만약 요세푸스가 문제의 그 구절을 직접 기록했더라면, 예수도 위에서 언급한 사기꾼처럼 묘사했을 것이고, 역설적으로 그것이 예수의 실존성을 증거한 중요한 증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역사와 이성의 모든 논증들은 그 구절이 염치없는 위조임을 증거한다. 이러한 이유로 정직한 기독교 학자들은 누구나, 그것을 첨삭된 것으로써 버려왔다.


Dean Milma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많은 추가적인 구절들과 함께 첨삭되었다.”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을 쓰며, Dean Farra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세푸스가 현재 있는 것과 같은 구절을 전부 썼다는 것은, 제대로 된 정신의 비평가라면 절대 믿지 않는다.”

Chambers'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세푸스의 유명한 그 구절은 일반적으로 첨삭임이 인정된다.” [The Chambers Encyclopedia]

Warburton 주교는 그것을 “비열한 위조이며 매우 어리석은 것이기도 하다”며 비난했다.


(2) 빌라보 보고서


한편, 요셉푸스의 기록외에도 기독교인들이 만들어낸 조잡한 위조문서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빌라도 보고서'라는 것이 있다.


기독교인은 이문서가 빌라도가 로마황제에게 보고한 법정에서 만들어진 공식적인 문서라고 이며, 현재 터어키의 성'소피아'사원(寺院)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 '빌라도 보고서'라는 글이 인터넷의 곳곳에 퍼져있는데, 필자는 '빌라도 보고서'라는것에 대해서 자료를 수집하려고 했으나, 하나같이 전부 똑같은 카피글뿐으로써, 이 문서에 대한 어떠한 배경자료를 전혀 찾을수 없었다.


수많은 카피글에는 모두 판에 박힌 듯 "본 보고서의 내용은 '도날드 N.리드만'박사가 소정의 요금을 지불한 후 특별 허가를 얻어 읽고, 영어로 번역하여 '예루살렘'에서 간행(刊行) 되고 있는 월간'더 마운트 자이언 리포터(The Mount Zion Reporter '시온산 보고서'; June 1974)'에 게재한 것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라고 간단히 언급되어 있을뿐이었다.


보통, 이러한 문서들은 '외경'으로 분류되어 내용의 진위여부는 제쳐두고라도, 학술적으로 가치가 대단함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외경을 다룬책에서 조차 인터넷에 떠도는 '빌라도 보고서'는 전혀 언급되지도 않는다. 우선 1970년대에 터키의 소피아 성당에 있는 자료를 영어로 번역해서 영미권도 아닌, '예루살렘'에서 발행된 잡지에 게제 되었다는 것부터가 좀 미심쩍다. 또한 내용자체도 황당하기가 그지없다. 문서의 전체내용은 빌라도가 기독교인처럼 느껴질 정도로 예수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하다. 로마총독이 쓴 것인지, 기독교인이 쓴 것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이다. 더구나 빌라도를 위해 전혀 맞지도 않는 상황까지 연출한다.


"백성들은 매우 거칠어서, 저 자신 순간순간마다 폭동(暴動)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저는 폭동을 진압할 만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저의 지휘 하에 한 명의 백부장 (百夫長)과 그가 거느린 군대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자기의 통치지역을 방어할 만한 충분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고 알려 온 「시리아」의 사령관(司令官)에게 증원군을 요청하였습니다."


로마의 총독이 백부장 한명과 그가 거느린 군대만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근거없는 이야기며, 유대인폭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당시의 시대상황에서는 더더욱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었다. 또한 백부장이라는 군대계급은 오늘날의 '하사관'급의 계급이었다.


"이론적으로 100명의 지휘관이지만 실제는 50~100명이었다. 신분은 하사관으로, 그들이 장교의 계급으로 승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百夫長 (centurion)항목]

더구나 빌라도의 경우 수많은 폭동을 폭력으로 진압하고, 수많은 유대인을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빌라도가 로마총독이 되어 부임했던 '가이사랴'라는 곳은 오늘날의 발굴결과, 로마의 신전과 대규모의 수도관, 항구 등의 대규모 유적이 발굴된 도시로, 로마총독이 100여명정도의 군대(그나마 지휘관인 백부장은 오늘날의 하사관급 계급)를 거느렸다는 것은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가? 이렇게 정황이 맞지 않게 언급된 것은 '빌라도 서신'의 배경을 알고 나면 확실히 이해가 된다.

빌라도와 그의 아내를 악역의 역할에서 성인(聖人)으로 탈바꿈하기 위함이었다.

'빌라도 보고서'의 전문을 다 읽어보면 예수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폭동이 두려워서 그를 사형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빌라도의 아내는 예수를 위해 남편을 설득하려고 했다. 즉, 빌라도부부를 성인의 경지에 올리기 위해서 빌라도가 예수를 흠모했다는 것을 알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모순점이 생긴다.

예수를 흠모했던 빌라도가 어떻게 예수를 사형에 처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폭동이 일어나려고 하면 로마군대로 진압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빌라도 서신은 그의 부하가 100명 남짓이었다고 보고서 앞부분에 미리 언급해둔 것이다.


"저는 예수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보호의 손길을 그에게 뻗쳐 주었습니다....제가 생각하기로는 우리 조상의 종교는 예수의 종교로 대치될 것이며, 이 숭고한 관용의 종교는 「로마」제국을 허망하게 붕괴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가련한 저는 유대인의 말을 빌자면 하나님의 섭리요, 우리의 말대로 하자면 운명의 도구로 쓰여진 것일 것입니다."

위의 구절은 빌라도 보고서 중에 가장 파렴치한 구절이다. 로마의 종교를 비하하고, 로마제국까지도 붕괴할 것이라는 말을 감히 총독이 황제에게 보고했다는 것이 믿어지는가?

이것은 빌라도부부를 성인으로 올려놓기 위한 후대의 문서일뿐이다.

빌라도는 사마리아인 학살사건 때문에 말년에 로마로 소환되어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중세의 카톨릭 전승에 따르면 빌라도의 아내 프로클라는 기독교인이었으며 성인의 대열에 끼워져 있다. 이디오피아에서는 빌라도 부부가 성인으로 되어있다.(카톨릭과 이디오피아의 성인 축일표에도 빌라도 부부의 날이 있다) 또한 초대교회 서술가 떼르뚤리아누스는 빌라도를 성인과 비슷하게 취급했다. [윌리스 반스토운 / 숨겨진 성서(the other bible) 2권 / 이동진 역 /문학수첩 / p.365]


빌라도를 성인으로 올려놓기 위한 '빌라도 보고서'는 또 있다.

위에서 언급한 출처불명의 이상한 자료와는 달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있고, the other bible에서 소개된 비슷한 내용의 '빌라도 서신'들은, 위의 빌라도 보고서와 거의 유사한 형태를 띄고 있고(빌라도를 성인으로 올려놓기 위해서), 비슷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내용이 각각 다른 유사문서들이 여러 가지 버전으로 현존하고 있다.

빌라도가 헤롯과 로마황제들에게 보냈다는 편지 모음으로 알려진 '빌라도 서신'은 현재 6세기~7세기의 시리아어 필사본으로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숨겨진 성서(the other bible)에서 빌라도 서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티센도르프 박사는 그의 저서 '비경전 계시록들'에서 파리 필사본 가운데 그리스어로 된 사본을 구했는데 '본문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논의할 가치가 없다.'라고 말했다. 빌라도의 편지 뒤에는 후대에 필사자가 추가한 요약 구절이 들어있다.

거기 나오는 유스티누스는, 역사가 요세푸스가 자기와 동시대의 역사가라고 말한 티베리아의 유스투스로 이해된다.

우리는 이 요약된 구절의 진정성을 찬성하는 쪽으로 기울 수가 없다.

유스투스가 그리스도에 관해서 언급한 적이 없다고 포니우스가 증언하기 때문이다.

테오도루스라는 인물을 우리는 티베리우스 황제라고 이해한다." [윌리스 반스토운 / 숨겨진 성서(the other bible) 2권 / 이동진 역 /문학수첩 / p.347]


위조화폐의 경우에는 정밀성이 요구된다. 그러나 고대의 위조문서들은 메스메디아 부재나 지식의 일부층 독점 등으로 오히려 그 위조의 수법이 유치찬란해도 무지자들은 그대로 믿을 수 있었다. 빌리도 서신이 얼마나 유치한 위조문서인지는 '빌라도 서신'을 읽어보기만 하면 금세 알 수가 있다.


로마총독 빌라도가 공식적으로 왕들에게 보냈다는 공문서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하다. (위에서 언급한 '빌라도 보고서'와 유사하다)


아예 한술 더 떠서 헤롯이 빌라도에게 보낸 서신중에는 "당신네 부부는 밤이나 낮이나 예수를 기억하면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정의로움을 받아들이십시오"라고 권하기도 한다.

한편, 빌라도가 헤롯에게 보낸 서신에는 백부장 롱기누스로부터 예수의 부활에 대한 보고를 받고, 빌라도와 그의 아내앞에 부활한 예수가 등장한후, 두 부부는 예수의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다고 한다. (이 편지들은 직접 전문을 다 읽어보면 너무도 기독교적인 찬양과 서술에 조잡한 위조를 한눈에 알아채게 만든다)


그리고, 빌라도가 로마황제에게 보낸 서신들은 위의 '빌라도의 보고서'와 유사한 성격의 문서이다. 이 서신에도 후대의 필사자가 "빌라도는 개인적인 보고서와 함께 아래 내용을 로마의 황제에게 보고했다"라면서 이것이 공문서임을 미리 언급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빌라도 보고서와 내용은 유사하지만 다른 글이다)

그리고, '숨겨진 성서'에는 앞에서 소개한 '빌라도 보고서' 바로 뒤에, 내용은 유사하지만 또다른 '빌라도 보고서'가 실려 있다.

즉, 필자가 아는 '빌라도 보고서'만해도 3가지나 된다.(인터넷에 떠도는글, 숨겨진 성서라는 책에 2개 수록.)

전부 유사한 내용이지만 각각 다른 글들인 것이다. ('숨겨진 성서'에는 전혀 앞의 것과 유사하지 않은 로마황제에게 보내는 빌라도 보고서가 또하나 있다. 이것까지 합치면 4개)

빌라도는 똑같은 내용의 서신을 황제에게 계속해서 보냈단 말인가?

빌라도 보고서라 주장하는 여러 가지 버전의 글들을 보면 한눈에 그 조잡함을 느끼게한다.

한마디로 복음서의 축소판에 불과하며, 예수가 병자들을 치료한 기적을 서신의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복음서에 있는 나자로의 부활, 예수의 옷자락을 만진후 치유된 여인...등등 파렴치하게 복음서의 내용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예수의 기적이 실제로 있었던 것이라고 가정해도, 빌라도는 이런 기적들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것도 아닐 텐데, 이런 기적행위들로 서신의 대부분을 할애해서 황제에게 보낸 공문서에 예수를 믿으라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서신을 그대로 읽으면, 마치 빌라도가 로마황제에게 예수를 믿어달라고 간청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 '빌라도 서신'과 함께 언급되어 있는 '빌라도의 최후'는 더 가관이다. 빌라도의 최후 역시 두가지 버전이 있다.


첫 번 째는 빌라도를 성인으로 만든 '파라도시스'이다.

빌라도의 편지를 받은 로마황제는 "그렇게 위대하신 분을 죽였단 말인가?"라고 화를 내며,빌라도를 로마로 소환하여 그의 목을 베어버린다. 사형을 당하기전 빌라도는 기도를 했고, 그 순간 하늘에서 빌라도를 축복해 주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의 목이 떨어지자 천사가 빌라도의 머리를 받았으며, 그 모습을 본 빌라도의 아내 프로크라는 기쁨에 넘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또하나는, 빌라도의 처참한 자살버전이다.

빌라도의 편지를 받은 황제는 화가나서 그를 소환했으나, 빌라도는 예수의 옷을 걸치고 황제 앞에 나타났다. 예수의 옷을 걸친 그를 볼 때마다 이상하게 황제는 분노가 가라않았으나, 어느 기독교신자의 권유로 빌라도의 옷을 벗기니 다시 황제는 분노가 치밀어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하지만 빌라도는 처형당하기전에 자신의 단검으로 자살해 버렸다.


빌라도 보고서는 여러 가지의 버전이 있으며, 담긴내용조차 도저히 공문서라고 볼 수 없는 기독교인들의 조잡한 문서일뿐이다. 차라리 빌라도 복음서라고 부르는게 더 나을것이다.

답변참고 >> http://kr.blog.yahoo.com/jnj0731/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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