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과 정통교회
비록 사도신경을 예배시 공중을 위한 신앙고백으로 사용하지는 않지만, 일반 교회에서의 사용을 비평하거나 그 일반적인 내용을 부인하는 입장을 취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모든 다른 신앙고백들처럼 사도신경도, 그것을 정통 신조의 기준으로 삼아 신앙고백 형식을 취하는 것은 찬성하지 않는다. 사도신경을 이단 판별의 첫 번째 기준으로 삼아 형제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교회들이 많은데 이전에, 오늘날 교회들이 쓰고 있는 사도신경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문제점이 무엇인지 진상과 허실을 바로 아는 일이 앞서야 하겠다. 먼저 사도신경이 제정된 역사적 배경과 그것이 지닌 신학적인 문제점을 밝힌 후에, 그것을 그리스도교의 공중 신앙고백으로 택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 밝히고자 한다.
사도들의 신경이 아닌 사도신경
첫째, 사도신경 곧 사도들의 신조(the Apostles' Creed)는 그 이름과는 달리 예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신조도 아니고, 사도들에 의하여 쓰여진 것도 아니다.² 그러므로 권위나 정통성에 있어서 십계명이나 주의 기도문과는 차원이 다르다. 필립 샤프(Phillp Schaff)의 말처럼 사도신경은, “일찌기 만들어 진 것 가운데 그렇게 짤막한 것으로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최선의 대중적인 요약”이기는 하지만, “이 신조가 매우 단순하고 간결해서....신학적인 지식이 증가된 단계를 위한 공식적인 교리의 기준이 되기에는 충분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³ 만약 사도신경이 각 시대의 정통신앙의 기준이 될만 했다면 그 후에 니케아 신조(325년)나 칼케돈 신조(451)가 다시 나와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종교개혁 이후 교파들이 저마다 신조를 만들어 30개도 넘는 신조가 양산되어 이전 것을 대신하거나 보강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초기의 신조들을 방편으로 현대 교회들의 일치된 정통성을 이룩하려는 시도의 부당함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적절한 평가가 있다.
“사도신경이나 니케아신조 등을 기초로 교파들을 연합시키려고 하는 것은 다 자란 성숙한 어른을 아이들 상태로 돌아가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⁴
사도신경의 역사적 배경
둘째, 염두에 깊이 두어야 할 일은 사도신경이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이다. 복음서에 기록된 신앙고백 (마16:16, 28:19)을 기초로 한 단편적인 신조가 2세기 초중반부터 존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의 사도신경의 모체가 된 것은 서기 400년경의 라틴어로 된 ‘로마교회 구 신조’ (the Old Roman Creed)임이 밝혀졌다.⁵ 그러나 오늘날 로마 가톨릭교회나 개신교회들이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이와 같은 ‘로마교회 구 신조’가 아니고, 그 이후 300여년 동안 서방의 여러 교회들이 사용하면서 자신들의 신조에 맞게 내용을 수식한 것으로서⁶ 서기 700년경 비로소 지금의 것과 같은 내용을 갖추게 된 개정 신조이다.⁷
서기 900년경이 되어서야 이 사도신경이 동방을 제외한 모든 교회들에서 공식적으로 쓰여졌다. 동방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사도신경을 결코 공식적인 신앙고백으로 채택한 바가 없었고, 그 대신 동서방교회가 함께 그 정통성을 인정하고 있는 니케아 신조(325년)를 택하여 썼다.⁸ 뒤에 설명되겠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사도신경 대신 니케아 신조를 신앙고백으로 택한 동방교회는 앞에 제시된 이단 판별기준에 의하면 처음부터 이단이 되고 만다. 논증에는 논리가 서야 하고 기준에는 보편성이 있어야 하겠다.
애매한 내용 -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셋째, 지금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에는 신학적으로 석연치 않은 찜찜한 내용이 첨가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앞서 말한 대로 지금의 사도신경은 서기 700년 이후 갈리아(프랑스) 지방에서 형성된 것을 당시의 로마교회가 최종적으로 수용한 것이다.⁹ 그런데 이 8세기 신조에는 그 전의 구 신조에는 없던 여러 마디의 수식어가 첨가되어, 신학적으로 그 의미를 애매하게 하고 있다. 첨가된 10여 가지 표현 가운데, 특히 신학적으로 주목이 되는 두세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음에 구 신조에는 없던 구절, 곧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he descended into hell)"라는 삽입구가 첨가되었다. 이러한 표현대로라면, 예수께서 무덤에 장사되어 계셨던 삼일 동안 “지옥”에 다녀오셨다는 희한한 이야기가 된다. 이 문구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치 않음으로써 이단이 된 아리우스파의 신조에 처음으로 나타났는데(359년), 점차로 퍼져나가다가 결국 8세기에 개정된 사도신경에 정식으로 삽입된 것이다.¹⁰
이곳의 “지옥(hell)”은 본래 헬라어의 “하데스”나 히브리어의 “스올”로서 죽은 후에는 모든 사람이 가게 되는 무덤 곧 음부이다(창37:35, 시16:10, 88:3 등). 국내에서 번역 출판된 사도신경 해설에도 이 말이 잘못 적용되었음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단어(지옥)는 악인들이 형벌 받는 곳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대 영어 지옥(hell)은 성경의 용어 ‘스올’이나 ‘하데스’와는 다른 뜻이며 또 사도신경에도 적당치 않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때에 그는 분명히 지옥으로 가시지 않았다.”¹¹
이러한 비성서적인 표현은 영혼불멸을 주장해 온 로마 가톨릭교회의 연옥설과 상통하고 있음을 교리사(敎理史)에서도 쉽사리 찾게 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 음부 곧 ‘하데스’를 일종의 연옥으로 보고, 예수께서 무덤에 머물러 계시던 삼 일 동안에 그의 영혼이 연옥의 한 부분인 림보(Limbus)에 내려가 구약시대의 의인의 영혼들을 구속했다는 기상천외한 주장에 이용하고 있다.¹² 이러한 비성서적인 표현은 개신교 신앙에도 큰 영향을 미쳐서, 문맥을 무시한 채 인용된 성경의 다른 표현들(벧전3:19, 벧후2:9, 눅16:23)과 어울려, 개신교의 연옥에 해당되는 중간상태라는 엉뚱한 교리를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했다.
이 중간상태란 사람이 죽은 후 부활 때까지 영혼이 임시로 머물러 있는 상태라고 하는데 성경에는 물론 칼빈주의 기본신조에도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칼빈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훼케마씨는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동원하여 이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어, 다수 그리스도인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¹³ 국내에서 번역되어 발간한 또 다른 ‘사도신경 강해’에도 이 사실이 아래와 같이 드러나 있다.
“주께서 옥에 내려가셨다”는 표현은 사도신경에 있어서 가장 많은 논쟁거리를 일으켰다. 사실상 어떤 신조에서는 이 표현을 임의대로 수정하든지 혹은 아예 그것을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이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과연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는가라는 것으로써,....“옥에 내려가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 세상의 죄악을 옥에 옮겨 놓으셨다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구원의 소식을 거지 나사로와 또는 뉘우친 강도와 같이 하나님을 믿다가 죽은 자들에게 가져다 준 것임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¹⁴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성경의 어느 곳, 어느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장사되어 계시던 3일간 거지 나사로와 회개한 강도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인가? 앞서의 영혼문제에서 언급한 대로, 또 하나의 개신교 연옥을 만들어내는 엄청난 신학적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¹⁵
이러한 혼란 때문에 미국의 감독교회는 1789년에 제정한 기도서에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표현을 아예 삭제하거나 다른 표현을 쓰게 했다가, 1892년에는 이를 철회하는 등 갈팡질팡하고 있다.¹⁶ 이러한 자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이를 영적인 의도로도 해석하지만 모두 궁색한 시도에 불과한 것으로, 역사적 배경과 본문의 의도에 빗나간 것이다.
오늘날 영어로 된 사도신경에는 거의 모두가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he descended into hell)”를 그대로 포함하고 있다. 우리 한국 교회들이 쓰고 있는 사도신경도 물론 8세기에 개정된 것이면서도, “지옥에 내려가셨다가”라는 문구는 이유도 밝히지 않고 삭제한 채 적당히 통용하고 있어 교리적인 혼란은 모면하고 있지만, 문서의 역사적인 정확성과 정직성은 무시하고 있는 셈이다. 신학적으로 깊이 재고해야 할 문제이다.
사연이 있는 표현 - “거룩한 공회”
넷째, 문제가 되는 또 다른 삽입구는 교회에 관한 것인데, 5세기의 ‘로마교회 구 신조에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거룩한 교회(the Holy Church)"를 믿사오며”로 되어 있다.¹⁷ 그러나 8세기 개정신조에는 거기에 “가톨릭”을 첨가하여, “거룩한 가톨릭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를 믿사오며”로 표현했다.¹⁸ “가톨릭”의 뜻은 본래 “보편적” 혹은 “세계적”이란 뜻이어서 일반적으로 쓸 경우에는 구태여 로마가톨릭교회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사도신경에 쓰여진 배경은 그 역사 때문에 전혀 다르다. 그 당시 이미 베드로의 후계자임을 공언하고 나선 로마교회의 감독이 전 세계교회의 머리로서 땅 위의 모든 교회를 대표하고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교회라는 주장을 강화하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실제로 말의 뉘앙스가 다르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당시에 서방의 로마교회와 지상권을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던 동방의 희랍교회가 자신을 “거룩하고, 정통적이며, 세계적(Catholic)인 사도직의 동방교회”로¹⁹ 부르고 있던 때라, 서방의 로마교회가 이 “가톨릭”이란 표현을 쓰기 시작하자 자기 이름을 도적맞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동방교회는 로마교회의 권위주의적인 독선을 드러낸 사도신경을 배척하고, 내용은 거의 비슷하면서도 동방교회의 영역에서 제정된 유서 깊은 니케아신조를 자신들의 신앙고백으로 고집한 이유를 알게 된다.²⁰ 아울러, 역사적인 뒷받침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교회가 사도신경을 굳이 사도들의 직접적인 작품이라고 무리하게 주장하는 이유도 깨닫게 된다.²¹
한국교회들이 쓰고 있는 사도신경에는 이 “거룩한 가톨릭교회”의 표현을 그저, “거룩한 공회(公會)”라고 했는데, 이 “공회”란 말은 본문의 뜻과는 거리가 먼 애매한 뜻이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난관을 넘기고 있다. 그러나 ‘한영 찬송가’에 함께 쓰여진 영문 사도신경에는 “the holy catholic church”라고 써서 그것이 8세기의 개정 신조임을 드러내고 있다.²²
의심스러운 말 - “성도가 교통하는 것”
다섯째, 또 다른 문제의 삽입구는, “성도가 교통하는 것”(the communion of saints)이다.²³ 이곳의 “교통”이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나 인간과의 교제를 나타낼 수 있는 헬라어의 “코이노니아”인데, 여기에는 그 문법적인 성격을 보아 성만찬을 통해 이루어지는 교제임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²⁴그런데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교제”를 이 세상에 살아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죽은 성도들에게까지 확대하여 성자숭배와 죽은 사람에게 기도하는 교리적 근거로 오용하고 있다.²⁵
물론 성경적ㅇ니 의미의 성자(聖者)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 모든 신자들인 “성도”(聖徒.saints)를 가리키지만(고전1:2), 로마 가톨릭의 성자는 죽은 지 오랜 세월이 경과한 뒤에야 특별심의를 거쳐 서품(敍品)되는 비성서적인 개념이다. 또한 죽은 자와 교통하는 일은 사단의 속임수로(삼상28:8~10), 성경에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사8:20, 신18:11~12)
사도신경을 가장 옹호하는 교회 - 로마 가톨릭교
이러한 교리적인 이유와 역사적 배경 때문에라도 사도신경을 가장 옹호하고 두둔하는 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임을 다음에 인용하는 교리해설서에서도 일별할 수 있다.
증언 가톨릭 “성 레오(St. Leo)는 아무도 이 [사도]신경에 대해 무지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성 막시무스는 이 [사도]신경에 무지한 영세받은 신자들은 그의 시대에 있어서 믿음의 최대의 적으로 간주했으며, 오늘날에는 자신들의 교리를 모르는 가톨릭 신자들을 이유 없이 믿음의 최대의 적들로 간주할 수 있다고 했다. 성 토마스는 이 신경에 대하여 고의로 무지하게 되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죄로 간주했다.”²⁶
해 설 한 마디로 사도신경에 무지하면, 신앙의 최대의 적, 곧 이단이 되고, 동시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최대의 적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다수의 교회들이 사도신경을 암기하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설정한 이단 판별의 기준은 중세적인 로마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힘있게 대변한 데 불과하다. 사도신경에 대한 충성 여부를 정통과 이단의 판별 기준으로 삼는다면 로마 가톨릭교회는 최선의 정통이 되는 것이다.
종교개혁을 통하여 확인된 개신교의 정신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이 신앙의 규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는 1546년 4월 6일, 개회중이던 트렌트 종교회의(1545~63) 제 4회기 동안, “성경과 전통은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용납되어야 한다”²⁷는 치명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참 신앙의 뿌리를 찾아 바르게 믿고 바르게 판단하는 그리스도인의 양식(良識)이 참으로 아쉽기만 하다. 이러한 비성서적인 기중을 가지고 형제 그리스도인을 이단으로 정죄해서야 되겠는가 자문해 보라.
결 론 서두에서 밝힌 대로 사도신경의 일반적인 내용을 부정하지 않으며 그것을 공중예배시의 신앙고백으로 사용하는 것을 정죄하는 입장을 취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제정한 모든 신조가 그렇듯이 사도신경 역시 그 역사적 배경이나 성경적인 빛으로 볼 때에 그것을 그렇게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사도신경 해설’을 저술한 도날드 콜의 솔직한 고백대로, “‘지옥에 내려가셨다가’와 같은 찜찜한 내용 때문에,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이 사실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 의심스러운 마음이 생긴다.”²⁸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공중예배의 신앙고백으로 택하기를 꺼리는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고백의 목적이 양심적으로 의심 없이 믿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도신경을 정통과 이단을 가리는 판별 기준으로 삼아 같은 그리스도인 형제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일은 명백히 성경의 원칙과 그리스도인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傳統]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마15:3)라고 말씀하신 우리 주님의 교훈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사도신경 사용 여부로 형제의 신앙을 비평하는 일은 성서 신앙에 철저히 어긋남을 일러두고 싶다.
판 단 사도 바울의 신조처럼, 성경은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하며,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교육하기에 유익”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딤후3:15~17)게 하는 유일한 정통 신조임을 재확인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자문자답해 보자.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 1991, 빛과 소리사,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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