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빌라도의 보고서 [성극대본] ☆
"십자가 옆에서
[말커스]가 말한 것처럼
나는 진실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본디오 빌라도
이 보고서(報告書)는
[메시아]시대에 법정에서 만들어진 공문서로서,
현재(現在)
[터어키]의 성(聖)
[소피아]사원(寺院)에 소장되어 있다.
50권(卷)으로 되어 있는 이 원고는
서기관(書記官)의 손으로 씌어졌는데,
각권이
2*4피트로 되어
있는 것의 전문(全文)을 옮긴 것이다.
[로마]史家
[발레루스 파테르쿠러스]의
주(註)에 의한 원명(原名)은
[예수의 체포와 심문
및 처형에 관하여 가이사에게 보낸
빌라도의 보고서(報告書)]로 되어 있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이 史家는 19세였으며,
그의 작품(作品)은 모두 소멸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史家 [프리시안]과
[타시투스]의글을 빌면,
그는 [캄파니아]출신으로
가이사와는 친한 벗이었고
16년 동안 로마군을 지휘하였으며,
그후 로마로 돌아가
[로마史]집필을 끝낸 후
집정관(執政官)의 직책에
오랫동안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史家[발레루스]
자신이 유대지방에서 만난
[나사렛]예수는 그가 만난 인물 중
가장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자신은
전 군대보다도
예수를 더 두려워했다고 기록하였다.
예수는
모든 종류의 병자들을
치료하였으며 죽은 자를 살렸고,
그가 결실 하지 못한
과일 나무를 저주하였을 때
그 나무는
즉시 뿌리까지시들어 말라죽었다고 기록하였다.
예수는
그의 놀라운 능력을
타인(他人)을 해치기 위하여는
결코 사용치 않았으며
항상 불쌍한 자들의
마음에 주의를 기울였다고 그는 기록하였다.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여론은 양분되었었다.
빈민층은
[로마]의 권력으로부터 구원해 낼
그들의 구원자로 여겨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지도층 계급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증오하고 시기하였으며
등뒤에서는 그를 저주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죽음만큼이나
두려워하면서도 그를 애굽의 마술사라고
빈정거렸다고 史家[발레루스]는 기록하였다.
본 보고서(報告書)의 내용은
[도날드 N.리드만]박사가
소정의 요금을 지불한 후
특별 허가를 얻어 읽고,
영어(英語)로 번역하여
[예루살렘]에서 간행(刊行)되고 있는
월간(月刊) {더 마운트 자이언 리포터
(The Mount Zion Reporter [시온山 報告書];
June 1974}에 게재한 것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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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라도 ☆
헤럴드 로우돈(HAROLD ROWDON)
1961년도에 가이사랴에서
본디어 빌라도의 이름이 새겨진
돌판이 하나 발견되었다.
이것은
그 불행한 사람의 생애와
치적에 관한 성경 이외의 몇
안되는 증거들 중 하나이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빌라도에 의해서
예수님이 처형된 사실을 언급하고 있고
또 유대의 저술가
요세푸스와
필로도 몇몇 사건들을 진술하고 있다.
이것을 떠나서는
우리가 단지 성경의 증거만 갖고 있을 뿐이다.
복음서 저작자들이
제시한 설명들 말고는
사도행전 3:13,4:27,13;28,
디모데전서 6:13에
그에 대한 간략한 언급들이 나온다.
빌라도는
A.D. 26년에 임명을 받은
유대의 총독으로서 분명히 군사적,
행정적인 분야에
경험이 있는 중류층의 로마인이었다.
총독(혹은 집정관)으로서
그는 특히 군사적, 재정직인
문제들에 있어서 광범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그는 대제사장들을
임명하고 성전의 기금을 관장하였다.
필로는 빌라도를 거칠고
악의가 있으며 잔인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그의 역사적인 저작물들 중 하나에서
빌라도가 부임하고 나서
곧 유대인들을 적대하였다고 지적한다.
그는 로마의 군부대가
그들이 연대기들을 예루살렘에
가지고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 旗들에는
로마 황제의 표상들이
그려져 있었으므로 유대인들은 격노하였다.
이는
그 우상적인 상징들로 말미암아
거룩한 성예루살렘이
더럽혀졌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빗발치는
비난에 져서 그 기들을 치우도록 명하였다.
필로에 의하면
다른 때에 유대인들이
빌라도가 그의 관저에 보관해둔 어떤
금방패들에 대해서 맹렬한 반대를 퍼부었다.
이번에는
빌라도가 그것들을 치우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디베료(Tiberius) 황제에게 진정하였고
황제는 그 방패들을
빌라도의 총독부가 있는
가이사랴로 옮기도록 명령하였다.
요세푸스는
또 빌라도가 25마일 떨어진 한 샘에서
예루살렘으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송수르를 건설하는데
드는 비용을 성전의 금고에서 꺼내어
쓸 계획을 세운 것이
화근이 된 어떤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빌라도는 폭력을 써서
집단적인 항의를 진압하였고
그 결과 많은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것은 누가복음 13:1에
언급된 사건일 가능성이 있다.
각 복음서는
예수께서 빌라도 앞에서
재판 받으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마 27:1-26,막15:1-15,
눅23:1-25,요18:28-19:16).
마가는
기본적인 줄거기를 기록해 두고 있다.
누가는
예수께서
헤롯에게로 보냄을 받으신 일(23:6-12)과
빌라도가 세번씩이나
예수님의 무죄를 증거한 사실
(23:4,14,22) 을 덧붙여 기록하고 있다.
마태는
빌라도 아내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였는지를
보여주고 (27:24하),
예수님의 무덤에 파숫군을
세운 사실까지도 알려준다(27:62,66)
재판 현장에 있었던
요한은
더욱 상세하게 그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었던
요한은 더욱 상세하게
그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다.
빌라도의 마지막 대실수는
회막의 성물들이 그곳에 감취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리심산에 모여든 수 많은
사마리아인들을 체포한 것이었다.
주모자들 중 몇몇이 처형되었다.
한 사마리아인의 항의에 접한
수리아 총독이자
빌라도의 상관인 비텔리우스(Vitellius)는
그 어설픈 총독(빌라도)를 명하여 황제에게
그가 저지른 사건의 전말을 직접 보고하게 했다.
당시의 황제 디베료(Tiberius)는
빌라도가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우리는
그 일의 결과를 모르나
A.D. 4세기의 기독교 역사가인
유세비우스(Eusebius)는
빌라도자 자살하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 밖에도
빌라도의 몸에 관한
믿을 수 없는 전승들이 여럿 있다.
빌라도의
몸에 관한 기록들이라고 주장된
수 많은 빌라도의 행적들이
초기 기독교 시대에 여기 저기서 나타났다.
그것들은 기독교의 품위를
땅에 떨어뜨리기 위해서 제작된 위조문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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