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모세오경

2. 하나님께서는 왜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나?

은바리라이프 2008. 1. 28. 15:22

2. 하나님께서는 왜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나?

창세기 4장에 하나님께 대한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나오고 하나님께서 아벨의 것은 열납하시고(받으시고),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본 말씀이 나오는 창세기 4장 1~8절까지의 말씀을 자세히보면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받지 않으시는 기준은 제물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그것을 바치는 사람의 마음과 태도입니다.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은 제물만이 아니라, 아벨과 그 제물, 가인과 그 제물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받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제물을 바치는 가인의 마음과 태도를 보시고(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므로),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또한 제물만 놓고 생각하더라도신약성경 히브리서 11장 4절에 보면 아벨의 제물이 가인의 것보다 훨씬 정성이 있었고 좋았다는 것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  이것을 사이비, 이단, 혹은 성경을 왜곡하여 억지로 해석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는 피의 제사를 원하셨는데, 가인이 피의 제사가 아닌  땅의 소산물(곡물)을 바쳤기 때문에 받지 않으셨다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4장 말씀에 보면 이미 제물을 드리기에 앞서 가인과 아벨이 어떤 일에 종사하고 있는지를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즉,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습니다. 

 

농사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의 소산물이 아닌 다른 동물이나, 양 또는 그 피를 제물로 요구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결코 아니십니다.


또한, 살인은 가인의 죄의 속성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지 그것을 하나님께서 방종하시거나, 거기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로보트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하나하나의 인격을 지닌 귀중한 인격체로 창조하시고, 우리 모두에게 귀한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가인 스스로가 악한 마음에서 살인이라는 엄청난 죄로 이어간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것을 방종하시거나 개입하신 것이 아닙니다.(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먹지말라고 말씀하신 맥락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어지는 같은 창세기 4장 5~7절까지에 보면 가인이 어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잘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 창세기 4장 5~7절 말씀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아래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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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장 1~8절까지에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가인과 아벨의 신앙
 
1. 가인과 아벨의 신앙(3,4)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과 아벨은 그 가족의 제사장인 아담에게 각각 `여호와께 드릴 제물`을 가져왔다. 하나님은 이렇게 해서 약속에 대한 아담의 믿음과 치료책으로 주신 법에 대한 그의 복종을 시험하셨다. 하나님은 이렇게 해서 다시 하늘과 땅 사이에 교통이 있게 하려고 하셨고 장차 올 좋은 것들의 그림자를 주려고 하셨다.
 
여기서 다음의 네 가지 점을 생각해 보자.
 
첫째, 하나님께 드리는 경건한 예배란 전혀 새로운 고안물이 아니라 옛부터 있어 온 제도이다. 그것은 `태초부터 있는`(요일 1:1)것이며 `옛적의 선한 길`(렘 6:16)이다.
 
둘째, 자녀들이 어릴 때 그들에게 경건한 예배를 잘 가르치고 일찍부터 훈련시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래야 그들이 장성하여 스스로 행동하게 되었을 때는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셨으니 우리는 가진 바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넷째, 위선자들과 악을 행하는 자들도 외형적인 예배에 있어서는 가장 훌륭한 하나님의 백성들로 나타내 보일 수 있다. 가인도 아벨과 함께 제물을 가져왔다. 아니, 마치 가인이 아벨보다 먼저 제물을 가져온 것처럼 가인의 제물이 앞에 언급되었다. 바리새인이나 세리나 모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었다(눅 18:10).

2. 그들 신앙의 각기 다른 결과(4,5)
신앙의 모든 행위 가운데서 목표 삼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열납 하심이다. 만일 우리가 이 목표를 이룬다면 참된 예배가 이루어진 것이며 이것을 놓친다면 우리는 헛되이 경배하게 되는 셈이다(고후 5:9).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을 열납 하셨으며` 아마도 하늘에서 불을 내리심으로써 그 증거를 보여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가인과 그 제물을 열납 하지 아니하셨다`.

(1) 그들 사이에는 인격의 차이가 있었다. 가인은 악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제물은 `헛된 제물`이었다(사 1:13). 하나님은 가인 자신을 열납 하지 않으셨으며 따라서 그의 제물도 열납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아벨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의인 아벨`이라고 불린다(마 23:35). 그의 마음은 곧고 그의 생활은 경건하였다. 하나님은 그를 거룩한 사람으로서 열납 하셨고 그러므로 그의 제물을 거룩한 제물로서 열납 하셨다.

(2) 그들이 가져온 제물에 차이가 있었다. 성경에는 아벨의 것이 가인의 것보다 `더 나은 제사`(히 11:4)라고 명백히 언급되었다. 아벨의 것은 제사의 성격에서나 제물의 질에 있어서 더 나았다. 가인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인 `땅의 소산`을, 곧 자기에게 필요 없는 것을 가져왔다. 그러나 아벨은 제물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신중했다. 아벨은 절름발이나 깡마른 것이나 찌꺼기를 제물로 선택하지 않고 `양의 첫 새끼`, 곧 그에게 있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으로 그리고 `그 기름`, 곧 최고의 것들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으로 제물을 삼았다.

(3) 무엇보다 중대한 차이는 아벨은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고 가인은 믿음으로 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의거한 원리 자체에 차이가 있었다. 아벨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법칙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목표로 삼고 제물을 드렸다. 그러나 가인은 단지 교제를 위해서 하는 정도로만 했다. 곧 자기 자신의 신용을 보존키 위하여서만 드렸으며 믿음으로 드린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것이 그에게 죄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아벨은 회개의 마음을 가진 신앙인이었다. 그러나 가인은 겸손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만을 신뢰하였다.
 
3.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와 자신의 제사에 차별을 두신 데 대한 가인의 불만(5)
가인은 이에 대해 몹시 분을 내었고 그것이 이내 그의 얼굴에 나타났다.
 
첫째, 이러한 그의 분노는 하나님께 대한 그의 적대감을 나타낸다. 명백히 그는 자신의 불신앙과 위선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지 아니한 것이라고 자신을 나무라고 통분해 해야 했었다. 우리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듣는 비난들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우리가 겸손하지 못한 마음을 가졌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둘째, 또한 그것은 자기 동생에 대한 그의 시기심을 나타낸다. 그는 자기 동생을 원수로 보고 증오심을 품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에 무가치한 자들은 흔히 하나님의 은총으로 귀하게 된 자들에 대해 분을 품는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고자 하는 잔들도 막음`으로써(눅 11:52)가인의 이러한 길을 걸었다. 시기심이란 대체로 그 자체에 뼈를 썩게 하는 형벌이 따르는 죄이다.

가인의 분노와 하나님의 책망
여기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그의 분노와 불평이 어리석고 죄된 행위임을 깨닫게 하고 그로 다시 선한 성품으로 돌아오게 하여 그 이상의 악을 방지할 수 있도록 그와 변론하신다. 이와 같이 탕자의 아버지도 맏아들과 그들이 당면한 문제를 변론하였다(눅 15:28 이하).

(1) 하나님은 가인 스스로 자신의 불평의 동기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말씀하신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6절).
 
여기서 다음 두 가지 점을 유의하자.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적인 격정과 불만을 주목하고 계시다.
둘째, 우리는 스스로 이렇게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 내가 분해 하는가? 내가 분을 내는데 실제적이고 바르며 적당한 이유가 있는가? 내가 어찌하여 그렇게 급히 성을 내는가?"

(2) 하나님은 다시 가인의 마음을 바로잡으시기 위해 여기서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그에게 명백히 밝히셨다.
1)그가 하나님께 화를 내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①하나님은 가인 앞에 생명과 축복을 제시하신다.  ㉠"만일 네가 네 동생이 한 것처럼 선을 행했다면 너의 제물도 네 동생의 것처럼 틀림없이 열납되었을 것이다." ㉡"이제 만일 네가 선을 행한다면 다시 말해 네가 네 죄를 회개하고 네 마음과 생활을 고치며 보다 나은 제사를 드린다면 그것은 열납될 것이고 너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며 너의 위로와 명예가 회복되고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이 얼마나 일찍부터 전파되었는가를 보게 되고 그 복음의 은혜가 죄인들 중의 괴수인 한 사람에게까지 제공되었음을 보게 된다.

②하나님은 가인 앞에 죽음과 저주를 놓으신다. "만일 네가 선을 행하려 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네가 계속해서 분을 품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해지기 보다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마음이 강퍅해진다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죄를 더하게 된다는 뜻이다. 즉 "분이 네 마음속에 있으니 머지않아 살인을 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죄의 형벌을 가져오리라는 뜻이다.
 
죄와 형벌은 아주 가까운 동계어다. 그래서 히브리어에서는 같은 어휘로 두 가지 듯을 모두 표현하고 있다. 죄가 집안에 숨어 있으면 저주는 죄수를 발견하기만 하면 곧 체포할 준비가 되어 있는 형사처럼 문에서 기다린다. "네가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와 `죄를 위한 희생`을 모두 의미한다. 성경은, 대속 제물이신 그리스도께서 `문 밖에 서 계시다`고 말한다(계3:20). 이 모든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가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화를 내야 했지 하나님께 대하여 화를 낼 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2)그가 자기 동생에게 화를 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의 소원은 네게 달려 있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너를 형으로 존중할 것이고 너는 장로로서 이전처럼 그를 다스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열납하셨다고 해서 장자 상속권을 그에게로 옮겨 주신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으셨고 아벨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가인이 그렇게 화를 내야만 했는가?

출처 : 성경말씀 + 주석성경 + 성경해석학 + 헨리 모리스 박사의 "Bible has the answer"자료 +직접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