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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와 문화읽기

은바리라이프 2007. 11. 24. 20:18

서태지와 문화읽기

 

승현민

서울대학교 총기독학생회 간사

 

1. (): X세대론 혹은 신세대론 잠깐보기

1994 6 8일자 뉴스위크지는 머릿기사에서 "Generation X: X세대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탄식과 질문을 전세계에 던졌었다. 물론 그것은 정확하게 말한다면 미국인들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자신들의 분석대로 베이비붐 세대 이후에 탄생한 운좋은 혜택의 세대가 일정한 동질성을 지니고 있는 하나의 '세대' 덩어리일거라는 추측을 믿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미국 매스컴과 문화를 지배하는 영화와 TV 제치고 젊은 세대(이들이 혹시 X세대가 아닐까?) 모조리 사로잡아 버린 MTV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놀랍게도 다른 세대들이 X세대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계층의 10분의 1만이 자신들을 X세대라고 불러도 좋다고 허용했다는 것이다. 말은 결국 X세대란 사회학적인 명칭이거나 언론이 임시로 붙힌 통칭이라고 있다는 뜻이다. 적어도 자신들이 그렇게 규정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X세대'라는 용어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화두(話頭) 하나임에 틀림없는 '신세대(新世代)' 혼용되고 있다. 단정적으로 어떤 화장품 광고에서 용어를 사용하면서 시작되었다고도 하고 거창하게는 동구권의 몰락과 함께 찾아온 세계관의 공백을 통해 나타난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세대를 지칭한다고도 한다. 어떤이는 소위 포스트모던적인 결과물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단지 '다음 세대'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X세대건 신세대건 이들은 이미 '여기' '지금'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지금 전통적인 가르침이나 조언없이 전격적으로 문화를 형성하고 있으며 기성세대로 들어오고 있다. 이에 대한 수많은 설명과 해명이 있었지만 이들이 갖는 문화적 함의와 함의의 배후를 정확히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본래 '신세대와 기독교문화'라는 다소 거창하고 무모한 제목의 평론을 준비하려 했으나 준비의 미흡으로 인해 신세대의 특징을 드러내었던 가지의 대중문화적 사건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먼저 시도하려 한다. 사탄이 대중문화를 선택했건 안했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대중문화의 거대한 물줄기에서 기이하게 불거져 나왔던, 그러나 어떤 면에서 사실은 예견되었던 놀라운 사건에 대한 일종의 변명과 변증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기성세대는 놀라운 돌출을 사정없이,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예상했던 대로, 잔인하게 짓밟았기 때문이다. 글에서는 짓밟기의 과정과 결과를 살펴보고 그래도 결국은 짓밟히지 않는 대중문화의 저변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또한 과정이 가지는 문화적 도약(Warp) 심각성을 상기하고자 한다.

2. 신세대의 전도사 '서태지와 아이들'의 도래

1992 5 1집앨범 ' 알아요'

1993 6 2집앨범 '하여가'

1994 8 3집앨범 '발해를 꿈꾸며'

1994 8 13-15 3 앨범 발매기념 공연

90년대성이라는 것이 대중문화의 범주에서만 일컬어진다면 그것을 주도한 대중문화인은 단연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명의 록가수들이다. 이들은 거의 순간에 전국민의 입에서 ' 알아요!'라는 흥얼거림이 끊어지지 않게 했고 야구모자와 푸대자루같은 반바지, 그리고 손을 앞으로 구호외치듯이 휘젓는 동작을 유행시켰다. 이른바 '(rap)'이라는 새로운 음악장르와 함께.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거리를 누비기 시작했는데 이들을 가리켜 신세대라고 불러도 그리 차별성을 지닌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1년후 홀연히 TV 떠나버려 방송과 언론관계자들의 괘씸죄를 처음으로 유발시켰던 그들은 갑자기 태평소를 요란하게 휘날리면서 구세대의 구강구조로는 도저히 따라 부를 없는 노래로 '하여가(何如歌)' 불러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훨씬 많은 신세대들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도 하여가의 기관총알같은 가사를 넉넉하게 따라 불렀다. 200 장이라는 앨범 판매고 역시 구세대의 주판으로는 계산할 없는 숫자였다.

하지만 이들이 진정으로 대중문화의 지각을 뚫고 밖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경악시킨 것은 작년 8월에 시작된 3 앨범의 태풍이었다. 그들은 불경하게도 수많은 진보적인 사람들이 총력을 다해 돌파하려 애쓰는 통일이라는 화두를 자신들의 제목으로 삼았다. 그것도 해방절인 8 15일을 전후하여 전격적으로 발표하면서 충격적인 콘서트를 통해 세상에 선포했다. 태극기의 건곤감리를 각기 하얀 티셔츠에 새긴 댄서들이 거대한 태극기를 배경으로 춤추는 가운데 이들은 분단의 아픔을 노래하고 통일하자고 주장한다. 앞에는 수만 명의 청소년들이 손을 흔들며 공감을 표시한다. 물론 순간에 최루탄이 터지고 백골단이 돌격해 들어와야 하겠지만 신기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KBS 9 뉴스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3 앨범이 100 장이 넘게 팔리고 있다는 보도를 메인 앵커가 전했다.

이것으로 끝났다면 우리는 매우 훌륭하고 실력있는 음악가가 다시 히트를 쳤구나 하는 생각으로 마무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둘러싼 화제는 끊어지지 않았다. 진보진영에서는 이들의 급작스런 등장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당황스런 논의가 진행되었으며 기독교권에서는 사탄적 메시지 전파설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반향들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결국 가지 현상이 '서태지와 아이들'을 둘러싼 문화적 논쟁의 축이라고 있으며 음악적인 관점에서의 논의는 생략하기로 한다. 다음은 가지 현상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다.

2-1. 진보진영에서의 '서태지' 보기

월간지 {} 1994 9월호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한 특집을 다루었다. 주간지 {한겨레21} 인터뷰와 특집을 실었으며 1994 겨울에 창간된 계간 문화평론지 {REVIEW} 서태지의 사진을 표지로 삼았다. 그밖에 일간지와 대중문화잡지에서 거의 예외없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충격적인 변신에 대해서 기사를 실었다. 대중문화평론가 강헌과의 대담을 실은 {REVIEW} 서태지를 '주류질서의 전복자'라고 표현하면서 진정한 '(Rock)정신'의 실현이 가져온 자연스런 결과물이라고 본다. 전통적 가치판단에 의문을 제기하는 록정신의 발현이 현재 우리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주류질서'인 반통일적 반교육적 사회에 대한 반란을 기획했다는 것이다. {한겨레21}에서의 중립적인 평론 역시 궤를 달리하지 않는다. '무대를 뛰어넘은 신세대 전위' '탈정치 신세대 겨냥한 정치적 주제' '끝없이 도전하는 혁명아' 등의 파격적인 제목들로 장식했다. 도무지 대중문화 혹은 대중문화에 종사하는 이들에 대해서 시선을 주지 않았던 진보진영의 매체들이 일제히 어린 대중가수에 대해서 주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조심스럽지만 최대의 찬사로 그를 격려하고 일종의 전향자 내지는 양심선언을 사람처럼 대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호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2. 서태지의 사탄숭배설

제목부터 이미 불길한 예감을 내포하고 있지만 과정은 표면적으로는 기독교 문화비평을 내세우는 그룹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낮은 울타리}라는 월간 평론지를 중심으로 신상언 등이 주역들이다. 그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3 앨범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마자 대중강연과 자신들의 평론공간을 통해 맹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들은 3집앨범의 테잎을 뒤집어 듣는 방법을 통해 이미 서태지와 아이들이 2집의 '하여가'에서부터 소위 '백워드마스킹(Backward Masking)'기법으로 사탄을 찬양하는 메시지를 유포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는 3 앨범 발매부터 테잎 뒤집어 듣기가 청소년들 사이에서 대유행하고 일제히 '피가 모자라'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무렵 KBS '연예가중계'에서는 실제로 과정을 보여주면서 정말로 그런 소리가 들린다고 단정했다. PC통신매체에서도 온통 문제로 뒤덮혀 버렸는데 하이텔과 천리안에서 이루어진 토론은 비슷한 제목을 모은다면 수천 회가 넘는다. 과정에서 대부분 10 후반이거나 20 초반인 통신토론 참가자들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1) 서태지는 사탄이다 2) 서태지는 사탄이 아니다 3) 서태지가 사탄이면 어떤가 4) 사탄설 자체가 수상하다. 실제로 토론 참가자 비율로 본다면 2) 3) 압도적으로 많았고 4) 논리적으로 전개하려 애쓴 발언도 상당히 많았다. 물론 3) 근본적으로 4) 논리를 수용하면서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했을 대체적으로 발언자들의 의견은 그러한 논란에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에 대해서 의심을 감추지 않으면서 '서태지 사탄숭배설'을 단호하게 배격한 것으로 판단된다. 게다가 그들은 연이어 벌어지는 토론들에서 이러한 과정이 KBS 의도적인 서태지 깎아내리기와 맞물려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신세대들은 자신들의 우상(?) 손상을 입는 상황을 좌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3. 대중의 우상 혹은 아이콘(Icon)

중세 유럽 교회를 격동시켰던 논쟁의 주제 '아이콘'은 오늘날 거의 가지의 의미만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은 단연 컴퓨터 용어이다. 컴퓨터를 작동시키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가지는 일정한 영역을 알기 쉽게 표현한 일종의 상징(Symbol)이면서 언어이다. 그것은 복잡한 수식이나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기계언어가 아니라 단순히 눈으로 보아서(Visual) 의도를 알아차릴 있는 기호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우리가 외국에 가더라도 화장실을 암시하는 상징을 찾아낼 있는 것처럼 아이콘은 명료한 의미를 집약적이고도 단순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현대의 아이콘은 우상이 아니다. 아이콘에 익숙한 현대인은 감탄하거나 숭배하지 않고 그저 그것이 뜻하는 바를 파악하려 뿐이다.

컴퓨터가 사각형의 시커먼 우주공간에 있는 줄의 영어 명령어로 온갖 종류의 계산과 타자치기를 가능하게 하던 시대를 지나 '윈도우'라는 별천지의 창문을 열어젖히고 있는 것처럼, 지금은 윈도우의 모든 것을 작동시키는 새로운 에스페란토어인 아이콘이 컴퓨터의 모든 영역을 표현할 뿐이다. 단지 마우스로 아이콘을 누르기만 하면 아이콘이 상징하고 있던 내용이 즉각 실행된다. 고민하거나 장황한 프로그래밍 과정을 거치거나 아니면 컴퓨터의 본령인 집적된 자료구조에 접근하는 경로를 따로 연구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그저 하나의 상품에 불과한 '윈도우'라는 소프트웨어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세계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소프트웨어들이 구현하려고 하고 구현하고 있는 세계이다. 그리고 신세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사용자 위주'의 세계이다. 다른 어떤 존재나 없는 권위와 권력이 지정한 방법이 아니면 진리에 접근할 없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 사용자 개인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방법으로 진리를 찾아 있는 자유의 세계이다. 상징이 바로 아이콘이며 그래픽 환경이다.

한편 아이콘은 사회적인 상징이다. 오늘날의 아이콘은 사회 전반에 흩어져 있는 각종 기호와 상징들이면서 누구나 이해할 있고 쉽게 받아들이는 문화의 내용이다. 중에서도 가장 극명하게 상징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존재는 대중의 우상이라 불리우는 대중공간의 스타들이다. 그러면서도 대중의 우상은 이제 과거처럼 멍청한 자들의(Idol) 스타거나 멍청한 사람들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향한 자유롭고 손쉬운 '창문-윈도우'이다. 아이콘이다. 그래서 미니스커트와 생맥주와 통기타가 젊음의 아이콘이었던 것처럼, 야구모자, 반바지, 그리고 춤과 랩은 서태지가 내세운 아이콘이었다. 이러한 자유스러운 복장과 자연스럽고 파격적인 몸짓이야말로 알듯말듯 신세대들이 찾던 행동양식이었고 간섭받지 않는 문화였다(물론 이런 옷차림의 영역만이 신세대 문화의 전부는 결코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폭발적인 지지와 동의를 '서태지와 아이들'에게 보낸다. 그러나 대중의 우상이라는 호칭에 짓눌려 자신이 예수보다도 유명하다는 쓸데없는 소리를 내뱉었다가 곤혹을 치른 비틀즈와는 달리, 이들은 대중 앞에 그렇게 카리스마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TV 같은 일상적이고 위력적인 매체를 채택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콘서트를 압도적으로 선호하지도 않는다.

요컨대 지배하거나 숭배받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거나 지배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서태지의 지지자들을 이루는 세대들에게는 전근대적인, 봉건적인 일이다. 포스트모던은 커녕 현대적이지도 않다. 대신에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로 여러 가지의 아이콘들을 사용한다. 이른바 오렌지와 낑깡도 일종의 아이콘이며 배꼽이 드러나는 셔츠도 아이콘이다. 1집의 폭풍 이후에 국민이 휘저었던 손동작도 아이콘이었고 상표가 아직 붙어있는 모자와 반바지도 아이콘이었다. 아이콘을 클릭(click)하는 순간 사용자는 즉시 아이콘들이 만들어 내는 신세대의 문화에 가입되며 그곳은 앨리스가 도착한 이상한 나라가 아니라 신천지이다. 아이콘을 수용하는 일이야말로 친근하지만 설명받지 못했던 세계, 이미 존재하지만 부정당했던 현실을 인정받는 가입 절차였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피할 없이 그들 자신이 바로 아이콘이 되는 길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클릭할 있도록.

대중의 우상(Idol Star)이라는 기묘한 설명 범주에 넣어 이들을 묘사하려 한다면 아마도 이들은 단연 문화적인 우상이라고 있다. 많은 배우와 가수와 운동선수들이 우상 명단에 등록되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사실상 명단을 작성하는 실무자는 TV인데, 서태지는 TV와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상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TV라는 매체가 본격적으로 10대들의 아우성에 종속되기 시작한(사실은 종속당한 것이 아니라 어느 면에서 10대들을 조종하고 있는 셈이지만) 90년대 이후 스크린을 명멸해간 수많은 스타들은 아무도 그들처럼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지 못했다. 수많았던 스타들은 그저 인기많았던 배우와 가수와 운동선수 자체일 뿐이었다. 그러나 서태지는 가수라는 본연의(?) 직책에 대한 인기와 함께 90년대 신세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며 대표선수가 되었다. 우상이 아니라 아이콘이 것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2 앨범을 발표했던 1993년에, 국가보안법에 의해 구속되면서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어이없는 비난의 화살을 매스컴으로부터 집중적으로 맞았던 어떤 그룹이 펴낸 책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그의 음악은 신선한 생물처럼 구시대의 오물을 쓸어내고 시간과 공간의 교차점에서 형성된 새로운 소우주다. 그는 인간의 아름다움과 진실, 열정과 파워, 에너지와 스피드, 자유와 사랑을 노래하는 시인이며 역사가이며 철학자이다. 또한 그는 인간 최고의 과학기술을 훌륭히 다루고 새로운 창조를 이룩하는 과학자이다. 그는 기성세대의 상식, 도덕, 윤리, , 제도, 관습, 인습, 규칙, 약속을 파괴하는 아방가르드이며, 우아함, 환상, 과거, 향수, 집착, 명예, 치사함, 불신, 공포, 절망, 안주, 패배와 결별하고 자유로운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질주하는 혁명가이다....

이는 신세대가 있는 최대(the best) 찬사라고 있다. 만일 이들이 3 앨범 발매 이후에 다시 발언할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대체 어떤 비교급(the more best) 찬사가 가능할지 궁금할 정도이다. 신세대는 그러나 그들의 내면을 대언하고 미래의 불을 밝여주는 고마운 서태지에 대해서라면 다시 어떤 찬사라도 창조할 있다. 실제로 PC통신을 통해 진행된 3 앨범 발매 이후의 토론들을 본다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단단한 어떤 지반(地盤) 이미 그들의 '공화국'에 형성되어 있음을 있다. 그것은 우상이 나무의 재질이거나 돌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파괴되는 초급의 신화도 아니고 상품자본주의의 촉수에 감염된 새로운 형태의 소비문화가 초래한 현상도 아니다. 사실 서태지를 지지하는 세대들은 오히려 매우 담담하다. 콘서트에서 보이는 괴성과 열광적인 환성은 일종의 스포츠이고 배설일 결코 그들의 전부가 아니다. 서태지가 우상이라면 그들은 노예지만 새로운 세계를 열고 있는 신세대들은 서태지를 단지 성능좋고 매력있는 아이콘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으며 언제나 그들 자신이 서태지의 주인인 것이다.

4. 반격의 전략

우리 나라의 근현대사에서 대중문화 영역에서 이토록 전국민의 관심을 끌었던 사건은 없었다. 그리고 이토록 격렬한 토론과 논쟁을 유발시켰던 경우도 없었을 것이다. MBC '인간시대'에서 아직 유명해지지 않았던 이들 '서태지와 아이들'을 다룬 이래 권위를 자랑하는 공영방송 KBS에서 9 뉴스 정규방송을 통해 그들 앨범 발매소식과 100 돌파 소식을 전한 것은 그것 자체로 거의 경악스러운 뉴스였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이러한 호의는 오래 가지 않았다.

KBS 그후 다시 한번 복장을 단정하게 정돈하여 얌전한 모습으로 출연할 것을 요구한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출연을 금지시켰으며 비슷한 시기에 수차의 사탄소동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를 간접적으로 비난하는 듯한 '추적60' 등은 모두 3 앨범 발매 직후부터 최근까지 벌어진 일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탄소동은 KBS 주장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문화운동을 주창하는 그룹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들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서태지와 아이들', 그리고 그들을 잉태한 음악 자체가 사탄의 조종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이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교회에서는 목사들이 공공연하게 서태지를 공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KBS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마치 '그것이 알고 싶다'와 같은 방식으로 추적하기 보다는 현실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변화들로 파악할 있을 것같다. 경악스런 앨범 예약 숫자에도 불구하고 서태지의 3 앨범은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히려 같은 시기에 경쟁자 신승훈의 노래와 김건모의 3 앨범은 날개돋힌 팔려 나갔다. 피부로 느끼는 유행도 별로 타지 못한 것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들의 행보가 자못 의도적인 어떤 힘에 의해 눌리고 있다는 징후를 발견한 것이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러한 결과가 서태지로 대표되는 신세대의 도래에 대한 일종의 반격이며 반격의 전략으로써 신세대의 교두보를 파괴하려는 공격이라면, 희생물이 가장 강력한 신세대의 기수인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판단 또한 가능할 지도 모른다. 실제로 작년에 조선일보와 MBC 야심적으로 추진했던 환경캠페인 콘서트인 '내일은 늦으리'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은 공연에 참가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송화면에는 나타나지 못했다. 물론 머리의 김종서도, 메탈 그룹 크래쉬의 열정적인 연주도 같은 신세였다. 단지 사랑과 이별이라는 영원한 기성세대의 주제를 열창하는 다른 뮤지션들의 모습만이 화면 가득히 반복적으로 방영되었다.

그렇다면 반격의 지휘자는 누구일까? 그리고 반격은 어떤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단순히 일개 대중음악인을 사장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6,70년대 나타난 한국의 자생적 음악의 싹을 완전히 멸절시킨 대마초 사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많다. 이와 비슷한 시도가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 3인에 대한 병역 불법기피설이었다고 하겠다. 흐지부지되고 강력한 해명이 있었지만 매스컴에서 진행된 무책임한 질타는 그들에게 매우 효과적인 타격을 가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현재 이러한 일련의 시련으로 말미암아 지속적인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는 느낌이 강하다. 이들은 공격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격은 어떤 파장으로 응축된 스펙트럼인가? 안기부나 서울 시경의 형사들이 그들에게 수갑을 채웠는가? 아니면 스캔들의 반복적 확대재생산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매장되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먼저 공격의 파장을 분석하는데서 나온다. 첫번째로 앞서 지적한 가지 첫번째, 진보 진영에서 서태지를 바라보는 우호적인 시각이야말로 서태지를 공격하는 세력이 반격을 시작한 가장 이유이다. 대체 고작 대중가수에 불과한 젊은 녀석이 건방지게 통일을 노래한다는 사실이 못마땅했을 것이었다. 그것도 가장 민감한 8 15일을 택해 '발해를 꿈꾸며' 노래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통일 논의를 아무에게도 나누어 없다는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는 당국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 마땅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가공할 전달력을 지닌 TV 내어준다면 수백만 명의 추종자들은 통일이 당국의 독점 행사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문제라는 특급 비밀을 모두 알게 것이었다. TV 내어 준다는 것은 테러리스트에게 폭탄을 쥐어주는 꼴이 것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이단자들은 TV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가끔 예외적으로 방영될 수는 있으나 사랑을 노래하는 다른 노래들보다 결코 우위에 있어서는 안되었다. '통일'이라는 주제는 결코 일상적인 주제여서도 안되고 청소년들이 흥얼거리는 노래 가사에 담겨 있어서도 안되었다. 절대로 비신화화되어서는 안되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오직 대학입시와 살인적 경쟁만이 가득해야 학교 교실에 '교실 이데아(Idea)' 존재한다는 사실이 폭로되면 끝장이었다. 교육의 모순이 폭로되고 모두들 대학에 가기 위한 획일화된 공부보다는 자신의 삶과 인간 존재에 대해서 많이 사색하기 시작한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것이었다. 청소년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무언가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일순간에 교육현장은 '통제' 불능의 도가니가 것이었다. 그러므로 '교실 이데아'는 불순하고 따라서 가급적이면 불리워지지 않아야 했다. 아니 그런 불순한 가사와 시끄럽기 짝이 없는 음악을 담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악마적인 요소를 함유하고 있을 것이었다. 학교 공부를 '됐어! 됐어!'하고 외치는 일은 분명 사탄의 외침이 아닌가! 그러니 거꾸로 들어본다면 가장 확실한 사탄의 메시지가 들릴 것이다. 틀림없이 메탈 음악은 사탄이 가장 최근에 선택한 대중 문화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뿐인가. 경건한 서양 악기들을 놔두고 감히 무당의 악기인 태평소를 사용하다니 저속하기 짝이 없다. 이것도 없이 사탄의 냄새가 묻어 있다. 뒤집어 들어보자! 그리고 사탄이요, 악마요, 우상인 아이콘을 파괴하자!

5. (): 아이콘 파괴의 결과는?

음악 연주의 결과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볼륨이 높다고 해서 악마적이라거나 옷차림과 자기선전의 방식이 기괴하다고 해서 사탄의 하수인이라거나, 아니면 저항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해서 거세된다면 우리에게 남겨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 트롯트와 사랑 타령, 그리고 찬송가와 군가 밖에 없다. 지금도 모든 음반에는 의무적으로 곡씩 소위 '건전가요'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가. 그리고 슬프게도 이런 종류의 결과는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다. 서구화의 물결 속에서 파괴당했던 우리 문화의 본령이 판소리라는 아이콘의 기적적인 생존과 영화라는 신세대의 아이콘의 만남을 통해 두터운 지각을 뚫고 미약한 싹이나마 돋았던 것처럼, 대중의 우상이 아닌 문화의 아이콘들이 각기 자기의 방식으로 살아남아 철저하게 인간을 위한 기능을 수행해 준다면 신세대는 더이상 형용불가의 존재들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가 잃어버렸던 인간의 자유로운 영혼을 되찾게 해줄 감람 잎사귀를 물고 오는 비둘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설사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배는 언젠가 마른 땅에 닿을 것이며 마른 땅은 새로운 세계 자유의 왕국이 것이다.

아이콘이 우상이라고 우기는 비현실(not Modern)적인 주장들은 어쩌면 가장 현실(Modern)적이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현실이야말로 언제나 기존 질서에 반하는 모든 것들을 악마이면서 우상이라고 경고하고 파괴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상이기에 사탄이요, 사탄이라면 우리의 적일 수밖에 없다는 외통수는 더욱 현실 이전(pre-Modern) 판단이 된다. 갑각류같은 껍질조차 아직 꿰뚫지 못한 중세의 나라이다. 그리고 그렇게 파괴당하는 우상아닌 우상들이 화형당하는 의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아이콘을 사용할 편리한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미래의 세계(after-Modern; post-modern(?)) 나아가지 못할 뿐더러 잘못된 현실마저 바로잡지 못하게 것이다. 결과는 또한 또다시 우리의 그래픽 환경을 박탈당하고 시커먼 도스 화면으로 복귀하는 끔찍한 결과가 것이다. 사용자 중심이 아니라 컴퓨터 중심이라는 웃기는 상황이 재현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모든 종류의 SF에서 일제히 경고하던 미래가 아닌가?

하지만 우리의 미래가 이토록 끔찍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아이콘을 아이콘으로 간주하고 우상아닌 것을 우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투명한 정서와 용기만 남아 있다면 모든 종류의 억압과 권력과 껍질과 부조리와 마녀사냥은 격퇴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음의 글을 인용하면서 '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한 간략한 감상을 마무리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신세대' 논쟁의 핵심은 가치관과 감성의 차이, 생활태도의 차이, 민족적 감성과 세계화된 감성의 대립, 언플러그드와 테크놀로지의 대립, 사라져가는 질서를 유지하려는 세력과 현재와 근본적으로 다른 미래를 건설하려는 세력 사이의 대립의 문제이다. 이러한 대립은 음악, 영화, 미술, 문학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고 개개인의 생활태도와 가치관 속에 투영되어 있다. 논쟁은 단순히 '세대갈등론'으로 치환될 없다. 관건은 '새로운 문명을 누가 형성하느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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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이져 방송국이 아닌 일종의 케이블 TV라고 보면 된다. 미국의 전통적인 대 방송사를 제치고 젊은 세대를 압도적으로 사로잡은 방송국 이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수많은 팝 가수들이 메이져 방송국이 아닌 MTV에서 성장했다. 미국에서 데뷔하는 가수들은 이 방송을 통해 전국순회 콘서트를 통하지 않고도 전국을 커버하는 히트곡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듀란 듀란, 컬쳐 클럽 등이 초기 스타였고 무엇보다도 그 유명한 마이클 잭슨이 바로 1983년부터 MTV를 통해 폭발적인 인기를 획득하게 되었다. 단순히 음악적으로 잘 만들어진 앨범이었다면 그는 겨우 200만 장을 팔고 말았겠지만 주지하다시피 엄청난 영상을 동원하는 그의 비디오 클립(이를테면 방송사에서 노래를 내보낼 경우 단조로운 화면을 지양하고 뮤직비디오 같은 화면을 만들어 방영한다)이 MTV를 통해 전파를 타자 1년 동안 그의 앨범 '스릴러(Thriller)'는 무려 2000만 장이 판매되었다. 물론 신디 로퍼와 마돈나도 이런 식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바로 TV가 갖는 엄청난 위력이 극대화된 경우들이었으며 이 과정은 지금도 계속된다. 서동진,{ROCK 젊음의 반란}, 새길 1993.

2> 뉴스위크지의 특집이 나가기 직전 1994 5 5일자 시사저널은 'X세대, 그들이 말하기 시작했다'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특집을 실었었다( 전인 1993 8.19에서는 X세대를 이상하고 특이한 미국의 별종들로 보고 있었다). 그후 수많은 매체들이 신세대 혹은 X세대에 관한 특집을 실었는데, 그중 [주간조선] 1994.9.5에서 다룬 특집 [CF 사회학] 설명을 참조하라. 기독교 대중문화비평을 표방하고 있는 '낮은울타리'의 1994 6,7,8월호에서도 신세대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밖에 거의 모든 매체가 신세대 혹은 X세대에 대한 기사를 다루었다. 대부분은 X세대와 신세대를 혼용하거나 동일한 명칭으로 보는 같다. 미국에서 말하는 X세대적 특징이 곧바로 한국의 신세대적 특징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대체적으로 비슷한 경향성을 나타낸다고 있다. 부분은 뉴스위크의 기사를 참조하라.

3> 또한 예상했던 바와 같이 기독교는 돌출에도 침묵했고 패배에도 침묵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탄설의 유포과정을 통해 적극적으로 짓밟기에 참여했다.

4> 엄밀하게 따진다면 한 명의 가수와 두 명의 댄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그룹은 서태지, 양현석, 이주노 세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태지는 16세 때 이미 로큰롤 계통에서는 전설적인 그룹이라는 '시나위'의 베이스 기타리스트로 활동했으며 양현석과 이주노는 언더그라운드에서 춤에 관한 한 달인들이라고 일컬어지던 춤꾼들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2집과 3집의 제작과정에서 보듯이 서태지를 음악감독이라는 포괄적인 영역의 명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는 단지 노래할 뿐 아니라 작사, 작곡, 연주, 편곡, 엔지니어링 등 스튜디오 작업 등 모든 것을 직접 수행한다.

5> 이 숫자가 그리 감동적이지 않은 사람은 대중음악의 본고장이라는 미국의 경우를 볼 필요가 있다. 본래 레코드사가 노래를 부른 가수에게 고맙다는 표시로 주는 골든 디스크는 10만 장이었다. 인구 2억에 10만 장이 팔리면 레코드회사는 가수에게 상을 준 것이다. 물론 플래티늄(100만 장)도 있고 더블 플래티늄도 있다. 하지만 인구 4천만에 더블 플래티늄은 가히 경악스런 숫자라 하겠다.

6> 이들이 선보인 뮤직비디오는 더욱 충격적이다. 그들은 휴전선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옛 철원 노동당사에서 그들의 타이틀 곡인 '발해를 꿈꾸며'를 촬영했다.

7>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KBS가 그 직후부터 '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한 노골적인 평가절하 작업과 흠집내기를 시작했다고 본다. 이를테면 공연실황을 녹화중계하면서 의도적으로 산만한 녹음으로 엉성한 모습을 방영한다든가(이 방법은 지나간 두 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많이 경험했던 TV조작술의 전형적인 방법이다), 가요인기 순위에서 빼버린다든가(시청률과 직결되는 코미디 프로에 출연하면 순위에 다시 넣어주겠다고 했다고 함), 아니면 다양한 보조 프로그램들에서 음악적으로 비판한다든가 하는 매체조작 방법을 사용한다. 그 절정이 '연예가중계'에서 보여주었던 소위 '사탄설'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였다(천리안, 과거토론모읍집 389번 <KBS의 서태지 죽이기>, 토론기간 1994/11/25 - 1995/01/02 참조).

8> 그는 {사탄은 마침내 대중문화를 선택했습니다}(신상언, 낮은 울타리 1992)와 {대중문화 최후의 유혹}(신상언, 낮은 울타리 1993)을 통해 소위 '반뉴에이지(NewAge)운동'의 선두에 서있다. 이 책은 중고생들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관심을 끌어 기독교문화의 상당 부분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9> 일명 '역행차폐'라고도 하는 이 기법은 음반을 거꾸로 돌리거나 테잎을 거꾸로 틀었을 때 무작위적인 잡음이 아니라 일정하고 목적의식적인 가사가 형성되도록 하는 기법을 말한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스튜디오녹음에서는 이러한 기법이 일반화되어 있으며 원하는 경우 헤비메탈 장르의 음악인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방법으로 메시지를 기록한다. 일부 보수적인 기독교인들(6,70년대 미국의 반전평화운동이 한창이던 무렵 이를 반대하고 나선 미국 동부의 보수적인 사친회나 근본주의 교회지도자들)이 '경건하지 못한' 이런 종류의 음악에서 악마적인 요소가 발견된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특히 양동복, {새로운 대중음악 CCM(Christian Contemporary Music)}(참빛미디어 1995)의 315-318쪽을 자세히 읽어 보라.

10> 실제로 들리는가 들리지 않는가는 청소년들 사이의 토론과 나름대로의 과학적인(?) 조사에 의해서 차츰 정리되어 갔다. 필자가 듣기에도 억지로 그렇다고 듣는다면 '피가 모자라'가 아니라 '이아 오자와' 정도로 들렸다. 다른 많은 식견있는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을 때도 거의 대부분은 들린다고 볼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이를 분석한 많은 컴퓨터 전문가들이 한글의 구조상 이런 백워드마스킹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단지 시끄러운 부분에 일부러 삽입시킬 수는 있지만 그렇다면 오히려 선명하게 들리도록 녹음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11> 이 의도는 종합적인 의미를 가진다. 일각에서는 서태지와 경쟁관계에 있는 어떤 가수측에서 유포시켰다고 주장하며 어떤 사람들은 KBS가 MBC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인 관계로 MBC에 우호적인 서태지를 공격한다고 본다. 또한 자신들의 시청률과 직결되는 코미디 프로나 연예잡기 프로에 출연하기를 거부한데 대한 괘씸죄가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의 보수적인 반뉴에이지 운동가들이 자신들의 입지 강화를 위해서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다. ([천리안, 과거토론모읍집 389번 <KBS의 서태지 죽이기>, 토론기간 1994/11/25 - 1995/01/02] 참조)

12> 매스컴에 민감한 청소년층은 의외로 자신들이 좋아하는 대상이 공격당할 때 단순히 매스컴의 주입식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는 신세대적인 사고방식이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보겠다. 기성세대와 같이 일단 TV 등의 언론매체에 대한 맹신이 없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기성세대보다 더한 측면이 많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TV는 즐기는 대상이지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기계라는 이미지가 없다. 그러므로 굉장히 재미있는 존재이지만 신화적인 존재는 아닌 것이다. TV가 전해주는 메시지는 단지 메시지일 뿐 결코 그 이상의 무엇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이 기준에서 틀리다고 생각되면 TV를 포함한 어떤 대상이든지 부정한다. 설사 그 대상이 KBS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서슴치 않고 공격한다. 다시 [천리안 과거토론모음집 389번 <KBS의 서태지 죽이기>, 토론기간 1994/11/25 - 1995/01/02]를 보라.

13> 윈도우(Windows)는 미국의 컴퓨터 소프트웨어 제작업체인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만든 프로그램 이름이다. 그 유명한 빌 게이츠가 바로 이 프로그램으로 오늘날 전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의의는 예전에 소위 도스화면으로 진행되던 컴퓨터의 진행과정을 평범한 보통의 사람이 보기만 해도 이해할 수 있고(GUI:Graphic User Interface, 즉 사용자 위주로 만들어지고 그림으로 쉽게 이해되는 장치들의 개념) 또 사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 안에서 모두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14> 앨빈 토플러의 [권력이동]이 가진 모티브가 바로 이 정신이다. 정보화 사회가 가지는 정보 공유와 개방의 정신이야말로 대공장과 굴뚝의 산업 사회를 마감하고 나아가서 남의 것으로만 여겨지고 으례 누군가가 독점하는 것이라 여겼던 권력을 공유하게 만드는 진정한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리라는 것이다. 사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해커(Hacker)'의 진정한 꿈은 장벽의 파괴에 다름 아니었다. 정보의 독점에서 비롯되는 권력 누적을 막고 정보와 정보의 힘을 공유하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15> 이를테면 각종 국제 영화제 수상과 타고난 성적 매력으로 소위 '월드 스타(World Star)'라는 찬사를 낳으면서 뭇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강수연은 TV대담 프로에조차 드물게 출연하며 단지 뉴스의 대상이었기에 신세대의 시야에서 거의 사라졌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고주와 광고제작자는 이를 믿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강수연의 이미지를 신세대도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세대는 강수연을 알지 못했다. 신세대의 젖줄이자 신경망인 TV에 등장하지 않는 월드 스타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ICE맥주' 광고의 참패는 이러한 변화를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또한 최근 초강세를 보이고 있는 신승훈과 김건모 혹은 룰라가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기는 하되 이들을 일종의 리더(Leader) 개념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이 본받고 따라야 할 어떤 전범(典範)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신세대는 없는 것 같다. 이들은 그저 너무나 좋은 '스타'일 뿐이다. 운동선수들인 우지원이나 이상민, 이종범도 마찬가지다.

16> 미메시스그룹 기획, {신세대: 네멋대로 해라} (현실문화연구 1993). 이 책을 기획한 미메시스 그룹은 1993년 7월 소위 '국제사회주의자동맹'이라는 조직사건으로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이 그룹은 '현실문화연구'라는 출판공간에서 계속 신세대문화에 관한 이론서와 비평을 생산하고 있다. 이 책은 원래 부제가 '더 이상의 탄원은 없다 돌파하라!'이다. 그리고 이 문구는 미국의 60년대 반전.히피문화의 기수 중 하나였던 록 그룹 도어스(Doors)의 리더 짐 모리슨의 비석에 써 있는 경구이며 당대를 풍미했던 저항문화의 최고 슬로건이었다. 분위기를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동진, {ROCK 젊음의 반란}(새길 1993)을 읽어보라. 특히 제5장 [우드스탁 네이션]을 참조하라. 또한 최근 개봉되었던 영화 [Doors]를 보아도 도움이 될 것이다.

17> [천리안, 과거토론모음집 389번 <KBS의 서태지 죽이기>, 토론기간 1994/11/25 - 1995/01/02]과 [천리안, 과거토론모음집 220번 <요즘 대중음악 형태와 가수에 대해 한마디>, 토론기간 1994/08/12 - 1994/09/12], [천리안, 과거토론모음집 228번 <서태지와 아이들 3집에 대한 음악적인 토론>, 토론기간 1994/08/18 - 1994/09/26]을 참조하라. 또한 [천리안, 과거토론모음집 378번 <뉴에이지음악과 태지음악>, 토론기간 1994/11/18 - 1995/01/03]도 참조하라.

18> 1969년 미국 우드스탁에서 있었던 대규모의 록 페스티발을 일컬어 어떤 비평가는 '우드스탁 공화국(Woodstock Nation)'이라 불렀다. 40여 만명의 군중 앞에서 혁명정신을 노래하던 수많은 록 음악가들이 대거 출연한 이 공연을 '우드스탁'이라고 통칭적으로 부르며 어떤 사람은 일종의 문화대혁명이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이 공연은 단순한 음악 행사였다고 할 수도 있지만 1964년 미군 폭격기가 통킹만을 폭격하고 1966년 유명한 비틀즈가 반전선언을 한 이래 더욱 확전되고 있는 베트남 전쟁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사건이기도 했다. 여기서 뮤지션들은 베트남에서의 죽음을 노래하고 이를 초래한 미국이라는 나라의 애국가를 조롱하면서 연주한다.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 외치기도 할 뿐 아니라 노아의 방주를 타고 떠나버리자고 유혹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문화적으로 보았을 때 이 페스티발은 록 스피릿(록의 저항정신; Rock Spirit)의 마지막 절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후 자본의 위력이 오늘날처럼 록음악을 거세시키기까지 최후의 저항을 벌인 많은 뮤지션들이 결국 나이 30이 넘기 전에 죽거나 전향했다. 역시 서동진의 책을 참조하라.

19> 물론 이렇게 보는 견해도 많다. 진보진영에서 문화읽기의 주요 패턴이 바로 이 공식을 채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건강한 '진짜 문화'는 투박하고 사회주의적이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교묘한 공세는 퇴폐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문화로써 이러한 '대중문화'를 유포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20> 이른바 PD의 영역인 '추적60분'에서는 '백워드마스킹'에 대한 논란이야말로 최근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공포문화의 산물이며 일부 무책임한 어른들이 이러한 유행을 등에 업고 공포문화의 확산을 부추기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사실 이러한 공포문화의 발상지는 일본이다. 한국인의 정서에는 없었던 잔인하고 섬칫한 공포의 상상력이 무제한으로 표현된 각종 번역물들이 출처조차 불분명한 채로 널리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청소년들 사이에 무차별적으로 퍼져가고 있는 일본문화의 악영향이 이러한 측면에서도 번져가고 있다.

21> 이들의 실패는 200만장을 넘지 못했다는 뜻이다. 실제 집계로는 150만장과 100만장 사이라고 한다. 그리고 예정에 없었던 콘서트를 잠실 체조경기장에서 올해 초에 개최하기도 하고 TV(물론 MBC)에 출연하기도 한다.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반증이라고도 할 수 있다.

22> 이에 대해서는 각주3>을 참조하라. 참고로 현재 최고의 인기는 박진영이라는 또다른 섹스심볼(그는 근육질의 상체를 착 달라붙는 T셔츠 한 장으로 드러내고 마침내는 돌아서서 엉덩이를 자극적으로 쓰다듬어 올린다)과 그룹 룰라이다. 룰라는 세번째 싱글 히트로 레코드 판매고가 4월 중에 이미 100만장을 돌파했다고 한다. 이 그룹의 리드 싱어인 여성은 그 섹시함이 오히려 여성들을 더 자극하고 있다는 평가를 듣고 있기까지 하다. 그 역시 노래 도중에 박자에 맞추어 흔들리는 자신의 엉덩이를 계속해서 두드린다.

23> 이 사건은 박정희의 아들이었던 박지만의 방탕한 생활 중 하나였던 대마초에 대한 박정희의 분노에서 촉발되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 사건으로 신중현을 비롯한 대다수의 인기 연예인들이 구속되었다. 전세계적으로 벌어지던 저항문화의 물결이 김민기, 한대수, 양병집 등의 음악으로 표현되기 시작했지만 서슬퍼런 박정희 정권과 그 산하 기성세대들은 도저히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저항과 개혁을 내포하는 진정한 의미의 록 정신(Rock Spirit)은 한국에서 실종되고 거세된 사랑 타령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이 불우한 전통은 90년대의 서울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24> 록이 교육에 대해 가한 비판은 사실 영국의 유명한 프로그레시브 록 뮤지션인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이라는 앨범과 그 뮤직비디오가 대표적이다. 여기서 학생들은 학교라는 거대한 기계에 던져져 획일적인 괴물로 성장하지만 어느날 더이상의 교육은 필요없다고 외치면서 학교를 뛰쳐나온다. 교실과 책상을 부수고 불지르며 폭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결국은 아직도 거대한 벽에 갖혀 있다는 현실이 음울하게 강조되는데 이 앨범과 뮤직비디오는 의외로 검열의 가위를 그렇게 많이 타지 않았으며 아직도 인기가 있다.

25> 양동복, {새로운 대중음악 CCM}(참빛미디어 1995)의 312-315,352-360쪽을 참조하라.

26> 영화 '서편제'의 성공을 말한다. 사실 이 영화는 임권택이라는 한국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철저한 한국 영화지만 그 언어는 역시 철저하게 미국 헐리우드의 어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한국인의 잠자던 정서를 깨웠으며 그 한(恨)의 정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알 수 없는 눈물로 드러났다. 이 눈물은 바로 감추어지고 억압당했던 한국인의 옛 아이콘의 부활이었으며 영화라는 위력적인 아이콘과 오정해라는 매력적인 아이콘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결과물이었다.

27> 각주 9>를 참조하라.

28> DOS:Disk Operating System의 약자로써 전원을 넣었을 때 컴퓨터라는 하드웨어를 가장 먼저 구동시키는 소프트웨어라고 생각하면 된다.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만든 'MS-DOS'가 가장 보편적으로 쓰인다. 과거에는 컴퓨터를 배운다면 이 운영 체제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지금은 잘 만들어진 소프트웨어들을 어떻게 하면 잘 사용할 수 있는가가 컴퓨터 사용의 관건이요 핵심이다. 바로 사용자 중심의 개념이다. 또한 최고의 최종 사용자(High End User)야말로 가장 지혜롭고 현명한 컴퓨터 사용자이다. 즉 이미 만들어진 소프트웨어들을 잘 활용하는 사람이 가장 컴퓨터를 잘 이해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29> 미메시스그룹 기획, {신세대: 네멋대로 해라}, 현실문화연구, 1993, 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