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G뉴스/문화읽기

편재하는 미술관

은바리라이프 2007. 11. 12. 11:18

편재하는 미술관
-- ZKM 관장 Peter Weibel과의 대화

<미술신문(Kunstzeitung)> 53호, 2001년 1월호

미래의 미술을 예측하는 논의를 할 때마다 항상 특별히 그의 의견을 묻게 된다. 페터 봐이벨(Peter Weibel)은 칼스루에에 있는 미디어 아트 센터(ZKM)의 관장이자, 오늘의 입장에서 내일을 말할 수 있는 비젼의 소유자이다. Kunstzeitung의 편집장 헬무트 크론탈러(Helmut Kronthaler)가 여세를 몰아가는 미디어 이론가인 그에게 다시 한번 앞선 시각을 청해 보았다.

Kunstzeitung: 20세기에는 여러 번 '회화의 종말'이 가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화는 지금까지 살아 남았고 또 늘 새로운 형식을 발견해 왔다. 당신은 전통적인 미술 작품들이 미래에도 의미를 갖는다고 보시는지, 아니면 미디어 아트에 의해서 전통적인 것이 오랫동안 완전히 지배당할 것으로 보십니까?

Weibel: 나는 여러 책들에서 이미 미디어적 조건 아래에서의 회화의 변화를 소개했었습니다. 현대회화는 네 가지의 과정을 거쳐서 스스로 변형되어 왔습니다. 즉, 회화가 외형적인 그리고 이미 정확하게 계산된 미술사적 규칙들을 스스로 벗어났다는 말입니다. 그 첫 번째 단계에서 현대회화는, 옛 그림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들을 해체하고 분석했습니다. 이런 시도의 틀 안에서 회화는 형태적이고 재질적인 요소들, 즉, 선과 색으로 환원되었고, 그런 특정한 견해들이 강조되었습니다. 그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이런 개별적인 기본 요소들이 독립적으로 또 아무런 구속없이 설명되었고, 다른 요소들의 희생을 통해서 스스로를 절대화시켰습니다. 그 세 번째 단계에서는 회화의 기본적인 요소들이 무시되었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습니다. 미술사의 일방적인 요소들 따위는 새로운 재료들로 대체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세 번째 단계에서 새로운 물리적인 현상에서 비롯된 물성작업이라는 상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물성의 강조는 그 반대적인 강조에 대한 선택의 여지까지 열어 놓았습니다. 즉, 예를 들어서 순수한 빛과 같은 회화의 비물질성(Immaterialität)이 그 네 번째 단계입니다.

Kunstzeitung: 그것이 회화와 관련해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Weibel: 그것은 시각에 대한 새로운 정의입니다. 시각문화의 세계는, 예를 들어 사진에서부터 영화까지, 비디오에서 컴퓨터에 이르는 기술적인 미디어들 속에서 그림의 새로운 대상들로 성장되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매스미디어적이고 시각적인 대중문화를 향한 문이 열리게 되었고, 과학에 의한 새로운 그림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 그림들은 더 이상 실제나 회화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의 세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안에 회화와 미술의 현대적인 그리고 미래적인 조건들이 함께 담겨있습니다.

Kunstzeitung: 당신은 교육과 연구의 장이라는 미술학교의 역할에, ZKM과 같은 준비들이 하나의 모델로서 충분하다고 보십니까?

Weibel: ZKM은 21세기를 이끌 만한 선구적 미술관의 모델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미술 작품의 수집이나 전시 형태로 보여준다는 한정된 과제보다는, 문화적인 가공품들을 연구하고 발전시키고, 제작하는 데에까지도 지원과 보조를 해야 합니다. 미술관은 보관의 장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제작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극장이나 공연장과 오페라를 비교해 보면, 거기서는 고전적인 음악들도 이끌어 가지만 동시에 새로운 음악 작품에 대한 계약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ZKM은 일반적인 교육의 장이 아닙니다. 미술학교를 졸업한 작가들이 이곳에서 초청작가로 작업할 수 있습니다.

Kunstzeitung: '현대 미술관(MNK)'이 ZKM에 속해 있습니다. 동시에 당신의 연구소에서는 '편재(遍在)하는 미술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고, 그 맥락에서 '그게 그렇게 의미있다고 해도 미술 작품들은 한 튼튼한 장소에 수집되어야 한다'는 데에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런 전통적인 미술관들에게 미래는 있습니까?

Weibel: 미술관의 미래의 장과 목표는 지금까지처럼 인쇄미디어의 공개적 장이라는 출판사와의 협력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범 지구적인 인터넷의 혜택과 전자적 미디어의 공개적 장으로 그 협력을 증가시켜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미술관이 물리적인 지역성을 벗어나 어디든 존재하는 즉, 편재(遍在)하는 가상(virtual)의 미술관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이 확장은 지역성에 국한된 과업 보다는, 오직 추가로 새로운 지역을 획득하고 새로운 방문객들, 그리고 정보화의 가능성 등을 넓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Kunstzeitung: 미디어 아트는 오늘날까지 아직도 소수의 전문가와 수요자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미디어 아트의 보통의 소비층들이 계속 흥미를 보일 것이라고 믿습니까?

Weibel: 전문가들이나 아마추어들이 점점 더, 예를 들어 컴퓨터와 디지털 카메라 같은 도구를 똑같이 쓴다는 점에서, 미디어 아트의 이해를 위한 지름길이 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미디어 아트는 가까운 몇 년 전보다는 이미 더 광범위하게 수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미술관을 찾는 많은 방문객 수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Kunstzeitung: 당신의 의견에서 더 나아간다면, 미디어 아트는 미술과 일상문화 사이의 간격을 좁혀 줄 수 있습니까?

Weibel: 액션 페인팅에서 팝 아트에 이르기까지, 60년대에 이미 미술과 일상문화와의 접근이 시작되었습니다. 미디어 아트는 하나의 근원적인 분기점과도 같은 저항 운동이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아티스트들은 공개적인 장에서 스스로 일상문화에 봉사하는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백남준처럼. 60년대의 미디어 아트란 대부분이 전위적인 텔레비젼 방송과 별반 다들 게 없었습니다. 가장 최초의 미디어 아티스트들의 다수가 그 쪽에서 나왔는데, 아무튼 '스펙타클의 저승(Jenseits des Spektakels)'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며, 방송 프로그램과 매스미디어의 통속문화 바로 옆에 다가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최소한 부분적일지라도 미디어 아트는 여전히 분기점에 놓여 있는 예술 중의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