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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의 승리와 그 결과” 왕상 20:13-21 2007.2.25 주일 낮 설교

은바리라이프 2007. 8. 7. 15:29
악인의 승리와 그 결과” 왕상 20:13-21 2007.2.25 주일 낮 설교
2007/02/24 오후 4:45 | 기본폴더

유머1. 엄마와 택시기사

엄마와 딸이 택시를 타고 가다가 홍등가 뒷골목을 지나가는데 길거리에 여성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딸이 물었다. “엄마, 저 여자들은 저기에서 뭐하는 거야?” “응, 친구를 기다리는 거야.”그러자 택시기사가 촐싹 맞게 “아줌마, 솔직하게 얘기해야지 왜 거짓말해요?”그러자 딸이 물었다. “엄마, 솔직하게 뭐야?”엄마는 택시기사를 째려보고 난 후에 어쩔 수 없이 딸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엄마, 그럼 저 언니들도 아기를 낳아?” “아주 가끔 그럴 때도 있단다.” “그럼 그 아이들은 어떻게 돼?”그러자 엄마가 “음…. 그 아이들은 대부분 택시기사가 된단다.”

유머2. 지긋지긋한 건망증

1단계 :이 닦으려고 화장실에 갔는데 칫솔을 찾을 수 없다. 색깔도 기억 안 난다.
2단계 : 계단에서 굴렀다. 훌훌 털고 일어났다. 근데…내가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는지, 내려가고 있었는지 도통 생각이 안 난다.
3단계 : 회사에 가려다가 잊은 것이 있어서 집에 갔다. 근데 뭘 가지러 왔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한참 고민하다가 우산을 가져왔다. 그날 하루 종일 해가 쨍쨍했다.
4단계 :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근데 내가 누구한테 전화를 걸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미치겠다. "여보세요" "네 거기 누구시죠?" "어디 거셨지요?" "글쎄여…."
5단계 : 자장면 먹을 때마다 먹고 나면, 자장면 그릇에 한입만 베어 먹은 단무지가 7, 8개는 있다.
6단계 : 회사 가려다가 집에 돌아왔다. "오늘 토요일은 회사 안 가는 날인데…."

유머3.하늘의 가르침

한 탐험가가 아마존 정글에서 자신이 피에 굶주린 식인종들에게 포위된 것을 알았다.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탐험가는 속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꼼짝없이 죽게 생겼어요." 하늘에 먹구름이 덮이며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 "아니다. 꼼짝없이 죽을 상황은 아니다. 발밑의 돌을 들어 네 앞에 서있는 추장의 머리를 내려쳐 보아라." 탐험가는 돌을 들어 추장의 머리를 세게 내려쳐 죽였다. 숨이 끊어진 추장의 시체 앞에 서서 씩씩거리며 탐험가는 분노한 100명의 식인종들을 쳐다보았다. 이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됐다. 바로 지금이 꼼짝없이 죽을 상황이란다."

▣ 설교원고

정유년 여름에 경상, 전라, 충청의 삼도 수군 연합 함대는 거제도 북쪽 칠천량 앞바다에서 전멸되었다. 한산 통제영은 으깨어졌다. 통제영 휘하의 모든 연안 포구와 섬들에 적의 깃발이 휘날렸다. 이순신은 상복을 입은 채로 옛날같이 전라좌수사 겸 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이순신은 통제할 수군이 없는 수군 통제사였다. 이순신이 12척의 배를 선택한 전법은 일자진이었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 12척의 배로 적선 333척을 물리쳤다. 실로 기적적인 승리였다.

오늘 아합 왕의 승리는 마치 명량해전에서의 이순신의 승리와 같이 찬란했다.

아람 왕 벤하닷은 앗수르와의 전투에 이스라엘을 끌어내어 연합군이 되게 하려는 의도에서 32명의 왕들과 함께 지역 연합군을 이끌고 이스라엘을 침공하였다. 아람의 벤하닷 왕은 그의 군대를 다 모아 32개국 연합 10만 명이 넘는 군대로 말과 병거들을 타고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쌌다. 이스라엘의 군대는 7천명 뿐 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명량해전에서의 이순신의 승리에 견줄 만 했다. 20장 29절은 하루 만에 아람 보병 10만 명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2차에 걸친 전쟁의 승리, 아람 왕 벤하닷의 생포 등 정말로 아합 왕의 승리는 찬란했다.

◆ 멸망의 전조는 교만이다.

전쟁 발단의 중요한 원인은 벤하닷의 교만에 있었다. 당시 아람(시리아지역)은 여러 개의 소규모 지역 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중 다메섹(Damascus)왕 벤하닷은 주도권을 잡자 타 지역의 왕들에 대한 군주-봉신 관계를 형성시켰다. 본 절의 32명의 왕들은 바로 벤하닷에게 조공과 병역을 바치는 아람의 소왕들이다.

벤하닷의 교만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아내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하매”(3절) 그는 마치 자신이 역사의 주관자인 것처럼 행동했다. 18절은 그의 자만을 잘 보여준다. “그가 이르되 화친하러 나올지라도 사로잡고 싸우러 나올지라도 사로잡으라 하니라.”
우리는 ‘사로잡으라’는 명령에서 우리는 당시 벤하닷이 이스라엘군을 맞붙어 싸울만한 상대로 여기고 있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즉 벤하닷은 설령 이스라엘군이 싸우러 나왔을 경우에도 어른이 어린아이 다루듯 쉽사리 그들을 제압하여 사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자만심에 빠져 있는 벤하닷과 같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잠 16:5; 벧전 5:5)

또한 그는 너무나 자신을 과신했다. 멸망의 전조는 교만이다. 벤하닷은 전쟁을 앞두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비상시에 그가 안일 방종하였다. 자기 스스로를 과신하지 않았으면, 그는 술도 마시지 않았을 것이며, 술에 만취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방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방심과 관능은 옛 세상(홍수 이전 시대)과 소돔에는 병존했었다(눅 17:26). 벤하닷이 술취한 것은 벨사살 왕의 경우와 같이 멸망의 전조였다(단 5장). 벤하닷 왕을 위하여 각기 맡은 직위에서 싸워야 할 왕들이 술을 마시고, 업무보다는 유흥에 빠졌으니 어떻게 성공을 할 수 있었겠는가?

아람의 군대는 하나님께도 교만했다.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했다.

◆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성경이 주목하는 인물은 아합이다. 성경은 아합에게 많은 장을 할애한다. 아합만큼 길게 기록된 왕도 드물다. 아합 왕에 대한 기록은 왕상 17:1-22:40절에 걸쳐 나타난다. 하나님은 아합의 실패를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길 원한다.

아합이 악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승을 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악인의 승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잠16:4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은 악인을 사용해서 악인을 멸하신다. 하나님은 악인의 악함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공의를 나타내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보여준다. 인간에게 악은 악으로 끝나고 말지만, 하나님께는 악함이라도 선을 창조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인간에게 악은 악일 뿐 이지만, 하나님께 악은 선의 창조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구속사에 있어서 악을 선을 창조하는 도구로 사용하신 예는 너무도 많다. 가장 중요한 사건을 저지른 사람 중에 하나가 보디발의 아내이다. 보디발의 아내는 이름도 등장하지 않지만, 구속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의 발단을 제공한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갔다. 목숨은 겨우 부지하였지만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그의 삶은 노예로 끝나는가? 그렇지 않았다. 요셉의 성실함과 진실함을 보디발이 보기 시작했다. 세월이 지나자 마침내 그는 보디발의 집 전체를 관할하게 되었다. 이제 그의 삶에 전성기가 찾아온다. 고생을 끝났으며, 이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편안한 삶을 살고자 했을지 모른다. 하나님의 축복이 이러한 삶이라고 자족하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삶에 부족함은 없었다. 이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깨우친 것이 바로 보디발의 아내였다. 그녀의 악행은 구속사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선함을 창조하였다. 보디발의 아내의 악행이 없었다면, 요셉은 보디발 가문의 집사로 남았을 것이고, 야곱의 집안은 가나안 땅에서 기근으로 죽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악인의 악행이라도 선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그것은 그분의 지혜요 능력이다.

◆ 아합은 승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아합은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나, 실패한 인생으로 끝났다. 성공이 곧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성공 했다 해도 하나님의 뜻을 만족시키지 않는 한, 그리스도인에게 그것은 곧 실패이다. 아합의 실패는 어디에 있었는가?

① 전쟁 승리의 원인을 잊었다.
아람과의 1차 전쟁이 시작될 때, 한 선지자가 아합에게 찾아왔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아람과의 2차 전쟁이 시작될 때, 한 선지자가 다시 아합에게 찾아왔다.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는 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넘기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전쟁 승리의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이스라엘의 7000명의 군사력이었는가? 아니면 우연이었는가? 우리에게 우연은 없다. 인간에게 우연은 하나님껜 필연이다. 우연이 있는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개입이었다.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신 것이다. 전쟁이 시작될 때마다, 하나님은 이 진리를 아합 왕에게 ‘오늘 내가 네 손에 넘기리니’ 승리의 원인은 여호와 하나님의 손이 이스라엘에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은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우연인가? 내 자신의 능력 때문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선지자 하박국의 고백처럼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신 것이다. 여러분이 성실하게 일했는가? 그 성실함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누군가 당신을 도와준 사람이 있는가?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것이다. ‘담장 위의 거북이처럼’ 당신을 그 자리에 있게 한 것은 하나님이시다. 실패란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 것이다. 아합은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다. 그는 실패자였다.

② 전쟁을 승리케 하신 하나님의 뜻을 잊었다.
존 맥스웰의 책 ‘행복한 삶의 비결’에서 원제는 ‘성공에서 의미로의 여행’(The journey from success to significance)이다. ‘성공’은 일에 의해서 결정되지만 ‘의미’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하나님께서 아합을 승리케 하신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설정이었다. 그 전쟁의 승리를 통해서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라’는 것이었다. 아합은 전쟁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의 참된 뜻을 놓쳤다. 본질은 버리고 껍데기만 붙들었다. 승리에 도취되어 승리를 주신 하나님은 잊었다. 1차전 승리 때도 그것을 잊었고, 재차 말씀하셨지만 2차전 승리 이후에도 잊었다. 아합은 철저히 하나님을 배제 시켰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행위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예수님의 행동만을 트집 잡았다. 본질은 놓치고 껍떼기만 걸고넘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뜻을 가지고 행하신다. 목적을 가지고 일하신다. 어떤 때는 성공을 주시기도 하시며, 어떤 때는 환란을 주시기도 하신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공과 환란 자체보다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주시한다. 성공과 환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그 분을 더욱 알아가며, 성장하고, 그 분과 교제하는 것이다.

대하 16:9절 “그분은 모든 이의 영적 상태를 아시고, 어떤 응답을 하실지 아신다. 그분은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의 승리를 통해 아합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길 원하셨으니 아합은 바로 거기에서 실패했다.

③ 아합은 하나님의 영광을 놓쳤다.(하나님은 사소한 것을 소중히 여기신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의 궁극적인 이유는 둘 중 하나다. 인간 자신을 섬기거나, 하나님을 섬기거나 당신은 어느 쪽인가?

아합은 전쟁의 승리를 자신을 섬기는 데 사용했다. 그는 아람 왕을 죽이지 않았다. 아합은 벤하닷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벤하닷은 하나님을 무시했다. 22절을 보라.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산의 신이라며 깍아 내렸다. 만물의 주관자이시며, 왕 중 왕인 그 분을 지방 신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28절에 여호와께서 아람 군대를 이스라엘 손에 붙이신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하나님에 대한 무시였다. 아합이 비록 인정이 많은 자비로운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다른 계산이 있었다.

아합은 아람 왕 벤하닷을 ‘나의 형제’라 부르며, 자신의 병거에 태우고 자세를 나란히 했다. 아합은 벤하닷을 마치 자신의 동지처럼 여기듯 행동 했다. 그리고 마침내 몇몇 성읍의 반환과 무역 이익을 보장 받고선 벤하닷을 살려준다. 아합은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탐욕과 맞바꿨다. 전쟁의 승리를 자신을 섬기는 데 사용했다.

우상숭배가 무언인가? 우상숭배란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광을 빼앗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죄이다. 그 결과는 자명하다. 곧 죽음이다.

헤롯에게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몹시 노여움을 사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무리를 지어 헤롯에게 갔다. 그들은 왕의 내실 시종인 블라스도를 회유하여 그의 도움을 받아 헤롯에게 화해를 요청했다. 이는 이들 지방 사람들이 헤롯의 영토에서 식량을 공급받았기 때문이다. 약속한 날, 헤롯은 왕의 복장을 하고 왕좌에 앉아 그들에게 연설을 하자 군중들은 “이것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소리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헤롯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 그 결과 주님의 천사가 즉시 헤롯을 쳐서 벌레에 먹혀 죽고 말았다.

아합은 1,2차 아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결말은 곧 아람 군대에 의해서 전쟁터에서 죽고 만다.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경제적 탐욕을 채우기 위해 풀어 주었던 그 아람 왕의 군대에 의해 죽고 만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제쳐두고 자신이 탐욕을 채우려 할 때, 그 탐욕은 다시금 우리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온다.

◆ 기회가 있을 때 돌이키라.

앤터니 캠폴로는 90대 후반에 이른 50명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사회학적 연구를 진행한 바 있다. 그가 노인들에게 던진 질문은 단 하나였다. 인생을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고 했을 때, 이전과 다르게 해보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어떠한 응답이라도 가능한 주관식 질문이었지만, 노인들의 응답은 세 가지로 집약되었다.

1) 다시 살 수 있다면, 더 많이 반성하고 싶다.
2) 다시 살 수 있다면, 더 많은 위협을 무릅쓰고 싶다.
3) 다시 살 수 있다면, 내가 죽은 뒤에도 잊히지 않을 일들을 더 많이 하고 싶다.
그들은 더 많은 돈이나 권력, 또는 명성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과감히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무언가 중요한 목적을 이루고 싶어 했다.

아합의 승리는 아합에게 기회였다. 하나님을 향해 돌아설 기회였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신다. 선인과 악인에게 똑 같이 단비가 내리듯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는 악인이라고 비껴가지 않는다. 우리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아합이 아람과의 두 번의 전쟁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섰다면 이스라엘을 아람의 군대로부터 지켜낸 위대한 왕이 되었을 것이며, 가장 극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으로 성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하나님께 우연이란 없다. 모든 만물과 모든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며,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 보이신다.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로 하나님 주관하시는 것이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며, 그 분의 뜻을 헤아려 주님이 주시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 보충자료

천문학자의 역할

미 우주선 패스파인더호의 화성착륙은 '천문학의 승리'였다. 현대 천문학의 기초를 세운 과학자는 요한 케플러(1571∼1630)는 행성이 태양의 주위를 단순히 원형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초점으로 타원의 궤도를 그린다는 이론을 폈다.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말한다. "천문학자는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연이라는 책에서 무언가 찾도록 허락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일뿐입니다.

건학이념

미국 고등학교 필립스 아카데미와 필립스 엑서터는 동문 35명 중 1명꼴로 미국 명사 인명사전에 올라 있고 백만장자 비율도 가장 높다. 설립 이래 200년 이상 이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이 학교의 건학 이념은 똑같이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이다. 설립자인 새뮤얼 필립스와 존 필립스가 성경에서 영감을 받아 이 건학 이념을 정했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와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에서 영감을 받아 나 자신이 아닌 지역사회와 국가, 세계를 위해 그리고 최종 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교육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은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연주회가 열렸습니다. 그의 걸작 오라토리오 천지창조가 공연되었고 그 공연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중이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그는 늙고 병약하였기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공연장에 입장하였습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공연을 마쳤을 때 관중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는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나 떨리는 손을 위로 치켜들고 외쳤습니다. “내가 아닙니다. 그 음악은 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저기 우리의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습니다.”

크니이두스의 망대

고대의 숙련된 건축가였던 크니이두스는 애굽의 바로를 위해 한 망대를 지으라는 명을 받았다. 그는 건축을 해 나가면서 자신의 이름을 벽의 한 돌 위에 큼지막한 글씨로 새겨 놓았다. 역청으로 그것을 가리운 다음 겉에는 금으로 애급의 바로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이 바로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행해진 것처럼 가장해 놓았던 것이다. 그는 오랜 풍 상의 세월을 거치면 회반죽이 떨어져 나가서 자신의 이름과 공로가 미래 세대에 길이길이 남으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교회의 영광만을 구하는 척하지만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은 모든 동기를 아신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종말에 대하여 재미있는 비유를 이야기했다. 관객이 초만원을 이루고 있는 어느 극장 뒤쪽에서 불이 났는데 관객들은 재미있는 연극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극장 주인은 불난 사실을 갑자기 알릴 경우에 벌어질 큰 혼잡을 예상하고 조용히 설득하기로 했다. 그래서 우선 배우들 중에 가장 인기가 있는 배우 한 사람을 불러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에게 “당신이 나가서 관객이 당황하지 않도록 잘 설명하고 모두 차분하게 이 극장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유도해 달라” 고 부탁했다. 그 인기 배우는 막중한 사명을 띠고 무대 위에 서서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극장에서 불이 났는데 모두 차례를 지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그랬더니 관객들은 이것이 연극인 줄 알고 모두들 박수를 치며 아주 재미있어 했다. 당황한 연극배우가 이것은 연극이 아니라 사실이고 곧 불길이 번져올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관객들은 더 열심히 박수만 치면서 아무도 믿어 주지를 않았다. 자, 어떻게 되었겠는가?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극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서로가 먼저 빠져나가려고 아우성을 쳤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늦기 전에 해야 할 일

어느 여름 밤, 식구들이 함께 모여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어린 손자와 할머니가 마주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한참 맛있게 식사를 하다가 어린 손녀가 소리쳤습니다.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는 식사를 하다가 호들갑을 떠는 손자를 점잖게 꾸짖었습니다. "얘야, 밥을 먹을 때는 조용해야지.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게 아니란다." "그래도 할머니 급한 일인데..." "참아라, 밥을 다 먹은 후에 말을 하렴.""그게 아닌데...?" 묵묵히 식사를 마친 후, 할머니가 입을 열었습니다. "얘야, 아까 급한 이야기라고 한 게 뭐냐? 이제 말해 보렴." 손자는 힘없이 대답했습니다. "이젠 때가 늦었어요." "때가 늦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아까 할머니 국에 파리가 한 마리 빠져 있었거든요. 그걸 말하려고 했는데, 지금 그 파리는 할머니 뱃속에 들어가 버린 걸요..." "뭐야?"

소포 이야기

수년전 영국으로부터 남아프리카의 어떤 지방에 허름하게 포장된 조그만 소포가 우송되어 왔다. 수신인에게 연락했지만 통관세와 송료가 비싸다고 찾아가질 않아서 우체국 특별 창고에서 14년간이나 묵혀 있었다. 결국 수신인이 사망하게 되자 당국에서는 그 소포물을 경매에 부치려고 공고했다. 워낙 허름하게 싼 것이어서 그 속에 별로 대단치 않은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아무렇게나 다루었다. 그 당시 이 지방에서는 우편물 임자가 나오기 전까지는 포장을 풀 수 없도록 규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호기심 많은 사람이 매입하겠다고 하여 아주 싼값으로 사들였다. 그가 경매장에서 소포를 여니 거기에는 영국 돈 파운드 지폐가 잔뜩 들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간단한 몇 가지 사실을 무시하는 자는 나중에 어마어마한 손해와 비극을 당한다는 사실을 아는가? 여름이 지나면 여지없이 가을이 오듯이 만사에 때가 있어서 하나님은 세상에 두껍게 쌓인 죄와 오염된 인간의 심장을 보시고 살 길을 뚫어주셨지만 그 비상구를 통해 탈출하지 않으면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 주석 자료

◆ 구속사적 개관

① 왕상 17:1-22:40절은 아합의 바알 종교 장려 정책을 비롯한 그의 악정과 이에 맞서 바알 종교를 타파하고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여호와 신앙을 회복시키기 위한 엘리야의 활동에 관해 기록한 일련의 기사이다.

② 20:1-22:40절은 주로 아합의 대내외적 통치에 있어서 그의 신앙 타락과 불순종으로 인한 실정과 악정에 관련된 기사가 소개된다. 이것은 인간이 맺는 근본 관계인 하나님의 관계가 파괴된 자는 결국 일상생활 전체에서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 부분은 다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아람에 대한 아합의 승리(20:1-43), 나봇 포도원에 대한 아합의 탐욕(21:1-29), 아합의 마지막 전투와 죽음(22:1-36)

◆ 아람과 이스라엘간의 전쟁 개요(20:1-34)

① 아람과 이스라엘간의 전쟁은 아람 왕 벤하닷의 지나친 패권의식이 그 발단이 된다. 즉 벤하닷은 아람의 여러 군소 도시 국가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근동지역에서 아람이 큰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자 그 힘만 믿고 이스라엘을 송두리째 먹어 치우려는 야심으로 침공했다.

② 그러나 벤하닷은 월등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참패하고 말았다. 또한 굴욕적인 항복을 한 후에야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다.

③ 벤하닷과 아합과의 전쟁이 이처럼 전혀 예상밖의 결과를 낳은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와 승리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④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범죄자 아합을 후원하시는 분이거나 그의 범죄를 용납하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이 전쟁을 통해 당신께서 역사의 주인이시며 온 세상의 주권자이심을 선포하고, 지극히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멸시했던 벤하닷을 심판하셨다.

⑤ 벤하닷의 패배는 하나님을 멸시하며 교만으로 그 배를 채우려는 자가 거두게 될 결과의 비참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 설교 본문 주석: 아합 왕의 제1차 승전

13절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① ‘한 선지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Micaiah)라는 주장도 있으나 22:8에 의해 부인된다. 왜냐하면 본 절의 선지자는 아합에게 기쁜 예언을 전하나 미가야는 한 번도 아합에게 좋은 예언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Hammond). 또한 메시지의 성격으로 보아서 이 선지자는 엘리야가 아닌 것도 분명하다. 왜냐하면 아합에 대한 엘리야의 메시지는 대체적으로 경고와 심판의 내용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18:18;21:20-26). 따라서 이 자는 당시의 무명(無名)의 선지자 생도 중 한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② ‘너는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 본장에는 아합이 벤하닷에게 승리를 거두는 이야기가 나온다(16-21, 26-34절). 엘리야의 투쟁과 아합의 범죄를 그려 나가던 본서 기자가 이처럼 본장에서 느닷없이 아합의 승리를 수록한 것에 대해 독자들은 석연치 않게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 절은 아합이 심판받아 마땅한 왕임에도 불구하고 대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일에 대한 신학적 답변을 제시해 준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크신 권능을 나타내심으로 오직 당신만이 환난 날의 구원자시요(시 9:9) 모든 축복의 근원이 되심을 아합은 물론 온 백성들에게 거듭 거듭 알려주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요컨대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영원하신 언약을 상기시키려는 집요한 노력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향후(向後)의 태도에서 입증되듯이 아합은 하나님의 은총 앞에 감격하여 회개하기는 커녕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한갖 위기극복을 위한 수단 정도로 간주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아합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 것도 실상은 이러한 연유에서이다(22:29-40).

14절 “아합이 이르되 누구를 통하여 그렇게 하시리이까 대답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로 하리라 하셨나이다 아합이 이르되 누가 싸움을 시작하리이까 대답하되 왕이니이다.”

① '각 지방 고관'이란 아합의 행정 구역을 관할하는 지방 장관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비록 본문은 상세한 기록을 삼가하고 있지만 계속 이어지는 기록으로 볼 때(15-20절) 벤하닷의 침공이 개시되자 이들 지방 장관들은 자기 휘하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수도 사마리아에 집결 계획했던 듯하다.

② 한편 '청년'(히, 나아르)은 '젊은 청년'을 의미한다. 특히 군사적 맥락에서 사용될 때 이 단어는 대개 '병사들'을 가리킨다(수 6:23;삿 9:54;삼상 9:2;25:5;삼하 2:14). 그러므로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이란 지방 장관들이 끌고 온 군대를 의미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출중한 무용으로 인해 특별히 뽑힌 정예병들로 보인다.

③ '시작하리이까.'는 '공격을 개시하다'는 뜻인 '아사르'(히)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본 절은 '누가 맨 처음 공격을 개시하리이까.'라는 뜻이다. 그런데 공동 번역은 이를 "진두에는 누가 설 것입니까?"로 옮겼다.

15절 “아합이 이에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을 계수하니 이백삼십이 명이요 그 외에 모든 백성 곧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을 계수하니 칠천 명이더라.”

① 이스라엘군의 병력을 소개하는 15절은 그 왜소한 규모를 알림으로써 더욱더 전쟁의 승리가 진정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느끼게 해준다. 즉 최소한 10만 이상의 적과 대치한 이스라엘군은 불과 7,232명인 것이다(29절).

② 그런데 이처럼 소수의 병력으로 대군을 격파한 전공이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에 기인한 것이라는 모티프(motif)는 구약에 자주 등장한다(창 14:14-16;삿 7:16-22).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

16절 “그들이 정오에 나가니 벤하닷은 장막에서 돕는 왕 삼십이 명과 더불어 마시고 취한 중이라.”

아람 왕은 패전하고 이스라엘은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쟁에 있어서 아람 왕의 실패의 원인은, 그런 비상시에 그가 안일 방종하였던 사실이다. 자기 스스로를 과신하지 않았으면, 그는 술도 마시지 않았을 것이며, 술에 만취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방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방심과 관능은 옛 세상(홍수 이전 시대)과 소돔에는 병존했었다(눅 17:26). 벤하닷이 술 취한 것은 벨사살 왕의 경우와 같이 멸망의 전조였다(단 5장). 벤하닷 왕을 위하여 각기 맡은 직위에서 싸워야 할 왕들이 술을 마시고, 업무보다는 유흥에 빠졌으니 어떻게 성공을 할 수 있었겠는가?

17절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이 먼저 나갔더라 벤하닷이 정탐꾼을 보냈더니 그들이 보고하여 이르되 사마리아에서 사람들이 나오더이다 하매”

‘정탐꾼을 보내었더니’ - 원문에는 '정탐군'에 해당할 만한 용어가 따로 보이지 않는다. 단지 '벤하닷이 보낸 그들이 말하기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이 척후 활동에 있음이 분명하므로 '정탐꾼'이라 호칭한 것이다. 그런데 18절로 미루어 볼 때 정탐꾼들의 보고는 좀 명확치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보고를 받은 벤하닷이 진출한 이스라엘군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탐지군들 역시 맨처음 진출한 '각도 방백의 소년들'이 너무나 소수였기 때문에 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던 것 같다.

18절 “그가 이르되 화친하러 나올지라도 사로잡고 싸우러 나올지라도 사로잡으라 하니라.”

이 구절은 당시 벤하닷의 자만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보여 준다. (1) 즉 이스라엘군이 화친하러 나오든 싸우러 나오든 무조건 그들을 사로잡으라는 명령에서 우리는 그가 앞서 아합의 답변에 몹시 기분상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다음으로 사로잡으라는 명령에서 우리는 당시 벤하닷이 이스라엘군을 맞붙어 싸울만한 상대로 여기고 있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즉 벤하닷은 설령 이스라엘군이 싸우러 나왔을 경우에도 어른이 어린아이 다루듯 쉽사리 그들을 제압하여 사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자만심에 빠져 있는 벤하닷과 같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잠 16:5; 벧전 5:5)

19절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과 그들을 따르는 군대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들을 따르는’ - 원문은 '아하레이헴'(히), 즉 '그들의 뒤에'라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과 7,000명의 수도 방위 병력(15절)간의 관계 및 임무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즉 본 절에 의거할 때 당시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은 특별한 용맹과 무예로 선봉대의 임무를 맡음과 동시에, 수도 방위 병력의 단위부대를 이끄는 하급 지휘관 역할도 한 것으로 보인다.

20절 “각각 적군을 쳐죽이매 아람 사람이 도망하는지라 이스라엘이 쫓으니 아람 왕 벤하닷이 말을 타고 마병과 더불어 도망하여 피하니라.”

‘각각 적군을 쳐 죽이매’ - 원문은 '각자 자기가 맡은 적을 치매'(히, 와야쿠 이쉬 이쇼)라는 뜻이다(KJV, they slew everyone his man). 이로 보건대 이스라엘 정예병들은 비록 소수이지만 각기 습격해야 할 요소(要所)들을 정하는 등 철저하고 조직적인 사진 계획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적진을 난타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21절 “이스라엘 왕이 나가서 말과 병거를 치고 또 아람 사람을 쳐서 크게 이겼더라.”

‘크게 이겼더라’ - 원문은 '들이쳐서 큰 학살을 하다'(히, 웨하카 마카 게도르)는 뜻이다. 당시 아람군은 대군임에도 불구하고 겁에 질려 변변히 대항도 못한 채 죽임 당했음을 알 수 있다. 아합은 악한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아함의 악한 왕 벤하닷을 치는 데 사용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잠 16:4 하반에 말하기를,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였다.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이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따라 각자의 목적에 알맞게 지음 받았음을 의미한다. 한편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악인을 악하게 지으셨으므로 악한 일이 발생하는 데에 따르는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을 위해 정해진 때 곧 하나님께서 친히 악한 자들을 심판하심으로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밝히 드러내실 때가 반드시 다가을 것임을 확증하는 말인 것이다.)

◆ 1절~12절 아람 왕 벤하닷의 침공

1절 “아람의 벤하닷 왕이 그의 군대를 다 모으니 왕 삼십이 명이 그와 함께 있고 또 말과 병거들이 있더라 이에 올라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그 곳을 치며”

① 아람 왕 벤하닷 - 본절의 벤하닷(Benhadad)은 일찍이 이스라엘 왕 바아사(Baasha)와 동맹을 맺은 바 있던 벤하닷 1세의 아들이다. 그런데 벤하닷 1세는 지중해 무역로 확보를 위해 오므리(아합의 아버지)와도 전쟁을 벌여 이스라엘 국경의 여러 성읍을 탈취해 갔다. 그러나 본장에서 벤하닷 2세(B.C. 860-841)가 아합을 위협하는 까닭은 이스라엘 침략에 목적이 있기보다는 실제로 앗수르와의 전투에 이스라엘을 끌어내어 연합군이 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Bowman). 이 무렵 앗수르의 살만에셀 3세(Sharmaneser ,B.C.859-824)는 서서히 벤하닷의 아람(시리아)을 위협해 오고 있었다.

② 왕 삼십이 인 - 당시 아람(Aram)은 여러 개의 소규모 지역 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중 다메섹(Damascus)왕 벤하닷이 주도권을 잡자 타 지역의 왕들에 대한 군주-봉신 관계가 형성되었다. 본 절의 32명의 왕들은 바로 벤하닷에게 조공과 병역을 바치는 아람의 소왕들이다.

2절 “사자들을 성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보내 이르기를 벤하닷이 그에게 이르되”

‘벤하닷은 이르노니’ - 원문은 '벤하닷은 말하다!'(히, 아마르 벤하닷)와 같이 대단히 거만한 말투이다. 즉 여기서 '아마르'(히)는 '명령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이는 곧 왕이 신하에게나 걸 법한 말투이다. 따라서 한 나라의 군주가 다른 나라의 군주에게 이와 같이 말을 걸었다는 것은 충동과 도발의 의도를 지닌 것임이 분명하다.

3절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아내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하매”

이와 같은 벤하닷의 자극적인 언사는 아합의 자존심을 상처 입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도를 뚜렷이 내보인다. 심지어 아합의 아내들까지 자신의 소유로 주장하는 데서 이스라엘의 왕권을 자신의 발 아래로 완전 복속시키려는 벤하닷의 탐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제 이를 좀더 세분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1)은금의 요구는 실질적인 국력의 약화로 인해 이스라엘이 벤하닷에게 완전히 굴복하게 하려는 조처이다. (2)아내의 요구는 이스라엘 왕권의 독자성과 존엄성 상실을 겨냥한 처사이다. 2:17 주석참조. (3)자녀들의 요구는 일종의 인질, 볼모를 요구한 것이다. 한 마디로 이상과 같은 벤하닷의 요구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략시키겠다는 의도가 아닐 수 없다.
4절 “이스라엘의 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내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하였더니”

① ‘내 주 왕이여’ - 이 호칭은 일반적으로 신하가 왕을 부를 때 사용하는 것이다. 아합은 벤하닷의 막강한 위세에 눌린 나머지 그에게 신하의 예를 표한 셈이다.

② ‘나와 나의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 이말은 아합의 잠정적 항복이다. 즉 눈앞의 위기국면을 넘기기 위한 전술적 항복일 뿐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점은 벤하닷이 자기의 요구를 실제로 관철하려 들자 아합이 분노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7절).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아합은 대단히 유약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는 당시 아람의 막강한 위세에 겁을 먹고 어떻게 해서든 화친하려고 생각했던 것 같다.

5절 “사신들이 다시 와서 이르되 벤하닷이 이르노라 내가 이미 네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너는 네 은금과 아내들과 자녀들을 내게 넘기라 하였거니와”

'불이다'에 해당하는 '나탄'(히)은 요구하는 것을 '내주다'는 뜻이다. 따라서 2, 3절의 벤하닷의 언동(言動)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단호한 실제적 요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에 대해 아합은 단호한 거절도 실제적인 수락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답변을 했던 것 같다.

6절 “내일 이맘때에 내가 내 신하들을 네게 보내리니 그들이 네 집과 네 신하들의 집을 수색하여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을 그들의 손으로 잡아 가져가리라 한지라.”

① ‘수색하여’ - 이에 해당하는 '하파스'(*)는 '찾다'(search for)는 뜻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약탈 물을 뒤져 찾아낸다든지 도망자롤 찾아내려는 등의 움직임을 가리키는 말이다(창 44:12;삼상 23:23;왕하 10:23). 한편 '수탐(搜探)이란 역어(譯語)는 '수사하고 탐지함'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원어에 걸 맞는 표현이라 하겠다.

② ‘네 눈이 기뻐하는 것’ - 여기서 '네 눈이'(히,에이네이카)는 특별한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방향을 말한다. 그리고 '기뻐하는'(히, 마흐마드)은 사랑스러운 아내에 대하여 기뻐하듯 확실히 기뻐하는 것율 말한다. 그러므로 '네눈이 기뻐하는 것'이란 아합이 특별히 귀중히 여기어 아끼는 모든 것을 말한다. 즉 여기에는 비단 물건 뿐 아니라 사람들도 포함된다. 그런데도 공동 번역은 이를 '값진 물건'으로 번역하였으니 본절의 의미를 충분히 보여 주지 못하는 감이 있다.

7절 “이에 이스라엘 왕이 나라의 장로를 다 불러 이르되 너희는 이 사람이 악을 도모하고 있는 줄을 자세히 알라 그가 내 아내들과 내 자녀들과 내 은금을 빼앗으려고 사람을 내게 보냈으나 내가 거절하지 못하였노라.”

‘이 사람이 악을 도모하고 있는 줄을 자세히 알라 - '이 사람'에 해당하는 '제'(히)는 경멸과 조소가 담긴 비칭이다. 즉 이 말은 '이 자' 혹은 '이 작자' 정도의 어감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본 절은 '이 자가 추구하는 악을 보라'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때 '보다"(히, 라아)는 말은 단순한 응시가 아닌 '주목하여 살피다'는 뜻이다. 그래서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자세히 알라'로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합이 장로들의 의분을 자아내어 자신의 전의(戰意)에 호응토록 유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8절 “모든 장로와 백성들이 다 왕께 아뢰되 왕은 듣지도 말고 허락하지도 마옵소서 한지라.”

‘왕은 듣지도 말고 허락지도 마옵소서!’ - 장로들과 백성들의 한결 같은 의견을 집약하고 있는 본 구절 속에는 아합 왕의 소아적(小我的)이고도 경솔한 처신에 대한 책망이 내포되어 있다. 사실상 아합의 굴욕적 태도로 인하여 아람 왕 벤하닷의 기세는 한층 거만해졌으며,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긍지는 땅 아래로 실추되고 말았다.(4-6절) 따라서 백성들 중 대다수는 가만히 앉아서 아람의 약탈을 지켜보기 보다는 차라리 싸우다 죽는 편을 원하였다. 특히 그들 중 여호와를 경외하는 경건한 무리들은 성지 유린을 막기 위해 강경 대응책을 적극 지지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9절 “그러므로 왕이 벤하닷의 사신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왕께 말하기를 왕이 처음에 보내 종에게 구하신 것은 내가 다 그대로 하려니와 이것은 내가 할 수 없나이다 하라 하니 사자들이 돌아가서 보고하니라.”

이 말에서 벤하닷의 첫 번째 요구와 두 번째 요구가 내용에 있어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벤하닷의 첫 번째 요구는 전쟁에 패한 왕으로서의 배상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3절). 그러나 두 번째 요구는 아합의 궁전은 물론 그의 온 백성들의 집까지도 뒤져 약탈하겠다는 일종의 수도 점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6절). 그러므로 아합의 대답은 최대한 협상일의 폭은 첫 번째 요구까지이며 그 이상의 요구에 대해서는 들어 줄 수 없다는 내용인 셈이다. 그런데 7,8절을 참고해 보면 장로와 백성들은 벤하닷의 첫 번째 요구에 이미 분노를 느끼고는 단호한 거절의 의지를 표명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아합은 백성들의 의지를 확인한 후에도 지극히 유약하고 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한다.

10절 “그 때에 벤하닷이 다시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사마리아의 부스러진 것이 나를 따르는 백성의 무리의 손에 채우기에 족할 것 같으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하매”

아합 왕의 미온적인 태도로 인해 격노한 벤하닷은 고대 근동 특유의 과장적 표현을 통해 더욱 거센 위협을 가하였다. 즉 본 절에 담긴 의미는 두 가지인 바 아람군의 무차별 살상과 공략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 성은 철저히 잿더미로 화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아람군의 수효가 하도 엄청나기 때문에 초토화된 사마리아 성의 모든 부스러기들로도 아람 군들의 주먹조차 채울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11절 “이스라엘 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 같이 자랑하지 못할 것이라 하라 하니라.”

여기서 '갑옷 입은 자'란 이제 막 싸움의 채비를 차리는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갑옷 벗는 자'란 전쟁에서 승리하여 이제 전투복을 벗는 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 절은 아직 싸워 보지도 않고 결과를 장담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이는 한번 싸워 보지도 않고서 이미 승리를 거둔 듯이 교만방자하게 군 벤하닷을 비꼬는 풍자적 표현이다. 이는 곧 우리 속담에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라'는 말과 비슷하다. 그런데 Living Bible은 영어 속담을 인용하여 본 절을 '알이 부화되기도 전에 병아리 수효를 세지 말라'(Don‘t count your chickens before they hatch!)로 번역하였다.

12절 “그 때에 벤하닷이 왕들과 장막에서 마시다가 이 말을 듣고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진영을 치라 하매 곧 성읍을 향하여 진영을 치니라.”

‘마시다’에 해당하는 '쇼테'(히)는 곧 '술을 마시다가'란 뜻이다. 이는 우리말에서도 '마신다'는 말만 가지고 음주를 완곡하게 묘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편 전쟁터에 와서까지도 한가롭게 술을 마시는 벤하닷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이스라엘군을 깔보았는지 증거해 준다.

◆ 22절~30절 아합 왕의 제2차 승전

① 22절에서 아합에게 내린 선지자의 예언처럼 싸움을 준비하고 훈련된 자만이 다가올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 사단과의 싸움에서 일회적 승리는 있을지언정 계속된 승리의 보장은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무장할 때(엡6:10-13;벧전5:9) 연승이 약속될 것이다. 따라서 아합은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여 즉각적으로 회개하고 여호와의 능력에 힘입어 싸움을 예비해야만 했었다.

② 22절의 ‘해가 돌아오면’ - 이에 해당하는 '테슈바트하솨나'는 '해의 되돌아감'이란 뜻으로 '명년 봄'을 의미한다. 근동 지방의 겨울은 우기에 해당하므로 전쟁을 하기에는 적당치 않았다. 그러므로 당시의 침공은 대개 건가인 여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얕잡아 보던 상대에게 의외의 패배를 당하는 수치에 절치부심한 벤하닷은 해가 바뀌자마자 재차 이스라엘을 침공하려 들었다.

③ 아벡(Aphek) 또는 아빅(Aphik)의 뜻은 '샘터', '강바닥', '요새'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같은 지명이지만 서로 다른 곳이 몇 군데 나오니 혼돈해서는 안 된다(수13:4;삿1:31;삼상4:1;왕하 13:17), 그 중에서 본 절의 아벡은 트랜스 요르단 븍부 지역에 위치한 성읍으로 다메섹과 벧산 또는 이스르엘 골짜기를 연결하는 도로상에 위치하였다.

④ 28절의 하나님의 사람은 13, 22절에 나오는 선지자와 동일인인 것으로 사료된다. 우주 만물의 창조주시요 통치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일개 지역 신으로 간주한 아람 인들의 처사는 여호와 신앙에 비추어 볼 때 용서받을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벡 평지에서의 전투를 통해, 아랍인들의 편협하고 우매한 생각을 무너뜨림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로 그렇듯 허탄한 이교 사상에 물들지 않도록 미연에 조치를 강구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 31절~34절 벤하닷을 살려준 아합

① 32절에서 '왕의 종'이란 말은 신하의 입장을 자청하는 굴복의 표시이다. 앞서 4절에서 '내 주 왕이여'라는 굴욕적 표현을 써야 했던 인물은 이스라엘 왕 아합이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어 처지가 뒤바뀌었다. 이것은 벤하닷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이다(28-30절).

② 32절에서 '형제'란 말은 이웃 나라끼리 사용하는 공식적 외교 용어일 경우, '동맹국'또는 '동맹국의 수반'을 가리킨다. 이는 아합의 경솔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즉 아람 왕 벤하닷은 이스라엘의 대적이자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한 자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벤하닷을 멸하기로 작정하셨다(42절). 그런데도 아합이 벤하닷을 가리켜 '나의 형제'라 하였으니 이는 큰 실책인 것이다.

③ 33절에서 아합이 벤하닷을 자신의 병거에 태워 자세를 나란히 한 것은 곧 그와의 동반자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독하고 또한 이스라엘 영토를 침략한 벤하닷에게 아합은 마치 동지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아합의 이처럼 애매한 처신은 곧 아합 통치의 성격을 은연 중 드러내보여 주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아합의 통치는 외국과의 교류와 경제에 의존하는 기반위에 토대하고 있었다.

④ 아합이 몇몇 성읍의 반환과 무역 이익을 보장 받고선 벤하닷을 살려준 조치는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가들에겐 납득할 수없는 행위였다. 즉 그들에게는 분명 아합의 처사가 눈앞의 조그마한 경제적 이익과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맞바꾼 불순한 결정으로 보였을 것이다(42절).

◆ 35절~43절 아합에 대한 심판 예고

① 어떤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책망을 가했다. 유태인은 이 선지자가 미가야라고 한다. 그런데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아합은 미가야 선지자를 "항상 자기에게 악을 예언한다" 고 불평했기 때문이다(22:8).

② 다소 어려운 일이었으나, 선지자는 스스로를 부상시키게 된다. 어려웠다는 것은 아무도 자기 손으로 부상을 입히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아합에게(아마 알고 있었겠지만) 선한 선지자도 하나님께서 "때리라고" 말씀하였을 때 친구 선지자를 때리지 않다가 이처럼 처벌을 받게 되니, 하나님께서, "때리라" 고 말씀하셨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적을 때리지 않는 사악한 왕은 더욱 심한 처벌을 받아 마땅한 것임을 암시하려는 것이다.

③ 선지자가 얻어맞은 후 재(灰)를 가지고 위장하여 자기가 선지자임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벤하닷을 살려 준 일이 범죄가 된다하여 아합 왕을 비난하는 얘기를 하고 아합 왕의 판단이있기를 기대했다.

④ 선지자의 비난에 아합이 몹시 분개한다. 진실로 참회하는 것이 아니며, 실수한 바를 원상태로 하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선지자에 대해 격노하고 하나님에 대해 분격하며(마치 아합에게 선고된 형이 너무 가혹한 것처럼) 자신이 안절부절 못하고, 승리에도 불구하고 모든 웃음을 잃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