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이 알고 싶다’는 종교개혁에 대한 큰 그림을 알고자 하는데 유용한 책이다.
한국성서대학교 역사신학 교수가 썼는데 종교개혁 일련의 과정을 담담히 전달하고 있다.
<종교개혁의 배경>
1)로마가톨릭의 타락
종교개혁은 중세 천 년을 거치면서 로마가톨릭에 의해 진리를 떠나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버린 교회와 신학을 개혁해 초대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돌리려는 회복과 갱신운동이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붙인 것을 시작으로 유럽 전역에 불길같이 퍼져나갔다. 그 배경으로는 로마가톨릭의 타락을 들 수 있다. 로마가톨릭으로 대표할 수 있는 중세 교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초대 교회의 신앙에서 떠나 점차 변질 돼 갔다. 교회가 타락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보다 유일한 진리인 성경에서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을 대체한 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쌓여온 교회의 전통과 관습에 의존하는 신앙이었다. 대표적으로 성자와 성물 숭배다. 로마가톨릭 교회는 도시와 사람마다 ‘수호성자’를 임명해 그들이 보호하고 지킨다는 신앙을 만들었으며 문제가 있을 때에는 그들에게 먼저 간구하도록 가르쳤다. 특히 마리아 숭배의 성행으로 마리아가 만인의 어머니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중보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사람들이 가지면서 교황청은 마리아 숭배 사상을 점차 발전시켰다.
또 성자들의 유물이나 유골을 성물로 숭배하며 순례자들을 끌어들였다. 인기 있는 성자들의 유골은 그대로 보존되지 못했고 축성식을 통해 한 몸을 여러 부분으로 나눠 보관하는 관습이 성행했다.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성물은 예수 그리스도가 달린 십자가의 나무 조각들이었다. 이 밖에도 예수의 가시면류관, 수의, 십자가의 대못,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남은 빵, 마리아의 머리카락, 성자들의 옷과 머리카락 등 다양한 성물이 존재했다. 성자와 성물 숭배는 성지 순례로도 이어졌다. 위대한 성자가 묻혀 있거나 수많은 성물이 보관돼 있는 성물 보관소가 위치한 성지를 순례하면 놀라운 육체적, 영적 치유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을 비롯해 이탈리아 로마,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등이 유명한 순례지였다.
로마가톨릭은 중세시대 봉건제도의 사회적 틀 안에서 복음 전파와 영혼 구원의 본질적 사명과는 전혀 상관 없는 정치적인 괴물로 변해갔다. 로마가톨릭 교황은 로마와 이탈리아 지역을 다스리는 봉건 영주의 역할을 하게 돼 세속 군주로까지 군림하게 됐다. ‘카노사의 굴욕’과 ‘아비뇽 유수’는 이 시대 교황청의 세속화를 드러낸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아비뇽으로 옮긴 교황청은 새로운 환경에서 현실적으로 심각한 재정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로마에 있는 교황청에 대한 재산권 행사가 제한된 상태에서 교황청 건물을 화려하게 짓고 예술품들로 채우며 전쟁을 수행하는 용병까지 고용하기 위해선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재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황청은 새로 임명된 주교가 첫 해의 수입 전부를 교황에게 바치는 임직세, 교황이 주교 임명을 미루고 그동안의 수입을 교황이 대신 받는 보류세, 성직을 판매하는 대가로 얻는 성직매매세 등 성직 매매와 다양한 명목의 헌금을 거둬들였다.
로마가톨릭의 또 다른 수입원은 면죄부였다. 면죄부는 원래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병사들이 고국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경우 자신이 지은 죄의 벌에 대해 대가를 면제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시행됐던 제도인데 하나님 구원의 은총을 구입할 수 있다는 편리성으로 인해 대중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게 됐다. 교회는 십자군이 아니어도 돈을 기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면죄부를 구입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선전했고 1457년 연옥에 있는 영혼들도 면죄부에 의해 구원이 가능하다고 공포했다. 면죄부는 이후 교회가 성당, 병원, 공공 건축 등 대형사업을 진행할 때 재원을 마련하는 주요한 수입원이 됐다.
성직자의 타락과 부패는 심각한 수준이어서 대중의 무시와 경멸을 받을 정도였다. 성직자는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을 고수하는 것이 로마가톨릭의 공식적인 입장이었지만 사실 이 제도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단적인 예로 교황 알렉산더 6세는 여러 명의 첩을 두고 일곱 살 된 아들을 추기경에 임명하기도 했다. 성직자들은 이처럼 성적으로 타락하고 부도덕했을 뿐만 아니라 성경과 교리에도 무지했다. 성직자의 사생아로 태어난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에서 성직자들에 대해 "나는 그들보다 가엾은 사람은 상상할 수 없다. 그들은 스스로 성스러운 맹세를 통해 비참의 호수에 빠진 이들이다"라고 비꼰다.
2)인문주의
1453년 동로마제국이 이슬람의 오스만제국에 의해 멸망당했다. 그러자 학자들은 그동안 제국에 잘 보관돼 오던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문헌을 가지고 서유럽으로 넘어왔다. 그러면서 14∼16세기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르네상스 운동은 고대 문헌 연구를 중심으로 ‘아드 폰테스(근원으로 돌아가자)’를 외치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가 성취한 인간 중심의 학문과 문화로 돌아가자는 회복으로 진행됐다. 르네상스 운동은 중세를 지배한 기독교의 하나님 중시적 사고에서도 탈피해 새로운 인간관의 부활을 주창했다. 르네상스 운동은 알프스를 넘어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아드 폰테스의 종교적 적용을 통해 종교개혁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인문주의자들이 그리스 로마의 고대 문헌을 연구했던 것처럼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근원이 되는 성경 연구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3)민족주의
유럽의 민족주의는 왕권과 교황권의 대립과 갈등 과정에서 발전했다. 교황은 보편주의를 내세워 유럽 전체를 하나의 신앙 공동체로 생각했고 각국의 종교 뿐 아니라 정치까지 관여했지만 중앙집권화를 이룬 왕들의 입장에선 더 이상 이를 허용할 수 없었다. 특히 상당히 빠른 시기에 민족국가를 형성한 프랑스는 자국민들이 종교적 목적으로 내는 헌금이 교황청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문제 삼았으며 평신도 서임권 문제로도 충돌했다. 갈등이 표면화된 것이 프랑스왕 필립 4세와 교황 보니페이스 8세간 대립이다. 1296년 교황은 ‘우남상탐’ 교서를 통해 교회의 단일성을 강조하고 세속의 권력은 영적 권력에 종속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황의 허가 없이 징세하는 왕과 왕에게 세금을 내는 성직자들을 파문하겠다고 위협했지만 별 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38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들이 교황 승인 없이도 독립적으로 황제를 선출할 수 있다는 선언까지 하게 됐다. 각국의 왕이나 귀족들이 교황으로부터 정치적, 종교적 독립을 선언하게 되면서 종교개혁자들이 세속 정치권의 지지 아래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
4)인쇄술의 발달
1450년쯤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인쇄술은 종교개혁 사상을 유럽 전역에 빠르게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됐다. 이제까지 오랜 시간을 들여 필사를 통해 만들어지던 책이 나무틀에 금속으로 된 글자들을 배열해 잉크를 묻혀 한 번에 대량으로 인쇄할 수 있게 됐다. 95개조 반박문도 이전 같았으면 독일 한 지방의 논쟁으로 그칠 수 있었던 문제였다. 하지만 인쇄술의 발달로 2주일 만에 독일, 몇 달 안 걸려 유럽 전역에 루터의 사상이 확산될 수 있었다. 루터는 "인쇄술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종교개혁의 선구자들>
1)존 위클리프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여러 사람들이 성경을 기준으로 로마가톨릭의 오류와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교회개혁을 시도했다. 존 위클리프는 ‘종교개혁의 새벽별’로 불리는 사람이다. 영국 사람으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고 학장까지 지냈다. 그는 지속적으로 로마가톨릭을 비판하였는데 이로 인해 이단으로 정죄당하기도 했다. 그의 사상은 당시 영국에서 싹트고 있던 민족주의 영향으로 귀족과 대중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에 살아 있는 동안 큰 핍박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죽은 뒤 30년이 지나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그의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불사르고 그 재를 스위프트 강에 뿌리도록 명령했다. 그는 당시 통용되던 라틴어 성경인 벌게이트를 영어로 번역하여 영국 사람들이 성경을 쉽게 접하고 읽을 수 있도록 했다. 그가 성경 번역에 헌신한 이유는 성경이 교황권이나 교회 법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이는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의 기초가 됐다.
2)얀 후스
얀 후스는 보헤미아에서 위클리프 사상을 수용해 교회개혁을 외쳤다. 당시 프라하 대학에선 옥스퍼드 유학파 출신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위클리프 개혁 사상을 가르쳤다. 보헤미아 지역에서 위클리프 사상이 확산되자 이를 막기 위해 프라하의 대주교는 위클리프의 책을 읽는 것과 체코어로 설교하는 것을 금지했다. 하지만 프라하 대학에서 위클리프 사상을 수용한 후스는 성직자로서 서품을 받고 1402년부터 종교개혁을 진행해갔다. 그는 체코어로 설교를 하고 자신이 직접 작사한 찬송가를 성도들에게 가르치며 함께 부르도록 했다. 1409년에 그는 프라하 대학의 총장까지 됐다. 결국 후스는 1411년 로마가톨릭 교회에 의해 파문당하고 1415년 콘스탄츠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요청받았다. 그는 이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돼 화형을 당했다. 후스는 보헤미아어로 ‘거위’를 의미하는데 그는 화형 당하기 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당신들은 지금 거위를 불태우지만 앞으로 100년이 지나면 백조가 나타나 유럽을 뒤흔들 것이며 그 때는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이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후스의 유골은 라인 강에 뿌려졌지만 여러 보헤미안인들은 후스가 불탄 자리에 있던 흙을 파서 보헤미아로 가지고 돌아가 그를 기념했다. 보헤미아인들은 콘스탄츠공의회를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후스의 죽음을 순교자의 죽음으로 선포하며 교황에 대항해 후스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3)에라스무스
위클리프와 후스와 달리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 시대의 인물이다. 그는 로마가톨릭의 오류와 잘못을 인문주의자로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성경을 번역해 종교개혁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하지만 막상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시작되자 자신은 로마가톨릭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온전한 개혁을 주장해 새로운 시대를 잉태하는 종교개혁자가 되지는 못했다. 에라스무스는 당대의 인문주의자 영국 토마스 모어 등과 교유하며 ‘우신예찬’‘그리스도 병사의 지침서’ 등을 통해 로마가톨릭 교회의 위선을 풍자해 신랄하게 비판했고 성경 연구와 경건 생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에라스무스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용의 입장을 고수했다. 당시 로마가톨릭이나 종교개혁 진영 입장에선 그의 학문적 명성과 능력으로 인해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길 원했지만 그는 끝까지 중립을 지켰다. 특히 루터의 실망은 상당했다. 그는 에라스무스에 대해 "미꾸라지 같은 인간"이라거나 "믿을 수 없는 인간"이라며 심한 비난도 서슴치 않았다.
<요약>
1. 종교개혁은 로마가톨릭의 타락, 인문주의 유행, 민족주의 발흥, 인쇄술의 발달 등을 배경으로 진행됐다.
2. 존 위클리프는 종교개혁의 선구적 인물이었으며 그의 생각을 받아들인 후스는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했다.
3. 에라스무스는 로마가톨릭 공격에 앞장섰지만 종교개혁 과정에서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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