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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 지형도> 12 기독교 윤리학

은바리라이프 2020. 9. 30. 15:17

기독교 윤리학이 없었을 때: 무대 배경

현대 기독교 신학의 고유한 특성을 제시하려면, 먼저 현대 신학자들이 신학

과 윤리학의 관계를 이해하는 특이한 방식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이m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현대의 조직신학자들이 (특별히 이전 세대들의 기도

인들과 비교하였을 때) 윤리적인 문제들에 대단히 드불게 주의를 기울였다는

. 그리고 역으로 기독교 윤리학자들이 기독교 신학을 직접 인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대단히 드물었다는 사실이다. 이 장에서 나는 이런 사태에 대해

기독교 윤리학의 관점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최소한 미국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기독교 윤리학자들은 명확하고 조직적으로,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중이다. 조직신학과 기독교 윤리학이 어떻게 이렇게

소원해질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수세기에 걸쳐 도덕적 성찰의

기독교적 관점을 변경시켰던 몇 가지 중심적인 변화를 폭넓게 개관해야 한

. 이 개관은 기독교 윤리학 과목의 현대적인 윤곽과 관련된 독특한 특성

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며, 기독교 윤리학의 기초를 놓은 세 명의 인물들에

대한 설명으로 전개될 것이다. 월터 라우셴부시 (1861-1918), 리처드 니다

(1894-1962), 그리고 그의 형제인 라인홀드 니버(1892-1971)가 그들이다.

는 기독교 윤리학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자 중 한 사람인 스탠리 하우어

워스(Stanley Hauerwas, 1940-)가 제기한 이 과목에 대한 비판을 요약함으

로써 결론을 내릴 것이지만, 그의 사상은 이 장을 시작하는 큰 틀의 밖이 아

닌 안에 놓일 것이다.

 

 

기독교는 강력한 이교적 제국 안에서 일종의 소수 분파로서 시작되었나. 관료적이고 군국주의적인 제국의 뒤편에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문화적인 기억과 다채로운 실천을 간직한 철학파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이 학파들은 종종 지적으로는 교양 있고 도덕적으로는 모범적인 사람들로 이상화되고 존경을 받았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153-217)와 같이 도덕적인

질문을 다루었던 몇몇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은 철학자들의 역할이 이교 사회 안에서 도덕적이고 지적인 귀감이 된다고 전제하면서, 자신들이 더 나은

철학의 공급자들이라고 자칭했다. 테르툴리아누스(145-220)와 같은 다른 신학자는 군국주의적인 다수 문화와 그리스 철학이라는 내적인 그림자 모두를 거절했고, 기독교와 이교 간에 모든 형태의 도덕성을 분명히 구분할 것

을 제안했다. 두 가지 양식의 사상가들이 모두 가정했던 것은 이교 사상이

지배하는 현실이었다. 그들 모두는 자신들이 소수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변

호하고 있다고 느꼈고, 그 입장에서 기독교인의 삶을 설명했다.

 

서방에서는 적어도 아우구스티누스(354-430)와 함께 이 모든 것이 결정

적으로 바뀌었다. 그의 강력한 신학적인 비전은 곧 서구 사상의 지형도를 지

배하게 되었다. 로마 제국의 붕괴 그리고 제국의 쇠퇴와 함께 이어졌던 황제

들의 회심 또한 철학 유파들이 의존해왔던 후원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그 결

과 오래된 이교 세계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으며, 기독교 신학이 일어나 현실

에 대한 지배적인 설명을 제시하게 되었다.

 

고대 세계에 폭넓게 분포되었던 종교들은 신전의 많은 신들이 북적대는 우주에 대한 지배적인 신념에 근거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의 확산과 소위 중세기라고 특징

지어지는 문화적인 변천이 협력하여 그런 이교 사상을 극복했다.

 

새로운 상식에 따르면 구약과 신약성서의 삼위일체 하나님, 곧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만 계시고, 오직 하나의 교회만 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시대에 수도원은 철학 유파라는 도덕적이고 지성적인 엘리트들이 개방해놓았던 문화적 공간 안에 여전히 머물면서, 그 공간을 재구성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수세기가 지난 후 철학이 이번에는 기독교 세계 내에서 소수자의 목소리도서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철학의 귀환은 중세 중엽(1200-1300)에 도시의 수도원에서 임계점에 도달했는데, 그 수도원들은 부유했고 정치권력과도 잘

연결되어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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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음에 유의하라.

 

기독교의 첫 시대(대략 400년까지)에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숙고는 신약성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이 저술한 모든 분야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기독교의 두 번째 단계(대략 400-1400)-흔히 모든 사람이 기독교인인 것

으로 전제되는 콘스탄티누스 시대-에서는 "기독교적"이라는 용어가 포괄적

인 서술어, 곧 삶의 모든 형태를 포함하는 커다란 우산이 되었다. 기독교적 다

덕성은 '상식"으로 취급되었으며, 이 시대에 도덕적인 삶에 대한 유일한 며

적인 토론은 수도원과 고해성사 규정서에서만 발견될 수 있었다. 종교개혁은

대체로 이런 형태들에 도전하지 않았고, 오히려 수도원적 삶이라는 "고차원

적인 미덕'을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확대하려고 시도했다.

 

비록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야기한 변화가 문화적·신학적으로 심오하

기는 했지만, 성서 주석과 교리 신학으로부터 분리된 독립적인 학문 분과와

연구 주제로서의 "기독교 윤리학"이 출현하기 위한 필수조건들은 여전히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 조건을 위해 최종적인 변화가 발생해야만 했는

, 그것은 비신학적인 사상의 지적이고 문화적인 지배 아래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기독교 사상은 이제 더 이상 이교 철학에 근거하지 않

았고, 수도원으로부터 출현하는 새로운 명칭의 철학을 가리켰다. 역설적이

게도 수도원적인 배경에서 자연적 이성에 대한 보다 강한 호소를 허용하는

특성들이 공고해졌는데, 그것은 하나님이나 계시를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중세 중엽에 시작된 바로 이런 사상적 궤적으로부터, 현대로 변화하는 근간

을 표시해주는 계몽주의라는 운동이 출현한다. 계몽주의 운동의 결정식인

특징은, 하나님을 언급하지 않고서도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 어떤 실체로

이해되는 이성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이 아니다. (수백 년 동안 일부

기독교 수도사들이 그렇게 주장해왔다.)' 오히려 그 특징은 계몽주의 철학자들

이 수도사들이 아니었고, 계시된 진리를 단지 형식적으로만 승인했다는 사

실에 있다. 계몽주의 철학에서 하나님은 주로 인간적 지각의 진실성을 보장

하기 위해 요청되는 방관자로 머문다. 교회로부터 해방된 것, 그리고 계시

되 진리의 속박이 느슨해진 것은 궁극적으로 철학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

하 모든 언급으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도록 만들었다. 최악의 경우에 하나

님과 기독교는 이성의 적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기독교-이후"의 그런 합리

성의 가능성은 서구의 세 번째 시대의 결정적인 특징이다. 늘날에 와서야

우리는 이교적이지도 기독교적이지도 않은 세속인을 보통 사람으로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에 와서야 겨우 신앙과 기독교 윤리는 사람들이 일

반적으로 합리적이기에 도덕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배후에

서 선택되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많은 세기가 지난 후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적 전제들이 지배

적인 것이 되어버린 지적인 세상 안에서 자신들이 다시 한번 소수자의 입

장에 놓이게 된 것을 발견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기독교의 제2국면에서

서구 철학자들이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들이나 성직자들이었다면, 계몽주

의는 서구의 신학자들이 대부분 대학과 같은 세속적인 연구 기관들 안에서

발견되는 시대를 열어주었다. 이제 신학자들은 신학교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해도 대부분의 경우 일반대학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다. 오직 이런 발전

안에서 "기독교 윤리학"은 오늘날 개신교적인 서구에서 대학의 독자적인

학문 분과로 성립될 수 있었다.

 

 

현대성과 신학

현대신학의 전체적인 윤곽이 세속적인 이성의 솟아오르는 물결에 대한 오

래된 반응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세속적인 도덕성"이 자

명한 것으로 가정될 때, 기독교인들은 교리나 주석을 언급하지 않고서도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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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윤리적인 주장을 정당화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고대와 중세의 맥

락에서는 서로 다른 방식이기는 해도 모든 도덕적인 주장이 신학적 주장을

함축한다는 것은 명확했다. 고대 세계에서 어떤 사람의 삶의 방식은 그것을

설명하는 철학적 혹은 신학적인 언어와 본질적으로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

되었다. 나아가 형이상학적인 주장은 흔히 어떤 윤리를 지탱해주는 개념적

인 신념으로 이해되었다. 예를 들어 스토아 철학자들은 생의 도전들에 굴하

지 않는 자신들의 윤리를 설명해주는 우주론을 가지고 있었으며, 반면에 에

피쿠로스 철학자들은 우주가 그와 다르게 구성된 것으로 보고 감각에 몰두

하며 보내는 삶을 지지 했다. 형이상학과 윤리학의 연결이 중세 초기까지 그

와 같이 전제되고 계속해서 유지되었던 것은,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바르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한 담론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성이 지니는 형이상학적

인 현실성의 함축으로 생각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대단히 중

요한 일치의 내부에서 다른 한 가지 고대적 특성이 중세 중엽에 새롭게 누

드러지게 되었다. 그것은 일상적인 삶의 질문으로부터 분리되고 그 질문보

다 뛰어난 것으로 생각되었던 "이론적인 이성"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사상,

그리고 심지어 학식 없는 이들도 유용하게 사용했던 추론의 형식들 사이에

있었던 "실천 이성"이었다. “실천 이성"은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잔여 지식에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것은 씨를 뿌리고거

두는 시기, 송사에 대한 판결 방법, 또는 자녀 양육법 등에 대한 지식이었다.

현대성은 단지 세속적인 이성의 시대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이론

과 실천 사이의 간격이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시대로 이해되어야 한다. 임마

누엘 칸트(1724-1804)는 윤리적 의무의 전제들에 대한 자신의 이론(지금은

메타 윤리학이라 불리는 것)을 그 의무의 규칙들이 작동하는 맥락에 대한 질

문들(지금은 특수 윤리학 또는 실천적인 추론이라 불리는 것)로부터 구분함으로

, 윤리학에서 그 톡성을 법전과 같이 모범적으로 서술했다. 세계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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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이론화로부터 실천적인 삶을 이런 식으로 새롭게 분리함으로써,

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인 윤리학을 우리가 "아는" 것 즉 우

리의 마음에 믿고 있는 것으로부터 연역된 것이라고, 또는 그 아는 것에 의

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윤리학의 "문제"는 어떻게

"자연적" 이성(계시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인간의 이성)이 알고 있는 것을 일상적

인 삶의 정교한 구조 및 상황과 연결시키는가 하는 것이 되었다. 고대인들의

질문은 "실재와 관련하여 어떤 설명이 참이며 더 나아가 인간의 삶을 가장

잘 인도하는가?"라는 것이었던 반면에, 현대의 질문은 "어떻게 나는 내가 믿

는 것을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와 관련시키는가?"이다. 현대에 기독교

인이 된다는 것은 생각하고 고백하는 것과 사는 것 사이의 괴리, 즉 기독교

신학과 윤리학의 소외가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괴리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현대성"은 기독교인들이 세속적인

도덕성에 대해 적절한 응답을 발견해야 하는 문제와 직면하는 시대를 가리

기며,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현실성에 대한 교리적

긴 왁승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도덕성 "을 소유한다고 주장하려는 유혹

e 받고 있음을 뜻한다. 지난 150-200년 동안 기독교 윤리학의 이야기가

대체로 그와 같은 유혹에 굴복했던 역사라는 사실은 통탄할 일이다." 내가

곧바로 제시할 것처럼 자칭 현대 기독교 윤리학의 실행가들은 점점 더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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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적인 이성에 의존해왔으며, 그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하심, 성서, 교리,

리고 교회적 실천의 영역으로부터 도피하려는 관심에 이끌렸다. 칸트는 만

일 인류가 성숙해지려고 한다면 인간성은 "자율적이고" 자유롭고 합리적이

며 하나님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순종하지 말아야 한다고 기독교인들을 설

득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런 유혹의 상황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때 카드

에게 하나님은 엄격한 개인적 이성과 양심 안에서 작동하는 경건주의적 옷

어로 정의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미국의 기독교 윤리학의 기초를 놓은 이

물들의 저작을 읽을 때 받는 압도적인 인상은, 몇몇 주변적인 예외가 있다

고 해도, 그들이 교리적인 용어로는 전혀 사고하지 않으려고 한 것처럼 보인

다는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기독교마저도 계몽주의적 신념과 함께 살아가기

를 기대하는 세상 앞에서, 바로 그 기독교를 존경받을 만하게 만드는 것이었

. 오직 기독교가 계몽주의적 규칙들을 준수하면서 경기할 때만 "기독교 윤

리학"도 하나의 문명화 세력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쇠퇴의 이야기로 시작함으로써 나는 기독교 윤리학이라는 현대적

인 학과의 기초를 놓았던 이야기를 전도시키려고 한다. 시초부터 기독교 윤

리학은 기독교 교리가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는 문제를 일으킬 뿐이라고

생각하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전제에 근거한 학과였다. 자유주의 신학은

정의로운 교회란 고착화되어 있는 잘못된 신념을 벗겨내는 것을 통해서만

생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에른스트 트릴치(1865-1923)는 기독교 한더그

을 자율적인 이성의 원칙에 의해 조직되는 대학의 학과로 설정하는 전제들

을 마련했다. 그에게 수십 세기 동안의 기독교 사상은 보편적 윤리의 건설

에 봉사하기 위해 단지 보충되어야 할 뿐인 낡아빠진 개념의 목록으로 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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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되었다.' 하지만 자유주의자들도 전통적인 자료들에 몰두하는 학과에서

고육을 받은 사람들이었고, 그들도 발췌된 전통적인 자료집을 사용하였으

며 전통적인 교리들이 유산으로 남겼다고 믿는 문제들을 극복하려는 목적

ㅇ로 그 자료들을 취급했다. 만일 그들에게 배운 학생들이 이미 세속적인

한리성의 대안적 윤리학의 틀을 수용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런 방식으로

전통적인 신학적 사고와의 접촉을 단절했던 것은 심각한 마비증세를 일으

켰을 것이다.

이와 같이 고전적인 기독교 언어 및 교리와 더 이상 친숙하지 않게 된

것은 두 가지 광범위한 결과를 불러왔다. 첫째, 그것은 신학을 윤리적 문제

와 개념에 일차적인 관심을 갖도록 재정립한 것이었다. 이것은 "윤리학"

개념을 다양한 맥락에 놓인 기독교인들의 일상의 삶으로부터 분리시켜 추

상화함으로써 나타난 불가피한 결과였다. 둘째, 전통적인 자료들에 대한 그

와 같은 조각난 접근방법은 현대라는 시대가 기독교의 도덕적인 주장은 언

제나 교리적인 확증의 결과로 이해했는지 여부를 더 이상 알 수 없게 만들

고 말았다. 이에 따라 현대의 기독교 윤리학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원천을

그저 오해만 하면서 잘못 읽는 경향을 보였다. 많은 예 가운데 하나를 들자

면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의 도성」』 14권에서 전개하는 "타락에서 성의

역할"에 대한 설명은 거의 언제나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망 없이 역행하는

인간론, 가부장적인 형이상학, 그리고 그와 비슷한 것들만을 입증하기 위해

인용된다. 현대 기독교 윤리학이라는 분야는 타락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

의 교리적·주석적 연구가 근본적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가정함으

로써, 그가 제기하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들을 직시하기를 전형적으로

거부한다. 어떻게 타락은 우리의 몸과 갈망에 혼돈을 초래하는가? 몸의 구

속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미덕은 "몸의 습관'일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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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가? 이와 같은 거리감에 유의한다면, 우리는 수세기에 걸쳐 신학과 도덕

적인 삶 사이에 분리를 만들어낸 것이 재앙과도 같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는 사실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된다.

이 논문의 목적은 그 갈라진 균열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

려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우리는 미국 대학 내의 학과 중 하나로서의 기

독교 윤리학의 발전에 대해 보다 상세히 설명할 것이다. 또포한 우리가 말해야

할지도 모르는 다른 이야기가 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이론적 이성과 실

천적 이성 사이의 분리가 너무나 확고하게 되었고 신학은 이론적 이성과 너

무 깊이 연계되었기 때문에, 신학은 실천적인 추론에는 별다른 관심도 없고

관련도 없는 사변적인 학문이 되고 말았다. 도덕적인 생각은 목회 신학"으로

이관되었고, 성공회와 스코틀랜드 교회의 신학교에서만 수행되고 있다. 케네

스 커크(Kenneth Kirk)하나님의 비전(The Vision of God)은 그와 같은

전통의 한 사례이며, 아래에서 상론하게 될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의 시대석

추세와 영향 아래서 일어난 발전을 대표하는 모리스와 월일리엄 템플"의 삭

품도 마찬가지다. 칸트, 피히테,10 헤겔11과 같은 전형적인 계몽주의 사상가

 

드의 윤리학에 강한 홍미를 느꼈던 대륙의 이야기도 그와 다르지 않다.

o 같은 독일 관념론의 전통에서는 윤리학이 철학에 통합되는 것으로 간주

되었는데, 왜냐하면 윤리 없이는 어떤 사고 "체계"가 완결될 수 없기 때문이

었다. 이론 이성은 여전히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통합하고 통제하

는 방식으로 실천 이성을 필연적으로 포괄해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이와 같

은 독일 전통이 미약하게 기독교화된 변형(이자크 도르너) 12이 있었고, 나중

에 보다 강력한 신학적인 변형도 있었다(칼 바르트13, 에밀 브룬너4, 헬무트 틸

리케15). 저지대 나라들에서 이와 관련된 접근방법들이 발전되었으며, 덴마

크의 닐스 쇠에(Niels Hansen Soe)'b와 문화적으로 영향력 있는 네덜란드

칼뱅주의자들의 작품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저술이다.

네덜란드 칼뱅주의 자들이 이전 세대의 스콜라주의적인 가톨릭교인들

과의 대화에서 자신들의 윤리적 설명을 명문화했다는 것은 여기서 자세하

게 설명할 수 없지만, 로마 가톨릭의 도덕 신학이라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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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나의 논의는 "기독교 윤리학의 영어권 전

문용어의 모관이자 그것의 제도적 발전의 본고장인 서구 개신교의 이야기

. 가톨릭의 이야기는 훨씬 더 길고 복잡하며, 거기에는 중세 중엽의 질문

들과 토마스 아퀴나스1B의 사상이 구성적인 역할을 했다. 도덕 신학에 대한

가톨릭의 주장은 자연법 개념의 주위를 선회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퀴나스

는 기독교 교리를 윤리학, 교회법, 고해성사 규정(고해실에서 사제들이 어떻게

각각의 죄의 무게를 달아 고행을 할당할 것인지를 가르치기 위한 규정-역자 주)

과 함께 엮기 위해 자연법 개념을 발전시켰다. 로마 가톨릭이 도덕 신학이

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고전적·스콜라주의적인 접근방법의 현대적 사례를

보려면, 저메인 그리세츠의 주 예수의 길을 보라."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가톨릭적인 것으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개신교 신학의 영향을 받은 도덕적

질문들에 대한 로마 가톨릭적인 접근방법을 위해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

생명의 복음을 보라.

 

미국의 기독교 윤리

이제 나는 지난 150년 동안에 기독교 윤리학의 발전에 뚜렷한 특징을 T

해준 사람들에게 보다 밀착하여 집중하려고 한다. 윤리학은 자율적인 이성

의 전제들 아래 형성된 교육기관들 안에서 정확하게 어떤 환경에 놓이게

되었는가?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그런 풍경 안에서 기독교적 행위의 자리를

무엇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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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윤리학이 미국에서 하나의 학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하 가지 현저한 문화적 요소는 기독교 윤리학의 기초를 놓았던 사람들이 1

arl 독일계 미국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왜 윤리적 담론이 자

우주의 신학의 전제에 의해 거의 전적으로 지배당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많

으 부분을 설명해준다. 월터 라우센부시, 리처드 니버, 그리고 라인홀드 니

버는 모두 문자적·상징적으로 독일 자유주의 개신교의 후손들이었다. 이것

이 미국 기독교 윤리학의 이야기에 대한 첫 번째 역설이다. 윤리학의 형식

과 내용은 철저하게 개신교적 유럽에서 생겨난 매우 특수한 일련의 문화적

이고 이론적인 전제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두 번째는 이 세 명의 사상가들

이 모두 균형 잡힌 신학교 교육에 깊이 젖어 있었기는 했지만, 그들은 전체

적으로 독일 경건주의 전통의 훌륭한 대표자들이었기에, 원칙적인 근거에

서 그들은 그런 신학교육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월터 라우셴부시 : 하나님 나라와 사회 복음

이 세 명의 사상가들이 독일 경건주의의 대표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들

이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경험을 생기 넘치도록 확증했으며, 다양한 정도로

실제 그렇게 경험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월터 라우센부시는 이 점

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그는 따뜻한 신앙을 가졌고 기도와 예배를 향

안 강한 열망을 보였다. 하지만 전통적인 경건주의자들의 신학과는 달리.

그의 신학은 사회적인 연대를 창조하는 사랑의 힘에 날카롭게 집중되어 있

지으로 제시되는 구약성서적 감수성의 정점으로 생각했다.21 라우셴부시의

견해에 따르면 그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산업화된 현대적 삶이 사회에 촉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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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던 파괴적인 힘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의 대응책은 사회에 정의와 물질적

인 평등을 가져오기 위해 사회적인 연대를 창조하고 또 모든 인간을 평등

하게 만드는 기독교적 사랑의 회복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찬송과 기도는 무

엇보다도 그와 같은 정서들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운동의 중심이 되었으며,

이 운동은 사회복음 운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물론 라우센부시는 고대의 기독교적 감수성도 회복시키는 중이었는데,

그것은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자들의 복지에 대한 불타는 열정이었다.

열정은 구원이란 사회복음을 산출하는 공동체적 현상이라는 그의 이해에

의해 뒷받침되었고, 그의 사회복음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이 예수의 메

시지의 바른 방향이라고 말했다. 기독교 윤리학의 과제는 1912년에 출간된

그의 책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사회적 질서의 기독교화 다. 기독교 윤리학

이라는 좁은 학문 분야에서 "하나님 나라"를 주도적인 중심 주제로 확립했

던 사람은 라우셴부시였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후일 미국의 모든

성향의 사회 활동가들에게 접근 가능한 용어를 만들어주었다. 그 나라는 부

르주아 개신교의 자기만족적인 기독교와 라우셴부시가 수도원적인 내세성

이라고 불렀던 금욕적 은둔을 거부하는 것으로써 특징지어졌다. 라우셴부

시는 "인류는 용감하게 세상을 악하다고 말하고 그런 세상을 변화시킬 ㅜ

있는 혁명적인 기독교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결론지었다23 이런 역할의 표

회가 미국의 구원에 있어 핵심적인 실행 기관이어야 했다.

라우셴부시는 신학의 과제에 대해 고전적인 "칸트-이후"의 설명을 했

. 설명의 목표는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 수세기

동안 쌓여온 기독교의 성서적· 교리적 오해의 껍질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라우센부시는 역사비평의 방법이 윤리적인 문제에 관여하는 교

회를 든든하게 만들어줄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

22) Walter

 

505

. 라우셴부시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성서의 예언자적 정신의 체현이

, 사회적인 주제들에 대한 거리낌 없는 관심과 구약성서의 방대한 본문에

서 그토록 분명히 제시되는 제의적인 주제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내어 보여

주신 분이다. 이에 더하여 예수는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 안에 있었고, 그 교

제가 그분의 사회적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원천이었다. 예수는 단지 유대

이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려고 애쓰

셔다 그곳에서는 강압이 아니라 설득이 행동 양식이며, 구약성서의 군주적

이고 제의적인 함축성은 청결하게 세척된다. 하나님 나라는 묵시적인 심판

의 불과 지옥불로 도달하는 곳이 아니라, 상호 간의 사랑과 평등의 세포들

의 점진적인 성장 안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라우셴부시는 이와 같은 기본적인 기독론을 넘어서지 않았으며, 그리스

도의 본성에 대한 고전적인 교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24 라우셴부시의 예

수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했던 구약성서의 예언자적 전

통의 최고 정점이었다. 정의를 위한 예수의 사역의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은.

보다 민주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해 구약성서의

군수적인 아버지 개념에 항거했던 것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라우셴부시

ㄷ 삼위일체의 언어를 거부했고, 성령을 단지 예수와 예언자들이 대변했던

정신과 부합하는 해방의 힘으로만 말했다. 성령에 대한 그와 같은 이해는

결과적으로 계시를 현존하는 사물의 질서에 대한 하나님의 적대감을 표현

하는 예언자적 정신을 일깨워주는 것으로 정의했다. 라우센부시는 슐라이

어마허(1768-1834)의 영향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으면서도 죄를 정의

할 때 인간론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진 슐라이어마허적 용어인 '죄 의식'

라는 표현을 채택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속죄는 그리스도께서 개인적인 죄

를 짊어지셨다는 것에 달려 있지 않고, 그분이 설교를 통해 반대했던 사회

 

506

적인 죄의 예봉을 젊어지신 것에 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은 그

분이 설교를 통해 저항했던 세력, 곧 개인적인 경건과 비민주적이고 약탈적

인 상태에 빠져 있었던 불의한 회당의 망령이었다.25

이와 같은 틀 안에서 라우센부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명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구속의 성장에 장애가 된다고 보고 교회를 내던져버리는 경

향을 보였다. 이런 의심의 한 가지 결과는 사회복음 운동을 통해 YMCA O

같은 교회와 유사한 기관들이 출현한 것이었다. 그런 기관들은 기독교인 되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 "기독교화된 사회"의 복음을 정당하

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증언한다고 여겨졌다. 그와 같이 교회와 유사한 기관

들을 통해 교회를 배제해버린 것은, 기독교 윤리학이 라우셴부시와는 달리

삶이 결정적으로 교회나 신학교를 통해 형성되지 않았던 사람들이 추구하

'대학의 학문으로 진화하는 데 기여했다. "사회복음주의자들"의 새로운

세대는 개인적으로는 라우셴부시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신앙은 그들의 학문적인 작업에서 대단히 미약한 방법론적인 역할

만을 수행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은 사회 참여에 방해가 된다고 가르침

받았던 기독교적 전통을 점점 더 무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손실은 라우센부시의 기독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것은 민주주의를 신론에 이르기까지 끌어올렸다. 아버지와 예수 사이의 친

밀함은 삼위일체의 민주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이것은 교회를 민

주주의라는 복음의 담지자가 되도록 만들었다. 라우셴부시는 이 주장을 이

스라엘의 최고의 통찰력의 연장으로 이해했으며, 그 통찰력을 사회적인 신

분제도와 생산수단의 부당한 분배에 대한 예언자들의 철저한 반박 안에서

발견했다. 아래 글에서 라우센부시는 자신에게 영감을 주었던 신학적 감수

성에 대해 명확한 견해를 밝힌다.

 

507

지금까지 우리는 거룩한 풍경을 바라볼 때 노란색 유리병 파편을 통해 보는

것처럼 비유적인 해석을 통해 보이왔다. 그것은 대단히 훌륭한 황금빛 풍경

이어지만, 현대의 일상적인 삶과는 매우 동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부터

서서는 새로운 의미에서 "사람들의 책'이 될 것이다. 종교사에서 처음으로 우

리는 사회적 삶을 하나님의 이름 아래서 포괄적이고 지속적으로 재구성하는

임이 인간적 가능성의 한계 안에 있다는 학문적인 지식을 갖게 되었으며,

지식에 의해 종교적인 에너지를 이끌어올 수 있는 가능성도 갖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과학에 대한 높은 평가와 결합된 민주주의의 근본

적인 가치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성서 주석의 전통을 낡고 오래된 것으로

취급해버리게 만들고 기독교를 단지 사회적 진보의 과제만을 위해 활용

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지 분명히 볼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은 이와 같은

청명한 그림에 먹구름이 끼게 만들었다. 그것은 라우센부시를 그렇게 형

성시켰던 독일에 대한 전쟁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라우셴부시는 그토

독 깊이 지적인 자양분을 섭취했던 자신의 문화적인 고국(독일-역자 주)

과 미국에 대한 자신의 충성 사이에서 긴장을 화해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

e 발견할 수가 없었다. 라우센부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 세상

e 떠났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하나님 께서 세계사를 진전시키기 위해

구교 국가인 미국을 사용하신다는 자신의 확신을 재확인하기를 잊지 않

았다.27

 

508

리처드 니버: 미국이 이해하는 계시외 신앙

라우센부시의 저술에서 발견되는 많은 주제들은 니버 형제 가운데 동생이

자덜 유명한 리처드 니버의 저술 안에서 계속된다. 나는 리처드 니버를 라

인홀드 니버보다 앞서 다룬다. 왜냐하면 리처드는 기독교 윤리학자의 중심

적 사역으로서의 사랑의 공동체의 건립에 대한 라우셴부시의 강조, 그리고

공공 정책과 정치 이론에 대한 보다 명시적인 관심으로 인한 라인홀ㄷ 1

버의 그 주제에 대한 침묵 사이에서 중간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리치ㄷ

의 저술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신학적 이단(heterodoxy)과 개인적 경건

"하나님에게 도취된 사람이 강력하게 혼합된 것을 보게 된다.28 리처드

니버는 1930년부터 1962년까지 예일 대학교에서 기독교 윤리학을 강의하

면서 가르치는 자로서의 특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거기서 리처드는 기독

교 윤리학이 20세기 후반에 취하게 될 주요한 궤도를 형성할 수 있었고,

의 가장 중요한 학생들은 폴 램지(Paul Ramsey, 1913-1988)와 제임스 거스

탑슨(James Gustafson, 1925-)이었다.

리처드 니버의 저술은 라우셴부시의 기본적인 강조점들에 대한 보다 성

교한 이론적 설명이라는 것이 최선의 이해일 것이다. 리처드는 1929년에

세상에 대한 교회의 적응을 강하게 비판한 책인 교단주의의 사회적인 자

(7be Social Sources of Denominationalism)으로 저술을 시작했다. 이제

목은 트뮐치의 역사적 방법의 지속적인 영향을 지적하고 있으며, 이번에는

교단적인 파벌주의의 모든 부착물을 제거하여 진정한 기독교 행동주의의

"세포들'을 드러내는 일에 적용되었다. 이와 같은 순수한 교회의 이야기는

기독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방향을 제시해주려는 의도를 가졌다. 그들은 각 나라에서 자신들

으 민족주의와 자본주의의 프로그램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민족적이고 계급

저이 분리선을 넘어서서 고도의 중성심으로 연합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

드의 셀 조직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급진적인 기독교가 아직도 하나의

프로그램에 도달하지 못했고 철학사에 등장하지도 않았기에, 그와 같은 국제

적인 기독교인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셀 조직들은 형성 중이다.29

 

1935년에 처음 출간된 그의 성숙한 작품 아메리카의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 in America)에서 리처드 니버는 사회복음 자체에게 이와

같은 역사적인 폭로의 방법을 사용해보도록 권고했으며, 하나님 나라의 개

넘에 대한 사회복음의 지나친 강조를 비판하기 위해 점점 더 계시에 대한

설명을 요청하게 되었다. 리처드 니버는 지나치게 역사주의적인 방법론을

끝장내는 아킬레스건을 점점 더 많이 의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관점 역시 역사적으로 파생된 것이어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비판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이런 의문제기는 하

나님의 계시적 사역, 곧 시간에 제한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의 우선성에

대한 주장과 함께 그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와 결합시키는 것으로 보인

. '계시의 의미」』(1941)에서 리처드 니버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바르트

ㅋ미판을 의식하는 미묘한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트륄치 쪽으로 기

울어져 있고, 역사학적인 분석을 보다 더 강조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결

과는 일종의 변형된 현대적 자유주의 신학이었다. 이제 계시는 신적으로 승

인된 이미지나 상징의 원천으로 읽혀진다. 이 원천을 통해 개인이나 단체는

세속적인 합리성의 내부에 확고히 가정된 유리한 입장으로부터 자신에 대

한 이해될 수 있는 설명을 구성하게 된다.

 

510

책임성 있는 자아: 기독교 도덕철학 에세이(1962)는 리처드 니버가 가

장 야심차게 기획한 기독교 윤리학 저서다. 이 책에서 니버는 "응답자 인

'man the responder)에 대한 해설을 전개했다. 니버는 기독교 윤리학이

란 우선적으로 특별한 도덕적 명령법을 발전시키는 작업이 아니며, 다른 역

사적인 대리자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이 타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에 대한 인간적 의식을 강화시키는 것과 관계된다고 주장한다. 응답한다

는 것은 옳거나 잘못된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것(what is fitinol

을 행하는 것이다. 적절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포함된 것으로 발견되

는 이야기에 의해 결정된다. 이런 방식으로 책임지는 자아는 기독교 윤리

학의 핵심적인 용어가 된다. "자아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신을 갖는다는 것

이다. 신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의 역사 즉 의미 있는 패턴과 연계된 사건들

을 갖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공동체 안의 자아들의 역사는 이와 같이 분

리될 수 없이 연합되어 있다."30 책임성(Responsibility)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인간적인 반응(respond)으로 정의되는데, 이때 그 사건들은 마치 행위

자에 대한 하나님의 행동인 것처럼 생각된다. 이런 유리한 위치로부터 리처

드 니버는 교회를 위한 강력한 역할을 확증할 수 있었다. 이때 교회는 회승

의 책임성(response-ability, 반응-능력),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능력

을 증가시키기 위해 직접적인 관심을 "현재 진행 중인 것"에 쏟는 책임성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기관이다. 니버의 가장 유명한 책인 그리스도와 문화

(1951)는 바로 그런 사랑을 해치는 교회의 역사적인 형태를 트륄치 식으로

폭로하는 것으로 읽혀질 수 있다.

리처드의 설명이 갖는 강점은 인간들의 상호작용을 깊게 형성하는 여러

맥락의 힘에 기독교인들을 적응시킴으로써 타인들을 향해 기독교인들을

개방시키려는 그의 관심에 있다. 하지만 니버의 급진적인 일신론"은 몇가

30) Tbe Mar

 

511

지 신학적 난점을 제기하며, 그중 하나는 역사적 기독교가 현대적인 수용을

통해 반드시 수정· 보완해야 하는 이미지 자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그의

주장이다.32 교의학적으로 니버는 양태론자였고, 삼위일체가 세 인격의 이

aol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 곧 창조, 통치, 구속의 세 가지 계기들의 명칭이

과고 주장했다. 이런 양태론적 성향은 그리스도를 슐라이어마허적인 하나

님 의식에 특별히 강한 감각을 지닌 모범적인 한 인간으로 강둥시켰다.

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성과 초월성을 강조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신

앗의 주관적이고 인간중심적인 개념이 그것의 객관적인 지시대상인 하나

님보다 더 결정적인 요소가 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인간적 행위자의 모

습에 대해 말하려는 이와 같은 신학적 환원주의를 통해 리처드 니버는 왜

신앙의 어떤 형식이 인간적으로 그리고 보편적으로 불가피한지를 세속적

인 이성의 용어로 설명하는 것을 기독교 윤리학의 첫째 과제로 삼았다.3

 

라인홀드 니버: 인간의 죄성에 대한 인식의 회복

기독교 윤리학의 담론에 대한 기본적인 전제들을 다시 한번 언급함으로써

선체 논의의 자기규정적인 한계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번에는 라인홀드

니버가 그 전제들을 표현한다.

 

하나님은 유한한 능력 안으로 들어가셨을 때·그리고 결정론과 필연성의 영

역 안으로 입장하셨을 때, 그것들에 의해 제한되셨다 여기 그 인간의 의식 안

에서 결정론은 최소치에 머문다. 달리 말해 다른 어떤 기적이 가능하든지 간

 

(우리는 결코 이 초월성의 정확한 한계를 설정할 수 없다) 계시, 즉 하나님과

의 의식적인 연합의 기적은 가능한 가장 확실한 것이다.34

 

512

라인홀드 니버의 신학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학이 반드시 자신을 세속

적인 이성이 수용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가정의 최

종적인 만개를 본다. 그래서 라인홀드 니버는 대학과 세속적 이성 안에 확

고하게 머물면서 신학을 "단일한 종교적인 전통과 연계되어 있는 다양하고

때로는 모순적인 신화들로부터 삶에 대한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견해를 구

축하려는 노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었다.35

그와 같은 의미에서 신학을 수행하는 라인홀드 니버 자신의 방법은 계

시 개념과 죄 개념을 결합시켜 죄악된 인간성이라는 사상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었다. 라인홀드 니버에게는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으켜지는 유

한한 인간에 대한 염려가 죄에 대한 보편적인 표식과 신학적인 관여를 위

한 접촉점이 되었다.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염려에서 인간들은 다른 유한한

존재들, 사회적인 운동들, 통치자들, 그리고 유한성의 해소를 약속하는 빈

간적인 사랑에 충성한다. 예수, 또는 보다 적절하게는 종교적인 삶은 만니

들에게 "역사의 가능성 너머로의 영혼의 비상"을 허용함으로써 그와 같은

염려와 그것이 산출하는 불의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공한다.36

이런 도식 안에서 그리스도는 인간적 행위자들의 일이라고 인식되는

역사가 제기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의미에서 구속의 역할을 감당하

신다. 그러므로 라인홀드 니버의 그리스도는 역사를 넘어서 있지만 그렇

 

513

게 존재하심으로써 인간을 역사적 한계성의 문제로부터 해방시키는 약속

을 제공한다. 십자가는 역사를 정의하는 현실 사건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항해하는 인간을 돕는 북극성으로서 역사 너머에 서 있는 영원한 가능성의

상징이다. 하우어워스는 이와 같은 기독론이 표현하는 윤리적인 구도와 그

것이 만들어내는 문화적인 해석학을 간결하게 요약하는데, 그것은 스토아

철학과 우연한 유사성 그 이상을 지닌 설명이다.

니버의 많은 사례들을 관통하는 것은 계속 반복되는 동일한 원칙들이다. 그것

은 유한한 인간 존재가 자신의 욕구가 지시하는 것 이상을 게걸스럽게 획득하

려고 한다는 사실이며, 이것은 집단이 될 때 무한히 악화되는 경향이 있다.

러므로 우리가 소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개인이나 그룹이 상대적인 통제

아래 유지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룹들, 사회들, 국제 관계들의 구조를 짜는 것

이다. 비록 그 이상의 온전한 실현은 역사 안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종교는 이

와 같은 상태를 드러내 보여주며, 우리가 그 과제를 보다 더 잘 수행할 수 있

도록 약간의 영감을 제공한다."

비록 라인홀드 니버가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이 기독교인들에 대해 규

남적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위의 마지막 논점은 그 역시 십자가에서 제

사랑이 정치적인 삶과는 양립할 수 없다고 믿었다는 것을 보여준다.38

예수는 그 영원한 순수성에서 사랑의 상징이지만, 역사적인 사건들 안에 사

 

 

514

로잡혀 있는 인간들은 그의 모범을 직접 흉내 낼 수도 없고 흉내 내서도 안

된다. 라인홀드 니버는 자신의 교구 안의 공장지대의 노동자들이 벌인,

신이 비효율적이라고 간주했던 비폭력적인 항의를 관찰하면서 그"교훈'

배웠다. 예수의 초월적인 정의를 따르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모든 상황

에서 독재와 무정부 사이의 중도 노선이다. 라인홀드는 예수가 윤리학에 대

해 직접적인 적실성이 있다는 주장을 거부하고 로마 가톨릭의 윤리학과 관

계된 결의론적·자연법적 접근방법도 믿지 않으면서, 정의가 경쟁하는 이익

들의 균형이라는 수단을 통해 역사 안에서 도달된다는 윤리학에 대한 순전

히 점진적인 설명을 선호한다. 라인홀드는 그와 같은 균형의 과정을 각각의

그룹들이 갖는 죄악의 역동성과 일치하는 "현실주의적"인 접근방법이라고

불렀다. 예언자들의 선포는 언제나 어떤 그룹에 반대하는 것으로 정의되었

고 어떤 한 그룹의 행동을 변호하거나 정당화하기보다는 비판적인 기능을

수행했다. 교회 역시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정치적인 압력단체로서의 기능

을 행사하는 데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도 또한 다른 이익 집단에

필적하는 힘에 의해 제한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정치적인 주제는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 민주주의의 정

당성과 그 전통적인 변호에 대한 비판에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다. 이 적

의 부제는 민주주의가 사회적인 조직과 정부의 유일한 기독교적 존재방식

이라는 라우센부시와 라인홀드 니버의 일치된 견해를 지시한다. 하지만 라

인홀드 니버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에는 모든 이상 안에 은밀하게 잠

복해 있는 사리사욕을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정부와 사회적 조직으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학적 변론을 보다 암울하게 채색했다. 왜나하면 과도한

자기 사랑의 타락이 없는 인간적인 도덕이나 사회적인 성취의 어떤 수준이

 

515

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후 세대의 이익집단이었던 자유주

의와 완벽하게 맞물렸던 설명이었다. 라우센부시의 설명을 사회주의적·

제학적 가정과 대조시키는 것도 보다 분명해졌다. 라인홀드 니버에게 경제

저인 정의는 생산수단의 공정한 분배가 아니라, 재산을 소유한 사람들의 권

러을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표현되는 국민의 대리적인 권력에 의해 제한하

는 것이었다.

기독교 윤리학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와 같은 설명의 전체적인 체계

는 죄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성장했다. 기독교적 사랑에 대한 라인홀드니

버의 설명은 자유주의 사회가 자유와 평등의 균형을 성취하도록 돕는 끝없

는 과제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종교적 신앙은 겸손의 끊임없는 원천이어야

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자연적인 교만을 완화

시키고 가장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각자의 진술의 상대성을 품위 있게 의

식하도록 격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신앙은 종교가 가장 고상한 진

리의 진술들 안에도 몰래 숨어들어오는 실수, , 유한성, 우연성의 요소를

인식할 때 비로소 가장 확실하게 참된 종교가 된다고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한다."41 하나님은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 직접 개입하시는 것이 아니

, 도덕적 이상주의와 강력한 자기비판적 추진력을 만들어냄으로써 정의

로운 사태를 일으키기신다. 이와 같은 자기 비판적인 입장은 궁극적으로는 다

는 어떤 기독론보다도 라인홀드 니버에게 구성적인 원리의 기능을 행사했

. 라인홀드 니버의 목표는 경쟁적인 이 익집단이 반드시 서로를 지속적으

로 견제하도록 만드는 책임성 있는 행위 주체들을 양성함으로써 정의를 성

취하는 것이었다.

 

516

내부자 한 사람의 분노: 스탠리 하우어워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비록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미국에서

는 분명히 기독교 윤리학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생존하는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하우어워스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우리의 목적에 유용하

.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경력 전체를 통해 기독교 윤리학 분야의 주요한

동시대인들과 선배들과의 관계 안에서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자신의 이

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동시에 하우어워스는 기독교 윤리학이 세속적인 한

리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타협하고 있는 지점을 조사하고 찾아내면서 기도

교 윤리학을 요란하게 비판해왔다. 나는 이제 하우어워스의 신학의 주된 전

제들이 어떻게 미국의 기독교 윤리학의 전통 및 그것의 자유주의 신학적인

전제와 맞섰던 일련의 반응을 통해 정제되었는지를 보여주려고 한다.42

하우어워스는 도중에 중단된 한 저술 프로젝트에 대해 논평하는 중에.

기독교 윤리학에 대한 자신의 호감과 그것에 대해 증가하는 거부감이라는

양면을 우리에게 어렴풋이 드러내준다.

[미국 기독교 윤리학의 역사에 대해 쓰려고 준비하는 중에] 더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점점 더 그 책을 써야 한다는 열정을 잃게 되었다. 내 생각에

그렇게 머뭇거리게 된 이유 중 한 가지는, 내가 그토록 깊이 존경했던 사람을

을 비판하는 글을 쓰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 책을 쓰려는 8

각을 시작했을 때, 그것은 기억을 되살려 연습시키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점

점 더 나는 망각을 위한 논증으로 그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물론 모든 기

억은 망각이기도 하다. 하지만 점점 더 그 이야기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말해

야 한다고 내가 생각하게 되었던 방식에 함축된 종류의 망각은 너무나 슬픈

 

517

것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내가 이미 끝장이 났다고 믿는 역사에 관한 책

을 쓴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43

이와 같은 것이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와 평가를 통해 내려진 판단이었

고 이것은 라우셴부시의 사회복음에서 시작되었다. 여기서 하우어워스는

사회복음이 삶의 조건들에 대한 관심사를 사회과학적인 방법론과 가설을

통해 정의한다는 점에서 결함이 있으며, 그 결과 기독교 윤리학자를 종교라

는 주제에 흥미가 있는 사회과학자로 만든다고 생각했다.44 리처드 니버는

사회복음 노선을 이어가면서 인간적인 통찰에 세례를 베풀거나 타당성을

부여하려는 그 노선의 경향을 따르지 않고서 그것의 주요한 강조점을 표명

하려는 보다 나은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리처드 니버는 트될치의 역사주

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기독교 윤리학이 교리적인 전통을 1

질서의 언어로 삼고 그 안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고, 기독교 윤리

학은 그런 1차질서로 표현된 확신들 안에 함축된 윤리적 의미를 해석하기

위한 올바른 개념적 수단을 발견하려는 2차질서의 작업에 몰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여기서 그는 그토록 강력하게 기독교 윤리학을 분석철학과 결합시키고

있다). 간결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여기서 명백히 신앙고백적인 도덕언어로

부터 새로운 기독교 언어로의 전환을 보고 있는데, 새로운 언어는 전통적인

기독교 언어의 추측된 의미를 정의, 권리, 평등 등과 같은 세속적인 관용구

로 번역한 것이다. 라인홀드 니버는 이 전환이 초래할 수도 있는 몇 가지 문

제를 포착했으며, 기독교 윤리학이라는 학과가 당시에 가정하고 있었던 것

을 위반하지 않은 채 기독교의 전통적인 언어를 그대로 유지해야 하는 보

다 실질적인 이유를 제공하려고 시도했다. 그것은 자연법이라는 세속화된

 

 

518

언어로 구성된 칸트적 도덕 체계였다. 라인홀드 니버가 그 운동의 낙관론에

반대하는 반작용으로써 기독교 윤리학에 도입했던 신학적인 진지함으 히

대화된 원죄 교리라는 형식을 취했다. 하지만 1차질서를 서술하는 전통제

기독교의 그런 몇 가지 언어의 복원조차도 사회복음 주장자들의 기본적인

주장을 의심 없이 수용하는 영역 안에 확고하게 머물러 있었다. 다시 말해

기독교 윤리학의 주제는 미국의 시민 사회다.

기독교 윤리학의 주요한 책임성은 보다 더 도덕적인 미국 대중을 만들

어내는 것이라는 공유된 추정은 자유주의 개신교의 가정으로부터 나온 것

이었고, 그것은 기독교가 자기유익에 대한 단순한 호소를 초월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세속적인 대중에게 부여하려고 하는 세속적인 현대 사회에서만

유용하다는 가정이었다. 의료윤리라는 하부 학문 분과는 대중을 도덕화하

는 과제가 효과적으로 성취되었다고 가정함으로써 그 추정을 논리적 섬는

으로 밀어붙였고, 그렇게 하여 개업의들이 1차질서의 기독교 언어로 표던

된 당혹스럽게 전근대적이거나 "신비적인" 내용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

도 되게 해 주었다.5 이와 같은 넓은 추세의 결과로 당대의 기독교 윤리학

자들은 공적으로 자신들의 일차적인 언어로부터 출현하는 통찰력을, (아마

도 잘못된) 자신들의 생각으로는 그 언어를 인식하지 못하여 그 언어의 타

 

519

당성을 거부하거나 그것을 우스운 것으로 여기는 청중에게 설명해야 하는

역설적인 과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사람들로 보이게 되었다.

제임스 거스탑슨은 1차질서의 기독교 언어로부터 총체적으로 멀어지는

것에 저항하면서 기독교 윤리학의 큰 궤적과 투쟁했던 사려 깊은 논문에서

그와 같은 입장을 요약한다. 거스탑슨은 교회가 기독교 윤리학자들의 핵심

적인 청중이라고 제안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공적인 포럼에서 기독교

인이 불신자들과 소통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실상 기독교 신학자는 특수한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그들(불신자들-역자

)이 수용할 수 있는 도덕에 대한 보다 보편적인 언어의 진술 쪽으로 움직이

고 있다. 이런 진술이 비종교적인 사람들에게도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은,

직 그 논증이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특수성"은 다른 진지한 도덕적인 사람

들도 마찬가지로 인식하고 또 마땅히 몰두해야 하는 원칙들과 가치들에 빛을

비추어 준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을 때뿐이다. 기독교 신학자도 세속적인

사람들의 일반적인 도덕적 경험을 공유하기 때문에, 그리고 신학적으로 정당

성이 보증되는 그런 작업의 한 가지 양상이 일상적인 경험으로부터 원칙과가

치들을 추론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신학자는 각자의 실천적인 상황에서 공

식적으로 표명되는 것을 특별히 신학적으로 입증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신학

자는 그렇게 하라는 도전을 받을 때는 마땅히 기독교 신학의 정당성을 입중할

수 있어야 한다.46

이와 같은 확언은, 기독교 윤리학자들이 교회와 관련된 역사적 자료나

신학적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해서 교회를 그 자체의 고유한 신조나 신앙고

맥의 의미로는 더 이상 다룰 수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확언은

 

520

최소한 기독교 윤리학자들이 그렇게 해야 할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제안했다.

이 고찰은 미국에서 기독교 윤리학에 종사하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이

왜 자신들의 과제가 기독교 전통으로부터 배운 것을 비신학적인 이야기로

바꾸는 것이라고 보는지에 대한 이유를 제시해준다. 하지만 기독교 윤리학

(1차질서의 기독교 언어를 분석하고 번역하는) 2차질서의 학문 분과로 설정

함으로써 기독교 윤리학의 기초를 놓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리고 왜 미래의

기독교 윤리학자들도 교회의 전통을 공부해야 하는지의 문제에 변화를 이

으켰고, 이 변화에 따라 그들은 전통적인 교리 신학에 덜 친숙해졌고 덜 호

미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 기독교 윤리학은 교회와 신앙인들의 주장을 부

석하고 평가하는 작업으로 재형성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그것 전체가 세

속적인 이성의 범위 안에서 작동한다고 여겨졌다. 제임스 거스탑슨이 한때

"윤리학자"라는 명칭이 어떻게 생겨났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며 말했던 것

처럼, "윤리학자는 도덕 철학자의 전문가 자격증을 갖지 못한, 전직이 신학

자였던 사람이다."47

이와 같은 관찰은 우리가 현 시대의 기독교 윤리학의 풍경을 적절하게

음미하고자 할 때, 하우어워스의 다음과 같은 관찰이 지니는 온전한 함축성

을 주의 깊게 고려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나의 세대는, 만일 신학이나 기독교 윤리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원한다면 당신은 먼저 신학교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마지막 세대였다. 신학

교에서의 훈련은 최소한 우리로 하여금 성서, 역사 신학, 그리고-윤리학 분

야에 있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특별히 중요한-19세기 신학에 대해 무언

가를 배우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이런 신학교란 배경 없이도

 

 

521

윤리학 "분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현대의 기독교 윤리학자들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기독교 윤

리학자들은 자신이 윤리적으로 몰두하는 문구들을 설명하기 위해 철학적

개념을 찾는 중에, 점차 윤리학에 대한 철학적 토론에다 어떻게 기독교 윤

리학의 독특한 내용을 더할 수 있을지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기독교 윤리학 분야에 대한 하우어워스의 기념비적인 공헌은, 친근했

던 기독교적 언어의 상실이 어떤 독특한 기독교적 생활 양식의 상실과 함

a 역여 있다는 당연한 귀결을 다음과 같이 도식화했다는 것이다. "기독교

저 확신이 기독교인 혹은 비기독교인 모두에 대해 능력을 상실하게 된 이

유는 많은 기독교인들, 특별히 대부분의 기독교 신학자들이 교회가 세상에

문화적으로 적응하는 것에 대해 도전하고 명확하게 반대하지 못했기 때문

이다."49 우리가 하우어워스가 제시한 사상의 개념적인 틀을 어떻게 판단하

든지 간에 (이 문제는 마지막 단락에서 다룰 것이다), 그의 증언이 기독교 윤리

학의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궤적에 대한 생생한 통찰을 실시간적으로 제공

했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기독교 윤리학의 주장을 세속적인 관용구로 번역하는 기획은 시민사회

에 제공할 수 있는 어떤 독특한 것을 기독교 윤리학으로부터 제거해버렸

지음을 뜻한다.50 물론 거스탑슨이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논문은 혼탁해진 통찰을 기독교 윤리라는 학과 안으로 삽입해 넣은 것으

로 이해될 수 있다. 자신의 기획을 입증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

면서, 기독교 윤리학은 사회에 대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장을 전달해야 하

 

 

522

는 교회에 속한 한 지체로서의 사명을 아마도 망각했던 것 같고, 그 결과 비

판적인 목소리가 되는 일도 중단했다. 이런 사실을 받아들일 때 더욱 비그

적인 것은 그때 신학자들이 윤리적 통찰의 생성을 위해 철학자들에게 저지

으로 의존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신학자들이 지배적인 세속적 한리

성과 도덕성에 대해 실제로 제공했던 비판은 신학적으로 분명하게 표현되

"도덕 신학"-만일 그런 것이 있다고 가정한다면-에 의해 제공되어야 해

. 이에 대해 하우어워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무엇보다도 기독교 사상가들은 도덕적인 삶을 주로 율법의 유비를 따라서 영

위하고자 하는 시도를 제일 먼저 비판했어야 했다. 하지만 기독교 사상가들은

그렇게 하는 대신에 동료 철학자들과 같이 도덕적인 무정부상태를 두려워하여

다음과 같이 가정했다. 즉 기독교 사상가들은 1) "옳음"의 문제가 선의 문제보

다 우선하며, 2) 원칙이 미덕보다 근본적이며, 3) 도덕적 정합성에는 다른 모든

원칙들이 도출되거나 검증될 수 있는 어떤 유일한 원칙이 요구되며, 4) 도덕적

인 반성의 중심 과제는 우리로 하여금 진퇴양난에 대해 바르게 사고하도록 돕

는 것이며, 5) 우리는 세계를 많은 가치 판단의 가능성들(그중 몇몇은 곧잘 갈

등을 일으키기 마련인 가능성들)로 가득 차 있는 존재로 생각하기보다는, 사실

과 가치로 깔끔하게 나누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가장 아

이러니한 것은 기독교 신학이 우리의 '윤리학"이 보편적인 설득력을 가지게 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 안에서 우리의 도덕적 확신에 대해 본질적인 본성, 곧 역

사적이고 공동체 의존적인 본성을 부정하려고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경력이 전개되어갈수록 하우어워스도 위에서 후자의 강조점을 대

변했다. 하지만 하우어워스는 다른 한편으로 윤리학이 가장 직접적으로 교

회와 연결되어 있다고 이해하는 사회복음의 어법 안에 머물렀고, 교회를 나

 

 

523

o과 같이 자아실현과 사회적 창의성의 공동체로 정의했다.

만일 신학자들이 우리의 특정한 상황에서 도덕적인 삶의 반성에 기여하고자

한다면, 정확히 기독교 윤리적 숙고의 본성과 내용의 결정에 대한 교회의 중

요성을 파악할 수 있는 정도까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초기 기독교인

들에게 본래적이었던 것은 그들의 신앙, 곧 예수에 대한 신앙의 특수성이 아

니라 공동체를 만들어낸 그들의 사회적인 창의성이었다. 그와 같은 것은 이전

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우리는 보다 선하게 된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

여 주고 그 사람들로 하여금 살아가게 해주는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이와 같이 재형성된 기독교 윤리학의 과제는 내부적으로 기독교 윤리학

의 역사적인 전통을 재평가하라고 촉구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것은 기독교가 일련의 공리적인 신념의 체계가 아니라 제자도의 삶이요.

의 방식이라는 하우어워스의 강조를 통해 주어지는 초대다. 예배, 습관,

덕을 상호 관련짓는 비트겐슈타인적인 (그리고 예일 학파의 영향을 받은)

수성에 의존하면서 하우어워스는 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라고 말하지

만 우리는 그 고백이 의미하는 바를 오직 교회로서의 그들의 삶의 방식을

평가함으로써 알게 된다고 주장한다.

외부자 한 사람의 매력: 존 하워드 요더

사신의 학문분야에 대해 그처럼 철저한 내부적 비판을 발전시킨 후에 하우

어워스는 새로운 시작의 때가 무르익었음을 발견했고, 그것은 존 하워드 요

(1927-1997)라는 인물에게서 실제로 예시되었다. 요더는 메노파 교단의

 

524

윤리학자이자 신학자였다. 그의 지적이고 교회적인 삶의 형성 과정은 방금

우리가 개관했던 (하우어워스를 포함한) 사상가들의 환경인 아이비리그의 월

씬 바깥에서 이루어졌다. 하우어워스는 비록 자신이 자유주의의 선생들에

게서 전해 받은 질문들에 도전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질문을 재형성하는 것

이 일군의 다른 개념적 기술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질서 안에

서 다른 입장도 요청했다고 종종 언급했다.53 나는 이제 하우어워스가 요더

에게 매료되었던 것이 왜 이해될 만한 일인지를 제시하려고 한다. 우리는

하우어워스가 자신의 분야에 대해 탄식하는 목록이 어떻게 그를 사회적 질

서 내부에서 그런 전혀 다른 입장을 지녔던 증언자인 요더에게로 이끌었는

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요더는 농촌의 목가적이며 사역 중심적인 전통 교회

의 형태를 몸소 보여주었는데, 하우어워스는 그것을 기독교 윤리학이라는

학과의 최상의 측면들로 이해하게 되었다.54

만년에 이르러 하우어워스는 자신이 몸담았던 기독교 윤리학과로부터

소원하게 된 것이 요더에게서 받았던 깊은 영향 때문이라는 사실을 명확하

게 인정했다.

너무나 많은 것이 당신이 출발하는 지점에 의존한다. 요더와 달리, 나는 주변

부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최소한 교회적으로 나는 주변부로부터 시작하지 않

았다. 나는 주류 개신교에서 외부인으로서 시작했다. 하지만 "외부인'이라고

해도 나는 여전히 주류 교단의 개신교인이다. 이와 같은 "교회"(즉 주류 개신

교단의 교회)는 우선적으로 미국에 기여할 것이라고 오랫동안 이해되어갔고

그렇게 정당화되어왔다. 그 이해에 따르면, 교회를 세상의 폭력에 도전하기에

충분한 정치적 구조로서 지탱해갈 수 있는 근본적인 실천과 확신은 존재하지

않았거나 혹은 종교로 격하되어 있었다.

 

 

525

요더의 메노파적인 하부문화는 제도화된 자유주의 개신교와는 매우 다

e 유곽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어주었다. 이것은 단지 교회가 국가를 구원하

기 위한 책임을 거절한다는 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기독교 윤리학의

지배적인 가정들에 대한 하우어워스 자신의 반작용은, 그로 하여금 요더라

는 인물 안에서 제시되는 기독교 윤리의 독특한 입장을 인식하고 수용하도

록 준비시켜주었다. 동시에 하우어워스가 요더의 신학과 윤리를 평가하는

방식은 하우어워스가 훈련 받았던 주류 학문 분과의 어휘와 강조점에 의해

형성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읽어본 바로는, 하우어워스가 요더를 수용할 때 하우어워스의 질

문의 틀이 그가 받았던 자유주의적 개신교 방식의 훈련을 통해 형성되었다

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 하우어워스가 바르트에 친숙했다는

점이 요더에 대한 그의 평가에 영향을 끼쳤다는 추정도 역사적 근거를 갖

고 있다. 하지만 하우어워스는 바르트를 만난 적이 없으며, 그에게는 요더

만이 기독교 윤리학 분야 종사자들의 사회적인 입장에 대한 살아 있는 구

체적인 (그리고 미국적인) 대안이었다. 하우어워스는 그 만남이 "계시적이었

"라고는 감히 스스로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요더의 인격 안에서 살

아 계신 하나님과 구체적· 역사적으로 대면하게 되었고, 그래서 은혜가 충

만한 가운데 그의 눈이 열리게 되었다. 나는 최종 단락에서 그가 직접 그렇

게 말하기를 의도적으로 거절했던 이유를 설명할 것이다.

요더는 하우어워스가 기독교 윤리학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며 기대했던

기독교 신학자의 모든 특징들을 보여주면서, 자유주의 개신교 그리고 특별

히 기독교 윤리학이 끝장났다는 하우어워스의 감각이 절정에 도달하도록

만들었다.6 그가 보았던 것처럼 최소한 요더와의 교제의 초기에는 예수

 

526

의 정치학이 기독교 윤리학을 위한 새로운 시작점을 표시해주있다. 그 객

안에서 신조들과 성서 주석의 1차질서의 언어는 다시 기독교 윤리학의 중

심 영역이 되었다. 내 관점에서 그와 같은 새로운 시작의 인식은 약속의 땅

을 바라보았던 모세의 유비에 의해 조명될 수 있다. 모세는 그 땅을 갈망했

지만 들어갈 수는 없었다. 모세는 자기 백성들이 오래도록 추방되어 있었던

그 약속의 땅의 경계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하우어워스의 증언들은,

독교 윤리학의 전통 안에서 훈련을 받은 전체 세대에게 기독교의 교리적인

전통의 1차질서 언어와 대화하는 풍요로움을 재고해보라고 분명하게 초대

한다는 점에서 생산적이다.

기독교 윤리학의 주제가 미국적인 전제를 드러내어 비판했던 하우어워

스마저도 요더가 주변부의 배제된 기독교 전통을 대변한다는 인식에서 벗

어날 수 없었다. 그 판단은 미국 기독교의 지형도 내부에서 내려진 것이므

로 의심할 바 없이 사실이다. 하지만 요더의 배후에는 칼 바르트라고 하는

방대한 신학적인 본체가 버티고 있다. 요더는 스위스 바젤에서 바르트와 함

께 공부했고, 바르트는 요더가 기독교의 역사적인 전통을 평가하는 데 결정

적인 역할을 했다. 바르트는 신학적 자유주의에 대해 현대에 아마도 가장

반향이 큰 도전장을 던졌으며, 시간을 초월한 성도들의 교제라는 풍요한 대

화로 다시 돌아오라는 대단히 매력적인 권유를 했다.57 바르트의 신학은 유

럽 신학의 풍경 안에서 결코 주변부라고 불릴 수 없다. 요더가 하우어워스

에게 "기독교 윤리학"으로부터 보편적인 교회로 입장하는 문을 제시했다면,

바르트는 요더의 배후에서 기독교적 삶을 사는 것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에

게 시간을 초월하는 성도들의 교제의 풍요함 안으로 다시 한 번 입장하도

독 권유하는 사람으로서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다음 질문으로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기독교 윤리라고 불리는 학

 

527

고의 중심에서 요더에 대한 하우어워스의 평가가 이루어졌다는 점이 혹시

바르트가 대변했던 권위 있는 종교개혁적 전통과 요더 사이의 상호관계를

파악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지는 않았는가? 자유주의 신학의 흐름 속에서

바르트가 출현했던 이야기가 이 책의 다른 장들에서는 일관된 주제인 반면

에 자유주의적 이성에 사로잡힌 포로 상태의 기독교 윤리학이 미국에서 모

습을 드러내는 이야기는 아직 거의 시작되지도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퇴조와 도래

하우어워스는 기독교적 담론을 1차질서의 언어로 다시 회복시키는 데 관심

을 가졌다. 이 관심은 그로 하여금 교회론과 기독론에 주요한 강조점을 두

면서 기독교 신학의 많은 고전적인 교리들의 진가를 점점 더 인정하도록

인도했다. 이 결론적인 단락에서 나는 자유주의 개신교에서 교육을 받았을

때 하우어워스에게 남겨진 한 가지 흔적을 간략하게 지적하고자 한다.

것은 하나님의 행동에 관심을 집중하려는 하우어워스의 신경과민이다.

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우어워스를 바르트 그리고 많은 기독교의 신학

적 전통들로부터 계속해서 구분하게 만드는 요인은 그가 계시개념을 자신

의 신학 안으로 수용하기를 거부한다는 사실이다. 교회 변혁에 대한 하우어

워스의 가장 활동적인 설명은 교회가 자신의 적절한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에 달려 있다. 하우어워스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임재하실 때 교회의 특

수한 중재적 역할을 강조하지만, 그 중재를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사역이라

고 말하지는 않는다.58 이런 이유에서 하우어워스는 바르트를 계시 신학자

 

528

로서가 아니라 기독교적 언어의 모범적 교사로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바르

트 읽기를 배우는 이유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도전함으로써 세상을 바

라보는 세속적인 방식에 도전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지성적이고 도덕적인

표현 형식 모두를 요구하는 그 훈련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세상을 보이는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실체로 보게 한다."59 하지만 그런 형

식으로 말하는 것은 인간적 주체성의 관점 안에 확고히 머무는 것이며,

과적으로 자유주의적 개신교주의의 감수성 안에 머무는 것이다. 하우어워

스는 다음과 같은 진술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는 말한다.

그리고 말하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의 진술의 대상과 함께 형이상학적이라!

고 묘사되어야 하는 수고 안에 함께 사로잡혀 있음을 발견한다"0

이와 대조적으로 바르트는 인간들이 다른 주체자들과 맺는 모든 상호과

용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비추어져 투명해져야 한다고 주

장하며, 나아가 믿음이란 다름이 아니라 인간의 거룩한 혹은 세속적인 활동

들을 향한 하나님의 그와 같은 "뚫고 들어오심"에 대한 구체적인 인간적 반

응이라고 더욱 강하게 주장한다. "선택되었기에 부르심을 받고 있으며,

기서 우리는 현실적 인간에 대한 첫째 정의를 갖게 된다.부르심을 받는다

는 것은 들었다는 것, 깨워졌다는 것, 자신의 자아를 각성시켜야 한다는 것.

(하나님의) 요청을 받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61 하우어워스와 바르트는 예

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요청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독교적 사고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으로 시작해야 하며,

의 역사성이 근본적인 것으로 수용되지 않는다면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도

덕적인 숙고는 진행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요청 말이다. 하지만 하우어

워스에게 이 통찰은 하나님의 진리의 가시성을 보증해야 하는 교회의 책임

 

529

성에 대한 강조로 이어지는 반면에,92 바르트에게 그것은 모든 사람이 반드

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만 한다는 주장이 된다. "구속받은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역사 외에 다른 아무런 역사도 가지고 있지 않다.

것은 인간이란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대면 안에

서만 흥미로운 존재, 보다 정확하게는 현실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이 목소리가 교회와 교회적 증언들에 한정되기는 했지만, 바르트는 그

목소리가 그런 증언들에 제한되어야 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주장한다.

계몽주의가 세운 조건들 아래서 기독교 윤리학의 중심적 문제는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방

식으로 질문을 던지면서 칸트는 우리가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합리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진리인 일을 행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지식은 합리적 사유에

의해 얻어져서 삶에 적용된다. 하지만 하우어워스는 이 과정을 뒤집는다.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 할지 알게 되는 것은 교회의 실천과 교회가 우리에

게 물려준 관습이 우리의 상상력과 지각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안

다는 것은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상상력 넘치는 열린 대안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육체적 지식 (a bodily Knowledge)으로 이해된다.에 바르트는 칸트와

하우어워스의 인식론이 모두 현대성이라는 인간중심적인 논리 안에 머물

더 있다고 제안한다. 두 사람 모두의 사고의 틀에서 하나님이 행위 주체로

시 능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하우어워스와 마

이이 아니 사라들

 

530

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돕는 언어, 이야기, 실천들을 우

라에게 가르치는 일에서 교회가 결정적이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최종적

인 분석에서는 바로 그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개인들을 개별적으로 제자와

종으로 삼으셔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기독교 윤리학이 직면하는 도전은 그것이 우리 시대의 인간론이

점하고 있는 승리주의적인 우위의 관점과 타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바르트와 하우어워스가 기독교 신학의 관습과 미덕의 언어의 유용성에 미

해서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이 그들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

는 아니다. 신학적으로 결정적인 갈등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관습을 재

구성하는 것을 어떻게 적절하게 시도하고 서술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우어워스는 주로 교회의 예전을 통해 몸체를 형성할 때 나쁜 관습이 좋

은 관습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고 제안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를 기독

교 윤리학의 초점으로 확증한다. 바르트는 두 가지 이유에서 이것이 적절하

지 않다고 생각한다. 첫째, 하우어워스가 언급은 하지만 인정하기는 거무아

는 것은 다음과 같다.

린드백은 십자군이 이교도들의 두개골을 쪼개면서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

라고 외친 것은 바로 그 선언 자체를 거짓으로 만든다고 주장했는데, 바르트

는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려고 했다.바르트는 왜 십자군이 말하는 것의

의미(진리-역자 주)가 십자군이 그 말을 사용하는 어법(진리에의 자기참여)

에 의해 결정되어야만 하는지 아무런 이유도 발견하지 못했다. 바르트는 틀립

없이"자기참여"가 진리에 의존하는 것이지, 진리가 자신에 대한 "자기참여적

인 특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65

이처럼 바르트는 예배나 증언을 명확하고 적절하게 실천하는 것이 복음

 

531

서가 바리새주의라는 현상으로 묘사하는 자기기만과 양립할 수 있다고 주

자한 것인데, 이것은 하우어워스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다. 하우

어워스의 중언 이해와 신학적 언어에 대한 강조는 기독교인들이 예배와 신

학적 언어의 사용으로부터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둘째, 앞의 논점과 관련이 있는데, 바르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간의 삶을 요구하려고 나타나시는 사건의 놀랍고도 예측할 수 없는

특징을 강조했다. 인간은 자신들의 나쁜 습관이 야기한 눈덮 안으로 하나님

께서 처음부터 그리고 계속해서 뚫고 들어오지 않으신다면, 그렇게 해서 인

간이 자신의 고유한 존재조차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간들에게 보여주

지 않으신다면, 나쁜 습관을 좋은 것으로 대체해줄 공동체를 건설할 능력

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기독교

윤리학에 대해 어떤 다른 것으로 환원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우어워스

는 기독교의 언어를 듣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어두고 접근가능하게

하기 위해 공공의 언어에 몰두하는 현대 기독교 윤리학의 내부에 머물기를

선호하며, 그 결과 계시에 대한 위와 같은 강조를 거부한다. 하지만 바르트

는 기독교적인 언어 자체가 스스로 어떤 일을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지한 사람의 목소리만이 우리를 눈멀게 하는 습관의 힘을 부술 수 있는데,

바로 그분은 타자를 위한 한 인간이었던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 그리스도

는 어떤 이념이나 원칙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 나라를 향해 우리

의 눈을 열어주기 위해 반드시 나타나셔야 하는 분이시다. 그때 하나님 나

라는 우리가 현실로 여기는 것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다.66 그것은 윤리적인

함축성 전체를 포괄하는 각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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