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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홀드 니버의 인간론

은바리라이프 2020. 6. 4. 19:34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론


목 차



Ⅰ. 서 론 ............................................... 1
A. 문제제기와 연구목적 ............................... 2
B. 연구의 방법과 범위 ................................ 4
Ⅱ. 니버의 생애와 사상 .................................... 7
A. 니버의 생애 ....................................... 7
B. 니버의 사고구조 ................................... 12
C. 니버의 신학사상의 발전단계 ........................ 14
Ⅲ. 하나님의 형상과 피조물로서의 인간 ..................... 20
A. 인간에 대한 여러 견해들 ........................... 20
1. 고전적 인간관 .................................. 21
2. 성서적 인간관 .................................. 22
3. 근대적 인간관 .................................. 24
B. 하나님의 형상과 피조물로서의 인간 ................. 25
1.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 26
2. 피조물로서의 인간 .............................. 28
Ⅳ. 죄인으로서의 인간 ..................................... 31
A. 죄의 기원 ......................................... 32
1. 유혹과 죄 ...................................... 32
2. 죄의 기원으로서의 인간 ......................... 33
B. 죄의 형태 ......................................... 34
1. 교만의 죄 ...................................... 35
2. 육욕으로서의 죄 ................................ 37
3. 도덕적인 죄와 종교적인 죄 ...................... 39
Ⅴ. 사회속의 인간 ......................................... 43
A. 개인의 죄와 집단의 죄 ............................. 44
B. 인간과 사회 ....................................... 47
1.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47
2. 개인의 윤리와 사회의 윤리 ...................... 48
3. 불가능한 가능성으로서의 인간 ................... 49
Ⅵ. 원죄와 원의 ........................................... 52
A. 원죄와 인간의 책임 ................................ 52
B. 유혹과 죄의 불가피성 .............................. 54
C. 죄의 불가피성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책임 .......... 56
D. 원의 .............................................. 58
Ⅶ. 은혜로 구원받는 인간 .................................. 62
A. 그리스도의 중요성 ................................. 65
B. 은혜로 구원받는 인간 .............................. 68
C. 회개와 신앙에 의한 구원 ........................... 70
Ⅷ. 결 론 ................................................ 73
A. 요 약 ............................................ 73
B. 문제점과 공헌점 ................................... 78
** 참 고 문 헌 ........................................... 82

Ⅰ. 서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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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미국의 어떤 사상가보다도 가장 큰 영향력을 떨친 세계적인 인물이다. 그의 활동범위는 대단히 광범위하여, 디트로이트시의 13년간의 목회 생활 중에는 노동자의 복지향상을 위하여 포드 자동차사와 대결하면서 노동자의 인권문제, 인종문제등에 활약하였다. ) G. Brillenburg Wurth, 니버와 현대 미국신학 , 이창우편역(현대신학비평론집 1권, 서울:성광문화사, 1978), p. 298.
그 후 유니온 신학교 교수 시절에는 정당에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특별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를 취급하기 위하여 세워진 수많은 위원회에 참여하였다. 또한 니이버는 에큐메니칼 운동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W.C.C.회의를 준비하는 데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그는 1971년 그의 사망까지 기독교 윤리학과 신학에 관한 특강과 집필로써 대 학자요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니버의 사상은 사회적 정치적 현실 속에서 또는 국제적인 사건들의 전개 속에서 확인되어 정립되었다. 그는 상아탑 속에만 갇혀 있었던 학자가 아니라 국제적으로 활동한 신학자요, 사회, 정치, 경제, 문화등 인류 활동의 제 분야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체취를 느끼게 한 행동가였다. 그는 디트로이트시에서 그가 경험한 윤리적 충격을 신학적으로 포착하여 세계를 뒤흔들어 놓은 신학자였으며, 신앙을 일상적인 도덕적 상태에 응용한 윤리철학자였다. 또한 엄격한 실용주의에 찬동한 정치적 자유주의자였다. ) 박아론, 라인홀드 니버 연구 , 신학지남 , 1981년 10월호, P.
54

그러나 니버는 자신을 신학자라고 자처하기를 꺼렸다. 다만 자기의 일생을 통한 관심은 이 세속적인 세대에 기독교적인 신앙을 어떻게 옹호하며 정당화시킬 것인가에 있다고 하였다. ) R. Niebuhr, "Intellectual autobiograhy" in Reinhold Niebuhr: His Religious, Social and Political Thought, The Liberary of Living Theology, vol. 2, ed. Charles Kegley and Robert W. Bretall(NY: McMillan Co., 1956), p. 3.

니버가 일생을 통하여 발전시킨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신정통(新正統)이라고 불리워지며, 그를 가리켜 미국에서의 신정통주의의 대변자였다고 한다. ) Phillip E. Huges, Creative Mind in Contemporary Theology, (Michigan, Grand Ropid: Eerdmans,1966), p. 404.
이렇게 금세기의 위대한 영향을 미친 신학자 니이버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기독교 인간관에 대한 그의 독특한 이해이다. 그의 인간관은 그의 신학사상중 가장 잘 체계가 잡혀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사상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 된다. 그의 인간론은 신학적으로 어거스틴, 키에르케고르 그리고 칼 바르트의 영향을 받았으며 틸리히와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와도 깊은 사귐이 있었다.

A. 문제 제기및 연구 목적

그가 정립한 인간에 대한 결론은 하나님의 형상을지닌 피조물로서 자기 초월의 능력을 갖고 있으며, 동시에 타락한 죄된 인간이라는 역설이다. 니버는 성서와 기독교의 전통에 있는 근거들을 사용하여 인간의 원죄를 강조하였다. 1930년대 당시의 미국의 상황에 있어서 니버는 원죄에 대한 위대한 발견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 John C. Bennett, Christian Realism and Political Problems (NY:Scribner, 1953) p. 221.

니버가 생존한 당시의 사람들은 죤 듀이(John Dewey)의 실용주의적 사회개혁이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월터 라우쉔부쉬(Walter Rauschenbusch)의 사회복음이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시기이다. 그러한 사상의 중심은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낙관적 견해와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가 기초된 것이다. 따라서 진보적인 교육과 사회제도 등으로 사회 개혁과 인간성의 회복과 실현이 가능하다고 믿어졌다.
그러나 니버는 당시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영향을 미치던 낙관적인 인간관을 비판하며 실존주의적인 입장에서 인간을 자연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존재로 보고 인간의 죄는 인간이 자기의 제한성을 부정하고 영원무한자 되려는 의지, 즉 교만에 있다고 갈파하였다.
따라서 이와같은 인간관과 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서 인간이 처해 있는 윤리적 상황과 그가 창조하는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놀라울만큼 예리한 진단을 내렸고 인간의 죄와 긍정적 가능성을 둘러싼 변증법적 사고로써 어떤 대책과 결론을 시도하였다. ) 박아론, op. cit., p. 54.
이러한 니버의 인간관은 낙관적이며 합리적인 인간관에 도전하여 인간의 본성에 관한 성서적인 관점을 통찰력 있게 파악해낸 것이다.
본 연구의 목적은 니버의 신학적 공헌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그의 인간관을 그의 변증법적인 사고구조 속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또한 그의 인간관이 성경에 근거한 전통적인 기독교의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항상 모순과 긴장관계에 놓여 있는 인간이라는 실존주의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이러한 니버의 인간론의 중요성과 공헌 그리고 문제점들을 성서적인 기준과 기독교 전통의 입장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B. 연구의 방법과 범위

본연구의 방법은 니버 자신의 저작을 고찰하는 문서 연구이다. 니버의 수 많은 저서들 중에서 대표적인 저작들이라고 할 수 있는 책들은 다음과 같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Moral Man and Immoral Socitety, 1927)와 기독교윤리 해석학 (An Interpretation of Christian Etics, 1935)과 비극을 넘어서 (Beyond Tragedy: Essays on the Christian Interpretation of History, 1937)와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 (The Children of Light and the Children of Darkness: A Vindication of Democracy and its Traditional Defense, 1944)와 인간의 본성과 운명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 A Christian interpretation.Ⅰ. Human Nature,Ⅱ. Human Destiny,1946) 등이다.
그의 저서들 가운데 인간론에 관한 그의 가장 훌륭한 대표작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기포드 강연(Gifford Lecture)에서 연설한 것을 책으로 펴낸 인간의 본성과 운명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1946)일 것이다. 이 책에서 인간론에 대한 니버의 견해가 가장 조직화 되어 나타나 있다. 이 책은 2부작으로 제 I부 에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2부에서는 인간의 운명에 대하여 논한다. 본 연구에 주로 제 I부인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고찰할 것이다. 주요 참고 도서로는 William John Wolf의 Reinhold Niebuhr's Doctrine of Man (1956)과 Makers of the Modern Theological Mind 에 Bob E. Patterson 이 쓴 Reinhold Niebuhr 등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니버의 신학사상을 연구하는 것이 본 연구자에게는 힘든 작업임을 고백한다. 니버의 저서와 논문들은 내용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많은 독서를 통하여 과거 현재의 가능한 모든 정신 운동과 사회정치 운동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복잡한 문제는 니버의 방법은 역설(逆說)을 아주 좋아한다는 것이다. 니버가 생각하는 문제는 항상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때문에 그의 신학사상이 명확하게 표현되지는 못하지만 대단한 생명력과 활력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그는 틸리히와 비교할만한 전체적인 체계를 이룩해내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독창적인 사상이 내포되어 있으며 유럽의 신학사조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사람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니버는 미국을 대표할 만한 신학자이고,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고도 특별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본 연구 Ⅱ장에서 니버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에서 니버의 생애와 신학이 형성되는 전환점들을 살펴보고 그의 사상의 발전단계, 그리고 니버의 신학 구조와 특징을 고찰할 것이다. 제 Ⅲ장에서는 인간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들과 각각의 인간관이 가지는 특징과 영향, 그리고 문제점들과 인간의 본성에 관한 기독교적 통찰, 즉 니버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피조물로서 인간의 초월성과 죄된 인간이라는 선언 에 대하여 살펴 볼 것이다. 제 Ⅳ장에서는 성서의 자료와 기독교 전통에 입각한 자료들을 사용하여 니버가 분석한 인간의 죄에 대하여 죄의 기원과 죄의 불가피성, 그리고 죄의 형태들과 종교적인 죄와 도덕적인 죄의 구분을 살펴볼 것이다. 제 Ⅴ장에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닌 사회적인 차원에의서의 인간에 대하여 강조한 니버의 견해를 살펴볼 것이다.
그는 인간의 개인적인 죄와 집단적인 죄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제 Ⅵ장에서는 원죄와 인간의 책임이라는 모순된 주장에 대한 니버의 해명과 죄인된 인간의 원의에 대하여 고찰할것이다 제 Ⅶ장에서는 인간의 구원의 가능성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의 관점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 Ⅷ장에서는 결론적으로 앞에서 살펴본 니버의 분석을 간략히 요약하면서 그의 공헌점과 문제점들을 평가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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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니버의 생애와 사상

니버의 생애는 그의 사상과 뗄 수 없을 만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역사적 체험과 종교적 영적 가치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때문에 이런 점에서 그의 생애와 사고구조를 정리하는 것은 니버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 고재식, 라인홀드 니버의 공산주의 이해에 대한 연구 , 기독교사상 , 1985년 10월호, p. 94.

A. 니버의 생애 ) Bob E. Patterson, Reinhold Niebuhr, (Word Books, Publisher, Waco, Texas:1977), pp. 20-62.

라인홀드 니버는 1892년에 미국 미주리州에 있는 라이트市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원래 독일계통이고 그의 아버지 구스타프 니버(Gustav Niebuhr)가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 와서 정착한 것이다. 구스타프는 독일에서 루터교회에 속해 있었고 미국에 이주한 후에도 루터교회의 경건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녀들을 양육하였다. ) 이종성, 신학적 인간학 , 대한기독교출판사 (서울:1991), p.
152.
니버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 처음에 형성된 종교적 영향력은 그의 아버지였다고 한다. 그는 열살이 되었을 때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그후 두 루터파의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엠허스트(Elmhurst) 대학과 이든(Eden) 신학교를 마치고 예일(Yale) 대학에 가게 되었다. 그가 아직 이든에 있던 1913년에 그의 아버지 구스타프 니버는 세상을 떠났다.
니버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구스타프는 그의 가정을 세가지 원칙에 따라 운영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깊은 종교적 바탕과 자유와 평등의 가치 강조와 학문적 생활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 Ronald H. Stone, Reinhold Niebuhr: Propret to politicians, Nashville. 1972. p. 191.

라인홀드는 엠허스트대학에서는 교양교육과 고전어의 훈련을 받았다. 또한 이든 신학교에서는 성서와 조직신학에 관하여 철저한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예일대학에서 그는 자유주의적 사회철학과 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는 예일대학교 신학부에서 신학사 학위(BD)를, 그 다음 해에 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박사 학위 과정에 입학하였으나 휴학하고, 목회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가 받은 최고의 학위는 문학 석사였으나, 그 후 그는 옥스퍼드 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으로부터 18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 목창균, 라인홀드 니버의 생애와 사상 , 화해 , p. 171.

1915년에 니버는 자동차산업이 번창하던 디트로이트시의 벧엘교회에서 그의 첫목회이며 유일한 목회였던 교회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그 교회에서 13년간 목회생활을 했는데, 이 기간이 니버에게 있어서는 그의 일생중 가장 귀중한 체험을 했던 기간이었다. ) 고재식, op. cit., p.94.
1915년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던 해로써 파나마 운하가 1914년 개통되었고, 제1차세계대전이 1915년에 일어났으며, 미국의 생산력은 극도로 상승했다. 이러한 때에 그가 디트로이트에서 보고 느낀 것은 대량생산을 위해서 모든 것을 기계화하는 한 과정이었다.
니버는 그곳에서 아메리칸 유토피아를(American Utopianism) 내세운 헨리 포드의 자동차 공장에서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몸소 체험하고 나서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그가 그 교회에서 13년간 목회하는 동안에 20여명의 교인이 650
명으로 성장되었으며, 이 교회는 그가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논쟁의 소용돌이의 중심이 되었고, 후에 그의 평화주의 지지때에도 마찬가지로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심각한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그의 경건과 도덕적 이상주의가 팽창해가는 산업제도의 야만성을 뒤덮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일이다. 여기서 그는 자기가 예일대학에서 배운 자유주의 신학의 타당성에 대하여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 이종성, op. cit., p. 155.
그는 포드자동차사와 대결을 시도하여 노동자의 임금인상과 여타의 노동조건개선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으며 이러한 내용의 논문을 1926년 크리스쳔 센츄리 (Christian Century)지에 여러번 게재하였다. 또한 니버는 임금문제가 심각해져감을 발견하고 임금문제 위원회 회장직을 맡아 활약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을 하면서 니버는 격동하는 사회에 대하여 기독교사상이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신앙을 재해석하기 위한 임무를 느꼈다. 그러한 일을 통하여 기술사회에 있어서 인간의 필요성에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Stone, op. cit., p. 34.

또한 니버는 1923년 셔우드 에디(Sherwood Eddy)의 도움으로 세미나 참석차 구라파 여행을 하게 되었으며, 이 여행에서 그는 전쟁이후 독일의 비참함과 영국의 노동복지정책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사회민주주의가 기독교이상에 가장 근사한 정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것이 미국장래를 위한 최선의 길이라는 암시를 받게 된다. 여기까지가 니버 사상의 전기, 즉 첫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다. ) 고재식, op. cit., p. 95.

1928년, 니버는 13년간의 디트로이트의 목회를 고별하고 뉴욕시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의 응용신학 교수로 부임하였다. 니버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주로 기독교사회윤리를 강의하였는데 학문적인 분위기와 학술 연구의 기회가 좋아서 30년이 넘는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강의와 강연들 그리고 신학적 저술들을 통하여 윤리학자와 신학자로서의 그의 이름을 미국에서 뿐만아니라 국제적으로 알리기에 이르렀다. ) 박아론, op. cit., p. 53.

아메리칸 유토피아니즘이 1920년말의 세계 대공황으로 쇠퇴하게 되자 니버는 종교사회주의자로 변신하게 된다. 1931년 니버는 사회주의 크리스쳔 동지회 (The Fellowship of Socialist Christians)에 가담하여 투쟁적인 사회주의 정당과 정치에 깊이 개입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선동운동에 직접 개입하였고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여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1930년에 소련을 다녀왔고 그때 발견한 것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면이었다. 산업화가 상당히 진척되어 있는데 대하여는 깊은 감명을 받은 반면에 인간의 가치를 무시해가면서 능률을 강조해 가는데 대해서는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시기를 그의 사상의 중기 즉 두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30년 후반에 들어서면서 니버는 공산주의 정치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다.
특히 그는 독일의 나찌전체주의, 소련의 전체주의로 초래될 미지의 미래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그리하여 니버는 사회주의 정당과 결별하였다. 또한 니버는 그가 가졌던 초기의 평화주의도 버리고 말았다. 그는 미래에 예측되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고, 국제 정치무대에서 미국이 책임을 회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하게 된다. 따라서 제 2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는 것을 소극적으로나마 지지하게 된 것이다. ) 이종성, op. cit., p. 100-161.
그는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현실주의적인 시각에 입각하여 순수한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사회민주주의야말로 서양운명의 최종적 소망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니버가 이러한 사상의 변화를 일으키게 된 중요한 이유는 세계 대공황과 미국의 뉴딜정책의 성공때문이었다. 이때부터 니버는 공산주의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 니버, 기독교 현실주의와 정치문제 , 제3장 왜 공산주의는 그렇게 악한가?
국제정치무대에서의 미국의 책임의식을 고양시키는 정치적 현실주의의 지적 대변자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1939년 니버는 에딘버러대학에서 기포드 강연을 부탁받았다. ) 이종성, op. cit., p. 158.
그는 이때 자유주의 신학의 낙관적인 인간이해를 탈피하고 실존주의 인간론을 전개한다. 인간의 본질은 자연적이며 동시에 정신적이라는데 인간존재의 모호성이 있다. 그는 1952년에 초인적일 만큼의 사회참여와 저작활동으로 인하여 뇌일혈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B. 니이버의 사고구조

정치에 깊이 개입하여 활동하는 동안 니버는 그의 신학적 사고를 심화 발전시켰다. 그의 저작활동은 매우 활발하였고 그의 관심은 거의 무제한적이었다. 이미 서론에서 지적하였듯이 니버의 저서들도 많은 역설들을 포함하고 있기때문에 그의 사상의 줄거리를 명확하게 잡아내기가 어렵다. 따라서 니버의 사고의 기본적인 틀을 이해해야만 그의 사상을 곡해하지 않고 읽을 수 있다.
니버의 신학적 방법은 역설적인 변증법적 긴장관계라고 볼 수 있다. 해리 데이비스(Harry JR. Davis)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니버사상의 전구조는 상치된 두가지 개념들의 변증법적 긴장으로 형성되어있다. ) Reinhold Niebuhr on politics, ed., Harry R. Davis & Pobert C. Good(New Yord; Charles Scribner's Sons, 1960. p.x. 재인용
니버는 그가 사용하는 용어를 정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한 사실을 동시에 여러 관점에서 접근하는데 그는 이를 변증법적이라고 한다. ) June Binghour, Courage to Change, p. 32.
이 변증법은 재래의 정, 반, 합을 따르지 않고 합을 무한정 연기해 버린다. 그는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이는 의미에서 either-or"보다는 both-and"를 택한다. 예를 들면 그가 Christian Marxist일 때에도 그는 Marx사회 건설을 위해 자유사회의 파괴를 요구하지 않았다. ) 이종성, 라인홀드 니버의 정치 사회 신학사상 , 교회와 신학 , 제16집, 장로회 신학대학, 1984, p. 24-25.
이에 대해 고재식 씨는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설명한다. 니버는 항상 자유를 역사와 필연, 질서와 정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등의 상치개념들을 긴장관계에 대립시켜 놓고 기독교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이 개념들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통한 정확한 분석과 잠정적 해결책을 찾아내려 하였다. ) 고재식, op. cit., p. 97.
니버는 또한 변론법을 썼는데 그는 남의 사상을 비판함으로 자기사상을 표현했다. 따라서 그는 부정적 변론가 라고 불리웠다.) Ibid.

먼저는 어떤 사상이나 사람을 비판 공격하고 그후에 가서 어떤 좋은 점을 그 속에서 찾아낸다. 즉 그는 사회복음의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비평하고,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으면서도 그를 심하게 공격했다. ) R. Niebuhr, Nature and Destiny of Nan, (New York; Scribner's, 1941, vol. 1. pp. 282-3.
니버는 또한 역사적 방법론을 택하여, 어떤 사상을 다룰 때 희랍이나 로마의 근원까지 올라가서 역사적 사실에서 진리를 찾아낸다. 그는 한 이론을 시험하고 평가하기 위해 역사를 연구했다. 역사에서 같은 사실을 발견하고 경험적으로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고 했다. ) 이종성, op. cit.
또한 그는 성서적 신앙과 현실의 상황을 계속 함께 다루었다. 그는 성서가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조명하는가를 나타내 주었다. ) James. Civingstone, Mordern Christian Thought, p. 458.

C. 니버의 신학사상의 발전과정(단계)

니버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의 사상의 발전 단계를 세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의 발전단계를 소개하고, 더불어 그의 신학사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살펴보자. ) Marxism; An American Christian Perspective, p. 108; Comunism and the Theologians, pp. 122-125참조.

1) 첫번째 단계- 자유주의적 시대(1915-1928): 이 시기는 니버가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디트로이트에서 목회하던 시절로서 니버는 자타가 공인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로 자처하였다. 이 당시 니버가 자유주의적 경향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그동안 그가 자유주의자들이 내놓는 프로그램, 즉 국제연합회 지지자들과 인종문제의 관용적 태도를 찬성한다고 지지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그는 디트로이트 공업사회의 노동자 문제라든가 20
년대말의 미국의 대경제공황들을 체험하면서 자유주의의 한계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니버는 자신이 주관하고 있던 잡지인 Radical Religion'에 자신이 생각하는 자유주의 사상의 공통분모적 요소로 다음과 같이 집약하였다. ① 부정(Injustice)이란 무지의 소치이며 교육이 이를 해결할 것이다. ② 인류운명은 점차 더욱 윤리적으로 되어간다. 이 점진성의 불가피함을 거스르는 것은 죄악이다. ③ 사랑, 정의, 선의, 우애에의 미소는 궁극적으로 효과를 볼 것이다. ) 기독교를 살고 간 거인 , 기독교사상 1971년 7월, p. 151.
니버는 이와같은 자유주의의 공통분모적 요소들을 오류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인간성에 대한 오해로서 인간의 이성, 성선설, 점진적 발전을 믿는 하나의 낙관주의적 신앙이 곧 자유주의라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인간의 역사속에서 신국(Kingdom of God)이 인간의 힘에 의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믿는 기독교적 자유주의도 세속적 자유주의의 한 부류로서 인간이해의 오류에서 나온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이란 그렇게 믿을 만한 것도 아니며 인간의 본성이 선하지도 못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인간의 역사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고 마르크스주의로 쏠리게 되었다.
2) 두번째 단계- 공산주의에 대한 동조의 시대(1930-1937): 이기간은 니버가 유니온 신학교에 부임한 이래 여러가지 사회활동에 직접 개입한 시기로써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혁명적인 마르크스주의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이때부터 니버는 정치적 현실주의와 기독교 현실주의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당시에 그가 심취했던 혁명적 마르크스 주의는 폐쇄적인 소련의 권력체제나 이데올로기 체계인 공산주의와는 다른 것이었다. ) 고재식, op. cit., p.99.
이 무렵 니버의 사상은 사회복음과 마르크스주의의 혼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회문제 분석의 밑바닥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이 있었으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비폭력주의와 평화주의였다. 그러나 그는 마르크스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부터 마르크스의 중대한 오류를 지적할 수 있었다. 결국 자유주의의 근본적인 오류인 지나친 낙관론이 맑시즘에 옮겨와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나 맑시즘이나 인류 역사안에 유토피아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데에는 일치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 방법론만이 다를 뿐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는 자유주의를 부드러운 유토피아주의 , 맑시즘을 딱딱한 유토피아주의 라고 불렀다. 맑시즘 역시 인간은 죄인이다 라는 것을 무시함으로 지나친 낙관론에 빠지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 기독교를 살고 간 거인 , 기독교사상 1971년 7월호, pp.
152-153.

3) 세번째 단계-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단계, 실용주의적 시대(1940-1971년): 40년대 후반에 이르러 그는 자유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을 거쳐 실용주의적 입장으로 옮겨간 시기이다. 그때부터 그는 어떤 태도나 정책의 절대적인, 항구적인 타당성을 부인한다. ) 고재식, op. cit., p. 100.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첫재 마르크스주의를 정당안에서 구현하는데 실패했다. 둘째 정치철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의 부당성, 세째 종교화되어가는 마르크스주의의 위험성이 크다는 것이다.) Stone, op. cit., p. 61.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추구했던 그의 정치철학이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였다.
그는 신학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우그스티누스의 신학을 깊게 연구하게 되었고, 그후의 그의 정치철학의 근원을 신학적 인간론과 세계관에 두게 되었다. 니버는 기포드 강연(Gifford Lecture)를 위한 준비단계에 있어서 자유주의 신학의 낙관적인 인간이해를 탈피하고 실존주의 인간론을 전개한다. 니버는 비록 사회학과 제도에 관심을 집중했을 때라도 한번도 인간의 문제를 소홀히 다룬적이 없다. 니버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인간의 문제였다. 니버는 그의 지적 자서전 (Intellectural Autobiography)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1939년 에딘버러대학의 Gifford 강좌에 초빙되었을때 나는 인간의 본성과 운명 이라는 주제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분야는 나의 능력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 R. Niebuhr, op. cit., p. 9.

이종성 씨는 다음과 같이 그의 저서를 평한다.

그의 가장 신학적인 저서인 인간의 본성과 운명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은 그때까지 그가 의존하고 있었던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를 청산하고 신정통주의로 옮겨간 경로를 잘 알려주고 있다. ) 이종성, op. cit., p. 161.

이후의 니버는 점차 더 기독교적 인간관과 역사관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와 사회와 정치를 이해하는데 점점 더 기독교적 입장을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니버는 만년에 실용주의적 자유주의자로 변하였다. 그러나 그 자유주의는 20C초 미국에서 유행했던 그러한 자유주의가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과 역사철학과 신정통주의적 보수주의에 의해서 재구조된 자유주의였다.
이와같이 니버가 자본주의의 부패상을 보고 마르크스주의가 필요하다고 믿게 되었다가 다시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좀더 보수주의적으로 전향한 이유는 원죄 에 대한 기독교적 교리 때문이다. ) Marxism: An American Christian Perspective, p. 108. 고재식, op. cit., p. 107. 재인용
즉 니버의 사상적 전환을 초래한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가 인간의 죄성에 대한 그의 철저한 신학적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고재식, op. cit., p. 107.

이제 그의 생애와 사고구조, 그리고 사상의 발전단계를 살펴보면서, 그의 사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인간에 대한 이해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다음장에서부터는 니버의 모든 사상체계의 기본을 이루었던 인간관에 대하여 분석하며 평가하고, 문제점을 지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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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하나님의 형상과 피조물로서의 인간


니버는 인간상황(situation)의 세가지 모순된 양상에 대해 해석하면서, 모든 세속적 관점과 인간에 대한 그의 기독교적 관점이 다른 것을 구별해 내고자 했다. 첫째 그는 인간의 영적 불안성 안에 있는 인간의 자기 초월성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성경적 교리를 강조한다. 둘째로 인간은 제한적이고 의존적이며 자연에 속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성이 악의 근원은 아니다. 세째로 그는 인간 안에 있는 악은 인간모호성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나 필연적으로 그의 제한성과 그의 불안정성을 인정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 Patterson, Reinhold niebuhr, Word Books, Publisher, Waco, Texas, 1977, p. 64.
본장에서는 우선 니버가 분석한 인간에 관한 여러 견해들을 살펴보고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초월성과 자유에 대하여, 또 피조물로서 인간의 한계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A. 인간에 대한 여러 견해들

니버는 먼저 그의 인간관을 피력하기 전에 인간은 인간 스스로에게 문제시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를 자각한다는 이 역설로부터 인간에 관한 두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고 본다. 명백한 사실은 인간은 자연의 아들이며 자연의 변천에 따르고, 자연의 필연에 강요당하며 그의 충동에 의해 조정되고, 또한 자연이 지나친 자유를 인정치 않으나 어느 정도의 자유는 시인하고 있는 범위내에서 여러가지 모양의 유기적인 형태를 허락하는 것을 단시일로 제한하였던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다지 명확하지 않은 사실로 인간이 자연과 생명, 또는 그 자신, 그의 이성, 그리고 세계의 권외에 서있는 하나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 Niebuhr, 인간의 본성과 운명 , 제1부, 이상설 외 공역, 민중서관, 1962, p. 4.

이렇게 자기자신에게 문제가 되는 인간에 대한 근대인의 견해는 다음 두가지 인간관의 혼합 또는 어느 하나의 경로로 나타난다고 분석한다. 그 두가지 인간관은 모두 독특한데, 첫째는 고전적 인간관, 즉 희랍 로마세계의 인간관이며, 둘째로는 성서적 인간관이다.
이 두 인간관은 모두 독특하며, 부분적으로는 상호용납되지 않는 것이지만, Aquinas의 사상에서는 결합되어 있었다.
니버는 인간이해에 있어서 고전적 인간관과 성서적 인간관이라는 두가지 자료에 기초하였으며 인간관을 분류할 때는 고전적 인간관, 성서적 인간관 그리고 이두가지 인간관의 혼합으로 나타난 근대적 인간관의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고있다.

1. 고전적 인간관

고전적 인간관은 인간이란 본래 이성을 가졌다는 독특한 입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공통적인 확신을 갖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입장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들은 공통된 합리주의 이원론에 서있는데, 이 합리주의와 이원론의 영향은 고전적인 인간관과 그 고전적 인간관을 차용하는 모든 인간관을 한정해 왔다. 그 결과로 합리주의는 실제로 이성적 인간(본질적 인간)을 신적인 것과 동일시 한다. 이원론은 육체를 악과 동일시하고 마음이나 정신을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가정하는 인간관이 되는 것이다.
고전적 인간관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크로스의 자연주의적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라고 해석했다. ) Ibid., p. 11.

2. 성서적 인간관

기독교적 인간관은 하나님을 세계의 창조주라고 하는 신앙에 의하여, 합리성의 규범이나 이율배반, 특히 정신과 물질, 의식과 외연관의 배반을 초월한다. 신은 생명력과 형태이시며 모든 존재의 초월이시다. 성서에서는 신이 신이 만드셨기때문에 선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인간은 육체에 있어서나 정신에 있어서 창조된 존재이므로 영과 육이 분리되지 않은 통일된 존재이다.
성서적 관점은 인간에 대하여 일원론을 취하며 인간 이성의 기능 혹은 자연관의 관계의 특이성보다는 오히려 신의 입장에서 이해되어져 있다. 정신과 육체의 통일은 마음과 육체를 창조한 창조주시며 속죄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서 강조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신과의 관계에서 볼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임과 동시에 죄인이다. ) Ibid., p. 14.

하나님의 형상 으로서의 개념에 포함된 인간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견해는 기독교 사상에 있어서 인간의 미덕을 낮게 평가하는 견해와는 역설적으로 병립하는 것이다. 인간은 죄인이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에 대한 모반으로서 정의되며, 이 죄는 인간의 인격 중심, 즉 인간의 의지속에 악이 위치하고 나오는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대단히 심각하다. ) Ibid.
죄란 인간이 자기가 피조물임 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생명의 전 통일체의 일원에 불과한 것으로서 자기를 인정하기를 거부한다고 하는 사실에 의해서 야기되어진다.
여기에서 니버는 인간의 본질에 관하여 정의한다.

......인간의 본질은 그의 자유인 것이다. 죄는 그 자유로 인해서 범해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죄는 인간의 본질 속에 있는 결점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죄는 인간의 자유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고 그 자유의 사실에 있어서 가능케 된 자기모순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 Ibid.

니버는 그의 책 인간의 본성과 운명 에서 기독교의 죄악관의 의의를 좀더 충분히 분석하여 기독교에 있어서 표현된 불안한 양심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3. 근대적 인간관

근대적 인간관은 일부분은 고전적 정신으로, 또 일부분은 기독교적 정신으로 또한 일부분은 분명히 근대적 정신으로써 구성되어져 있다. 근대문화의 역사는 인간을 이성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 의해서 인간을 설명하려는 사람들과의 사이에 끊임없는 논쟁의 이야기다.
근대인은 자기자신의 능력을 전연 오인하고 있으므로 자기의 본질적 도덕성을 확신한다. 그는 자기자신을 자연의 인과율 혹은 그의 독특한 합리성으로써 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연도 이성도 초월하는 정신의 자유를 가지고 있는 것을 모른다. 근대정신이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오류를 범하는 것은 인간의 자기 초월의 높이뿐 인간의 정신과 그 육체적 생활 사이의 유기적인 통일의 양자를 공평하게 해석하는 원리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인의 정신은 인간의 비이성적 생명력을 공평하게 평가함이 없이 인간을 본질적으로 이성적으로 해석하든지 또는 인간의 이성적 자유의 영역을 바르게 평가함 없이, 인간을 본질적으로 생명력이라고 해석하는 어떤 쪽이다. 근대의 형이상학은 인간의 현실의 생명속에 정신과 자연, 자유와 필연과의 통일이 있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 니버, 인간의 본성과 운명 , op. cit., p.167f.

성서에 의한 창조의 교리는 창조된 세계를 악이라고 하지않으면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자유를 보유하고 있다. 오히려 성서적 종교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근거에 의해서만 이 창조를 선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창조주와 창조에 관한 성서적 해석은 이와 같이하여 인간정신의 높이가 측정할 것을 얻고, 육체와 영혼에 있어서의 그 생명의 통일이 보유되며 그리고 유한세계에 있어서의 그 역사의 본질적인 의미깊음이 긍정되고, 인간정신의 자유는 자기 초월성에 한계를 주는 유일한 근거이다. ) Ibid.

B.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과 피조물로서의 인간

성서적 견해에서의 인간의 독특한 특성은 하나님의 형상 과 인간의 단적인 자유에 있다고 보고, 인간의 이성은 이러한 그의 독특한 소질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하나님의 형상 을 지니고 있는 것은 전인이어서, 의지, 기억, 오성의 통일체이지 단순한 이성은 아니라는 것이다. ) 니버, 현대정신비판의 철학 , pp. 120-121.

1.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기독교 인간관의 또한가지 특징은 인간이란 그의 독특한 이성능력에서나 또는 그와 자연과의 관계에서 이해될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견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대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니버는 이 교리의 성서적 근거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구약성경에서 ruach와 nephesh는 둘다 숨, 바람을 의미하며 어떤 특수한 관념보다도 육체와 영혼의 통일을 의미하는 히브리적 의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ruch라는 말은 점차로 인간에게 있어서 생명의 윤리의 영혼 즉 는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인간의 기관의 특수한 명칭이 된다.
니버는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 는 창조의 교리를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시한다. 그 교리에서 니버는 성서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말할때 인간은 피조물이면서 자유로운 정신이며 인간은 마침내 정신으로서 하나님앞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 주장하였다.
인간정신에는 끊임없이 그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이 있다. 이 인간의식이 자기자신을 초월하는 정도는 더욱 높은 것이다. 니버는 자아의 자유에 대해 여러단계로 분류했다. ①본성적 과정을 초월하는, 본성으로부터 두드러지게 밖에 존재하는 자아의식이 있다. ②좀더 높은 단계에서는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개념을 창출하는 능력을 포함하며 이 능력에 대해 인지(awareness)하는 것이다. ③ 다른 초월의 단계는 이러한 인식적 의식을 넘어서 자아의식에 이르게 되며,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밖에 존재하는 곳에 있는 것이다. 자의식은 인간정신의 높이를 말한다. 즉 여기에서 자아는 경계없는 자유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 Patterson, op. cit., pp. 65-66.

인간은 그가 본성안에 있으면서 또 그밖에 있기도 하지만 어떤 필수적인 통일성(essential unity)을 가지고 있다. 니이버는 분석을 위해서 자아를 본성, 합리성, 그리고 정신(spirit)의 자유로 나누었다. 자아 안에 있는 이러한 요소들은 자아가 3중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일치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자유와 본성의 접합점에서있는 존재라는 주장에 대해 책임이 있었다. ) Ibid.

니이버가 이처럼 자아에 대해 신비(mystery)로 여기는 실존적 해석을 내리는 것은 19C 네델란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아서였다. 니이버는 키에르케고르가 인간의 자아에 대해 어떤 현대의 기독교 사학자나 심리학자들 보다도 더 정확하게 해석했다고 말한바 있다. 키에르케고르의 원칙은 니이버에게 매력적인 것이었는데, 그것은 시간과 영원, 인간의 초월과 한계,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 과 그의 타락 사이의 변증법적 위치를 설명했기 때문이다. ) Ibid.

자아초월의 인식과 이러한 자아초월에로 기억의 무한한 도달의 개념(이것은 니이버가 Augustine의 기억의 현상에 대한 분석에서 빌어온 생각)은 그의 신학체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합리성을 넘어선 초월의 개념은 인간 경험의 분석에 의해서는 드러나지 않는 성서적 계시로의 길을 닦아 놓았다.
기독교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인간의 개체성에 근거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 Ibid.
인간의 자유와 유한성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역설적인 해석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과 피조물로서의 인간을 병행하여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2. 피조물로서의 인간

생명과 역사에 관한 성경적 해석 전체는 지음받은 세계, 유한한 세계, 의존적이며 우연적인 존재는 그 유한성 때문에 악이 아니라는 가정에 서있는 것이다. ) Ibid.
성경은 인간의 죽음, 성경의 유한성, 의존성 및 불완전성은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에 속하는 것으로서 존경과 겸손으로써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 사실이라는 관점을 갖는다.
바울 신학에 있어서 지배적인 특색은 그것이 하나님의 존엄과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연약함과 의존성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인간의 가사성(mortality), 불완정성 및 의존성은 그 자체가 악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랑속에 자기의 가사성을 감추려하며, 자기의 힘으로 불완전성을 극복하려 하며, 자기의 독립성을 확립하려고 할때 바로 죄의 기회가 되는 것이다.
고뇌(anxiety)는 인간의 피조성의 한부분을 이룬다. 인간의 자연적 자아 와 이성적이며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자아 의 틈바구니속에는 갈등을 느낀다. 그는 유한하지만 자유롭고, 자신의 제한성을 무시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초월할 수 있다. 인간은 제한성과 자유를 똑같이 의식하면서 그 자신에 대하여 염려하게 된다. 이것이 그의 고뇌이다. ) Ten makes of Modern Protestant Thought, Association Press: New York, 1958, p. 86.

인간은 위에서 살펴본 것 같이 자연적 자아 와 정신적 자아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과 긴장관계 속에서 날마다 이것을 경험하고 있다. ) Creative Minds in Contemporary Theology, p. 383.
여기서 니버가 말하는 고뇌 는 죄 그 자체는 아니고 다만 죄와 믿음을 가능케 하는 그 무엇이다.
인간은 그의 자연과 정신 또는 유한성과 자유라는 이중적 차원구조속에서 고뇌하면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함으로써 자아긍정을 할 수가 있고, 반면에 피조성을 부인함으로써 자아부정적으로 흐를 수 있는데 전자를 가리켜서 믿음 이라고 하고 후자는 죄 라고 한다는 것이다. ) Ibid.,

니버의 피조성에 대한 해석은 죄에 대한 개념을 동시적으로 수반함으로 그의 죄관에 대한 고찰로 나아가게 한다. 따라서 죄는 자연 과 정신 또는 유한성 과 자유 라는 이중적 존재론적 환경에 대하여 그의 대조성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여기서 행위라는 것은 개별적 행동들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행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죄 는 자아의 중앙부에서 일어나는 왜곡 을 뜻하기 때문이다. ) Idid.

Ⅳ. 죄인으로서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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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지위에 관한 앞서 설명한 견해가 기독교의 인간관의 전부는 아니다. 인간의 자유에 대한 높은 평가, 즉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 이라고 보는 평가와 인간에 대한 낮은 평가는 기독교 이상에서는 역설적으로(paradoxical) 두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즉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 니버, 현대정신비판의 철학 , p. 125f.

니버는 죄의 형태보다는 죄의 본성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죄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그 본성을 이해하는데 실마리가 된다. 다음의 일련의 요소들은 니버가 죄의 출현에 대해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구별할 수 있게 한다.
① 인간은 자유로운 피조물로써 자연과 정신(spirit) 사이의 독특한 위치에 있다. ② 마귀는 인간에게 그의 창조자로부터 부여받은 위치를 거부하라고 유혹한다. ③ 이 세번째 요소는 앞의 두가지보다 좀 더 확대된 것으로, 하나님의 본래적인 질서에 위반되어, 그의 위치를 보호하려는 인간의 근심이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의존을 거부했고, 그는 그의 불안을 더 의식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의 불안은 무한정한 부분까지 다다른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파괴됨의 이 세가지 얽혀있는 양상들은, 개인과 단체의 다중적인 죄의 형태로 유도한다. 니버는 이만큼 날카롭게 죄의 출현에 있어서 이 세가지 요소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들이 상호연관되어 있고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 Bob. E. Patterson, op. cit., p. 83.

니버의 죄의 분석의 출발점은 인간실존의 모호성 이다. 인간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에 자아에게는 창조적인 능력도 있는가 하면 파괴적인 능력도 있다. 니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고 인간의 파괴성과 창조성을 분명히 구별해 낼 도리는 없다. 파스칼의 말을 빌리면 인간의 존엄성과 초라함 은 똑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다......" ) Ibid.

이제 니버가 분석하는 죄의 기원과 죄의 형태들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A. 죄의 기원

1. 유혹과 죄

성서에서는 죄악이란 인간 자신에게 유래되는 것으로, 인간이 처하고 있는 조건의 어떤 다른 요소에서 불가피하게 유래된 것이라고 변명할 수 없다고 줄곧 주장하면서도, 인간은 죄를 범하게끔 유혹을 당했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다. ) 니버, 인간의 본성과 욕망 , p. 240f.

인간 타락의 기록에서는 뱀이 인간의 형상을 분석한 데서부터 그 유혹이 생겨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인간은 유혹을 당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정해 놓은 인간의 제한을 깨뜨리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생각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받은 유혹은 인간의 유한성과 자유때문에 생겨났던 것이다. 즉 인간은 두가지 사실이 함께 겹쳐서 유혹을 당하게 되었다. 그 두가지 사실이란 인간의 위대성과 약점, 또 그의 무제한의 지식과 유한한 지식이 그것이다.

2. 죄의 전제 조건으로서의 불안

이렇게 인간이 자유로우면서도 유한하다는 역설적인 사실에서 불가피하게 불안이 나타난다. 인간이 이 불안을 자신의 힘으로 극복하려는데서 죄가 발생한다.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 속에서 불안감을 느낀 인간이 사탄으로부터의 유혹에 의해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고 스스로 높아지려는 교만에 빠져 범죄하고 만다. 그러므로 죄의 경향성은 인간상황 자체 속에 있다. 즉, 불안 자체는 죄가 아니나 불안은 죄의 전제 조건으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불안은 죄와 신앙 둘 다 가능하게 한다. ) 니버, 인간의 본성과 운명 , p. 244.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 신앙이라면, 자신의 유한성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 죄이다.
따라서 니버는 죄악은 인간이 자기의 피조물성 을 인정하지 않고 또 자신이 전체 생명의 통일 속에 들어있는 하나의 구성원에 지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바로 그 사실에 기인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 Ibid.,

인간은 두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려고 한다. 첫째는 자신의 유한성을 무시하고 자유를 극대화하여 하나님께서 설정해 주신 한계를 넘어 자기를 신과 동일시하려는 교만이다. 둘째는 자연의 생명력 속에 자기를 소실시킴으로써 자기 결정의 위험과 책임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하는 육욕의 방법이다. ) Ibid., p. 248,



B. 죄의 형태


니버는 죄의 형태를 교만과 육욕으로 분류한다. 그는 성서의 기독교적 사상이 교만을 육욕보다 한층 더 근본적인 것으로 본다고 말한다. ) 니버, Ibid.,


1. 교만의 죄

니버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이 교만이 인간속에서 여러가지 모양으로 죄를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교만의 세가지 타입 즉 권력의 교만, 지식의 교만, 및 미덕의 교만, 이 사이에 구별을 짓는 것은 단죄할 것이다. ) 니버, op. cit., p. 249.
니버는 Muller의 on the Christian Doctrine or sin 을 근거로 이러한 구분이 기독교 사상에 있어서 전통적인 구분이라고 한다.

첫째로 권력의 교만은 인간의 무한한 욕망중 권력을 구하는 욕망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자연의 우연성에 휩쓸려 있기 때문에 오는 피조물로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한계를 넘어서 자기의 불완선성을 극복하려는 의지, 즉 권력의지를 보인다. 이것은 자기만족과 자기우월을 주장하여 자신의 완전한 상태를 가정하는 인간의 교만이다. ) Niebuhr, 1964. op. cit., pp. 186-193.

인간은 점차 자기가 유한한 한계를 넘어서 드디어는 그의 정신이 보편적 정신과 일치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적, 문화적 추구는 모두가 교만이라는 죄악에 젖어있는 것이다.
두번째로 지적 교만이 있다. 이것은 권력의 교만이 한층 정신적으로 이상화한 것이다. 인간의 지식은 어느 것을 막론하고 이데올로기적 색채를 지니고, 또 각자의 특별한 입장에서 얻어진 부분적, 유한적 지식이며 왜곡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그 지식을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관점이 편파적임을 알지 못한다. ) Ibid.
지적 교만은 스스로 시간적 과정 속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는 것을 잊고, 자기가 역사를 완전히 초월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성의 교만에 빠지는 것이다.
세째로, 지적 교만이 발전된 도덕적 교만이 있다. 도덕적 교만은 타자가 자신의 독단적인 기준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는 모든 독선적인 판단속에 표현되어 있다. 인종적, 국가적, 종교적, 그외의 사회의 투쟁의 모든 것은 독선의 결과의 객관적인 악과 사회적 비참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 교만의 죄는 영적 교만을 가져오게 한다. 궁극적인 죄는 도덕적 교만 속에 포함된 자기 신격화를 표명하는 종교적 죄이다. 자기 주장의 최악의 형태는 종교적 자기 주장이다. 이것의 핵심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종교는 하나님과 인간의 자기 영광간의 전쟁이다. ) 니버, 인간의 본성과 운명 , pp. 263-264.
종교적 교만과 편협는 인간 죄의 최후적인 표현이다.
위에 열거한 4가지 교만은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1) 인간 자신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2) 이 교만들은 자애의 양태를 띠고 있고, 3)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방법이다. 이러한 결과로서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자인 하나님과 가질 수 있는 본연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다. ) Perry Lefevere, 현대의 인간이해 ,이종성역(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0, p. 116.

2. 육욕으로서의 죄

니버는 죄의 두번째 일반적인 형태를 육욕(sensuality)라고 부른다. 교만과 마찬가지로 육욕도 자연과 영혼이라는 기본구조안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교만이 자아를 영(Spirit)과 일치시키고자 하는 의도인 반면에, 육욕은 자아를 자연(nature)와 일치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 Bob. E. Patterson, op. cit., p. 92.

성서적 종교는 죄를 원래 교만과 자애로 정의하고 있다. 니버는 자애와 육욕의 관계를 분석함에 있어서 죄를 근본적으로 육욕과 동일시하는 기독교적 흐름이 있음을 설명한다.
즉 희랍교부들의 입장이 그러하다. 대표적으로 오리겐은 인간의 타락이 성적 타락이라고 보며 그 결과 모든 성활동을 생래적인 죄로 간주한다. 악을 동물적 정열 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희랍사상이 헬레니즘적인 기독교의 죄관에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헬레니즘적 기독교는 죄를 쾌락애, 육욕, 색정과 동일시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성생활을 죄악시하는 오류에 빠졌다. ) 니버, op. cit., p. 303.

이와 대조적으로 바울-어거스틴적 신학전통은 색정, 특히 자연적이 아닌 색정은 교만과 자기 신격화의 보다 근본적인 죄의 결과이며 또 그 죄의 벌로써 그려져 있다. ) 니버, Ibid., p. 304.
즉 육욕을 죄의 결과나 벌로 간주하는 것이다. 니버는 색욕은 사실상 하나님의 자랑보다는 오히려 원시적 자기애에서 야기되는 모든 피조물적이며, 변하기 쉬운 것에 대한 지나친 사랑이다. 라고 한다.) 니버, Ibid., p. 307.

즉 니버는 기독교 신학이 육욕을 자애의 보다 원시적인 죄의 파생물로 간주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육욕은 하나님 대신에 자기를 존재의 중심으로 대치시키는 근본적 혼란의 결과로서 더욱 큰 혼란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자기본위, 자기애가 생명을 자기에게 집중시키려고 하는 의도에 의해 초래되는 생명의 조화의 파괴이므로, 육욕은 자기 속에 있는 특수한 충동과 욕망에 자기를 부당하게 일치시키는 것과 그것에의 자기의 헌신등에 의하여 초래되는 자기내부의 조화의 파괴이다. ) 니버, Ibid., p. 302.

성과 육욕과 죄의 문제는 항상 혼란의 근원이 된다. 죄가 부득이 성과 연결되어 있기때문에 이원론자나 금욕주의자는 성을 흔히 죄된 것 자체로 생각하기 쉬웠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타락한 본성을 받아들여서 그의 성생활에서 죄를 범하나, 성이 본질적으로 죄된 것은 아니다. ) Ibid., pp. 306-307.

다시말하면 하나님 안에서 자기 생명의 진정한 중심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인간은 육욕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여러가지 육욕중에 성은 육욕을 표현하기 위한 가장 명백한 기회이며, 또한 육체의 가장 선명한 표현인 것이다. ) 니버, Ibid., p. 315.

성은 자애의 한 형태이며, 타자의 신격화에 의해서 자기에에서 도피하려는 노력이며, 무의식 속에 빠짐으로 자기나 상대방을 신격화하는 어리석음으로 부터 도피하려는 것이다.
육욕은 음주, 대식 성적 방종, 사치, 변하기 쉬운 선에 대한 지나친 헌신 등의 모든 것으로 표현된다. 니버는 육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① 자기자신을 파괴하는 데까지 이르는 자기애의 팽창. ② 어느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함으로써, 혹은 자기외의 어떤 인격을 발견함으로써 자기의 감옥을 도피하려는 노력.
③ 죄가 어느 형태의 잠재의식적 존재 속에 창조한 혼란에서 도피하려고 하는 노력들인 것이다. ) 니버, Ibid., p. 315.

3. 도덕적인 죄와 종교적인 죄

성서에서는 죄악을 종교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면에서도 규정하고 있다.
종교적인 면에서 본다면 죄악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 하나님의 자리를 가로채려는데 있다.
도덕적 사회적 면에서 의 죄악은 부정의다. ) 니버, 현대정신비판의 철학 , pp. 130.

니버는 전통적으로 기독교신학이 도덕적 죄와 종교적인 죄를 구분하지 않고 인간은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태도를 강조해왔음을 지적한다.
즉 기독교의 죄에 대한 불가결한 표현은 로마서 3장 23절에 나타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니버, 인간의 본성과 운명 , p. 291.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불신앙의 죄, 즉 종교적인 죄(sin)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현실속에 있는 인간사이의 죄악(guilt)에는 확인되어야할 불균등성이 있다.
도덕적 죄는 종교적 죄의 객관적, 역사적 결과이다. 그런데 도덕적 죄는 개인이나 집단간에 큰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권력을 가진 인간이나 집단은 그렇지 않은 것들보다 더 부정을 행하며, 자신의 지위나 지식에 유혹된 인간은 지위나 지식을 갖지 않은 사람들보다도 더욱 교만하고 부정한 죄를 범한다는 것이다. ) Ibid., p. 296.

자아는 위로도 옆으로도 확대된다. 그 위로의 확대, 즉 교만은 신에 대한 죄속에 그 자아를 끌고 들어 간다. 그 옆으로의 확대는 동료들을 희생시켜서 안전과 위신을 획득하려고 하는 부정한 노력속에 자아를 끌어 넣는다.
하나님 앞에 동등한 죄인인 인간은 그들이 휩쓸리는 악행의 특수한 행동에 동등하게 죄악적일 필요는 없다. 성서적 종교가 죄(sin)의 균등성과 함께 죄악(guilt)의 불균등성을 강조해 온 것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 니버, Ibid., pp. 295-299.

이와 같이 니버가 종교적 죄의 보편성과 심각성을 이야기하면서도 도덕적 죄와 구분하여 말하고, 그 불균등성을 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니버는 정통적인 개신교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종교적 죄의 균등성이 엄연한 사실이며 타당하나, 그것만 강조하다보면, 모든 상대적인 도덕적 판단을 파괴하려는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 니버, Ibid., p. 292.
여기에서 니버는 바르트신학을 다음과 같이 비평한다. 바르트의 신학과 같이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궁극적 종교적 사실에 대한 배타적 강조에 의하여 모든 상대적인 도덕적 판단을 파괴하려고 위협하는 신학은 역사의 상대적인 도덕적 목적 달성을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의심해도 좋다.

또한 카톨릭에서의 난점은 우연적이며 역사적인 도덕적 판단속에 종교적으로 절대적인 것을 부단히 침투시켜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니버는 사회제도에 있어서 약간의 보다 많은 정의와 약간의 보다 적은 정의의 차이 및 죄인에 있어서의 약간의 보다 많은 이기주의와 보다 적은 이기주의와의 차이는 특수한 상태에 있어서는 병환과 건강, 비참과 행복과의 사이의 차이인 것이다. 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니버의 견해를 살펴보면, 그는 죄의 도덕적 차원을 기존의 정통기독교가 소홀히 한 문제라는 것을 직시하여 사회적 부정의로서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그는 종교적 죄의 깊이와 심각을 논함으로써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비관적인 사실 상태를 더욱 심각하게 드러내 보이면서도, 인간관계의 도덕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부정의는 개인과 집단간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도덕적 차원에서는 모든 인간이 똑같이 균등한 죄악을 범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이 부분에서 니버는 가진자를 보다더 권력이 있으며, 종교적 의를 소유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도덕적 죄악의 심각성을 약하고 가난한자, 소외된 자의 도덕적 죄악보다 더 무거운 것으로 간주하며 다루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존 베네트(Jhon C. Bennett)는 니버가 강자들의 죄악 에 주로 집중했음을 말한다.
니버는 항상 죄중에서 가장 파괴적인 형태는 흔히 일반적으로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인정될 수 있는 사람들의 자기 정당성과 가식이라고 생각한다. ) Jhon C. Bennett, op. cit., pp. 220-221.

그러나 니버는 전통적인 게으름(나태)의 죄는 결코 논의한 적이 없다. 훈련이 필요한 약한 자들의 죄는 그의 범주에서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커다란 실수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부분은 지혜자나 권력자, 성인의 범하는 죄의 자리에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 Bob E. Patterson, op. cit., p. 91.

Ⅴ. 사회속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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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장에서는 니버가 인간을 단지 개인적인 측면에서만 다루지 않고 사회적인 관계와 상황속에서 인간을 이해하였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그는 인간의 죄를 단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파악한 것이 아니라 사회 집단 안에서의 죄에 대하여도 다루고 있다. 즉, 하나님앞에서 죄인된 인간은 사회적 관계에서도 죄악적임을 심각하게 인식한 것이다. 이 점은 다른 신학자들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니버의 특징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죄를 자유를 가진 인간의 불안 의 불가피성에 존재한다고 이해하는 니버의 견해는 실로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매우 흡사하다. ) 니버와 키에르케고르는 둘다 불안 을 죄의 전제 조건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들은 중요한 면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키에르케고르의 인간이해가 인간의 내적 삶의 심리학적 차원에 대한 복잡하고 정교한 것이라면 니버는 키에르케고르가 빠뜨리고 있는 면인 인간이해의 사회적인 관여에 관심을 두고 있다. ) Perry Leferre, 현대의 인간이해 , pp. 108-109.
즉, 개인의 이기주의에 대하여만 분석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도덕 생활을 지배하는 집단의 이기주의와 죄에 대하여도 분석한다. 집단적 이기심을 밝혀낸 것은 그의 인간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A. 개인의 죄와 집단의 죄

니버는 개인의 이기주의와 집단의 교만 사이의 구별이 필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집단적 혹은 사회적 자아의 허세나 요구는 개인의 자아의 그것을 능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집단은 그 목적 추구에 있어서 개인보다 존대하며 위선적이며, 자기중심적이며, 잔인한 것이다. 개인도덕과 집단도덕간의 불가피한 도덕적 긴장관계가 이와 같이 조성되는 것이다. ) 니버, op. cit., p. 278.

인간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일때는 어느정도 도덕적일수가 있고 타인의 이익을 열망할 수도 있지만, 사회집단 속에 들어가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본성이 드러난다. ) R. Niebuhr, 신앙과 역사 , p. 101.
모든 인간 집단에는 집단을 형성하는 개인이 그들과 개인 관계에서 나타내는 것에 비해서 충동을 견제하고 지도할 만한 이성이 보다 적고, 자기 초월의 능력이 보다 적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헤아릴 능력이 보다 적어서, 더 많은 무제한의 이기심을 나타낸다. ) R. Niebuhr,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p. 8.
따라서 가족에서 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집단적 이기심과 교만은 개인적 이기심 보다 더 큰 충동을 일으킨다. 즉 개인적 이기심은 개별적으로 점잖게 나타날 때보다 연합해서 공동의 충동으로 나타날 때에 더욱 생생하게 표현되고, 보다 더 누적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Ibid.

사회적 집단은 그 존재의 필언성이 개인의 존재의 궁극적인 법칙이라는 것을 주장함으로 개인의 무조건적 충성을 요구한다. 집단적 이기주의는 확실히 보다 큰 전체속에 자기를 상실하는 기회를 개인에게 부여하며, 또한 자기 확대의 가능성을 개인에게 주는 것이다. 집단적 교만은 이와 같이 하여 인간 존재의 제약적 우연적 성질을 부정하려고 하는 인간의 최후의 그리고 어느 의미에서는 가장 불쌍한 노력이다. 인간의 죄의 본질 그 자체가 그 속에 있다. ) 니버, op. cit., p. 283.

니버는 인종적, 국가적, 사회경제적 집단의 이기주의가 국민 국가에 의하여 가장 철저하게 표현 된다고 지적한다. 국가의 주권 속에는 우상 숭배의 유혹이 내포되어 있으며, 정치적으로 확실한 형태가 부여된 사회집단 치고 우상숭배의 유혹에 지지 않고 존재한 것은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 니버, 인간의 본성과 운명 , pp. 279-280.
국가의 교만은 그들의 제약된 가치를 무조건적인 것으로 주장하려는 경향속에 있다. 국가는 그의 생명을 초월한 가치에 대하여 사실상의 정당한 근거보다도 더욱 절대적인 헌신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국가에 충성을 바치는 그 가치를 실제적인 가치보다 더욱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개인이 누구나 죄에서 해방되어 있지 않음과 같이 어느 국가도 교만의 죄에서 해방되어 있지않다.
니버는 여기에서 히브리 예언자들이 국가가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것과 국가가 하나님과 배타적으로 향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국가를 심판하였음을 지적한다. 또한 니버는 국가와 같이 교회도 집단적 이기주의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즉 루터의 종교개혁은 역사적 기독교의 신격화에 대한 반동이었다. ) 니버, op. cit., pp. 285-290.

이렇게 개인의 죄만이 아니라 개인의 죄가 더욱 누적적인 힘을 갖는 집단의 죄를 집단의 이기주의로, 즉 집단의 교만의 죄로, 분석한 니버는 과거의 도덕적 이상주의 자들이나 합리주의 자들의 오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합리주의적이건, 종교적이건, 이들 도덕주의자들 모듀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모든 인간 집단의 행동이 야수적이라는 사실에 대한 이해, 그리고 모든 집단관계에 있어서의 사욕과 집단적 이기심의 힘에 대한 이해인 것이다. 모든 도덕적 및 포괄적 사회 목표들에 대해서 집단적 이기주의가 얼마나 완강히 저항하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가불 그들은 비 현실적이고 혼란된 정치 사상에 빠지는 것이다 ) R. Niebuhr,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p. 16.

니버의 죄의 깊이와 보편성의 강조가 갖는 중요한 결과는, 그가 인간의 죄 많은 오만과 이기주의는 개인적인 발전, 사회적, 문화적 진보, 종교적 주장과 같은 모든 단계에 있어서 찾아볼 수 있다고 경고 한다는 것이다.

B. 인간과 사회

1.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앞에서 살펴 볼 것과 같이 죄는 개인적인 현상인 것만은 아니다. 죄는 사회적 차원도 갖는다. 니버는 이와같은 죄의 사회적 차원의 구성 요소들을 그의 저작,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속에서 탐구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제목은 잘못된 인상을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쓴것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 관한 것이 아니고, 비 도덕적 인간과 좀 더 비도덕적 사회에 관한 것이었다. ) 후에 니버는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의 제목보다 The Not so Moral Man in His Less Moral Communities 가 더 적절함을 시사했다. R. Niebuhr, Man's Nature and His Communities, (N.Y.: Chales Scribner's Sons, 1965), p. 15.
즉 인간은 개인으로서 도덕적으로 출발하지만 문명에 의하여 부패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려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니버는 곧 인간 자아의 바른 구조속에 스며들어 있는 집단적인 악의 뿌리, 특히 그 자아의 유한성, 불안, 염려에서 나오는 자아의 수세적 (守勢的)인 경향에 대하여 좀더 깊이 반성한 것이다.) Jhon C. Bennett, 라인홀드 니버의 업적 , Union Seminary Quaterly Review, vol.
XXIV, Number I, Fall, 1968.

그럼에도 개인이 사회보다 도덕적이라는 니버의 뜻은 개개인은 행동의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서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의 이익을 고려할 수도 있고, 또 때로는 자기의 유익보다 타인의 유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도덕적 일 수 있다. 는 것이다. ) R. Niebuhr, Maral Man and Immoral Society, p. 22.

니버의 죄론으로 보아, 또 죄는 보편적인 인간의 현상이라는 그의 확신으로 보아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다고 말하는 속에서 도덕을 무죄와 동등시하고 있지 않음이 명백하다. ) 윌리엄 A. 스코트, 개신교 신학 사상사 , 김쾌상 역, p. 271.

2. 개인과 사회의 윤리

개인은 신앙을 통하여 기독교인으로서 사랑이 그의 삶에 있어서 주된 원리가 되어야 함을 깨닫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개인은 다른 사람들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사랑을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인관계를 지배하는 사랑이 대사회 관계에서도 효과적인 운영원리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에서 그 저작 내용의 대부분이 최고의 도덕적 가치인, 또한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윤리명령인 사랑이 사회관계에서는 그 기본적인 운영의 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한다. 개인의 경우는 교만과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권력의지는 제어될 수도 있다. 사회의 경우는 누적적인 교만 (a Cumulative Pride)이 있어, 통제하기가 훨씬 어렵고 이성이나 양심의 지배아래 들기가 훨씬 더 어렵다.
이런 이유때문에 이웃사람에 대한 호소로는 사회개혁을 가져오지 못하며, 국가간의 분쟁을 해결하기에는 사랑의 윤리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집단간의 차이와 그 차이에 서식하는 사회적 불의는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설득에 굴복하지 않게 된다. 이익 갈등의 경우 권력은 권력에 의하여 도전을 받아야 한다. ) R. Niebuhr, op. cit., p. 15.
각기 자체의 권력의지를 갖고 있는 다양한 집단들로 이루어진 사회의 규범은 정의 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집단간의 관계는 윤리적이라기 보다는 압도적으로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Ibid.

인간이 예견할 수 있는 미래에 자신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강제가 없고 완전한 평화와 정의가 이룩될 이상적인 사회의 건설이 아니고, 충분한 정의가 존재하고 공동의 과제가 완전한 파산에 이르는 것을 막을 만큼 강제가 비폭력적인 방식이 될 사회의 건설이다. ) 니버, op. cit., p. 22.
따라서 니버는 인간의 정의실현의 가능성이, 민주주의를 가능케하고, 부정의에로의 경향성 때문에 민주주의는 필요하다 고 말한다.) R. Niebuhr,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녀들 , p. 6.

3. 불가능한 가능성 으로서의 인간

한편 니버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하여 좀 더 희망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사랑의 법 을 사회속에 구체화시킬 가능성이 매우 적다할지라도 사랑의 법으로서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서 니버는 불가능한 가능성 ) 이 문제를 니버는 그리스도교 윤리의 해석 이라는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다.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법과 행위에 대한 가능성, 이 두가지 관점에서 행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랑의 법이 완전히 수행되는 사회란 없다. 다만 사랑의 법이란 행위에 대한 우리의 동기이며 표준일 따름이다. 이러한 사랑의 법에 의해서만이,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며, 정의의 상관성이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박해의 사회적, 부정의에 부딪친다 할지라도 결코 절망이나 자기 만족 또는 그것을 거절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역사속에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보여 준 구체적인 아가페는 인간 역사 속에서는 인간의 능력으로 도저히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적응성(relavance)이 있다고 니버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1) 예수의 십자가에서 계시된 아가페 사랑은 이웃에 대한 관심, 사랑의 동기와 실천력을 제공하고 강화해 주기 때문이다. (2) 아가페 사랑은 불완전한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만족이나 자기 정당화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자기 성찰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3) 아가페 사랑은 각자의 몫을 계산해야 하는 정의가 그 계산 과정에서 인간의 이기심때문에 불의로 전락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4) 인간의 마음과 행위를 아가페 사랑에 더 가까이 가도록 계속 노력하게 하는 기준과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아가페 사랑은 인간공동체의 유지와 향상을 계속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가페 사랑은 역사안에서는 절대적 실현이 불가능한 것이면서도 역사에 대해서 타당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 현영학, 라인홀드 니버의 삶과 사상 , 기독교 사상 , 1981.
8월호, p. 131.

이렇게 하여 니버는 인간과 사회의 죄에 대하여 깊이 있게 숙고하지만 그는 인간과 사회의 불가능성만을 논한 비관론자로만 머물지 않았으며, 또한 사랑의 초월적 이상의 가능성만을 신회하여 인간과 사회에 대한 낙관론을 말하지는 더더욱 않았다.
니버는 이러한 단순한 두 견해의 오류를 거부하고 낙관과 비관 사이의 긴장을 현실과 이상사이의 역설로 인정하여 단순한 가능성도 불가능성도 아닌 이른바 사랑의 불가능한 가능성 (Impossible Possiblity)으로 그의 이상을 결합하여 이 양자의 긴장을 유지한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현실주의 라 칭한다. ) 나학진, 仁과 사랑의 정치영역에서의 역할 , 신학사상 제 XI호, 한국신학연구소, pp. 711-712.

Ⅵ. 원죄와 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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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버가 원죄에 대하여 다룬다는 것은 죄에 대한 그의 사상중 매우 의미깊은 부분이다.
본장에서 다루는 소제목은 니버가 인간의 본성과 운명 에서 다루고 있는 절차를 따르고 있다.

A. 원죄와 인간의 책임

니버는 전통적인 원죄의 교리가 갖는 문제성을 이렇게 표현한다. 고전적인 모습을 취한 그리스도교의 죄의 교설은 인간이 불가피하게 그리고 숙명적인 필연성에 의해서 죄를 범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항력적인 숙명에 의해서 촉진된 행동에 대하여 인간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외관상 불리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합리주의자와 도덕주의자와의 양방을 발돋음하게 한다. ) 니버, 인간의 본성과 운명 , p. 320.

즉 원죄와 인간의 자유의지를 병행시키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처럼 보인다. 니버는 이 애매하고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죄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정통기독교의 원죄교리는 죄의 기원으로부터 후대 인류까지 죄의 역사를 확대시키려는 노력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일부 신학자들이 종종 성적욕구에 의한 타락과 동일화 시키기도 했다.
물려받은 혹은 유전된 교리가 되어 버렸다. ) R. Niebuhr, 기독교윤리학 , 노진준 역, p. 88.
니버는 이 교리의 고전적인 해석에 따르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더이상 과거의 한 사건으로 받지 않았고, 인간의 보편적인 어쩔 수 없는 죄에의 경향성에 대한 상징적인 진리로서 보았다.

원죄는 유전된 타락이 아니라 인간 실존의 불가피한 사실이며, 이 불가피성은 인간의 본능적 영성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다. 원죄는 실존의 매 순간마다 존재하나 역사성은 없다. ) Ibid.

니버는 원죄가 유전된 타락이라면, 그 유전성은 죄의 개념의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와 책임을 파괴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니버는 어거스틴이 계시를 역사화해서 초역사적인 현실로 변형시키고, 혈연적인 원죄의 개념을 역사적인 죄로 변형시켰다고 비난한다. 이러한 니버의 견해가 비록 성서의 메세지를 보다 효과적으로 설명하고자 취하여진 하나의 방법이라 할지라도 창조와 타락에 대한 성서의 기록을 역사성을 부인 하는 점은 성서적 신앙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B. 유혹과 죄의 불가피성

니버는 원죄의 문제를 밝히는데 있어서 키에르케고르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죄에 있어서 자유와 운명과의 변증법적 관계에 관한 키에르케고르의 설명은 기독교사상의 가장 심원한 것 중의 하나라고 인정한다. ) 니버, op. cit., p. 344.

니버는 유혹과 죄의 불가피성에 대한 분석으로 인간이 그 죄에 대한 책임을 피함이 없이 죄를 범하는 것을 명백히 하고자 의도하였다. 그는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빌어 죄는 그것 자체를 전제한다. 고 하였다. 만약 인간이 이미 죄를 범하지 않은 것이라면 그는 유혹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 니버, op. cit., p. 331.

키에르케고르는 원죄의 교리를 심리학적으로 설명함으로써 현대적인 형태로 이 교리를 새롭게 했다. 니버는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인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궁극적 죄의 기원은 신비로운 것이다. 그가 탐구한 심리학적 조건은 ① 인간의 동물성과 정신성으로써의 이중적인 본성, ② 불안정한 근심의 합성된 상태, ③불가피한 죄의 발아를 포함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죄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유혹에의 극복에 따른 인간의 책임에서 떠난다. 인간은 어쩔수 없이 죄를 짖는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적인 우연성이나 존재론적인 필연성 때문에는 아니다. ) Bob E. Patterson, op. cit., p. 95.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 죄는 인간과 분리될 수 없다. 아담은 죄의 유혹에 의하여 잠재적인 죄인으로서 노출되어있다. 키에르케고르로부터 유래한 전통은 사람이 자기 의식(Self-conscious)이 될때마다 그는 그를 요구하는 것에 대해 부족하다는 느낌을 갖는다고 말한다. 원죄 는 이러한 상황을 표현하는 실존적 공식이다. ) Ibid.

인간의 책임감은 그가 자유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단지 죄에 대해서 자유이다. 이것은 니버가 원죄 라고 부르는 것의 모순이다. ) Ibid.
니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신앙이라는 선행적 죄가 가정될 때에만 자유의 불안은 죄에로 이끈다. 이것이 죄를 스스로 가정한다는 키에르케고르의 주장의 의미인 것이다. ) 니버, op. cit., p. 333.

죄의 불가피성은 자연과 영혼에서 인간상황의 논리적 결과는 아니다. 그러나 죄에의 유혹은 이러한 상황에 놓인다. 불안이 자아를 하나님의 의리에 복종하도록 이끌수 있다.
그러나 불안이 자아를 하나님없이, 그의 삶이 독립적이라는 것을 발견하도록 이끌 때, 그것은 죄로 떨어지는 것이고, 그의 삶을 잃을 것이다. 죄의 불가피성은 불안은 죄를 더한다 는 것이다. ) Ibid., p. 331-332.

C. 죄의 불가피성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인간의 책임

니버는 죄의 불가피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책임은 사실은 죄악된 행동이 가져오는 회한과 참회의 감정에 의해 입증된다. ) 니버, op. cit., p. 335.
니버는 인간이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 사고할 때, 그는 자기가 자신의 행위속에 결정론적으로, 또는 맹목적으로 휩쓸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명상할 때, 그는 그 행동의 순간에 있어서 찾아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커다란 자유의 주장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고 말한다.
회개는 신앙을 가진 자유이지만 회한은 신앙없는 자유인 것이다. 니버는 결론적 죄의 불가피성에 대한 인간의 책임간에 표면상의 모순된 주장을 가진 기독교의 원죄설은 변증법적 진리라고 하였다. 인간이 죄를 범하는 것은 그의 자유속에서이며, 또 그 자유에 의해서인 것이다. 궁극적인 역설은 죄의 불가피성의 발견이 인간 자유의 최고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 니버, op. cit., p. 344.

확실히 니버는 죄많은 불안한 현실을 사회복음의 낙관적인 신학보다도 아주 진지하게 다루었다. 낙관주의적인 신학에서는 인간의 어떤 죄가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의지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는 확실한 불안정성만 남아있다고 한다. ) G. Brillenburg Wurth, 니버의 현대 미국신학 철학의 하나님 , 이창우역, (성광문화사, 1978), p. 339.

그러나 타락과 원죄에 관한 니버의 진술은 많은 반대를 받는다. 우선 정통신학은 역사적 사건들로부터 실존적 경험으로 원죄의 전통적 개념을 바꾼 니버의 방법을 거부한다.
정통주의는 원죄가 역사가 아닌, 실존의 모든 순간에 있어서의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
니버의 접근은 자유가 의를 획득할 것이라는 펠라기안적인 어조에 의해 거절되어지는 것이다. ) Bob E. Patterson, op. cit., p. 97.

원죄의 교리는 니버가 죄에 대하여 다루는 것중 가장 애매한 난점이었다. 그는 어려운 문제에 대해 모순적으로 보이는 답을 한 것이다. 그러나 니버의 심리학적 분석은 아직도 왜 죄가 불가피하며, 그래도 인간에게 책임이 있는지에 대한 명백한 답을 주지는 않는다. 죄가 그 자체를 가정한다. 는 키에르케고르의 명상은 감명적이기는 하지만 혼란스러운 것이다. 니버는 심리적 사실들이 그들의 완전한 복잡성에서 깊이 연구할 때, 인간이 분명하게 죄를 짓는다는 것과 그러나 책임성을 도피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라고 말한다. ) 니버, op. cit., p. 331.

E. J 카넬(Carnell)은 라인홀드 니버의 신학 이라는 책에서 니버가 인간은 죄를 피할 수 없는 존재라고 우리에게 명백히 말했다고 언급했다. 이는 인간이 인간을 규정짓는 한계내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거절하고 있기때문이다. 니버는 인류에게 어떤 죄의 요소가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있는데, 죄는 아담의 타락과 관련되어 자연적인 발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들어왔다. 니버의 말을 인용하면 죄는 어거스틴주의자의 잘못된 해석 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실존주의자들이 인정하려고 하는 것보다 더많은 구조적인 죄악의 요소 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카넬은 묻고 있다. 자동차가 규칙적으로 고장이 났을 때에 자동차 내에 어떤 구조적인 결함이 있다고 사람들은 예상한다. 이것은 인간의 경우에도 동일하지 않느냐는 것을 카넬은 묻고 있는 것이다. ) G. Brillenburg Wurth, op. cit., p. 339.

이러한 비평은 니버가 원죄를 심리적 경험의 차원에서 분석할 때 제기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니버는 원죄의 모순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논리적 어리석음을 인식하고 있다.
이제 까지의 기독교적 사상가들은 니버가 주창했던 실존의 모순적인 해석을 따르지 않고 심각한 죄의 교리를 생각해 왔다.
결국, 원죄의 불쾌한 현실성에 대한 니버의 의미있는 인식은, 니버의 접근법이 옳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니버가 분석적이고, 실존적 인간이 모든 사실들을 자아의 불가피한 자기 주장과 그것에 따르는 책임성의 변증적인 진술을 포함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D. 원의(Orginal Righteousness)

카톨릭에 있어서 타락은 인간에게 있어서 본질적이 아닌 어떠한 것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타락은 인간의 본질의 부패는 아닌 것이다.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인간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는 인간의 타락으로 파괴되어진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니버는 인간의 본질적 본성과 그의 죄의 상태와의 관계는 타락이전의 완전의 연대적 해석에 의하여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수평적 관계라기보다는 수직적 관계인 것이다. 타락이 인간의 생명에 있어서 모든 역사적 순간에 대한 모습의 상징으로서보다도 역사속의 사건으로 취급될 때 그 순간에 있어서 선과 악의 관계는 불명료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 니버, 인간의 본성과 운명 , vol. 1, pp. 355-356.

니버는 장님은 실명했다할지라도 아직 눈을 가지고 있다. 는 말로 원의를 표현하고 있다. ) Ibid.
따라서 장님의 눈이 인간의 몸에서 눈을 제거하는 것이 아님과 동시에 아무 것도 본질적 본성과 구조를 변경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니버는 인간의 본질적 본성에는 두가지 요소가 포함된다고 한다. 하나는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특질에 속하는 것으로 자연성 이라고 불리운다. 다른 하나는 인간 정신의 자유에 호응하는 미덕으로 신앙, 희망 그리고 사랑 이다. ) 니버, op. cit., p. 358.
신앙은 하나님께 대하여 조화를 준다. 신앙의 한 형태인 희망은 자아내에서의 조화이다. 신앙에서 유래되는 사랑은 공동체 내에서 사람들을 용납하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조화이다. 신앙, 희망, 그리고 사랑은 원의의 진술이다. 그것들의 충만은 원의이다. 그것들은 정적인 용어들이 아니고 인간의 그것들의 활동성에 대한 동적인 표현이다.) Bob E. Patterson, op. cit., p. 99.
신앙, 희망 그리고 사랑의 덕목들은 법의 형태로서 죄악된 인간에게 나타난다. 이러한 법은 인간의 마음에 쓰여 있으며, 그의 의식속에 영원히 그것을 기억한다. 원의는 인간의 자유의 필수조건을 나타내고 있으며, 자연적 의는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필수조건이다.
원의도 자연적인 의도 모두 죄로 말미암아 타락되어져 있으나 양쪽이 모두 실현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필수조건으로서 지금껏 인간과 함께 있는 것이다. ) 니버, op. cit., p. 363.
이 원의는 타락에서 완전히 상실되는 것은 아니며, 그가 무엇이어야 하는 것의 지식으로써 즉 그의 자유의 율법으로서 죄인에게 남겨져 있다. 니버는 종교개혁 이전의 기독교에서는 원의 즉 사랑의 율법은 자연적 인간에게 있어서의 가능성이 아니라 은총 에 의해 속죄된 인간이 원의를 이해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고 말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은총 을 불완전함을 완전하게 하시는 인간에게 있어서의 신적 힘이라고 하기보다는, 사죄의 은혜로 정의하고, 해방된 사람조차도 그의 모순을 극복하고 원의를 구체화 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본성및 인간의 역사를 제한없는 가능성의 영역으로 간주했다.
니버에 따르면 현대 자유주의적 기독교와 세속적 문화 둘다는 인간의 원의의 도달을 위해 르네상스의 대답을 적용했다고 본다. 그는 르네상스와 개혁주의의 통찰력중에서 유효한 것을 택하기를 제안하고 보다더 유익한 접근으로 그것들을 결합시키기를 제안한다.
그의 대답은 능력과 사죄 둘다로서 은혜의 모든 유익들을 갖게 하기 위하여 의도되어진다.

Ⅶ. 은혜로 구원받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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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버의 죄에 대한 교리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오해되고 또 가장 잘 알려진 것이라면, 은총에 대한 그의 교리는 그의 가르침중 가장 적게 평가되고 가장 적게 알려져 있다.
인간 위에 그리고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인 은총에 관한 그의 교리는 그의 신학중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요소이다. 죄의 교리가 그의 비평가들에 의해 알려진 유일한 요소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결론은 니버는 인간 본성에 대해 너무나 비관적이며, 그는 단지 인간의 죄만을 보고, 그리고 인간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Bob E. Patterson, op. cit., p. 101.

또 이와 다른 한관점에서 접근하는 사람들은 인간본성의 죄성에 대한 니버의 스케치는 너무나 어두운 색깔로 칠해져 있어 하나님조차도 인간을 인간이 빠진 처지로부터 구해낼 수 있을 지를 생각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본다. ) 윌리엄 A. 스코트, op. cit., p. 281.
그러나 니버는 그의 비평가들이 이해하는 것보다 더욱 거대하게 희망적이다. Bob E. Patterson은 니버에 대한 위의 견해들에 대해 루머라고까지 이야기한다.
니버에 대해 공감하는 소수의 비평가들은 니버에게 은총의 교리가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불충분하다고 느낀다. 또한 은총에 관한 니버의 교리가 전적으로 종말적이며 다가온(임박한) 구원이 아니라고 말한다. ) Bob E. Patterson, op. cit., p. 102.

일반적으로 니버의 은총의 교리는 부정되어왔거나 왜곡되어졌고, 우호적이거나 비우호적인 비평가들 모두에게 무시되어져 왔다. ) 이종성씨는 신학적 인간학 에서 니버의 죄론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고찰하고, 은총의 교리나 구원론에 대하여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앞에서 인용한 G. Brillenburg Wruth박사의 책에서도 니버의 은총에 대하여 다루지 아니하고 비평만을 가하고 있다.
이러한 취급때문에 니버는 부분적으로 비난 받아왔고 그리고, 이러한 오해에는 그것을 심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근거들을 갖고 있다.
몇가지 이유를 살펴보자.) William John Wolf, Reinhold Niebuhr's Doctrine of Man", pp. 243-245.

첫째, 니버의 초기 저작은 하나님의 은총보다도 더 인간의 죄에 대한 분적세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Gifford Lecture의 Volum 2에서 은총안에서의 성장 에 대해 조직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두번째 권이 2년 후에 나왔을 때 그것은 그늘에 가려졌다는 비평을 받는 것이다.
둘째, 니버가 너무나 계속적으로 경고하기 때문에, 은총에 삶조차도, 은총이 자기-의(self-sighteousness)에 의해 필연적으로 손상되어진다는 인상을 갖도록 전와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지적받는다. 그의 전문용어는 그리스도 은총이 역사안에서 승리를 얻을 수 없다는 인상을 쉽게 줄 수 있다.
그는 죄가 사실상 에서가 아니라 원죄에 있어서 극복되었다고 말한다. ) R. Niebuhr, volum II, p. 49.
외견상의 의미는 은총이 인간의 투쟁에 아주 적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니버는 그렇게 십자가를 제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결국 영혼이 그 자신으로부터 하나님께 돌이킬 때 회심에서 일어나는 진정한 성화를 묘사하기 위하여 는 부적당한 것으로서 그러한 혼란스러운 전문용어를 마침내는 부인하였다. ) William Wolf는 Fact 라는 용어사용으로 인해 니버에 대한 오해가 생기는 것을 지적하엿다. 이에 대하여 니버는 그것이 구원받은 삶속에 죄가 존재한다는 사실, 즉 종교개혁의 원리인 Justus와 Peccator simul 이라는 것을 정당하게 다루기에는 부적당한 방법임을 인정하였다.
R. Neibuhr, Reply to interpretation and criticism, p. 437.

은총에 관한 니버의 교리는 그의 죄의 교리와 같이 그의 신학에 있어서 중심적이고 필수적이었다. 니버는 죄속에 있는 인간의 상황에 대하여 무수히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했다. 확실히, 니버는 원죄의 어두운 배경에 대하여 은총에 대한 그의 교리를 세웠다. 그는 기독교의 은총의 교리를 원죄의 기독교 교리에 대해 병치시켰으며, 원죄의 교리는 단지 인간 경험의 실제적인 사실에 대한 정확한 묘사를 의미해왔다. 고 말한다. ) R. Niebuhr, vol. II, p. 108.

그는 은총의 필요를 보여주기 위해 인간의 죄에 어두운 그림을 그린다. 은총의 교리는 그것의 중요성을 성취할 잠재성에 대한 진단으로부터이다. 왜냐하면 은총은 인간문제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은총은 항상 사죄와 능력 둘다이다. ) R. Niebuhr, Pious and Secular America, p. 105.
Bob E. Patterson, op. cit., p. 103. 재인용.

니버는 은총에 의한 구원이라는 기독교 교리가 단지 원죄를 위한 치료였다고 확신한다.
그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메세지가 개인적인 차원에 있어서나 그들이 존재하는 사회적인 면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은총과 진심의 자원(Source)이라는 것을 기독교인으로서 주장한다고 말한다.
본장에서는 니버의 사고에 균형을 회복시켜주고 기독교적 희망의 낙관성을 부여해 주는 그의 사상적 차원을 살펴보기 위하여 그의 구원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른 많은 개신교신학자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니버에게 있어서도 구원 은 곧 은혜 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의 은혜관 을 고찰하는 것이 곧 그의 구원관 을 고찰하는 것이다. ) 박아론, 라인홀드 니버 연구 , 신학지남 , 1981. 10, pp.
63-64.

A. 그리스도의 중요성

니버나 종교개혁의 성서적 가르침의 해석에 따르면,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 니버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성에 대한 대답이면서 인간 역사의 의미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신앙이 중심적으로 이해하는 역사적 사실, 인간의 죄성과 역사의 애매성에 빛을 던져주기 위하여 신앙이 이용하는 역사적 사실은 그리스도의 사실이며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실이다. 니버의 사상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폴 레만(Paul Lehmann)이 ......인간의 상황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업을 이해하는 실마리로서......핵심적 중요성 ) Paul Lehmann, "The Christology of Reinhold Niebuhr," Reinhold Niebuhr; His Religious, Social and Political Thought, eds.
Charles W. Kegley and Robert W. Bretall, (New York; Macmillan Co., 1961), p. 255.
이라 부른 바와 같은 위치를 차지한다.
십자가는 이 세계 내에 존재하는 악과 악의 위력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있다. 하나님은 이 악에 압도당하고 살해당하였다. 그러나 이 십자가는 또한 이 세계 내에 존재하는 구속적 은총과 그것의 보다 막강한 힘을 보여주기 위하여 서 있다. 하나님은 악을 이기시고 인간에게 악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제시한 정신적 차원의 진리들의 정상이요, 총 집약은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시간 과 영원 , 역사 와 초역사 의 교차점에 놓여 있는 프리즘(Prism)과 같다. 그것은 인간 역사에 빛을 던져주고, 또 영원을 향하여 빛을 던진다. 그것은 사람과 하나님에 대하여 다 빛을 비춘다. 십자가의 기능 또는 역할은 이렇게 매개적이며 통전적이다. ) Creative Mind in Contemporary Theology, p. 390.
그리고 십자가의 내용은 아가페 즉 희생적 사랑 이다. 그런데 이 아가페 즉 희생적 사랑은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는 불가능 이요, 어리석음 이다. 그러나 자유의 차원에서 생각할 때 십자가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계시 이다.) Ibid., p. 391.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진노와 사랑의 이중적 관계를 계시한다. 십자가의 내용인 아가페, 즉 희생적 사랑이 그것을 말해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하나님은 인간 악에 대한 불용납 과, 그것에 대한 그의 격분 을 계시한다. 동시에 아들을 희생하는 사랑을 통하여 인간의 죄의 결과를 자신이 짊어지는 일을 기꺼이한다. 그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여러가지 의미들을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하여 니버는 하나님의 지혜로서의 십자가 개념과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십자가 개념을 이용한다. 니버에 따르면, 기독교 복음의 본질적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인간에게 와 닿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참 의미가 계시되었을 뿐아니라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역량도 제공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는 진리 만이 아니라 은혜 가 충만하다. ) 니버, Human Destiny, p. 98.
이것이 니버에게 있어서는 지혜와 능력으로 이해된다.
이말들이 니버에게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안에서 지혜가 주어진다. 이것은 그 안에서 생명의 참된 의미 가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이 주어진다. 이것은 이 생명의 의미를 성취시킬 수 있는 원천이 이루어졌다 는 것을 말한다.) Idem.

B. 은혜로 구원받는 인간

그리스도 안에는 삶의 참 뜻을 계시해 주는 아가페, 즉 희생적 사랑으로 대표되는 지혜의 면 이 있음과 동시에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생활가운데서 열매 맺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로 대표되는 능력적 국면 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자체에도 두가지 국면이 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한편으로는 인간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인간이 완성 못한 것을 완성케하고 인간의 죄적 요소들을 초극하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이다. 동시에 은혜는 인간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것은 인간이 소유하지 않는 역량의 공급이다. 즉 성령의 은사이다. ) Ibid., p. 99.
니버는 갈라디아서 2:20의 주석을 통하여 그리스도안에서의 새삶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니버, 제4장, 지혜 권능 은총.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바울의 첫번째 확신은 죄갚은 자아, 자아 스스로가 중심이 된 자아는 못박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서지고 파괴되어져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의 심판과 자비가 동시에 나타난다. 이 계시 속에서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자비에 대한 소망은 서로 혼합되어져서 절망은 회개에 이르게 되고 회개는 소망에 이르게 된다. ) William John Wolf, op. cit., pp. 245-246.

그러면서도 내가 삶은
신생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새로운 자아의 경험이기도 하다. 자아의 재건의 가능성은 자신을 초월하는데서 오는 권능 과 은총 의 결과라고 느껴진다. 죄 깊은 자아가 파괴되고 참된 자아가 스스로를 초월하는 데서 내려오는 힘으로 성취될 때 그 결과는 파괴라기보다는 새로운 생명인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교리에 있어서는 다른 어떤 교리보다도 자아는 무능함과 동시에 가치가 있으며, 보다 더 의타적인 동시에 불멸적인 것이다.
내가 산 것 아니오,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산 것이다.
새로운 자아는 어떤 실제적인 공적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를 목적 삼는 것이다. 그것은 신생의 주요목적과 의도가 그리스도를 규범으로 하는 방향에 놓여졌다는 의미에서 믿음으로만 말미암은 자아인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구속의 모든 사역을 그리스께 돌리는 감사의 표시이다. 새로운 자아가 완성된 실재라기 보다는 신적인 자비에 의해 그리스도의 완전이 자아에게 돌려지는 방식으로서의 그리스도를 향한 방향정립이다.
여기에서 니버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 능력으로서의 은총과 우리죄의 용서로서의 은총의 두가지 측면은 인간의 삶속에서 계속적 긴장을 유지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나 인간은 죄를 범한다. 은총은 인간을 새로운 삶으로 인도할 수 있으나 이 삶의 어느 단계에서나 인간 악의 새로운 가능성들이 현존한다. 성취된 덕의 모든 새로운 수준은 죄의 가능성의 새로운 수준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용서와 및 칭의 는 기독교인의 삶의 시작에서 필요한 것처럼 끝에서도 역시 필요하다. 기독교 역사적 기록들은 아무도 로마서 7장이 말하는 바 중생인이 경험하는 죄의 내적 갈등으로부터 해방된 적이 없었음을 우리에게 알게하여 준다. ) 니버, vol. II, pp. 100-105.

능력으로서의 은총의 두가지면을 어느 한쪽만을 강조함이 없이 표현하는 것은 어렵다.
그런나 니버는 은총의 이들 두면이 모순되지 않고 서로를 지지한다고 주장한다. 경험의 사실은 칭의로서의 은총(용서)과 성화로서의 은총(능력으로서 부여된)이 둘다 진리라는 것이 니버의 결론이다. 한단계에 있어서 자아는 신생을 경험하며, 또 다른 단계에서 자아는 죄에 머무른다. 니버는 이것을 은총의 역설 이라 명명한다.

C. 회개와 신앙에 의한 구원

니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여 인간이 회복되는 방법을 회개와 신앙으로 보았다.
신앙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교리는 역시 니버의 관심사 중에 일관되어 있는 주제이다. 정의에 대한 우리의 노력은 언제나 타협에 빠지게 되고, 사랑의 법도는 오직 상대적으로만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는 신앙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이다. ) 나학진 편, 현대신학자 20인 , (대한기독교서회. 1989), p.
66.

인간이 뉘우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바랄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은 먼저 그가 처한 곤경의 근본적인 심각성을 인식하여야 한다. 인간은 그가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조성하여 놓았음을 이해하여, 절망으로 이끌려야 한다. 십자가의 뜻은 먼저 절망을 일으키고 그런 다음에야 희망을 일으키려는데 있다. ) 윌리엄 A. 스코트, op. cit., p. 276.
이 뉘우침과 이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이용하는 데서 인간의 상황은 충분히 이해되고 극복되어진다. 이 경험속에서 인간은 유한한 자신을 이해하며, 자신의 부족하고 의존적인 면을 피하려고 하는 노력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자신을 초월한 능력을 붙잡는다. 이 능력이 그의 불완전을 완전하게 해주고 그에게서 자기 완성을 꾀하려는 잘못되고 헛된 노력들을 정화시켜 준다. ) R. Niebuhr, volun II, p. 57.

용서란 말은 회개를 전제하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자각하지 못할 때는 회개가 일어날 수가 없다.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인간의 죄악의 심각성을 인식하며 하나님의 심판의 엄위하심을 인식하고 회개하는 인간, 국가, 문화는 새로운 시작을 약속받는다. ) R. Niebuhr, 신앙과 역사 , (종로서적. 1983), p. 148.

니버가 신앙에 의한 구원을 말할 때 신앙의 의미는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신의 힘이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완성할 수 없는 것을 완성하고 인간이 만든 악을 극복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 Ibid., p. 158.
니버는 신앙을 인간의 궁극적인 자유의 표현이며 그것은 반드시 모든 인간의 현실적 인식에서의 우연적이고도 또한 잘못된 요소의 인식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신앙의 표현은 인간의 지혜의 능력을 초월하는 지식, 곧 은총 의 선물이라고 인정된다. 신약성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일은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확고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자신이 메시야로서 부름을 받고 있음을 베드로가 이해한 것은 신의 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베드로를 향해 단언하는 것이다. ) Ibid., pp. 154-155.

종교개혁의 중심교리인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는 니버의 견해는 매우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니버의 신학을 종교개혁 사상의 갱신이라고 보는 부분적인 이유가 된다.

Ⅷ. 결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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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논문을 마침에 있어서 이제까지 고찰한 내용을 요약하고 니버의 인간관의 문제점과 공헌점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A. 요 약

제 Ⅱ 장에서는 니버신학이 당시의 미국적 상황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그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과 죄인으로서의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인간관의 중요성과 배경을 살펴보았다. 니버는 당시의 자유주의 신학의 낙관적인 인간이해와 보수주의적 기독교의 비관주의적인 인간이해의 오류를 지적하고 성서적 통찰의 빛 아래에서 현실 상황을 분석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과 죄인으로서의 인간이라는 그의 독특한 인간이해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인간 이해는 그가 자유주의적 기독교의 낙관주의에 젖어 있다가 당시의 미국의 상황을 예리하게 분석하면서, 또한 그러한 상황에 적합하다고 느낀 공산주의가 역시 낙관적인 인간이해와 유토피아니즘의 환상에 젖어 있음을 발견함으로써 결국 성서적이면서도 현실에 적합한 인간에 대한 이해의 틀의 필요성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니버의 사상은 모든 신학적인 사고와 체험안에서 정립된 것이며 그의 일생을 통하여 발전갔다.
제 Ⅲ 장에서는 니버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주장하는 성서적인 근거를 분석하고 또한 지금까지의 인간에 대한 견해들을 분석하였다. 니버는 현대적 인간관이 두가지의 인간관에 기초한 것임을 밝혔는데 그것은 고전적 인간관과 성서적, 히브리적 인간관이다. 고전적 인간관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및 스토아 학파의 철학으로 부터 유래한 것으로 이들은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인간의 본질로서 파악하고 그것을 신적인 것과 동일시 한다. 이들은 인간의 이성을 확신하는 합리주의를 이루며 인간의 미래와 역사에 대해 낙관주의적인 태도를 갖는다. 즉 인간 이성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의미한다. 성서적 인간관은 창조주에 대한 신앙에 기초한 것으로 인간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육체와 영혼의 통일체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근대적 인간관은 고전적 인간관과 기독교적 인간관을 혼합한 것으로서,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자연주의적 견해을 받아들여 인간에 대하여 모순되는 입장을 취하게 되며, 또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지 않거나 죄인인 것을 거부하게 되는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결국 근대적 인간관은 인간의 악의 문제를 소흘하게 취급하거나 낙관적으로 생각하여 인간 이성의 힘으로 인간과 역사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분명히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초월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과 그러한 초월적 인간이 죄를 범하므로 죄인된 인간이라는 것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위대한 반면 창조주 하나님을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죄를 범한 죄인인 것이다.
제 Ⅳ 장에서는 그러한 죄된 인간이 죄를 짓게된 기원을 성서는 뱀의 유혹과 타락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니버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 불안으로 인하여 유혹당할 수 밖에 없었음을 말한다. 그는 인간이 처한 상황은 그가 불안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한다.
인간은 자유를 가지고 자신을 초월할 수 있으나 그러나 제한된 피조물인 것이다. 인간의 불안은 죄 자체는 아니나 인간이 죄를 짓게 하는 전제 조건이 된다. 인간은 자신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하여 자신의 정신을 과대평가하여 하나님처럼 높이고자 하는데 이것이 교만의 죄이다. 또 다른 면으로는 자신의 육체를 과소평가하여 육체의 쾌락에 자신을 맡기는 육욕의 죄가 있다. 니버는 교만의 죄의 형태로서 권력의 교만과 지적 교만, 지적 교만이 발전된 형태인 도덕적 교만, 그리고 도덕적 교만이 가져오게 되는 영적 교만이 있다고 분석한다. 육욕은 자기 자신안에 진정한 생명의 중심을 상실한 것으로 니버는 교만을 육욕보다 더 앞선 것으로 다룬다.
성경은 죄악을 종교적으로만이 아니라 도덕적인 면에서도 다루는데 종교적인 죄악이 교만이고 하나님께 대한 죄라면 도덕적인 죄는 사람들과의 관게에서 나타나는 부정의이다.
여기에서 니버는 과거 전통적인 개신교가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이라는 종교적인 죄만을 강조하다보면 모든 상대적인 도덕적 판단을 파괴하게 되는 위험이 있음을 경고한다.
제 Ⅴ 장에서는 니버가 단지 죄를 개인적인 면에서만 다룬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측면도 다루었다는 것을 밝히었다. 이것은 인간을 개인으로만이 아닌 사회 속에 있는 인간으로 본 니버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인간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만이 아니라 사회관계 속에서 보려는 니버의 관점은 전통적인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매우 귀중한 것이다. 그는 인간이 개인으로서가 아닌 집단으로 나타나게 될 때 얼마나 더 이기적이며 포악해 지는지를 예리하게 분석하며 특히 강자들의 죄 즉,권력과 경제력을 가진 지배자들과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자들의 더욱 교묘하고 깊은 차원의 죄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
이렇게 인간의 죄의 심각성과 보편성을 심도있게 파악한 것은 니버의 가치있는 점이며 그러한 죄가 단지 개인적이 아닌 사회적이고 집단적으로 어떻게 더 교묘히 위장되어 나타나는 가를 분석한 것은 특기할만하다.
제 Ⅵ 장에서는 인간의 죄가 그렇게 심각한 양상을 띠고 모든 부분에 스며들어 있는 원인을 원죄로 설명한다. 즉 죄의 불가피성이 원죄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죄가 불가피함에도 불구하고 죄에 대한 책임이 인간에게 있다는 사실은 죄를 지은 인간의 참회의 행동이 증명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 깊이 생각하게 될때 후회하고 참회에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니버는 원죄라는 말을 사용할 때 성서에서 말하는 타락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원죄를 인간의 죄의 심각성과 보편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이해한다. 이것은 성서적 신앙으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니버는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잔여적으로 남아 있음을 말한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였다. 그러나 장님이 눈이 멀었다는 것은 인간의 몸에서 눈을 제거하는 것이 아님과 동시에 아무 것도 인간의 본질적 본성과 구조를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특질에 속하는 것으로 인간의 자연성과 원의인 신앙, 희망, 그리고 사랑이 있다. 이러한 원의도 자연적인 의도 모두 죄로 말미암아 타락되어졌으나 양쪽이 모두 실현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필수조건으로서 지금껏 인간과 함께 있다는 것이다.
제 Ⅶ 장에서는 인간의 구원에 대하여 논하면서 니버의 비평가들이 니버가 인간에 대하여 너무나 비관적이며 죄만을 논하고 있다는 비평들과 그러한 오해의 원인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니버는 인간의 구원에 대하여 소망을 가지고 논하였으며 죄많은 인간 구원의 가능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랑의 은혜임을 강조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 그리스도 안에는 희생적 사랑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지혜와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열매 맺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이 은혜에도 두 차원이 있는데 하나는 인간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이다. 동시에 인간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성령의 은사이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여 인간이 회복되는 방법을 회개와 신앙으로 보았다.
인간이 자신이 처해 있는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회개를 할때 용서가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전제한 것이다. 니버는 신앙을 인간의 자유의 궁극적인 표현으로 보았다. 신앙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교리는 역시 니버의 일관된 관심사였다. 인간은 인간의 노력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는 신앙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이다.

B. 문제점과 공헌점

이제 본절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니버의 인간 이해가 주는 신학적 공헌점을 살펴보고 문제점들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니버는 성서와 기독교적 전통에 있는 재료들을 사용하여 인간에 대한 포괄적인 교리를 발전시켰다. 그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피조물로서, 죄인으로서 이해하고 있다.
특별히 니버는 죄인된 인간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인간의 죄의 기원과 형태,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죄를 분석해 낸다. 그러나 인간이 죄인임만을 강조하여 비관주의에 빠지지는 않았다. 그는 동시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님으로 인하여 위대성과 가능성을 갖고 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낙관주의에 빠지지도 않았다. 이렇게 니버는 인간의 두 측면, 즉 하나님의 형상과 죄인, 또는 자유와 유한성을 동시에 강조한다. 그의 인간 이해는 낙관주의도 비관주의도 아닌 하나님의 형상과 죄인된 인간이라는 기독교 현실주의이다
니버의 공헌점은 우선 그의 인간해명에 있다. 그는 성서와 현실주의에 근거하여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그는 인간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현대의 수 많은 정치, 경제, 사회의 문제들을 심각화시킨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관념론자들이 인간의 이성을 지나치게 신뢰하여, 인간이 피조물이며 죄인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오류를 지적한다. 또한 인간을 단순한 피조물로만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초월적 존재임을 거부하는 자연주의자의 오류를 지적한다. 이와 같이 니버는 인간 본성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갖는 근대적 인간관의 오류를 분석함으로 인간상황의 현실적인 문제를 파악한 것이다.
니버의 인간의 죄에 대한 분석은 매우 탁월하고 심오하다. 특히 교만의 죄에 대한 니버의 분석이 유일한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점은 교만의 죄를 삶의 여러측면에 적용시켰다는 것이다.
또한 니버는 죄의 깊이와 보편성을 강조하여 인간의 죄많은 이기주의는 개인적인 발전, 사회적 문화적 진보, 종교적 주장과 같은 모든 단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또한 발전의 도가 높으면 높을 수록 죄가 더 교묘하고 더 파괴적이게 된다는 것을 니버는 인식한 것이다. 그리하여 니버는 보다 더 도덕적인 사람들,정치력과 경제력을 주장하는 사람들, 즉 강자들의 죄악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하며 분석해 내는 것이다. 과거에 기독교의 지나친 신성시와 절대화의 오류도 종교적 교만의 한 형태임을 지적하면서 니버는 오늘의 기독교도 교만의 가장 죄악적인 종교적 자만을 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죄의 분석에 있어 중요한 점은 죄의 심리학적이고 개인적인 차원만을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키에르케고르의 죄의 개념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으나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죄의 사회적인 차원, 즉 인간관계 속에서의 집단적인 죄를 분석해내는 독창성을 발휘하였다. 이제까지의 전통적 신학이 주로 인간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개인으로 보고, 인간의 죄에 대하여도 개인적인 죄에 대하여 치중한 것에 비해 니버는 인간의 현실 상황 즉 사회적인 면을 중요시하였다. 따라서 그는 사회적인 측면의 죄에 대하여도 간과하지 않고 집단의 교만, 이기주의를 날카롭게 분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니버에게 있어서의 문제점은 죄의 근원과 죄가 사람의 어디에 자리잡는지에 대한 이해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그는 죄의 근원으로 원죄를 말했으나 그의 타락과 원죄 등의 교리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받아들이기보다 인간의 죄에 대한 불가피성을 상징하는 신화로서 받아들인다. 이것은 성서적 신앙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부분이며 극복되어야 할 신학적 과제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가 설명하는 죄의 본질과 기원은 다분히 실존주의적이고 심리학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니버의 비판가들은 니버가 창조적 신앙이 결여되었으며 실존주의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신학적 사조가 대부분 실존주의적인 언어로 설명되어졌다는 것을 감안할 때 니버는 오히려 이러한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적인 측면에까지 그의 분석의 틀을 적용시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니버가 비록 인간 타락의 사건을 신화라고 가정하고 하나의 상징으로 해석하였지만 그럼에도 니버가 성서에 충실히 입각하여, 그의 인간론을 전개해 나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미 살펴본대로 니버는 성서적 계시의 통찰의 빛아래서 현실의 상황을 중요시하면서 그의 모든 분석을 수행해 나갔던 것이다. 니버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 피조물로서 죄인이라는 견해는 전통적 기독교의 흐름을 따른 것이다.
또한 니버의 신학이 종교개혁 사상의 갱신이라고 볼 수 있게 하는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 는 니버의 견해는 매우 가치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회개와 신앙에의 구원이 가능하다고 하는 그의 성서적인 구원관은 니버가 성서적인 입장보다도 실존주의적인 입장에서 인간을 이해하려 했다고 비판하는 보수주의자들에게성서적 신앙의 결여임을 지적하는 많은 보수적인 비평가들에게 조차 그가 성서적이고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음을 인정하게 하기 때문이다.
본 연구자는 니버의 인간이해가 인간의 이성을 과신하고 인간의 죄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리하여 점차 인간의 가능성만을 주장하여 현실 상황의 수많은 문제에 대하여 인간과 과학의 발전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믿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광야의 예언자적 외침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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