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 존재들이 결국 ‘나’라는 존재의 확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시나요? 자식도 결국 ‘나’이고, 부모도 결국 ‘나’이며, 재산도 결국 ‘나’이고, 명예와 인기도 결국 ‘나’입니다. 타락한 죄인인 인간이 ‘나’라는 존재의 유익과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가 내 자식을 진짜 객관적인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내 자식이 예수를 잘 믿고 일찍 하나님 품으로 올라가는 것이 가장 기뻐야 합니다. 그게 자식이 제일 잘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진짜 자식을 객관적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식의 인생 속에 쌓이는 그 어떤 스펙(specification)보다도 그 자식의 올바른 신앙에 집중하여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한시적으로 맡겨진 그 자식이 올바른 신앙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올곧게 신앙하다가 이 세상 소풍을 얼른 끝내고 진짜 그의 집인 하나님 나라로 올라가 영생을 살게 되기를 염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세상에서, 자식이 일찍 죽으면 부모가 그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는 말은 들어 보았을망정 자식이 요절한 것을 기뻐했다는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자식의 신앙보다는 부모 자신을 자랑스럽게 만들어주는 자식의 세상 적 스펙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나를 사랑하는 것이지 그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감정, 내 만족, 내 기쁨이 중요한 것이지 그 대상의 행복과 만족과 기쁨은 관심 밖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이나 부모가 천국에 가든 말든, 내가 외롭고 내가 슬프니까 먼저 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자기사랑이라고 하는 것이며, 자기성취라고도 하는 것이고, 자아실현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은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살고 싶어 합니다. 그게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저마다 ‘나’라는 존재를 강하게 강화시켜 나가는 데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인생 전체를 거기에다 올인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주위의 모든 관계나 소유 등을 자아라는 울타리 안으로 흡수해 버립니다. 그렇게 인간은 ‘나’라는 존재의 강함을 위해 관계와 소유라는 스펙을 쌓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쌓아가고 있는 ‘나’라는 존재의 울타리 속의 것들에 손해를 끼치거나 상함을 초래하는 것들은 즉시 경쟁자요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빼앗아간 분이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하나님의 뒤를 쫓아가 그 분의 등에 칼을 꽂습니다. 우리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공부하면서 그러한 가짜 신앙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파헤쳐 본적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그렇게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요12:25)
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여기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자기 생명이 ‘나’라는 존재의 울타리 안에 쌓고 있는 모든 스펙을 포함한 ‘육’이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그걸 형상화 시켜 놓은 것이 국가라는 것입니다. 그걸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죽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바로 죄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의 삶에 뚫고 들어오셔서 그들이 ‘나(육)’라는 존재의 확장으로 쌓아놓은 것들을 하나하나 폭격해서 떼어내시는 것입니다.
(마10:34~39)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 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 이야기는 한 가정 안에서 예수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 사이의 불편한 관계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날 때부터 예수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 예수 믿는 집으로 시집을 간 사람은 이 말씀과는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되겠네요? 성경은 모든 성도에게 유효한 말씀이지 어떤 특정한 부류만을 위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모든 성도들이 힘으로, ‘나’라는 존재의 확장으로 갖고 있는 인간관계의 단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 평화의 왕으로 오셨고 화평케 하는 이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화평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평을 말하는 것이지 인간 사이의 화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간의 화평이 이루어지면 하나님 백성들 간의 수평적 화평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인간 세상의 보편적 화평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전제되지 않은 인간들끼리의 화평이 바벨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바벨탑을 부수십니다. 그게 검을 주러 왔다는 말씀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이 여실히 드러나 있는 곳이 욥기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서 자식과 아내와 친구와 재물과 건강과 일을 다 빼앗아 버리십니다. 그 때 욥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거두어 가신 분도 하나님이시므로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 것이라’고 멋진 고백을 하지요? 그런데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지고 친구들을 포함한 세간의 평가도 자신의 기대와 엇갈리게 되자 어떻게 합니까?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합니다. 그 말은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을 원망했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근사하게 자신을 포장하고 있던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본전을 완전히 발각당한 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교활하냐면, 자신이 무언가를 손해 보았을 때에조차차차차섨해를 가지고도 자신의 영광과 만족을 챙기는 것이 자신 만족을 챙게 욥기 서깐 서욥의 모습 만족을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많은 돈을 기부한다거나 연약한 이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쏟아 부어 희생을 하면서도 인간들은 주위의 평가나 인정을 기대하고윬 챙게 아니라 해도 자기 스스로에게 칭찬을 퍼부어 자기만족은 하나상을 스스로 챙겨 갖습니다. 인간은 자아실현은 하나명분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는 그런 자기 챙기기의 달인들 만족을 순교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슬람이나 불교의 순교자들을 보세요을 챙게 인간의 자기 챙기기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순교는 하나님에 의해 옛 사람을 살해당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성도를 순교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인간들 측에서 나오는 자발적 죽음은 ‘나는 하나님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자다’라는 인간의 자기챙기기일 뿐입니다. 그건 순교라 하지 않고 만용이라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을 그렇게 죽으면서까지 자기 챙기기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욥처럼 그도 저도 허락되지 않는 완전한 상실의 상태로 몰리게 되면 그제 서야 자신의 본 모습을 직시하게 됩니다. 어떤 모습이요? 자신의 가치 챙기기를 방해하는 것은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원망의 대상으로 끌어당기는 마귀 적 본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인간은 근사한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행위로 포장해 놓았던 자아를 낱낱이 해부 당하게 되고 자신의 가치 상실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하나님 앞에서도 악다구니를 쓰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선택 밖의 존재들은 하나님을 영원히 등지고 하나님이 안 계신 곳으로 스스로 발길을 돌이키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선택 안에 들어 있는 존재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절실하게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 안에는 ‘나’라는 우상을 향한 사랑밖에는 다른 사랑이 없으니까요. 그걸 구원이라 합니다. 그래서 욥이 결국에는 자신의 본전을 완전히 폭로당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귀로만 듣던 지식의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욥기 전체를 산상수훈을 통해 단 한 문장으로 요약을 해 주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청결이란 어떤 존재가 있어야 할 제 자리에 놓이는 것을 말합니다. 화장실 바닥에 아무리 깨끗한 밥이 놓여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쓰레기이지 밥이 아닌 것처럼. 그렇다면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놓여야 할 제자리에 놓여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성경은 우리의 마음이 놓여야 할 곳을 정확하게 지적해 줍니다.
(수24:23)
23 여호수아가 가로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우리 인간의 마음이 ‘나’라는 존재의 확장과 강화를 꿈꾸며 쌓고 있는,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그것을 여호수아가 이방신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 단어는 우리 주님께서 ‘맘모나스’라는 단어로 바꾸어 쓰시기도 하신 그 단어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 이방신에게 가있는 상태를 부정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부정한 마음이 엉뚱하게 닿아있던 그 자리와의 관계를 모두 청산하고 하나님께로만 돌아서게 되는 상태를 청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회개라고도 합니다. 그 상태가 되어야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을 보청산하든만이 영생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하여 난분분하게 이리저리 나누어져 있던 우리의 마음을 다잡아 끌어당겨 하나님께로만 집중하는 과정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닿아있던 그 자리, 그 물건, 그 니다은 이미 우리의 마음과 연합이 되어 살과 피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것들로부터 우리의 마음이 적출되기 위해서는 살이 찢어지고 피가 쏟아지는 아픔을 동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성경이 고난이라고 합니다. 부모 자식과의 관계가 하나님 뒤편으로 물러납니다. 재산과 명성이 하나님 뒷자리로 멀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다 내 살이고 내 피였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나로부터 떨어져 나가 하나님 뒤편으로, 즉 객관적 사랑의 대상으로 재편이 될 때 우리는 아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의 삶에 가입이 되다. 되어 우리는 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들의 원망을 감수하시고 그것들을 끊어내시려 우리 삶 속에 내려와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성도의 삶의 고난이 필연적이라 강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이란 이 역사와 인생 속에서 우리의 일상을 폭격당하면서, 우리의 가치에 손해를 끼치는 것에 대해서는 일말의 양보나 이해가 없는 완벽한 죄인인 자신을 폭로 당하고, 그 자리에서 두 손 번쩍 들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항복의 자리로 가는 모든 여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신앙생활이란 자기사랑이라는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 사랑이라는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앉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내가 ‘나’라는 존재의 안전과 발전과 행복과 만족을 위해 내 주위로 켜켜이 쳐 놓았던 ‘나’라는 존재의 울타리, 내가 왕이 되어 다스리고 있던 갈대아 우르, 바벨론이라는 국가에서 빠져나와 약속의 땅으로 옮겨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한다, 전도를 한다’라는 행위의 정의가 조금 달라지겠지요? 우리가 지금까지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았습니다. 그 구원의 도를 전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어느 부분까지 전해야 하는 것입니까? ‘당신은 죄인이어서 구원이 필요한데 당신이 정말 구원을 받도록 선택이 되어진 사람이 맞다면 당신은 이제 이 세상이 합의해 놓은 모든 가치와 힘이라는 것에서부터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빼앗김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나라에서 나와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로 옮겨가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까지 전해야 합니다.
그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선민이라고 자처하던 유대인들에게 외치신 복음은 너무도 간단했습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는 것은 지금 가는 길이 잘못된 길이니 반대방향으로 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가던 방향은 세상 사람들의 세계관이나 가치관으로 볼 때 전혀 하자가 없는 길이었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종교 행위를 했고, 열심을 다해 구제를 했으며, 경건하고 깨끗하게 살기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에게 회개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그러한 방법으로는 절대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너희들의 모든 노력과 시도를 일단 중단하고 먼저 너희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과 교묘하게 감추어둔 추악함을 인정하고 너희 밖의 어떤 존재에게 도움을 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그게 전도입니다.
그러니까 올바른 전도를 받은 그 대상의 첫 번째 반응은 죄에 대한 처절한 자각이어야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내가 나라는 존재의 가치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예수를 죽인자이며 오늘도 나는 여전히 나라는 존재의 가치 챙기기를 위해 예수를 죽이고 있는 자입니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죄인 됨의 자각이 없이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해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무엇을 용서해 주셨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무슨 감사를 합니까? 그냥 천국에 보내주셔서 감사한 것입니까? 제가 단언하건대 구원이라는 것을 ‘나의 천국 확보’로 알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지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 ‘나를 천국 보내주신 하나님이 감사해서’라는 전제의 주인공은 역시 ‘나’입니다. 올바른 신앙에서 격발이 된 감사는 ‘나의 천국, 나의 구원’이 확보된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죽은 흙에 불과한 이런 존재를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자각할 수 있는 산 존재로 만들어 주셨는가에 대한 면목 없는 감사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면목 없음에는 ‘하나님, 저라는 존재는 오늘이라도 당장 지옥에 들어가서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존재입니다.’라는 통회의 고백이 함의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걸 이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누가 감히 복된 소식, 복음으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힘의 원리 속에서는 저주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겠다고 찾아온 사람이 ‘당신은 죄인이며 당신의 힘으로는 절대로 그 죄인 됨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거기에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면 당신이 지금 마음을 주고 있는 모든 대상들에게서 당신의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겪게 됩니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하게 됩니다.’라고 말을 했다고 해 보세요. 그걸 누가 받아들이겠습니까?
맞아 죽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들에게로 보내는 것과 같은 마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잘 자란 양을 배고픈 이리 앞으로 보내는 것은 ‘어서 먹어라’하고 음식으로 내어주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보내십니다. 가서 세상에게 먹히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리라면 사자나 호랑이 정도로 무장을 시켜 보내시면 되잖아요? 그러면 힘으로라도 복음을 전해볼 것 아닙니까? 그렇게라도 하면 힘이 무서워서라도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왜 양으로 보내십니까? 그건 전도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어떻게 해서든 설득을 하여 교회로 모아오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상식과 판단으로는 절대로 믿을 수 없는 그런 행위와 말로 세상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고, 그 중에서 하나님이 택한 자들만 쏙 빼 내오는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전도는 세상과 하나님 백성 가르기인 것입니다. 즉 그 전도의 행위에 의해 어떤 무리는 심판으로 떨어지게 되고 어떤 무리는 구원으로 올라오게 되는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따라서 근사한 찬양 팀과 근사한 드라마 팀, 상냥한 새 신자 환영 팀을 만들고 멋진 멀티미디어 등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설득하여 붙잡아 두려는 행위는 전도가 아니라 세력 확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오히려 가라지 들을 쫓아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엉뚱한 것을 기대하고 예수를 믿겠다고 예배당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에게 올바른 전도(설교)가 행해지면, 세상이 예수를 때려 죽였을 때처럼 그 전도자를 죽이고 싶어야 정상입니다.
(딤후4:2)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도를 명하면서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하는 것이 전도라고 전도의 정의를 내려줍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전도와 설교는 동일하게 ‘케륏소’를 번역한 것입니다. 거기에 쓰인 헬라어 ‘엘렝코, 에피티마오, 파라칼레오’는 ‘비난하다, 잘못을 꾸짖다, 야단치다, 훈계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전도나 설교는 살살 달래서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대상의 껍질을 완전히 벗겨서, 화를 내고 튕겨져 나가게 하든지, 어른에게 야단을 맞은 아이처럼 자신의 죄인 된 모습을 인정하고 통회자복하게 하든지 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전도자의 자격은 화려한 학벌이나 지식, 수려한 외모, 현란한 언변, 등을 소유한 자가 아니라 ‘저는 지금도 여전히 죽은 흙에 불과한 자인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렇게 생명에 이르는 도를 이해시켜 주셨습니다’라는 자기부인의 경험이 있는 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는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서 자신을 자랑하며 사람들을 모으는 행위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라지 들을 갈라내기 위해 연약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도저히 인간적인 가치기준으로는 복 받은 자의 모습이 아닌 모습으로 보내지게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세상 앞에서 계속 생명나무 실과를 그룹들과 화염검으로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사야처럼 세상의 눈과 귀를 막는 것이 전도자들의 전도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그나마 가지고 있는 세상 적 힘들을 다 빼앗아 버리시는 것입니다.
마10:9-10)
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 이니라
먹을 것은 하나님이 챙겨 줄 테니 그것 외에 너를 증명하고 자랑할 만한 모든 것은 다 두고 가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전도를 하는 그들의 삶이 어떻게 전개가 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 주시는데 도대체가 이해가 안 되는 내용입니다. 본문 17절 이하를 다시 보세요.
(마10:17~23)
17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18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이게 전도자의 삶이며, 설교자의 삶입니다. 총독들과 임금들, 즉 세상의 권세 자들에게도 미움을 받고 가족들에게까지 버림을 받아 하나님과만 묶이게 되는 것이 전도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하나님이 마치 자신을 사형수처럼, 개선 장군 행진의 미말, 즉 전쟁포로처럼 여기셨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전도라는 것, 그자체가 목적이라면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막아주셔야 일이 효율적으로 진행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핍박을 말씀하시는 주님이 그걸 막아주시겠다고 하시지 않고 그냥 다른 동네로 피하라고 하십니다. 거기에 가면 핍박이 없나요? 핍박은 계속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핍박과 고난이 분명 그들에게 닥칠 것을 아셨으면서도 가지고 있던 것까지 다 빼앗아 버리시는 주님의 심보가 도대체 뭐냔 말입니다.
심지어 이리들 앞에 먹잇감으로 던져진 양으로 선, 제자들에게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은 양은 끝까지 양의 신분을 지켜야 하는 것이며 그 어떠한 공격에도 이 세상의 다른 먹잇감에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뱀이라는 동물이 그의 지혜로 이 세상에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적이 있지요? 언제입니까? 에덴동산에서입니다. 피조물의 자리에서 조용히 순종의 삶을 살고 있던 하와에게 선악과나무 열매를 들이대며 ‘왜 네가 하나님의 말만 듣고 살아야 해? 너도 충분히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여기 지혜의 열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가 있으니 먹어봐’하고 꾀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리로의 도약을 시도했습니다. 그게 죄입니다. 따라서 이리들 틈으로, 양으로 보내지는 제자들에게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말씀을 하신 것은 절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양의 자리에서 이탈하지 말고 끝까지 양으로 죽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에덴동산 이후로 뱀은 모든 이들의 기피대상이 됩니다. 뱀을 보는 사람들은 징그럽고 무서워서 돌을 던집니다. 그러나 뱀은 계속 돌을 맞는 뱀 이어야 합니다. 뱀이 거기에서 예쁜 강아지로 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리를 끝까지 고수하고 지키는 것을 뱀의 지혜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의 놋뱀이 되셔서 끝까지 뱀으로 돌을 맞고 죽으신 것과 같은 형국입니다.
비둘기의 순결도 마찬가지입니다. 홍수가 끝나갈 무렵 물이 얼마나 줄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방주 안에서 노아가 첫 번째로 내어 보낸 것이 까마귀입니다. 그런데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고 물이 마를 때까지 물 위를 날아 다녔다고 합니다. 그래서 노아는 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비둘기는 아직 물이 많았기 때문에 다시 노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칠일 후에 두 번째로 비둘기를 날려 보냈더니 이번에는 금방 딴 올리브 잎을 물고 왔습니다. 세 번째로 날려 보냈을 때에는 돌아오지 않았지요? 그 때 노아가 방주 문을 열고 내립니다. 그러한 비둘기의 행보는 노아의 뜻을 정확하게 간파한 행보였습니다. 한마디로 순종의 행보를 보여준 것입니다.
반면에 까마귀는 어떠했습니까? 분명 비둘기는 발붙일 곳이 없어서 금방 돌아왔다고 했는데, 먹이도 없고 발붙일 곳도 없는 창공에서 까마귀가 어떻게 살아남았겠습니까? 까마귀는 죽은 고기를 먹습니다. 하나님께서 보기 싫다고 저주의 홍수로 멸절시켜 버린 그 현장에서 그 죽은 고기를 먹는 것이 까마귀입니다. 반면에 비둘기는 아무리 죽은 시체들이 물 위를 떠다닌다고 해도 그 죽은 고기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는 순종의 모습을 보쟬 쥼 것입니다. 그게 비둘기의 순결입니다.
성도가 전도자로 이 세상에 파송이 될 때 성도에게도 수많은 죽은 먹잇감들이 유혹의 손길을 뻗치게 됩니다. 그 때 그것을 덥석 집어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으로 파송이 되는 전도자는 뱀의 지혜에 속지 않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 자기의 신분을 인위적으로 격상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양의 신분으로 이리에게 잡아 먹혀야 하는 것이고, 비둘기의 순결함으로 세상의 죽은 고기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되는 자로 보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되지요? 그래서 주님이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서 이리 앞에서 사자로 변신하려고 하는 우리의 시도를 묵사발 내시는 것이고, 세상의 죽은 고기를 덥석 물려고 하는 우리의 도모를 막아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지지리도 복도 없는 자의 삶처럼 보이게 됩니다. 하는 것마다 막히기도 하고, 세상에게 두들겨 맞고 있는데 말려주시지도 않는 것입니다. 양은 그렇게 이리에게 먹혀 죽음으로 세상의 심판에 참여하는 자라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결은 어려움과 고난의 현장에서도 제자리를 떠나지 않는 순종의 몸짓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방인과 권세 자들에게 넘겨질 때 말할 것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연약한 인간은 궁지에 몰리게 되면 자신이 할 말을 다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는 반드시 성령에 의해 해야 할 말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의 전도는 세상을 설득하여 예배당으로 모으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과 성도를 구분하고 가르는 행위인 것입니다. 절대 인간의 노력과 열심을 보태서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연한 순 같고, 싫어 버린바 된 자처럼 연약한 모습으로, 세상은 절대 알아들을 수 없는 저주의 독설 같은 복음을 전파하며 숨어 있는 악당들의 악을 끌어내는 미끼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전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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