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역사/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성 문들 (The Gates of Old Jerusalem )

은바리라이프 2019. 4. 9. 19:37

예루살렘의 성 문들 (The Gates of Old Jerusalem )

현재 예루살렘의 Old City를 둘러싸고 있는 예루살렘 성은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성과 다른 예루살렘 성입니다. 현재의 예루살렘(Old City) 성은 AD 1537년~1542년 오스만 터키의 슐레이만 1세 황제에 의하여 재건된 성벽으로써 둘레가 약 3.4 Km이고 높이는 약 12 m 이며 모두 34개의 탑을 가지고 있는 커다란 건축물입니다.

성벽에는 총 8개의 문이 있는데, 동쪽의 사자 문(Lion’s Gate, 스데반 문, 양의 문)과 황금 문(Golden Gate, 미문, 美門), 서쪽의 자파(욥바) 문(Jaffa Gate), 북쪽의 다마스쿠스 문(Damascus Gate), 헤롯 문( Herod’s Gate), 새문(New Gate), 그리고 남쪽의 분문(糞門, Dung Gate)과 시온 문(Zion Gate) 등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문들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BC 6 세기 초, 당시에 동방의 세계를 지배했던 바벨론 제국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1년 반 동안에 걸친 포위 공격 끝에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정복자 느부갓네살 왕은 불을 질러 예루살렘 성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BC 586년에 400년 동안 계속되어 왔던 유다 왕국은 멸망당하였습니다.

그 후 예루살렘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던 제국들과 군왕들의 각축장이 되었고 그곳을 지나는 수많은 군대의 말발굽에 짓밟히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파사, 헬라, 로마 비잔틴, 이슬람교도, 십자군, 마멜루크, 오스만튀르크, 영국 등 당시 세계를 주름잡던 세력들은 예루살렘에 군림하는 지배자가 되었고 그들이 남겼던 흔적들은 지금도 예루살렘 도처에 남아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역사적으로 복잡한 과거를 지나온 것처럼 지리적으로도 그리 단순한 곳이 아닙니다.  우선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 크게 동쪽과 서쪽지역으로 나누어집니다. 즉, 동 예루살렘과 서 예루살렘으로 나누어집니다.

면적으로는 동 예루살렘이 약 70 ㎢이며, 서 예루살렘은 이보다 작은 45 ㎢ 정도입니다.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과 함께 일어났던 1차 중동전쟁이 끝난 후, 동 예루살렘은 아랍 사람들이 관할하게 되었고, 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관할하는 구역이 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동 예루살렘은 소위 “요단강 서안지역(West Bank)”의 일부가 되었고, 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국토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은 동서로 확연히 분할되고 서로 왕래조차 금지된 상태가 1967년까지 계속되어 왔습니다.

동과 서로 구분되어진 예루살렘에는 제 3 의 구역이 되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예루살렘 성, 즉 “구 예루살렘(Old Jerusalem)”입니다. 구 예루살렘이야말로 예루살렘 전체에서 그 핵심이 되는 부분으로서 오랜 역사의 묵은 때가 겹겹이 쌓여 있는 곳입니다.  구 예루살렘은 높이가 14 m에 달하는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 이름에 걸맞게 고도(古都) 예루살렘의 풍모를 엿보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벽은 3,000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예루살렘으로서는 축성된 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구시가(Old City)를 둘러싸고 있는 웅장한 성벽과 성문은 예루살렘을 정복한 오스만 터어키 제국의 슐레이만 대제가 예루살렘을 견고한 요새로 만들기 위해 지금으로부터 약 460년 전이 되는 1537년~1542년에 걸쳐 완성하였고, 성벽의 총 길이는 3.4 ㎞ 정도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성벽 근처에 예루살렘 성벽을 쌓는데 책임을 맡고 있었던 두 건축가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들은 AD 1541년 예루살렘 성벽을 쌓을 때 시온 산성과 다윗 성을 예루살렘 성안에 포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참수형(decapitation)을 당하였습니다. 오토만 터키의 황제 Suleiman은 다윗의 도시를 성안에 포함시키기를 원하였는데 그 건축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참수형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유로써 속설에 의하면, 이 두 건축설계가가 설계한 예루살렘 성의 비밀이 밝혀지기를 원하지 않았던 Sultan Suleiman은 그들의 목을 베었던 것이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Orange Line으로 된 성벽은 오스만 터키의 술레이만에 의해서 쌓여진 성벽.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 예루살렘의 면적은 1㎢밖에 되지 않아 오늘날 예루살렘 전체 면적의 1%도 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이 바로 구약시대 다윗 왕이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정했던 역사적인 예루살렘으로 그 후 파란만장한 역사가 펼쳐졌던 역사의 무대인 것입니다.

지금 볼 수 있는 성벽은 북쪽 성벽이 먼저 완성되었고 뒤이어 동쪽과 서쪽, 남쪽 벽이 쌓아졌습니다. 성벽 둘레의 길이는 4,018 m이며, 성벽을 따라 8개의 성문과 성위에 설치되어 있는 34개의 탑과 24개의 망루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 성벽에는 성 안에서 화살이나 총을 쉽게 쏠 수 있도록 좁고 아래위로 긴 구멍을 뚫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성벽에는 성을 향하여 쳐들어오는 적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뜨거운 기름을 붓는다거나 무거운 돌을 굴려서 방어하였던 곳(machicolation)도 설치하여 놓았습니다.

성문 중에 욥바 문, 다메섹 문, 시온 문은 오스만 터키가 새로 건축하였던 이전의 원래 모습을 지금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성문들은 적들이 침입하였을 때 방어하기 좋도록 하기 위해서 “ㄷ” 자의 모양으로 설계하여 만들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구 예루살렘의 성벽에는 8개의 문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스만 터키의 술레이만이 건설하였던 성벽에는 다마스커스 문, 헤롯 문, 스테반 문, 분문, 시온 문, 그리고 자파 문,  이렇게 6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이러한 문들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좋은 “L”자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후 교통의 편리를 위해서 스테반 문과 분문은 곧바로 지나갈 수 있도록 변형되었지만
아직도 4개의 문은 L자형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황금 문(Golden Gate, 미문, 자비의 문과 회개의 문)

성벽의 동쪽으로는 키드론 골짜기와 올리브 산을 마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 예루살렘 성벽의 동쪽에는 황금의 문과 라이온 문이 있는데, 황금의 문으로 유대인의 메시아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 올 것이라는 전설에 따라 무슬림들은 유대인의 메시아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봉쇄하여 버렸고, 그 문앞에는 무슬림들의 무덤들로 길을 막아 놓았습니다.

golden gate jerusalem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그런가하면 또 최후의 심판이 있은 후, 이 동쪽에 있는 황금의 문에서부터 부활할 것이라는 전설 때문에 무슬림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황금의 문 앞인 키드론 골짜기와 올리브 산에 무덤을 만들어 놓고 묻히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곳에는 수많은 돌로 만든 석관을 볼 수 있습니다.

감람산(올리브 산) 과 키드론 골짜기를 마주보고 있는 황금 문은 황금의 돔 앞에 예루살렘 동쪽 성벽 중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황금 문” 이라는 명칭은 예루살렘 성문 중 가장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서 붙여진 것으로 “미문(美門)”으로도 불리도 합니다. 동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동문(Eastern Gate)”으로도 불리는 황금 문은 성전 산의 성전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이 동쪽의 문이 왜 “황금 문”이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전승에 의하면, 사도행전 3장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원래에는 “Beautiful Gate(미문)”이라고 불리는 문이었는데 AD 4 세기경에 Vulgate 성경을 번역한 Jerome이 Beautiful이라는 의미인 라틴어 “Oraia”를 발음이 비슷한 “Aurea(Golden)”라고 기록함으로써 Beautiful이 아닌 Golden으로 되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이 황금 문은 성문들 중에 가장 오래 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가장 밑부분을 받치고 있는 커다란 반석은 BC 6 세기에 세워진 제 2 성전 때의 것으로 느헤미야 시대의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 황금 문(Golden Gate)은오스만 터키의 술탄 술레이만 1세가 예루살렘 성벽을 개축할 때, 새롭게 건축되지 않은 유일한 문으로 1541년 오스만 터키의 술탄 술레이만 1세가 이스라엘을 구원한 메시아가 이 문을 통해서 들어 올 것이라는 전설에 대하여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성문을 완전히 봉쇄해 버렸는데,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황금 문을 통하여서 아무도 들어 올 수도 나갈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 황금 문 앞에는 아랍사람들 특히 무슬림들의 무덤이 많이 있는데 이들이 이곳에 무덤을 만들었던 또 다른 유대인들의 관습과 관련된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교도들은 무덤을 만지거나 그것을 스쳐지나만 가더라도 부정하게 됩니다. 또 부정하게 된 사람은 성전으로 들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들어 올 것이라고 예언되었던 황금 문앞에 무덤을 만들어 놓으면 부정하게 되기 때문에 황금 문으로 메시아가 들어 올 수 없다고 생각하여 황금 문 앞에 수많은 아랍 사람들의 무덤이 있다고 하는데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 같지는 않습니다.

또한 이슬람교에서는 마지막 심판의 날이 이곳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날에는 이 황금 문 가까이에 있는 무덤으로부터 죽었던 영혼이 부활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황금 문 가까이 묻히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금 문은 아랍 사람들에 의하여 “영원한 생명의 문(Gate of Eternal Life)”으로도 불리기도하며, 현재 황금 문 근처는 물론, 건너편 감람산 기슭까지 수많은 유대인과 무슬림들의 묘지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969년 Dr. Fleming에 의해서 발견된 황금 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유대교의 전승에 따르면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동쪽 문(황금 문)으로 들어가신 뒤, 문이 닫혀 다시는 열리지 않으며, 메시아가 올 때에야 비로소 문이 열릴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에스겔 44:1~3) “그 사람이 나를 데리고 성소 바깥 동쪽 문으로 데려갔는데, 그 문은 닫혀 있었다.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이 문은 닫아 놓아야 하며 열어서는 안 된다. 아무도 이 문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이 문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이 문은 닫아 두어야 한다. 오직 왕만 문 안에 앉아 여호와 앞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왕은 현관문으로 들어오고 반드시 그리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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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도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실 때에도 올리브 산 넘어 벧바게(Beth Page)로부터 나귀를 타고 이 문(자비의 문)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또 유대의 전승에 의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Divine Presence)가 이 문을 통하여 자주 임하였다고 하며, 또한 이 문은 에스겔서에 기록된 것처럼 메시아가 들어 와서 새로운 문으로 대처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종려주일을 지키면서 메시아의 입성을 기념하고 있으며, 유대인들도 마지막 날에 이곳에 메시아가 와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스가랴 14:3~5)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아가셔서 그 나라들과 싸우실 것이다. 전쟁 때에 싸우듯 싸우실 것이다. 그 날에 주께서 예루살렘 동쪽 올리브 산 위에 서실 것이다. 그러면 올리브 산은 둘로 갈라져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깊은 골짜기가 생길 것이다. 그리하여 산의 절반은 북쪽으로, 절반은 남쪽으로 옮겨질 것이다. 너희는 아셀까지 뻗어 있는 이 산 골짜기를 통해 도망할 것이다. 마치 유다 왕 웃시야 시대에 지진을 피해 도망한 것처럼 도망할 것이다.  그 때에 내 주 하나님께서 모든 거룩한 사람을 거느리고 오실 것이다.”

 

이 황금 문은 2 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유대인들도 심판의 날이 되면, 착한 사람은 남쪽문 (자비의 문, gate of Mercy)을 통해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악한 사람은 북쪽의 문(후회의 문, Gate of Repentance)을 통해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전승에 의하면, 메시아가 오는 그날에 2 개의 다리가 이 회개의 문에서부터 올리브 산으로 연결될 터인데, 하나는 철로 만들어지 다리가 연결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종이로 된 다리가 연결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철로 된 다리라고 할지라도 죄를 지은 사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아랍사람들은 이 문을 “영생의 문”라고 부릅니다.

지금의 황금 문은 로마 황제 유스티아누스 1세(Justinian I, AD 483-565 재위) 통치 기간 중인 AD 520년경에 세워졌으나, 전쟁으로 인하여 파괴 되었다가 후에 우마이야 왕조가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7세기에 다시 세운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1969년 Dr. Fleming에 의해서 발견된 황금 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예루살렘 성 안에서 보이는 황금 문, 2개의 문은 막혀 있습니다.

사자 문(Lion gate, 스데반 문, 양 문, 여호사밧 문)

이 성문은 감람산(올리브 산)을 마주보며 동쪽 성벽에 있습니다. “양의 문” 또는 초대교회의 스테반 집사가 순교한 곳이라고 하여 “스테반 문(사도행전 7:54~60)”이라고도 불리는 곳입니다.

lion gate jerusalem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전승에 의하면,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던 오스만 터키의 술탄 술레이만 1세가 예루살렘 성벽을 개축하고 있을 어느 날, 슐레이만 대제의 꿈에 4 마리의 사자가 나타나서 대제를 삼켜버리려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 꿈을 해몽한 사람에 의하면, 사자들이라면 유대인들을 상징하는 것인데 이 예루살렘 성을 다시 유대인들에 의해서 정복당하게 될 것이라고 풀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슐레이만 대제는 그 사자들이 나타났던 곳에 성문을 세우고 4마리의 사자를 새겨 넣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슐레이만 대제는 곧 꿈에 나타났던 4 마리의 사자들을 성문 양쪽에 한 쌍씩 조각하여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오스만 투르크의 통치자였던 슐레이만(Suleiman) 1세의 지시에 따라 이 성문의 양쪽에 한 쌍의 사자가 조각하였는데, 이렇게 하여 이 문을 “사자 문(Lion Gate)”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lion gate jerusalem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또 다른 전승의 이야기에 의하면, 사자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상징이므로 유대인의 상징으로 사자를 부조하여 놓았다는 것과 Ottoman(Osman Turkey)의 무슬림이 십자군들과 몽고의 침입을 막아낸 유명한 “이집트와 시리아의 사자(Lion)”로 알려진 Mamluke의 술탄 Baibars(1223~1277년)를 기념하기 위해서 그의 상징이었던 사자를 문에 새겨 넣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초대 교회의 스데반 집사가 이 근처에서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하여 “스데반 문”이라고 부릅니다. 이 문을 나와서 남쪽 키드론 골짜기에 이르게 되면 그곳에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스데반 교회가 있습니다. 또 다른 이름으로 여호사밧 계곡으로 향한다하여 “여호사밧 문”이라고도 하고, 마리아의 무덤이 이 근처 어디 있다고 하여 “마리아 성문”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는데 일반적이지는 않습니다.

또한 매주 금요일에는 이 문 근처에서 양(羊)을 팔고 사는 시장이 열리고, 특별히 제물로 사용될 양들이 출입하는 문이라고 하여 오래 전부터 “양 문(Sheep Gate, 느헤메야 3:1)”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이 문을 통해 감람산(올리브 산), 베다니, 여리고 그리고 요단강으로 갈 수 있습니다. 1920년 영국군이 차량이 통행할 수 있도록하기 위해서 입구를 확장했고, 1967년 6일 전쟁 때 이스라엘군은 이 문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 와 점령하게 된 기록이 있습니다.

사자 문을 통하여 구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서서 얼마 안가면 바로 우측에 성 안나 교회가 나타나는데 이 교회의 뒤쪽에는 유명한 베데스다 연못의 유적이 있습니다.

헤롯 문 (Herod’s Gate)

영어 명칭은 헤롯 문 (Herod’s Gate)입니다. 유대인들은 성문 정면에 장식된 꽃무늬 때문에, 꽃들로 장식된 문이라 해서 히브리어로 “사아르 헤파라힘(Sha’ar HaPerahim, 꽃들로 장식된 성문)” , 즉 “꽃 문”으로 불렀으며, 아랍인들은 “초소의 문 (Bab al Shirah)”이라고 부르고 있는 문입니다.

Herod's Gate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헤롯 문은 예루살렘 성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에 헤롯 왕(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의 궁전이 있었다고 전해진 곳에 십자군 시대에 교회를 세웠는데 이 헤롯 문 옆에 헤롯 안티파스의 집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헤롯 분은 오스만 터키의 술레이만 대제가 성벽을 개축할 때 당시인 1539년에 세워졌는데, 이 문은 원래 샛문으로 세워졌으며 사람들과 마구를 푼 짐승들만 성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였습니다. 19세기 말경에는 성문을 확장시켰는데 원래 입구를 경비하기 위해 있었던 초소의 흔적이 문의 동쪽에 남아 있습니다.

1099년 예루살렘에 입성한 십자군은 헤롯 문이 있는 근처의 성벽을 파괴해서 들어갔다고 전해집니다. 1875년부터 약 25년간 통행이 통제되다가 1879년에 예루살렘 시민들의 요구에 의해서 통행이 재개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아랍 재래시장으로 연결되는 길목에 있으므로 아랍인들이 가장 많이 출입하는 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문 안쪽으로는 좁다란 골목에 아랍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 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00년에 촬영된 헤롯 문

다메섹 문 (Damascus Gate, 세겜 문, 나블로스 문)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쿠스(다메섹: 시리아의 수도)를 향하고 있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된 다메섹 문을 유대인들은 그 문이 세겜 쪽으로 가는 길과 통한다고 하여 “세겜 문(Sha’ar Shechem)”이라고 부르고, 아랍 사람들은 세겜의 아랍 식 이름인 나블로스(Nablus, 세겜의 로마식 이름인 Neopolis의 아랍식 이름))로 가는 문이라고 하여 “나블로스 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또 다른 이름으로 “Bab-el- Amud(Gate of the Pillar)”라고 부릅니다.

Damascus Gate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이 다메섹 문은 동쪽 방양에 있는 헤롯 문(Herod’s Gate)과 서쪽 방향에 있는 새문(New Gate) 사이에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문들 중에서 가장 크고 인상적이며 아름다운 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 안으로 들어서게 되면 과일가게, 환전상, 옷 가게와 잡화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는 시장 골목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 다메섹 문에 들어서서 약 20 m 정도 가면 두 갈레 길이 나오는데, 왼쪽으로 가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메고 가신 길의 제 3 지점과 4 지점을 만나게 되고, 조금 더 내려가면 통곡의 벽(Western Wall)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나옵니다.

로마 시대에는 예루살렘의 중심 성문이었고, 이 문을 중심으로 두개의 길이 뻗어 나갔는데, 그 하나가 성전 서쪽 벽 앞으로 지나갔고 다른 하나는 시온 문으로 통하였습니다. 최근 이 성문에서 시온 문까지 이어졌던 웅장한 중심도로의 흔적이 발굴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성문 아래쪽으로는 2세기에 만들어진 하드리아누스 트리플 케이트(Hadrian Triple Gate)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다메섹 문의 모습 왼쪽 아래로 하드리안 트리플 게이트의 유적이 보입니다. 자파 문, 시온 문과 함께 원래 예루살렘 성문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는 성문에 속하며, 적의 갑작스러운 침범하였을 때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ㄴ”자형으로 만들었습니다.

성문으로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혹은 왼쪽으로 꺾어서 들어가야만 하도록 성문을 만든 것입니다. 이 문은 적의 갑작스런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중각을 이루고 있었고, 원래는 단단한 나물로 만들어서 쇠(철)를 씌워서 만든 삼중의 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한 쌍의 문만 남아있습니다. 돌출 총안(銃眼: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불•돌•끓는기름 등을 퍼붓는 구멍, Killer, )을 갖춘 2개 탑이 있습니다.

File:A. Salzmann - Porte de Damas, vur extérieure - Jerusalem.jpg

1856년에 촬영된 다메섹 문

다메섹문 밑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서쪽으로는 십자군 시대의 교회의 유적들을 볼 수 있고, 동쪽으로는 옛 로마의 Aelia Capitolina 성안으로 통하던 옛 문이 있고, 그곳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습니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아랍 바자(Arab bazaar)와 시장이 시작되고, 당시에 성문을 지키던 군인들이 사용하던 방 2 개는 현재 가게로 개조되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왼쪽으로 가면 이슬람교 사람들의 지역이 시작되고 오른쪽으로 그리스도교인들의 지역이 위치하고 있는 곳입니다.

Damascus Gate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둘레 4 ㎞, 평균 높이 17 m의 원래성벽은 구약성서에 의하면, 솔로몬 왕이 건설하였고 헤롯대왕(Herodes, BC 73?~BC 4)이 재건했다고 전해지는 성벽이며, 문 위에는 1536년에서 1538년 사이에 이 문을 복원한 슐레이만 대제(1520~1566 재위)를 기념하는 문구가 아랍어로 쓰여 있습니다.

구시가지는 이슬람교, 유대교, 그리스도교의 공동 성지이며, 근처에 유대인들의 성지인 통곡의 벽 외에 엘악사 사원, 황금 돔 사원, 올리브산, 시온산, 마리아 교회 등 여러 종교의 유적지가 많이 있는 곳입니다.

새 문 (The New gate, The Gate of Hamid)

새 문(The New Gate)은 예루살렘 옛 시가지 성벽의 여러 문 중 가장 최근에 생긴 것으로, 예루살렘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지만 성벽의 서쪽 코너쪽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문입니다. 기독교 지구(Christian Quarter)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새 문은, 1887년에 오스만제국의 술탄 압둘 하미드 2세(Abdul Hamid II)의 허락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술탄 압둘 하미드 2세 통치 기간 중에는 하미드 문(the Gate of Hammid)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새 문의 서쪽 면에 새겨져 있는 부조에는 다윗의 별인 육각형의 별 안에 45도 기울어진 솔로몬 문양(Seal)의 별이 있습니다.

the new gate jerusalem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독일 황제 윌리엄 2세(William II, 재위 1888-1918)가 1898년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을 당시 이 문을 통해 예루살렘의 기독교 지구를 방문한 기록이 있습니다.

새 문은 기독교 Quarter의 입구로서 성 안과 성 밖의 기독교인들이 드나들 수 있게 하기 위해 1899년에 개통된 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이전에도 이곳에 문이 있었음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바룩이 여호와의 성전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향해 예레미야의 말을 적은 책을 읽었습니다. 그가 책을 읽은 방은 사반의 아들이며 왕의 서기관인 그마랴의 방이었습니다. 그 방은 성전 ‘여호와의 새 문’ 입구의 위 뜰에 있었습니다.” (렘 36:10)

1948년 제 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 당시 요르단이 현재의 예루살렘 옛 시가지를 포함한 동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당시에는 이 문의 출입이 통제되었습니다. 그러나 1967년 제 3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새 문의 통행이 다시 허가되었습니다.

자파(욥바) 문 (Jaffa Gate, 다윗의 문, 아브라함의 문, 헤브론 문)

자파(욥바) 문은 예루살렘 성문 중에서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유일한 성문입니다. 원래의 자파 문의 역사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지금 볼 수 있는 욥바 문은 십자군시대의 성문이 있던 자리에 오스만터키의 술레이만 대제에 의해서 세워진 문입니다.

자파 문의 명칭은 고대부터 지중해 연안에 있는 욥바(자파) 항구로 이어지는 교역로가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또 비잔틴과 십자군 시대에는 옆에 다윗 망대가 있었기 때문에 “다윗 문”이라고도 불렸습니다.

the jaffa gate jerusalem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자파 문은 아랍어로는 밥 알-칼릴(Bab al-Khalil, 헤브론 문)로 불리기도 하는데, “엘 카릴”은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친구라고 하면 아브라함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아브라함의 문”이라고도 합니다.

문 정면에는 ‘술레이만 대제가 1538년 이 문을 세웠다’라고 아랍어로 쓰여 있고, 그 밑에 최근에 기록 된 문구로서 1970년에 보수를 마치고 나서 히브리어와 아랍어로 “예루살렘성이 보수됨”(느헤미야 4:7)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1898년까지는 욥바 문과 다윗 망대 사이에는 성벽이 있었으나 독일황제 빌헬름 2세(Wilhelm II, 재위 1888-1918)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마차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성벽을 헐어내어 길을 만들었기 때문에 현재의 도로처럼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는 넓은 길이 그곳에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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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에 영국 알렌비(Edmund Allenby) 장군이 영국군의 선두에 서서 이 욥바 문을 통해 들어 올 때에는 예루살렘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말에서 내려서 걸어 들어왔습니다.

자파 문을 들어서게 되면 오른쪽은 아르메니아 지구이며, 왼쪽은 기독교 지구입니다. 문 안으로 들어오면 오른쪽에는 다윗의 탑이 있고 정면에는 Christian Information Center가 있습니다. 그리고 왼쪽에는 여행자들을 위한 Information Center가 있습니다.

자파 문의 바로 오른쪽 옆에는 예루살렘 성의 수비를 위한 요새가 있는데, 보통 ‘다윗 망대(Tower of David)’라고 불렸습니다. 이 망대는 BC 20년 헤롯왕이 예루살렘 서쪽 방어를 위해 지은 망대입니다.

AD 70년에 예루살렘 성은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점령되고 성전도 파괴될 때, 이 지점이 로마군의 공격 거점이었으며, AD 11세기에는 십자군이 예루살렘 공략을 위한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다윗의 망대는 오스만터키 술탄 술레이만 대제 때 재건된 것입니다. 현재 탑 내부에는 고고학 박물관과 전망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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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에는 자파 문 바로 오른쪽에 세워져 있었던 Ottoman 시계탑을 중심으로 하여 상업지구가 크게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Ottoman 시계탑은 영국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었을 때(1908년과 1922년 사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영국 행정당국은 예루살렘의 역사적인 장소들을 보호하기 위해 1944년에 성벽을 따라 세워져 있었던 건물을 모두 철거했습니다. 자파 문은 1948년 제 1차 중동전쟁 당시 요르단에 점령되어 있으며, 자파 문 옆에 방어벽이 세워져 있어서 통제되었었지만, 1967년 제 3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전 지역을 점령하면서 이스라엘에 귀속되고 나서 통행이 재개되었습니다.

자파 문은 1981년부터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자파 문 아래로는 대형지하주차장과 버스 정류장이 있어서 관광객이 모이는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자파 문 안쪽의 오른편에는 관광안내소가 있고, 신시가지와 연결되는 자파 문의 바깥쪽으로는 마밀라(Mamilla) Shopping Center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시온 문(Zion Gate, 예언자 다윗의 문)

예루살렘의 구시가지(Old City)를 감싸고 있는 성벽의 8개 문 중 남쪽에 있는 성문으로서, 유대인 지구로 통하는 문입니다. 1541년 오스만 터키의 술탄 술레이만에 의해서 건립하였습니다. 이 문은 시온 산으로 통하기 때문에 “시온 문”이라 부르는 문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사아르 시온(Shaar Zion)”이라고 하는데 시온 산에 있는 다윗왕의 무덤으로 갈 때, 이 문을 통해서 가기 때문에 아랍사람들은 시온 산에 있는 예언자 다윗 왕의 무덤으로 통한다는 뜻으로 “예언자 다윗 문(Bab el-Daoud)” 라고 부릅니다.

시온 문의 벽면과 기둥에 1968년 6일 전쟁 이후 보수하였지만,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 당시에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지금도 무수한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성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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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안쪽은 아르메니아 정교회가 관리하는 아르메니안 지구로서 비잔틴시대의 중앙대로인 카르도(Cardo), 중세 시대의 회당 등이 있습니다. 또 부근에는 다윗 왕의 묘와 마가의 다락방, 가야바의 집 등 구약 성서시대의 유적과 마리아 영면교회(Dormition Church) 등이 있어 순례자와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곳입니다.

이 시온 문은 다마스쿠스 문, 자파문과 함께 원래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는 문이기도 하며, 적들이 침범하여 왔을 때 방어하기 좋도록 ‘ㄴ’자형으로 만들어진 문입니다.

분문(Dung Gate, 오물 문)

분(糞) 문(오물 성문)은 예루살렘 옛 시가지를 둘러싼 성벽의 출입구 중 하나로, 예루살렘 성전 산(Temple Mount) 남동쪽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문들 중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고 유대 지구로 통하는 유일한 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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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 성 안의 분뇨와 번제단에서 제사를 드리고 난 후에 쓰레기를 기드론 골짜기로 내버리기 위해 만들었던 문이었기 때문에 분문 또는 오물 문 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문 주변에 십자군 시대에는 가죽을 가공하던 사람들이 많이 살면서 자주 출입했다하여 “무두질 꾼의 문” 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느 3:14)에는 분문으로, (에레미아 39:4)에 “두담 샛문”이라고 언급된 문입니다. 이곳에서 번제단의 재을 버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들입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실로암 연못까지 이어지는 계단이 이곳에 있어서 실로암 문이라고도 불렸던 곳입니다.

문 안쪽에는 오늘날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예루살렘 성전의 서쪽 벽이 남아있습니다. 구약성서 (느헤미야서 3:13~14)에 언급된 샤아르 하쉬폿(Sha’ar Ha’ashpot)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곳이 오늘날 분문 안쪽의 통곡의 벽과 지리적으로 일치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오물 성문 맞은편에는 다윗 왕이 처음에 예루살렘에 정착했었던 다윗성이 있습니다. 오물 성문을 나와 계속해서 곧장 내려가면 실로암 연못에 이르게 됩니다.

1948년 이전까지 이 문은 작고 좁은 문이었지만, 1948년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던 이스라엘 군에 의해서 자파 문이 봉쇄된 후에 요르단 사람들이 자동차들이 이 문을 통하여 들어 올 수 있도록 확장 하였었던 문입니다. 이 문을 통해 서쪽 벽(Western Wall)과 유대인 지역(Jewish Quarter)으로 갈 수 있어서 유대인들과 관광객이 많이 이용하는 성문입니다. 분문을 지나는 사람들은 통곡의 벽을 방문하는 유대인이나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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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기의 분문

분문을 지나 들어가다 오른 편을 보면 예루살렘 성전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현장을 볼 수 있습니다. 오물 성문 맞은편에는 다윗이 초기 예루살렘에 정착했던 다윗성의 유적이 있으며 지금도 많은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또한 1967년 이스라엘이 제 3차 중동전쟁에서 이 지역을 점령한 후에 이 분문을 보수작업을 하였는데 건축가 아론슨(Shlomo Aronson)에 의해 개축되었으며, 현재는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넓게 확장 하였습니다.

성벽 순례(Ramparts walk)

약 3.4 Km의 예루살렘 성벽을 따라서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성벽 위에는 걸어서 다닐 수 있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한 바퀴 도는 데 약 1 시간가량 걸립니다. 욥바 문 안쪽에 있는 Information Center 옆에 성벽을 따라 구경할 수 있는 입구가 있습니다.

시간: 토요일~목요일 09:00~16:00, 금요일 09:00~14:00
입장료: 16 세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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