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역사/이스라엘

포에니 전쟁과 마카비 혁명(3)

은바리라이프 2011. 2. 4. 19:27

포에니 전쟁과 마카비 혁명(3)
지중해 정세의 판도 변화와 수리아 버가모 로마의 역학관계

포에니 전쟁으로 인한 지중해 정세의 판도 변화

포에니 전쟁은 지중해 패권구조가 새롭게 변화되는 동기를 부여하였다. 첫째 전쟁 포로를 잡아 매각함으로서 노예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으며, 둘째 정복지에서 대농장 체제가 확립되었고 속주에서 값싼 곡물들이 유입됨으로 인하여 로마 내의 소농들이 몰락하게 되었으며 셋째, 몰락한 농민과 노예 노동으로 인하여 일자리를 잃게 된 노동자들이 도시로 몰려들므로 인하여 불만세력들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넷째, 상인, 고리대금업자 그리고 정부와 계약을 맺고 광산개발 및 도로건설, 세금징수를 맡은 하층업자들로 이루어진 중산계급들이 등장하였다. 다섯째, 사치와 향락적인 생활관습의 변화가 전쟁승리로 인한 부가가치의 이득이 신흥부유계층으로 확산되었다.

기원전 197년에서 168년 사이 로마가 동부를 지배하게 되는 전략은 서부지역의 전략과 차이가 있었다.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 서부지역에서 로마는 제국의 기틀을 잡은 동기를 제공하고 있었지만 동부지역에서는 원로원의 정책이 섬세하고 점진적이고 외교적인 노선을 선택하는 정략을 구성하는 정책을 사용하였다.
당시 동부 지중해에는 여러 개의 왕국이 있었다. 그런 왕국들은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하고(B.C 332) 소왕국들이 탄생하였지만 단명하였던 왕국은 무너진다. 이러한 소왕국들은 그의 휘하에 있던 장군들의 손으로 세워졌으므로 장군들이 새운 계승자 왕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런 왕들 가운데 마케도니아의 빌립 5세는 로마를 향하여 항거하였다. 그는 칸나이 전투 이후 로마 공화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는다. 기원전 197년 이때는 프톨레미 왕조가 셀레우쿠스 왕조로 넘어간 1년 후였다. 이 전투는 바네아스 전투(Baneas War)라고 부른다.(BC 198) 카르타고가 로마에 의해 정복되자 로마는 빌립 5세에게 본격적인 선전포고를 하였다. 로마의 동방지역 진출은 빌립 5세에 의해 종속되어 있는 아시아의 소왕국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한다는 명분이었다. 이 전쟁을 역사는 마케도니아 전쟁이라고 부른다.


마케도니아의 빌립 5세(B.C 221-179)는 안티고누스 왕들 중 가장 유능하며 동시에 가장 불행하였던 왕들 중에 하나였다. 마케도니아 통치자들이 항상 그러하였던 것처럼 전 도시국가들을 지배하고 전 발칸반도를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여야겠다고 야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지도자였다. 그가 권좌에 오를 무렵 로마 공화정은 해적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아드리아해 동부해안선으로 침략해 들어왔다. 빌립 5세는 이러한 침공을 자기의 영역을 도전하는 세력으로 간주하고 한니발과 동맹을 맺고 로마를 공격함으로 몰아낼 결의를 한다. 이 시기가 제2차 포에니 전쟁기간이었다. 그러나 한니발이 패한 다음 마케도니아 자체에 대해 로마는 전쟁을 선포하였다. 빌립 5세 휘하의 장군 팔랑크스가 지휘하는 마케도니아군은 데살리에 있는 키노스 케팔라에(Cynoscephalae)에서 로마 군대에 패망하고 만다(B.C 197). 그 이후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로마는 자유를 선포한다. 그 후 아우구스투스 황제 제위에 이르기까지 그리스(헬라)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수리아와 버가모와 로마의 역학관계

수리아의 창건자는 알렉산더 부관 중의 한 사람이었던 셀레우쿠스 1세 니카드(Seleucus Ⅰ Nicator)였다. 그는 박트리아 지역의 용맹스러운 코끼리들을 훈련시켜 전쟁에 투입하였다(약 500마리). 그는 이들 전투동물들을 안티고누스와 리시마쿠스(Lysimachus)에 대항하는 서부지역 전투에 이용하였다.
후일 그는 이들 코끼리 전투 부대를 안티고누스와 리시마쿠스 왕조와의 전투에 투입하여 대승을 거둔다(입수스 전투, B.C 301; 코루페디온 전투 Corupedion, B.C 281). 위대한 정복자 셀레우쿠스 1세 니카드는 프톨레미 케라우수스(Ptolemy Ceraunus)에게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안티오쿠스 1세가 왕조를 계승하였다. 그 이후 셀레우쿠스 왕조의 후계자들은 셀레우쿠스나 안티오쿠스의 이름으로 불려졌다. 셀레우쿠스 왕가의 6대 왕 안티오쿠스 3세는 대왕이란 호칭을 역사가들은 부른다. 그 이유는 그 이전의 제왕들을 셀레우쿠스 1세가 정복한 영토를 지키지 못하고 잃어버렸지만 안티오쿠스 3세(Antiochus Ⅲ)는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고 또한 그러한 영토를 회복하는 전과를 거둔다. 그의 최대 성공은 이집트 프톨레미 왕조가 다스렸던 팔레스타인을 자국의 영토로 복속시키는데 성공한다(B.C 198, 파네아스 전투). 프톨레미 왕조가 차지하고 있던 수리아, 길리기아에 있는 영토마저 셀레우쿠스 왕국의 지배하에 두게 하는데 성공한 왕이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버가모 왕국(Kingdom of Pergamom)을 복속시킨 사건이었다. 이 왕조의 창건자는 아탈루스 1세(Attalus Ⅰ, B.C 24-197)였는데 소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이었다. 그는 세금 징수에 능하였고, 양피지, 좋은 작물, 역청 등을 수출하여 큰 왕국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이 버가모 왕국의 가장 유명한 건물은 제우스 제단으로 최근에 발굴하여 지금 현재는 독일 베를린 박물관에 전시 복원되어 있다. 이 도시는 연무장과 화려한 신전을 소유하고 이었다. 버가모 도사관은 그 규모에 있어서 알렉산드리아에 다음가는 위치에 있었을 정도로 번창하였다. 또한 소아시아에는 아르메디스를 위한 대신전 할리카르나수스(Halicarnassus)가 있었으며 기원전 4세기 중엽에 마르솔루스왕(Mausolus)을 위해 세워진 마우솔레움 영묘가 있었는데 헤로도투스는 이를 7대 불가사의로 지명하였다. 이러한 지역을 통합한 인물이 바로 안티오쿠스 3세(Antiochus Ⅲ, B.C 223-187)였다.
그러나 안티오쿠스 3세의 엄청난 실수는 로마를 약하게 보았는데 있었다. 그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이후(B.C 201) 한니발이 동부 소아시아로 피난하였을 때, 그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였다는 사실이다. 안티오쿠스 3세는 소아시아의 영역을 그의 지해 하에 두기 위하여 한니발의 카르타고의 지도력을 높이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로마는 이러한 안티우쿠스 3세의 정치역량을 깊이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특별히 버가모 왕국의 유메네스 2세(Eumenes Ⅱ, B.C 195-159)는 로마 공화정에 안티오쿠스에 대항하여 로마가 아시아에 간섭하도록 안티오쿠스를 과장되게 오판하도록 정보를 제공하였다는 사실이다. 유메네스 3세는 후일 버가모 왕국을 평화롭게 로마에 이양하였고 그 결과 그의 왕조와 버가모 왕국은 로마의 보호를 받을 수가 있었다.
버가모의 유적은 병원단지였던 아스클레페리온, 그리고 붉은 마당으로 이루어진 이집트 사원, 그리고 아크로폴리스로 대표된다. 동쪽으로는 셀리우스 하천과 서쪽으로는 켄티우스 강 사이에 위치한 400m 높이의 천연적인 바위 언덕위에 건설되었다. 버가모 왕국은 기원전 400여년 경부터 발전하여 갔다. 리시마쿠스가 페르시아의 전리품을 이 도시에 보관하면서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이 버가모 왕국은 기원전 263년 유메네스 1세때부터 시작하여 아탈로스 1세(B.C 241-197) 시기에는 유럽에서 건너온 켈트족을 물리치고 도시를 위기에서 구하는 승전기록도 있다. 당시 버가모 왕국은 메간데르 강에서 콘야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다스리는 왕조였으며 기원전 133년 아탈로스 3세가 자신의 왕국을 로마에 바침으로 130년에 걸친 도시의 역사는 막을 내린다. 요한계시록은 유메네스 2세 시대 때 건설된 제우스 제단을 사탄의 보좌로 기록하고 있다(계 2:12).
카르타고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이후 전쟁 배상금 10,000달란트를 로마에 지불하였으며 셀레우쿠스 안티오쿠스 왕조는 기원전 189년 이후 15,000 달란트를 지불하였다. 로마는 세계의 수도가 되었고 전체적 부(富)의 중심지가 되었다. 로마 원로원에서 결정되는 사항과 법령을 전세계 속주국가에 전달되었고 법과 전통이 되었다. 로마의 일상은 축제와 연극과 검투사의 경기로 가득 채워졌다. 티베르의 한 언덕에서 시작한 로마는 드디어 근동의 패자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