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복음서
열처녀 비유-이종윤박사, 리챠드 트렌취의 견해|
열 처녀 비유에서 열 처녀를 이미 거듭난 사람들로 볼 것인지 아니면 미련한 처녀는 구원받지 못한 자로 볼 것인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계속해서 이 점에 대하여 소위 지방교회들과 관련이 없는 분들의 견해를 추가로 소개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2. 리챠드 트렌취의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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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역사상 나타난 열처녀 비유에 대한 학설들 소개
이제 (지방)교회측의 열 처녀 비유 해석을 본격적으로 소개 드리기에 앞서서 교회역사상 다른 분들은 이 비유를 어떻게 보았는지를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내용은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자이신 정태성 님의 석사학위논문 '""열처녀 비유와""(마25:1-13)와 ""양과 염소의 비유""(마25:31-46)에 나타난 마태의 심판사상'(1994년)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 논문도 다양한 학설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결론은 열처녀 비유는 '거듭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는 요구를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거듭났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함으로 의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 열매는 믿는 사람의 예수믿는 생활의 증거라고 말할 수도 있고, 생명의 성숙일 수도 있고, 곡식이 익어 추수될만큼 예비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막4:26-29).
이제 해당 논문의 본문들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어거스틴
# 열 처녀 비유에 대한 해석에서 어거스틴은 '처녀들'을 단지 종교적 의미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어거스틴은 이 비유를 우리 모두에게, 즉 성직자뿐 아니라 교회 전체에게 연관시킨다.
그 처녀들은 왜 다섯 명씩 나뉘어 있는가? 다섯이라는 수는 '육체를 가진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육체를 가진 인간은 '오감(五感)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식 수단은 이 오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부정한 것을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맡지도 않고, 맛보지 않고, 만지지 않는 자는 ""처녀라는 이름을 얻은 자""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처녀가 되기에 충분치 않으며, 오히려 선행의 상징인 등을 준비해야 처녀가 된다. ...어거스틴은 지혜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 사이의 차이를 길게 주석한 후, '양심의 내적 기름'을 가진 자들에게는 영원한 상급이 될 심판에 대비하라는 권면으로 끝을 맺는다(Warren S. Kissinger, 한신의 옮김, 예수의 비유(종로서적, 1987), p 32)
크리소스톰
# 고대의 가장 위대한 설교가들 가운데 한 분인 크리소스톰은 열 처녀 비유의 해석에서 자선과 가난과 처녀성(정결함)의 종교적 삶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크리소스톰은 이 비유의 중심 주제가 '자선에 있어서의 자비심'이라고 믿는다. ... 그는 또한 기름은 '곤궁한 자들을 구제하고 자선을 베푸는 인간성'을 의미한다고 말하며, 처녀들의 잠은 죽음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신랑이 오고 있다는 한밤의 외침은 이 비유의 한 연장이든지 또는 예수가 '부활은 밤중에 일어날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크리소스톰은 주장한다. 어리석은 처녀들의 비극은 자연적 욕구에 대한 그들의 투쟁과 노력이 다 끝난 다음에도 그들은 전적으로 버림받고 수치를 당한다는 사실이다. 단지 자비심이 없기 때문이다. 크리소스톰은 ""자비심이 없는 것보다 더 처녀성을 더럽히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주요점은 '자선에 있어서의 자비로움'이다. 이 비유는 '자기의 소유를 버린 처녀들과 그리스도가 얼마나 가까이 연합하셨는가'에 대해 알게 한다고 주장하면서, 크리소스톰은 빈곤의 덕과 자비를 연결시킨다.
그레고리 대제
# 기독교의 전통적인 라틴 박사들 가운데 네 번째이자 마지막이었고, 중세 교황청의 아버지였던 그레고리 대제는, 열 처녀 비유는 현재의 교회에 대하여 이야기한다고 말한다.
각 사람은 다섯 가지의 감각 기관을 갖고 있는데 각각 두 개씩이므로 결국 열이 된다. 충성된 자는 남녀 모두들 포함하므로, ""교회는 열 처녀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혜로운 처녀들의 그릇에 있는 기름은 '밝은 영광'을 나타내고 있으며, 반면에 그 그릇은 우리들의 마음으로, ""우리는 그 안에 우리의 모든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한다. 지혜로운 처녀들은 그들의 등에 기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양심 속에 이 찬란한 내면적 영광을 감추어 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처녀들은 그들의 기쁨을 안에 감추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이웃의 입술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에 기름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레고리는 이 비유의 교훈을 '예기치 않게 갑자기 닥칠 궁극적인 심판에 대비하라는 경고'라고 보았다.
말틴 루터
# 마틴 루터에 의하면 다섯 처녀가 배격된 이유는 그들이 기름 없이 봉사했기 때문인데 기름은 은총이란 것이다. 그들은 은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것을 가지고 선을 행하려 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영광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칼빈
# 칼빈은 열 처녀 비유의 의도가 신자들에게 그들 앞에 놓은 긴 영적 여행을 위해 절제와 인내와 준비가 필요함을 알리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고 문이 그들 앞에 닫힌 이 비유의 마지막 장면은 오랜 기간 동안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은 자들이 저주 받을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준비와 인내라는 중심 테마로 돌아가서 칼빈은 이 비유에 대한 결론을 설명한다. ""이윽고 하늘 나라의 문은 충분치 못하게 준비한 모든 자들 앞에 닫힐 것이다. 그들은 중간 과정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단지 바로 그 순간에 준비되어 있지 않은 모든 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의미할 뿐이다(Calvin's Commentaries: A Harmony of the Gospels
이제 이 논문의 저자는 '마태복음 25장의 열처녀 비유'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소개드려 보겠습니다.
#.. 마태의 텍스트들을 직접 다룸으로 마태의 삶의 자리에서 마태의 편집사적 의미를 살펴 보아야겠다. 마태는 이 비유를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을 말씀하셨을 때에 제자들은 ""언제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며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고 질문했다(24:3). 제자들은 예루살렘 멸망과 주님의 재림, 그리고 세상의 종말을 모두 하나의 사건망으로 보고 이런 질문을 했다. 예수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세상 끝에 있을 주님의 재림 전에 환란이 있을 것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을 말씀하셨다. 마태는 자기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주는 비유로 이 비유를 소개하고 있다.
# 마태는 이 비유를 어떤 문맥에 편집하였는가? 마태에게서 이 비유는 '인자의 재림'을 준비시키기 위한 일련의 교훈들을 제시하는 문맥 가운데 편집되어 있다. *인자의 재림(24:29-31):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31절) *무화과 나무의 교훈(24:32-35):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33절). * 그 날과 그 시간은 모른다(24:36-44):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44절). * 열 처녀 비유(25:1-13):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13절). *달란트 잔치(25:14-30):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 새""(19절). ...
# 이 비유는 깨어 있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예비하고""있을 필요성을 가르치고 있다. 반면에, 바우어는 ""깨어 있으라""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다"", ""경성하다"", ""자지 않고 조심하다""로 정의하고 있다. 이 의미는 파루시아와 관련하여 ""예비하다""로 쉽게 전용되며, 그것이 마태가 의도했던 방식이라는 것이다. 뢰베스탐도 ""깨어 있으라""는 밤 시간에 신랑의 도착을 영접하기 위하여 예비된 활활 타는 등불을 들고 서 있는 것, 인자의 재림에 주위를 집중하고 기다리면서(그리스도 안에서)구원의 삶으로""깨어 있는 것"", 이것을 예비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위 글에 의하면 ""깨어 있으라""는 밤 시간에 신랑의 도착을 영접하기 위하여 예비된 활활 타는 등불을 들고 서 있는 것, 인자의 재림에 주위를 집중하고 기다리면서(그리스도 안에서)구원의 삶으로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삶으로 깨어 있는 것이라는 말을 눈여겨보기 바랍니다.
불신자는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알미니안주의 기준에 의해 나중에 구원이 취소되고 지옥 갈 분들은 결국 실제로는 구원받은 자가 아님으로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생명으로 참되게 영접한 사람들만이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제 이어서 계속 보겠습니다.
# 이 비유에서 다섯 처녀들은 지혜로운 자들로 불려지고 있으며, 다섯 처녀들은 어리석은 자들로 불려지고 있다. ""지혜로운""그리고 ""어리석은"" 처녀들의 구별은 무엇인가?이러한 구별은 ""지혜로운""그리고 ""어리석은"" 건축자의 구별과 비슷하다....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가 각각 예수의 말씀을 행하는 자와 행치 않는 자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지혜로운""과 ""어리석은"" 처녀들의 구별은 예수의 말씀을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여 온 자들이다. 등불을 계속 밝힐 수 있게끔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는 것은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선행을 나타내고 있다.
# 단프리드도 '기름'은 선행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단프리드는 제 1 단계로 마태복음 25;1-13 본문에서 '기름'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으나 본문 자체에서는 아무런 해석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 제 3 단계로 마태복음 전체의 시각으로 볼 때도 선행이 강조되어 있다. 5-7장의 산상보훈의 내용도 바른 인격과 바른 동기로 행하는 바른 행위가 역설되어 있다. 7:13-27에는 산상보훈의 결론으로서 결단 촉구의 말씀이 나오는 데 열매로서의 행위, 듣고 행하는 행위가 최후 시판의 근거로 제시되어 있다. 굉장한 능력을 행해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불법자들에게 주님은 최후 심판일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신다고 되어 있다(7:22-23). 특별히 마태복음 5:16에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이 있어서 ""빛을 비취는 것""과""착한 행실""이 직결되어 있다.
# 제 4 단계로 민수기 7장 19절에 대한 유대인의 주석을 보면""기름과 섞는다""는 말이 율법 연구가 선행과 섞인다는 말로 주석되어 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배우는 자들의 선행이 하나님이 보실 때 받을 만한 선행이다. 마태복음이 강조하는 선행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서의 선행이다(3:8)
# 마태는 자기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제자들에게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주님의 오심에 대해 지혜 있는 삶을 살라고 말한다. 마태가 말하는 지혜 있는 삶이란 알 수 없는 그 날과 그 시에 대해 주의를 집중하고 기다리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선행으로 예비하는 삶이다.
위 내용 중에서 '마태는 자기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제자들에게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주님의 오심에 대해 지혜 있는 삶을 살라고 말한다.'는 대목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 마태복음 전체의 맥락을 통하여 마태가 가지고 있는 종말 심판사상을 알아보려 한다. 이 문제에 관해서 보른캄(Gunther Bornkamm)은 매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보른캄을 참고하여서 마태복음의 첫 부분부터 끝 부분에 이르는 맥락을 통해 볼 때 마태는 마태복음이 기록되었던 당시 교회가 바라던 종말 심판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산상수훈을 살펴보면, 마지막 날에 관한 기대와 교회 개념이 이 산상 설교의 구조를 결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마태복음에서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미덕이 무엇이지를 묘사하고 있다.
# 산상수훈 가운데는 팔복이 있다. 팔복은 하나님 나라의 참된 계승자들에 관한 원칙을 제시해 준다. 빛과 소금에 관한 말씀으로부터 권고의 말씀이 5:16에 기술되었다. 5:20절은 뒤이어 나오는 명령들의 설명을 나타내는 표제로서의 역할, 어떤 의미에서는 산상수훈 전체의 주제 역할을 한다. 이 구절은 보다 뛰어난 의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 보고 있다. 7장 13절의 좁은 문 비유, 7장 16-20절의 과실에 관한 비유, 7장21-23절의 심판 묘사의 비유, 7장24절의 두 건축자에 관한 비유 등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는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 사실 이것은 심판 때에 요구되는 것이다. 이 명령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 성도들은 충실히 지키도록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지방교회 측의 열 처녀 비유 해석 (1)
지금부터 소개드리는 내용은 위트니스 리의 열 처녀 비유 해석인 마태복음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 64에 있는 내용들입니다.
일반 독자분들은 우리측의 세세한 항목들에 대한 해석에 다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불신자이거나 이00님의 사견처럼 ""교회를 다니지만 형식적인 믿음을 가진 구원받지 못한 자"" 가 아니라 '거듭났지만 깨어있지 못한 성도들'이라는 위트니스 리 형제님의 해석이 칼빈이나 정훈택 교수의 해석과도 일치함을 강조 하고자 합니다.
# 이미 본 바와 같이 왕국에 대한 예언 가운데 교회에 관한 부분은 두 면-깨어 있고 예비되어 있는 면과 신실하고 지혜 있게 되는 면-을 다루고 있다. 깨어 있음과 예비됨은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과 관계 있다. 우리 모두는 깨어 있어야 하며 주님의 오심을 위해 예비해야 한다. 그러나 합당한 그리스도인은 생활면을 돌볼 뿐 아니라 봉사면도 돌봐야 한다. 봉사(섬김)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신실함과 지혜로움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향하여 신실해야 하며 동료 믿는이들을 향하여는 지혜로워야(사려 깊어야)한다. 이미 본 바와 같이 24장에서 그 양면이 모두 다뤄진다. 생명 안에서 우리는 깨어 있고 예비되어야 한다. 봉사에 있어서 우리는 신실하고 지혜로워야 한다.
# 비록 두 면이 모두 24장에서 다뤄졌지만 충분하지는 못하다. 그러므로 25장에는 24장에서 다뤄진 각 면을 위한 보충의 말이 있어야 한다. 마태복음 25장 1절부터 30절까지는 24장에 있는 믿는이들에 관한 부분을 완성시킨다. 처녀들의 비유(25:1-13)는 깨어 있고 예비하는 문제를 완결한다. 깨어 있고 예비하는 방법이 처녀들의 비유에서 계시되고 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마지막 구절인 마태복음 25장 13절은,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24장 42절과 매우 유사한데, 이는 25장 1절부터 13절까지가 휴거되기 위해 깨어 있는 것에 관한 24장 40절부터 44절까지에 대한 완결임을 가리킨다.
우리는 마태복음 25장이 마태복음 24:3의 주님의 재림과 세상 끝날의 징조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긴 답변의 일부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마24장과 25장을 연결하여 이해하려는 위트니스 리의 시도는 정당한 것입니다. 계속 인용해 보겠습니다.
# 마태복음 24장 32절부터 44절까지는 깨어 있음과 예비하고 있음에 관한 부분이다. 25장 1절부터 13절까지도 역시 깨어 있음에 관한 부분으로서 앞 부분을 완결하는 것이다.같은 원칙으로, 24장 45절부터51절까지와 25장 14절부터 30절까지는 신실함과 지혜 있음에 관한 부분들이다. 쓸모없는 노예를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마태복음 25장 30절은 24장 51절과 병렬된다. 이것은 25장 14절부터 30절까지가 주님의 일에 신실함에 관해 말하고 있는 24장 45절부터 51절에 대한 완결임을 가리킨다. 24장 45절부터 51절까지는 주님의 위임을 이루는 데 있어서 노예의 신실하지 못함을 다루고 있다. 마태복음 25장 14절부터 30절까지는 주님의 달란트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노예의 신실하지 못함을 다루는 데 여전히 필요하다. 24장 45절부터 51절까지는 신실하며 지혜 있어야 함을 일러주지만, 신실해지고 지혜롭게 되는 방법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이것은 달란트의 비유에서 계시되고 있다.
# 깨어 있는 길은 성령의 내적 충만을 통해서이다. 즉 그것은 여분(餘分)의 기름을 가짐으로써 된다. 우리 스스로에 의해서는 깨어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예비되지도 못한다.여분의 기름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령의 내적 충만에 의해서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깨어 있고 예비하는 길이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봉사에 있어서 신실하게 되고 지혜롭게 되는 방법은 영적 은사들을 통해서이다. 영적 은사들이 없이는 신실하게 되거나 지혜롭게 될 능력이 없다. 우리의 신실함과 지혜 있음은 우리가 주께로부터 받은 은사들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25장에서 우리는 그 영의 내적 충만과 그 영의 은사들을 모두 볼 수 있다. 그 영은 우리에게 생활을 위한 내적 충만과 봉사를 위한 은사들을 제공해 주신다. 그것은 모두가 그 영에 달려 있다. 어떻게 우리는 깨어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오로지 성령의 내적 충만에 의해서만 된다. 어떻게 우리는 신실해질 수 있는가? 그것은 오로지 성령의 은사들에 의해서만 된다.
위 내용에서 '깨어 있는 길은 성령의 내적 충만을 통해서이다'.라는 부분을 주목할 필욕 있습니다. 즉 이 열처녀 비유는 이미 거듭난 자가 영의 충만으로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라는권면이지 불신자에게 지옥가지 말고 구원받으라는 복음 메시지가 아닙니다.
# 25장이 24장의 완결이라는 또 하나의 지적(指摘)은 남자들 중 한 명과 여자들 중 한 명은 데려감을 당했고 나머지 남녀는 남겨졌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왜 한 명은 데려가졌고 다른 한 명은 남겨지게 되었는가? 그 답은 24장에는 없고 25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한 명이 데려감을 당한 것은 그가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한 명이 남겨진 이유는 그에게 여분의 기름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제우리는 깨어 있음을 위한 비유인 열 처녀의 비유를 한 구절씩 살펴보기로 하자.
# 마태복음 25장 1절은,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때에」라는 말은 「그 당시에」, 즉 「임재(parousia)의 시기에」를 뜻한다. 24장에 기술된 임재(parousia)가 발생하고 있을 때, 많은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때에 천국은 열 처녀로 비유될 것이다.
1) 처녀
# 처녀는 생활면에 있어서 믿는이들을 상징한다(고후 11:2). 왕국백성인 믿는이들은 순결한 처녀들과 같아서 어두운 시대에 주님의 간증(등)을 지니고 있으며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세상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이를 위해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의 내주하심뿐 아니라 충만함도 역시 필요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첫째로 처녀들이다. 처녀가 되는 것은 일이나 봉사나 활동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의 문제이다. 더구나 우리는 다만 처녀일 뿐 아니라 정결하고 순결한 처녀이다. 처녀가 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거나 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우리 자신이 어떠한가의 문제이다. 남성이건 여성이건 우리는 처녀들이다. 나는 비록 노인(老人)이지만 처녀같이 처신한다. 나는 결코 처녀인 내 신분을 팔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원수의 목전에서도 나는 처녀이다.
2) 등
# 1절은 처녀들이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밖으로 나갔다고 말한다. 등(燈)이란 믿는이들의 영(靈)을 상징하는데(잠 20:27), 거기에 하나님의 영을 기름으로 담는다(롬 8:16).믿는이들은 그들의 영 안으로부터 하나님의 영의 빛으로 빛을 낸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이 시대의 어둠 안에서 빛을 발하는 등처럼 세상의 빛이 되어(마 5:14-16, 빌 2:15-16)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주님의 간증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처녀들로서 우리는 전쟁을 위한 무기나 놀이를 위한 스포츠 기구들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증거하고 빛을 발하고 비추기 위한 등(燈)을 들고 있다. 우리의 손 안에는 주님의 간증을 위해 빛을 발하는 등이 있다.
3) 나감
# 처녀들은 나갔다. 이것은 믿는이들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맞으려고 세상에서 나왔음을 상징한다. 처녀들은 어느 곳에서도 머뭇거리거나 정착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다. 팬톤(D. M. Panton)은 그의 저서들 중 하나에서, 세상은 자기에게 다만 하나의 오솔길일 뿐이고 이 오솔길의 끝에는 무덤 하나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만일 주님이 더디 오신다면, 세상은 결국 나에게 하나의 안식처 곧 무덤만을 제공해 줄 것인데, 그곳에서 나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누워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정착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 밖으로 나가고 있다.
4) 신랑을 맞으려고
# 신랑은 즐겁고 매력적인 사람인 그리스도를 상징한다(요 3:29, 마 9:15). 이 비유에서 주님은 자기 자신을 승전(勝戰)의 장군이나 위대한 사령관으로 비유하지 않고, 가장 즐거운 사람인 신랑으로 비유하셨다. 얼마나 좋은가! 이처럼 우리는 나가고 있는 처녀들이요, 그분은 오시고 있는 신랑이시다.
5) 기름을 가지지 않은 미련한 다섯 처녀들
# 2절은,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고 말한다. 다섯은 넷에 하나를 더해서 이루어진 숫자이다. 그것은 하나님(하나로 상징됨)이 더해진 사람(넷으로 상징됨)이 책임을 맡는 것을 상징한다.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롭다는 사실은 믿는이들 중반은 미련하고 나머지 절반은 슬기롭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믿는이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될 책임을 지고 있음을 가리킨다. 구약은 다섯이 책임의 수라는 것을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은 다섯씩으로 된 두 조(組)로 구분된다.또한 다섯이란 숫자는 성막과 그 기구들과 관련해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다섯은 많은 치수들 가운데 기본 인수(因數)이다.
# 2절은, 다섯 처녀는 미련하고 다섯은 지혜롭다고 말한다. 책임을 맡는 데 있어서 슬기로운 자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미련한자들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주 예수님은 미련한 자들을 먼저 언급하신다. 미련하다는 것이 이 다섯 처녀들을 가짜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본성에 있어서 그들은 슬기로운 자 다섯과 동일하다.
# 3절은 그들이 미련한 이유를 말해 준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기름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한다(사 61:1, 히 1:9). 어리석은 자들은 등만 가졌을 뿐 그릇에 여분의 기름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미련했다. 거듭나게 하시는 그 영에 추가해서 그들은 내적 충만의 그 영 곧 여분의 성령을 갖지 않은 것이다.
열처녀 비유에 대한 (지방)교회의 해석 (2)
아래 내용은 위트니스 리의 마태복음 라이프 스타디 #64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1) 그릇에 기름을 가진 슬기 있는 다섯 명
# 4절은,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라고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진 그릇이고(롬 9:21, 23-24), 사람의 인격(개성)은 그 혼 안에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릇이란 믿는이들의 혼을 상징한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에 기름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릇에도 기름을 가졌다. 등에 기름을 갖는다는 것은 그들의 영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있음을 상징하고(롬 8:9, 16), 그릇에 기름을 담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혼을 흠뻑 적시는 하나님의 영의 충만함을 갖고 있음을 상징한다.
'등에 기름을 갖는다는 것은 그들의 영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있음을 상징하고(롬 8:9, 16), 그릇에 기름을 담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혼을 흠뻑 적시는 하나님의 영의 충만함을 갖고 있음을 상징한다'는 대목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 우리는 등과 그릇에 관해 매우 분명해야 한다. 잠언 20장 27절은-히브리어 원문에 따르면-사람의 영을 여호와의 등이라고 말한다. 등 안에는 기름 곧 성령이 있다. 신약은 우리의 영이야말로 성령이 내주 하시는 장소임을 계시한다. 로마서 9장대로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그릇들이다. 우리의 존재, 우리의 인격은 우리의 혼 안에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의 그릇은 우리의 혼을 상징한다.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 하나님의 영을 갖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등을 타오르게 만든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우리 혼을 충만케 하는 여분의 성령을 가지고 있는가의 여부에 있다. 우리의 등 안에 기름이 있더라도 우리에게는 혼 안에 들어있는 여분의 기름이 필요하다. 이것은 그 영께서 반드시 우리 영으로부터 혼의 각 부분에 퍼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면 우리의 혼 안에는 여분의 성령이 있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이 여분이 있다면 우리는 지혜로운 것이다. 만일 여분을 갖지 못했다면 우리는 미련한 것이다. 달리 말해서 만일 우리가 성령의 내적 충만에 무관심하다면, 우리는 미련한 것이다.
위 인용문중에서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 하나님의 영을 갖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등을 타오르게 만든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우리 혼을 충만케 하는 여분의 성령을 가지고 있는가의 여부에 있다. 우리의 등 안에 기름이 있더라도 우리에게는 혼 안에 들어있는 여분의 기름이 필요하다.'는 대목이 중요합니다.
요 3:6은 성경은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고전 6:17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거듭난 사람들은 그들의 사람의 영 안에 영이신 하나님이 내주 하시고 연합되어 계십니다. 이런 사람은 영안에 기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 감정, 의지로 구성된 혼 안에는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감정, 하나님의 의지가 우리의 불순종과 불 신앙으로 인해 거절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이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자기 좋은 것을 하고, 자기 생각대로 고집하다가 하나님과 많이 부딪치고 많은 환경의 십자가를 통과한 다음에는 우리의 고집, 우리의 생각, 우리의 느낌은 감소되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느낌,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살게 됩니다. 이것은 한 면으로는 옛사람의 씻겨짐이고 또 다른 면으로는 성령의 거룩케 함의 역사인 것입니다(엡5:26).
이처럼 기름을 준비한 자의 특징은 그 사람의 옛 관념이 깨지고 생각이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롬12:2). 생각을 육신에 두어 영적 사망에 빠지는 시간보다는 생각을 영에 두어 생명과 평안을 누리는 시간이 많게 되는 것도 혼 안에 기름을 준비한 사람들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8:6의 내용이고 저의 체험이기도 합니다.
계속 위트니스 리의 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 만일 우리가 지혜롭다면 이렇게 기도할 것이다. 『주여, 제게 긍휼을 베푸소서. 저는 당신의 영이 제 영 안에만 계실 뿐 아니라, 제 혼 안에도 계시길 원합니다. 주여, 저에게는 그 영의 내적 충만이 필요합니다. 저에게는 저의 전 존재를 채우는 여분의 성령이 필요합니다.』 이 여분의 그 영이 없이는, 우리가 깨어 있을 수도, 예비하고 있을 수도 없다. 깨어 있고 예비하고 있으려면 성령의 내적 충만, 즉 그 영 자신이 우리 영으로부터 내적 존재의 모든 부분에 퍼지는 것이 필요하다.
2) 신랑이 더디 옴
# 5절은 신랑이 더디 오신다고 말한다. 실로 주 예수님은 그분의 재림을 지체하셨다. 계시록에서 그분은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셨지만, 거의 이천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분은 그분의 오심을 지체하고 계신다.
3) 모든 처녀들이 졸다가 잠이 듬
# 신랑이 더디 왔기 때문에 모든 처녀들은 『다 졸다가 잠이 들었다』. 조는 것은 병드는 것을 상징하고(행 9:37, 고전 11:30), 잠드는 것은 죽는 것을 상징한다(살전 4:13-16, 요 11:11-13). 주님이 그분의 재림을 지체하시는 동안에 믿는이들 대다수가 먼저 병들게 되고 나중에는 죽는다.
물론 위 구절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하던 열처녀 모두가 구원받은 우리들이다 라는 저의 주장과 다섯은 구원받은 자 나머지 다섯은 구원받지 못한 자라는 이00님의 해석의 차이는 엄연히 있습니다.
4) 한 밤중에 소리가 남
# 6절은, 『한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니』라고 말한다. 한 밤중이란 이 어두운 시대(밤)가운데 가장 캄캄한 때를 상징한다. 그것은 이 시대의 끝,즉 대환난 때일 것이다. 「소리」는 천사장의 음성을 상징한다(살전 4:16).
5) 처녀들이 다 일어남
# 7절은,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손질하는데』라고 말한다. 「일어나」라는 말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부활을 상징한다(살전 4:14). 이것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과 고린도전서 15장 52절에 예언된 부활이다.
6) 그들의 등을 손질함
# 처녀들은 일어난 후에 『등을 손질했다』. 이것은 그들이 생활 가운데서 그들의 간증을 처리함을 상징한다. 이것은 만일 우리가 죽기 전에 온전하지 못하다면 부활 후에도 주님의 간증을 위한 우리의 생활이 여전히 처리 받아야 함을 가리킨다.
7) 미련한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서 기름을 빌기 원함
# 8절은,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말하되 우리의 등불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심지어 부활 후에도 미련한 믿는이들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의 영의 충만함이 필요하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꺼져 가니」라는 말은 미련한 처녀들의 등이 켜져 있고 그 안에 기름이 있지만 충분한 공급을 갖지 못했음을 입증한다. 미련한 처녀들은 그들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에 의해 거듭났지만, 그들의 온 존재를 흠뻑 적실 정도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되지 않은 믿는이들을 대표한다.
8) 슬기로운 처녀들의 대답
# 9절은,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말하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아무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성령의 충만을 가질 수 없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다른 많은 것은 빌어올 수 있을지 몰라도 성령의 내적 충만은 빌어올 수 없다. 이것은 먹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도 당신을 위해서 대신 먹어 줄 수 없다. 슬기 있는 처녀들은, 파는 자들에게 가서 쓸 것을 사라고 미련한 처녀들에게 말했다. 기름을 파는 자들은 대환난 중의 두 증인-두 감람나무와 기름의 두 아들들-임에 틀림없다(계 11:3-4, 슥 4:11-14). 대환난 동안에 기름의 두 아들들인 모세와 엘리야가 하나님의 백성을 도우러 올 것이다.
사는 것(買入)은 대가의 지불이 필요함을 가리킨다. 성령의 충만은 세상을 포기하고 자아를 처리하고 모든 것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손해보는 것 등의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얻어진다. 만일 오늘날 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부활 후에 지불해야 한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분의 성령을 갖지 못한다. 결국 미련한 처녀들은 그들의 마음과 혼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해야 함을 깨달을 것이다. 그들은 세상을 포기하고 자아를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볼 것이다.
위 본문에서 '기름을 파는 자들'이 누구인가는 매우 쉽지 않은 부분입니다. 위트니스 리는 ""기름을 파는 자들은 대환난 중의 두 증인-두 감람나무와 기름의 두 아들들-임에 틀림없다(계 11:3-4, 슥 4:11-14). 대환난 동안에 기름의 두 아들들인 모세와 엘리야가 하나님의 백성을 도우러 올 것이다.""라고 주석 했습니다. 이00님도 자신의 주석을 근거를 가지고 제시한 후 판단은 독자들에게 맡기면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열처녀 비유의 중점은 아닙니다. 열처녀 비유의 중점은 살아 있을 때 즉 주님의 재림 전에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재림을 예비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9) 신랑이 오시고, 예비했던 이들은 그분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감
# 10절은,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고 문은 닫힌지라』고 말한다. 「오므로(came)」라는 말은 그분의 임재(parousia)의 일부분으로서 주님이 공중으로 오셨음(살전 4:16)을 언급한다. 예비한 자들은 어린 양의 혼인 만찬에 초대된 사람들임이 분명하다(계 19:9). 우리는 항상 우리 그릇에 기름을 가짐으로써, 항상 우리 온 존재 안에 하나님의 영을 가득 채움으로써 예비되어야 한다(24:44). 깨어 있고 예비되는 것은 주님의 임하심(parousia)을 위한 우리의 매일의 훈련이어야 한다.
# 그분과 같이 들어가는 것은 주님이 임하시는 동안 부활한 믿는이들이 공중으로 휴거되는 것을 언급한다(살전 4:17). 10절에 있는 혼인 잔치는 어린 양의 혼인 만찬(계 19:9)인데, 그것은 그분이 오시는 동안 즉 그분이 임하시는 동안 공중에서 베풀어질 것이다(살전 4:17). 그것은 왕국이 나타나기 전에 예비된 믿는이들, 즉 죽기 전에 성령의 충만으로 준비되었던 믿는이들에게 주는, 주님과 함께 누리는 상으로서 베풀어질 것이다. 예비된 자들이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간 뒤에는 문이 닫힌다. 이것은 구원의 문이 아니라 주님의 혼인 잔치를 누리는 누림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위 내용에서 보듯이 이 비유는 불신자에게 구원받고 지옥 가지 말라는 내용이 아니라 이미 거듭난 자들에게 깨어서 생명의 성숙의 삶을 살므로 주님의 혼인 잔치를 누리는 누림 안으로 들어가라는 권면이요 경고인 것입니다.
10) 미련한 처녀들이 늦게 왔지만 신랑은 그들을 알지 못함
# 11절과 12절은, 『그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그가 대답하여 말하되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고 말한다. 미련한 처녀들이 나중에 왔다는 것은 부활한 믿는이들의 후기의 휴거를 언급하는 것이다. 그들은 여분의 기름을 위해 대가를 지불했지만, 그것을 너무나 늦게서야 얻었다. 여기에서는 시간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왔을 때 문은 이미 닫혔기 때문이다.
# 그들이 주님께 문을 열어 달라고 청했을 때, 주님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알지 못한다 함은 누가복음 13장 25절과 요한복음 1장 26절, 31절, 8장19절에서처럼 인정하지 않고 시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미련한 처녀들은 등에 불을 켰었고, 주님을 맞으려고 나갔고, 죽었고 부활했고 휴거되었지만, 성령의 충만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데 있어서는 늦었다. 이로 인해 주님은 그들이 그분의 혼인 잔치에 참예하는 것을 인정하거나 승인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은 시대적으로는 이 상(賞)을 놓쳤지만, 구원은 영원히 잃지 않는다.
# 그들에게 알지 못하노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은 『나는 너희를 좋게 여기지도 않고 너희를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땅 위에서 생활했던 방식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또 너희가 너무 늦게 온 것도 인정해 줄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왕국 잔치의 누림에서 거절된다.
11) 깨어 있으라
# 13절은,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느니라』고 결론 맺고 있다. 24장 40절부터 44절까지는 오직 이미 예비된 살아 있는 믿는이들의 휴거만을 언급하고 있다. 25장 1절부터 13절은 죽은 자들과 부활한 자들의 휴거를 다루는 데 필요하다. 이 부분의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깨어 있어야 하는지를 볼 수 있다. 깨어 있고 예비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다른 어느 책도 마태복음만큼 자주 우리에게 경고를 주지 않는다.
# 나는 사십여 년 이상을 이 책에 의해 경고를 받아 왔음을 주님 앞에서 간증할 수 있다. 나는 조금 부주의했을 때마다 마태복음에 담긴 그 경고들을 기억하곤 했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처녀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련한 처녀들인가, 아니면 슬기로운 처녀들인가? 우리 모두는 이 질문을 자문 자답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지혜로운지 미련한지의 여부는 우리가 우리의 그릇 안에 여분의 성령을 갖고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위 열처녀 비유의 해석이 합당한지의 여부는 그 해석이 이미 거듭난 사람들에게도 참되게 깨어 있도록 경고가 되는지를 보면 됩니다. 거듭난 사람을 상징하는 슬기로운 다섯은 100퍼센트 천국혼인잔치에 들어 갈 것이고 미련한 다섯은 천국 혼인잔치에 못들어 가지만 그것은 불신자를 뜻하므로 이미 거듭난 나와 는 무관하다며 빠져나갈 구멍을 주는 이00님식 해석은 본문이 전달하는 엄중함이 결여된 해석입니다. 비 성경적인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심각하게 어떤 것을 명령하며 만일 그대로 이행치 않으면 큰 대가를 치뤄야 할 것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왔는지 모르나 어떤 사람이 마음대로 주인 말을 뒤집어 '명령대로 안 해도 다 잘되니 걱정 말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사람의 말만 믿고 종들이 주인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면 그 책임은 막중할 것입니다.
열 처녀에 대한 (지방)교회의 해석(계속)
# 믿는 이들에 대한 신약의 또 하나의 상징은 처녀들이다. 마태복음 25장 1절은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라고 말한다. 처녀들은 생명의 방면에서 본 믿는 이들을 나타낸다. 왕국 백성들인 믿는 이들은 어두운 시대에 주님의 간증(등불)을 짊어지고 주님을 맞으러 나간 정결한 처녀들과 같다. 이것을 위해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내주하심뿐 아니라 충만을 필요로 한다. 처녀라는 것은 역사, 봉사, 활동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이다. 더욱이 우리는 처녀들일 뿐 아니라 정결하고 순결한 처녀들이다. 처녀라는 것은 우리가 행한 것 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우리의 어떠함의 문제이다. (신약의 결론 믿는 이들Ⅰ 10장, 124쪽)
'처녀들은 생명의 방면에서 본 믿는 이들을 나타낸다. 왕국 백성들인 믿는 이들은 어두운 시대에 주님의 간증(등불)을 짊어지고 주님을 맞으러 나간 정결한 처녀들과 같다. 이것을 위해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내주하심뿐 아니라 충만을 필요로 한다'라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 바울도 고린도의 믿는 이들에게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라고 말할 수 있었다. 더욱이 계시록 21장 2절은 새 예루살렘을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묘사한다. 이것은 우리가 총체적인 처녀인 새 예루살렘에 참여하려면 우리 자신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기다리는 처녀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위 책).
# 많은 때 우리는 영과 혼과 몸을 가리키는 동일한 중심을 가진 세 개의 원으로 다이어그램을 사용했다. 그 중심에 있는 영은 생각, 감정, 의지로 구성된 혼으로 둘러싸여 있다.성경은 혼의 그 세 부분에 영의 한 부분인 양심을 더하여 마음(heart)으로 여긴다. 마음은 혼과 매우 비슷하지만, 그것이 영의 한 부분인 양심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보다 큰 어떤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 주님은 우리 영 안으로 오셨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혼 안으로, 즉 우리 생각, 감정, 의지 안으로는 그렇게 많이 확장되지 못하셨다. … 그분은 우리 영이라는 작은 부분에 갇혀 계신다. 그러나 적어도 그분은 우리 안으로 오셨으며, 우리를 비추셨고, 우리 영은 이제 등으로서 불타고 있다(신약의 결론 왕국 31장, 312-313쪽).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우리 영은 어두웠고 죽어 있었다(엡 2:1,5). 우리에게는 우리 영에 대한 지각이 없었으며 우리 안에 그런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가 복음을 들었을 때,우리가 복음의 말씀을 읽었을 때, 무엇인가가 우리 속을 비추었으며 우리는 빛 비춤을 받았다. 이러한 빛이 우리 속 깊이 들어왔으므로 우리는 회개하고 주님의 이름을 불렀다.즉시 우리 안에서 무엇인가가 살아났으며 타오르고 빛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 깊은 속에서 무엇인가가 살아 있고 불타며 빛난다는 지각을 가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비추고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우리 영으로 오셨음을 뜻한다(요 3:6)(위 책).
#비록 여러분의 `영이 살아났다 할지라도 나는 여러분의 생각이 주님으로 적셔지지 않고 여러분의 감정이 주님으로 침투되지 않았을까 염려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불타는 등을 갖고 있지만, 많은 사람이 그들의 그릇에 기름을 예비하고자 하는 갈망이나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구원을 받았고 그들 안에 주님을 소유하고 있다. 비록 그들의 영이 불타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평강 중에 있지 않다. 그들은 기름이 부족하기 때문에 여전히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등에 불타는 약간의 기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 존재의 모든 속 부분 안에―그들의 생각, 감정, 의지, 및 양심 안에―여분의 기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이 등 안에 기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혼 안에서 여전히 커다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그들의 영 안에는 주님이 계시지만 그들의 혼 안에는 그렇지 않다(위 책).
#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여러분이 영원을 위한 구원은 받았기 때문에 구원에 관하여는 여러분에게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혼인 잔치에서의 여러분의 몫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혼인 잔치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으며, 여러분이 그것을 잃느냐 얻느냐는 여러분이 지혜로우냐 어리석으냐에 달려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여러분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느냐에 달려 있다. 여러분이 지금 대가를 지불한다면, 여러분은 그날 상을 얻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오늘 대가를 지불한다면 그날 상을 얻을 것이지만, 그날에는 여러분이 대가를 지불할지라도 상을 얻지 못할 것이다.
# 그것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과 매우 비슷하다. 여러분이 공부를 잘하여 과정을 이수한다면, 여러분은 졸업할 때 상을 받을 것이다. 여러분이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낙제하고 졸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럴 때 여러분은 여러분이 낙제한 그 과정을 보충해야 할 것이다. 여러분이 구원받은 한 여러분에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지 말라. 여러분이 거듭났을지라도 여러분에게는 여전히 변화됨이 필요하다.
즉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문제는 지옥 가고 안 가고 등의 죽고 사는 일이 아니라 졸업시 상을 받거나 낙제하는 보상과 징계의 문제인 것입니다. 계속 보겠습니다.
# 지혜로와서 여러분이 죽기 전에 변화되는 것이 더 좋다.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리라. “주여, 나는 당신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당신이 지체하신다면 주여 내가 죽기 전에 변화되도록 나를 도우소서. 나는 변화되지 않은 채 죽기를 원치 않습니다”. 변화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변화된다는 것은 당신의 모든 속 부분이 주님으로 충만되는 것이며, 삼일 하나님의 여분의 몫으로 적셔지는 것이다. (신약의 결론 왕국 31장, 317쪽)
# 우리 모두는 거듭나서 지금 변화의 과정 중에 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변화되는가는 우리가 얼마나 큰 대가를 지불하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가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고자 한다면, 주님은 분명히 우리를 적시고 채우실 것이며, 우리는 그릇 안에 예비된 여분의 기름을 갖게 될 것이고 그분의 다시 오심을 위해 자신을 예비할 것이다. (신약의 결론 왕국 31장, 318쪽)
# 마태 25장 1-13절을 보면, 우리는 깨어 있는 것이 성령으로 충만히 채워지는 것임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온종일 채워져 있지 않다면, 깨어 있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진지하게 생각할 일이다. … 우리는 이것이 회복임을 깨달아야 한다. 구원받은 믿는 이로서, 우리는 그 영으로 채워져서 항상 깨어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매일 우리의 등이 불타고 매일 우리의 존재인 혼이 여분의 성령으로 채워져야 한다. 이 영은 적시는 영이며, 우리는 이 영이 우리의 영에서부터 우리의 혼에 이르고, 심지어는 관통하여 우리의 전 존재를 적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확실히 깨어 있는 사람들이 될 것이며, 그분의 다시 오심을 위해 우리 자신을 예비하게 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앞에서 두 가지 신분을 갖고 있다. 우리는 생명에 있어서 처녀들이고, 주님을 위한 일에 있어서는 노예들이다. 우리는 반드시 생명에 있어서 깨어 있어야 하고 봉사에 있어서 신실하여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예비된 자들이 되어야 한다.
# 만약 우리가 주님의 오늘날의 움직이심에 진지하다면, 우리는 매일 아침 마땅히 그 영으로 채워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죄들을 자백해야 하며, 또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우리 영 안에 오신 그 영은 값없이 주어졌지만, 우리의 전 존재, 특별히 우리의 혼을 채우고 적시는 영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당신이 대가를 지불함으로 사야 하는 것이다.(주님의 현재의 움직이심을 실행하는 길, 영문판 104-105쪽)
'우리 영 안에 오신 그 영은 값없이 주어졌지만, 우리의 전 존재, 특별히 우리의 혼을 채우고 적시는 영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즉 영의 거듭남은 주님의 은혜로 값없이 얻는 구원이지만 우리의 생각, 감정, 의지가 변화를 받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함' (마16:24)과 '그리스도를 얻음'(빌3:8)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 보겠습니다.
#'그분과 같이 들어가는 것은 주님이 임하시는 동안 부활한 믿는 이들이 공중으로 휴거되는 것을 언급한다(살전 4:17). 10절에 있는 혼인 잔치는 어린양의 혼인 만찬(계 19:9)인데, 그것은 그분이 오시는 동안, 즉 그분이 임하시는 동안 공중에서 베풀어질 것이다(살전 4:17). 그것은 왕국이 나타나기 전에 예비된 믿는 이들, 즉 죽기 전에 성령의 충만으로 준비되었던 믿는 이들에게 주는, 주님과 함께 누리는 상으로서 베풀어질 것이다. 예비된 자들이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간 뒤에는 문이 닫힌다. 이것은 구원의 문이 아니라 주님의 혼인 잔치를 누리는 누림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렇습니다. 혼인잔치의 문은 구원의 문이 아니라 주님의 혼인 잔치를 누리는 누림 안으로 들어가는 문인 것입니다.
# 그들이 주님께 문을 열어달라고 청했을 때, 주님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알지 못한다 함은 누가복음 13장 25절과 요한복음 1장 26절, 31절, 8장19절에서처럼 인정하지 않고 시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미련한 처녀들은 등에 불을 켰었고, 주님을 맞으려고 나갔고, 죽었고 부활했고 휴거되었지만, 성령의 충만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데 있어서는 늦었다. 이로 인해 주님은 그들이 그분의 혼인 잔치에 참예하는 것을 인정하거나 승인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은 시대적으로는 이 상(賞)을 놓쳤지만, 구원은 영원히 잃지 않는다. 그들에게 알지 못하노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은 “나는 너희를 좋게 여기지도 않고 너희를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땅 위에서 생활했던 방식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또 너희가 너무 늦게 온 것도 인정해 줄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왕국 잔치의 누림에서 거절된다. (마태복음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64, 745-747쪽)
# 나는 기름을 사기 위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의 혼을 처리해야 했다. 어떤 사람과 농담할 수 있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때에 몇 마디 농담을 한 뒤에는, 정죄함이 있었다. 나는 대리석 조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다.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의견을 갖고 있다. 하지만 많은 때 나의 의견을 표현하려 했으나, 기름을 사는 것에 의해 제재를 받았다. 많은 때 이러한 관점이 나의 매일의 생활에 영향을 주었다. 아내와 말다툼하면서 더 많은 영을 얻을 수 있는가? 어떤 특별한 곳에 가면서 더 많은 영을 얻을 수 있는가? 어떤 곳에 가고자 할지라도, 내 안에서는 평강이 없다. 요점은 바로 우리의 매일 매일이 각 방면에서 기름을 얻는 하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부터 기도해야 한다. “주여, 깨어 있음에서 빗나가게 하는 어떤 일도, 기름을 사는 것이 아닌 어떤 일도 행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언제나 어떤 경우에나 기름을 사기 원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는 시간을 낭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 많은 날 저녁 때에 나는 나의 모든 시간이 영 안에 있지는 않은 것에 대해 뉘우쳤다. (주님의 현재의 움직이심을 실행하는 길, 영문판 136-137쪽)
다음은 '깨어 있는 다는 것'(마25:13)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말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 깨어 있다는 것은 다만 그분의 오심을 주의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깨어 있다는 것은 당신이 기름을 구입함으로 자신을 예비하는 것이다. 매일 우리는 약간의 기름을 사야 한다. 우리의 영적인 변화는 매일의 문제이며 일생이 걸리는 문제이다. 매일 조금씩 축적됨이 있어야 하며, 우리 존재에 얼마의 기름이 더해져야 한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기름을 사기 위해 자신을 훈련하는 이러한 합당한 훈련 가운데 있지 않았다. 갓난아이는 매일 매일 먹음으로써 소년이 된다. 이 소년은 그가 먹고 소화시킨 모든 음식들의 축적, 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신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도록 휴거 될 자격을 갖추려면 긴 시간 동안 영적 기름을 축적하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 시간부터 당신은 매일 매일 당신의 그릇에 기름을 사서 담아야 한다.
#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텔레비전을 보는 것, 신문을 읽는 것, 운동 경기하러 가는 것 혹은 세상 오락에 빠지는 것에 관해 규제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또한 다만 어떤 것이 성경적인가 아닌가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우리가 기름을 사느냐의 문제이다. 당신은 기도하지 않지만, 텔레비젼은 본다. 기도하지 않지만, 신문은 읽는다. 또, 기도하지는 않지만 운동은 한다. 당신의 매일의 생활가운데에는 많은 ‘않지만’이 있다. 당신은 이유 없이 그냥 기도하지 않는다. 당신은 죄 된 것은 어떤 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열 처녀의 비유가 보여 주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를 범했는가에 따라 주님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그릇에 얼마나 많은 기름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영 안에, 등 안에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은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혼을 적시는 그 영을 얻는 것은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혼을 적시는 성령을 얻고자 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혼을 처리함으로써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 신약에서 깨어 있음은 기도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에베소서 6장 18절은 우리가 기도에 깨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기도생활을 위해 주의하며 깨어 있을 필요가 있다. 18절에서 “이를 위하여 깨어”라는 말은 앞의 기도와 간구를 가리킨다. 기도하는 것 외에는 기름을 얻을 다른 길이 없다. 만약 기도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당신이 기름을 사기 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더 많은 영을 받아들인다.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어느 정도의 그 영을 더 얻었다는 깊은 느낌을 갖는다. 다른 많은 일들을 위해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기도하는 데 우리의 시간을 드리는 것이 기름을 얻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주님의 현재의 움직이심을 실행하는 길, 영문판 135-137쪽).
'신약에서 깨어 있음은 기도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 때가 악하므로 우리는 반드시 시간을 아껴야 한다. 이 악한 시대(갈 1:4, 헬라어 원문)는 매일 매일이 우리 시간을 파괴하고, 손상시키고, 망쳐 놓는 유독한 것들로 가득 찬 악한 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모든 가능한 기회를 붙잡음으로 시간을 아끼기 위해 지혜롭게 행해야 한다. 모든 기회를 붙잡지 않는다면 우리의 시간은 낭비될 것이며, 많은 악한 것들이 우리를 미혹하고 좌절시키기 위해 들어올 것이다. 우리는 전화 통화하거나 편지나 방문객들에 의해서도 미혹될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누리고 있을 때 갑자기 소극적인 전화 통화로 말미암아 공격받을 수 있다. 세월이 악하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모든 기회를 활용할 수 있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 술 취하는 것(18절)은 육체 안에서 충만케 되는 것이고, 반면에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서 충만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충만에 이르기까지(3:19), 그리스도로 충만케 되는 것이다(1:23). 육체 안에서 술 취하는 것은 우리를 방탕하게 만들지만 하나님의 충만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로 충만케 되는 것은 말하고, 노래하고, 시로 찬미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서로서로 복종함에 있어서 우리를 그분으로 넘쳐흐르게 한다. 날마다 우리는 영 안에서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충만케 되어야 한다. (에베소서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51, 469-470쪽)
# 마태복음 25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받아들이는 문제를 다루는 것도 아니며, 성령이 그분의 종에게 임하여 그들로 영적인 은사를 얻게 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릇 안에 여분의 기름의 문제로서 … 그 영의 끊임없는 기묘한 공급으로 말미암아 빛이 유지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 나는 우리의 중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말하는데,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의 차이는 단지 이 점에 있다. 당신이 만일 슬기로운 사람이라면 조금 더 일찍 이 풍성을 추구할 것이지만, 만일 미련한 자라면 나중으로 미룰 것이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부모요 또 어떤 사람은 자녀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성격에 있어서 조금 다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자녀는 즉시 순종하나 어떤 자녀는 미룸으로 순종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일 진실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당신이 충분히 강하지 못하여 그에게 순종을 회피할 여지를 준다면, 사실상 순종하기를 미루던 그 자녀가 슬기로와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미루기만 하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말이 운명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이어서 결국 반드시 순종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 즉시 순종한 자녀가 당연히 더 슬기로운 사람인 것이다.
#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만일 별것 아니라면 당신이 회피하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 어리석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치 않는 분이시고 변치 않는 뜻을 가지셨으므로 우리는 마땅히 슬기로운 사람이 되어 세월을 아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릇 안에 여분의 기름을 공급함으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엡 3:19) 되는 것이다.
# 이 비유가 우리의 모든 문제에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성경은 미련한 자가 어떻게 기름을 사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성경의 어떤 구절에서도 그분이 결국 그분의 모든 자녀들을 성숙한 단계로 이끌도록 어떤 진일보적인 절차를 취하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우리가 관심할 바가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관심하는 것은 처음 익은 열매이다. 우리는 다만 전진하도록 자극을 받을 뿐, 전진하지 않을 경우 발생하게 될 일을 추측하는 것이 아니다.
# 당신이 회피하거나 도망한다면 성숙될 수 있는 길은 없다. 회피한다면 성숙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지혜는 시간과 관련이 있다. 슬기로운 사람은 세월을 아낀다. 나의 만년필에 잉크가 가득 차 있어 내가 언제든지 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슬기로운 사람은 주님과 합하여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것을 그분께 드리고 합당한 그릇이 되어 언제든지 그분이 쓰시게 한다.
# 사람이 영적인 일을 깨닫고 주님을 따라 전진하기 시작할 때에 나는 마음속에서 이러한 것을 느낀다. “아 그들이 오 년 일찍 이 일을 보았더라면!” 우리가 전진할지라도 시간은 너무도 짧으므로 이 같은 간절함이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얻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주님이 반드시 무엇을 얻으셔야 하는가의 문제임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주님은 잘 예비된 그릇을 얻기를 원하신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이 세대가 악하기 때문이다”(엡 5:16). 오늘날 일반적인 그리스도인 가운데의 상황은 급박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워치만 니 전집 39권, 좌행참 43쪽)
안토니오 신부의 열처녀 비유 해석
&lpar안토니오 신부님 피정 강이 순서대로는 아니지만 오늘 복음이랑 겹쳐서 먼저 올립니다.&rpar
우리는 복음에서 열 처녀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무엇이 비유입니까? 비유란 천국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지상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비유의 언어는 매일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상의 이야기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느님 나라의 특징이 무엇인가? 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비유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열 처녀의 비유는 천국이 지니고 있는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까?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리석지 않고 지혜롭게 기다려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 물건 등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살펴봅시다. 먼저 신랑이 오는 것에 대해 살펴봅시다. 누가 신랑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가 도착하면 이제 잔치가 베풀어집니다. 열 처녀와 등잔, 기름 등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신랑, 잔치, 열 처녀, 등잔, 기름 등이 나오는데, 각각이 무엇을 상징합니까?
신랑이 오는 것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상징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늘 혼인 잔치에 비유합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모릅니다. 천국은 전혀 상상하지 못할 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 신랑을 맞는 신부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이 비유에서 신랑을 맞을 열 명의 처녀가 있습니다. 두 부류의 처녀들입니다. 하나의 부류의 처녀들은 현명하고, 다른 하나의 부류의 처녀들은 어리석습니다. 이들이 누구를 상징합니까? 지혜로운 처녀들은 진정으로 믿는 참 신자들입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겉으로만 믿는 것처럼 보이는 가짜 신자들입니다. 거짓된 믿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혼인 잔치를 살펴봅시다. 당시 유다인들의 혼인 잔치는 오늘날 우리의 혼인 잔치와는 다릅니다. 결혼식 날 신랑은 친구와 함께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결혼식장으로 갑니다. 결혼식을 하는 장소는 불과 1 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직선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멀리 돌아서 시간을 끌다가 늦게 도착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보통 행진을 하고, 가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춥니다. 친구들이 서로 농담도 하고, 그 부부를 치켜세워 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신랑은 보통 해가 지기 전에 결혼식장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늦게 가기도 합니다. 거의 자정 때나 되어서 도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을 재미로 여기는 것이지요. 시간을 더 많이 끌면 신부가 더 많이 기다려야 하니까 그것을 재미로 여기는 겁니다. 신부가 기다리는 열망을 더 크게 갖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신랑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처녀들을 봅시다. 5 명의 처녀는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고, 5 명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등잔을 지니고 있습니다. 등잔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믿는 이의 믿음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증거와 체험이 담겨 있는 믿음입니다. 그들은 등잔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등잔에 기름을 채워야 합니다.
기름은 믿음의 행동, 그 행동의 결과입니다. 우리의 자선 행위나 선행 등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에는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모두가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처녀와 같습니다. 우리는 많은 좋은 것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부모로부터 신앙을 받았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말합니다. “왜 우리가 짐스럽게 기름을 준비해서 가지고 갑니까? 신랑이 일찍 올텐데 말입니다. 그가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것이니, 기름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기만족의 신앙입니다. 일요일에 성당에 가고 성지 순례에 가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안주에서 벗어나라!”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과소평가한 겁니다. 자기 식으로 예수님을 평가했습니다. 여분의 기름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여분의 기름은 성령께 의탁드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머무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기쁨에 차서 기름을 준비하고 기다리게 됩니다. 신랑은 예기치 않은 시간에 와서 문을 열라고 외칩니다. 때로 아주 늦은 시간에 오는 겁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늦은 시간에 신랑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서야 기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지혜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빌려달라고 합니다.
열 처녀는 겉모습으로 보면 거의 같게 보입니다. 모두 초대를 받았고, 모두 등잔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차이는 신랑이 왔을 때, 드러납니다. 다섯 명은 기름이 있고, 다섯 명은 기름이 없습니다. 기름이 없는 사람은 잔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아무도 다른 사람이 준비시켜 주지 않습니다. 기름은 스스로 준비해야 합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 지식인들을 위한 가르침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준비를 스스로 해야 합니다. 혼자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교회가 준비해 줍니다. 은총을 베풉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준비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준비해야 합니다. 어떻게 준비할 수 있습니까? 믿음의 삶을 살면서 그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은 미리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행동으로 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시간에 다시 오십니다.
우리가 언젠가 예수님을 만날 것을 압니다. 문제는 오늘, 바로 지금 예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은총의 지위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지금 죄 중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자기 안주에서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깨어 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없습니다.
튜린을 방문하신 분은 성 도미니코 사비오를 아실 겁니다. 돈 보스코 대성당에 그의 유품이 있습니다. 성 도미니코 사비오는 어린 나이가 죽은 성인입니다. 그가 친구들과 함께 놀고 있었습니다. 친구 중의 하나가 다른 친구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약 오늘 죽는다면, 너는 무엇을 할래?” 한 친구는 자기는 사제에게 달려가서 고백성사를 보겠다고 했습니다. 다른 친구는 자기는 부모님께 가서 작별 인사를 고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친구는 집으로 가서 배부르게 음식을 먹겠다고 했습니다. 도미니코가 말했습니다. “나는 그냥 하던 대로 놀겠다.”고 답했습니다. 그 친구가 화가 나서 다시 물었습니다. “너, 정말 오늘 죽으면 뭘 할 거야?”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계속 놀 거야.” 친구는 도미니코가 자기를 놀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린 도미니코의 대답의 의미는 그가 언제라도 준비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는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은총 지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린 성인은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미사 안에서 청합시다.
늘 기름을 준비하고 있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 당신이 오실 때, 우리는 당신을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름을 준비하여 가지고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과 함께 잔치를 즐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루터와 안토니오 신부님과의 다른 의견
저는 루터의 이런 해석이 과도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루터는 아가페의 사랑과 은총(은혜)를 너무 강조하면서 은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것을 가지고 선을 행하려 했기에 구원을 못받았다는 것입니다. 즉 안토니오 신부처럼 선행을 추구하는 믿음을 가지면 구원을 못받는다고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개신교적 전통에 친숙한 저이지만 오히려 안토니오 신부님의 해석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즉 슬기로운 처녀나 어리석은 처녀나 모두 그리스도의 신부(처녀), 믿는자이나 어려석은 처녀들은 무엇인가 부족한 자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안토니오 신부는 어리석은 처녀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행동하는 믿음이 부족한 처녀라고 생각하는데, 이 해석이 옳은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수업시간에 논쟁이 있고, 다른 종교적 전통에서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기에, 잘 몰라서 여쭈어 봅니다. 가르쳐 주시기를 바라며 ?
열처녀 비유와 가톨릭 문화
마태복음 25장에는 ‘열 처녀’가 등장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하늘나라를 설명하는 비유 중의 하나이다. 열 처녀 중에 다섯은 등잔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가득 담고 신랑을 기다리는 ‘슬기로운 처녀’이고, 다섯은 등잔은 있되 기름이 준비되지 않은 ‘미련한 처녀’들이다. 이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은 왔고 슬기로운 처녀들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간다. 미련한 처녀들은 잠긴 문 앞에서 하릴없이 문을 두드리며 ‘주님, 주님, 문 좀 열어주세요’ 라고 간청하나 신랑은 매정하다. ‘분명히 들으시오. 나는 당신들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이 비유의 마지막은 준엄한 경고문이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 그래서인지 열 처녀의 비유는 기름을 채워두고 그 날을 준비하는 ‘깨어 기다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흔한 해석으로 ‘기름’은 믿음이나 선행일터이고 ‘그날’은 죽음으로, ‘혼인잔치’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종말론적인 해석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우리에게 ‘그 날과 그 시간’을 환기시키며 미지근한 믿음과 부족한 선행에 대해 돌아보며 영적 게으름을 일깨우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돌아보니 그동안 미사참례 중에 이 복음으로 강론하는 우리교회의 해석은 대부분 신자들을 ‘미련한 처녀’로 규정하고 야단맞았던&lpar?&rpar 시간으로 기억된다. 정말 우리 모두가 미련한 처녀일까?
신학은 정형화된 진리가 아니라 시대와 문화에 맞는 해석이라고 한다. 발상을 전환해서 이 비유를 달리 해석해 보고자 한다. 미련한 처녀가 아니라 ‘슬기로운 처녀’로. 이렇게 생각하도록 한 개신교의 전례음악 중에서 필립 니콜라이의 칸타타를 인용해 본다.
복음 내용을 전하는 음악형식의 전례곡 중 교회 칸타타는 개신교에서 유래된 형식인데 기존 민요리듬에 복음을 내용으로 하여 대중에게 다가간 전례음악이다. 이것을 코랄&lparchoral&rpar이라고 한다. 유명한 ‘마태수난곡’ 같은 바하의 칸타타도 코랄형식이 들어있는 전례음악이었다. 이 코랄 중에 필립 니콜라이&lparPhilipp Nicolai 1556&tilde1608&rpar가 만든 ‘깨어 있어라’ 라는 곡이 ‘열 처녀의 비유’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그는 이 곡을 7개의 노래로 만들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1. 깨어 있어라 2. 그가 온다 3. 언제 오시나요?&lpar신부&rpar / 나는 간다&lpar신랑&rpar 4. 시온아, 저 청지기의 노래를 들어라 5. 내게 오시어 나를 신부로 택하리니 6. 나의 친구, 너는 나의 것&lpar신부&rpar / 나는 너의 것&lpar신랑&rpar 7. 영광과 승리
이 노래는 신부는 여자가, 신랑은 남자의 목소리로 쉬운 리듬을 반복하면서 내용을 전달하는데, 두 남녀의 목소리는 ‘아가서’의 농밀한 사랑의 기운을 품고 있다. 즉 신부는 애타게 신랑을 기다리는 준비된 ‘슬기로운 처녀’이다. 개신교의 해석은 로마서의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마르틴 루터의 사상을 이어받아, 자신들을 이미 믿음이라는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로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혼인잔치라는 축제를 앞둔 설레이는 처녀의 마음을 노래에 담았다. 축제에 담긴 춤과 노래와 음식과 의장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더구나 혼인잔치라면 이 모든 것의 최고치를 지향하지 않겠는가. 이에 반해, 우리 가톨릭은 어떤 해석을 하는가! 우리들은 아직 기름을 채우지 못한 ‘미련한 처녀’이기에 문앞에서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다. 오늘도.
이제 이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를 두고 가톨릭 문화를, 문화의 복음화를, 왜 신문과 매체를 통해 문화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문화의 복음화가 말잔치로 끝나는지 생각해 본다. 쉽게 풀어가기 위해 초등학교 교실을 생각해 보자. 어떤 학생은 선생님의 사랑을 받는 예쁜 학생이고, 어떤 학생은 늘 지적을 받는 아이이다. 자신이 사랑을 받는다고 느끼는 학생(슬기로운 처녀)은 노래를 해도 더 자신감 있게 하고, 그림을 그려도 더 열심히 그려낸다.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을 가진 사랑받는 아이는 글을 써도 당당하게 써낸다. 그러면 선생님께 더욱 칭찬을 받는다. 노래와 글과 그림과 놀이와 행동이 문화라면 사랑받는 아이의 문화는 풍성할 수밖에 없다. 늘 지적을 받는 아이(미련한 처녀)는 아직도 반성문을 쓰는 중이다. 반성문을 쓰며 노래할 수 없고, 화사한 색감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그의 글은 항상 ‘이렇게 잘못했고, 노력할 것이고, 남을 돕지 못했고, 나는 나쁜 아이였습니다’ 라는 표현밖에는 할 것이 없다. 그 미련한 처녀아이가 오늘날 가톨릭 신자는 아닌가? 그들은 눈에 띌 것이 없는 착하고 순한 아이들, 하지만 결코 혼인잔치에 들어 갈 수 없는 ‘미련한 처녀’는 아닌가? 스스로를 미련한 처녀로 규정하여 늘 기름사러 다니는 꼴이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아닌가? 문화를 풍성하게 창조하고 즐기는 역할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빼앗기고 혹시 신랑을 혹독한 분으로 알고 달란트를 묻어 두는 ‘악하고 게으른 종’은 아닌지, 우리 교회문화가 그렇게 만들지는 않는지 함께 생각해 보고 싶다.
가톨릭 문화원 회지 11월 호 <;문화사랑방>; 원고입니다.
http://cafe.daum.net/antiultari/2rxo/2106?q=%B8%B6%B8%A3%C6%BE%20%B7%E7%C5%CD%BF%CD%20%BF%AD%C3%B3%B3%E0%20%BA%F1%C0%AF&r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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