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의 주를
교회의 여러 전승 중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은 오늘날 많은 이들에 의해 받아들이기 매우 힘든 진술 중의 하나로 간주된다. 똑같은 이유에서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이러한 신앙 고백적 표현에서 신앙의 합법화를 위한 결정적인 기준을 찾는다. 예수에 대한 양측 입장의 이런 진술이 일치하고 있는 점은 예수의 본질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주장한다는 것이다. 한 쪽이 이 초자연적인 요소를 거절하거나 의심스럽게 생각한다면, 다른 한 쪽은 이 주장을 확신함으로써 양측이 구별된다. 이런 주장은 예수의 평면적 인간성을 신화론적으로 입체화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상은 예수를 우리와 같은 한 인간으로서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적 모습으로 위장된 예수의 초지상적 본질이라는 표상은 현대의 현실성 이해와 불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원시 기독교의 칭호를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이들을 다음과 같이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본다. 즉 이러한 의심은 기독교 전승에서 핵심적으로 작용한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놓쳐버린 것이라고 말이다. 이러한 의심은 훨씬 적절하게 평가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렇게 의심스러워하는 생각은 예수의 초월성만 강조함으로써 거부된 전통적 방법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특색에 대한 근원적인 의미를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결과다. 이미 지적된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전통적 표상을 초자연적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이 칭호의 동기를 알아낼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 칭호를 바로 예수의 인간적 현상에 대한 해석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그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석의적으로 제시된 바다. 이러한 해석은 원시 기독교에서 그 독특한 역사를 보이고 있다. 신약성서 본문의 최종 형태로부터 시작해서 예수에게 소급되기까지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에 대한 기독교적 논증이 형성된 일련의 시기를 추론할 수 있으며, 또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양식(樣式)에서 표현되고 있는 동기들을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양식을 이해해가는 변화도 역시 단순히 자의적인 게 아니라, 예수등장과 그의 역사에 내재한 독특한 사실로부터 동기화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독특성의 고유한 의미는 이러한 해석사에서 중요한 문제다.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Gottessohnschaft Jesu)이라는 말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말을 지지하는 전통적 입장이나 회의하는 입장이 자칫 빠지기 쉬운 오류는 예수의 초월성을 이것과 연결시키려고 한다는 데에 있다. 판넨베르크는 이 신앙 고백적 표현이 오히려 예수의 인간적 현상에 대한 해석이라고 본다. 이 칭호의 전승사를 통해서 그 사실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설명이 아래에 전개되어 있다.
처음부터 ‘아들’로서의 예수라는 특징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생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아들이라는 칭호에서 핵심적인 요소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선포가 다시 선포자에게 되돌아 왔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가 그렇게 한 것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그럴듯하게 말한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이것은 예수의 독특성이었다. 예수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독특한 언급을 통해서 제자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했다. 이것은 복음서에 있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 가르침에서 예수는 오직 ‘아들’로서 자신의 특색을 드러낸다. 이러한 특색은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선포함으로써 그의 공동체가 이에 상응해서 그를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에서 가장 명백하게 설명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물론 아들로서의 예수에 대한 명백한 언급이 그를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간주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성격들을 갖는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 칭호에는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칭호는 이미 전통이었다. 이 칭호는 메시야 칭호와 거의 같은 의미였다. 시편 2편에 부분적으로 그 흔적을 보이고 있는 유대 왕의 즉위식에서 야웨는 (기름부음 받은)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너는 내 아들이니, 오늘 내가 너를 증거한다(시 2:7). 여기서 왕의 육체적 뿌리가 야웨와 연결되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中및 新제국의 에집트에서는 왕들이 神 레(Re)의 육체적 아들들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시편 2편에서는 분명하게 양자삼기가 언급되고 있다. 야웨의 ‘아들’로서 왕은 야웨의 위임으로 세계통치를 받아들인다(시 2:8, 110:1). 이러한 생각은 원시 기독교에서 예수에게 적용되었다. 바울은 로마서 1장3절 이하에서 이미 예수에게 적용된 이러한 고백양식을 인용한다. 말하자면 예수는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로 인해서 ‘능력적인 하나님의 아들’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부활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격을 갖게 되는 시점으로, 또한 양자삼기의 시점으로 작용한다. 다른 한편으로 후기 전통에서 이 시점은 예수의 세례로 소급되었다. 마가복음 1장11절에 따르면 예수가 세례받을 때 시편 2:7 말씀이 하늘에서 그에게 들려왔다. 여기서 예수는 메시야의 공식적 활동을 이미 시작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발전이 계속되는 상황과 마주치게 된다. 즉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근원을 예수의 탄생에까지 소급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는 1장35절에서 예수는 하나님 이외에 그 어떤 인간적 아버지가 없다고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칭호를 자세하게 설명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의 근원이 계속적으로 예수에 관한 초기 이야기로 소급되고 있는 이러한 전통이 뜻하고 있는 관심은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해명될 수 있다. 즉 예수는 이미 하나님에게서 그 권능을 위탁받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도록 위탁받은 자라고 말이다. 이러한 관심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한다 하겠다. 예수의 부활은 부활 이전에 발설한 예수의 말을 확증했으며, 그 말을 추가적으로, 또한 소급해서 합법화 했다는 것을.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근원적으로 예수가 육체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특징화하는 게 아니었으며, 또한 예수를 일종의 신적인, 초인간적인 존재로 그리는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린 유대의 왕은 확실히 한 인간이었다. 유대적 전승 영역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예수의 기능만을, 즉 하나님의 세계통치를 실현하기 위한 그의 개입을 특징적으로 말한 것뿐이지 그의 본성(Natur)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이 헬라적 표상영역에서는 달랐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인간 예수에게서 ‘일어난’, 그러나 그와는 구별된 초인간적-신적 본질(Wesen)로 특징화 되었다. 이러한 신적 본질이 뜻하는 바는 인간적 형태를 취하기 위해서 육체 가운데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바울은 로마서 8장3절과 갈라디아서 4장4절을 통해서 이를 밝히고 있다. 사도신경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의심 없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선재적인, 즉 예수의 지상적 탄생 이전에 하나님의 영원성 가운데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본질로서 말이다. 이 본질은 예수 탄생에서 인간적 형태를, 그리고 인간적 본질을 취한 그것이다.
선재성이라는 사상을 받아들이기에 앞서 우리는 우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언급하는 사도신경의 사유에 담긴 특별한 뉘앙스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한다. 신약성서에서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를 특징짓는 이러한 표현은 오직 요한(3:16)에게서만 사용되었다.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것이다. 예수 이외에 하나님은 어떤 다른 아들도 두지 않았으며, 자기 통치의 그 어떤 위탁자나 대리자도 두지 않았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수행하는 유일한 자로서 예수는 세상 창조의 중재자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는 니케아 신조의 언급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명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사상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에 펼친다는 사실에서 이해될 수 있는 문제다. 그렇다고 역사적 예수와 완전히 분리된 하나님의 본질을, 즉 세계가 시작할 때 그 어떤 특별한 기능들을 감당했을 수도 있는 그런 본질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때,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세계 창조의 중재자다. 우리는 앞서 말한 대로 창조가 마지막으로부터 일어난다는 중요한 사상을 기억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그가 모든 사물의 마지막이며 모든 사물의 마지막이 예수 안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는 한에서 창조의 중재자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 마지막이란 세계의 참된 본질을 결정하는 요인이다. 예수가 종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모든 사물은 그에게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이 마지막이 그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마지막은 그에게서 연유된다. 예수는 역사의 중심이나 혹은 마지막, 그리고 그 안에서 창조의 중재자라는 사실 때문에 세계를 통치하는 하나님의 일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말은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와 더불어 드러난 것이 만물을 포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예수를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 그리고 유일한 아들로 간주하는 분기점이기도하다.
예수가 하나님의 외아들이기 때문에 그는 홀로 하나님의 계시를 수행한다. 아들과 또 아들이 계시해주는 자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마 11:27, 요 14:6 참조). 따라서 말씀의 충만한 의미 속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도 역시 유일한, 한 아들을 통한 계시이다.
신학적 인식에 관한 기초적 연관성은 확실히 역으로 진행된다. 사실상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그 계시의 유일성은 예수가 독생자라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서, 즉 우리의 인식과정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는 언급은 역으로 하나님이 그 안에서 계시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표현일 뿐이다. 분명히 인간의 삶과 항상 연관되어 있는 신적 현실성이 자기를 드러내는 길은 여러 가지다. 인간들은 자기 실존을 실행할 때만 세계를 현존하도록 이끌어가는 현실성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인간들과 관계를 가질 때 이미 전제되어 있다. 이렇게 인간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사건에서 신적 현실성은 인간에게 여러 방식으로 알려진다. 종교사는 철저하게 이에 대한 흔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알림은 대개가 무언가 잠정적이며, 또한 그와 같은 현실성과 다른, 그리고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 해체될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서 이러한 알림은 신의 최종적인 자기 계시*일 수 없다. 이 알림이 유일하고 최종적인 진리를 요청하게 되는 곳에서도 역시 이 알림을 해체하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 다시 그 성격을 상실한다.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사신(使信)은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최종적인 성격을 확보한다. 그 사신이 최종적이라는 것이 보장됨으로써만이 아니라 그 내용이 독특하다는 점에서도 역시 그렇다. 이 내용이 독특한 이유는 예수의 사신이 인간으로 하여금 유일하고 독자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의 사신은 신적인 자기알림이 발생하는 그 어떤 미래를 통해서도 추월당하지 않는다. 예수는 따라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결정을 그 사신에 대한 인간 각자의 태도에 따라서 선취할 수 있었으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나 용서를 선포할 수 있었다. 이러한 궁극적인 ‘종말론적’ 전권을 요구함으로써 그는 결국 십자가를 지는 데 까지 이르게 된 사건을 불러일으켰으며, 제자들의 경험에 의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전권을 부여받는 자로 확증되었다. 이런 확증은 죽은 자로부터 부활함으로써, 또한 하나님에게서 파생된 그의 삶이 갖는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현실성이 나타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 ‘종말론적’ 성격으로 인한 궁극성에서 예수는 바로 앞서 표현된 의미로 하나님의 계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예수가 아버지라고 부른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원시 기독교적 양식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미래만이 인간 구원을 결정하는 유일한 요인이라고 선포함으로써 예수의 사신이 선포된 곳에서 하나님의 미래가 이미 현재적으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의 미래를 통보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에 기초해서 선포하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인간에게 하나님의 미래를 드러내는 대리자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미래에 근거해서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에 의해 최종적으로 증명되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자기알림을 수행하는 자로서 예수는 우리에게 아버지의 외아들인 바로 그 ‘아들’을 의미한다. 이 하나님은 이러한 사명의 전권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궁극적 결정을 이미 선취한 분을 말한다. 여기서 이러한 진술방식에 담겨진 위탁된, 메타포적인 성격이 또렷하게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양식은 근원적으로 예수의 초자연적이고 육체적인 가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 양식은 자신의 사명과 자신의 역사에서 표현된, 그리고 그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석해주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비유적으로 표현된 ‘아들’이라는 말은 만약 우리가 구약성서의 그 유래를 생각하기만 한다면 전반적으로 이해될만하며 적절하다 하겠다. 우리는 아마 아버지라는 이름이 하나님에게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고유한 경험의 지평에서 언급할 때 아들이라는 이름을 직접 예수에게 적용하지 않으려 할지 모른다. 그러나 마치 기독교 신앙의 역사에 담겨있는 예수현상이 그 어떤 표현도 전혀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거나, 또한 그런 이유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에 어울리는 표현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찾아보아야만 할 선택에 직면해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에게 적절한 표현이 무엇인지 찾는 작업을 항상 거듭해서 처음부터 시작해야 된다는 것은 일종의 착오일지 모른다. 각기 오늘의 기독교인은 본질적으로 역시 예수 현상에 대한 해석 역사인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역사로 돌입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전통에 대해서 비판적이지 않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그는 모든 비판적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그 전통에 가담하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사실을 포기하지 않을 수도 있고, 또한 예수 공동체가 그를 ‘아들’로서 이해했다는 사실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칭호와 예수에 대한 아들 칭호를 비판해보자는 오늘의 문제제기에서도 역시 실질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인정된다. 물론 ‘아들’로서의 예수사건은 오늘의 인식에서 최초 기독교인들과는 다른 지평을 제시한다. 원시 기독교에서 이 칭호**가 이미 예수 사건과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의 인식지평에서 볼 때 이 칭호 자체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현재의 생명체가 전승의 역사에 정렬된다는 것은 이미 전승된 것을 현재와 연결시킨다는 의미이며, 또한 이로써 역사 자체는 현재적 경험의 차원이 된다. 이 경우에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더 이상 초자연적이고 신적 세계의 자명한 형태가 결코 아니라, 예수의 인간적 현실성을 해석하는 연관 가운데서만 오늘의 이해에 적절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자기계시(Selbstoffenbarung)라는 용어는 헤겔 이후로 기독교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학에서 계시는 하나님 자체로 인식된다. 하나님이라는 주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계시 현상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 계시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또한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가 다른 게 아니라 일치된다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로 존재한다고. 판넨베르크의 경우에 이 계시는 보편사적 개념으로 파악된다.
**예수가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는 사도신경의 고백은 어떤 자연과학적, 혹은 사회과학적 사실이라기보다는 해석학적 진리를 드러내는 사건이다. 따라서 신학은 예수가 어떤 해석학적 지평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호칭되었는지, 그리고 지금도 역시 그런 칭호가 유효한지 설명해야 한다. 초대교회의 이러한 해석이 오늘 우리들에게 여전히 진리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당연히 오늘의 현실성 경험에 근거되어야하기 때문에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이 호칭을 순전히 예수의 초월성을 강화시키는 도그마로서만이 아니라 개방된 진리인식의 차원에서 해석할 준비를 갖추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계시자인 예수는 ‘아들’이며, 또한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을 인식하는 일에 매우 밀접하게 관계되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신성을 예수와 분리해서는 실제적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미래가 예수를 통해서 현재적 현실성이 된다는 말이다. 그의 사명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그 사랑을 증명한다. 이런 한에서 예수 자신은 그가 세계와 인류역사의 과정에서 상당히 늦게 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영원한 하나님의 신성에 속한다.
이 인간 예수가 하나님의 영원한 신성에 속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가 갖는 선재성을 뜻한다. 바울은 이미 이 사실을 로마서 8장3절과 갈라디아서 4장4절에서 언급하고 있다. 만약 하나님의 계시라 할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면, 그는 이런 측면에서, 그리고 하나님과의 일치라는 측면에서 인간으로 출생하기 이전에 당연히 하나님의 본질에 속하는 게 틀림없다. 따라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재한다는 언급은 하나님의 계시에서 하나님과 예수가 일치한다는 사실로부터 나온 일종의 귀결이다. 이 계시에서 예수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것은 완결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예수 안에 있는 자기 계시에서 하나님 자신으로서 계시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예수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은 그가 인간적으로 유한하며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시간적으로 제약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원성에 참여한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에게 ‘主’ 칭호가 부여됨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라는 특징이 매우 확실해진다. 이러한 특징적 표현은 원시 기독교 전승이 견지한 고대 기독교의 고백양식이 담고 있는 내용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3절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성령으로 감동하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主, 즉 퀴리오스(Kyrios)라는 단어는 구약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 경건한 유대인이 직접 부르기 힘든 야웨라는 구약의 하나님 이름을 바꿔 쓰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부활 이전의 예수는 단순히 의례적인 대화의 차원에서 ‘주’라고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후에 이런 습관은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바꿔 쓴 ‘주’라는 단어의 중요한 의미로 용해되었다. 왜냐하면 헬라인들은 퀴리오스라는 단어를 그와 같이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이런 과정과 또한 이런 과정에 근거해서 결과적으로 도출된 예수에 대한 언급은, 즉 예수를 신적인 의미에서 主라고 한 언급은 예수가 종말론적으로 보냄 받은 자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따라서 하나님과 하나라는 사실을 통해 정당화되었다. 원시 기독교의 역사에서는 하나님의-아들-칭호보다 퀴리오스라는 칭호가 훨씬 분명하게 예수와 하나님의 일치를 상위적인 개념으로 결정하고 있는 표현방식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유대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수하에 속하는 하부구조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지상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갖는 기능은 피조성의 한계를 벗어나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주로 헬라 영역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신적인 본질로서 이해되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러한 이해가 바울에게서 항상 발견된다. 여기서 예수에게 속한 하나님의 아들 직에 대한 사상은 퀴리오스라는 칭호가 뜻하고 있는 하나님과의 일치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만약 예수에게 속한 하나님의 아들직이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알림을 뜻한다면 이러한 인식의 발전은 분명히 실질적으로 정당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 하나님의 자기 알림이라는 것은 그것의 최종적인 성격에 의해 본질이 결정적으로 성취되는 순간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主라고 믿는 고백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과 내용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여기서 이 두 언급은 언어적 강조점에 따라 사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기도하며, 반대로 서로 다른 의미를 제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는 그것의 전승사적 유래로부터 도출된다. ‘하나님의 아들’ 칭호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예수의 입장을 오직 세상과의 대립적 위치에서 우선적으로 그리고 명시적으로 직접 파악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역으로 퀴리오스, 즉 主라는 칭호는 우선적으로 세상과의 관계가 통치적 의미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과 예수의 일치, 즉 하나님을 향한 예수의 입장이 이 칭호에서 오직 비명시적으로 결정되고, 또한 그 출생에서부터 고유한 그의 의미를 생각함으로써 형성되어가는 중에서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외아들이며 우리의 주라고 언급하는 것을 보면 사도신경은 이미 이 두 칭호를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아들 칭호에 따르면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위치가 설명되는 것이며, 주 칭호에 따르면 우리와 세계를 향해서 그 칭호에 토대를 두고 있는 예수의 위치가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주’로서 예수는 초기 기독교회의 신앙에서 헬라 세계가 알고 있던 여러 종류의 ‘主들’과 관계된다. 한편으로는 헬라 식으로 퀴리오스라는 칭호로 불리운 로마의 카이저가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밀의종교에 볼 수 있는 신적인 것들이 있었다. 그 모든 것들에 대립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퀴리오스로서, 세계의 참된 주로서 선포되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지배당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서 특별히 교회의 선교적 사명은 예수가 퀴리오스라는 징표에 담겨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인해서 초기 기독교 이래로 主라는 칭호는 그리스도를 우주론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의 차원에서 선포해야 한다는 특징을 갖게 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모든 다른 진리를 지양*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진리로 증명되는 그것이다.
*독일어 aufheben은 일반적으로 ‘지양한다’로 번역되고 있지만, 잘못하면 이것이 무언가를 거절하고, 포기하고, 중지한다는 뜻으로만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다. 이 단어는 그런 뜻만이 아니라 ‘위로 올리다’, ‘보관하다’는 등 여러 의미로 사용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主칭호가 다른 진리를 지양할 수 있다는 이 문장의 의미는 다른 진리를 제거한다기보다는 우주론적 기독론 가운데서 변증법적으로 살려낸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오늘 기독교는 타종교나 여타의 진리실행들에 대해서 적대감을 보일 게 아니라 생명의 세계에 이르도록 대화하고 연대해나가는 게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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