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예수 그리스도를
사도신경의 첫 항목*은 인간현존에서 제기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을 다룬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군더더기 없이 언급하면서 예수가 아버지라고 일컬었던 하나님이 바로 전능자로 불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이에 따라서 두 번째 항목도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전망에 근거해서 진술되고 있다.
첫 항목에서 고백된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만 접근될 수 있으며 계시될 수 있다. 이럴 경우에만 두 번째 항목은 실제적으로 전체 신앙고백의 중심을 이룬다. 이것은 특별히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와 맺는 관계에서 분명해진다. 이 관계는 두 번째 항목의 모든 확장된 진술을 각인하고 있는 그것이다.
칼 바르트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두 번째 항목은 실질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신앙고백을 말할 때 예수의 하나님이 문제이지 그 밖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신앙고백의 앞머리에 놓여야만 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신앙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보다 논리적으로 앞서 있었고, 그 기본골격을 형성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양자 사이에 일종의 고유한 상관**이 놓여 있다. 단순하게 순환이라고 묘사될 수 없는 이런 연관이 그 어떤 자리에서 출발하고 있다면, 이 출발점은 당연히 역사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유에서 모색되어야만 할 문제다. 실질적으로 이런 출발점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감당해야할 박탈감에 놓여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마지막을 의식함으로써 자신에게 항상 따라오는 무한한 현실성을, 그리고 또한 종교적 경험의 차원을 향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출발점은 무한한 현실성이 민중들의 종교에서 이미 오랫동안 신적 능력의 활동성으로 경험되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이 무한한 현실성은 인간과 세계가 맺고 있는 삶의 연관을 견인해가고 있는 그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현실성은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의 전승에서 살았던 예수의 경우만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었던 초기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경우에도 역시 전제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서 그 경험이 주어진 다음에, 이제 이렇게 전제된 신적 능력에 대한 이해가 예수를 통해서 새롭게 각인되었다. 완전히 특별한 방식으로 새롭게 규정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가리키는 바는 아버지인 전능자가 곧 그 하나님이라는 말이었다. 우리는 이제 사도신경에서 전제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사유를 결정적으로 각인한 역사적 현상을, 즉 나사렛 예수라는 형태***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사도신경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이라는 세 구조로 짜여져 있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첫 항목이라는 말은 하나님에 관한 부분을 뜻한다.
**기독교 신앙의 특성은 역사적이고 실존적인 예수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동일시되었다는 점에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에 대한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일종의 상관(Wechselbezieung)관계라 할 수 있다. 이 두 신앙의 관련이 어떤 출발점에서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유과정에서 필요하다고 판넨베르크는 생각한다. 그것은 당연한 말이다.
***독일어 Gestalt(게슈탈트)는 모습, 형태, 현상, 사람이라는 여러 말로 번역이 가능하다. 이것은 원래 stellen(놓다)이라는 동사에 뿌리를 둔 단어로서 사물이나 사상의 형태를 말하기도 하고, 혹은 어떤 것 자체의 구조나 체제를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 나사렛 예수 형태(die Gestalt Jesu von Nasareth)라는 말은 역사적 예수라는 인물이 갖는 고유한 사건과 현상 전체를 총칭한다.
나사렛 예수의 소명은 기독교 신앙, 즉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신앙을 말할 때 본질적인 요소다. 이것은 사도신경의 진술을 숙고하는 과정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한 짝을 이룬다는 가장 포괄적인 전망은 무엇보다도 셋째 항목인 성령에 관한 테마에서 심화된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예수에 대한 신앙과 짝을 이룬다는 사실은 예수에 대한 신앙에서만 진리성이 획득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가 시작한 이래로 기독교인이 줄기차게 증언한 바였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인격체인 그분, 즉 씨이저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시대의 인물이며, 70년 유대전쟁의 대 파국 이전 시대에 살던 팔레스틴 계 유대인인 그분이 이후 시대만이 아니라 이전 시대까지 통시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기준이라는 설명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 실질적 진실의 무게를 감당해야만 한다.
기독교 신앙이 이러한 역사적 인격체에 기초되었다는 사실은, 말하자면 기독교 교리나 아니면 그 교리와도 상관없는 그 어떤 것에서가 아니라 이런 특별한 인간에게 기초되었다는 사실은 다른 종교와 비교할 때 극단적이라 할 정도로 취약한 부분이다.
이런 취약성은 두 가지 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선 기독교 신앙이 터하고 있는 예수의 등장과 그의 운명이 보여주는 모든 흡인력은 사실적이며 역사적인 리얼리티로 판단되어도 좋은지에 대한 질문이 거듭 제기된다. 다음으로는 예수의 역사적 상황에 속한 특별성이 파악되면 될수록 어떻게 이러한 특별한 역사적 현상이, 즉 티베리우스 시대에 살던 한 팔레스틴 계 유대인이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적 조건과 더불어 20세기라는 전혀 다른 세계 안에서도 여전히 현존이해와 神이해의 열쇠로 작용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더욱 급박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취약성은 실질(實質)이 불가피하게 담지해야할 양면성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곧 기독교 신앙을 불교와 이슬람교를 포함해서 모든 타종교와 구별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이 역사적 생기(生起)*와 역사적 현상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그런 요소들 안에서 기독교 신앙이 외적으로 출현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본질적 내용이 결정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기독교 사신은 많은 신화적 요소들을 수용할 수도 있었지만 또한 신화의 세계로부터 구별되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곤란한 경우에 직면하게 되었다.
어떻게 영원한 확신과 영생의 축복이 일종의 역사적 인물과 역사적 생기에 기초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역사적 생기에 대한 인식은 최선의 경우라 하더라도 개연성에 불과한 것이며, 더구나 근대 역사연구가 시작한 이래로 분명하게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궁극적인 확신을 우연한 역사적 사실에 토대하고 있으며, 영생의 축복을 최선의 경우에 몇몇 개연성을 중재하는 역사에 기초하고 있다는 이 난점이 기독교 신앙의 기본문제라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어떤 방법으로도 역사적 인물인 예수와의 근본적인 관계를 소홀히 하지 않으려면 이런 기본적 문제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
사실은 신앙을 역사적 인식의 돌발적 사건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시도가 기독교 역사에서 되풀이 되었다. 따라서 예수는 기독교와 더불어 세상에 돌입하게 된 진리를 역사적으로 끌어낸 분이라고 생각되었다. 또 다른 경우에는 오늘날에도 역시 다층적인 차원에서 주장되고 있는 것처럼, 신앙경험에서 예수의 현실성에 대한 어떤 특별한 통로가 있다고 여겨졌다. 이는 곧 부활하고 들림 받은 이와 직접적으로 조우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며, 또한 신앙경험이 나사렛 예수에 대한 역사적이고 사실역사적인** 현실성을 특별하고 자유롭게 인식하도록 중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실역사적 인물인 예수가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적 ‘케리그마’에 대한 신앙, 그리고 새로운 현존이해에 그 본질적 내용이 담겨있는 사신을 믿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점이 주장되기도 했다.
이런 모든 시도들은 기독교 신앙이 사실역사적 인물, 그리고 분명한 사실역사적 생기들과 연결되어있다는 사실로부터 달아나려는 거의 같은 크기의 도피로들이다. 기독교 신앙의 취약성 앞에 놓인 도피로. 이러한 취약성에 맞서 기독교 신앙을 확보하려는 시도. 그러나 이러한 시도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을 기초하고 있는 예수와의 관계가 반복적으로 포기될 뿐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한 번도 이러한 사실역사적 인격체와 다른 그 어떤 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시 기독교의 신앙에 따르면 그 인격체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이러한 세계에 등장했으며, 원시 기독교 신앙에서 들림 받은 主는 이런 사실역사적 예수와 다른 그 어떤 분이 아니다. 따라서 원시 기독교 사신과 신약성서 문건들은 되풀이해서 사실역사적 인격체를 언급한다.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예수에게서 일어난 운명,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언급한다. 복음서 기자들의 문헌이 출현하면서 예수의 지상적 삶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완전히 새로운 생각으로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승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 같이 보이는, 그리고 오직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만 집중한 바울의 사신도 역시 예수의 유일회적인 사실역사적 현상을 신앙의 근본이라고 확신했다. 예수의 부활을 그의 사실역사적 본질로서, 그리고 구체적인 시간 가운데서 십자가에 달린 이에게 일어난 생기로서 간주함으로써 우리의 사실역사적인 사유에서 매우 불편한 문제들이 많이 발생한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 없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들은 예수의 부활을 구체적인 인간에게서 발생한 생기라고 보도하고 있는 원시 기독교의 증언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를 인식하고, 또한 이를 통해 일어난 사태를 받아들이는 일을 적어도 방해하지는 못한다.
*독일어 Ereignis라는 단어는 ‘일어난 일’, ‘사건’을 뜻하지만, 신문보도 처럼 어떤 객관적 사실(Tatsache)이나 사건(Geschehen)이라기보다는 의미가 포함된, 혹은 해석된 현상이기 때문에 생기(生起)로 번역했다.
**Historie은 어떤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역사를, Geschichte는 어떤 의미가 있는 해석된 역사를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단어들이 항상 그렇게 엄격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우리말로는 더더욱 힘들다. 글쓴이의 의도에 따라 구별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역자는 문맥에 따라서 Historie를 Geschichte와 구분하여 ‘사실역사’라고 번역하기도 했으며, 때에 따라서는 그냥 역사라고도 했다. 별 문제는 없으리라고 본다.
앞서 말한 대로 기독교 신앙을 살려내기 위해서 역사적 인물인 예수의 근본적인 의미와 묶여있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보려는 도피로는 순전하게 교의학적인 그리스도像을 사실역사적 문제들과 독립시켜 설계해보려는 시도에 이미 내재해있다. 신학은 단순히 예수에 대한 상이한 신약문헌들을 이해하는 것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만약 사실역사적 인물인 예수에 대한 기독교 신앙이 그 인물의 유일한 특수성과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면, 신학은 신약성서 증언의 배경으로 들어가 예수 자신에 대해서, 그의 출현과 그의 운명에 대해서 되물어야만 한다. 사실역사적 인물의 특수성에 대한, 그리고 그 도정을 표시하고 있는 생기들에 대한 질문은 만약 신화나 전설에 매달리지 않고 오히려 최소한의 확실성이나 개연성에 도달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하고자 한다면 사실역사적 연구를 필요로 한다. 일반적으로 예수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준거에 대한 요구는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다. 왜냐하면 오직 이럴 때만 예수와 전혀 상관이 없거나 아주 미미하게만 상관이 있는 일을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선포하거나 믿는 일을 피하고, 신앙을 오롯이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트만의 순수 케리그마신학*과 달리 케제만 이후 진행된 오늘의 예수연구는 이러한 생각에 근거해서 역사적 예수에 대해 다시 질문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신앙은 게르하르트 에벨링이 언급한대로 예수에게 ‘근거’를 두어야만 한다. 물론 이 경우에 예수 역사에 나타난 사실역사적 실태의 단편적인 문제만을 고려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이미 다른 방식으로 획득된 기독교 신앙의 개념을 예수에게 소급시키고 있다. 오히려 예수 출현과 그의 역사에 나타난 사실역사적 현상이 그의 전체 주변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20세기 사람들이 느끼는 이질감에서 조망되어야만 한다. 이 사건이 있어났다면 이 일이 우리에게 어떤 지속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가라는 점을 진지하게 질문할 수 있다.
*케리그마 신학(Kerygmatheologie)은 대표적으로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신학을 가리킨다. 바르트가 말씀의 객관성에 기초한 신앙을 강조했다면 불트만은 말씀의 주관성에 기초한 신앙을 강조했다. 즉 예수의 역사문제는 기독교 신앙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고 실존적으로 신앙에 참여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참고적으로 ‘케리그마’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구원론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그 믿음과 구원을 뜻한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이런 실존주의적, 신자의 주관주의적, 케리그마적 신앙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그 중심으로 다루기 때문에 신학이 일종의 인간론으로 축소될 위험성이 있다.
예수는 절박한 세계종말을 긴박하게 기대함으로써 자신의 복음선포와 자신의 역사를 확고히 했다. 여기서 언급된 세계종말은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관철되는 그것이다. 예수라는 인물의 이러한 특이성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전환기에 특히 요하네스 슈바이쓰와 알베르트 슈바이쩌에 의해 실행된 신약성서 연구로 인해서 전에 없이 분명하게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런 연구결과로 인해서 금세기의 신약성서 주석이나 또한 교의신학은 계속적으로 그 영향력이 축소되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시각이 오늘날 자연과학에 의해 규정된 세계이해와 부조화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예수의 기대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진 역사진보의 단순한 사실을 통해서, 또한 이에 따라서 그에 의해 기대된 세계종말의 지체를 통해서 오류로 판명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예수의 의미를 현재적 시각에서 복원해내기 위해서 그가 선포한 사신의 ‘종말론적’ 성격을 거듭해서 새롭게 해석하거나 아니면 제거해보려 한 것은 이해할만 하다. 무언가 다르게 해석해 보려는 신학적 동기는 역시 아주 명약관화하다. 신학과 기독교적 경건은 예수현상의 특이성을 기꺼이 있는 그대로 따라가려고 한다.
우리는 예수에 대해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역사 연구는 일종의 몇몇 완성된 예수의 전기를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게 했다. 과거에는 복음서에서 상호 연관적으로 잘 짜인 예수에 대한 전기적 사실보도를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 차례대로 보도된 예수활동의 공적인 사건은 그 어떤 전기적 가치도 지니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다른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개개 전승 단편들은 각기의 상이한 신학적 관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그렇지만 몇몇 본질적인 사건과 실상들은 풍부한 개연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역사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 받은 일, 예수의 등장과 사신의 특이성, 예루살렘에서 집행된 십자가 처형이 여기에 속한다. 또한 추후에 해석되었다는 의미로 예수의 부활을, 즉 가장 오래된 기독교의 이런 주장을 여기에 포함시켜서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예수에 관한 역사 연구의 일반적 판단에 따르면 복음서에 전승된 예수말씀의 상당한 부분이 예수와 맞닿아있는 게 아니라 예수전통의 전설적 기대에 기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출현의 전체성격에 담긴 상을 얻어내기 위한 그 현존적 거점들은 충분하다. 즉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웠다는 기대를 통해서 결정적으로 각인되었다는 말이다. 세계종말과 더불어 임박한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예수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요청했다. 동시에 그는 지체 없이 하나님 통치의 구원에 대한 그의 사신을 받아들이고 이로써 예수와 그 사신의 전달자를 승인한, 혹은 역으로 예수를 받아들이고, 그와 더불어 그의 사신을 승인한 이들에게 그 구원을 설파했다. 인간의 운명은 임박한 하나님의 통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예수는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통치가 무조건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이에 근거해서 구원을 선포할 수 있었다. 또한 예수는 이미 인간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명시적으로 분명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종말론적 희망과 그것에 상응하는 예수의 태도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준거가 됨으로써 그는 유대의 전통적 율법종교와 정반대의 길로 접어들었는데, 이 율법종교는 율법과 율법실행을 도래할 구원에 참여할 준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는 결국 유대교 고위층으로부터 정죄당하고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 유대인이 예수의 부활사신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증언하게 되는 경우에 이 사건은 그에게 역으로 예수에 대한 정죄가 神적으로 파기되었음을 의미했으며, 그리고 예수를 보증하고, 또한 그와 그의 사신을 지지함으로써 미래의 인간 구원과 파멸이 하나님 앞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나님 자신이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확증했다는 전제 하에서 예수는 분명히 인간이 하나님의 통치에 일치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준거로서 인정된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가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하나님의 미래를 위한, 혹은 반대하는 결단 앞에 인간이 직면해야만 한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의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라면, 역으로 예수의 사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보증되었다면, 하나님의 임박에 대한 예수사신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거절하는가라는 문제는 사실상 하나님 자신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거절하는가라는 문제와 다르지 않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사실상 예수 사신과의 일치 가운데서만 가능하다. 인간의 태도가 실제로 예수에 의해 선포된 준거에 상응하든지, 아니면 그의 태도에서 예수사신이 명시적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는 말이다. 궁극적인 문제는, 즉 예수의 사신에 대한 신앙이 내포하고 있는 예수에 대한 신앙은 어떻게 예수가 그에 대한 신앙에 기초한 공동체의 출현과 그 확산을 통해서 모든 神인식의 준거로서 명백하게 작용하게 되는지를 가리키는 방식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신뢰, 그리고 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인 예수 자신에 대한 신뢰는 근대적 의식에 근거해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여전히 명명백백한 가능성인가? 세계종말의 임박에 대한 기대와 하나님의 통치영역에서 일어날 창조의 우주적 변형이 임박했다는 기대는 자연과학의 확실한 결과들을 지향하는 세계인식과 일치하지 않는 게 아닐까? 그리고 예수의 그 기대*는 이미 세계의 종말이 예수 시대가 지난 후에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서 부정되는 것은 아닌가? 따라서 만약 예수를 여전히 확신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열광적 임박에 대한 기대와의 연결고리를 포기하고 예수의 주장을 구체화하려고 시도하지도 말아야만 하는가?
*이 구절은 하나님 나라의 급박한 도래에 대한 예수의 기대(Erwartung Jesu) 및 예상을 말한다. 이에 터해서 원시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들의 시대 안에 실제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즉 예수의 재림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믿은 것 같은 태도를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았으며 예수의 재림도 실행되지 않았다. 대신에 교회가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예수의 기대는 오류인가? 판넨베르크는 곤혹스러운 이 문제를 적당한 말재주로 넘어가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아래의 내용이다.
이 문제를 우리는 두 가지 각도에서 접근해야한다. 첫째로 예수 사신의 고유한 핵심을 현존적 세계 변형인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그의 기대로부터 분리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은 일종의 착각이라는 시각이다. 예수가 자신의 고유한 출현을 통해서 임할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언급한 것은 그 통치의 임박한 미래에 앞서서 던져진 불빛일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예수의 사신은 하나님의 강압적 미래가 매우 긴박하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즉 예수의 경우에 하나님의 사랑은 가까운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기 위해서 주어진 자신의 특별한 사명에서 명백해졌다. 왜냐하면 이러한 선포는 하나님의 통치에 의한 구원에 참여하기 위해서 허락된 하나님의 배려이기 때문이며, 특히 예수가 약속한 무조건적인 용서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예수사신의 모든 내용이 담고 있는 궁극적 기초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그의 현실적 기대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 임박에 대한 기대지평이 떨어져나가게 된다면 그가 스스로 보여주려 한 그 어떤 말이나 생각도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또한 신앙은 더 이상 예수 자신이 아니라 예수 이름에 전가된, 자기가 만든 외형적 像과만 관계를 갖게 된다.
둘째로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예수의 기대가 좌초되었다는 주장은 더 많은 논증이 없는 한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는 시각이다. 즉 예수의 부활에 대한 사신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임박에 대한 예수의 기대는 아직 세상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고유한 인격체에서는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에게서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최종적 구원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유대적 기대가 희망한 영원한 삶의 최종적 구원에 이르는 입구다. 이 사건이 예수에게서 발생했다면 최소한 그의 인격체에서 이미 완성된 것이다. 신적인 권능에 대한 그의 요구는 어떤 임의적인 기적을 통해서 강화되는 게 아니라 그에 의해 임박한 것으로 기대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낼 구원 현실성이 성취됨으로써 강화된다. 이러한 성취는 확실히 그에게서만 발생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취는 여느 약속이나 기대와 구별된다. 반면에 우리가 예수의 부활 사신을 사실로 받아들여도 된다면, 그가 하나님 통치의 임박에 대해서 착각했다고 더 이상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예수에게서 발생한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은 바울이 말했던 대로 우리의 이 세상이 얼마나 오래 존속하는가에 대한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러한 동일한 사건이 예수를 믿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발생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보증한다.
이러한 숙고의 중요성은 우리가 뒤에서 좀더 자세하게 다루게 될 예수 부활에 대한 전승을 어떻게 판단하는가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만 십자가에 죽은 예수에 대한 믿음이 다시 가능하게 되었다고 말해야만 한다. 이것은 그 사건 이후 예루살렘에서 형성된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게 이미 해당되는 말이며, 또한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 후대 사람들에게도 역시 해당되는 말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언제나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예수의 기대에 동참했다. 그러나 어쩌면 오늘날 예수는 묵시론적 열광주의자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의 생각이, 만약 부활 사신이 이를 분명하게 받쳐주지 않았다면 오류로 판명 났을지도 모를 그 기대에 완전히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당연히 부활절 사신도 역시 그것에 연관되어 일어나는 사건과 분리될 수 없다. 부활절 사건의 의미는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에 근거해서 인간에게 특별한 사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에 좌우된다. 예수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언급했는지에 대해서 내적으로 증언할 능력이 없는 한 기독교의 부활절 사신이 주장하고 있는 사건의 특이성은 기독교 사신과 대립하여 제기되었던 원래의 반대 보다 훨씬 강한 반발만 키우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특별한 문제가 벌어지는 와중에서도 오직 부활절 사신만이 예수의 전권에 대한 문제에 대해 책임적으로 답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여기서 말하는 이 문제제기는 십자가처형으로 인해서, 그러나 그것을 뛰어넘어 예수가 그 안에 살았던 임박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뀜으로 인해서 주어진 것을 뜻한다.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통해 예수의 사신(使信)이 명실상부하게 공고해졌다는 전제 하에서 다음과 같은 예수의 요청이 오늘의 인류에게 다시금 제기된다 하겠다. 즉 예수의 사신을 받아들이는가 거절하는가라는 문제는 하나님의 임박을 수용하는가 아니면 거절하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예수의 사명과 인격체에 대한 신앙고백을 제쳐두고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당연히 궁극적인 문제는 예수의 사신에 의존하는 자에게만 유효하다. 그렇다고 이것이 기독교인만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는 그의 팔복말씀 가운데서 고난받는 이들, 무력한 이들, 자비로운 이들, 그리고 의에 주린 자들과 목말라하는 자들을 예수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전혀 상관없이 축복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자신의 고통과 무력감에 정복당하지 않는 사람은, 보다 나은 정의를 진실로 원하는 사람은, 그리고 자비심과 평화지향성으로 충만한 사람은 실제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을 신뢰한다. 이런 한에서 예수의 사신은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시금석이다.
예수가 하나님을 향한 모든 인간의 태도를 결정짓는 시금석이라는 말은 예수가 고유하게 언급한 하나님과 일치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물론 예수를 만나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하나님과, 그리고 세상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일과 예수의 이러한 결합은 원시 기독교가 예수에게 부여한 칭호에 잘 드러나 있다. 원시 기독교는 예수를 유대인들이 기대한 사람의 아들(人子, Menschensohn)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세계를 심판하러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실 자다. 원시 기독교는 예수를 마지막 때 약속된 예언자라고 생각했으며, 또한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가 약속된 메시야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메시야라는 단어는 ‘기름부음 받은 자’를 의미하며, 헬라어로는 ‘크리스토스’라 한다. 이 단어는 신앙고백문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오래 전에 고유한 이름이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었다. 원래 ‘메시야’란 칭호가 핵심이었다. 이 칭호는 고대 이스라엘 왕들에게 사용되었다. 왕은 확실히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인정받았으며, 미래의 왕에 대한 희망이 이미 유대 왕정시대에 등장했는데, 그 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과 세계를 통치할 왕권을 평화와 정의로 실행하게 될 자다. 이런 이스라엘의 희망과 예수의 연관성 사이에는 그 어떤 틈이 없을 수 없다. 더구나 예수에게 적용된 ‘메시야’라는 칭호를 그가 명시적으로 거절했으리라는 점에는 분명한 개연성이 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한 전승은 (막 8:27-33) 예수가 이 메시야 칭호를 거절했다는 사실을 다루고 있다. 이 전승의 원형을 생각해 볼 때 이 예수의 거절은 현재의 본문이 말하고 있는 보다 훨씬 단호했을 것이다. 예수 자신은 유대백성의 민족적 희망을 수행하는 자가 되는 것을 공개적으로 사탄의 유혹이라고 간주했다. 예수는 분명코 하나님의 통치가 모든 차안의 정치적 현존형태의 임박한 종말과 다르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즉 예수의 생각에 따르면 유대민족은 일종의 민족적인 부흥을 고집스럽게 희망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통치가 피안에서 돌입하게 될 그 미래로 돌아서야만 했다는 것이다.
예수가 자신에 대한 그리스도 칭호를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에 그 칭호가 그에게 부여되었다. 이것은 잘된 일인가? 그 어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선결문제다. 로마인들에게 예수는 분명히 정치적 선동가로서 고발당해야만 했으며, 따라서 그러한 이유로 그는 처형당해야만 했다. 처형의 이유가 예수의 십자가 명패에 기록되어있다. 즉 그는 ‘유대인의 왕’이 되고자 했다는 것이다(막 15:26).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십자가의 명패에 새겨진 명문은 오늘날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다시 거듭해서 역사적인 사실 보도로 밝혀지고 있다. 여기에 표현된 예수와 메시야 칭호의 연결은 우리가 앞서 본대로 예수가 이 칭호를 원하지 않았다면 오류다. 이러한 연결은 예수에게 항상 운명적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이유들만 갖고 어떻게 예수의 제자 공동체가 메시야에 대한 예수의 생각과 어긋나게 예수를 이해했는지 확실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에 덧붙여 생각해야 할 점은 다음과 같다. 예수의 부활 이후에는 예수 이외에 다른 구원자를 생각할만한 그 어떤 여지도 없었다고. 그의 공동체는 그의 재림을 기대했다. 따라서 예수는 이제 유대인들이 기대한 최종적 인물과 동일한 자로, 그리고 예수가 그의 오심을 언급한 사람의 아들과, 또한 그가 마지못해 자신의 운명을 통해서 불가분리 연결된 메시야와 동일한 자로 여겨졌다. 이제 그의 공동체는 예수에게서 참된 메시야를 인식할 수 있었다. 메시야에 대한 기대는 세계 안에서 무언가 현존적으로 실행해서 성취해야겠다는 희망으로부터 벗어나서 예수를 통해 인간이 죽음을 극복하는 피안적 사죄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특징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따라서 메시야, 즉 그리스도로서 예수의 본질적 특색이 갖는 정당성은 그 어떤 다른 구원자를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인간의 모든 기대가 예수에게 위탁될 수 있었다는 점에 있다. 왜냐하면 구원에 대한 기대의 참된 동기가 그에게서 실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경우에 예수가 메시야 칭호를 거절했다고 해서 그것을 피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정당하다. 그러나 유대백성이 메시야 사건에서 기대한 구원자는 비록 그것이 다른 방식으로 생각된 메시야 희망이었을지라도 사실상은 예수였다. 유대인들이 생각한 메시야 사명을 예수가 거절함으로써 파생된 위험스런 오해가 메시야 칭호의 표징에서 극복된 후에, 역으로 메시야 칭호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한 예수에게 위임됨으로써 그 의미가 바뀔 수 있었다.
원시 기독교에 의해 예수에게 붙여진 또 다른 칭호인 사람의 아들, 다윗의 아들, 主 등과 비교할 때 메시아 칭호의 특별한 점은 메시야 개념이 예수의 의미를 완전히 다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데에 있다. 메시야 칭호는 하나님의 통치인 최후 심판을 위해서 재림할 예수가 미래에 갖게 될 기능의 특징을 가리켰다. 따라서 이 칭호는 부활한 主의 현재적 현실성과 관련되었다. 이 부활한 주는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미 현재적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다. 십자가상의 명문은 계속해서 예수의 고난을 이미 그의 메시야됨과 연결했으며, 또한 지상적 예수를 이미 메시야로서 파악할 수 있게 했다. 메시야 칭호로서 구원의 중재와 하나님 아들의 자격이라는 요소들도 역시 연관되었다. 이것들은 헬레니즘 식으로 각인된 세계에서 원시 교회가 이방인들에게 선교할 때 예수의 의미를 선포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 칭호는 널리 변형되어서, 결국 인간 예수와, 그의 등장, 그리고 그의 운명을 완전히 의미심장하게 하는데 포괄적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칭호가 예컨대 바울과 같은 원시 기독교의 유대인 선교사들에게 예수 사신의 전체적인 총괄개념으로 적용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당연했으며, 더구나 그들 선교사들이 유대 전통을 뛰어넘어 이방인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 사신을 전해들은 이방인들은 사실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특색이 나타내고 있는 칭호적 의미를 태생적 유대인들 보다는 다소간 불충분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예수의 이름을 가리키는 구성 요소가 되었다.
끝으로 두 가지 문제를 명백히 해야한다.
1.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특별히 예수의 구원자적 의미를 드러낸다. 이 이름은 이미 우리에게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질문이 보여준 결과를 더욱 명료하게 해준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자신의 사신에 직면해서 결단하도록 인간을 강요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이 실행되기를 요구했다는 것,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의 미래에 안에서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통해서 확증되었다는 것, 그러나 또한 예수의 이름 가운데서 구원이,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미래적 친교를 나누며 그의 부활에서 나타난 새로운 삶에 참여하는 것인데, 그 구원이 예수를 믿는 모든 자와 근본적으로 예수를 신뢰하는 모든 자에게 개방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의미는 마치 어떤 다른 현상에도 똑같이 전가될 있는 것처럼 외부적으로 예수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 구원의 의미는 그에게 관계되는 것이며 그에게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예수에 대해서 언급한다고 해서 당연히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내재하는, 그리고 그에 의해서 출발하는 구원의 능력은 이런 방식으로 명시적 특색을 드러내야 하며, 거론되어야만 한다. 이런 근거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그에게서만 의미를 획득하게 되며, 그에게서만 완전해지고 구원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비록 우리의 현존재가 완전해지는 것이 모든 인간의 갈망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는 ‘완전해’*지거나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에는 우리의 운명이 강요하는 매우 많은 것들이 아직 성취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이미 시작된 여러 종류의 것들이 분쇄되며, 형태를 획득한 것들이 위기나 태만, 혹은 오판으로 인해서 사라진다. 결국 모든 것은, 그리고 가장 충실하게 실행된 생명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죽음 안에서 개방된 질문으로서만 남아있게 될 조각들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내재해있는 파멸의 극단적 상황을 그가 여전히 그 안에서 살았던 하나님의 임박과 중재시켰다. 하나님의 임박은 지상적 삶이 성취되었다 해서 실현되는 게 아니며, 또한 그것이 분쇄되었다 해서 무기력해지는 게 아니다. 어쨌든지 우리의 현존은 피안적 성취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이 세상으로부터 저 세상으로 도피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 존재의 완전성에 대한 신뢰로부터 발생하는 이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 옳다. 이 완전성은 우리 생명의 현재적 리얼리티 가운데서 명료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편적인 것을 통해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자에게 오직 단편적으로만 지시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대한 예수사신을 통해서, 그리고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되고 보증되어 있다. 이에 근거해서 우리의 현재 생명이 처한 상황, 경험, 기회는 이 완전함의 부분으로서 존재하고 경험될 수 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서는 그 토대를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다.
*여기에 사용된 ‘ganz’라는 독일어 단어는 ‘완전한’, ‘전체적인’, ‘통일된’ 등 여러 의미로 사용된다. 참된 게 완전하다는 것은 전체로서만 타당하며, 또한 그 전체가 하나로 통일된다는 점에서만 타당하다. 따라서 한 개인이 구원받거나 완전해진다는 것은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인 하나님의 전체 생명세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2.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은 우리의 삶이 예수에게서 ‘구원’받고, 완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의 토대를 예수에게 둔다는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은 이를 뛰어넘어 기독교 신앙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희망들과 결합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희망들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대로 예수를 통해서 변화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러한 희망*들을 물리쳤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희망들이 예수현상과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메시야 표상의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이해가 예수의 사신을 통해서 변화된 것 보다 훨씬 심층적으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일종의 연속성이, 즉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 칭호의 위임을 의미심장한 것으로 드러내 보인, 그리고 실제로도 가능하게 한 한 연관이 잔존한다. 그리스도 칭호가 예수에게 부여되어 새로운 의미를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시 기독교는 그리스도 칭호에서 유대의 메시야 희망이 예수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유대의 메시야 희망이라는 불빛 가운데서만 예수 현상에 내재한 구원의미가 완성된다고 생각할 수 있었으며 또한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대연관이 아니고서는 아마도 역사적인 예수현상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에 대한 본질적인 요소들이 결코 알려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도 역시 기독교회는 이스라엘의 신앙이 보여준 역사를 상속해야 하며, 그리고 예수 현상과 예수 역사의 의미가 충만하게 유지되기를 확실히 원한다면 이러한 유산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희망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정치적 메시야 상을 말한다. 즉 이스라엘의 메시야적 희망(messianische Hoffnung)이다. 비록 이런 희망들이 예수에 의해 거절되었지만 결국에는 예수에게 메시야 칭호가 부여되었고, 원시 기독교는 이 연관성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따라서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기독교의 기독론적인 구원론은 유대인들의 메시야적 희망 가운데서만 그 의미가 충만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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