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아버지를
인간이 자신의 인간적 실존에서 다소간 의지하고 있는 무한한 현실성이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 현실성은 이로써 동시에 인간적 본질*이라는 특색을 지닌다. 인간적인 것의 동인이 명시적으로 알려져 있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神들이나 하나님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신들과 하나님에 대한 각각의 진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러한 인간적 의미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 논의 가능성도 근본적으로 의심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이럴 경우에 포이에르바흐에게서 시작된 무신론 논증과는 달리 인간이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유한한 것을 뛰어넘는 무한한 현실성을 생각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이런 현실성에 담겨있는 인간적 특질이 바로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물론 하나님의 인격성을 부정한 피히테의 논증은 포이에르바흐의 종교론을 위한 단초가 되기도 했다. 포이에르바흐의 종교론은 투사명제로 잘 알려진 것 처럼 그의 보편화 개념이다.
*역자는 여기서 persönliches Wesen을 ‘인간적 본질’이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이 그렇게 정확한 것은 아니다. 독일어 Person이나 Mensch는 -그것의 형용사는 각각 persönlich와 menschlich인데- 거의 비슷하게 인간이라는 뜻이다. 앞의 페르존이 인간의 내부적 품격에 중점을 둔다면, 뒤의 멘쉬는 인간의 외부적 성격에 중점을 둔다 하겠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호칭하는 것은 그의 인간성을 전제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본문의 경우에 사실은 이 두 단어가 모두 사용될 수 있지만, 삼위일체론적인 면에서 그 ‘위격’이 바로 Person을 가리키기 때문에 판넨베르크는 여기서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 같다. 한국말로 이 두 단어의 차이를 도저히 구별해 낼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경우에 따라서 인간, 인간성, 인격, 인격체, 품격 등으로 번역했다.
피히테는 1789년 무신론 논쟁에서 주장하기를 하나님은 이론의 여지 없이 인격체로 간주될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인격체를 생각한다는 것은 곧 유한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격체’로서 진술되는 하나의 본질은 항상 일종의 다른 존재와 상대적으로, 사물적인 세상과 상대적으로, 혹은 다른 인격체들과 상대적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다. ‘나’에 대한 생각에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불가분리 ‘너’와 ‘그것’이 포함된다. 따라서 모든 것일 수 있는 ‘나’라는 것은 없으며 항상 상대적으로 마주하고 있고, 따라서 각기의 인격체는 다른 이를 통해서 결국 인격체로 한정되며, 그런 점에서 유한하다. 이러한 논증으로 헤겔은 자신의 종교철학에서 첨예한 논란을 전개함으로써 종교철학의 기초가 되어있는 인격체 개념의 실질성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다. 헤겔에 따르면 인격체는 자신의 대상을 그 고유한 존재의 한계라 할 자기 외부에 있는 각기의 관점에 두고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대상에 연관되어 있는, 게다가 그 대상에 직면해서 자기를 포기하며, 또한 타자에게 들어가는 것이 바로 인격의 본질이다. 이것은 내가 관여하는, 다루어지고 인식되는 일들 가운데서, 그리고 내가 우정이나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는 너(Du) 안에서 그렇다. 이럴 때 하나의 인격체는 이러한 타자에게 자기를 맡겨버리거나 포기한 것 처럼 타자의 기준에서 다시 등장하게 된다. 따라서 인격적인 삶에서 타자에 대한 대립과 한계는 지양되고 극복된다. 이것이 가리키는 바는 인격체로서의 인격체가 그 본질상 결코 유한하지 않다는 것이다. 인격체의 유한성이 그 인격존재*의 제한이라고 이해될 때 유한한 인격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논박의 여지가 없다. 사실상 인간적인 인격존재의 유한성은 우리가 타자와의 -그것과의, 그리고 너와의- 대립을 오직 부분적으로만 극복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부분적으로만 타자와 일치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이런 한에서 그 유한한 인격체는 완전한 의미에서의 인격체는 아니다. 인격체로서의 인격체는 우리가 헤겔의 생각을 따른다고 할 때 무한할지 모른다. 인격성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무한성을 부정하는 규정이 결코 아니다.
*인격존재(Personsein)이라는 단어는 인격(Person)과 존재(Sein)라는 단어의 합성어다. 일단 직역으로 인격존재라고 했지만 우리 말로는 약간 어색한 표현이다. 단순히 인격이라고만 해도 뜻은 통한다. 말하자면 인격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으로 생각하면 된다.
인간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무한자를 계속적으로 인격적인 존재로 인식해 나간다. 이 무한자에 대한 인격적 해석은 종교에 드러나 있는 것과 같이 신적 인격성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 의해서 여전히 상당하게 소외되어 있다. 이런 논의는 독일 이상주의에 의해 견인되어 온 그것이다. 더구나 인격성에 대한 명시적 개념이 종교 세계의 어떤 곳에서나 기대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거의 모든 종교들은, 그들이 하나의 신이나 많은 신들을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현존의 실제적 기초가 인격성으로서 경험된다는 사실과 상호적 관계를 갖는다. 모든 현실성의 기초에 있는 이러한 인격체성은 사건에 작용하는 능력이 완벽한 비밀로서, 그러나 완전하게 통찰될 수 없는 것으로서 경험되었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자연의 능력을 최소한 원리적으로 항상 통찰할 수 있거나 계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을 결코 그 어떤 인격적 능력으로 다루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기계적인 능력만을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런 기계적인 것과의 유기적 능력들만을 생각한다. 인간만이 그 본질의 궁극적인 중심으로서 계산될 수 없는, 마음대로 처리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오직 그런 이유 때문에 인간은 여전히 인격체가 된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서 사건의 외견만이 계산될 수 있고 마음대로 처리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 하는 점을 질문해야한다. 인간들이 여러 점에서 심리적으로 통찰될 수 있고 다루어질 수 있는 것 처럼 말이다. 이러한 외관적인 통찰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인간존재의 심연 속에서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게 타당한 말이다. 인간이 아무리 심리학적으로 파악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우리는 한 인간인 그와 가까워지는 한 그에게 있는 너(das Du)를, 그의 인격체를 고려하게 된다. 세상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의 토대는 마음대로 처리될 수 없으며, 우리를 초월해서 규정되고, 또한 여전히 인격적이라고 생각될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는 이러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건(Geschehen)은 어떤 역사적, 사회적 사건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물리세계를 포함한 모든 가시적, 불가시적 현상 전체를 뜻한다.
인간은 그 세계와의 사귐에서 어떤 능력과 상대해 있음으로써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능력을 인간에게 필요한 일종의 의지로 경험하게 되었다. 이 능력은, 항상 거듭해서 놀라게 되는 일이지만, 의미심장한 연관 없이는 완전하게 작동하지 않으며, 또한 인간 현존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능력이 완전하게 통찰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에 대한 당혹감이 인간과 그 생명세계를 향한 인간의지의 한 경향을 인식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신적 인격성의 경험은 이런 능력에 대한 종교적 기초경험에 토대를 둘 수 있다. 이렇게 의지할만한 능력의 숫자가 많다고 생각한 여타 민족들과 달리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대로 올라갈수록 훨씬 분명하게 모든 사건을 통해서 유일한 하나님의, 그리고 시내산에서 경험한 야웨의 능력적인 의지를 신뢰했다. 그들은 그 어떤 타자도 곁에 남겨두지 않는, 모든 사물 중에서 가장 탁월한 유일한 하나님을 신뢰했다. 이러한 신뢰는 그들이 그 하나님과 관계한 이래로 그와 함께 이룬 경험들로부터 생겼다. 항상 거듭해서 예지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발생한다는 경험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하나님이 전능하다고 인식했다. 이로써 이 하나님은 사물의 현존적 질서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각기 우리의 사유능력을 뛰어넘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현존 질서의 변화가 그에게 의존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되었다. 그에게는 “못하실 일이 없다”(렘 32:17, 27). 신적 전능이라는 사상은 이런 형태에서 특별히 이스라엘적이다. 이런 사상은 무엇보다도 모든 헬라적 神이해와 구별되며, 오히려 잘 알려진, 그러나 한 번도 유일신이지 않았던 수메르와 바벨론의 신성 쪽에 가까웠다. 사도신경의 헬라적 前형식에서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신앙고백은 헬라神의 칭호인 판토크라토르, 즉 모든 것의 主라는 칭호를 통해서 표현되었다. 이 主는 경우에 따라서 헤르메스 처럼 헬라 신들에게 덧붙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유대교적, 기독교적 전승의 구약성서적 헬라어 번역을 통해서 이미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主 판토크라토르와의 연관 가운데서 구약성서적 하나님 이름인 만군의 주 야웨라는 명칭으로 다시 주어졌다. 여기서 이 번역이 가리키고 있는 바는 얼마나 자주 야웨의 무제한적 능력이 유대적 신앙의 중심에 속했는가 하는 점이다. 사도신경에 언급된 하나님의 전능은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일치한다는 점을 가리킨다. 그에게는 못할 일이 없다는 이 언급은 죽은 자로부터 이루어진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기독교인들에게 새롭게 증명되었다(비교- 롬 4:24).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에는 그가 만물의 창조자라는 사실이 이미 내포되어 있었다. 세계창조가 명시적으로 암시된 진술을 통해서 만군의 주이며, 전능자인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다시 언급하는 것은 전능이라는 사상이 이미 무엇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의미한다. 그가 전능자라고 한다면, 가시적 세계인 땅만이 아니라 불가시적 세계인 하늘도 역시 그의 창조행위이다.
모든 것을 자유하게 하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의지는 예수에 의해서 부성(父性)적 의지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다만 예수에 의해 神이해의 중심 개념이 되었다.
여기에 난점들이 있다. 하나님의 속성을 아버지라고 한다는 것은 분명히 가부장적 사회질서를 반영하는 게 아닐까? 이 낱말은 그때와는 다른 오늘의 사회적 조건 하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강요될 수 없는 神경험이 아닐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이 신앙고백은 세례자에게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라고 말하도록 한 게 아니라 다만 아버지라고, 말하자면 나사렛 예수의 아버지라고 말하게 했다. 따라서 부성적 표현에 맞추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어울리는 부성적 상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언급할 수 있는지, 혹은 없는지에 대한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신앙고백에서 진술되고 있는 하나님은 아버지 칭호를 통해서 예수의 하나님으로서 확증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여기서 질문해야 할 사실은 예수에게서 아버지 칭호가 어느 정도로 자신이 이해한 神의 특성을 드러내는가 하는 것이다.
신성을 ‘아버지’로서 드러내는 특징은 많은 종교에, 아니 거의 모든 종교에서 발견된다. 일단 이스라엘과 가까운 종교사적 주변을 생각해보도록 하자. 바벨론의 월신(月神)인 신(Sin)은 신들과 인간들의 아버지로 불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가리트인들은 그들의 창조 신인 엘(El)을, 그리고 헬라인들은 제우스를 그렇게 보았다. 스토아 철학자인 클레안트에 의한 제우스 찬양은 만물의 아버지인 그 한 하나님을 향한 종교성의 고전적 증거라 할 수 있다. 구약 성서에서, 특히 후기에 속하는 포로기 이후의 문서에서 야웨는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거명된다(렘 3:19, 31:9). 이보다 훨씬 앞서 그 하나님의 특징은 왕의 ‘아버지’이다(삼상 7:14). 원래 야웨의 부성은 백성들에게 오직 간접적으로만, 즉 그들의 왕을 통해서만 정당하게 작용했다. 그런데 이제 모든 가부장적 사상에서 분명히 비슷한 특징으로 드러나고 있는 아버지 관계가 전체 백성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왕조의 몰락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이 개체 인간 하나 하나를 돌보아주신다는 하나님의 부성에 대한 예수의 생각은 그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이에 대한 동기를 발견할 수 있을까? 예수의 사신과 전체적으로 연관되어있는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칭호는 임박한 심판에 직면해서 다시 한 번 예수를 통해 구원을 허락하는 하나님에 대한, 말하자면 하나님의 다스림이 가까운 미래로 다가왔다는 사신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들에게 어떤 조건도 없이 구원을 허락하는 하나님에 대한 구원론적 접근을 특별한 방법으로 표현한다는 게 틀림없다.
이처럼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더 이상 가부장적으로 굳어진 사회의 신적 상징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확실히 종교사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최고 신에 대한 아버지 이름의 근원이 가부장적 사회구조와 연결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구약 성서에서, 더구나 예수의 경우에 이 상징이 의미심장한 변형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분명하다. 또한 이 상징은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방식에 담긴 특별한 의미를 인식할 수 있게 해주며, 이로써 역시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앙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우리가 고백하는 예수의 하나님을 기억하는 신앙고백양식의 의미를 인식하게 해준다. 예수가 언급한 아버지 이름은 그의 전권적 도래가 임박한 미래에 기대되고 있던 이스라엘의 전능한 하나님이 고유한 방식으로 예수를 보냄으로써 어떻게 계시되었는가 하는 것을 특별하게 가리키고 있다. 그 예수는 인간이 당면해야할 심판 앞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자다. 따라서 아버지 이름은 특별한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비한 성품과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유지하고 규정하는 신적 현실성이 예수를 통해 어떻게 해명되는가, 혹은 좀더 분명히 말하자면 그 현실성이 예수를 통해서 어떻게 해명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이 하나님을 자신의 고유한 파송에서 실제로 행위하는 분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의 부성적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한다는 것이 모든 종교에도 중요한 문제인, 그러나 동시에 종교사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논쟁적인 문제로 남아있는 신적 현실성의 참되고 궁극적인 진술에 어느 정도로 접근하고 있는 것일까?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전승이 진리를 담지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는 예수의 하나님이 현재 우리 삶의 문제들을 조명할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삶이기도 하며 또한 우리 자신이라 할 현실성이 그 분으로부터 분명하게 증명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느냐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이런 의미에서 루터는 대교리문답의 첫 신앙 항목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변했다. “이런 분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첫째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아버지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아니고서 나는 하나님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하늘과 땅을 창조할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인 아버지가 모든 것을 창조했고 또한 혼자서 창조할 수 있었다는 것, 이것은 루터에 따르면 그분 홀로 참된 하나님이라는 것에 대한 근거다. 첫 항목에 대한 루터의 설명에는 어떤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인가에 대한 질문이 여전히 남아있다. “……마음의 신앙과 신뢰는 두 가지, 즉 하나님과 우상을 만듭니다. 신앙과 신뢰가 옳다면 당신의 하나님도 옳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신뢰가 거짓이거나 불의한 곳, 그곳에는 올바른 하나님이 없습니다.” 각자 인간이 어느 곳에서나 자신의 최종적 신뢰를 걸어둔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 자신의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옳다. 루터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이 의지하는 것, 당신의 마음을 걸어두고 신뢰하는 것, 이것이 실제로 당신의 계명(Gebot)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옳고 하나인 하나님을 만나며 그에게만 달려 있는” 올바른 신뢰가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루터는 첫 항목의 설명에서 제시한다. 이 하나님만이 홀로 하늘과 땅을 창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참된 하나님이라고.
이 답변을 루터가 최초로 언급한 것은 아니다. 이 답변은 기독교의 이방인 선교와 기독교 신학 초기부터 항상 거듭해서 제기되었다. 물론 이 문제는 내몰린 자의 신앙을 그들의 야웨가 만물의 창조자라는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확고히 하려한 제2 이사야에게까지 소급된다(사 40:27이하). 이방 기독 교회와 그들의 신학은 그들이 그 하나님 안에서 만물의 창조자를 인식하게 된 경우에 우선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며 모든 이들의 하나님이라고 믿고 선포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고대의 기독교 사신은 초기부터 세계의 근원으로서 신적인 것의 참된 형태에 대한 표준을 말하는 철학적 질문에 직면해 있었다. 기독교 신학이 철학적 근거에서 시도한 논증은 기독교적 형태로 진술된 성서적 하나님이 철학적 세계이해의 표준에서 만물의 참된 근원으로서 증명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사유가 어떤 철학적 전제에 터해서 견인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추가적으로 그런 전제들과 연관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사실에 근거해서 자신의 진리성을 증거했다. 즉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사유는 철학적 전제들과의 논의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더우기 그것을 극복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말하자면 철학적 논증의 밑바탕에서 철학적 사유에 의해 검열을 받았다는 뜻이다. 기독교적 사유에서 발생한 철학과의 논쟁이 이처럼 기독교 진리의 보증을 획득하거나 유지했다는 사실이 복음의 변질로 폄훼당할 수는 없다. 철학의 주제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진리로 증명되기 위해서 당연하게 필요한 그 총체적 현실성에 대한 경험이다. 만약 하나님의 신성이 그가 모든 현실적인 것의 단초이며, 또한 그가 없이는 모든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런 하나님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연에 놓여있는 현실적인 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아무리 옳바르게 살펴본다고 해도 피상적으로만 묘사될 수 있을 뿐이다. 철학과의 논쟁에서 지적되어야 하는 바는 기독교인에 의해 주장된 하나님이 진정으로 하나님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다.
우리의 현존경험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증명은 한편으로 확실히 우리의 전체 인격적 경험에서, 즉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충격, 존속과 큰 기쁨에서, 특별히 도덕적 경험의 영역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보편타당하게 유지될 수 있는 근거가 인간 삶의 협소한 영역에서는 절대 가능하지 않다. 바로 그 성서의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라는 게 틀림 없다면 말이다. 우리가 인간 삶의 경험을 독점적으로 판단하게되면 신앙이냐 불신앙이냐 하는 결단은 항상 궁극적으로 자의적이고 감정적인 요소를 지니게 된다. 전체 인간 삶의 경험 중에서 자기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작은 부분이 아니라 각기 현실성에 대한 모든 경험의 넓은 부분이 성서적 하나님의 신성이 논증되어야만 할 장이다. 물론 개개인에게 속한 인간 삶의 경험, 특히 죄와 용서에 대한 도덕적 경험은 간과되면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들을 현실성에 대한 경험의 확장된 연관 가운데서 보아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인간으로서 이 현실성에 참여한다. 개인의 인간적 삶에 대한 경험, 그리고 그의 신앙적 확증에 대한 그 의미는 여기서 과소평가되거나 축소되면 안된다. 그러나 이 경험은 시간적인 전체 생명으로부터 해체되어 종교적 경건의 특수 영역 안으로 빠져들면 안된다. 이 특수영역이란 것은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세상으로 난 창문을 밀폐해두는 영역이다. 하나님의 단일성에는 현실성의 전체성만이 상응할 뿐이다. 더구나 완료되지 않은 전체성의 과정 중에는 더욱 그렇다. 이 완료되지 않은 과정이란 일종의 의미 전체성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서 모든 경험이, 즉 궁핍, 고통, 죄, 그리고 불합리 같은 부정적인 경험이 발견되고 있는 그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이런 의미 전체성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초월해나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존적인 것과 이미 지나간 것을 포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유하게하고 구원하는 하나님이 세계 창조자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기독교를 언급할 때 항상 결정적인 문제다.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하는 구원과 해방에 대한 모든 경험은 우리가 그런 것을 세계 창조자와 함께 생각하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렇다고 마치 내가 인간의 전체적인 경험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덕으로 돌리고 모든 것이 그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확신하고 싶어서, 즉 세계창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런 하나님만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세계 창조자로서 이해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그의 덕으로 돌리는 인간적인 경험은 일종의 경건한 자기기만일 수 있다. 이 경건 역시 이러한 질료적인 세계가 자기 현존의 터전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경험이 전체적인 면에서 볼 때 다양하다는 사실 앞에서, 그리고 모든 개체 인간의 경험이 한정적이라는 사실 앞에서 성서의 하나님이 모든 현실성의 근원자로 이해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질문이 결국 결정적이라는 말인가? 여기서 말하는 이 현실성은 현실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그것을 뜻한다. “그 어떤 다른 하늘과 땅도 창조될 수 없습니다.”는 루터의 주장은 무엇인가? 성서적 희망에서 볼 때 하나님의 나라에서나 완성될 인간의 역사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면 분명히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여전히 논쟁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셈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는 하나님의 현실성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그 어떤 최종적인, 그리고 반론의 여지가 없는 답변이 주어지지 않는다. 역사의 미완료성과 개체에 대한 경험의 비확정성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 어떤 다른 정보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잠정적인 답변에 대한 기준이라도 주어질 수 없다는 건 아니지 않을까?
이에 대한 하나의 길은 다음과 같은 통찰에 있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이해는 종교사적인 면에서 볼 때 아주 분명한 세계이해와 결합되어 있다. 세계에 대한 모든 임의적 이해가 어떤 神에 대한 이해와 연결된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사유하는 기능은 하나님으로부터 세계이해가 규정된다는 데에 놓여있다. 이처럼 하나님을 전능한 아버지라고 일컫는 성서적 사유에도 역시 어떤 분명한 세계이해가 결합하고 있다. 이 세계이해는 개별적인 이해에서는 변형되기 쉽지만 성서적 神사유의 기본적 성격에서는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다. 현실성에 대한 성서적 이해는 하나님을 전능한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사상에 의해 규정되어 있으며 또한 분명한 시간적 조건들로부터 해방되어 있다. 이 시간적 조건들은 곧 본질적이며 영속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성서적 사유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성서적 이해가 그 기본 성격상 현실성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여전히 유효한지 아닌지를 물어야만 한다.
이런 성서적 神사유에 적합한 현실성 이해는 역사적인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이 세상은 여기서 무시간적 질서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무시간적 질서라는 것은 그 안에서 모든 현상의 변화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뜻이다. 성서적 이해에서는 오히려 항상 거듭해서 새로운 것이 발생한다. 그것은 전에는 한번도 있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것이며, 개체 사건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비견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사건 속에서 항상 거듭해서 일어나는 새로움과 놀라움은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사유로부터 유래한다. 이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사물이 없으며, 이 하나님은 이것을, 즉 세계와 인간현존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특별한 것을 항상 거듭해서 드러낸다. 따라서 동일하게 유지되는 질서라는 사상은 하나님에 대한 성서의 사상과 긍극적으로 일치될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성서의 사상은 구약성서의 하나님을 올림피아 종교의 신들로부터 구별한다. 헬라인들에게 신들은 오토(W.F. Otto)가 적절하게 언급한 것처럼 ‘존재론적 형태들’(Seinsgestalten)이었다. 헬라인들에게 ‘질서’와 ‘세계’가 유일한 로고스인 것처럼, 그런 신들 가운데서 세계에 대한 원형적 질서가 그 전망을 드러냈다. 따라서 헬라 철학에서 코스모스는 인간적 신들 없이는 생각될 수 없다. 이에 반해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하나님의 전능이 만물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함으로써 사건들의 결과에서 관찰될 수 있는 모든 질서는 전능한 하나님의 의지가 우연하게 자리 잡게 된 것으로만 인식될 수 있었다. 이로 인해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체 현실성은 무시간적 질서로서가 아니라 항상 새로운 사건의 계승으로서, 예상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항상 새롭게 전개되는 하나님의 역사행위로서 이해되었다. 항상 거듭해서 우연하게 일어나는 새로운 사건이 이렇게 강조됨으로써 이스라엘 사상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인격성은 헬라 신들의 인격성과는 달리 결코 진부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여기서 순전히 우연한 사건들에 대한 통찰이 근본적인 핵심 문제라고 한다면 사건의 그 어떤 단일성도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가기도한다. 사실상 그 연관, 즉 지속적인 것 자체가 여기서 우연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전능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하나님이었다. 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했으며, 역사의 부침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어 나갔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최종적 파국 앞에서 인간을 구원하고 그 역사를 통해 구원을 관철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그 전능의 하나님은 ‘자신의 손이 해야할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그가 한 때 행했거나 행하려했던 것을 견실하게 유지함으로써 신실하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확고부동성은 항상 거듭해서 새롭고 놀라운 방식으로 일어난다. 현재에도 무엇이 영속적인 것이며, 무엇이 지속되거나 머물러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을 결정적으로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래는 무엇이 존속하게 될 것인지를 증명한다. 따라서 미래는 무엇이 사물의 영속적인 본질인지도 역시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성서의 하나님은 미래로부터 과거의 사건들로 되돌아감으로써, 또한 자신의 방식으로 그 사건들을 확고히 함으로써, 사건연관의 연속성과 일치성을 기초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예상 외로 벌어진 사건의 모든 방향전환에서 여전히 거듭해서, 이는 하나님의 초기 의지가 작용하는 놀라운 방식이지만,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나눈 약속으로 되돌아옴으로써 그는 엄청난 사건에 역사의 단일성을 제공했다. 사건연관의 마지막으로부터 붉은 실*로서의 이 단일성은 사건들 가운데서 가시화된다. 어쨌든지 최후가 되면 이 마지막까지 지속된 붉은 실이 무엇인지 결정된다. 모든 역사적 경험에서 밝히 설명될 수 있는 이러한 확증은 여전히 훨씬 보편적으로 다음과 같이 언급될 수 있다. 마지막** 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무엇이 과연 현재 우리 주변에 있는 사물과 존재를 고유하게 유지하고 있는지 마지막 때 결정되기 때문이다. 역사의 모든 우연은 마치 신적인 창조의 ‘장소’라 할 궁극적 미래로부터 각각의 현재를 말해준다. 이에 상응해서 마지막 때 세계와 하나님의 의지는 세계, 그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계시된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능력과 주권으로 여전히 도래 중에 있는 그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그것은 곧 미래적 성격을 말하는데, 매우 분명한 특색을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즉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미래가, 즉 세계의 종말론적 미래가 그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비유로 이 사실을 적시해주고 있듯이 이러한 궁극적인 미래의 불빛 가운데서만, 그리고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임한다는 소식의 불빛 가운데서만 진리와 모든 사건의 본질이 드러난다.
*독일어 ‘붉은 실’(rote Faden)이라는 관용어는 역사나 사건연관에서 모든 것들을 연결해주는 핵심적 흐름을 가리킬 때 쓰인다. 이 표현을 굳이 우리 식으로 바꾸면 ‘맥’이라고 할 수 있긴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본문에서 판넨베르크는 역사가 우연한 사건들의 난삽한 전개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흐름으로 묶이게 되는데 이것이 곧 역사의 단일성이며, 바로 이 단일성에 모든 사건을 연관시키는 붉은 실이 자리한다고 설명한다.
**마지막으로부터(vom letzten Ende)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다는 말은 기독교의 종말론적 시각을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일종의 미래적 존재론이다. 역사의 흐름이 잠정적이고 일시적이고, 끊임 없이 새로움의 전개라고 한다면 궁극적인 진리는 결국 최후에 드러나게 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종말에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역사로서의 현실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우리에게도 역시 타당하게 작용할 수 있는가? 여기서 진지하게 제시된 질문들이 부수적인 방식으로 답변될 수는 없다. 이 질문들은 그것이 의미심장하게 생각되고 논의될 수 있는 그런 방향이 분명할 때만 설명될 수 있다. 이럴 경우에 인류 역사만이 문제가 아니라 성서적 창조신앙이란 의미에서 ‘역사’로서의 자연이 이해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널리 행해지고 있는 인간사에 대한 이해는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역사의 실행자가 된다는 점 때문에 성서의 역사설계와 다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 우리에게 인간역사의 단일성에 대한 전망이 보이는가? 인간이 역사 안에서 행동한다는 사실을 고대 이스라엘 역사 기록자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인간 행위에는 인간의 의도와 행동을 뛰어넘어야 파악되는 그 어떤 다른 것이 있었다. 사건의 진행이 항상 거듭해서 인간의 계획과는 다르게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러한 다른 과정을 통해서 오히려 사건의 심연에 어떤 연관이 결합되어 있는 게 아닐까? 역사 과정은 분명히 성서의 역사 기록자들이 여기서 배경으로 작용하는 세력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 성서 기자들은 인간이 행위함으로써 역사적 사건에 참여했지만 궁극적으로 그 역사적 사건은 하나님의 행위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행위가 드러내는 모든 일치에는 하나님의 영속성과 신실성이 있으며, 이를 통해서만 역사적 사건들의 모든 다양성에 내재한 일종의 의미 단일성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근대의 역사이해는 이러한 성서와 기독교 전승의 역사신학 없이 고려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의 이상(理想)이 자리하게 되었다. 인간이 역사에서 창조하는 주체로 인식되었다. 이 인간은 개개인과 그 상황을 통해서 자기를 실현하고 있는 그런 자를 말한다. 과연 인류는 진지하게 행동하는 주체로서 간주될 수 있는가? 역사를 인류의 자기해방의 과정이라고 보는 표상은 신화적 성격을 갖는다. 이 표상은 인간 종(種)의 개념을 신화적으로 상승시킨다. 종들은 행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들이 우선적이다. 인간이라는 종 개념은 역사 가운데서 행동하는 하나님의 기능을 위탁받을 수 없다. 이 개념은 모든 인간 역사의 일치성에 토대를 형성할 수 없다. 이러한 통찰로는 하나님을 인간역사에 단일성을 제공하는 주체로서 말한다는 것이 어떻게 정당한지 밝히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국면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성서적 신앙이 중요하다는 질문이 오늘 우리의 현실성 이해에서도 의미심장하게 제기되며 논의될 수 있는가라는 테마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자연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은 18, 19세기에 자연이 꺽일 수 없는, 그리고 영원한 법칙의 불변적 제도로서 이해되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나 있다. 이 말이 옳다면 자연사건 가운데 있는 단 한 번의 사건과 형태의 모든 시간적 변화, 모든 광휘와 소멸은 결국 비본질적이며, 항상 동일한 구조 가운데 있는 단순한 변조에 불과할지 모른다. 오늘날도 역시 자연의 ‘역사’를 말한다. 현재의 자연과학적 세계像은 또 다시 개체 사건의 우연성(우연한 일)*에 대한 관점을 통해서 규정된다. 사건의 우연성은 고전 물리학에 의해서 의식적인 배경으로 물러나 있었지만 실제로 차단되지는 않았다. 법칙은 사건들의 흐름에서 볼 수 있는 비교적 불변하는 진행형태로서 항상 우연한 현상들에서만 관찰되었다. 앞서 발생했던 것과 거의 흡사한 것이 이 사건들로부터는 발생하지 않는다. 열역학 두번째 명제는 세계현상의 과정이 완전히 불가역적이라는 점을 새롭게 보도록 가르쳤다. 그렇다면 전체로서의 세계는 시간 가운데서 일어나는 단 한 번의 경과이며, 또한 그렇다면 사건현상에서 관찰된 모든 법칙성은 사건들의 외관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건현상에서 일어나는 동형식화**는 특정한 시간에서 발생한 것이다. 동형식화는 법칙의 형식화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또한 이 자연법칙은 시간에 의존적이라는 점에서 타당하다. 그것이 수학공식과는 다르다는 한에서, 즉 시간에서 발생하는 사건현상에 응용될 수 있다는 한에서 말이다. 자연현상에서 이루어지는 진행 형태의 상대적 불변성은 그 자체가 우연한 사실일 뿐이다. 말하자면 규칙은 자연역사의 진행 가운데서 어느 시점에 당분간 걸쇠가 걸려있는 것이다. 이 규칙에서 사건은 이후부터 불확실하게 지속된다. 그리고 현상에 대한 각기의 등급과 더불어 이러한 새로운 진행형식들, 새로운 자연법칙의 형식화에 대한 사실들이 출현하게 되는데, 이런 자연법칙들은 오직 생물학적인 차원에서만 쓸모있는 물리법칙 같은 것들이다.
**우연성(Zufälligkeit, Kontingenz)이라는 말은 단순히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은 사건의 성격을 뜻한다. 역사는 기계론적으로 진행되거나 아니면 인간에 의해 지배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힘에 의해 견인되고 있다. 그런 것이 성서 기자들의 눈에는 전적인 새로움이었다. 이 역사 현상의 새로움은 곧 우연성으로 규정된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세계현상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사건의 진행과정이다. 판넨베르크는 종말론적으로 세계를 견인해 가는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이 세상을 설명할 길이 없다는 점을 주장한다.
** 동형식화(同形式化, Gleichförmigkeit)는 세계현상에서 어떤 형식이 일정 시간 동안 같은 형식으로 유지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인간은 인간종이라는 형식으로서 동일하며 잠자리는 그런 류로서 동일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 이외에도 여러 물리학적 규칙들도 이에 해당한다. 일정한 시간과정을 통해서 이런 동일형식화가 이루어지는데, 이런 형식들은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결국은 시간에 의존적이라 할 수 있다. 판넨베르크는 9장에서도 이 개념을 자연과학 개념에 담겨있는 폐쇄적이고 기술주의적 속성의 한계를 비판하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자연과학이 이 세계현상을 시간적 한계 안에서는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근원과 최종적 형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술로 규격화시킴으로써 세계의 개방적이며 종말론적 성격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기존의 자연과학적 법칙성이 이 세계의 미래와 그 진리를 온전히 담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한 지적이다.
이렇게 이해된 자연의 단일성은 더 이상 그 사건들을 지배하는 법칙을 통해서만 규정되지 않는다. 법칙은 곧 사건의 분명한 동형식화를 보여준다. 늘 거듭해서 유사한 것들이 반복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그 차이가 너무나 미미해서 인간이 자연을 인식할 때에 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동일한 형식으로 발생하지는 않는다. 자연사건을 완전한 동형식화로 생각하려는 것은 일종의 추상이다. 물론 여기서 작용하는 것은 일종의 매우 실용적인 추상이다. 이 추상은 인간에게 놀라울 정도로 사건을 능가하는 능력을 획득하고 사용하도록 한다. 그렇지만 모든 사건의 유일회적이며 불가역적인 경과는 이러한 유일회성에서 하나의 법칙으로 구성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반복성이라는 것이 법칙을 파악하는 문제에 속하기 때문이다. 유일회적이고 불가역적인 경과로서의 유일회적인 전체 진행이 통일성을 갖는다면, 이제 동형식화로부터 구별되는 연관의 종류가 문제다. 더 이상 법칙을 통해서 제시되지 않는 이러한 연관의 특징을 찾기 위해서 자연의 역사가 언급될 수 있다. 여기에 당연히 궁극적인 난점이 파생된다. 우리는 역사를 역사의식과의 관련 가운데서만 깨닫게 된다. 모든 과거로부터 개개의 현재를 볼 수 있게 하는 특별하게 역사적인 연관이 우리의 역사의식에서 성립된다. 역사연관은 개개의 잠정적인 종국으로부터 과거를 향한 이러한 역망 없이는 전혀 가능하지 않다. 역사적 사건에 담겨있는 각기의 최소 단일성은 이미 앞서 발생한 사건의 수용이라는 고유한 방식을 통해서 규정된다. 자연이 의식적이지 않는데 우리가 어떻게 자연의 역사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우리가 코스모스 안에 있는 사건의 전체 경과를 인간과 연관시킬 때만 가능하다. 인간 역시 자연에 속한다. 인간으로부터 되돌아보고, 또한 인간을 향해서 달음박질함으로써 자연사(史)는 그 상을 드러낸다. 여기서 의식적인 역사연관이 일종의 단순한 허구 그 이상이라면 이러한 연관의 단일성을 기초하는 일이 인간에게는 가능하지 않다. 오히려 인류역사의 연관을 생각할 때 보다 훨씬 힘들 것이다. 자연은 그 역사 단일성을 자기 자신 안에 소유하고 있지 않다. 인간에게 역망해 봄으로써만 인식된다. 그렇다고 자연이 인간에 의해서 그 근원이 파악되는 것도 아니다. 이로써 역사의 하나님, 성서의 하나님이 바로 자연사건의 역사적 단일성까지도 기초하는 분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아마 바로 오늘날 자연을 이해하고 있는 그런 조건 하에서 성서의 전능한 하나님이 하늘과 땅, 즉 잘 알려진 (자연법칙의 발견을 통해서 밝혀진) 주변과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건현상에 있는 심연의 창조자로서 새롭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사건현상의 유일회적인 진행을 완전하게 규정하는 우연성의 배경에서는 현존적 자연법칙의 연관들이 등장한다. 이 연관들은 존립을 위한 신적 의지의 표현이며, 그리고 이러한 세계 가운데서 우리로 하여금 현존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표현이다. 이 경우에 그 연관이 역사연관이기 때문에 자연의 단일성도 역시 그 연관에서 추론된다. 이것은 종말론적 미래의 하나님을 역망함으로써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이 단일성이 이미 잠정적으로 배후를 향해서만, 즉 인간으로부터만 밝혀진다는 사실은, 그리고 그것은 곧 사건의 법칙을 알고 있는 자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뜻한다는 사실은 창조 역시 인간역사에서 처럼 전체적으로 그 창조의 의미연관에서 각각의 마지막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을, 그리고 이로써 그 본질의 완성인 궁극적 종국에 대한 질문을 야기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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