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원어해설

39.거짓선지자,죄인중에 괴수,됨(진리)

은바리라이프 2015. 11. 9. 18:03

39.거짓선지자,죄인중에 괴수,됨(진리)

 

-로마서 96 주일예배말씀중에서...

 

(눅6:26)

모든사람이너희를칭찬하면화가있도다저희조상들이거짓선지자들에게이와같이하였느니라

ψευδοπροψήτης(G5578, 프슈도프롭헤테스)

                                           거짓 선지자 false prophet.

프슈데스(ψευδής, G5571: 거짓말하는, 거짓의)와 프롭헤테스(προψήτηςG4396: 예언자)에서 유래했으며 '거짓 예언자', 즉 '신적 영감을 받은 예언자 노릇하면서 신적 예언이라는 이름 하에 거짓말을 발하는 자'를 가리킨다.

(딤후4:3-4)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διδάσκαλος(G1320, 디다스칼로스)

교사 teacher

디다스코(διδάσκωG1321: 가르치다,배우다)로부터 유래-'교사, 가정교사'

이 단어는 초등학교 교사로부터 시작해서 가정교사, 철학자, 그리고 공연을 위해 시가를 연습시켜야 하는 합창단 지휘자를 칭할 때 사용되었다. 시인은 그의 활동이 합창하는 시(詩)든 비극이든 자신에 대해 디다스칼로스라고 불렀다.

 

(고전4:15)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G3807)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무수히 많은,

             παιδαγωγός(G3807, 파이다고고스)-교사,몽학선생,관리자 안내자...

이 명사는 파이스(παιςG3816: 아이)와 아고(ἄγωG71: 인도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아이를 책임진 사람, 관리자, 가정교사, 어린 아이나 소년이 학교에 오고 갈 때 그들을 인도하며, 그들의 행동일체를 보살피는 사람'을 뜻하는데 주로 '노예들`이 이 일을 하였다.

 

* 거짓선지자

거짓은 진짜를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진짜의 반대편에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진짜를 애기하지 않고 진짜를 담고 있는 표피적인 그릇만 애기하면 거짓선지자,율법입니다.

이 걸 애기해 주면 모든 사람들은 다 칭찬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게 거짓선지자다하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이구도성으로 칭찬해주고 존경해 마지 않는 목회,심지어 세상의

신문들까지 올바른 교회상이니 올바른 목회상이니 칭찬해 주는 그런 것이 거짓것들일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올바른 교회 진짜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모두 칭찬받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수반한 비수를 던지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수십년간에 자신의 삶 전체를 헛된 것으로 부정해 버리는 못된 사람 일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내가 산 건 뭐야’‘아무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게 가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그 걸 통하여 진리로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니까요.

보편적아담들이 원하는 것은 뒷전으로 다 미뤄두고, 정말 원치 않는 아담들의 자존심만 건드리는 그런 말만합니다.

진리를 그렇습니다.

진리라는 자체가 인간은 아담은 nothing,하나님 전부를 전해주는 겁니다.

심지어 사회의 정의 도덕 윤리 이런 것도 기독교의 궁긍적 목적지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외쳐야 그게 진리입니다.

어떻게 그런 이들은 온 세상이 이구동성으로 칭찬 할 수 있겠습니까.

사회정의 평등 평화 모든 이들이 공평하게 다 잘사는 세상 이건 온세상이 공통으로 추구하는 가치 아닙니까.

그런데 기독교의 목적지는 그게 아닙니다.

각자의 처한 상황속에서 현실속에서 하나님은 진리를 만들어 내신 다고 하시는데  어떻게 온세상이 칭찬을 합니까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보편적 인간들의 지향성 방향성을 잘 압니다 아니 아는게 그거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 보편의 자존심을 높여주는 말만 합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도달할 목적지가 있다라는 겁니다

성도의 자격 열심 헌신 등등 성도가 도달할 목적지를 제시하고 거기에 미달하는 이에게

야단과격려,담금과 채찍을 교대로 주는 겁니다.

거기에 반드시 동반되는 것이 송사와 정죄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도달하고 있지 못하는 목표지점을 설교자로부터 제시를 받으면 그 자신을 바로 송사하고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그 제시된 목표지점이 이 세상이 합의한 거룩하고 정의롭고 성숙하다라고 하는 목표지점일때에는 스스로에게 정죄와송사가

더욱 심해집니다.

‘맞아 저렇게 살아야 되는데 나는 뭐야’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자기의 두 눈을 자기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자기의 행위에 몰입하게 되버립니다

‘넌 왜 아직도 이 모양이냐’

‘넌 정말 구원 받을 자격있는 인간인거야’

‘넌 구원 안 받을 수도 있겠다’

‘왜 맨 날 제자리야’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에 기인한 것이지 우리의 행위와 됨됨이로써 주워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걸 알고 있다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헛탈한 율법으로 자꾸 받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선물을 쓰레기 취급하게 되는 엄청난 잘못를

범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휼륭한 신앙이라고 사람들이 착각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을 찬송하고 자랑하는 자로 사는 겁니다.

성도의 시선은 그 사랑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육을 향해 자기의 행위를 향해 있으면 안됩니다.

이 세상속에서 아무리 성인군자로 칭송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육을 바라보면 송사와 정죄 밖에 나올게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그 무엇으로 채우려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게 존재의 결핍이란 겁니다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존재의 결핍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소유의 결핍은 얼마든지 그 걸로 채울 수 있습니다.

자기를 바라보게 되면 간디 같은 사람도 자신을 정죄하고 송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너는 어제 그렇게 살았어’‘오늘은 그거 보다 더 잘 살아야지’이렇게 늘 자신을 정죄하고 송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성숙한 사람이라고 칭찬받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제 가슴을 치면서

‘내 탓이요’를 외치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 걸 굉장히 겸손하고 휼륭한 사람이고 존경해주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죄를 가장 민감하게 인식하고 ‘내가 죄인중에 괴수입니다’라고 울고 불고 하면서

그 불안함을 해소하기위해서 열심히 헌신하고 노력하기만 하면 휼륭한 신앙인 대접을 받습니다

기독교는 죄와무관한 자가 되는 거지 죄를 인식하는‘내가 죄인중에 괴수입니다’그 지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운운하는 사람들까지도 자신들을 송사하고 정죄하는 데까지 멈추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다 하셨데 근데 나는 멉니까?’

그 분과 아무 상관없이 여기 역사속에 뚝 떨어져서 그냥 죄인중에 괴수로 있으면 되는 겁니까?

그걸 구원이라 합니까? 아니란 말입니다

그 정죄와송사에서 반드시 그 진리의 말씀으로 벗어나야 되는 겁니다.

거기까지 가야 되는 겁니다

그 걸‘됨’이라고 하는겁니다.

‘앎’에서 그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건 더 굉장히 겸손하고 마치 율법에서 벗어난 것처럼

그렇게 생각되지만 그거야 말로 무서운 율법주의입니다

자기를 끝까지 정죄하고 가는 겁니다

그건 정죄와송사와 율법은 절대로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표피적 외모 껍질을 개선해 갈 수는 있지만 그런 것은

그러나 생명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육을 십자가에서 죽었지 그 육을 개선해서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