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창세기

62 -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에 속한 자가 치러야 할 대가 (창22:20~23:20)

은바리라이프 2013. 10. 22. 16:04

62 -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에 속한 자가 치러야 할 대가

 

 

(22:20~23:20)

20 이 일 후에 혹이 아브라함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밀가가 그대의 동생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21 그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동생은 부스와 아람의 아비 그므엘과

22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이라

23 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처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24 나홀의 첩 르우마라 하는 자도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를 낳았더라 

 

1 사라가 일백 이십 칠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의 향년이라

2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3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가로되

4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

5 헷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6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7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거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8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진대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하여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9 그로 그 밭머리에 있는 막벨라 굴을 내게 주게 하되 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서 당신들 중에 내 소유 매장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10 때에 에브론이 헷 족속 중에 앉았더니 그가 헷 족속 곧 성문에 들어온 모든 자의 듣는데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11 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께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께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께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 하소서

12 아브라함이 이에 그 땅 백성을 대하여 몸을 굽히고

13그 땅 백성의 듣는데 에브론에게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합당히 여기면 청컨대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그 밭 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 장사하겠노라

14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15 내 주여 내게 들으소서 땅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나와 당신 사이에 어찌 교계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 하소서

16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좇아 에브론이 헷 족속의 듣는데서 말한 대로 상고의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17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을 바꾸어 그 속의 굴과 그 사방에 둘린 수목을 다

18 성문에 들어온 헷 족속 앞에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정한지라

19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 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20 이와 같이 그 밭과 그 속의 굴을 헷 족속이 아브라함 소유 매장지로 정 하였더라

 

 

우리가 여러 주에 걸쳐 공부를 한 창세기 22장의 모리아 산 사건은 시온 산에서 쪼개진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게 되는 교회의 탄생에 관한 상징적 그림이었으며(여호와 이레) 아울러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과 주권 속에서 구원을 받은 하나님 백성들의 삶 속에 나타나야 하는,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순종의 삶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으로 죽어야 할 자 대신에 죽음을 맞게 되는, 죽기까지 충성하는(2:8)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양이 담고 있는 내용과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백세에 난 이삭을 하나님께 순종의 제물로 드리는 아브라함의 삶은 정확하게 같은 것이라 했지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 그로 말미암아 탄생케 되는 성도의 순종으로 나타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잘 그려져 있는 장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그 온전한 순종의 삶이 자기 부인의 삶이고, 십자가의 삶이며, 거룩한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온전한 순종의 삶을 예수님의 삶 속에서 보았고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보았으며 온전히 완성된 하나님 백성들의 삶 속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이자 규범이니까요.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격발시켜 자기를 부인하는 자로 만들어 가는지에 대해 공부를 해 보았습니다.

그러한 창세기 22장에 이어서 전개되는 오늘 본문인 23장의 내용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죽음과 막벨라 굴을 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두 이야기 사이에 뜬금없이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22 20절 이하를 보시면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이 역시 아브라함의 형제였지만 일찍 세상을 떠난 하란의 딸 밀가와 결혼을 합니다. 밀가는 롯과 남매지간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이 자기 조카하고 결혼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여덟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중 막내아들 이름이 브두엘인데 그가 바로 야곱의 외삼촌인 라반과 이삭의 아내이자 야곱의 어머니인 리브가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이삭과 리브가는 오촌 당숙과 조카지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리브가의 이름이 등장하고는 23장의 사라의 죽음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경에 이유 없이 기록되어 있는 구절은 단 한 구절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이 그렇게 귀한 지면을 할애하여 뜬금없이 나홀의 족보를 삽입해 놓았을까요? 나홀의 족보 역시 그 앞의 모리아 산에서 나타난 여호와 이레의 속편인 것입니다.

 

사라는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고 살다가 믿는 자들의 어머니가 될(17:16) 생활의 행적을 남겨 놓고 하나님 품으로 떠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이어서 이 땅 위에서 경영하는 하나님 나라의 일 가운데 안살림을 할 리브가가 하나님에 의해 준비되어져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중도에 실패되거나 중지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라가 죽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파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 때까지의 하나님 언약의 끊임없는 전승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에 의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유지되며 완성되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홀의 족보에 뒤이어 나오는 23장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창세기22장 마지막 부분의 족보는 ‘왕이 없으므로 그들이 각각 그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사사기의 마지막 구절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왕을 허락하셨다’는 사무엘서 사이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다윗의 이름이 등장하는 룻기가 들어가 있는 것과 같은 형국으로 삽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계획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여호와 이레’의 모리아 산 사건에 강조하여 첨가해 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창세기 22장은 앞부분도 여호와 이레요 뒷부분도 여호와 이레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준비하시고 예비하시는 하나님에 의한 언약의 확실성과 영원성과 최종성이 이제 23장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23장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사라의 뒤를 이을 리브가가 출현하고 사라가 역사의 뒤로 사라집니다. 23 1절을 보시면 사라가 127세에 헤브론 땅 기럇아르바에서 죽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137세였고 아브라함은 그 후로도 38년을 더 산 뒤 175세에 죽습니다. 사라가 죽을 때에 이삭의 나이는 37살이었습니다. 이삭이 3년 뒤인 마흔에 리브가와 결혼을 했고 60세에 야곱을 낳았으므로(25:26) 아브라함은 이삭과 75년을 함께 동거했고 야곱과는 15년을 함께 산 셈입니다.

 

이삭과 야곱은 아브라함과 함께 한 장막에서 동거하며 아브라함의 삶을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상당히 긴 시간과 공간을 서로 공유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동거하며 하나님과 교제를 했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삶은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의 삶으로 서로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가리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칭하시기를 서슴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의 삶을 축약하여 한마디로 표현을 한다면 ‘나그네의 삶’입니다. 아니 이 땅을 살다간 모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나그네여야 합니다. 이 땅은 자기가 영원히 살 나라가 아니니까요.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니까요.

 

본문 4절에 아브라함이 자신을 가리켜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라고 칭하는데 나중에 야곱도 바로 앞에서 ‘내 나그네 세월이 130년’이라고 자기 인생을 요약하여 밝힙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도 자신을 가리켜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라합니다.

 

(39:12)

12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그렇게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 이 세상을 살다가 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이 세상을 나그네처럼 살다간 이들을 가리켜 ‘내 백성’이라 부르십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이 땅에서 주인처럼 행세하며 산다면 그는 매국노나 배신자임이 분명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도 우리의 열조들처럼 이 땅을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처럼 살아야 하며 그렇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대상29:15)

15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세상의 세월은 살같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니 이 땅에서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 살라는 말입니다. 세월은 정말 쏘아놓은 화살같이 흐릅니다. 언제 우리의 삶이 끝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영원을 준비하는 나그네로 이 땅을 살다가 영원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어떻게 사는 것이 이 땅을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 사는 것인지, 그리고 그들의 특징은 어떻게 나타나게 되는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삶이 여호와 이레로 성취되어지는 하나님의 언약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도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실 사라의 죽음에 그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라의 죽음에 대처하는 아브라함의 행동에 그 초점이 있습니다. 먼저 성도가 이 땅을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 살게 되는 근거가 무엇인지부터 보지요. 본문 3절로 가겠습니다.

 

(23:34)

3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가로되

4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

 

3절의 ‘일어나 나가서’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와야 쿰’은 그냥 ‘일어나다, 세우다, 들어 올리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히브리 원어에는 나갔다는 말이 없습니다. 사실 그 ‘와야 쿰’이라는 단어는 아주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먼저3절 초반부의 ‘시체 앞에서’의 ‘앞에서’라는 단어부터 분석을 해 보겠습니다. 그 ‘앞에서’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단어는 ‘파님 알’입니다. 직역하면 ‘얼굴 위에서’입니다.

그러니까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를 올바로 직역을 하면 ‘아브라함이 죽은 사라의 얼굴 위에서 일어났다.’입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이지요?

그러한 표현은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죽은 자의 부활을 상징하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죽은 이들을 살릴 때 그 위에 포개지듯 엎드렸다가 그 죽은 자의 얼굴 위에서 일어나는 의식 같은 것을 행한 것입니다.

 

(왕상17:21~22)

21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었는데 엘리야가 그 아들의 시체 위에, 오늘 본문의 표현으로 하자면 그 시체의 얼굴 위에 엎드렸다가 일어남으로 아이가 살아납니다. 여기도 역시 ‘알’ ‘위에서’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열왕기하4장에 보면 엘리사가 죽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는 사건이 나오지요? 거기서도 엘리사가 그 죽은 아이의 눈에 자기의 눈을, 그 아이의 입에 자기의 입을 대었다가 그 얼굴 위에서 일어나자 아이가 살아납니다. 그렇게 히브리 사람들에게서 죽은 자의 얼굴에 산자의 얼굴이 포개어졌다가 일어나는 것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와 연합이 되어 그 죽은 자의 사망을 자기가 가져가시고 자신의 생명을 불어 넣어주시는 십자가 복음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신약에서도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서 떨어져 죽었을 때 사도 바울도 그 유두고의 몸 위에 엎드렸다가 일어남으로 그를 살려내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입니다.(20:10)

그런데 아브라함이 사라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포개었다가 일어났습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이 사라의 부활을 믿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게 사실일까요? 아브라함은 이미 그로부터 20여 년 전에 사람의 부활을 굳게 믿었던 사람입니다.

 

(11:1719)

17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8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 이니라

 

아브라함은 이렇게 사라가 죽기 20여 년 전에 이미 사람의 부활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히 믿는 신앙의 실력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었을 때 슬퍼하며 애통했다라고 두 가지 사이한 단어로 그의 슬픔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 어구도 아주 중요한 어구입니다. 2절로 올라가 보지요.

 

(23:2)

2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여기서 ‘슬퍼하다’라고 번역이 된 ‘리쓰포드’는 가슴을 치고 쥐어뜯으며 통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사라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리쓰포드’와 연이어 붙어있는 ‘애통하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 단어 ‘웨리브코타흐’는 스스로 감정을 자제하며 조용히 흘리는 눈물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왜 성경이 아브라함의 슬픔을 표현하는 데에 이렇게 각기 다른 의미의 두 종류의 단어를 연이어 반복하여 표현을 했을까요?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에 대해 두 가지 감구지회(感舊之懷)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사라에 대한 깊은 사랑을 대변하는 단어로 ‘리쓰포드’가 쓰인 것이고 아브라함이 갖고 있던 사라에 대한 부활 소망을 ‘웨리브코타흐’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라에 대한 사랑이 아브라함을 통곡하게 만들었지만 그에게는 부활 소망이 있었기에 ‘웨리브코타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슬픔을 자제하며 조용히 담담하게 아내의 죽음을 맞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성도의 죽음에 대한 관점과 태도에 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살전4:13)

13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이렇게 무섭도록 섬세합니다. 바로 그 부활 소망과 연결되는 단어 ‘웨리브코타흐’에 이어서 역시 부활을 상징하는 ‘얼굴 위에서 일어나다’ ‘파님 알 와야 쿰’이라는 어구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부활신앙으로만 이 땅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모든 이들이 두려워하는 육체의 죽음까지도 담담하게, 아니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의 죽음 뒤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죄와 허물과 아무 관계가 없는 완전한 부활의 몸이며 그 몸을 입고 살게 되는 행복과 기쁨과 안식과 평안의 영원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116:15)

15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14:13)

13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 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성경은 이렇게 성도의 죽음을 복이라고 까지 말을 합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렇게들 오래 오래 살고 싶어 할까요? 자기의 부활에 대해 자신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그는 확실한 부활 신앙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부활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땅을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진짜 고향은 이곳이 아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은 이미 하나님 아들의 나라로 옮겨져(1:13)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소유한 자라는 것을(3:20) 알았기 때문입니다.

 

(11:8~16)

8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9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13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 로라 증거 하였으니

14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 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

하셨느니라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면서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의 땅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약속의 땅이 자기가 딛고 있는 이 세상 속의 가나안이 아닌 다른 나라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는 신앙의 모습을 보였으나 그 곳에 집을 짓지 않고 장막에서 거한 것이며 한 평의 땅도 구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였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도 갈대아 우르에서 나서 아브라함과 함께 자랐습니다. 둘은 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이복 남매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 사라를 묻어야 했습니다.

짐승들은 죽을 때가 되면 고향을 찾아간다고 하지요? 그건 본능입니다. 대표적인 동물이 코끼리입니다. 여우도 죽을 때는 고향 쪽으로 머리를 두고 죽는 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도 죽을 때가 되면 고향을 생각하고 고향을 찾아 가고 싶어 합니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지요. 뿐만 아니라 망자는 고향에 묻는 것이 고대시대의 관습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사라의 매장지를 갈대아 우르가 아닌 가나안에 마련합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을 자신의 고향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사랑하는 사라가 죽었지만 하나님께서 자기와 사라에게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사라와 자신은 죽어도 다시 살아서 그 약속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부활 신앙이 그의 본향을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물론 그 것은 상징적인 땅이지만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아내를 매장함으로써 자신의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물리적인 가나안 땅에서의 부활을 기다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마 하신 하나님 나라를 그가 확고하게 믿고 소망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만일 그가 이 세상의 가나안에서의 부활을 기다렸다면 아브라함이 그의 재산으로 가나안 땅을 힘닿는 대로 조금씩 구입을 하거나 자기의 사병들을 동원해서 빼앗거나 하는 열심을 부렸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형의 가나안 땅에서 끝까지 믿음으로 진짜 하늘나라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살다간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의 삶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요, 최종목적지가 아니라는 확고한 부활신앙에 근거하여 격발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지금은 비록 보이지 않고 성취의 기미도 없는 것 같지만 그 언약을 확고히 붙들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소망하며 보이는 것들을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라를 다른 곳에 매장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 있던 사람이고 그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역시 그 가나안 땅의 막벨라 굴에 묻혔고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도 그 곳에 묻혔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일가가 모두 그 헤브론의 막벨라 굴에 묻힌 것입니다.

야곱은 애굽에서 죽었음에도 굳이 자기를 가나안에 묻어 달라했고 요셉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해서 요셉은 죽은 지 400년이나 지난 후에 가나안으로 돌아와 매장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의 육신의 숨이 끊어진다 해도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부활신앙이 우리 선조들의 삶 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절망의 나락에서 돈을 400세겔씩이나 주고 막벨라 굴을 사 버린 것입니다.

자기와 함께 언약을 받았던 사라가 죽었습니다. 자기도 이제 노쇠하여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이제는 누가 봐도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기는 틀렸다고 할 만큼 절망적 상황이 도래했지만 그래도 그는 믿었던 것입니다. 자기는 그곳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 아내와 자기의 장지를 가나안에 사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약속은 지켜질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살아 있을 때에는 자신의 의지로 그 가나안 땅에 머물러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이 죽은 후에는 다른 이들이 자기 시신을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은 거금을 주고 무덤을 사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은 이 땅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확고하게 붙들며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자기의 손해를 감수하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확신하고 그 아직 오지도 않았고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 나라에 자신의 소중한 물질과 시간과 능력과 힘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세상의 힘을 털어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사람에게 진짜 하나님 나라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가나안 땅 막벨라 굴 구입사건은 이 땅을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분명한 신앙 고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오늘날에 적용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날 성도인 우리에게 주어진 이 땅의 가시적 가나안이 어디입니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땅 가나안은 참 약속의 땅인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재의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약속의 땅이 무엇으로 주어져 있지요? 교회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 교회에서 세상과 구별된 나그네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성도인 것입니다. 성도는 교회에서 하나님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소망할 수 있어야 하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막벨라 굴에 자기를 묻어달라고 한 것처럼 여러분을 교회에다가 소망과 함께 묻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앙의 여정동안에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나그네로 살다가 교회에서 죽어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성도는 교회를 떠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우리의 희생이 요구됩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의 막벨라 굴을 사기 위해 자기의 것을( 400세겔) 희생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교회에서 물질과 시간과 힘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의 소유를 털어 예배당을 천국처럼 크게 지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건 마치 아브라함이 상징적 하나님 나라인 가나안 땅에 다가 성을 쌓고 멋진 집을 짓는 것과 같은 짓인 것입니다. 제 말은 우리의 이 세상 힘을 추구하던 삶을 돌이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 자신을 바치는 희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성을 쌓고 살지 않았습니다. 장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가나안에서 진짜 가나안을 바라보며 죽어서라도 그 하나님의 언약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자기와 후손들이 무덤자리 정도만을 산 것입니다. 자기 것을 희생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집 팔아서 교회 헌금할 생각마시고 빚내서 씨앗 헌금할 생각 마세요. 씨앗 헌금이라는 게 요즘 한국에서 유행한다고 하는데 집 팔고 빚 얻어서 교회에다가 씨앗으로 헌금을 해 두면 하나님께서 열배 백배의 열매로 돌려준다는 것이 씨앗 헌금이랍니다. 그건 투자지요. 아니 그 정도면 투기입니다. 그런 거 하지 마세요. 교회에 필요 이상의 돈이 들어오면 반드시 그 돈 때문에 문제 생깁니다. 교회는 우리 성도들이 흩어지지 않고 우리의 신앙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유지비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목숨 걸고 지켜내야 하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세상의 힘을 얻기 위해 세상에 온갖 힘을 쏟아 내느라 신앙을 잃어버리는 그런 삶에서 돌이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상 것을 손해 보는 그런 삶이 우리에게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아브라함의 막벨라 굴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교회의 존속과 유지를 위해서는 나의 것을 아낌없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시간, , 물질 그 어떤 것을 지불하더라도 소망의 보고인 교회는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2000년 동안 교회가 지켜진 것입니다. 수많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자기의 소유를 털어 세계 곳곳에서 그들의 막벨라 굴을 사는 것으로 교회는 이렇게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을 힘 삼아 살던 삶에서 돌이켜 우리가 소유한 이 세상의 힘을 값으로 주고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부인입니다.

 

아브라함이 소할의 아들 에브론으로부터 그 막벨라 굴을 거저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굳이 돈을 주었습니다. 그것도 시세보다 훨씬 비싸게 주고 샀습니다. 신앙의 보전과 교회의 보전은 우리의 희생이 수반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이들입니다.

요행이나 기적을 바라며 어떻게 해서든지 내 것을 손해 보지 않고 세상을 등쳐먹으려 하지 마세요.

 

오늘날의 교회는 너무 심한 거지 근성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사들도 다른 이들과 식사를 하면 당연히 자기는 얻어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필요한 일은 당연히 헐값에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무례하게 값을 깎습니다.

그건 현명한 것이 아니라 불신앙입니다. 엉뚱한 기대하지 마세요. 교회는 우리가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아무런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굴러갈 것이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털어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은 목숨처럼 여기는 힘의 상징인 돈과 명예와 시간과 노동력을 나를 증명하고 나를 자랑하는 도구로 삼아 살지 않겠습니다.’라는 고백이며 ‘우리 아버지는 천지 만물의 주인이시므로 내가 궁색하거나 인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헌금이요, 봉사요, 구제요, 선교요, 예배입니다.

값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나에게 약속된 하나님 나라가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시면 그 막벨라 굴이 밭의 끝에 있었다고 하지요? 밭은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것은 우리의 소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 소유의 끝에는 우리의 매장지가 있다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밭을 팔아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상속자인 아브라함이 겨우 얻은 가나안 땅이 그의 매장지였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성도가 받게 될 궁극적인 유업, 진짜 참 유업은 그의 죽음과 함께 받게 되는 하늘나라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밭을 팔아 매장지를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유를 팔아 교회를 사는 것이고 이 세상을 팔아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그 삶이 바로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부활신앙으로 이 세상을 팔아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삶을 사는 이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보이는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헷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방백’이라 부릅니다. 그 말은 당신의 하나님이 보내신 왕자요, 장군이라는 의미입니다. 가나안 원주님이었던 헷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러한 헷 사람들을 향한 아브라함의 태도를 보세요. 나이도 137이니 그들 중 누구보다 많았을 것입니다. 거느린 가솔도 만만치 않게 많습니다. 재산도 꽤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두 번씩이나 그들 앞에 정중히 몸을 굽히고 예의를 표합니다. (7,12)

 

부활 신앙을 가진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그들의 이웃에 대해 겸손합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거들먹거리며 어떻게 해서든 이 땅에서 자기의 잘남을 자랑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들은 겸손합니다. 그들은 나이브하며 염치(廉恥)가 있으며 정결(貞潔)한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그들의 염결성(廉潔)은 세상을 감동시킵니다.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부활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정말 영원을 믿으십니까?

아니 여러분은 정말 영혼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한시적인 이 세상에서 제한된 힘을 갖고 제한된 시간을 살다가 결국은 죽게 될 이 육신의 몸에서 관심을 돌려 우리의 영혼을 챙겨야 합니다.

세상의 힘이 여러분의 영혼을 살찌우지 못합니다. 돈과 명예와 인기로 여러분의 영원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배우십시오. 하나님 나라를 배우십시오. 그리고 이 땅에서 인색하게 잔머리 굴리며 온갖 사기와 임기응변과 권모술수를 동원해서라도 세상의 힘을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그런 추잡한 옛 사람의 삶의 방식을 저 멀리 던져 버리십시오. 세상의 힘은 분명 매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과는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이 마음에 드는 좋은 차를 갖게 되는 것은 참으로 그의 삶에 활력소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자기의 두 다리와 자동차를 바꾸는 바보는 없을 것입니다.

자동차는 두 다리가 없어지면 그에게 있어 아무런 효용도 가치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새 생명의 성숙과 자라남에는 전혀 관심도 없이 이 세상의 달콤한 힘에만 몰두 하는 것은 두 다리와 자동차를 바꾸는 바보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짜 중요한 것인지를 분명히 확인하고 사셔야 합니다.

 

지난 목요일 저녁이 우리 둘째와 셋째가 다니는 학교의 back to school night이었습니다.

학기가 시작되면 선생님과 학부모들이 모여서 아이들의 학습능력과 학습계획 등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으며 효율성 있는 교육을 도모하는 아주 의미 있는 날입니다.

아이들 선생님이 학교의 교육 방침과 자신의 교육 철학 등에 대해 열심히 말씀하시는데 제 눈에는 벽에 붙은 그 반 아이들의 글짓기 원고들이 가득 들어왔습니다.

선생님이 짧은 어구를 주면 그 어구 뒤에다가 글짓기를 하는 그런 수업이었던 모양입니다.

선생님은 그 아이들의 글을 아이들의 사진과 함께 벽에 모두 붙여 두었습니다.

그 날의 제시 어구는 ‘I believe~’였습니다. 아마도 지금 전 세계를 매료시킨 조엘 오스틴이나 로버트 슐러 식의 긍정적 사고와 적극적 사고를 교육하기 위한 글짓기였던 것 같습니다.

나는 미래에 이러저러한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매일 매일 다짐하고 확인하고 결단할 것이라는 그러한 교육 효과를 노린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의 대답은 대부분 대학진학이나 장래의 직업이나 갖고 싶은 것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하이스쿨에 들어가서 모든 과목에서 A를 받고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 세계적인 변호사가 될 것을 믿는다.’ ‘나는 우리 아빠가 첫 번째 자동차로 머스탱을 사줄 것을 믿는다.’ ‘나는 대학을 졸업한 후 멋진 요트를 사서 세계 일주를 할 것을 믿는다.’ ‘나는 매일 초콜릿 케이크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을 믿는다.’ 등등의 글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 막내 paul이 어떤 대답을 썼는지 너무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벽에 붙어 있는 글짓기 종이 위의 사진들을 훑어서 드디어 우리 아들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막내 아이의 글짓기 종이는 너무 황량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의 자기들의 꿈을 적기 위해 종이의 여백까지 사용하여 빽빽하게 글짓기를 한데 반하여 우리 아이의 글짓기 종이는 거의 대부분이 빈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썼는지 자세히 보았더니 우리 아이 왈 ‘I believe in God, Holy Spirit, Jesus’ 이렇게 딱 세 단어만 써 놓았더라고요.

저는 도대체 우리 아이가 무슨 생각으로 그 글을 썼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생각은 두 가지로 좁혀졌습니다. 그 것은 우리 아이가 선생님의 질문을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선생님의 질문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을 하고 마치 그런 질문을 한 선생님께 ‘선생님 우리의 미래는 그러한 긍정적 사고나 적극적 사고에 의해 개척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그렇게 마인드 컨트롤까지 해가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상의 힘을 쌓으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을 때 진짜 행복이 오는 거예요.’라고 항변하는 의미에서 그 글을 썼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물론 후자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자꾸 전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올라오는 것 왜인지 모르겠어요. 제 가 그 글짓기 게시판을 보면서 느낀 것은 온통 세상의 힘을 얻겠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달리는 세상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성실하고 정직하고 순결하게 살겠노라고 하는 성도의 모습은 저토록 외로운 것이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는 우리의 영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영원한 나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재물과 명예와 인기에 투자하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여러분의 새 생명의 성숙에 투자하는 시간과 노력이 얼마나 되십니까? 더욱더 진지해 지시고 더욱더 열심을 내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소유를 털어 밭 끝에 있는 막벨라 굴을 사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