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창세기

60 모리아 산의 여호와 이레를 통해서 본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지 (창22:1~19)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16:16

60 모리아 산의 여호와 이레를 통해서 본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지

 

 

 

 

(22:1~19)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4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 사환에게로 돌아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더라

 

  

저는 지난 달 브라질과 파라구아이 그리고 아르헨티나 유학생들과 현지 1.5세들 2세들이 모인 남미 코스타에서 아침 성경 강해를 맡아 매일 한 시간 반씩 나흘간 설교를 했습니다. 그 때 첫 번째 날 저의 설교 제목이이 복에 환장한 기독교인들아였습니다. 아주 원색적이고 공격적인 제목이지요.

그 제목은 전에 제가 한 번 설교 때 인용한 한국 불교계의 원로이신 휴암 스님의 글을 패러디한 것이었습니다.

 

 

휴암이라는 분이 한국 불교의 세 얼굴이라는 책에서이 복에 환장한 불교인들아, 너희들의 스승은 진리를 찾겠다고 왕궁과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가난과 고행과 수행의 자리로 갔거늘 너희는 진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스승의 이름을 부르며 스승이 버린 것을 달라고 조르고 있구나. 이 복에 환장한 불교인들아. 조국 대한민국의 불교인 수가 천 삼백 만에서 백 삼십 명으로 줄어든다 해도 그 빌어먹을 불교의 기복(祈福)사상은 깨져야 한다. 이 복에 환장한 불교인들아. , 내 조국 대한민국에 과연 불교가 존재하는가?’

 

 

저는 당시에 휴암의 이 글을 인용하여 읽으면서 누군가 영향력 있는 한국 교회의 원로께서 기독교를 향해서도이 복에 환장한 기독교인들아하고 외쳐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목소리를 높여 복에 환장한 기독교인들에게 경을 쳐 주시지 않아 제가 먼저 목소리를 높여 외쳤던 것입니다. ‘이 복에 환장한 기독교인들아

그런데 전 세계 기독교를 잠식하고 있는 번영의 신학, 기복 신앙에 대해 목이 터져라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는데 정작 알아듣는 사람들이 드물었습니다. 그만큼 작금의 기독교는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와 실용주의에 심하게 물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한 잘못된 패러다임을 버리지 못하고 오늘 본문을 해석을 하게 되면 오늘 본문의여호와 이레의 내용 또한 우리의 풍요와 성공의 필요를 채우시기 위해 동분서주 하며 준비하고 다니시는 우리의 종이신 불쌍한 하나님의 모습으로 귀결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본문을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께 내어놓아야 할 신앙의 행위의 측면으로만 바라 봐서도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아브라함이 백세에 낳은 이삭을 하나님께 아낌없이 바치는 모리아 산 사건입니다. 우리가 이 에피소드를 통하여 단순히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도 아낌없이 하나님께 바치는 믿음의 용사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고 그러한 결단을 하는 것에서 그친다면 우리는 성경이 이 이야기를 통해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반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 우리 인간 쪽에서의 행위를 배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만 머문다면 그동안 우리가 공부해 왔던 아브라함의 이야기의 일관성의 맥이 끊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모리아 산 사건을 하나님의 열심과 주권의 측면에서 하나의 그림을 그리는 한편 그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이끌려가며 자연스럽게 격발되어야 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삶의 측면 또한 여러분과 함께 나눌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상관관계에 대해 조금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주권과 그 분의 열심의 측면에서 바라본 모리아 산 사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에도 언급했다시피 아브라함의 이야기의 대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의한 하나님 백성들의 탄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말미암게 되는 약속의 후손, 즉 예수 안에 연합된 하나님 백성들의 탄생을 알기 쉬운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우상을 만들어 팔던 아버지 데라와 함께 세상의 상징인 바벨론(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셔서(소명) 그에게 믿음을 허락하시고(신앙) 그를 의롭다 칭하신 후에(칭의) 그를 진정 의로운 당신의 백성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성화, 영화)입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의 이야기 안에는 구원의 서정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이자 결론이 바로 오늘 본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여정 전체의 주도권을 누가 쥐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찾아오신 것도 하나님이요, 그를 값없이 의롭다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40여 년간의 방랑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만드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마지막으로 그를 모리아 산에 세우시고 그를 시험하여 합격 판정을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먼저 그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보자는 말입니다.

 

 

우리가 공부한 것처럼 하나님은 그렇게 불가능하고 무력한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을 22장의 모리아 산에서의 순종의 제사를 드리는 하나님 백성으로 완성시키시는 방법으로 하나님 당신 자신의 쪼개짐을 택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약속하시면서 쪼갠 고기 사이로 홀로 지나가심으로 아브라함의 후손,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의 탄생은 하나님의 자해 사건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힌트 하셨고, 창세기 16장에서 인간 쪽에서의 노력과 열심의 산물인 이스마엘을 등장시키심과 동시에 그를 기각시키시고, 17장에서 할례를 명하심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쪼개짐(할례)을 통해 탄생하게 될 것이며 그 쪼개짐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전가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17장의 할례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탄생은 죽어야 할 자 대신에 어린양의 모습으로 살해당하는 하나님의 십자가 할례(쪼개짐)로 이루어지게 됨을 조금 더 구체적인 그림으로 오늘 본문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사자는 성자 예수님이라 했지요? 예수님께서 그로부터 이 천년 후에 당신이 직접 쪼개져 죽으실 예루살렘의 시온 산에 오셔서 아브라함에게 십자가의 내용을 암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움으로 기다리다가 보았다(8:56)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골고다 언덕에서의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이어지는 것이고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 역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자해 사건인 십자가를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이삭은 자신이 매달려 죽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신 주님처럼 자신을 불태워 죽일 번제 나무를 짊어지고 모리아 산으로 오릅니다. 전에도 잠깐 언급해 드린 것처럼 이삭은 약속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 속에서 그와 연합되어 구원 얻게 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을 동시에 상징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심판대를 향해 자신이 매달려 죽어야 할 형틀을 짊어지고 올라가 처참하게 찢겨 죽어야 하는 죄인들 대신에 그 자신이 죄가 되셔서(고후5:21) 연약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죽으시는(쪼개짐, 할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모리아 산의 이삭과 어린양이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다시 구약의 제사 제도로 연결이 되어 구체적 실습의 단계로 넘어갑니다.

죽어야 할 죄인 대신에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이 대신 죽어 죄인의 죄를 대속하는 쪼개짐의 제사가 바로 구약의 성전 제사입니다. 죄인들의 구원은 바로 그러한 모양으로 주어지게 될 것임을 상징적으로 가르쳐 주시고 그 것을 실습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쪼개짐의 제사가 드려지는 성전은 바로 죽어야 할 이삭 대신에 어린양이 죽어서 이삭을 살려낸 모리아 산, 즉 시온 산에 지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의 모리아 산 사건이 어떻게 시온 산의 성전으로, 성전 제사로 이어지게 되는지 아시겠지요? 그러나 그 모리아 산에 선 성전에서 드려지던 성전제사도 원형은 아닙니다.

 

 

(9:9~12)

9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10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 이니라

11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그 모리아 산에 선 성전에서의 제사의 본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비유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제사의 본체이시며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는 그 모형인 성전과 제사가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로 그 모리아 산에 지어진 성전 앞에서 그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셨고 당신이 사흘 만에 다시 세우시겠다는(2:19) 장담을 하셨던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성전이시니까요.(2:21)


실제로 주님은 이삭이 올라갔던 그 모리아 산, 예루살렘에서 어린양이 되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진짜 성전, 진짜 제사, 진짜 모리아 산의 정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밝히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진짜 제사이며, 진짜 제물이시며, 진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이 자연스럽게 모형을 파괴하고 기각해 버린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과 10장의 이야기가 모두 그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약속의 자손은 하나님이 준비하신(여호와 이레)어린양에 의해 죄와 사망에서 건져지게 된다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게 여호와 이레입니다어떤 사람들은 여호와 이레 하면 으레 우리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모두 미리 준비해 놓으신다는 식의 아전인수 격 해석을 하곤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여호와 이레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연합되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탄생에만 적용이 되는 단어인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는 엉뚱하게 우리의 일상에 아무렇게나 적용을 해서주님이 다 준비해 주실 거야, 그러니 걱정 마라고 막 써 먹을 수 있는 그런 단어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준비하심에 의해 성취되고 완성되는 것이며 우리가 도달하려하는 참 행복과 만족의 고지도 하나님의 준비하심에 의해서만 주어지게 되는 것임을 고지하는 어구가 바로여호와 이레인 것입니다.


이렇게 모리아 산의 여호와 이레의 사건은 창세기 12장부터 시작된 아브라함의 이야기의 대단원의 결론이며 요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엉터리 아브라함을 모리아 산의 아브라함을 만드신 것이 자신의 쪼개짐을 근거로 한 하나님의 열심에 의한 것인 것처럼 우리 성도들의 탄생과 완성도 그렇게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시작되고 완성이 되는 것임을 모리아 산 사건이 결론지어 강하게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굳이 오늘 본문의 요절을 한절만 고르라면 8절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22:8)

8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게 바로 여호와 이레입니다. ‘죽어야 할 자 대신에 제물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은 도대체 어디서 그런 믿음이 나온 것일까요? 분명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죽여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음에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1:17~19)

17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8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 이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려 내실 것임을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정말 이삭을 죽이실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알고 있는 한 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기 아들을 살려 내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지요?

아브라함은 40여년 이상을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고 경험했습니다. 애굽왕 바로와 그랄 왕 아비멜렉까지도 벌벌 떨게 하시는 하나님, 도저히 불가능한 마른 막대기 같은 자기 부부에게서 새 생명을 탄생케 하신 하나님,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다시 약속의 땅으로 밀어 올리시는 하나님, 그렇게 당신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내시는 하나님을 배우게 된 아브라함은 이삭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 또한 실패치 않고 지켜질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어떤 약속이지요?

 

 

(17:19)

19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여전히 이스마엘에게 애착을 갖고 있었던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약속하시면서 이름까지 지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직접 그 약속의 자손 이삭과 그의 후손들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 장가도 못간 이삭이 죽는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지켜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기나긴 신앙의 여정 동안에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엄위하심과 신실하심을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백세에 낳은 자식, 즉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는 참된 순종의 예배자로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과 신앙의 여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가지며, 그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항복하는 자로 성숙되어지고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의 유일한 목표지점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모리아 산으로 끌려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브라함이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 아니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 것처럼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 아니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항복과 순종의 자리, 다른 말로 예배의 자리를 향해 성숙되어져 가는 것이고 완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화입니다그리고 종국에는 하나님의 마지막 시험에 멋지게 통과하여 영화의 단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한 마디로 이 땅에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예배의 삶을 배우고 참 예배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배가 뭡니까? 하나님께 온전히 항복하고 순종하여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무력함과 불가능함과 피조물 됨을 인정하고 그 분께 나를 온전히 드리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바로 그 예배의 삶을 배우고 익히며 경험하다가 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배운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피조물들이 온전한 마음으로 진심에서 우러나와 당신을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소 요리 문답 1번의 질문,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영원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영원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스스로 자기 인생의 왕이 되어 살겠다고 하던 그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께 항복하고 그 분께 순종하며 예배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자신을 예배하던 자들을 돌이켜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로 바꾸어 놓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12:914)

9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

10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로 너희 사방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로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에

11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 물을 가져가고

12너희와 너희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

13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든지 번제를 드리지 말고

14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의 택하실 그곳에서 너는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 할지니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어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시는 이유를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제사, 곧 예배를 하게 만드시기 위함이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겠다고(3:5) 예배의 삶을 잃어버린 당신의 백성들을 돌이켜 당신을 예배하는 자리로 다시 불러 들여 그들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허락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죽이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그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성전 제사의 원형에 대해 이렇게 기술합니다.

 

 

(8:5)

5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성전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참 예배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히브리서의 내용과 신명기 12장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확실하게 답이 나오지요?

하나님은 우리 성도를 구원하셔서 하나님 나라에서 당신을 온전히 예배하는 자들로 완성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에 한번 씩이라도 모여서 그 하나님 나라에서의 예배의 삶을 모형으로나마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당신의 백성들에게 명령하신 것처럼 일주일 동안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여 그 정복한 결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 온전히 예배드리는 그 천국의 삶을 미리 조금 맛보는 자리가 바로 오늘 이 예배의 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돈에게 지배당하지 않고 이렇게 돈을 지배하여 하나님 앞에 순종시킵니다

하나님 저는 세상 쾌락에 지배당하지 않고 이렇게 그 모든 욕구들을 쳐서 하나님 앞에 복종시킵니다.’

그게 예배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우리의 삶 전체를 예배로 드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12:12)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보시다시피 구약에 성전 제사가 있었다면 신약 시대에는 산제사가 있습니다. 제사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제물이 바뀐 것뿐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물이 송아지와 염소와 양등의 짐승들이었다면 신약 시대의 제물은 바로 성도 자신인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 앞에 복종시켜 산제사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성도는 가장 행복합니다. ? 하나님 백성들의 창조의 목적이 바로 예배의 삶이니까요. 그러니까 성도는 주일에 한번 모여 예배를 드리고 나머지 시간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일에 모여 전심으로 예배를 하고 그 마음으로 나머지 시간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행복 지수 1위인 곳이 어디인줄 아십니까?

바누아트라는 섬입니다. 그 바누아트는 세계 극빈 국 중의 하나입니다. 가장 가난한 곳에서 어떻게 행복지수가 가장 높게 나올 수 있을까요세계 유수의 방송국 기자들이 그 것이 궁금해서 취재를 해 본 결과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욕심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꿈도 없고 야망도 없습니다


얼핏 들으면 그런 바보 같은 삶이 어디 있나 하시겠지만 그게 바로 자기 부인인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으면 없는 대로 많이 가진 사람은 그 자리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며 사는 것입니다. 정 가진 것이 없어 배가 고프면 바다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아 배를 채웁니다. 갯벌을 파서 게를 잡아 구워 먹습니다. 나무 열매로 배를 채우기도 합니다. 그렇게 먹다 남은 것은 이웃과 나눕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난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랍니다.



한국에 우리 서머나 교회 인터넷 교인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 중에 제가 참 존경하는 장로님이 한 분 계십니다. 그 분은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수천억 원을 들었다 놓았다 하시던 거부이셨습니다. 그런데 10년 전부터 사업이 기울어지고 급기야는 하루 먹거리 마련도 어려운 상태까지 내려 가셨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몸에 병이 생겨 외부 출입도 못하십니다. 거기다가 자식까지 병을 얻어 큰 수술을 했습니다. 이쯤 되면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런데도 생활비를 쪼개서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계십니다. 얼마 전 그 분과 통화를 했습니다. 이제는 생활이 더 어려워져서 생활비가 한 달 치밖에 남지 않으셨다고 하셨습니다그런데도 목소리가 너무 밝았습니다. 이제는 가난도, 무시당함도, 그 어떤 고난도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당신을 지어가고 계신데 뭐가 두렵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난을 통하여 당신의 신앙을 공고히 다져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하셨습니다그리고는 그 달에도 자기에게 남은 한 달 치 생활비를 쪼개어 그동안 자신이 도와주던 사람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자기가 그 돈을 아껴서 그 불쌍한 사람들을 돕지 않으면 한 달은 더 버틸 수 있지만 한 달 더 버티자고 다른 이들을 굶길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달 먼저 굶으나 한 달 뒤에 굶으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그 상황 속에서 행복이란 말을 꺼낼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 장로님은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몸이 아파 밖에 나가지 못하니 매일 설교 테잎을 네다섯 편을 반복해서 들을 수 있어서 행복하고 돈이 없어서 사치하지 않을 수 있어서 행복하고 돈이 없는데도 부끄럽지 않은 신앙인으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고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설교 덕택에 이렇게 풍요에도 비천에도 처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고요.

여러분,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상황을 허락하셔도 그 속에서 만족하고 행복을 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드릴 예배의 삶인 것입니다.

 

 

 

다음 주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주권과 열심에 반응하여 나오게 되는 우리의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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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미 공부했다시피 창세기 1장은 우리 성도들의 새 창조와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을 미리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첫 창조는 그 자체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언약을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 강해 참조) 그 창세기 1장을 창세기 1 1절과 2 4절이 샌드위치의 빵처럼 싸고 있다는 것을 아세요? 두 구절을 원어로 비교하여 보면에레쯔(), 솨마임(하늘들), 엘로힘(하나님), 바라(창조하다)’등의 똑같은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히브리 문학의 기법 중에 수미(首尾)일치법(inclusio)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양쪽에 주제를 두고 가운데에서 그 양쪽을 덮고 있는 주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기법입니다. 지금 창세기 1장은 바로 수미일치법으로 기록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을 잘 공부하면 하나님께서 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는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혼돈(formless)과 공허(empty)의 상태, 즉 무()의 상태에 틀(structure)을 만드시고 공허(empty)를 내용(contents)으로 채우셨습니다. 그게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의 창조와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창조가 담고 있는 내용이라 했지요?(그런데 contents structure(언약)를 무너뜨린 것이 타락, 그래서 예수님이 사흘 동안 무덤 속에 계심으로 셋째 날까지의 structure와 언약을 회복시키시는 것임) 그리고는 일곱째 날에 안식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일곱째 날에는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일곱째 날이라는 창조의 후렴구가 없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안식, 즉 일곱째 날은 끝없이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신학자들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안식이 깨졌다는 표현을 하는 것은 이 세상의 관점으로, 역사 속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보았을 때 그러하다는 것이지 한 번 안식에 들어가신 하나님은 절대 그 안식에 실패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분은 전지전능하신 분 이시니까요.

 

 

하나님은 영원 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것이 어떤 것을 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엿새 동안의 사역이 너무 힘들어서 숙소로 돌아가 쉬셨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히브리어의 안식이라는 단어솨바트마땅히 가야할 곳으로 가다, 제 자리에 앉다라는 뜻입니다.

 

 

(66:1~2)

1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가 하나님의 궁전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피조물들을 아우르시며 좌정하시고 모든 피조물은 그 앞에 예배하는 것이 바로 안식입니다. 하늘에서는 이미 그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이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안식은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들에게 예배를 받는 것이고 피조물의 안식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분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안식입니다.

따라서 참 된 안식은 하나님이 좌정하고 계신 하나님의 보좌 아래에서 자기가 왕인 줄 착각하고 자기를 숭배하며 살던 자들이 그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께 항복하고 그 분께 순종하며 예배하는 자리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참 된 행복이며 참된 안식인 것입니다.

그 참된 안식을 우리가 주일날 모이는 공 예배 시간에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섯째 날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지키고 정복하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다스리고 지키고 정복하여 그들을 이끌고 일곱째 날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오늘날 예배의 모형인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엿새 동안 열심히 살아서 세상을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하는 일을 하게 되면 우리에게 결실로 주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이지요? 그래서 예배의 요소 중에 헌금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렇게 엿새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열심히 세상을 다스리고 지키고 정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제가 세상()에게 정복당하지 않고 세상을 정복하여 이렇게 결실을 맺었습니다. 여기 저의 엿새 동안의 삶이 있습니다. 받으시옵소서.’가 바로 헌금인 것입니다. 바로 창세기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나의 순종과 복종의 삶을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이 헌금인 것입니다.

 

하와가 다스려야 할 뱀에게 오히려 유혹을 당함으로 질서가 깨지고 예배의 삶이 금이 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스려야 할 이 세상 것들에게 우리가 명령을 받고 살고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첫 번째 아담 속에 들어 있는 자일지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의 대표 격인 돈을 다스려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돈 때문에 예배를 거르는 것은 돈에게 명령을 받고 있는 형국인 것입니다.

 

 

골프에게 명령을 받고, 피크닉에게 명령을 받고, 게으름에게 명령을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성도는 세상을 다스리며, 지키며, 정복하여 하나님 앞으로 끌고나와 예배하게 하는 worship leader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안식은 일주일에 한 번 오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순간이 안식이지요? 하나님 나라 자체가 안식의 나라이니까요.

그래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인 성도는 매 순간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 하나님께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거룩한 산제사입니다.

그러한 성도의 삶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이 주일 공 예배이고요.

 

 

우리는 주일 날 온 교회가 모여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공부할 때 살펴보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성도는 그리심 산이나 시온 산이 아닌신령과 진정으로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거기서 신령은 성령이요 진정은알레떼이아’ ‘실체라 했지요? 히브리서의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에서실상이 바로알레떼이아입니다. 그러니까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던 그림자로서의 제사장이나, 제물이나, 제사나, 성전 등의 모형이 아닌 실제 예수님이라는 제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구약의 모형들로는 우리가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10:1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실체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근거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의 자리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로의 부르심의 자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배의 자리에서 구원의 감격과 함께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위대하심 앞에 납작 엎드려 그 분의 영광을 찬양하며 그 분께 순종의 제사, 경배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한 것처럼 그 것이 바로 성도의 안식입니다. 주일 예배는 성도에게 있어서 빼먹을 수 없는 감격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치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지 못한 자들처럼 요리 조리 피해 다닐 궁리만 하는 이들은 아직도 진정한 안식이 뭔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우리는 어떠한 존재인지,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인지를 잘 모르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일로 예배를 빼 먹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유일한 안식의 자리인 예배를 아무런 가치 없이 여긴다는 것은 그가 지금 다른 것으로 안식을 얻고 있다는 증거이니까요.

여러분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오직 그 분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데에서 안식을 얻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여러분 자신과 이 세상의 이름을 부르며 그 것들을 숭배하고 예배하며 살 때 여러분은 끝없는 다툼과 갈등과 고통 속에서 한 시도 쉬지 못하고 지옥으로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 하나님과 맘몬,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서섬기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예배하다입니다. 여러분은 절대 세상과 아니 여러분 자신과 하나님을 둘 다 예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오롯이 예배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부인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야망, , 욕심 다 내려놓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 뜻을 좇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사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