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창세기

57 네 일이 다 선히 해결 되었느니라 (창20:1‐18)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16:13

57 네 일이 다 선히 해결 되었느니라

 

 

(20:118)

 

1 아브라함은 마므레에서 네겝 지역으로 옮겨 가서, 가데스와 수르 사이에서 살았다. 아브라함은 그랄에 잠시 머문 적이 있는데,

2 거기에서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를 사람들에게 자기 누이라 소개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서, 사라를 데려갔다.

3 그런데 그 날 밤에 하나님이 꿈에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네가 이 여자를 데려왔으니, 너는 곧 죽는다. 이 여자는 남편이 있는 여자다."

4 아비멜렉은, 아직 그 여인에게 가까이하지 않았으므로, 주님께 이렇게 아뢰었다. "주님, 주님께서 의로운 한 민족을 멸하시렵니까?

5 아브라함이 저에게, 이 여인은 자기 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이 여인도 아브라함을 오라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깨끗한 마음으로 떳떳하게 이 일을 하였습니다."

6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나는, 네가 깨끗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잘 안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지켜서, 네가 나에게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 여인을 건드리지 못하게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7 이제 그 여인을 남편에게로 돌려보내어라. 그의 남편은 예언자이므로, 너에게 탈이 나지 않게 하여 달라고 기도할 것이고, 너는 살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너에게 속한 사람들이 틀림없이 다 죽을 줄 알아라."

8 ○다음날 아침에 아비멜렉은 일찍 일어나서, 신하들을 다 불렀다. 그들은 왕에게 일어난 일을 다 듣고서, 매우 두려워하였다.

9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불러들여서, 호통을 쳤다. "당신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소? 내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나와 내 나라가 이 크나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말이오? 당신은 나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거요."

10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도대체 어째서 이런 일을 저지른단 말이오?"

11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이 곳에서는 사람들이 아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나의 아내를 빼앗으려고 할 때에는, 사람들이 나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12 그러나 사실을 말씀드리면, 나의 아내가 나의 누이라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내는 나와는 어머니는 다르지만 아버지는 같은 이복 누이이기 때문입니다.

13 하나님이 나를, 아버지 집에서 떠나서 여러 나라로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부탁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곳으로 가든지, 사람들이 나를 두고서 묻거든, 그대는 나를 오라버니라고 하시오. 이것이 그대가 나에게 베풀 수 있는 은혜요' 하고 말한 바 있습니다."

14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양 떼와 소 떼와 남종과 여종을 선물로 주고, 아내 사라도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냈다.

15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나의 땅이 당신 앞에 있으니, 원하는 곳이 어디이든지, 가서, 거기에서 자리를 잡으시오."

16 그리고 사라에게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대의 오라버니에게 은 천 세겔을 주었소. 이것은, 그대와 함께 있는 여러 사람에게서 그대가 받은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보려는 나의 성의의 표시요. 그대가 결백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될 것이오."

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그의 여종들이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태를 열어 주셨다.

18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데려간 일로, 주님께서는 전에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여자의 태를 닫으셨었다.

 

 

 

 

우리는 지난주에 약속의 후손인 이삭이 태어나게 되는 창세기 21장의 바로 앞 장에 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파렴치한 실수의 에피소드가 기록이 되어 있는지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왕 바로에게 아내를 빼앗겼던 사건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필요했던 사건이었으나 두 번째 그랄 왕에게 아내를 주었던 사건은 아브라함의 정체성 확인에 관한 사건이라 했지요?

 

 

우리는 자칫 19장까지의 내용을 공부하면서 아브라함이 꽤 괜찮은 사람인 것으로 오해 할 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괜찮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택하신 것이고 그렇게 자격이 있는 그에게 약속의 후손을 주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충분한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의 후손이 태어나는 21장 바로 앞의 20장에서 아브라함이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 한 번 폭로하시고 그렇게 부족한 아브라함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에게 부어져 약속의 후손이 출생하게 되는 것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지난주에 창세기 20장의 내용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해석을 해 보았다면 오늘은 같은 본문을 성도의 현실로 끌어들여 성도의 삶의 실제적인 교훈을 얻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에도 잠깐 살펴보았지만 창세기 20장의 주요 등장인물인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을 비교해 보았을 때 아브라함은 오히려 아비멜렉에 비해 도덕적으로나 인격적으로 형편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브라함의 편을 들어 주셨고 결국 아비멜렉으로부터 많은 재물과 가축과 노비들과 땅까지 빼앗아서 아브라함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혹자들이 하나님은 당신을 잘 믿는 사람들에게 세상적인 축복도 함께 주신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가요? 창세기 20장의 아브라함이 정말 하나님을 잘 믿어서 복을 받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형편없이 무너졌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놓지 않더라는 은혜의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아비멜렉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많은 전리품 아닌 전리품을 챙기는 모습이 등장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잘 믿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세상의 것들로 복을 주신다는 그런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더 훌륭한 아비멜렉에게 협박을 하시면서 까지 파렴치한 행동을 한 아브라함을 위하시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편파적이지 않습니까?

성경을 보면 그런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135:34,812)  3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을 찬양하라  4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8저가 애굽의 처음 난 자를 사람부터 짐승까지 치셨도다  9애굽이여 여호와께서 너의 중에 징조와 기사를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복에게 임하게 하셨도다  10저가 많은 나라를 치시고 강한 왕들을 죽이셨나니  11곧 아모리인의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 가나안의 모든 국왕이로다   12저희의 땅을 기업으로 주시되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셨도다

 

 

3절을 보시면 여호와는 선하시며 이름이 아름다우신 분이라는 찬양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선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는 그 이스라엘을 위해 애굽의 장자들을 모두 죽이시고 짐승들까지 모두 죽이셨다고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신 이스라엘을 위해 많은 나라를 치시고 왕들을 죽이셨으며 그들의 땅을 빼앗아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러한 일을 하신 하나님을선하다, 아름다우시다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4절을 보시면 그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 당신을 위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당신의 언약을 따라 당신의 백성을 건져내셔서 당신이 원하시는 자들로 만들어 그들에게 기업을 선물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 모든 일은 당신의 백성을 위한 일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당신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대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한 모든 일은 다 선인 것입니다.

이 시편 135편의 내용과 오늘 본문을 잘 연결해 보세요. 하나님 앞에서 줄곧 불순종과 우상 숭배의 죄를 지었던 이스라엘을 위해 열국과 열 왕을 쳐서 결국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의 모습과 파렴치한 죄를 짓고 있는 아브라함의 편을 드셔서 아비멜렉의 재산과 땅을 빼앗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야기가 마치 동 사무소에서 비닐 종이에 인감도장을 찍어 원본과 맞추어 보는 것처럼 들어맞지 않습니까?

 

 

본문 16절을 보시면 아비멜렉이 사라에게네 일이 다 선히 해결 되었느니라하고 위로를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보세요. 아비멜렉이 그 모든 일의 결과를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에는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자격이나 노력이나 열심이 손톱만큼도 개입되지 않은 온전한 하나님만의 작품입니다. 그렇지요? 오히려 인간은 계속하여 불가능하고 추악한 모습만 보이는데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따라 부지런히을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새 창조를 완성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선’이라는 말을 구약에서 찾으면 최초로 창세기의보시기에 좋았더라에서 찾을 수 있다 했지요?

‘좋았더라’토브입니다. ‘은 그렇게 창조에 관한 단어인 것입니다. 신약의 표현으로 하자면은 새 창조, 즉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관한 단어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인간의 도덕이나 윤리나 자격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과 그 분의 열심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시편 136편에도 똑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하고 감사하라는 후렴구 앞에 찬양과 감사의 내용이 나오는데 그게 전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엉뚱한 나라와 백성들을 쳐 죽이신 것들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애굽의 장자를 치신 것,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빠뜨려 죽이신 것,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것, 바산 왕 옥과 아모리의 왕 시혼을 죽이신 것, 그리고 저희 땅을 빼앗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을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라 부르며 그 내용을 찬양하고 감사하라고 합니다.

 

 

세상 적 관점에서 볼 때 어떻게 그걸 선이라 할 수 있으며 어떻게 그러한 일을 하신 하나님을 선하다, 인자하다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당신 자신의 계획과 목적을 위해 그러한 편파적인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선하다하고 인자하다 하며, 오늘 본문도 세상 적 관점으로 볼 때 아브라함보다 훨씬 훌륭한 아비멜렉을 위협하여 아비멜렉의 재산과 땅을 빼앗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처사를이라 결론짓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말씀드린 대로 성경이이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잣대로 규정하고 판단하는 것으로 정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선이라 정의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에 거기까지 간단하게 정리를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당신의 백성들과 영원히 함께 거하실 하나님 나라를 계획하셨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홀로 완성시켜 내시는 그런 은혜의 땅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에 꼭 필요한 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탄생이었고 그 백성들의 탄생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땅과 역사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탄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당신의 나라에 적합한 자들로 훈련하시고 연단하시면서 성숙시키고 완성해 가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나라에 당신과 영원히 살게 될 당신의 백성들에게만 관심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들이 다른 이들보다 잘나서도 아니고 그들이 다른 이들보다 성실하거나 순결해서도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불순종과 우상 숭배와 파렴치함으로 옛 사람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열심으로 그들을 목표지점으로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 창세전에 당신의 언약 속에서 그들을 택하셨기 때문에.

성경이 그렇게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과 약속과 영광을 위해 당신의 일을 열심히 해 나가시는 그 모든 것을하다 하는 것입니다.

 

 

(40:15~17) 15 그에게는 뭇 나라가, 고작해야,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 물이나, 저울 위의 티끌과 같을 뿐이다. 섬들도 먼지를 들어 올리듯 가볍게 들어 올리신다.

16 레바논의 삼림이 제단의 장작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 곳의 짐승들도 번제물로 드리기에 충분하지 않다.

17 그 앞에서는 모든 민족이 아무것도 아니며, 그에게는 사람이란 전혀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보시다시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없는 열방을 한 방울 물처럼 여기시고 티끌로 여기십니다. 당신의 백성이 없는 섬들은 그 분에게 먼지입니다. 당신의 백성이 없는 열방은 그분에게 아무 것도 아닌 것이고 그 곳은 하나님 앞에서없는 것, 빈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이 되는데 그 나머지는 그냥 빈 것, 없는 것으로 취급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애굽의 장자들을 모두 죽이신 것이나 가나안의 열 왕들과 나라들을 죽이시고 깨뜨리시고 그들의 소유를 빼앗은 일들은 더러운 먼지나 티끌을 청소한 것과 방불한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하나님의 백성들만 보이니까요. 따라서어떻게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구하시기 위해 죄 없는 왕들과 백성들과 나라들을 집단 살육하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 분 앞에서의 열방과 열 왕이 어떤 존재로 여겨지는지를 알지 못하는 아주 우매한 질문인 것입니다. 휴머니스트들이 들으면 돌 들고 달려들 말인 것 같지만 그게 진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피조물은 티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티끌이 아닌 당신의 자녀로 삼아 버리신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여전히 티끌인데 우리만 그 분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만을 바라보시며 우리의 성숙과 우리의 하나님 나라 입성에 다른 티끌들을 엑스트라로 사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티끌들이 때로는 하나님의 모든 것인 우리보다 더 잘나 보이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훨씬 뛰어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게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창세전에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의 성숙과 완성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계신 것입니다.

 

 

(3:2)  2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이 어찌 이스라엘만 아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만 관심을 두고 계셨기에 그들만을 알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의알다라는 단어는사랑하다라는 의미를 함의하는 단어라 했지요? 하나님은 창세전에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만 사랑하시고 그들만 아는 것처럼 역사를 경륜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죄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해결하시고는 그들의 죄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으십니다.

그래서 약속의 자손을 낳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죄가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마치 아브라함의 죄를 보지 않으시는 것처럼 아브라함의 편을 드신 것입니다.

 

 

(23:21) 21 주님께서는 야곱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하셨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서 어떤 잘못도 발견하지 못하셨다. 그들의 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신다. 주님을 임금으로 떠받드는 소리가 그들에게서 들린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러한 은혜를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엄청난 은혜를 받은 아브라함이 여전히 불순종하며 불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참으로 철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바로 그 아브라함의 자리에 우리를 세워 놓고 오늘 본문을 보자는 말입니다.

그렇게 놀라운 은혜를 입은 아브라함이 어떠한 실수를 했는지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각오를 다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첫 번째 실수는 롯이 안목의 정욕의 최후의 보루인 소알을 끝까지 놓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풍요를 좇아 이사를 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사귐의 장소였으며, 약속을 받은 곳이었고, 풍성한 은혜의 제단이 있었던 헤브론, 마므레를 떠나남방으로이사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아브라함이 남방으로 이사를 했을까요? 남방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목입니다. 애굽은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풍요의 땅인 세상을 상징하는 나라입니다. 그가 남방으로 내려가 거한 땅은가데스와 술 사이입니다.

 

 

가데스라는 말은거룩한 샘이란 뜻으로 민수기에서는 가데스바네아로 소개가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32:8) 이곳은 신 광야에 위치한 오아시스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한동안 머물렀던 곳입니다.(1:46) 그리고성벽이란 뜻으로 출애굽 한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에 제일 먼저 거처한 곳입니다. 그리고그랄거처라는 뜻으로 한때 아브라함과 이삭이 기근을 피하여 내려갔던 땅입니다.(26:16) 그랄은 그 이름대로 거처하기에 좋은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마므레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지켜본 뒤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더 안전하고 풍요한 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이 더 나은 세상살이를 위해 제단을 떠나 거처하기 좋은 땅으로 이사를 한 것에서부터 사건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계획 속에 들어 있는 성도들은 예배의 자리, 하나님과의 사귐의 자리를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한 하나님의 치열한 열심 앞에서 우리가 예배와 사귐의 자리를 떠나 나의 배를 위해 세상의 풍요를 좇는 삶을 산다면 그게 어찌 가당하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제단을 떠나 그랄로 이사를 한 아브라함은 즉시 사람들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20:11) 11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이 곳에서는 사람들이 아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나의 아내를 빼앗으려고 할 때에는, 사람들이 나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을 멸하러 가시는 하나님을 직접 뵙고 그 분과 장시간 이야기도 나누었으며 그 분의 약속을 따라 철옹성 같았던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의 불로 삽시간에 잿더미가 되는 것도 눈으로 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불신앙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능력보다 세상 왕의 칼이 더 무서웠던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고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한 자다(요일4: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께 순종하는 성도는 그 어떤 것 앞에서도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그 사랑을 체감하고 이해하고 있는 성도에게는 이 세상 그 무엇도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께 자신의 전부를 의뢰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가난, 질병, 권력, 폭력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천지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그 분이 나의 인생을 당신을 위해 선으로 이끌고 가시는 길에 생긴 가난이요, 질병이요, 폭력이요, 억지라면 그것들은 내가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합력시켜 나의 선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 적 풍요와 자랑을 위해 남방으로 이사하여 그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 모든 것들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모든 것들은 내가 그랄에 머물고 있는 이유와 목적에 정확하게 반대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제단을 버리고 풍요를 찾아 이사를 온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의 칼이 두려운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통해 보았듯이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생각한 것처럼 아흔 살이나 먹은 첩 하나 얻기 위해 남편을 죽이는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경고를 듣자마자 아침 일찍 일어나 그 일을 바로 잡으려 했고, 아브라함을 불러 네가 나를 큰 죄에 빠지게 할 뻔했다고 경책하고 그러한 일은 합당치 않은 일이라고 경고를 할 만큼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아브라함보다 나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싸이자 판단력이 흐려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아닌 세상이 두려워 질 때 우리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세상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꾀와 자신의 힘으로 그 두려움을 극복하려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애굽에서와 똑같이 약속의 후손의 어미인 아내 사라를 그랄 왕에게 주어 버립니다.

 

 

당시 고대 시대에는 큰 힘을 소유한 영주들이나 왕들이 서로의 유익을 위해 정략결혼을 많이 하던 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딸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의 안전과 풍요를 위해 아내를 정략결혼의 제물로 내어 놓은 것입니다. 다른 말로 자신의 풍요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약속을 잉태하고 있는 아내를 세상에게 팔아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티끌인 아브라함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그만을 바라보며 선으로 이끌고 계시는데 아브라함이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본문 속의 아브라함의 행태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나도 계속 실수하면서 살아야지입니까? 아니면나는 아브라함처럼 바보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으십니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죄는 반복적이며 의도적이며 계획적이었습니다.

 

 

(20:13) 13 하나님이 나를, 아버지 집에서 떠나서 여러 나라로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부탁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곳으로 가든지, 사람들이 나를 두고서 묻거든, 그대는 나를 오라버니라고 하시오. 이것이 그대가 나에게 베풀 수 있는 은혜요' 하고 말한 바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안전과 풍요를 위해 자기 아내를 다른 남자들에게 넘겨주기로 한 것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부터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하나님과 수시로 만나고 대화하며 그 분의 능력과 선하심과 성실하심을 배웠습니다. 그럼에도 자기의 유익을 위한 잔꾀는 꼭꼭 숨겨두고 버리지 못하며 그 것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실수는 절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계획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악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는 그 어떤 체험이나 배움도 다 망각해 버리는 약하고 추한 동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하나님이 그러한 자들을 놓지 않으시고, 그들의 허물도 보지 않으시며 당신의 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습니까? 나의 세상 적 유익을 위해서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고수하고 있는 나의 잔꾀가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그 꾀가 수시로 나를 죄의 자리로 끌어내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수요 성경공부 때도 확인해 보았지만 성도가 죄에서 해방되지 못하면, 다른 말로라는 존재에게서 풀려나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자아 숭배라는 우상 숭배를 하다가 사망의 자리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을 숭배할 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요즘 매일 성경을 가지고 큐티를 하고 있는데 지난주 본문이 사무엘 상28장이었습니다. 그 사무엘상 28장의 내용 중에서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올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이 많이 혼란스러우셨던 모양이에요. 여러 교인들이 그 부분을 질문해 오셨습니다. ‘죽은 사람의 귀신이 정말 존재 하느냐에서 부터정말 신접한 무당이 죽은 영혼을 불러올릴 수 있는가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좋은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 장면은 귀신의 존재여부나 무당들이 영혼을 불러올릴 수 있느냐 없느냐, 혹은 그 사무엘의 영혼이 진짜 사무엘의 영혼이냐 아니면 악령이냐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힘을 동원하려고 하는 자들의 말로에 대한 경고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삼상28 7절을 보면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는데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고 명령을 합니다. 사울의 관심은 온통 자기 자신의 유익이었습니다. 그가 신접한 여인에게 죽은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한 것은 사울의 마음속에 사무엘이 섬기던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던 이유는 순전히나를 위하여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의 힘을 수단과 방법으로 동원하는 사울과 그 아들들을 사무엘처럼 죽은 자 가운데 있게 하실 것을, 다른 말로 죽여 버리실 것임을 포고하신 것입니다.

이렇게에게서 자유롭게 벗어나지 못한 죄인들은 자기들의 잔꾀를 의지하여 항상 하나님을 수단과 방법으로 동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죄입니다. 심지어 반복적이고 계획적이며 의도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모든 죄는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나를 숭배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므로 모든 죄는 하나님께 대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창조된 자들이지 자기를 숭배하도록 창조된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3:7, 12:914)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네가 내게 범죄 하지 않게 하기 위해 내가 너를 막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0:6)

6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 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만약에 아비멜렉이 사라를 범했다 하더라도 그건 아브라함이나 사라에게 죄를 범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아비멜렉의 죄를내게 짓는 죄라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여 아이를 갖게 하고 그것이 들통날까봐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여 버렸을 때에도 다윗은내가 하나님께만 범죄하였다(51:4, 삼하12:13)고 고백을 했습니다.

탕자도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다(15:18)’고 하였습니다. 요셉도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면서내가 어찌 하나님께 득죄하겠습니까?(39:9)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모든 죄는 그 경중 여하를 막론하고 다 하나님께 짓는 죄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그 형량은 사형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죄는 천지만물의 왕이신 하나님을 대상으로 짓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죄만으로도 사형을 면키 어려운데 우리는 수시로 죄를 짓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 죄 값을 다 치르려면 정몽주의 시구(詩句)처럼 골백번 고쳐 죽어도 모자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신 예수의 대신 죽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대신 죽음을 이해한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득죄하지 않기 위해 매일 매일을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의 삶 속에서 죄와 싸우려는 분투가 없다면 우리가 무엇으로 세상과의 구별을 이야기하겠습니까? 성도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자기 자신을 숭배하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죄와 싸우는 것이고요.

성도들이 정작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온통 자기의 자랑과 증명과 숭배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가 이렇게 욕을 먹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시면 오히려 세상을 대표하는 아비멜렉이 성도의 대표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야단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20:910)  9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리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 하였관대 네가 나와 내 나라로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치 않은 일을 내게 행 하였도다 하고  10.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의견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여러분, 우리 교회가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야단을 맞는 삶을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세상을 책망하며 심지어 세상을 심판해야 할 성도가 세상으로부터 야단을 맞는 삶을 산다는 것 자체가 웃지 못 할 코미디 아닙니까? 아비멜렉은 자신의 삶에 대해 자신이 있었습니다.

 

 

(20:45)4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 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5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 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아비멜렉이 자신을 가리켜의로운 백성이라 부르고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의 소유자라 자신 있게 말합니다. 4절의 말씀을 보면 마치 아브라함이 소돔을 멸하러 가시는 하나님을 막아서서 하나님 그 성에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50명이라도 있으면 어떡하실 겁니까? 하고 기도를 하던 그 대목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하지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사람 중에도 자신의 삶을 자신 있게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며하나님 저는 의롭고 깨끗하고 온전하게 살았습니다.’하고 말할 만큼 선하게 사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의 온전한 마음을 인정해 주십니다.

 

 

(20:6)   6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 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아브라함의 처참한 실패와 대조가 되는 아주 훌륭한 모습 아닙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편을 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이런 집요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서도 여전히 아브라함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삶을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세상이 지적하는합당치 못 한 일을 끊어내지 못할 때 우리로 인해 우리 하나님은 세상으로부터 조롱과 능멸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반드시 분투 속에서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고마우십니까? 그런데 그 고마움에 빚진 자로서의 삶이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돼서야 되겠습니까?

 

 

이런 시가 있습니다.

‘천천히 씹어서 공손히 삼켜라 / 봄에서 여름 지나 가을까지 그 여러 날을 / 비바람 땡볕으로 익어 온 쌀인데 / 그렇게 허겁지겁 삼켜버리면 / 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 / 사람이 고마운 줄을 모르면 그게 사람이 아닌 거여

시인은 밥을 씹을 때도 비바람 땡볕 속에서 잘 익어준 쌀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천천히 씹어서 먹으라고 합니다. 고마움을 모르는 자는 사람도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열심과 그 분의 집요한 사랑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고마움을 모르고 자신의 인생을 바쁘게 씹어서 삼켜버리고 있다면 그게 어찌 고마움을 아는 성도이겠습니까?

 

 

자기 자신에게 반해 결국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끌려 물에 빠져 죽은 나르시스의 비극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 숭배입니다. 자기한테 반한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느라 다른 이들의 사랑과 호감을 무시하고,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섬겨주는 삶을 살지 못한 자아 숭배의 최후는 사망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느라 하나님의 약속도 팽개치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죄 짓는 것도 불사하는,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조차 야단을 맞으며 사는 그런 못난 모습이 아닌 나 아닌 다른 이웃들과 하나님께 반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들의 섬김에 푹 빠져 사는 칭찬받는 참 그리스도인의 삶을 잘 살아내십시다. 그 분은 모든 것을 사용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 이시니까요. 우리의 죄까지도 선용하시는 은혜의 하나님 아닙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자녀답게 잘 사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