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주기도문

주기도문(V)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00:15

주기도문(V)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은 주기도문의 마지막 청원인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이 ‘시험’이라는 말을 먼저 잘 정의하고 계셔야 오늘의 설교가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여기서 ‘시험’이라는 말로 번역이 된 헬라어 “페이라조”는 “유혹” “시험” 두 의미를 모두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한글 개역성경을 비롯한 여러 성경에는 “시험”이라는 단어가 “사탄의 유혹”과 “하나님의 시험” 이 두 가지가 구별 없이 그냥“시험”이라고 쓰여서 혼동(混同)이 될 때가 간혹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모순을 성경에서 발견하신 것이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고 이스라엘을 시험하셨습니다.

(22:1)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    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8:2-3)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    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    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교육하시기 위해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그런데 반대로 야고보서에서는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1:13-15)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14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렇지요? 구약에 사용된 히브리어 “나싸” 나 헬라어“ 페이라조” 모두 사탄의 유혹과 하나님의 시험에 혼용되기 때문에 이런 혼동이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의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신다”는 구절의 “시험”은 우리를 넘어뜨려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사탄의 유혹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신앙생활 잘 하던 사람이 갑자기 전에 하던 악한 습관이나 죄에 빠지게 되면 “저 사람 시험 들었어.” 하는데 거기서의 “시험”이 바로 이 사탄의 유혹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이 죄를 지어 하나님을 등지고 지옥으로 향하게끔 유혹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는 어구가 담고 있는 뜻입니다.

반면에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셔서 물도 주고 먹을 것도 주고 하시면서 그들의 삶에 간섭을 하시면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앞서서 끌고 가시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시험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그 시험은 사랑을 근거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끊임없이 시험하셔서 결국에는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드릴 수 있는 자로 만들어 내신 그 시험은 우리에게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시험하신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기도해야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라는 기도의 시험은 어느 쪽이겠습니까? 당연히 사탄의 세력에서의 보호하심을 요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의 내용은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지켜 주옵소서.‘ 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해석을 더욱 더 확실하게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바로 뒤에 나옵니다. 그 뒤에 바로 붙어 있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의 “악”이라는 말 “투 포네로우”는 남성 속격으로 “사탄”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는 정확하게 “사탄의 시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죄에 빠진 아담 적 실존을 갖고 있는 모든 인간들은 사탄의 세력 하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싫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가 되어있는 자들입니다. 그 중에 어떤 무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허락하셔서 하나님의 편이 되게 하셨는데 나머지들은 모두 그 죄악 속에 내버려두셨습니다. 사탄과 죄인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가만 놔두면 하나님을 향해 칼을 뽑아들게 되어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라는 기도는 우리를 그 사탄의 세력에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나방의 근육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불로 향하게 되듯이 그렇게 죄를 지향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든지 그 사탄의 편으로 달음박질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들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간섭을 하지 않으시고 가만 놔두시면 어떻게 되는지 상상을 해 보셨나요?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는 말을 기억하세요? 분명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기 전인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못 놓아주게 하신다음 마지막에 “이스라엘은 내 맏아들인데 네가 놓아주지 않았으니 내가 너의 맏아들을 죽이겠다.”고 바로에게 행할 일을 미리 계획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애굽의 맏아들들을 죽이기로 이미 계획이 세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아홉 가지 재앙이 내립니다. 한 가지 재앙이 내릴 때 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셔서 그 바로가 이스라엘을 놓아주지 아니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착한 사람 데려다가 계속 마음을 강퍅하게 하셔서 못 놓아주게 하신 다음 결국 그들의 맏아들을 죽이시기 위해 계획을 세우시는 것이라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여러 번 반복해서 공부한 로마서 1장의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그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common grace를 거두시고 악인들의 정욕대로 내어버려 두시는 것을 성경은 하나님께서 악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처럼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삶에 간섭하지 않으시고, 악함을 막지 않으시고 놔두면 죄인은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선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강이 피로 변했습니다. 개구리가 온 천지를 덮었습니다. 이가 날려서 살수가 없었습니다. 파리가 온통 마을을 덮습니다. 수역이, 독종이, 우박이, 메뚜기가 흑암이 그들을 쳐도 바로는 계속 해서 하나님과 맞서서 싸웁니다. 그게 죄인들의 속성입니다. 왜요? 자신이 왕이어야 하는데 왕이라는 자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를 죽이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버린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결국 맏이들이 다 죽었는데도 또 따라옵니다.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그들을 막아섰습니다. 이스라엘 쪽에는 불기둥이 환하게 비추고 애굽 쪽에는 흑암이 덮입니다. 그런데도 바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앞에서 홍해가 갈라집니다. 두려운 광경입니다. 자기가 쫓고 있는 적들의 하나님이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눈앞에서 바다가 갈라졌는데도 바로와 애굽 군대들은 거기를 따라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상태를 그대로 방치해 두시면 죄인들은 이렇게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까지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다 죽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이 그렇게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건짐을 받은 건지 이해가 가십니까?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탄과 그 무리들을 완전하게 강퍅하게 버려두심으로 최후에 어떤 결과가 일어나게 됩니까? 에스겔서 38장에서 그 비참한 죄인들의 최후가 나오는데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곡과 마곡의 전쟁입니다.

(38:1-6)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 인자야 너는 마곡 땅에 있는 곡 곧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에게로 얼굴을 향하고 그를 쳐서     예언하여

3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4 너를 돌이켜 갈고리로 네 아가리를 꿰고 너와 말과 기병 곧 네 온 군대를 끌어내되 완전한     갑옷을 입고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가지며 칼을 잡은 큰 무리와

5 그들과 함께 한바 방패와 투구를 갖춘 바사와 구스와 붓과

6 고멜과 그 모든 떼와 극한 북방의 도갈마 족속과 그 모든 떼 곧 많은 백성의 무리를 너와      함께 끌어내리라

15 네가 네 고토 극한 북방에서 많은 백성 곧 다 말을 탄 큰 떼와 능한 군대와 함께 오되

16 구름이 땅에 덮임 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 오리라 곡아 끝 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로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니라

17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옛적에 내 종 이스라엘 선지자들을 빙자하여 말한 사람이       네가 아니냐 그들이 그 때에 여러 해 동안 예언하기를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그들을 치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라

18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곡이 이스라엘 땅을 치러 오면 내 노가 내 얼굴에           나타나리라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곡과 마곡의 전쟁입니다. 나중에 계시록을 공부할 때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요한 계시록에서는 그 전쟁을 인용하여 아마겟돈 전쟁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아마겟돈 전쟁은 지금 우리가 치르고 있는 영적 전쟁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은 사회법이나 양심 등으로 죄인들의 죄 성이 극에 달하는 것을 막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속사가 역사 속에서 진행되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죄 성을 막지 않고 놔두었을 때 살인 등의 극한 적인 범죄나 전쟁 등으로 인류가 조기에 멸망해 버리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 가지 일반은총으로 인간들이 극한의 상황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막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완전히 그들을 풀어서 내버려두시는 날이 오게 됩니다. 계시록에서는 그 때를 사탄이 무저갱에서 풀리는 때라고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요한 계시록의 무저갱이라는 말을 너무 장소적 개념으로만 알고 있어서 오해를 하기 쉬운데 사탄이 무저갱에 갇혀 있다는 말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더 이상 성도들을 참소하지 못하고 이 땅에 내려와서 성도들을 핍박하며 쫓아다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어딘가에 꽁꽁 묶여 있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사탄이 더 이상 하나님 택한 백성들의 영원한 생명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상태를 사탄이 무저갱에 갇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14) 

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2:15) 

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having disarmed the powers and authorities)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1:6) 

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이렇게 사탄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그 상태를 무저갱에 갇혀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종말 때가 되면 그 사탄이 총력을 기울여 성도들을 핍박하도록 하나님이 놔두실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11장에 보면 그 때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죽는 모습으로 보여 질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1:7-10)

7 저희가(두증인)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여기에 보시면 교회를 상징하는 두 증인이 죽습니다. 큰 성길 다른 말로 세상을 상징하는 바벨론 성에서 죽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이 세상에서 죽고 지는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핍박 끝에 죽으셨듯이, 그러나 그 삶이 진정한 승리의 삶이었던 것처럼 교회 공동체도 동일한 예수의 삶을 살게 되는데 교회는 열심히 전도하고 팽창해서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을 이 땅에 이루는 공동체가 아니라 점점 세상의 핍박 속에 죽임을 당하는 공동체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삼일 만에 부활하셨듯이 교회도 그 죽음 뒤에 황홀하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할 것이라는 것이 이 땅에서의 교회의 모습이며 여러분과 저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 전쟁이 아마겟돈 전쟁입니다. 그러나 그 전쟁은 마지막 날 어느 때에 한 번 있는 전쟁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 크고 작은 전쟁으로 그 아마겟돈 전쟁은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정말 엄청난 영적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전쟁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전쟁의 정도는 여러분이 신앙인으로 성숙되어짐에 따라 점점 깊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떤 생활을 기대하고 계신가요? “점점 나아질 거야. 언젠가는 폼 한번 잡아볼 날 있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참 교회는 순교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며 매일 매일 나의 옛 사람을 죽이는 순교의 삶을 살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무시무시한 영적 전쟁의 현장을 성도라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들 인식하지 못 하고 있는 걸까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제대로 살고 있지 않으니까 그들의 삶에 전쟁이 없는 것입니다. 어차피 사탄의 편처럼 살고 있는데 그들의 삶에 무슨 거룩한 전쟁이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전쟁은 무슨 전쟁이야? 지금 전쟁이 있긴 있어”하고 안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제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심각한 영적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에 있는 기독교인들, 회교권 나라에 있는 기독교인들만 영적 전쟁하고 있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는 한 몸입니다. 어디선가 그런 핍박 속에 던져져 있는 교회가 있다는 것은 우리도 동일한 핍박과 처절한 전쟁을 치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런 핍박받는 교회의 모습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시는지 아세요? 우리의 영적 전쟁 상태가 바로 그렇게 무시무시하고 심각한 것이라는 것을 좀 깨달아 알라고 그런 핍박받는 우리 형제자매들을 우리 눈에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무시무시한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교회에게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에 대해 충분히 공부했고 지금도 공부하고 있기에 간단히 말씀드리면 영적 전쟁에서의 기도는 전쟁터에서 쓰는 워키토키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마치 ‘엄마 아빠 용돈 주세요.‘ 하는 인터 콤으로만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도는 전쟁터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사람들이 유일한 생명줄로 가지고 있는 워키토키입니다. “하나님 지금 실탄이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지금 적의 포탄 공세가 너무 심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는 바로 그런 영적 전쟁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통화하는 워키토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긴박한 전쟁터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저는 어떻게 저 멸망 받을 무리에 속하지 않게 된 것입니까” 하며 일단 감사하게 되는 것이며 지금이 그 마지막 아마겟돈으로 향하는 그 길인 것을 재확인하고 우리가 그들의 편으로 혹여 달려가지 않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때로 이렇게 세상 앞에 맥없이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박과 온역과 불과 유황으로 그들을 다 죽여 버리신다는 그 승리의 약속을 이루실 것을 확신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무엇을 근거로 우리는 확신하며 기뻐할 수 있는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아무 기도나 하고 예수님 이름만 갖다 붙이면 무조건 다 들어주는 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것은 그 예수님의 수준으로 예수님의 뜻을 분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드려지면 품질보증 “농심 신라면” “가방은 프라다” “화장품은 코리아나”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기도라면 내가 마음 놓고 들어줄 수 있는 기도이다.” 라고 하나님께서 큐 마크를 찍으시는 기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를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기도를 얼마나 신중히 해야 하는 지 아시겠지요?

어떤 목사님께서 일전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유명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이 사시는 동네에서는 다들 그 분이 목사님이신 줄을 알고 존경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 녀석이 그 동네 구멍가게에 가서 ‘아저씨 우리 아버지 누구인지 아시지요? 우리 아버지 이름으로 소주 한 병만 주세요.’한다면 그게 말이 되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기도를 잘 보면 거의 그런 수준 아닙니까? 유치해서 들어주지 못할 정도의 그런 기도들이 얼마나 많이 있어요. “하나님,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 기도합니다. 복권 당첨되게 해 주세요” “하나님,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 기도합니다. 이 땅에서 폼 한번 잡게 해 주세요”

아닙니다. 정말 예수님을 아는 자들은 그 예수님의 수준에 맞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가 그런 것이라면 예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는 예수님의 소원이라는 것이지요? 그렇잖아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주기도문을 한다는 것은 이 기도문이 우리의 염원과 소원이기도 한 것이지만 예수님의 소원이기도 하다는 말이잖아요?

그럼 하나님이신 그 분이 소원하시는 것이 안 들어 질 것이 있겠습니까?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럼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해 주옵소서.’하는 기도는 이루어졌나요? 그럼요, 영적으로 이미 그 기도는 이루어 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전쟁에서 안전한 것입니까? 네 안전합니다.

광야에서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시고 완전한 승리를 하시어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셨습니다. 아담은 시험에 실패하여 천사들에게 쫓겨났지만 예수님은 시험을 이기시고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 짐승들이 와서 예수님과 함께 지냅니다. 광야에 웬 짐승인가요? 그 것은 예수께서 시험을 이기심으로 광야가 짐승이 사는 에덴으로 회복되는 것을 힌트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에덴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 잘 믿으면 에덴을 회복해서 거기에 가서 살게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태초에 지어진 것처럼 벌거벗고요. 그러면 거기는 또 시험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누디스트들이 그 에덴을 근거로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하고 나서곤 하지요? 태초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어진 대로 우리 벗고 살자고요. 정말 하나님이 에덴에서 벗겨놓고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은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가 계시록의 의의 세마포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만들어져 가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해 우주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애초의 목적은 요한 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이었습니다. able to sin이었던 자들이 타락하여 not able no to sin의 죄인들이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해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자들이 able not to sin의 상태로 된 것이고 그들이 결국에는 not able to sin의 새 사람으로 되어져 가는 구속사를 역사 속에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에덴에는 선악과가 있지만 예수로  말미암아 그 시험이 완성되었으므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선악과가 없는 것입니다. 선악과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그렇게 예수께서 시험을 이기실 때 우리가 그 속에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우리가 그 예수 안에서 시험을 모두 이긴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시험에서 우리를 건지실 것인데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하나요?

역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실존은 어떻습니까? 매일 같이 시험에 지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그 사탄의 세력에 굴복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우리도 그 아마겟돈 전쟁의 하나님의 적군으로 서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거기서 또 already, not yet의 복된 교리를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실존입니다. 마치 우리는 사탄의 편인 것처럼 매일 매일 실패하고 실수하며 삽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렇게 약속이 되어있고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험에 실패하면서 난 이렇게 사탄의 편에서야 마땅한 자인데 어떻게 나에게 그런 은혜가 임 했는가 감격하십시오. 난 여전히 이런 꼴인데 하나님께서 예수의 삶을 나에게 전가 시키셔서 “너는 백점이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에 감동하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그 은혜를 아는 만큼 감사로 들어가게 되고 그 감사로 우리에게 오는 시험에서 가끔 한번 가끔 두 번 이겨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열심히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각을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는 칼로 총으로 위협해서 우리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성을 동원해서 공격해 들어옵니다.

제 친구 중에 공학 박사가 있습니다. 공학 박사인 그 친구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들고 이런 질문을 해 온 적이 있습니다. ‘질량이 있는 물체는 빛의 속도로 날아갈 수 없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승천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육체를 갖고 계셨다. 질량이 있다는 것이다.

그 천국은 삼층 천, 그러니까 저 우주 너머에 있다고 들었다. 가까운 안드로메다 성운까지 200만 광년이다. 광년이라는 것은 빛의 속도 1초에 30만 킬로미터로 달려서 1년을 가야하는 거리이다. 예수님은 지금 빛의 속도로 가고 계셔도 안드로메다 성운까지도 못 가셨을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을 믿느냐?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믿느냐?‘ 어떠세요? 여러분은 뭐라 대답하시겠어요?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의 질서와 법칙도 아울러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런 분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따라서만 달려야하겠니?‘ 여러분, 인간들의 수준이 고작 이정도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을 부정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죄인들의 속성입니다.

사람들은 과학이 인류를 부요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과학과 문명은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후예들이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기 위해 만들고 발전시켜 온 것입니다. 예전에는 번개가 치면 하나님 앞에 벌벌 떨면서 자기의 죄라도 뉘우치는 순진함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피뢰침 만들어서 꽃아 놓고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홍수가 나서 논밭이 잠기면 하나님 앞에 겸허해 지고 겸손해 지던 사람들이 둑을 만들고 물길을 마음대로 바꿔가며 우리 스스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하나님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과학이 정말 인류를 부요케 한다고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과학은 우리를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으로 하나님을 제한 할 수 없습니다. 과학으로 하나님을 밝혀 보겠다고 하는 것도 언어도단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이성의 한계 너머에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계속해서 그렇게 우리의 이성을 자극해서 인간을 유혹합니다.

그 어줍지 않은 이성은 종교 다원주의를 만들고 자기의 이해 범위 안에서 하나님을 제한합니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는 이미 세계 2차 대전 때 다 무너져 버렸음에도 사탄은 여전히 그 이성을 또 자극합니다. 마르쿠젠이나 송두율의 스승인 하버마스 같은 사람이 또 변증법적 이성이니 뭐니 해서 다시 들고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현대의 지성들이 또 인간의 이성에 기대를 합니다. 정말 우리는 우리 이성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것일까요?

기원전 5세기 사람인 피타고라스의 정리도 아직 이해 못하는 이 이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겠다는 것입니까? 사탄은 끊임없이 이렇게 우리를 시험합니다.

그렇게 과학과 문명과 이성과 우리 옛 사람이 젖어 있던 죄 성을 자극하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할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주기도문을 다 배우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제 실생활에 적용하셔야지요. 운전을 하다가 어떤 사람이 싹 끼어들었을 때 사탄으로부터 “가서 복수해”라는 유혹을 받게 되면 즉시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해 주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가 내 삶에 임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저는 복수하고 싶지만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내가 내 이웃을 용서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저 사람에게 복수하고픈 마음을 심고 있는 악한 세력에서 저를 구해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십시오. 손해를 보셨습니까? 누군가 억지를 부려 여러분을 괴롭히고 있어요? 그 때에 지금까지 배웠던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를 열심히 하나님께 올려 보내십시오.

우리는 오직 그 기도의 응답인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우리는 아마겟돈 전쟁의 사탄의 편에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매일매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내 삶에 예수의 도움이나타 나서 예수의 성품으로 변화되어질 수 있기를 매일 매일 기도하세요.

 

주기도문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소망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몇 주간에 걸쳐 주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일명 주기도문! 우리가 살펴 본 바에 따르면 주기도문의 내용은 모두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며 그 주기도문의 중심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확신하며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소원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가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신분과 ID, 정체성이 결정된다는 것을 주기도문 첫 시간에 살펴보았었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이런 기도를 해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심으로 우리는 우리의 신분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며 대단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배우면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의 것들에 매여 사는 자들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바라며 살아가야 하는 자들임을 자각하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에 굴복하지 말고 거기에 무릎 꿇지 말고 씩씩하고 당당하게 달려갈 길을 달려가야 한다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이해되어지고 열려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기도를 하게 된 우리는 얼마나 축복 받은 사람들입니까?

 

이렇게 주기도문 안에 모든 기도의 해답이 들어있습니다. 그 청원과 서약 안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야 할지 모두 들어있습니다. 그 안에서 여러분의 기도가 행해져야 합니다. 예수의 소원인 기도, 그리고 예수가 다 이루어 놓으신 그 기도 그것이 주기도문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예수님 고맙습니다.”입니다. 그것 말고는 없습니다.

매일 매일 기도할 때마다 주기도문을 떠올리며 우리의 기도할 바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하시고 천국 백성으로서의 그 신분을 확인하며 감격하십시오.

다함께 주기도문의 참 뜻을 되새기며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함으로써 오늘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