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주기도문

주기도문(IV)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00:14

주기도문(IV)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인류의 역사상 가장 큰 실험은 아마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일 것입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모든 사람들이 능력껏 일하고 모든 사람들이 필요껏 쓰는 프롤레타리아 유토피아를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유토피아는커녕 70-80년 동안 실험한 끝에 공산주의가 남긴 것은 대 재앙 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반증하는가 하면 인간들이 자기들이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하나님을 떠난 뒤 자신들을 스스로 보호하고 자신들의 힘을 쌓기 위해 만들어 놓은 그 어떤 것으로도 스스로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바래야 하는 자들이며 이 땅의 유토피아가 아닌 하나님 나라를 구해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 볼 기도는 어찌 보면 이 땅의 것을 구하라는 기도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만일 이 기도가 우리가 이해하는 이 땅에서의 우리가 필요한 양식을 구하는 것이라면 성경은 자체 내에서 심각한 모순을 갖게 됩니다. 같은 장의 25절을 보면 분명 그런 것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명확히 나와 있거든요.



(6:25)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그렇지요? 그렇다면 성경이 각기 모순된 요구를 한 장에서 이야기 할 리는 없고 우리가 놓치고 있는 어떤 심오한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심오한 뜻을 한번 밝혀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성경을 잘 보시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의 “일용할 양식”이라는 단어 옆에 풋 노트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혹 내일의 양식” 이라는 말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일용할”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에피우지온” 이라는 단어가 여러 가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에피우지온”이라는 단어는 헬라의 어떤 문헌에도 쓰인바가 없는 아주 생소한 단어입니다. 성경에서도 딱 여기서 한번 쓰였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도 이 단어에 대해 세 가지의 견해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에피우지온”이라는 단어를 “에피”와 “우지아”의 합성어로 보고 “삶에 필요한” 이라는 뜻으로 풀이를 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친숙한 해석이지요?

두 번째가 “그날을 위한, 당일을 위한” 이라는 뜻으로 풀이를 합니다.

세 번째가 “오는 날에 필요한” 혹은“다음날에 필요한”으로 해석을 하는 견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세 번째 해석을 지지합니다. 그리고 제가 존경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거의 세 번째 견해에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아람어를 쓰셨습니다. 아람어는 바벨론의 언어인데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70년간 있으면서 그들의 일상 언어가 아람어가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히브리어는 유대인들의 학자들이나 쓸 정도로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잊혀 진 언어였습니다

그런데 아람어 주기도문에는 “오늘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기본이라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해설이 아무리 그럴 듯하다 해도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흐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세대주의자들이 해석을 할 때에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가는 사람이 도중에 강도를 만난다. 예루살렘은 천국을 말하는 것이고 사마리아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강도는 사탄이고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포도주와 기름을 부어 치료를 한다. 포도주는 예수님의 보혈을 의미하고 기름은 성령을 의미한다. 여관으로 데리고 가는데 그 여관이 교회이고 그 여관 주인에게 동전 두 개를 준다. 그것을 신약과 구약이라 하고 다시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간다. 그 것은 예수님이 재림을 하실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떠세요? 어찌 보면 딱 맞아떨어지는 해석 같지 않으세요


그러나 그 비유는 율법사가 예수님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율법사에게 하신 대답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그 율법사에게 율법에 뭐라 기록되었느냐고 물으시자 그 율법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다고 정확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가서 그렇게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율법사가 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고 묻지요? 그 때에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론을 ‘누가 네 이웃인가 잘 정리하고 있어라. 네 입맛에 맞는 이웃 고르려 하지 말고 네가 다른 사람들의 이웃으로 살라’고 내려 주신 것입니다. 이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담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잘 못하면 성경을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임의로 해석하게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성경을 성경이 아닌 자기의 상식을 동원해서 푸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하는데  왜 제가 세 번째 해석인 ‘내일의 양식’을 지지하는가 하면 구약에서 내일의 양식을 오늘 주신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가 언제이지요?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6일 째 되는 날에 안식일인 다음날 것까지 주셨습니다. 왜 여섯째 날에 다음날 것까지 주셨습니까? 안식일에는 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기 때문에 일곱째 날에는 일을 하지 않고 여섯째 날에 일곱째 날 것까지 거두고 안식일에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신 온전한 창조를 기념하며 즐기고 종말에 이루어질 참 안식을 고대하라고 여섯 째날 다음날 것까지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여섯째 날 내일의 양식까지 주심으로 그 안식의 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신 것입니다. 안식의 날인 내일이 오지 않을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굳이 내일의 양식까지 오늘 주실 필요가 없잖아요? 내가 벌써 내일의 양식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여섯째 날 일곱째 날의 양식을 소유함으로 일곱째 날인 안식일을 여섯째 날에 미리 누리면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구속사 적인 측면에서 주기도문에서 쓰인 “내일의 양식”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쓰셨던 아람어 주기도문을 보면 거기 ‘마헬’이라는 아람어 단어가 나오는데 그 단어가 ‘내일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람어의 “마헬”이라는 단어는 그냥 24시간 후의 내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오늘과는 다른 날, 즉 다가올 시대의 내일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 오는 날의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는 지금 바로 다가올 영원한 안식의 나라, 천국이 임하게 될 바로 전인 종말을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며 이 땅에서 그 천국을 맛보면서 사는 자들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그 안식의 나라,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가올 내일, 즉 하늘나라를 살게 될 하늘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저 하늘의 것으로 먹고 마시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 나라를 통치하시는 왕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 나라를 준비하며 사는 자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하늘의 양식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오늘 “내일의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는 그 하늘의 양식이 무엇인가요? 요한복음에 정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6:27-35)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30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보시다시피 그 양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바라야 하는 그 내일의 양식인 예수는 어떤 예수입니까? 하늘 왕의 신분으로, 하지만 이 땅의 왕이 아니기 때문에 이 땅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핍박을 받으시고 그러나 지금은 하늘의 영원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그 예수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하늘의 양식인 예수를 바라며 예수를 원하며 “나도 그렇게 살겠습니다. 나도 그 하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늘의 왕이 살다 가신 그 길을 나도 따라가겠습니다.”하는 신앙고백이 바로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인 예수를 주옵소서.’라는 기도문이 담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어떤 자들이 그런 신앙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그 하늘의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아는 자들만이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후4:17-18)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이 그렇게 쉬운 것입니까? 아닙니다. 때로는 눈물도 안 나올 만큼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을 만큼 괴롭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더 고난을 당했던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당할 만큼 당해 보았다. 그러나 내가 하늘의 영광을 알기에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 하늘의 영광과 이 땅의 고난은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참아라. 그리고 그 달려갈 길을 계속 달려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이곳은 잠간이면 지나갈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 저 천국은 영원한 곳임을 아는 자들, 그들이 “오늘날 나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옵소서. 그 예수를 좇아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 그렇게 살겠습니다.” 하고 기도하고 서약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오늘을 살지만 다가 올 내일, 즉 천국을 아울러 사는 자들이기에, 그 나라는 우리에게 임했기에, 그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져 있기에 내일의 양식인, 하늘의 떡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며 그 삶을 좇으며 살겠노라고 고백하며 서약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이지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삼박자 축복을 바라는 것이 기독교가 아닌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구절은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의 영혼이 잘 된 것처럼 병도 안 걸리고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게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야기 하는 범사에 잘된다는 어구에 들어있는 ‘범사’라는 단어는 바울이 잘 쓰는 단어입니다. 한 군데만 볼까요?


(살전5:16-18) 

16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17 범사에 감사하라

18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잘 보세요. 바울이 교회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합니다. 여기서 범사는 ‘모든 일’을 뜻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어떻게 우리가 모든 일에 다 감사할 수 있어요? 바울이 말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범사란, 하나님께서 그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시고 그 백성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이 땅에서 세밀하게 그 삶에 간섭하셔서 그들을 자식답게 만드시는 그 모든 일들을 범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범사가 잘되는 길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져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쳐 가시고자 하시는 대로 우리가 만들어져 가는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잘된다는 것은 우리를 패서라도 자식답게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에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을 범사가 잘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감옥에 가있던 요셉을 가리켜 그의 삶이 형통하였더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저의가 동일하게 나타나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잘된 것처럼, 전에는 자기 마음대로 살던 죄인들이 이제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된 것처럼, 그 신자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 범사에 잘되기를 간구한다는 어구의 진의입니다. 그렇게 너의 범사가 그 영혼의 잘됨같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게 되기를 원한다는 기도 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은 너무나 힘이 들겠지요? 내 욕심과 내 야망을 접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어찌 쉬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거기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강건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비는 것입니다. 확실히 아시겠어요? 그 구절은 절대 이 땅에서도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겠다는 하나님 약속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늘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로 살게 하옵소서.’하고 기도 할 수 있는 자들은 이 땅의 것에 눈을 두고 사는 자들이 아니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며 사는 자들이기에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뭡니까? 죄인들은 자기 스스로 자기의 양식을 구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다 경쟁 상대입니다. 하다못해 옆집 애가 자기 집 애 보다 공부를 조금 잘 해도 배 아파서 못 견디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영원한 나라를 아는 자들은 굳이 이 땅에서 이 땅의 것으로 누구와 경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사랑을 근거로 자기에게 오른 뺨을 때린 사람을 왼뺨을 돌려대며 용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왼뺨을 돌려 대면서 이렇게 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여기서 ‘우리의 죄’는 복수로 쓰였습니다. 그렇게 “죄들” 이라고 복수를 쓴 것은 구체적인 죄의 행위들을 모두 사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모범이 되는 것처럼 기술이 되어있습니다. 그렇지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을 보고 우리의 죄를 사해 달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는 완료형입니다.

셈족의 언어를 가장 잘 연구해서 파악하고 있다는 요아킴 예레미야스에 따르면 여기서 쓰인 헬라어의 “아페카멘”을 아람어로 번역을 해서 읽어보면 아람어의 완료형은 시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인 것의 완료형으로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왜 학자들이 아리송한 어구나 구절들을 아람어로 번역을 해보는지 아세요?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이 당시에 쓰시던 언어가 아람어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아람어로 말씀하신 것을 헬라어로 옮겨 놓은 것이니 다시 아람어로 옮겨서 연구를 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부분을 아람어로 다시 번역을 해 보면 “하나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와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겠나이다.”의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하면서 내가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게 무슨 뜻이 되는가? “하나님 내가 아무개를 용서하고 있지 못하는 그 죄만 빼놓고 딴 죄만 용서해 주옵소서.”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그러나 저 놈만은 내가 용서 못 합니다. 그러니까 그 죄는 좀 눈감아 주세요“ 이렇게 말이 안 되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통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자들은 자신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 한 자들만 이 그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기도문 바로 다음절인 마태복음 6 14절과 15절을 보세요.

(6:14-15)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무섭죠? 이와 동일한 내용이 마태복음 1835절에 또 나옵니다.

(18:35)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말씀은 어떤 비유의 결론으로 하신 말씀인데 그 비유가 우리가 잘 아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비유입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왕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갚을 능력이 없어서 왕이 탕감을 해 주고 놓아주었습니다.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 주민 전체가 로마 정부에 내는 1년 치 세금이 이백 달란트였습니다. 그러니 일만 달란트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액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금액은 절대 값을 수 없는 금액이란 것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자가 나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는데 갑자기 멱살을 잡고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왕이 그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았던 자를 다시 잡아다가 “내가 너에게 그 큰 금액을 탕감해 주었는데 너는 겨우 백 데나리온에 사람을 옥에 넣었느냐” 하시며 그 갚을 수 없는 금액인 일만 달란트를 다 갚을 때까지 옥에 넣어 버렸습니다. 그 말은 영원한 지옥에 던져 버렸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큰일 났지요? 우리는 그게 잘 안 되잖아요?

어떠세요? 이 중에도 “딴 기도들은 그런 대로 수긍하겠는데 그 기도는 아무래도 아직 못하겠다. 난 그렇게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다“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계실 것입니다.

아닙니다. 자기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지 못한 자들은 주기도문을 하나님께 올릴 수 없는 자이며 주기도문은 하나의 완성된 기도문이므로 어느 것은 하고 어느 것은 안하고 할 수 없는 기도문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해야 하고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은 안 되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여기서 또 union christ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되었고 우리의 삶이 예수의 삶으로 전가 된 것을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에도 동참한 자들이 되었고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을 한 자들입니다. 성도는 그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입니다. 그럼 예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용서하실 때 우리는 어디 있었나요? 그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 함이니이다.” 하실 때 우리는 어디 있었습니까? 그 예수 안에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여전히 이 꼴이지만 예수로 말미암아 용서를 한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자격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 해 주옵소서. 우리도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겠나이다.”라고 기도하면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신분을 확인하며 감격하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 자가 되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 당당하게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는지 다시 곱씹으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감사 속에서 진정한 용서가 조금씩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렇게 용서한 자가 되었고,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께 감사하며 그 분의 삶을 좇아 이 땅에서 실제로 이웃을 용서해 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빠삐용이라고 하는 영화 맨 마지막 장면에 보면 악마의 섬에서 스티브 맥퀸이 탈출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스티브 맥퀸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서 더스틴 호프만에게 같이 탈출할 것을 권면하지요? 그러나 그는 거절합니다. 무서웠던 것이지요. 스티브 맥퀸이 절벽에서 뛰어 내려 정말 운 좋게 조수를 잘 타서 탈출에 성공을 합니다. 그리고 절벽 위에 있는 더스틴 호프만을 쳐다보면서 승리의 손짓을 합니다. 그것을 본 더스틴 호프만이 이런 대사를 합니다. "그대가 아무리 이 섬으로부터 탈출을 해도 그대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면 그대는 여전히 감옥 속에 있는 것이야!" 뒤집어 말하면 ‘ 나는 아무리 이 악마의 섬에 있다고 하더라도 나로부터 자유하면 나는 자유인이다.’ 이런 뜻입니다.

그 영화에서는 스티브 맥퀸이 왜 탈출하려고 했는지 이유를 밝혀주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스티브 맥퀸이 열연을 했던 실제 그 주인공의 실명은 앙리 샤리에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1930년도 3 24일 새벽에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중에 느닷없이 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문에 그 사건이 대서특필이 됩니다. 앙리 사리에르를 체포한 젊은 검사는 하루아침에 프랑스의 유명한 검사로 칭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수사였습니다. 젊은 검사도 나중에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자기 명예에 금이 가게 될 것을 두려워 한 그 검사는 다른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거짓 증인들을 세웁니다. 그리고 정말 앙리 샤리에르를 살인범이 되도록 꾸면 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931년 법정에서 한사람도 죽인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종신형의 선고를 받습니다.

그래서 억울한 앙리 샤리에르는 그 이후에 기회만 있으면 탈출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그 검사와 거짓증언을 한 사람들을 죽이고 복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침내 1944년도에 영화에서 본 것처럼 아홉 번째의 탈출을 시도함으로 느는 그 악마의 섬으로부터 탈출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남미의 아르헨티나 등을 전전하며 돈을 많이 모읍니다. 그리고 1967년도 그가 만61세가 되던 해 프랑스 법상 그 애매한 공소시효가 만료되기를 기다렸다가 그는 남미로부터 파리 행 비행기를 탑니다. 단 한 가지 자신을 그토록 모함을 한 자들을 찾아내어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파리에 도착한 앙리 샤리에르는 팔일 동안 밤새 생각하고 또 생각하던 끝에 마음으로부터 그들을 용서합니다. 그리고 그가 ‘빠피용’의 후편 격인 ‘방꼬’라고 하는 자기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내가 복수를 포기한 대가로 다시는 이런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해달라고 나 자신에게 속삭였다. 너는 이겼다. 친구여! 너는 자유롭고 사랑 받는 미래의 주인공으로 여기 있다. 이 일에 관계된 모든 사람 중에 네가 가장 자유롭고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30년 동안 자기 증오심의 노예가 되어 살던 앙리 샤리에르가 용서를 선포하고 자기로부터 자유 하는 순간 그는 정말 자유 한 삶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 시간 이후로 앙리 샤리에르는 참 자유를 만끽하는 한 사람, 인간을 사랑하는 자유의 인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그는 빠삐용이 된 것입니다. 빠삐용이라는 단어는 나비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그는 원수들을 용서함으로 나비가 되어 자기를 얽어매는 증오와 복수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용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위대한 용서를 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완전하게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그 예수의 용서를 따라 용서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청원하는 동시에 용서를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주기도문의 기도는 청원인 동시에 서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면서 “난 그 나라 통치에 순종하겠습니다.”하고 서약하는 것이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나도 내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며 살겠습니다.”하고 서약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발 한발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천국 백성의 수준을 향하여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용서받은 자로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31:312-34)

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우리는 주기도문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릴 때마다 이렇게 새 언약을 세워주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새 언약을 우리 가운데 이루시고 그 말씀대로 우리를 완전하게 용서하셨음에 감격하며 그렇게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속히 우리를 그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을 거듭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말을 살아가는, "내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의 양식이 아닌 하늘의 양식, 예수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자들이며, 이 땅의 것으로 살지 않고 하늘이 주시는 양식으로 사는 자들이 됨으로 아담에게 내린 저주가 풀린 자들이며

그 것으로 만족하며 사는 자들이기에 이웃을 시기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고 경쟁하지 않으며 참으로 용서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 하나님께 당당히 "나도 이렇게 용서하는 자가 되었으니 내 죄도 확실히 용서가 된 것을 난 확신합니다." 하고 기도 할 수 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면서 우리의 신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내일의 양식인 예수가 이렇게 내 안에 있으므로 그 하나님 나라는 속히 반드시 올 것이란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속히 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내일의 양식을 확실하게 소유하고 있으십니까? 그것으로 만족하며, 그것이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란 것을 알기에 사소한 것으로 남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며 살고 계십니까?

인간들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유지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농사를 짓고 땀을 흘려 그 땀의 열매인 양식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 나온 것들이 바로 현대 문명들입니다. 과학, 철학, 교육, 종교, 물질주의, 실용주의, 성공주의, 고지론 등등 그러나 예수로 말미암아 그 저주에서 풀려난 자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양식으로 그들을 먹이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며 하나님만을 추구하며 소망하며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