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주기도문

주기도문(II)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00:12

(II)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저는 목회를 하기 전에 십 수 년 간 찬양 사역을 하면서 미국에서만 백 군데가 넘는 교회에 초청을 받아서 집회를 했습니다. 저 멀리 플로리다, 오하이오, 엘파소, 알라바마 거의 모든 주를 다닌 것 같습니다. 짧게는 하루 집회에서부터 길게는 일주일 집회를 인도하며 설교를 열 한편을 하고 찬양 콘서트를 삼일 저녁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교회를 다니다 보니 인상적인 교회들이 참 많았습니다. 집회 시작 날부터 교회 마당에서 권사님들이 치마 걷어 부치시고 우리 옛날 시골 잔치 집처럼 무쇠 솥뚜껑을 걸어 놓고 전을 부치고 부꾸미를 부치고 하는 정겨운 교회가 있는가 하면 집회가 끝나고 새벽 두 시까지 성경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열심을 내던 교인들도 있었고  집회 중간에 전기가 나가서 몇 백 명 앉혀놓고 통기타 하나로 집회를 마쳐야 했던 곳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화에서나 나오는 곳처럼 푸른 언덕위에 그림처럼 서있던 아름다운 교회도 있었고 텍사스 A&M처럼 유학생들만 모여서 자체 예배당을 건축해 낸 교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 기억에는 아주 인상 깊은 교회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이 깊었던 교회는 뉴욕의 한 작은 개척교회였는데 그 교회는 강단에 서면 마주 보이는 맞은편 벽에 커다랗고 선명하게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뵙고자 하나이다.” 설교를 하는 사람이 보게 되는 강대상 맞은 편 벽에는 이렇게 요한복음 1221절의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뵙고자 하나이다.” 저에게는 그 말씀이 마치 그 자리에 앉아있는 성도들 모두가 강대상 앞에 서있는 설교자인 저를 향하여 던지는 부탁의 말씀 같이 들렸습니다. 설교 내내 그 눈앞에 보이는 말씀이 가슴을 찔렀습니다. ‘난 지금 이들이 그토록 뵙고 싶어 하는 그 예수를 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이야기를, 내 자랑을, 내 무용담을 겸손이라는 분을 발라서 이들에게 자랑하고 있는가?’ 그런데 당시 저의 설교는 간증이 반 이상이었습니다. 찬양 사역자가 성경을 강해하는 것은 좀 안 어울리잖아요? 그래서 대부분의 찬양 사역자들은 찬양 부흥회를 하더라도 거의 간증 수준의 설교를 하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저도 가만히 제가 하고 있는 설교 아닌 설교를 곱씹어 보니 예수의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순 자기 이야기만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화려한 치장을 하고 예수님이 빠진 권고로 착하게 살자, 선하게 살자 하고 있는데 그 앞에 앉아 있는 분들이 거의 다 울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미국에 와서 고생한 이야기며 하나님으로부터 기적적으로 기도 응답을 받은 이야기들이 감동이 되었었나 봅니다.

저는 그 집회가 끝난 후 극심한 자괴감에 시달렸습니다. 그 밤을 거의 꼬박 새웠습니다. 거기서 한 가지 하나님 앞에 다짐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내 이야기, 세상 이야기, 재미난 예화의 나열로 범벅이 된 그런 비빔밥 같은 설교는 다시는 안 하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본문을 잡든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을 내어야 설교다운 설교라는 것을 저는 그 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설교를 하기 위해 어떤 곳에 서더라도 그 벽에 걸린 말씀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앉아있는 회중들에게 마음으로 대답하고 올라갑니다. “예 오늘도 여러분이 뵙고 싶어 하는 예수만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내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을 읽어도 알 수 있는 그런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티비 교양 프로에서도 들을 수 있는 그런 세상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만을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항상 기도를  합니다“하나님 오늘도 예수만이 전해지게 하옵소서. 지루해도 할 수 없고 따분해 한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예수의 이야기만 전하게 하시고 그 예수만 전해지게 하옵소서.” 그래서 저의 모든 설교가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이 나는 것입니다. 제가 성경을 깊이 공부해 보니 정말 그 이야기밖에 할 이야기가 없어요. 인간적인 권고나 추궁이 절대 사람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전했더니 그 예수가 청중의 마음속으로 뚫고 들어가 그들을 바꾸어 버리는 것을 저는 무수히 경험을 했습니다.

제가 설교를 하기 위해 우리 교회 강단에 올라올 때도 마음속으로 항상 그 외침을 듣습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뵙고자 하나이다. 김용옥 교수의 강연 같은 학술 세미나 말고, 윤리강연 말고 예수를 뵙고자 하나이다.“ 저는 여러분의 얼굴을 보면서 이런 외침을 듣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공부하고 있는 주기도문을 통해서도 예수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주기도문 첫 번째 시간으로 주기도문의 배경과 주기도문의 처음 시작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는 대목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파테르”라는 단어를 쓰게 하심으로 본질적으로 본체적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의 수준으로 취급해 주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반드시 그 회복된 하나님과 그 분의 자녀들의 관계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지요?

오늘은 주기도문의 일곱 개 기도제목 중 세 가지의 thou petition의 첫 번째 것을 공부해 보겠습니다.

그게 뭡니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상관없이 이미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그 거룩이 침해를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고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우리의 정성과 노력으로 그 분의 거룩한 이름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는 것입니까?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아니 그 내용은 지금 우리가 공부할 부분이 아니니까 차치하고라도 우리의 어떤 노력이, 우리의 가진 것 중 어떤 것이 그 분의 영광에 도움이 될까요?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하나님은 이미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분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고 하고 그 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잘 들어 보세요. 제가 여러분이 이해하시기 쉽게 예를 들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기 우물이 있다고 해 보지요. 그렇다면 그 시원하게 샘솟는 마르지 않는 우물을 가장 위하는 길이 뭡니까?

다른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그 우물에 부으면서 ‘우물아, 우물아 참 좋지? 내가 네게 물을 보태주고 있잖아’그러면 그 우물이 기뻐할까요? 그렇게 하면 그 우물에게 영광이 돌아갑니까? 그 우물은 이미 물을 충분히 가지고 있고 더 이상 시원하고 더 이상 맑을 수 없는 물인데 다른 것을 가져다 부어 주면서 “참 좋지?” 하는 게 그 우물을 위하는 것이냐는 말입니다. 아니면 우물가를 금으로 치장을 해 주면 그게 우물을 진정 위하는 일이겠습니까?

정말 그 우물을 위하는 길은 그 우물물을 맛있게 마시고 “야 참 시원하다”하고 진심어린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우물을 자랑하는 것이 그 우물에게 가장 크게 영광을 돌리는 길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분의 크심과 높으심과 그 분의 거룩하심을 인정하며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에 감격하여 그 것을 즐기고 누리며 다른 이에게 그 생명수의 진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지금 설명한 내용은 다분히 철학적인 설명입니다. 그래도 이해하시기는 쉽지 않습니까?

그럼 이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구원 역사적 측면에서는 이 부분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지 성경을 통해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한 가지 팁을 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에는 이미 하나님의 이름이 더러워 졌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더러워 질 수 있나요?

하나님은 초월자이십니다. 그 분은 영원부터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이름이 더러워 질 수 있나요? 본질적인 하나님의 이름이 더러워 질 수는 없습니다. 그 분의 이름은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본질적인 면에서 더럽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을 맺으시고 관계를 맺으시면서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힘을 당했다는 측면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이름은 더러워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죠? 그리고 지금도 더럽힘을 당하고 계시지요. 에스겔서로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36:16-23)

16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17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 고토에 거할 때에 그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소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18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의 위에 쏟아

19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열방에 헤쳤더니

20 그들의 이른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 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니라

21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내 백성이라고 하셨던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계속해서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내 말을 잘 듣고 지키면 너희가 이곳에서 복을 받고 잘 살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너희들을 이 약속의 땅에서 쫓아내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계속 범죄하고 패역한 일을 저지르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나안에서 쫓아내 버리십니다. 그랬더니 그 열국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욕하고 우습게 여겼습니다. 이방 나라들이 “오죽 하나님이 못 났으면 자기 백성 하나 간수 못하고 이렇게 열국에 흩어서 고통을 받게 하는가?”하고 하나님을 모욕했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사람들이 인간사를 신들의 전쟁에 의한 것이라 여겼던 때입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승승장구하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승리를 하고 계신 것이고 가나안 사람들이 이기면 바알이 센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패배한 뒤 포로로 잡혀가고 여기저기 흩어지게 되자 이방 사람들이 그 하나님을 업신여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자기 백성 하나 지키지 못하는 하나님, 못난 하나님, 약골 하나님” 그렇게 이스라엘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힘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더럽혀진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 에스겔서를 읽으면서 오늘날도 우리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하고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조금 씁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겠다고 하시는가 볼까요?

(36:24-28)

24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        할지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겠다고 하시나요?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심으로, 열국에 흩어져 있는 자기의 백성을 취하여 내고 모아서 그들을 정결케 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들어가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스스로 정결케 될 수 없다는 것을 아심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물로 씻어 정결케 하시고 그 마음에 새 마음을 주시고 새 영을 주셔서 완전히 새 사람으로 만드셔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을 안 듣고는 못 배기는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서 가나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심으로 당신의 백성으로 만들고 그 백성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으로 더렵혀진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그 거듭남을 우리에게 거저 주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그 거듭남.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영원한 구원으로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열국으로 하여금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며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고백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구원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 살펴보고 있는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소원 합니다.‘라는 기도는 “하나님 그 에스겔에게 약속하셨던 그 하나님 백성의 구원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이미 응답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는 구원을 얻은 자라는 증거니까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그 기도는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 하는 것은 바로 그 기도의 응답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확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옛 사람을 입고 있는 우리의 구원이 반드시 완성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께 겸손히 그 구원의 완성을 간구 드리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시지요?

 

지난주에 제가 이런 농담을 들었습니다. 어떤 분이 하나님은 지금 지옥을 보수 공사 하고 계시는 중이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왜 그런가 하니 한국의 찜질방이 지옥불이 무색해 질 정도로 너무 뜨거워져서 더 온도를 높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참을 웃다가 정말 오늘날 사람들이 지옥을 믿기는 믿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정말 그 지옥이 믿겨지는 하시나요? 영원히 죽지도 않고 죽을 수도 없는 곳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신음해야 하는 그 곳이 실존한다는 것을 정말 믿으세요? 아님 그냥 농담에나 등장하는 그런 곳으로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정말 그 지옥에 갈 뻔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시나요?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거기서 빠져 나오게 되었는지를 정말 아십니까? 어떻게 된 게 사람들에게 지옥이라는 것이 농담거리로 밖에 안 여겨지는 것 같아요.

여러분 우리는 오직 그 예수의 은혜로 인해서 지옥에서 건져냄을 받은 것을 잊지 마세요.

여러분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영적인 관점에서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구원 얻은 자답게 지어져 가고 있고 완성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기도하면서 우리의 삶 속에서 구원 얻은 자다운 삶이 나오게 되기를 열망해야 하는 것이며

그러한 기도를 하는 자답게 우리의 손과 발을 움직여 신자다운 삶을 경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크게 한 번 외칩시다.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