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23) 원칙대로 하셨다면...
(롬1:16-17)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람이 무섭다’ 최근에 어떤 방송인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의 제목입니다. 글 제목이 흥미로워 클릭을 해 보았더니 그 내용이 이러했습니다. 한국에서 방송이 되는 예능 프로 중에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있는 모양입니다. 실력 있는 가수 몇 명이 출연을 해서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를 하게하고 시청자들과 방청객들이 점수를 매겨 꼴찌를 탈락시키는 그런 프로인 거 같아요. 그런데 출연한 가수 중에서도 고참에 해당하는 어떤 가수가 공연 도중에 익살스러운 퍼포먼스를 곁들이게 되었는데 그게 오히려 ‘채신없음’이라는 감점의 요인이 되었고 그 친구가 결국 그 일로 꼴찌를 해서 탈락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칙에 의하면 그 가수는 탈락을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후배 가수들이 선배 가수에 대한 예우의 차원에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몇 명이 반발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 글을 쓴 친구가 담당 피디에게 간청을 했다고 합니다. 그 선배 가수의 탈락 이유가 노래 실력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에 의한 것이라면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게 낫지 않겠는가라는 그런 내용이었겠지요. 그래서 담당 피디가 심사숙고한 끝에 기회를 한 번 더 주기로 결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과정을 지켜본 네티즌 들이 들고 일어나 결국 담당 피디가 교체가 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네티즌들이 이구동성으로 원칙을 지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졸지에 원칙보다는 사람을 위하겠다고 나선 담당 피디가 그 가수 대신에 탈락을 해 버린 것입니다. 그 가수는 그 다음 주에도 방송에 출연을 했고 담당 피디는 교체가 되었습니다. 사람을 살리겠다고 긍휼을 베풀었더니 세상이 그 긍휼의 발원지를 묻어 버리고자 나서더라는 것입니다. 원칙대로 하라고. 피디는 원칙을 지키고 가수는 그 원칙에 따라 인간다움을 지키며 장렬하게 산화하라는 것입니다. 그걸 본 그 방송인이 ‘사람이 무섭다’라고 단말마의 비명을 지른 것이죠. 세상은 그렇게 원칙을 지키는 것을 정의라고 생각을 합니다.
혹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원칙대로 인류를 취급하셨다면 인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랬다면 아마 인류는 이 땅에서 박멸되었을 것입니다. ‘먹으면 죽는다’ 그 말은 ‘내 말대로 살지 않는 자는 다 죽는다’는 말인데 피조물 중 그 누가 창조주의 말대로 살아 낼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세운 원칙은 단호합니다. ‘안 지키면 죽는다’입니다.
이 진퇴양난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아담과 하와가 생겨나기도 전에 이미 창세전 언약이 체결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해의 시나리오가 창세전에 이미 작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어, 정말 죽어야 할 자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진즉에 탈락이 되었어야 할 그 가수가 그에게 긍휼을 베푼 피디의 희생에 의해 다시 회생하여 그 다음 방송에서 노래를 하면서, 정작 죽어야 할 자신을 건져내고 물러난 그 피디를 떠올리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의 살아있음이 정말 기쁘기만 했을까요? 면목 없고, 미안하고, 감사하고 그랬겠지요? 만일 그 피디가 다음에 무슨 프로에서 그를 불러도 그는 만사 제쳐놓고 거기에 합류를 할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자발적 순종의 마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역사와 인생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희생되심으로 없음의 자리에서 그렇게 죽은 흙으로 존재해야 하는 우리가 있음의 상태로 새롭게 창조가 되었다는 그 엄청난 구원의 현실을 인생과 역사와 육신 속에서 체휼을 하고 면목 없고 미안한 마음으로, 그러나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 절대 의존자의 자리로 한 발 한발 가는 것이 바로 성도의 신앙 여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옵소서’라는 절대 의존의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정말 예수를 죽인 자라는 진심어린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왜 예수님이 자신의 죄가 되셔서 죽으셔야 했는지를 처절하게 삶 속에서 경험을 하고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위로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 아닙니까? 그렇게 성도는 이 세상에서 자신을 계발하고 변화를 추구하여 하나님도 놀랄만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원래 없음이어야 했던 자신의 처음자리와 그걸 덮으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알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영생은 착하고 훌륭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언약 안에 들어있는 당신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의가 어떠한 것인지를 배우고 그러한 하나님의 의를 면목 없이 덥석 받아들이는 것이 성도의 본무인 것입니다. 왜요?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다른 방법이 없거든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사실이 복음의 진수가 되는 것이며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만이 하나님 앞에서 카운트가 되는 것임을 선언하는 말이라 했지요? 그 외의 다른 의는 다 폐기처분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의인이 하나도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롬3:10)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전7:20) 20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신 그분의 말씀을 온전히 다 지켜낼 수 있는 피조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상태가 불의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피조물은 죄를 지어서 불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그 어떤 존재도 ‘의’의 상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이 이렇게 기술을 합니다.
(롬3:20)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인간 쪽에서 그 어떤 열심과 노력을 내어 놓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의’를 성취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가(imputation)시켜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마3:13~15)
13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14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바로 그 장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그 말은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죄인들의 자기 인정의 자리가 요한의 세례의 현장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요한의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건 예수님께서 죽어야 할 죄인들과 연합을 하시는 장면이라 했지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세례를 받아야 하나님의 모든 의가 이루어진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15절을 보다 원문에 맞게 번역을 하면 ‘왜냐하면 이렇게 해서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우리에게 적합하기 때문이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즉 저주의 홍해에, 저주의 홍수에 빠져 죽으시고 그 품에 안긴, 은혜로 말미암게 되는 하늘의 백성들이, 의인으로 살아나게 되는 그것이 바로 ‘모든 의’가 이루어지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의에 인간들이 보탤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의미에서 ‘모든 의’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의는 영 단번에 성취가 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모든 의를 이루다’가 부정과거 시제입니다. 거기에 쓰인 동사 ‘플레로오’는 ‘fulfil’입니다. 한 번에 빈틈없이 꽉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 의를 감사함으로 면목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인간의 의라 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세례 장면은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를 요약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 공생애가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즉 모든 의가 이루어지는 시작점이면서 그 모든 의가 한 번에 알기 쉬운 그림으로 설명이 되고 있는 장면인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의인’이라는 개념을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들의 선악 구조 하에서 정의해 놓은 그러한 개념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증명을 해 드릴까요? 지금 여러분이 알고 계신 의인들을 한 분씩만 떠 올려 보세요. 스물 두 살의 나이로 청계천 피복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자살을 한 전태일, 월남 파병 훈련 중 부하가 잘 못 던진 수류탄을 몸으로 덮어 자신의 중대원들을 살려 낸 강재구 소령, 신주쿠 신오쿠보 역에서 술에 취해 선로로 떨어진 일본인 취객을 구하기 위해 뛰어 들었다가 그 취객과 함께 사망한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 평생을 조국의 민주화와 빈자들을 위해 희생을 했고 돌아가실 때 안구까지 기증을 하고 가신 김수환 추기경, 무소유의 정신을 강조하며 장삼 한 벌 고무신 한 켤레만 남기고 간 성철 스님이나 법정 스님, 박사학위 다섯 개를 버리고 평생을 아프리카에서 헌신한 슈바이처, 도산 안창호, 도마 안중근, 성웅 이순신, 등등 많은 사람들이 떠오르시지요?
우리의 가슴 속에는 그토록 많은 의인들이 있는데 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마치 무를 자르듯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의는 그런 종류의 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심스럽지만 오히려 그러한 종류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 부정되고 부인 될 의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에서 보셨다시피 ‘의’의 주인, ‘의’의 주체는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의’를 이루셨습니다. 그 말은 이 땅의 그 어떤 의도 다 쓰레기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의’를 예수가 이루시는 것입니다. 잘 새겨들으셔야 합니다. 착한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착한 일 많이 하세요. 그러나 착한 것과 의로운 것은 다른 것이라는 걸 꼭 잊지 마세요. 하나님은 착한 일을 보시고 구원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를 보시고 구원을 하신단 말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의’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진짜 의의 현장에서는 모든 인간들이 다 떠나갔을까요? 진짜 의인은 이 세상 모두에게 외면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선악 구조 속에서 의라고 정의가 된 그러한 종류의 의인들은 온 세상의 추앙을 받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안구를 기증하고 떠났을 때 안구 기증 희망자가 30%가 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을 추모하는 추모 행렬이 40만 명, 그걸 길이로 따지면 300km입니다. 그렇게 그 분을 추모하는 행렬 속에는 스님들도 많았고 무신론자들도 많았습니다. 온 세상이 다 그 분을 칭찬했다는 말입니다.
법정 스님이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며, 자신의 책 인세까지도 가난한 학생들의 학비로 다 내어 놓고 사셨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가난한 학생들의 장학 기금이 일시적으로나마 풍성하게 늘어 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 분의 청빈과 청렴을 본받겠다는 인터넷 카페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 이후 학생 운동의 현장이나 노동 운동의 현장에서 자신의 몸을 불살라 공익을 쟁취하겠다는 분신의 후배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뒤를 잇겠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세상 의인들의 발자취는, 좇겠다는 이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진짜 의를, 모든 의를 완성하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좇겠다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걸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의 현장이었습니다. 아무도 그 길을 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다 도망갔습니다. 그 길은 철저하고 완벽한 자기 부인과 자기 부정의 현장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는 철저한 자기부인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의가 부어질 수 있으니까요. 그게 하늘나라 존재들의 존재 방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절대 의존의 자리가 의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의는 그 어떤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양을 하고 있더라도 그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의를 율법의 의라고 불렀습니다.
(빌3:16)
4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사도 바울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흠이 없는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가 ‘율법의 의’였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로마서에서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롬10:3)
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자신은 분명 율법의 의, 즉 세상의 의로는 흠도 없이 잘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그러한 삶, 의로운 삶이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의로운 행위를 해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의인과 하늘의 의인은 완전히 달라요. 하늘의 의인은 예수의 의가 우리에게 거저 전가되었다는 것을 믿는 믿음에 의해 규정이 되는 것입니다.
(롬10:9~10)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렇지요? 하나님은 인간 측에서 내어 놓는 그 어떤 모양의 착한 행위도 ‘의’로 받아주시지
않으십니다.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에 근거하여 위에 나열한 자타가 공인하는 세상의 영웅들, 그 의인들의 삶을 ‘의’가 아닌 것으로 부정할 때 세상이 그를 어떻게 취급할까요? 수십만 명이 조문을 올 정도로, 온 세상이 존경하는 그런 사람들의 행위가 ‘의’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의라는 이 바보 같은 말을 세상이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죽이고 싶도록 미워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사람들 개인의 행위를 폄하하는 것 이전에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의를 묵살하고 부정해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편적 인간의 자존심 전체가 부정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예전에 법정의 무소유는 진짜 무소유가 아니라 오히려 ‘나’라는 존재의 존재성과 주체성을 챙기기 위한 소유욕의 절정이라고, 그러니까 우리는 무소유의 삶을 살아서 인간됨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설교를 했을 때 스님들 뿐 아니라 기독교 교인이라는 사람들까지 들고 일어나서 저를 공격한 것입니다. 자기는 그렇게 살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살다가간 의인의 삶을 폄훼한다고도 하고 ‘너는 그 분의 발톱의 때만큼도 못 살 것’이라는 독설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맞다, 그래서 난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다’
오늘 설교가 나가면 또 욕을 바가지로 먹겠지요. 예수, 예수, 말로만 하지만 말고 행동으로 보이라고. 여러분, 인간의 착한 행위, 율법의 의는 예수의 도움이 없이도 얼마든지 생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세요?
(고전13:3)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보세요.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구제를 하고 자신의 몸을 불살라서 공익을 구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다 헛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예수님의 사랑을 입지 않은 자들의 삶 속에서도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는 착한 행위와 심지어 세상을 위하여 분신도 서슴지 않는 위대한 행위가 나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사랑을 입은 자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아닌, 인간들이 자신들의 열심과 노력과 의지를 근거로 내어 놓은 모든 것이 다 헛것이라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의를 부정당하면 자신의 의를 부정하는 진짜 의를 부수고 죽이려 합니다.
(요일3:12)
12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 이니라
가인이 아벨을 왜 죽였다고 하지요? 아벨이 의로워서랍니다. 이 말은 아벨이 착해서 죽였다는 말이 아니라 아벨이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것이 꼴 보기 싫었다는 뜻입니다. 아벨은 당시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양을 키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때에는 아직 인간들이 고기를 먹지 못하던 때였으므로 양이라는 짐승이 쓰일 곳은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가죽 옷을 만드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벨은 자기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입고 있던 가죽 옷의 의미를 알고 있는 자로 등장한 것이고, 가인은 그 의미를 모르고 자신의 힘과 가치를 향상시키고 쌓아 올리는 데에만 집중하여 살았던 자로 등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저주를 하시면서 ‘네 근본 된 토지를 갈라’고 하셨지요? 따라서 인간은 농사를 지으면서 자기가 나온 땅의 현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농사를 지으면서 자신이라는 존재와 자신의 행위에 가치를 두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자신의 제사를 가치 있게 여겨달라는 읍소를 올린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바로 인간의 의, 율법의 의, 선악과를 따먹은 자들의 의의 정체인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의가 하나님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면목 없는 의를 공격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성도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을 다시 보세요.
(롬1:17)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문장에서 주어는 ‘디카이오수네, 의’입니다. 그 의가 성도 안에서 일을 하는데 그 의가 성도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라는 어구는 ‘from faith to faith’입니다. 그 말은 믿음에서 시작하여 믿음으로 끝나게 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것이 들어올 수 없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모든 인간의 의를 다 부정해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의가 성도 안에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육적 자아를 죽여 가시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죽여 버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벨이 결국 믿음 앞에서 자신의 모든 행위를 다 부정당하고 장렬하게 전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세상의 모형인 가인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히11:4)
4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 하느니라
잘 보세요. 아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 믿음이 아벨에게 들어오자 아벨이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증거가 아벨의 죽음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그 증거라는 단어에 주의를 집중하셔야 합니다. 그 단어는 헬라어 ‘말튀레오’를 번역한 말인데 ‘증인이 되다’라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말튀스, 순교자’라는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갖고 있습니다.
다시 설명합니다. 아벨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제사로 말미암아 그 아벨이 의로운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의로운 자가 된 아벨에게 그가 의인이 되었다는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증거가 죽음이라는 것으로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는 다름 아닌 아벨이 드린 예물이 함의 하고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벨의 예물은 어린양 예수를 모형으로 하고 있던 것이고, 그 어린양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취될 하나님의 언약이 아벨의 삶 속에 증거로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이라는 무죄한 자가 ‘하벨(nothing)’으로 와서 악당에게 맞아 죽고 셋이라는 하나님의 자손이 새롭게 출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증거라는 단어가 히브리서 11장 39절과 40절에서 잘 설명이 됩니다.
(히11:39-40)
39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40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 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39절을 보시면 믿음의 선진들을 총칭하는 ‘이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전부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분들이 받은 증거의 내용이 바로 앞에 나옵니다.
(히11:36~38)
36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게 믿음의 선진들의 인생에 나타났던 의인됨의 증거입니다. 고난입니다. 죽음입니다. 믿음이 그분들을 증인, 즉 순교자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약속이라는 것은 미래에 주어질 어떤 것에 대한 보증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약속의 내용이 뭡니까? 예수지요? 창세전 언약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니까요. 지금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같이 전부 구약의 하나님 백성들입니다. 그 구약의 하나님 백성들은 예수라는 실체를 역사 속에서 받지 못했지만 증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증거가 아벨의 증거와 마찬가지로 ‘죽음’입니다. 육적 자아가 죽어가는 과정을 겪어내는 일을 성경이 ‘증거, 증인이 됨’이라고 이야기를 한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구약의 성도들 삶 속에 나타난 성도됨의 증거가 사실은 누구의 것이었다는 거지요? 예수님의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걸 선취적 고난이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먼저 육신으로 살다가 간, 이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의의 성취자이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 앞서 구약을 살다간 사람들의 삶 속에 선취적 고난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증거’입니다. 그래서 그 ‘증거’라는 단어가 ‘말튀레오, 맞아 죽다’인 것입니다.
그렇게 의인됨의 증거를 가진 이들이 계속해서 릴레이로 세상에게 맞아 죽다가 결국 예수에게 그 죽음이 당도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 죽음의 릴레이의 실체가 온전히 드러나게 되고 그 죽음에서 하늘의 의인들이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거기가 의의 완성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40절이 우리(신약의 교회)가 아니면 저희가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약속의 실체가 오기까지 그 약속의 실체가 반드시 온다는 증거를 몸에 받았는데, 그 증거가 가리키던 예수의 십자가가 이 땅에 서지 않았다면 교회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들이 받은 증거는 거짓이며 헛것이 되는 거잖아요?
따라서 신약의 교회가 구약의 성도들의 그 증거를 온전하게 해 주는 것이 되는 겁니다. 맞구나, 그 고난이 예수의 고난의 선취적 경험이었구나, 하고 인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그림입니다. 아담이 의인됨의 증거라는 바통을 잡고 열심히 달려 달려갈 길을 다 마친 후에 그 바통을 아벨에게 넘겨줍니다. 아벨은 그 바통을 꼭 부여잡고 열심히 달려서 셋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셋이 그 바통을 에노스에게 넘겼고, 에노스는 노아에게, 노아는 셈에게, 셈은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이삭은 야곱에게, 그렇게 죽 넘어오다가 마지막 바통이 세례 요한에게 넘겨졌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의 실체를 전하다 간 사람들을 성경이 선지자라 부릅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눅16:16)
16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 하느니라
그렇지요? 그런데 그러한 선지자들을 성경이 의인이라고 하고 그들은 세상에게 다 맞아 죽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마23:33~35)
33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35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어떠세요?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브라함을 거쳐 세례요한까지 전달이 된 ‘증거’라는 바통이 세례요한을 거쳐 예수님께 전달이 되었고, 예수님은 그 바통의 내용대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거기에서 구약의 증거 배달 바통이 완료의 지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게 온전케 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약의 교회는 약속을 받은 자들이지요? 이 천년 전에 골고다에 십자가가 섰고 그 역사적 사실이 성경에 이렇게 명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예수의 십자가라는 증거, 증인됨의 바통이 신약의 교회에게 또 다시 전달이 됩니다.
(행1:8)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거 보세요.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을 통해 진행된 증인됨의 바통, 증거의 바통 전달식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료가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서 또 다시 출발 신호가 떨어진 것입니다. 어디로? 재림 예수에게로. 그래서 신약의 교회들이 또 다시 증인됨의 바통을 들고 재림 예수에게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인생을, 증인됨의 바통을 쥐고 달려가는 경주자로 비유하여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행20:23~24)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 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의인됨의 증거가 바울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데 그것이 결박과 환난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증거들을 가지고 냅다 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인됨의 증거를 가지고 뛰고 있는 바울에게서 나타난 모습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자기부인의 모습이었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의가 바울을 덮쳐서 그의 옛 자아를 폭격을 하니까 바울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자로 바뀌어 가더라는 것입니다. 분명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요? 자신의 생명만을 위해 존재하던 자가, 자신의 생명이 없음으로 사라져야 진짜 하늘의 생명이 자신에게 온다는 것을 알자, 그 육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증거의 바통을 가지고 열심히 달리던 바울이 죽음 앞에서 ‘난 이제 다 달렸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는 그 바통을 우리에게로 넘겨줍니다.
(딤후4:6~8)
6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7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니라
의의 면류관을 약속으로 받은 바울이 의인됨의 증거를 가지고 자신의 인생 내내 달렸습니다. 그의 앞에 육신의 죽음이 들이닥쳤습니다. 바울이 그 상태를 달려갈 길을 다 마친 상태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의로우신 재판장으로부터 주어질 의의 면류관이 자기에게 주어질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의의 면류관을 약속받은 모든 교회가 다 바울처럼 육적 자아의 죽음의 질주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믿음으로 말미암게 되는 의를 선물 받은 모든 성도는 증인됨의 삶, 증거를 가지고 인생 내내 달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건 매일같이 죽는 육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전15:31)
31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의 삶을 살던 바울, 달려갈 길을 열심히 달리던 바울이 그 매일의 삶을 ‘날마다 죽는 삶’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게 달려가는 자의 삶이며, 믿음의 증거를 가진 자의 삶이며, 증인됨의 바통을 들고 뛰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복 있는 자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마5:10)
10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의가 개입을 한 인생은 반드시 핍박이라는 과정을 통과하여 십자가로 달리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달려감의 끝에 천국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아는 자는 세상의 의에게 반드시 맞아 죽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타락한 아담 군상들의 자존심을 지켜내기 위해서요.
그래서 성경이 의인들이 모여 있는 교회를 피밭, 나그네의 무덤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마27:3~10)
3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 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 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하고
7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 된 자 곧 이스라엘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가룟 유다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예수님의 피 값으로 받은 은 삼십 냥을 대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죄는 자신이 책임진다고 하면서 목매달아 죽어 버렸습니다. 그 은 삼십 냥은 큰돈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파리 목숨처럼 여겨졌던 노예 한 사람의 몸값이었습니다. 대 제사장들은 그 돈이 큰돈도 아니고 피 값으로 치러졌던 돈이라 꺼림칙하기도 하여 성전 창고에 다시 넣지 않고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성도들을 가리켜 나그네라고 부르지요?
(히11:13)
13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하나님이 선물해 주신 하나님의 의에 의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되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을 가리켜 ‘나그네’라 부릅니다. 베드로는 교회를 어떻게 부르는지 보세요.
(벧전1:17)
17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베드로 사도도 교회를 일컬어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 값으로 그러한 나그네들의 무덤이 구입이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으로 가면 바울이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것을 나그네의 무덤이라고 하지 않고 교회라고 부릅니다.
(행20:28)
28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그렇다면 삼단 논법에 의해 ‘교회=나그네의 무덤’이 되는 거지요?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힘을 동원하여 잘 먹고 잘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모이는 곳이 아니라 이 세상의 나그네들이, 마치 코끼리들이 자기들의 무덤을 찾아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처럼, 죽기 위해 모여드는 곳인 것입니다. 교회의 육신의 정욕이 묻히는 곳이고, 안목의 정욕이 묻히는 곳이며, 의인들의 피가 줄줄 흐르는 곳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전해지는 설교는 성도의 육적 자아를 살려내는 것이 아니라 징책하고 책망하여 죽여 버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파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진정한 쉼이 있다는 것을 아세요?
(마11:28~30)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교회로 부르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그런데 거기는 피밭입니다. 성도들의 피를 요구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거기에 쉼이 있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께서 밖에서 두르신 띠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거반 죽이셔서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끌고 가는 데에 필요한 것이 예수님의 멍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게 진짜 쉼이라는 말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왜 이렇게 고단합니까? 우리의 육적자아의 욕망이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어서 아닙니까?
(전1:8)
8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 하는도다
그렇지요? 그런데 만일 그러한 우리의 되고 싶은 바와 갖고 싶은 바가 다 죽어 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때 진정한 쉼이 있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이라는 사람이 교통사고로 거의 죽다가 살아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일을 기록한 책에서 헨리 나우엔이 말하기를 ‘죽음이 내 눈 앞에 닥치는 순간 나의 모든 정욕과 불안과 고통과 미움과 아픔이 일시에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죽음 너머에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이 그 순간 너무나 명확하게 깨달아졌기 때문이다’ 죽음이 코앞에 당도하자 그동안 자신이 이루지 못해 안타까워했던 것, 용서하지 못해 고통스러워했던 것, 상대적 결핍으로 부끄러워했던 것, 등 모든 것이 다 신기루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죽음과 함께 그 모든 육의 감정들의 발원지였던 세상이 함께 죽더라는 것입니다.
저도 실제로 두어 번 그런 경험을 했었는데, 군대에서 결박 수영이라는 훈련을 받다가 분대장이 저를 건지지 않고 그냥 떠나는 바람에 거의 익사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을 거 같으세요? 저한테 빚진 사람, 못 되게 굴었던 사람, 미래에 이루고 싶었던 꿈, 이런 거 하나도 생각 안나요. 오직 ‘살아야 한다’였습니다. 살기만 하면 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정말 살고 나니 다시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비중 있게 저의 감정을 휘두르더군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쉬게 해 주려고요. 어떻게? 무덤에 묻어서요. 피밭에 묻어서요. 나그네의 무덤에 묻어서요. 최근에 성룡이라는 배우가 자신의 전 재산을 한 푼도 빼지 않고 다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자신의 재산을 다 포기하고 나니까 비로소 자유로워지더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자식에게도 일원 한 장 안 물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육의 소욕이 죽을 때, 육의 영광과 가치를 향한 추구가 박살이 날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늘도 철장으로 우리를 부수시고 내일도 철장으로 내리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속에 다른 법이 있어 그 예수님의 철장을 상단 막기로 막아내고 예수님을 향해 훅을 날리고 있는 모습을 수시로 발견하게 됩니다.
(롬7:21~25)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보세요. 나를 묻으려는 예수님의 열심과 절대로 교회라는 무덤에 묻히지 않겠다는 우리의 옛 자아 간에 전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내 마음의 법이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게 자주 집니다. 나는 수시로 죄의 법에게 사로잡혀요. 그때 성령을 받은 성도에게 어떤 마음이 들겠어요? 그게 24절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괴롭다는 것입니다. 성령과 상관없이 살 때에는 그것이 즐겁고 자랑스럽고 괜찮은 삶인 줄 알았는데 성령을 받고 나니 ‘나’라는 우상을 위해서 사는 그러한 삶이 너무 싫은 겁니다. 그런데 죄의 법이 자신을 자꾸 그 쪽으로 끌고 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의 안에서 처절한 절규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누가 나 좀 여기서 건져줘요. 내 마음대로 나만을 위해서 사는 이런 삶에서 나 좀 건져줘요.’ 이러한 절규를 성경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절규라 부르는 것입니다.
(마5:6)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산상수훈은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역사 속 현실과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하늘 존재들의 존재 양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문장이 ‘복 있는 자여’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을 주셨다고 과거시제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 복을 받은 자들이 이 역사 속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의에 주린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목말라 하고 주려 한다는 것은 ‘나의 의’에 절망하고 나의 불가능함을 자각한 자의 몸부림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에게만 배부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나그네인 교회의 죽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교회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 들으면서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매일같이 폭로 당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아니면 도저히 살 수없는 자신의 실체를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하늘의 의를 간절히 바라는 자가 되셔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내시고야 마실 것입니다. 교회는 피 밭이니까요.
의인은 그렇게 교회라는 무덤 속에서 육적 자아의 죽음을 체휼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나는 끝까지 내 육적 자아의 영광과 가치를 챙기기 위해 동분서주 하다가 영원한 사망으로 던져질 뻔한 자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 살려 주세요’하고 하나님의 의를 꼭 붙드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의인입니다. 몸을 불사르고, 재산을 다 내 놓아 구제하고, 전 인생을 희생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도운 불신자보다 그렇게 나약하고 힘없이, 때로는 구차하게 하나님의 이름만을 부르는 자들이 의인인 것입니다. 그들만이 구원으로 초청을 받은 의인인 것입니다.
(창4:26)
26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롬10:13)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잊지 마세요.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 아래에서 원칙을 지키는 것이 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칙대로 하셨다면 우린 다 죽어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긍휼과 은혜를 베푸셔서 이렇게 살려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은혜와 긍휼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돈과 명예에 목마르고, 자식과 일에 주려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삶이 여러분 안에서 터져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만을 꼭 붙드는 자, 그들이 의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의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말씀의 자리를 사모하셔야 합니다. 제발 말씀 앞에 더 진지해 지시고 그 앞에서 부정당하고 해체되는 성도의 삶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그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올바른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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