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22)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1:16~17)

은바리라이프 2013. 10. 7. 11:26

로마서(22)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1:16~17)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제 우리는 로마서의 대주제가 담긴 16절과 17절에 이르렀습니다. 여기까지가 로마서 서론입니다. 

이제 이 후로는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 서론의 내용들이 구체적인 예들을 통하여 다시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로마서 서론을 잘 공부하셨다면 앞으로 펼쳐질 로마서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 별 어려움 없이 잘 이해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렇게 로마서의 서론은 사활을 걸만큼 중요합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우리가 공부할 16절과 17절이 로마서 서론의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바에 의하면 사도는 자신을 ‘빚진 자’로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 빚진 자라는 단어는 만일 빚을 갚지 않으면 강제로 자신의 소유를 차압당하게 되는, 이미 선고가 내려진 확정된 기결수를 가리키는 단어라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모든 하늘의 빚진 자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삶 속에서 무언가를 내어 놓아야 하는 필연적 의무를 지닌 자들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올바로 인식한 자에게서 나오게 되는 자기부인의 삶이며, 그것을 성경은 증인의 삶이라 부른다는 것도 확인을 했습니다. 


물론 빚진 자의 자기부인의 주체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옛 자아를 털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 증인은 그렇게 자신을 향해 심판의 활을 당기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좇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삶은 바벨론 성 길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삶인 것이라 했지요?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16절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개역성경에는 빠져 있지만 원어 성경에는 16절과 17절 앞에 공히 ‘왜냐하면, 가르’라는 접속사가 들어가 있습니다. 사도는 지금 자신이 빚진 자로 살 수밖에 없는 필연적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이유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표현법은 사도 바울이 아주 즐겨 쓰는 곡언법입니다. 적극적인 역설을 부정의 형식을 빌려 강조하는 표현 기법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복음이 부끄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너무 자랑스러워서 그걸 누군가에게 토해내지 않으면 견딜 수없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그러한 곡언법으로 표현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자가진단은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죄인 중의 괴수에게 복음이 들어와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자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을 수 있는 첫 번째 전제는 올바른 자아 인식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여리고 못난 사람처럼 오셔서 저주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버린 자타가 공인하는 루저인 예수가 자신을 구원하는 메시아라는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되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 군상들이 모여살고 있는 모든 문명 세계의 일상 표준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들의 지성과 도덕을 존숭하는 것인데 예수님은 아담 군상들의 지성에는 비밀로 나타나셨고, 율법에 근거한 인간들의 도덕의 측면에서도 어처구니가 없는 그러한 율법 파괴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울에게는 자랑하고 싶어 못 견디는 것이 되었다고 합니까? 그건 그의 이해 능력이나 논리를 담을 그릇이 커서가 아니라 복음 안에 들어 있는 복음 자체의 ‘능력’에 의해서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복음의 능력이 사도 바울 안에서 제일 먼저 행한 일이 뭐라는 말입니까? 사도 바울의 올바른 자 인식에 관한 일입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내 안에 또 다른 법이 있습니다. 난 사망의 몸과 함께 묶여 있는 자입니다. 누가 여기에서 나를 구해주셔야 합니다.’ 

이게 바로 성도 안의 복음의 능력에 의해 성취되는 첫 번째 사역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의 능력은 반드시 ‘믿음’이라는 전제 하에 그 위력을 발휘를 한다고 합니다.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복음의 능력’이라는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주체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엡2:8)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여기보시면 그 믿음이라는 것도 전제가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그 믿음의 전제는 은혜이고 그 은혜의 수여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도가 그것을 ‘선물’이라는 단어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이라는 것이 성도에게서 필연적 행함을 끌어내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전제는 믿음이라는 것인데 그 믿음은 은혜에서 격발이 되는 것이고 그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주체이신 하나님의 이끄심에 의해, 반드시 완료지점으로의 지향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이 세상에서 빚진 자로, 증인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증인이라는 단어는 순교자라는 단어라 했지요?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이들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육적 자아의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믿음이라는 단어가 주체의 전이를 말하는 것이잖아요? 내가 내 삶의 주체로 살 때에는 나 자신이 믿음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대상이 타자로 상정이 되면 그 때 주체가 그 대상에게로 전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아의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단어 자체가 자아의 죽음을 이미 내포하고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믿음을 선물 받은 성도는 그렇게 자아를 부인당하고 하나님 절대 의존의 상태로 밀려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 털리며 사는 게 빚진 자의 삶이요, 증인의 삶인 것입니다. 


내가 내 자아의 확장으로 붙들고 있던 모든 종류의 내 소유(돈, 일, 가족, 건강, 명예, 이웃 등)를 강제에 의해 털리게 되는 자, 그게 ‘오페일레테스, 빚진 자’이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다 털리고 난 그 자리에 진짜 풍요이신 하나님이 채우고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절대 의존의 상태라 하고 그것을 다른 말로 구원이라 합니다.

그러한 성도의 구원의 현실을 성경에서 가장 잘 요약하고 있는 부분이 오늘 본문 17절입니다. 이 17절 한 절에 성경의 모든 내용이 함축되고 축약이 되어 있습니다.



(롬1:17)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제가 지금까지 로마서 1장의 열다섯 절을 가지고 스물 한 번의 설교를 했는데 그 서론의 설교 스물 한편이 전부 이 17절을 설교하기 위한 초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구절은 중요합니다. 차근차근 한 번 보자고요. 설명할 내용이 많아서 이번 주에 다 설명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아마 다음 주까지 이어서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다는 어절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서 ‘의’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디카이오쉬네’는 히브리어 ‘짜다크’와 같은 말입니다. 그 단어를 영어 성경이 ‘justice’ 혹은 ‘righteousness’로 번역을 해 놓는 바람에 우리 말 개역성경도 ‘의’라는 말로 번역을 한 것인데, 사실 그러한 개념은 헬라철학의 영향 하에 있던 서방의 성경 번역가들에 의해 그 개념의 진의가 잘 못 전해진 것입니다. 


헬라의 철학자인 플라톤이 이 ‘디카이오쉬네’라는 단어를 ‘justice’라는 뜻으로 잘 사용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레떼, 덕’이라는 뜻으로 잘 사용을 했기 때문에 성경의 ‘디카이오쉬네’가 마치 ‘인간의 선한 의지나 덕스러움’ 정도로 번역이 된 것인데, 성경은 헬라어를 쓰던 동방 사람에 의해 기록이 된 것이지 헬라라는 서방에 의해 기록이 된 것이 아님을 잘 아셔야 합니다. 동방의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디카이오쉬네, 의’라는 개념은 그러한 인간의 덕스러움과 선한 의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용어입니다.


관계를 맺고 있는 두 대상이 그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해 내는 아름다운 상태를 ‘디카이오쉬네’라고 합니다. 아울러 ‘관계 안에서 인간을 진짜로 옳거나 선하게 만들어 주는 어떤 것’을 ‘디카이오쉬네’라 불렀습니다. 그렇게 서방의 ‘의’의 개념은 ‘rational’에 가깝지만 동방의 ‘의’의 개념은 ‘relational’에 가까운 것입니다. 미국 사회가 지나치게 ‘rule’에 집착을 하는 것에 비해 그 속에 사는 한국인들은 ‘relationship’을 더 가치 있게 여겨 작은 실수나 잘못에는 눈을 감아주고 하는 그런 것을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의’의 의미는 오히려 후자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우리가 그 ‘의’라는 개념에 대해 올바로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의로운 하나님에 의해 아브라함이 의롭다 칭함을 받는 장면이 창세기에 나옵니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각과 지혜의 울타리 속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창15:1-6)

1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 이니라

2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4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으로부터 아브라함에게 약속이 주어지는데 우리가 전에 공부한 ‘생육과 번성’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네 자손이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라는 겁니다. 제가 로마서 18번째 설교에서 그 생육과 번성이 무엇인지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렸었지요? 그게 뭐였습니까? 하나님의 자손에게서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할 생육과 번성은 그 자손이 상징하고 있던 예수 그리스도(갈3:16)에게서 가장 먼저 일어나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육과 번성은 단순히 숫자가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옛 것의 죽음을 통과한 존재,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마음을 받아 새로운 존재로 부활하게 되는 존재에게서 비롯되는 하나님 나라 확장의 방향성이 바로 생육과 번성이었지요?(겔36) 그래서 그 생육과 번성은 반드시 옛 자아의 죽음과 부활, 즉 십자가가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생육과 번성의 약속이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바꾸어 말해 ‘난 반드시 너를 죽여서 너를 복의 근원으로 만들어 내고야 말 거야’라는 선언인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복의 근원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대역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의 근원이 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잖아요? 그게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육과 번성이었잖습니까? 그 십자가로부터 교회가 생육되고 번성되기 시작한 것이니까요.


하나님은 지금 아브라함에게 바로 그 생육과 번성을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난 널 죽여서 복의 근원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믿음의 조상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의 대표로 그 자리에 서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내려진 약속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유효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금 아브라함의 육적 자아를 죽여 버리시겠다고 약속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백세에 낳은 아들의 심장에 칼을 들이 대는 것입니다. 그건 아브라함 자신의 육적 자아가 죽는 현장이라고 했지요? 그 전까지는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과정에 이러 저러한 모양으로 참견을 해 대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죽은 자를 살려서라도 언약을 성취시키실 것이다’라는 절대 순종과 의존의 자리가 모리아 산의 제단 앞이었으므로 그 자리를 아브라함의 육적 자아의 죽음의 현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야고보가 믿음과 함께 나와야 하는 행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그 행함의 예로 아브라함을 든 것이라 했지요? 그러니까 믿음과 함께 동전의 앞과 뒤처럼 꼭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이 자기 부인인 것입니다. 그게 생육과 번성의 필연적 전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은 복의 근원으로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살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난 널 죽여서 너의 죽음에서 비롯되는 그 하늘의 복을 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을 생육시키고 번성시킬 것이다’라는 언약 성취의 확약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에 의해 성취되는 것을 ‘의’라고 합니다. 하나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 그 언약의 대상을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 그것이 의입니다. 의는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상태라 했으니까요.


반면에 그러한 하나님의 의의 행위에 토를 달지 않고 온전히 그 하나님의 일하심 앞에 순종하는 것,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을 빈 손 들고 나아가서 덥석 받아내는 것을 인간 측에서의 ‘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하나님께서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당신의 약속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다고 하시잖아요?

아브라함이 무슨 덕스러움과 선한 행위와 선한 의지를 하나님 앞에 보였나요? 하나도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아브라함의 수긍의 행위를 ‘의’라고 하신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의 상태를 ‘안식’이라고 하고요. 안식은 하나님과 피조물이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자신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해 내는 상태를 말한다고 했잖아요? (창1:1~창2:4, inclusio 구조) 바울이 그러한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를 이렇게 잘 설명을 해 줍니다.



(갈3:6~9)

6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 지어다

8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보세요. 자기의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 측에서의 의를 받아들이는 자가 의로운 자입니다. 의로운 행위를 해서 의로운 자가 아닌 것입니다. 한군데만 더 볼까요?



(롬5:1)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어떠세요? 의로움이라는 것은 우리의 행위나 자격이나 업적이나 공로를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순순히, 거저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지금 내 꼴을 보면 절대로 그 약속은 이루어지면 안 되는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므로 면목 없이 그 약속을 믿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걸 의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러한 하나님의 의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이며 그 의가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가가 되는 것인지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롬3:21~28)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는데 그 의의 내용이 뭡니까?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1:45)

45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의의 ‘내용’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는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거기에 자기의 의를 보태려고 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를 당신의 백성들에게 거저주시는 이유가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함(롬3:25)’인데 거기에 인간들이 무언가 보태겠다고 나서게 되면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나타내시려 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뭔가 부족한 것으로 폄하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백성들의 의는 하나님이 완료하고 완성해 놓으신 하나님 측에서의 의를 감사한 마음으로 거저 받아 버리는 것, 즉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뭐라고요? 하나님의 의의 온전함을 증거하기 위해 피조물의 의는 완전히 부정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의 앞에서 자랑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고전1:29~30)

29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보세요. 예수가 의입니다. 그 분 자신이 우리의 의입니다. 그 분이 하신 일이 우리의 의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행위나 의지가 의의 기준이 아닙니다. 예수만이 의입니다. 그 진짜 의를 붙드는 사람만 의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명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어절을 어디에서 인용을 한 것이지요? 하박국서에서 인용을 한 것입니다.


하박국은 BC 605년경에 활동을 했던 선지자입니다. 당시는 신흥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세계 최강국이었던 앗수르를 무너뜨리고 팔레스타인 쪽으로 남하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바벨론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치고 계셨습니다. 그러한 현실에 대해 하박국이 불편한 심기를 내 보이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하박국이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지내며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야만인인 바벨론을 들어서 때리시냐고 하나님께 항의를 하자 하나님께서 ‘누가 의인이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율법 지키고 제사지내면 의인이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산 자들을 가리키는데 그 살아있는 의인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구절을 정확하게 직역을 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행위에서 비롯된 의가 아닌)를 가진 자만 살게 된다’라는 뜻입니다. 자기의 행위나 자격이나 소유 등을 가지고 나와서 ‘나 의인 맞지요?’하는 놈들은 다 죽인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러한 유대인들의 인본주의와 율법주의를 바벨론이라는 이 세상의 영걸, 용사들을 들어서 때리심으로 이스라엘의 정체를 폭로시키시고(너희가 바로 바벨론이다)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영걸 됨, 용사됨이 폭격을 당하여 부수어지고 오직 믿음만을 붙들게 되는 그것이 바로 사는 것이고, 그렇게 산 자들을 의인이라고 한다는 것을 그 한 구절이 모두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성자라고 불리었던 마틴 루터가 이 구절을 통하여 회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이라는 모토 아래 종교 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게 된 것입니다. 루터가 수사로, 신부로 살 때, 루터는 자신의 행위와 됨됨이 때문에 너무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매일같이 채찍으로 자신에게 체벌을 가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종아리를 후려치면서 의인이 되기를 힘썼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죄가 점점 더 밝게 보였습니다. 


오죽하면 루터가 고해성사를 하러 들어오면 신부들이 막았다고 합니다. 워낙 세세한 것까지도 다 이야기를 해서 하루 종일 고해성사를 들어줘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로마서 1장 17절을 강해하다가 의인은 자신의 행위나 뉘우침에 의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나게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 날부터 고해성사를 때려 치웠고 자신을 치던 채찍을 버렸다고 합니다. 그걸 진리에 의한 자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당신이 준비하신 당신의 의를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구원을 거저 받으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을 찬양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의입니다.



(롬5:8~10)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우리의 의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보내셔서 죽인 하나님 아들의 피에 의해 거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피가 부어진 시점이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원수였을 때입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예수님의 피를 부으셔서 하늘의 왕자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왕을 배신한 역적들을 능지처참을 해서 죽였습니다. 팔과 다리, 그리고 머리를 찢어서 다섯 토막을 내어 죽이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역적의 외가와 친가의 일족도 모두 죽었습니다. 5촌까지, 어떤 때에는 8촌까지 다 죽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조상의 묘까지 파헤쳐서 그 시체들을 난자하는 부관참시까지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역적을 용서해 주실 뿐 아니라 왕의 자리에 올려주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거기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조금 나은 역적, 조금 못된 역적, 이런 구분이 가능해요?

아닙니다. 역적은 다 같은 역적입니다. 그런데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거저 쏟아 부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내가 역적 맞습니다. 내가 왕이신 하나님을 배신하고 나라는 우상을 섬기던 자 맞습니다.’라는 자인식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내가 예수 죽인 자’라는 인식이 있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와 기쁨으로 인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구원을 받은 의인들은 역적들이 모여서 여전히 역적 짓을 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물 위의 기름처럼 둥둥 뜨게 되는 것입니다. 역적 짓이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것에 자신의 마음을 빼앗기고 그것에 의해 자신의 안위와 행복을 챙길 수 있다고 믿고 그것을 추구하고 사랑하는 것이 역적 짓입니다. 그게 땅의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자들은 다 진멸해 버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빌3:19) 거기에 대한 대표적인 인물이 노아지요? 이제 ‘믿음에서 비롯된 의에 의해 살아난 자들의 삶은 과연 어떻게 진행이 되어 지는가’로 넘어가는 겁니다.



(창6:5-9)

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노아의 사적은 이러 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 하였으며


아브라함도 의인이었지만 노아도 역시 의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의인이 된 것은 8절의 ‘하나님의 은혜’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9절을 보시면 그 의인이라는 사람의 특징이 ‘하나님과의 동행’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을 했던 또 다른 사람이 있었지요?



(창5:24)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 하였더라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하시면서 동행을 하는 이들을 성경이 ‘의인’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하나님과의 동행을 히브리서가 어떻게 설명을 하고 있나 보세요.



(히11:5)

5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 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은 의인이었기 때문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운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사망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 되어 버린 성도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동행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동행을 하는 자가 의인이고, 그 의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즉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동행을 하여 의인이 될 수 있는가? 바로 밑의 6절을 보세요.



(히11:6-7)

6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보세요. 하나님과 동행을 하던 의인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은 그의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말은,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7절을 보시면 노아가 바로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의인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의인인 노아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이 맞지요? 그런데 그 노아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면서 이 세상에게 어떤 취급을 받았나요? 바보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의인들의 고난의 현실을 설명하면서 노아를 예로 든 것입니다.



(벧전3:13-21)

13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15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8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13절의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라는 말씀이 먼저 거슬리지요? 우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세상이 우리를 해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 아래 문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잖아요? 지금 베드로가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된 자들의 고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선을 행하면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이 그 와중에 튀어 나오면 되겠습니까? 


거기에 나오는 선은 단순히 착한 일, 선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완료하신 하나님의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선’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첫 창조 때, 매 날마다 후렴구처럼 붙은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그 ‘토브’라는 단어를 인용한 것이라 했지요? 그 단어는 창조의 언어입니다. 그 단어를 바울도 종종 인용해다가 쓰곤 했습니다. 빌립보서로 가보겠습니다.



(빌1:6)

6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여기에서의 착한 일이 베드로전서의 ‘선한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착한 일이 뭡니까? 성도 안에서 시작된 착한 일이 뭐지요? 구원의 일입니다. 새 창조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선한 일은 예수가 하신 일, 즉 십자가의 대속 사건으로 창조되는 새로운 생명에 관한 일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대표적 속성이요, 하나님 나라의 존재 메커니즘이자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선이라는 단어를 하나님께 국한시켜 버리십니다.



(마19:17)

17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선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선한 일이 성도에게서도 일어나게 된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서 시작하신 일이 성도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 안에서 일어나는 십자가의 실제화, 즉 자기부인의 현실과 새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게 되는 신앙생활의 여정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예수에게서 일어난 일이 역사 속 성도에게서 그대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다’에서 행함이라는 단어로 ‘모방자, 추종자’라는 의미의 ‘미메테스’가 쓰인 것입니다.

그 ‘미메테스’라는 단어는 고린도전서에서도 똑같이 쓰였습니다.



(고전11:1)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자 ‘미메테스’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언급한 ‘열심으로 선을 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궤적을 본받아 그대로 좇아 살게 되는 성도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귀의 참소와 아무런 상관없는 의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해를 입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들만 지옥에서 건져짐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의 삶의 궤적을 좇아 고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의인이고, 그 의인만 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로 밑의 14절이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의를 선물 받은 자는 그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복이랍니다. 17절에도 똑같은 말이 나옵니다.



(벧전3:17)

17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삶을 좇아 생육과 번성의 삶,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은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절대로 피해갈 수 없는 성도의 필연적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절대로 취소되거나 변개치 못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러한 구원의 현실, 피조물의 육적 자아가 하나님의 은혜로 폭격을 당하여 이 역사 속에서 죽고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생명력으로 다시 살아야 하는, 성도의 십자가의 삶을 이해하거나 수긍할 수 있는 자가 아주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옥에 있는 영들, 즉 지금(NASB version) 지옥에 있는 자들에게 성령으로 복음을 전하셨는데 겨우 노아와 그의 식구들만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는 말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노아의 때에 의인으로 부르심을 입은 노아가 ‘방주’, 즉 ‘예수’ 안으로 들어가 그 예수를 의지하지 않으면 다 죽는다는, 하나님의 의를 전파했습니다. 어떻게요?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려 그렇게 의를 전파했던 것입니다.



(벧후2:5)

5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그렇지요? 노아가 어떻게 의를 전파했다고요? 성령에 의해 의를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영으로 복음을 전하셨다는 구절의 진의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영으로’는 성령을 말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아무도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떠난 이 역사의 실체와 그 역사 속에서의 고난의 현실이 감지되지도 않았고 이해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홍수에 쓸려가며 죽으면서 까지도 그 방주의 필요성을 몰랐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24:37~39)

38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렇지요? 그런데 노아는 어떻게 하나님의 의, 예수라는 방주의 필요를 알게 되었을까요?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과 모욕과 냉대와 업신여김을 받으면서, 이곳은 빨리 빠져나가야 할 곳이라는 것을 체휼했기 때문에 방주 안으로 도망 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을 보면 노아와 그 가족들을 ‘물에서’ 구원을 얻었다고 하지 않고 ‘물에 의해’ 구원을 얻었다고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벧전3:20)

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여기에서 ‘물로 말미암아, 디 휘다토스’는 ‘by water’입니다. 의인은 물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물은 죄를 진멸하고 잘라버리는 용도로 하나님께서 쓰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물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놓여 있는 자들에게는 저주의 물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어지게 되면 죄와 어두움을 발라내는 용도로 쓰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은 성도에게서 잘려나가고 부수어져 나가야 할 것을 없애버리는 수술용 메스인 것입니다.



(창9:11)

11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여기에서 홍수로 ‘멸하다’라고 번역이 된 ‘카라트’라는 동사는 ‘cut off’라는 뜻입니다. 그건 창세기 15장에서 제물의 쪼개짐에 쓰인 단어였고 그 단어는 ‘언약’이라는 단어와 혼용해서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노아시대의 홍수, 즉 물은 하나님의 저주로 퍼부어져 하나님의 대적들을 모두 몰살시키는 하늘의 심판입니다. 그 저주의 물을 예수(방주)가 맞고 십자가에서 ‘cut off’ 쪼개진 것입니다.(창15)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물(cut off)이,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어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성도의 삶 속에서 그대로 실제 화되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물에 의해서’ 구원을 받은 노아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물을 어떻게 설명을 하나 보세요.



(벧전3:21)

21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물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하지요? 그게 세례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례가 뭡니까?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서 죽었고(물에 빠져 죽었고)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공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세례라는 것 자체가 옛 자아의 죽음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물이 무엇을 하느냐하면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번역이 좀 가난합니다. 그 구절은 선한 마음이 하나님만을 간구하게 하는 것이라고 번역을 해야 맞습니다. 그 ‘에페로테마’라는 단어는 ‘향하여 찾아가다’라는 뜻이 아니라 ‘간구하다, 호소하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따라서 물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찾아 그분께 간구하게 만드는 하나님 절대의존자 만들기의 도구인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에스겔서 36장의 새 언약의 현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겔36:25-27)

25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 할지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생육하고 번성하는 자로 만들겠다고 하시면서 그들에게 물을 뿌려 새 마음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 행하는 자로 만드시겠다고 하지요? 하나님의 규례를 행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베드로서의 ‘에페로테마’입니다. 여기에 물이 나오고 선한 양심이 나오고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를 베드로가 인용 해다가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물이 우리에게 선한 마음을 갖게 하는데 성령이 개입을 하지요?(26,27)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 안에서 물의 심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에 의해 우리의 옛 자아가 죽고 새사람이(내 안에 사시는 예수)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물이 성령이다’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요7:38~39)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따라서 배에서 생수가 흘러넘치는 이의 삶은 심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거 기대하지 마세요.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하심으로 우리의 옛 사고와 옛 자아를 완전히 부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의 물에 의해 오히려 소생하게 되는 구원의 현실을 성경이 ‘부흥’이라고 합니다.



(합3:2)

2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라는 말의 진원지인 하박국은 바벨론과 유다의 공동 심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들어 유다를 치시겠다고 하시면서 ‘누가 의인이냐?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자가 의인이다’라고 말씀하신 후 그 유다를 치기 위해 세운 바벨론도 다 사용하신 후에는 용도 폐기를 해 버리시겠다고 2장에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곳에도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이 또 나옵니다.



(합2:4)

4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은 바벨론 안에 유다가 들어 있고 유다 안에 바벨론이 들어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유다 안의 바벨론을 완전히 진멸하시고 믿음에 의한 의로 그들을 살려 내시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걸 부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수년 내에 우리를 부흥케 해달라는 그 청원 바로 밑에 주께서 데만에서 오시고 바란 산에서 오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곳은 모두 심판의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부흥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하야’의 피엘(강조, 강의형) 동사입니다. 그 말은 ‘거의 죽었던 것을 은혜로 소생시키다, 살려내다, 생명력이 넘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부흥이라는 것은 죽음, 즉 없음인 자들에게 그 없음과 죽음의 실체를 체휼케 하여 있음으로 살려내는 ‘하나님의 의’의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로 구원해 내는 그 현실을 ‘하야, 부흥’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부흥, 생육과 번성은 어느 한 대표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 연합된 그의 가족들이 살아나는 십자가의 원리에 의해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인 노아 한 사람의 ‘의로움’에 의해 나머지 가족들이 살아나는 이야기가 창세기에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창7:1)

1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노아의 의로움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자 그의 가족들이 방주 안으로 거저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 한 사람의 의입니다. 노아의 가족 전부가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그게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게 되는 성도의 의인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성도의 삶에서 그러한 십자가의 현실, 의의 현실, 복의 근원됨의 현실이 실제 화되어 나타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나로 인해 다른 이들이 유익을 얻고, 내가 비워짐으로 다른 이들이 수지를 맞는 그런 삶이 우리 안에 실제 화되어 나타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점점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이 땅에서 살게 되고 결국 역사의 무덤 속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나그네의 무덤, 피밭(아겔다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결국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다음 주에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성도는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의 옛 자아와 역사의 역 창조 과정을 눈으로 목격을 하고 체휼을 하면서 새 창조의 필연성에 대해 뼛속 깊이 새기고 가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믿는 자란 자신의 주체를 부정당한 자인데 그들만이 구원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그 능력의 복음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면 우리 안에서 먼저 심판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복음을 받은 성도는 이 세상 속에서 이방인으로 나그네로 밀려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에릭 사티의 음악처럼.


어제 한참 설교원고를 써 내려가던 중에 제자로부터 메일이 한 통 왔습니다. 가구 음악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에릭 사티의 음악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참 신기하다 싶으리만치 아주 적절한 예화거리가 당도한 것입니다. 독립 영화나 다큐멘터리 등의 백 뮤직으로 아주 잘 쓰이는 사티의 음악은 그야말로 가구 같은 음악입니다. 사람들이 방안의 가구나 벽지를 특별히 신경을 써서 눈여겨보지는 않지만 보긴 보는 것처럼, 경청해서 듣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귀에 들리는 그런 음악을 가구 음악이라고 합니다. 있는 듯 없는 듯 편안한 음악을 말합니다. 그런데 아주 강한 매력이 있는 그런 음악입니다. 한 때는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촌스러운 사람이고 에릭 사티를 좋아한다는 사람이 음악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사람을 취급을 받을 정도였으니까요.


에릭사티는 드뷔시의 친구로 드뷔시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방안의 가구의 자리를 자처한 사람이었습니다. 제 노래 중에 ‘너를 위한 sarabande’라는 곡이 있는데 그 노래가 드뷔시의 피아노를 위하여(Pour le Piano)’ 중의 ‘사라밴드(Sarabande)’를 인용 해다가 만든 곡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음악 짐노페디는 예전에 제가 ‘김성수의 코팝스’라는 방송을 진행할 때 늘 백 뮤직으로 조그맣게 깔아놓고 멘트를 하던 그런 음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음악은 청중의 목덜미를 잡고 ‘자 나를 따라와’하며 강요를 하는 음악이 아니기 때문에 백 뮤직으로는 최고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티의 이야기가 메일로 왔으니 얼마나 제가 놀랐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는 스스로의 인생도 그렇게 가구처럼 살았습니다. 그는 평생을 문인들의 주점이었던 ‘샤노아르’에서 샹송이나 팝송을 연주하면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다가 결국 초라하게 생을 마감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음악이나 인생이 모두 다 다른 이들의 존재성과 주체성을 확립시켜 주는 가구와 같이 존재했고 영위 되어졌던 것입니다. 그는 그의 인생 전체를 다른 이들의 백 뮤직처럼 살다가 갔습니다. 역사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고 그는 늘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이 진짜 힘 있는 삶이었고 가치가 있는 삶이었음을 역사가 평가를 해 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끔씩 그러한 이들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복의 근원으로, 의인으로, 생육과 번성의 삶을 사는 자로 이 세상을 살다가 가야 하는 성도의 삶이 무엇인가를 힌트 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린 그렇게 하나님의 의에 의해 우리 자신의 주체성과 존재성을 차압당하고 벽지처럼, 가구처럼 타자를 위해 은은하게 존재하다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왜 나에게 이런 역할이 주어진 것이냐고 불평을 하시거나 원망을 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끌려가는 것이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 성도의 삶이 맞는 거니까요.

다음 주에 계속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