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21) 빚진 자들, 두 증인의 죽음
(롬1:14~15)
14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정당할수록 나는 더 죄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가 한 말입니다. 성령을 받고 그동안 인간들의 선악구조에 의해 잘 못 알고 있었던 죄와 의와 심판의 개념에 대해 책망을 받게 되는 자들에게서 필연적으로 도출이 되는 자기 진단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가치와 영광을 챙겨 갖기 위해 정당함이라는 것까지 이용을 해 먹는 존재인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정당하고 순결하고 깨끗한 겉모습이 해맑게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인간은 자아숭배의 깊은 죄 속으로 더 깊숙이 침잠을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을 죽은 자들의 세상이라고 명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역사는 죽은 시체인 주제에 산 자인 척을 하는 좀비들의 거대한 무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이 자기 삶의 주체가 되어 살고자 하는 모든 존재를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고 하니까요. 그래서 이 역사는 시체 썩는 냄새와 시체 썩는 더러운 물만 생산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역사에 던져지는 오고 오는 수많은 아담 군상들 중에 그러한 역사와 인생의 실체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존재들이 다 죄와 허물로 죽은 좀비로 태어나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하나같이 좀비처럼 사는 것이 옳은 것이고 정상이며 정당하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눈이 멀고 귀가 먼 이들 중, 창세전에 아들에게 주마고 약속을 하셨던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과 귀를 열어 버리십니다. 그들은 그동안 인간들의 선악구조에 의해 잘 못 알고 있던 죄에 대하여, 그리고 의에 대하여,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 깨달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눈은 ‘무엇이 보이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닙니다’라는 엉뚱한 대답을 했던 개안된 맹인의 경우처럼 한 번에 세상의 실체를 완전하게 간파할 수는 없지만 서서히 그 세상의 실체에 대해 알아가게 됩니다. 초점이 맞지 않던 카메라의 초점이 점점 맞추어져 그들의 마음속에 선명한 역사의 상이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헛되고 더럽고 어두운 세상에서의 탈주를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소망이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10년 전 쯤, 한 책방의 구석 자리에 앉아서 두 시간 만에 저자 후기까지 다 읽어 버렸던 파울로 코엘료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라는 소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왕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한 마법사가 그 나라 백성들이 모두 물을 길어 먹는 우물에 묘약을 풀었습니다.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은 모두 미쳐 버립니다. 이튿날 아침, 물을 마신 백성들이 모두 미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왕과 그 가족은 왕실의 우물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만 미치지 않았습니다. 제 정신인 왕은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서 안전과 공중위생에 관한 일련의 조치를 내립니다. 그 우물을 봉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백성들이 이미 그 우물을 마시고 다 미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왕의 칙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왕이 미쳤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대대적인 하야 시위를 합니다. 왕은 쓸쓸히 왕위를 떠날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왕비가 왕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도 우물로 가서 그 물을 마셔요. 그러면, 우리도 그들과 똑같아질 거예요’ 왕은 아내의 혜안에 감탄을 하며 얼른 가서 그 우물물을 마십니다. 왕이 같이 미쳐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왕은 죽는 날까지 그 왕좌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베로니카라는 그 소설 속의 주인공은 이 세상에 극심한 권태를 느껴서 자살을 시도했던 젊은 여자입니다. 그런데 그 자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그녀는 ‘빌레트’라는 정신병원에 갇혀 버립니다. 설상가상으로 다량의 수면제 복용으로 인한 심장 질환이 생겨 겨우 일주일의 시한부 인생이 되고 맙니다. 스스로 선택했던 죽음에 성공하지 못한 여자가 주어진 죽음에 순응해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바로 그 기간 동안에 그 정신병원에서 세상으로부터 비정상이라는 진단을 받고 외롭게 빌레트에 갇혀있는 소위 ‘미친 사람’들과의 세상살이의 와중에 나오는 대화입니다.
베로니카가 그 이야기를 해 준 제드카라는 사람에게 ‘당신은 미친 것 같지 않다’는 말을 하자 제드카가 말을 합니다. ‘아냐 난 미쳤어. 베로니카, 저 빌레트 담장 너머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 알아?’하고 묻습니다. 제드카의 의중을 알아차린 베로니카가 ‘같은 우물물을 마신 사람들이요’하고 대답을 합니다. 그때 제드카가 말을 합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 사람들은 자기들과 똑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는 그 담장 밖 사람들을 다 정상이라고 믿지. 그래서 나도 그 우물물을 마신 척하며 살고 있었던 거야. 그러나 이제 난 그들과 다른 미친 사람으로 살 거야’ 빌레트 울타리 밖의 사람들이 저주의 우물물을 마신 미친 존재들임을 아는 제드카는 그들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이 오히려 나은 삶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끊임없이 ‘누가 진짜 미친 자들이냐?’를 묻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이 좀비들의 세상에서 비 정상인이라고 진단을 받고 ‘빌레트’에 갇혀 있는 이들이 미친 사람인 것 같으세요? 아니면 이 저주의 우물물을 먹고 모두 다 힘과 복이라는 것에 미쳐 있는 이 좀비들의 세상에서 정상인이라고 인정을 받고 있는 그들이 미친 사람들 같으세요? 쉽게 대답을 못 하시겠지요? 다들 미친 세상에서 똑같은 우물물을 마신 사람들처럼 살고 있으니까요.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가 상정해 놓은 선악구조 하의 기준을 두고 정상과 비정상을 갈라냅니다. 전자에 속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누군가를 후자에 속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 그렇게 후자가 되어버린 자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하고, 결국에는 존재할 수없는 허상의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 이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의 속성 아닙니까? 그래서 모든 인간들이 그 ‘정상’이라는 무리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자기들의 전 인생을 걸지요.
아담 안에서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 들 중 그러한 기제론 적 삶의 공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을 받은 사람들만이 그러한 기제론 적 삶의 공식 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정말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미친 사람들처럼 이 세상의 삶의 원리와 반대 되는 쪽으로 끌려갑니다. 그들 속에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말이 아니라 밖에서 띠를 띠우고 어떤 저항할 수 없는 힘이 그들을 끌고 가는 것입니다. 힘이 들지요. 마치 거꾸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연어 떼들의 사투처럼 그들의 삶도 사투로 점철이 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성령의 은혜로 이 미친 세상의 실체를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사투의 현장에서 소망으로 말미암아 기쁘기도 하고 평안하기도 한, 세상이 보기에 진짜 미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빌레트에 갇혀 버리는 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그들만이 하나님 나라에 입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를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빚진 자’라는 단어로 함축하여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빚진 자’라는 단어, 헬라어 ‘옵헤일레테스’는 이미 법정에서, 갚을 것이 있는 죄인으로 확정 판결을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 채무 상환의 일을 소홀히 하거나 거부할 시에는 감옥에 들어가서 응분의 죄 값을 치러야 하는 그런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옵헤일레테스’는 어떤 일을 할 의무나 필연성에 묶여 있는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무언가를, 누구에겐가 내어 놓아야 합니다.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본문 15절에 나오는 ‘복음’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전도해라, 선교해라’라는 권고의 말씀이 아닙니다. 복음을 선물 받은 모든 성도의 삶의 양태에 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복음은 말이나 글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을 받은 자의 삶으로 녹아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그게 복음을 몸으로 살아내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살아도 되고 안 살아도 되는 그런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연적이며 필수적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한 성도의 역사 속 현실을 어떻게까지 표현을 하는 지 보세요.
(고전9:16)
16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 이로라
여기에서 ‘부득불’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헬라어 ‘아낭케’는 ‘강제, 강압’의 의미가 담긴 단어입니다. 그리고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 이로라’는 어구는 이사야나 마태나 요한이 하나님을 뵈었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탄식을 했던 바로 그 탄식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탄식은 망자가 지옥 앞에서 내 지르는 탄식입니다. ‘어, 이거 어떻게 하지? 난 완전히 망했네’하고 처절하게 부르짖는 망자의 외침. 그래서 거기에 ‘우아이(alas)’라는 헬라어 감탄사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 구절 속에서 ‘복음을 받은 자신은 반드시 그것을 삶으로 입으로 토해내게 되어 있는데 만일 그 삶이 내 속에서 터져 나오지 않는다면 나는 지옥 갈 사람이 분명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복음을 살아내야 하는 성도의 삶은 필연성과 당위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도 똑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행1:8)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승천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내 증인이 되어라’가 아니라 ‘되리라’입니다. 그 말은 증인이 되게 하시는 주체가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건 명령이 아니라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그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일어날 일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성취해 내시는 분이니까요.
이렇게 성도는 빚진 자의 삶, 즉 증인의 삶을 반드시 필연적으로 살아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그 빚진 자의 삶에서 반드시 나와야 하는 것, 그에게서 나와 타자에게 전해져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요한계시록으로 가서 하나님의 빚진 자들이 어떠한 삶을 살게 되는 지를 보지요.
(계11:1~10)
1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2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3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5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7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이니라
9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여기에 두 증인이 나옵니다. 두 증인은 유대 율법 하에서 증인이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정족수를 염두에 둔 숫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당신의 증인으로 세상에 파송되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신 것입니다. 이 두 증인은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하지요? 그게 어디서 나온 겁니까? 스가랴서 4장에 나오는 어절을 그대로 옮겨 온 것입니다. 스가랴 4장에 보면 촛대와 두 감람나무가 나옵니다. 그 두 감람나무는 당시 성전을 재건하고 있던 대 제사장 여호수아와 유대 총독 스룹바벨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슥4:3,11,14)
3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11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14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
사도 요한이 바로 이 어절들을 인용하여 요한계시록 10장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스가랴 4장에 보면 성전재건을 하고 있는 두 증인에게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이 떨어집니다.
(슥4:6)
6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열심히 성전 재건(스룹바벨 성전)을 하고 있는 두 증인에게 ‘그건 너희 힘으로 되는 게 아니라 나의 신에 의해 성취되는 거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동거하게 되는 하나님 나라, 즉 성전은 인간의 힘으로 성취되거나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에 의해 성취되고 완성이 되는 것임을 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 거룩한 성전이 바로 하나님의 신부인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이자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들의 수고와 노력에 의해 지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지어진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성전 재건의 현실을 직접 보고 들은 두 증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이 역사 속에서 무엇을 증거 하다가 가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지어질 수 없는 것이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만을 의지하여 그분께 순종해야만 산다는 것을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인간 존재의 존재성과 주체성을 박살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힘의 원리가 진리인 줄 알고 살아가는 이 세상 좀비들은 그들이 불편할 수밖에 없지요. 인간 존재의 가치 실현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올인 하고 있는데 그게 아니라는 자들이 나타나서 찬물을 끼얹으니 불편하지 않을 리가 없지요.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오셔서 유대인들의 그러한 행위들을 부정해 버리셨을 때 예수님을 때려죽이지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 이야기 해 보자고요. 누군가 우리의 자존심을 심하게 긁고 심지어 나라는 존재의 존재성과 독립성과 주체성을 부정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나타났을 때 우리 마음속에 어떤 마음이 들어요? 저 놈만 없으면 살 것 같다는 마음이 안 듭니까? 바로 그 마음이 예수를 죽인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 죽인 자가 맞지요? 내 안에 복음이 들어오게 되면 바로 그러한 육적 자아가 복음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진리의 말씀을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때려죽이고 싶어요. 왜? 그 복음이 나를 무시하고 하찮게 여기거든요. 매일 ‘넌 죽은 흙’이라고 하고 ‘넌 죄인 중의 괴수’라고 지겹도록 외치거든요. 그래서 때로는 그 복음의 말씀을 마음속에서 때려죽이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잔치를 벌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진리는 죽지 않아요. 계속 살아납니다. 결국 진리에 의해 육적 자아가 살해를 당하고 예수에게로 연합이 되는 것을 구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11장은 일차적으로 우리 성도 내면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양상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우리가 뭐 그렇게 대단하게 세상에게 죽임을 당하는 삶을 삽니까? 일차적으로 우리 내면에서 우리의 옛 자아가 부인을 당하게 되면 세상이 우리를 미친 사람 취급하는 순으로 요한계시록 11장이 우리에게 실제 화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리에 의해 정복당하고 부정당하는 삶을 살면서, 결국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가능성과 가치마저 차압을 당하는 그러한 성도의 삶이 바로 예수만이 길이요 생명이라는 진리를 전하는 복음의 삶인 것이고, 그게 바로 빚진 자들이 내어 놓아야 할 채무상환인 것입니다. 그 현실을 말로 표현해 내는 것이 복음전함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빚진 자들은 자기 안의 옛 성전, 즉 육적 자아의 가능성의 파괴를 경험하면서 새 성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의 의존이라는 필연성을 체휼하고, 그것을 몸으로, 입으로 전함으로 해서 빚을 청산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두 증인의 이야기가 시작이 되는 요한계시록 10장이 아주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계10:8-11)
8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9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10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두 증인이 증인의 삶을 살기 전에 무엇을 먹습니까? 작은 책을 먹습니다. 그런데 그 책이 입에서는 단데 배에서는 씁니다. 그 말은 그들이 받아먹은 말씀이 뱃속에 들어가서 소화가 되기 시작하여 밖으로 나가게 될 때 쓰디 쓴 일로 화하여 나타나더라는 말입니다.
말씀의 주제는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인데, 그래서 좋아죽겠는데 그것이 삶으로 체휼이 될 때 쓰디 쓴 약처럼 고통스럽더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책 속에 무엇이 기록이 되어 있기에 그것이 뱃속에 들어가서 에너지가 되어 밖으로 나올 때 쓰디 쓴 것으로 바뀌어 나오게 되는 것인가?
(겔2:8~10)
8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9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10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 되었더라
두 증인이 받아먹은 그 책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자기 주체성과 존재성을 우상 삼아 살고 있는 세상아, 너희들은 이제 다 죽었다’입니다. 그 책을 먹은 자의 뱃속에서 그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소화가 되면 그의 삶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먹은 대로 나오겠지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삶이 그 두증인의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먼저 그 책을 먹은 자 속의 옛 자아가 곡소리 나도록 공격을 당합니다.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현실이 성도의 자아 안에서 실현이 됩니다. 그리고 그 현실이 소화가 되어 밖으로 터져 나와 타자에게 전해질 때 그 타자들 또한 그이를 공격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멀쩡하게 자신들이 정상이며, 옳은 것이며, 훌륭한 것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는 자들에게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을 전하게 되면 세상이 그 말을 전하는 자들을 어떻게 대하게 되겠습니까? 그건 사는 게 아니라 죽은 거라며, 예수가 완료해 놓으신 십자가 은혜만을 붙드는 것이 인류가 살 길이라는 것을, 그렇지 않으면 전부 멸망의 불바다라는 재앙에 던져져 애가와 애곡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전하면 세상이 어떻게 반응을 하겠어요? 미친 사람 취급 하겠지요?
그런데 그러한 두 세력의 싸움이 내 안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복음을 받아먹게 되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이 혼돈입니다. 도대체 어떠한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가 명쾌하게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내 안에 들어온 복음이 불편합니다. 때로는 복음을 받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기도 해요.
그러다가 점점 살아계신 말씀에 의해 한 쪽 세력이 점령을 당하고 잠식을 당하게 됩니다. 인간의 옛 자아가 모든 통점이 다 살아있는 가운데에서 난도질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 속에서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시73:14)
14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욥7:15~19)
15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16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17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18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19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복음을 받자마자 침 삼킬 동안의 여유도 주지 않고 계속 애가와 애곡과 재앙으로 성도의 시간을 채우십니다. 그게 육적 자아의 해체 과정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으로부터도 고립을 당하고 공격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기 이 육신과 역사와 공간이 살만한 곳이 아니라 빨리 빠져나가야 할 곳임을 알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먼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삶을 체휼케 하십니다.
그렇게 말씀을 받아먹은 사람의 삶 속에서는 옛사람과 새사람 간의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새사람이 승리를 해가면 갈수록 이 육신과 역사는 빨리 벗어나야 할 것임을 깊이 자각할 수 있게 됩니다. 그걸 입으로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때 그걸 들은 세상 사람들이 우릴 어떻게 취급한다고요? 미친 사람 취급합니다.
거기에서 파울로의 소설 속의 어떤 이처럼 ‘나도 우물물을 먹은 사람처럼 연극을 하며 살 거야’하면 안 됩니다. 아니 그렇게 놔두시지를 않습니다. 세상이 정상이고 우리가 비정상인 것처럼 오히려 우리를 고립시키시고 소외시키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립과 소외를 경험한 자만이 여기에서 살아 날 수 있는 자입니다. 그게 빚진 자, 증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두 빚진 자, 두 증인이 굵은 베옷을 입고 ‘성전’에서 ‘다시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계10:11, 11:3)
11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3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1260일은 마흔 두 달, 즉 이스라엘의 42년 광야 세월로 상징되었던 이 역사와 인생 전체, 혹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류의 전 역사 속에 던져지게 될 하나님의 증인들은 옛 성전, 즉 인간의 가능성을 고수하려고하는 이 아담 군상들의 세상 속에서 새 언약의 현실, 즉 은혜의 현실을 다시 전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을 갖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역사와 인생을 고수하고 수호하겠다는 것이 이 세상 아담 군상들이라면 그것을 부정하고 부수는 이들이 빚진 자, 증인들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역사에다가 초를 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성전, 즉 옛 성전인 이 세상 속에서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죽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베옷이라는 것 자체가 장례식에서 입는 옷이니까요.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한 번이라도 웃으셨다는 기록이 성경에 없는 줄 아세요? 예수님은 이 죽은 자들의 세상 속에서 차마 웃으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초상집에서 어떻게 웃어요? 예수님은 자주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고 자기 백성들의 이름을 부르며 우셨습니다. 어떻게 죽은 자들이 산 자인 줄 착각하고 콩콩 거리며 강시처럼 살고 있는 모습을 보시면서 웃으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뭐 대단한 기쁠 거리를 찾아 낼 수 없어야 합니다. 베로니카처럼 이 세상이 정말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곳임을 알고 이 세상에서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 그 두 증인은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계시록 11장으로 돌아갑니다. 그러한 성도의 올바른 역사인식과 올바른 자 인식의 과정을 요한이 성전 척량이라는 소재로 설명을 해 줍니다.
(계11:1~2)
1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2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이미 말씀 드린 대로 두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라고 세상에 보내진 하나님의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요한계시록 21장에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지칭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성은 곧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처소, 성전인 것입니다.(고전3:16) 한 마디로 교회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 거룩한 성이 나옵니다. 그 거룩한 성을 하나님께서 척량을 하라고 하시는데 그 거룩한 성이 성전 밖 마당에 해당하는 이방인들에게, 곧 세상에게 짓밟힘을 당합니다. 얼마동안요? 마흔 두 달 동안이요. 그건 전 역사를 지칭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에스겔서 40장에서 인용이 된 것입니다.
(겔40:1-3)
1우리가 사로잡힌 지 이십 오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십 사년 정월 십일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2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그 땅에 이르러 나를 극히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3나를 데리시고 거기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 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서 있더니
거룩한 성이 척량이 되고 있지요? 38절과 39절에 보면 거기에 번제물을 씻는 곳과 제물을 드리는 제단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성은 성전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성전이 척량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이 함락 된 후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성과 성전이 이방인에 의해 파괴된 후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성과 성전이 파괴가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성전을 척량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에스겔에게 보여주시는 성전 척량은 어떤 성전의 척량을 말하는 것입니까? 파괴된 성전의 자리에 성령에 의해 선 새 성전, 즉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새 성전은 곧 예수(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요 그 안에서 새 성전으로 재창조되는 하나님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걸 천사에게 척량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인간에 의해 세워진 옛 성전, 그러니까 인간들의 하나님 흉내 내기에 의해 세워진 역사는 다 진멸 될 것임과 하나님의 사자에 의해 세워질 새 성전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세워질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벨론 포로기에 에스겔에게 환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는 하나님 백성들의 육적 자아 죽이기의 현장인 것이고 그러한 포로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 저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네요.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부르짖는 하나님 절대 의존 자 만들기의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척량이라는 것은 건물을 지을 때에도 필요한 것이지만 건물을 고치거나 허물 때에도 필요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거룩한 성, 성전 안만 척량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인 성도는 스스로의 노력이나 자격이나 자원에 의해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존재케 되는 것임을 알려주시는 것임과 동시에 이 역사 속에서 그러한 은혜의 현실을 체휼케 해 주시기 위해 이 세상 속에서의 육적 자아의 해체 과정을 겪게 만드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흔 두 달 동안 이방인의 뜰은 척량에서 면제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미쳐 돌아가는 이 세상이 진리인양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일반 은혜 아래에서의 심판 유보인 것입니다. 노아 언약에서 나타난 무지개가 바로 그 심판 유보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활이 아직 당겨지지 않고 휴지기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성도 안에서만 보수와 해체와 건설의 척량 작업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도는 이방인들에 의해 짓밟힘을 당합니다. 그들이 마흔 두 달 동안 성전을 짓밟는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이 역사는 미친 좀비들에게는 살만한 곳이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들에게는 죽고 싶은 곳이 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라는 곳이 전부 미치는 약을 풀어 넣은 마녀의 우물물을 먹고 다 미쳐 있다는 것을 맨 정신에 보는 이들이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빨리 탈출하고 싶잖아요? 그러한 역사의 현실을 간파한 전도서 기자가 이 역사라는 현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전9:3~5)
3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4모든 산 자 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5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바 됨이라
이 세상 모든 인간이 다 미친 마음을 품고 미친 삶을 살다가 죽은 자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미친 세상이 사자처럼 살다가 가는 그 와중에 개처럼 살다가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개처럼 살다가 간다고 해도 그들은 산 자들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죽은 세상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 세상이 아무리 자기들을 짓밟는다고 해도 그들의 결국을 알고 있는 두 증인은 올곧게 예수의 은혜만을 증거 하다가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증인의 삶을 누가 가장 먼저 살고 가셨나요? 예수님입니다.
(계1:5, 3:14)
5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14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 하는 증인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증거하고 가셨다는 겁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증거하고 가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빚진 자의 삶을 사셨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마치 채무자처럼 당신의 의무를 수행하고 가신 분입니다. 그렇게 빚진 자로, 증인으로 살기 위해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고 죽기까지 순종하는 완전한 자기부인의 삶을 살다가 가신 것입니다.
그게 두 증인으로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삶의 원형입니다.
그러한 증인으로서의 수난과 희생의 삶이 창세기부터 구체적으로 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 두 증인이 먹은 작은 책을 누가 들고 있었지요? 예수님이 들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그 분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고 있습니까?
(계10:1-2, 4:2-3)
1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2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2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그 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릴 때 무지개가 어김없이 등장하지요? 그런데 그 무지개라는 증인이 어디서 제일 처음 나타납니까? 창세기 9장에 가장 처음 나타납니다.
(창9:11-15)
11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12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13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14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15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 할지라
여기에 보시면 무지개가 ‘내가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의 증인으로 서지요? 하나님은 그 증인을 보시고 당신의 언약을 기억해 내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역사에 던지실 때마다 증인을 세우시는데 그 증인으로 서시는 분이 항상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창세기 1장에서 첫 창조의 사흘이 언약을 담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설명을 해 드린 바가 있습니다. 한 군데만 확인하고 가지요.
(렘33:20-21)
20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약정과 밤에 대한 나의
약정을 파하여 주야로 그 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21내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파하여 그로 그 위에 앉아 다스릴 아들이 없게
할 수 있겠으며 내가 나를 섬기는 레위인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도 파할 수 있으리라
여기보시면 20절에 ‘낮에 대한 약정, 밤에 대한 약정’이 나오지요? 그 단어가 히브리어 ‘베리트, 언약’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낮과 밤을 지으시면서 그 속에 언약을 담아 놓으셨다는 것이지요? ‘난 반드시 밤을 멸하고 낮만 있는 세상을 만들어 내고야 말 것이다’가 창세기 첫째 날에 담긴 언약이었잖아요? 그때 증인으로 서신 분이 누구입니까? 수면 위에 운행하시던 하나님의 신입니다.
그 ‘언약, 베리트’라는 단어가 가장 확실하게 보여 지는 곳이 어디지요?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시면서 쪼갠 고기 사이로 홀로 지나가시는 그림 있지요? 그 ‘쪼개다’라는 단어가 ‘언약’이라는 단어와 혼용되어 쓰이는 ‘베리트’인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의 언약의 증인은 누구입니까? 쪼갠 고기 사이로 홀로 지나가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시내산 언약에서도 하나님이 증인으로 등장하시지요?
그러한 언약의 증인으로서의 하나님의 이야기가 가장 이해하기 쉽게 설명이 되고 있는 곳이 창세기 9장의 무지개 언약인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도 잠깐 언급을 했습니다만 무지개라는 단어는 ‘케세트, 활’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활이라는 단어는 구약 전편에 걸쳐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퍼붓는 도구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9장에서의 그 활은 하늘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늘을 향하고 있는 활을 세워 놓으시고는 그 무지개를 보고 ‘죄인을 진멸치 않으시겠다’는 언약을 기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증인은,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지를 담고 있는 존재여야 하지요?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 증인을 보시고 언약을 기억해 내실 것 아닙니까? 물론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꼭 무엇을 보셔야 기억을 하실 수 있는 그런 노망난 노인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그 증인이 언약을 담고 있어야 한다면 그 무지개에 담긴 언약의 내용이 무엇이겠어요? 하늘이 심판의 활에 맞아 땅의 심판이 모면되는 것입니다. 그게 언약의 증인이신 무지개, 즉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시는 언약의 증인도 역시 십자가에서 쪼개지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고요. 그래서 언약과 할례와 증인(순교자)이라는 단어가 모두 ,쪼개지다, 희생당하다, 순교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같은 맥락의 단어로 쓰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희생에 의해 완전하게 성취가 된다는 것을 언약과 증인이 함께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증인은 자기가 본 것을 그대로 증거 해야 하는 자임과 동시에 그 언약을 몸에 담고 살아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의 최초 원형이 뭐예요? 에베소서 1장의 창세전 언약이잖아요? 하나님 아들의 희생의 피로 인해 점 많고 흠 많은 자들이 거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자로 완성이 되는 것이 창세전 언약 아닙니까? 따라서 그 창세전 언약의 증인들인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점 많고 흠 많은 원수들을 위해 피를 흘리는 자의 삶을 당연히 드러내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빚진 자입니다. 그게 두 증인입니다. 그래서 빚진 자로 살았던 바울이 가는 곳마다 수난을 받고 자기가 세운 교회에서마다 이단이라고 쫓겨나고 두들겨 맞고 했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참 증인이신 예수의 삶이었으니까요. 그걸 전도라고 해요. 그게 빚을 갚는 삶인 것입니다.
바울이 왜 그토록 고난을 받고 있던 로마 교회로 열심을 내어 가려고 했었는지 아시겠지요? 그건 다이너마이트를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것과 흡사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삶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으로 끝이 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이미 죽은 자가 죽음이 왜 무섭습니까? 자기가 죽어야 할 자이며, 그래서 이미 예수 안에서 죽은 자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그 필연적 죽음이 자기에게 다가 온다고 해서 두려울 일이 뭐가 있어요? 요즘 일본의 쓰나미로 인해 바닷가 집들이 가격이 엉망이래요. 왜 그래요? 죽기 싫어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필연성을 매순간 체휼하며 사는 게 성도입니다. 그런데 죽음이 두려우면 뭔가 잘 못된 거 아닙니까?
여러분은 빚진 자들입니다. 이미 말씀을 받아먹은 분 들이예요. 이제 쓰디 쓴 인생의 여정으로 그 말씀을 소화해 내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능성을 부정당하고 예수만을 꼭 붙드시는 분들이 되시기 위해 죽고 또 죽는 증인의 삶을 살아내셔야 합니다. 이 역사 속에서의 성전 척량은 성도에게만 일어난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예수를 믿었는데 왜 이렇게 힘이 드는가, 투정부리지 마세요. 성전 밖 척량은 잠깐 유보 되었을 뿐입니다. 이제 이 역사의 마지막과 영원 속에서 시행될 그 성전 밖 척량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없는 무시무시한 저주의 척량이 될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냥 열심히 빚진 자의 삶을 사세요. 그러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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