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4 -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고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   (요1:9-14)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0:16

4 -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고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

 

(요1:9-14)

1:9 4)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그 말씀은 참 빛이었으니'

1:10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1:12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13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5)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 그, '남자의'

1:14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우리는 지난주에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세례 요한의 삶을 통해 왜 성도는 세례 요한처럼 빛을 증거 하는 증거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을 발산시키셔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천지 만물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발산적 영광을 입은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효과적으로 반응을 하게 되어 있었고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세상이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했지요? 피조물들이 가장 행복한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입고 하나님의 영광에 반응하며 그 분의 영광을 찬미하는 상태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피조물들에게 막힘없이 영원히 부어지는 하나님의 영광(피조물들에게는 그 영광이 바로 생명력임)을 ’바라크‘’복‘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그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비로소 생명이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복‘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이 땅의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는 ’복‘은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기대치 않았던 이득이 생기고, 일취월장, 승승장구, 만사형통 등으로 삶이 윤택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복은 그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생명을 ‘복’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진짜 ‘복’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을 하게 됩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원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부어졌던 ‘복’이 다시 부어지게 되면 - 그 ‘복’은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이 입혀지는 것이며 다시 복을 받게 된 성도는 그 발산적 영광인 ‘복’에 반응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 그들은 이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처지에 놓여있다 할지라도 그 상황과 환경에 만족합니다. 그들은 ‘이 상황은 내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최선의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환경으로 바뀌는 것이 ’복‘이 아니라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며 만족하는 것이 복 받은 사람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복’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며 살게 됩니다. 죄인들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사랑과 온유와 긍휼과 자비와 양선과 같은 하나님의 성품을 자신의 삶 속에서 나타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복 받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어떠세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하고 성경이 말하는 복하고 많이 다르지요?

그 ‘참 복’의 회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고스란히 담고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요한은 ‘참 빛’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요1:9)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여기서 ‘참‘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단어는 ’알레띠노스‘입니다. 헬라어에는 ’참‘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온 ’알레띠노스‘이고 다른 하나는 ’알레떼스‘라는 단어입니다.’알레떼스‘는 거짓과 반대되는 개념의 ’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거짓말의 반대말은 참 말이다’라고 할 때는 ‘알레떼스’라는 단어를 쓰는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알레띠노스’는 부분적인 것과 대조되는 개념의 ‘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참 빛’은 거짓 빛과 대조되는 개념의 ‘참 빛’이 아니라 부분적인 것과 대조되는 ‘온전한 빛’의 개념으로 해석을 해야 맞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온전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도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부분적으로나마 계속해서 비추고 계셨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이런 말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에 -형이상학적인 것이나 형이하학 적인 모든 것을 포함해서- 하나님의 허락 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경계하고 있는 과학, 철학, 물질 적 풍요 등등의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허락하심 하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우리가 그 모든 것들을 탐욕이 아닌 선한 마음으로 받아쓰게 되면 그 것들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고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것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에 등장해서 인간들을 돕고 있는 세상 적인 빛들이 전부 필연적으로 ‘거짓된 빛‘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그 선한 것들을 우리의 탐욕과 탐심을 채우는 데에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이 인간들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 전서 4장 4절에 보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는 말씀이 있지요? 바로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안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조금씩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부분적인 것이 온전한 것인 것처럼 열광하며 좇아가게 되면 인간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온전한 빛‘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본문 9절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온전한 빛‘이 담겨져 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을 보시면 ‘그 빛을 세상이 알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요1:10)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0절을 잘 보시면 그 구절 속에서 하나님의 참담한 심경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요한은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구절 앞에다가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라는 구절을 붙여 놓았습니다. 세상이 자기를 창조한 창조주를 잊어버린 상태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한국에 계신 저희 아버님 집에 ‘순돌이’라는 개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그 ‘순돌이’가 저희 집에 아주 어렸을 적에 왔는데 그 순돌이를 원래 어미에게 받아서 잠시 키우던 분이 이사를 하시면서 개를 키울 장소가 없어서 저희에게 ‘잘 키워 달라’고 신신 당부를 하시며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순돌이를 저희에게 주셨던 분이 몇 년 뒤에 그 개가 너무 보고 싶어서 저희 집에 찾아왔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순돌이가 그 주인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으르렁대며 짖었습니다. 그 때 그 주인의 참담한 표정이 지금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너무너무 보고 싶고 사랑해서 일부러 버스를 타고 불원천리 달려왔는데 그 개가 자신을 잊고 오히려 으르렁대고 있으니 얼마나 그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천지 만물은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입니다.

(골1:15-16)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런데 그 천지 만물이 그 창조자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가 자기 백성에게 왔는데 자기 백성이 그 왕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잊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 분이 찾아오셨는데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중세 유럽에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중세 유럽의 어떤 나라의 왕이 나라를 신하들의 손에 맡기고 전쟁터로 나가서 오랜 시간 전쟁을 끝내고 돌아왔더니 신하들이 그 왕을 잊어버리고 자기들끼리 잘 먹고 잘 살고 있더랍니다. 그 왕이 ‘내가 바로 너희에게 이 나라를 맡기고 전쟁터로 떠났던 왕이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그 왕을 알아보는 신하가 한 사람도 없었답니다. 그 속사정이야 어찌된 것이지 모르겠지만 그 왕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참 빛이신 예수님이 오신다면 세상이 과연 그 분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저기 south LA 할렘 가에서 태어난 어떤 못 생기고 볼품없고 가난한 청년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보고 ‘이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서슴없는 독설을 퍼붓는다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여러분, 왜 죄인들은 그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자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빛’을 못 알아볼까요?

첫 번째로 타락한 세상은 그 분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빛’은 자연스럽게 어두움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두움에 속한 자들은 자기들의 추악함을 드러내며 그 어두움 속에서 나오라고 외치는 ‘빛’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것을 인식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렇게 죄인들은 자기들이 진정으로 원치 않는 것이 가까이 오기 전에 거부해 버리기 때문에 그 것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자기들의 삶이 그 빛 때문에 방해받는 걸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요3:19-20)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예수님은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영으로 세상에 빛을 비추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세상은 똑같은 반응을 보일 뿐이었습니다. 

 

(렘44:10-18)

10      그들이 오늘까지 겸비치 아니하며 두려워하지도 아니하고 내가 너희와 너희 열조 앞에 세운 나의 법과 나의 율례를 준행치 아니하느니라

11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여 재앙을 내리고 온 유다를 끊어 버릴 것이며

12      내 가 또 애굽 땅에 우거하기로 고집하고 그리로 들어간 유다의 남은 자들을 취하리니 그들이 다 멸망하여 애굽 땅에서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이 칼과 기근에 망하되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칼과 기근에 죽어서 가증함과 놀램과 저주와 모욕거리가 되리라

15      때에 자기 아내들이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는 줄을 아는 모든 남자와 곁에 섰던 모든 여인 곧 애굽 땅 바드로스에 거하는 모든 백성의 큰 무리가 예레미야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16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

17      우 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정녕히 실행하여 우리의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방백들이 유다 성읍들 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대저 그 때에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

18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

(암7:7-13)

7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8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 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9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훼파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하시니라

10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11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하고

12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

13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왕의 궁임이니라

 

이렇게 세상은 하나님께서 비추시는 빛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있습니다. 애써 그 빛을 인식하려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참 빛’이 직접 이 세상에 오셨을 때도 못 알아 본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세상은 그 빛을 보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눈이 아예 멀어 있기 때문입니다.

 

(고후4:3-4)

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전2:13-14)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이렇게 타락한 죄인들은 빛을 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만일 본다 해도 그 빛을 밟아 꺼 버릴 수밖에 없는 추악한 상태로 타락을 해 버렸기 때문에 ‘참 빛’을 영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을 볼까요.

 

(요1:11)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마태복음21장에 보면 포도 원 농부의 비유가 나오지요.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농부들에게 세를 준 뒤 타국으로 갔습니다. 그 포도원 주인이 포도 열매가 나올 때쯤 되어서 포도 실과를 받기 위해서 종들을 그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소작 농부들이 종들을 돌로 치고 심지어 죽여 버렸습니다. 나중에는 그 주인이 아들까지 보내었는데 농부들은 그 아들까지 죽여서 포도 원 밖으로 내쳐 버렸습니다. 그게 세상인 것입니다. 세상은 주인에게 줄 실한 포도를 절대 맺을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주인이 실과를 요구했을 때 그 주인의 종들과 아들까지 죽여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의 말씀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라는 내용을 예수님의 언어로 다시 풀어서 설명해 주신 것이 바로 포도원과 농부의 비유인 것입니다. 이렇게 죄인들은 절대 ‘참 빛’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도 영접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 속에 그 ‘참 빛‘을 알아보고 영접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요1:12-13)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로서 난 자들이니라

 

12절은 ‘데’라는 헬라어 접속사로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입니다. 참 빛이 세상에 오셨는데 아무도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참 빛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는 것은 ‘오직(alla)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일하심’에서만 비롯되는 것이지 인간 쪽에서의 어떤 도모나 노력도 거기에 기여하거나 보태질 수 가 없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에서는 대표적인 인간 쪽에서의 도모를 ‘혈통, 육정, 사람의 뜻’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을 자기들의 구원의 근거로 알고 있었습니다.

13절의 ‘혈통’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하이마톤’은 ‘피’나 ‘혈연’을 의미하는 ‘하이마’의 복수 소유격입니다. 그러니까 ‘육체 적인 혈연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 빛을 보고 그 빛을 영접하는 데에 ’육체적 혈연관계‘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집안이 3대 째 혹은 4 대 째 예수를 믿는 집안이라고 자랑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집안을 축복하실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구원은 ’육체적 혈연관계‘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저도 어렸을 적에 저희 할머니께서 수없이 ’아가, 너는 이 할머니 치마만 잘 붙들고 있으면 꼭 천국 갈 수 있어‘ 라고 말씀을 하셔서 한동안 정말 그런 줄 알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육정‘ 이라고 번역이 된 ’델레마코스 사르코스‘는 ’육체적인 욕망‘이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성령에 의한 것이 아닌 모든 세상 적인 육체적 욕구나 정욕, 그리고 거기서 나온 세상의 가치 체계(예를 들어 사회적 명망이나 권력, 부)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로는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의 선생이었고 관원이었으며 부자였던 니고데모가 주님께 찾아와서 ’주님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에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그래 너는 참 많은 것을 이루어 냈구나, 성경도 열심히 공부했고, 부지런히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성실하게 네 삶을 살았으니 네가 가진 것에다가 조금만 보태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scrap everything you've done Nicodemus' ‘네가 이루어낸 것은 다 갖다 버려라‘ ’네가 이루어낸 어떤 것도 너희 구원에 도움이 안 된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셨습니다. 니고데모가 가지고 있던 그 많은 것들이 바로 ’육정‘’델레마코스 사르코스‘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의 뜻’ ‘델레마토스 안드로스’는 절대자에게 도달하려고 하는 인간의 이성적 노력이나 수양, 율법 준수 같은 것을 통칭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의 뜻으로는 절대 주님을 알아보거나 영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약1:18)

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요일3:1)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엡1:5)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쪽에서 나오는 어떠한 인본주의 적 수단도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롬9:14-16)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은 계속해서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을 영접하게 된 자들은 하나님께서 ‘권세’를 주신다고 합니다. 본문 12절을 다시 한 번 보시지요.

 

(요1:12)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에서 ‘권세’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엑수시아’입니다. 헬라어에는 ‘권세’라고 번역할 수 있는 단어가 여러 개 있습니다. 이 단어들은 모두 영어의 ‘power'로 번역이 가능한 단어들입니다.

 

먼저 ‘크라토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 단어에서 영어의 ‘democracy'(민주주의)’aristocracy'(귀족정치)’theocracy'(신정정치) ‘monocracy'(독재정치) 이런 단어들이 파생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크라토스‘라는 단어는 여러 형태의 ’정치적 권세‘ 혹은 ’통치의 권세‘를 나타내는 말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듀나미스’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폭발적이고 이적 적인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에서 ‘dynamic''dynamite''dynamo'(발전기) 같은 단어들이 파생되었습니다.

이 단어도 역시 ‘힘, 권세, 권위’등으로 번역이 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쓰인 단어는 ‘엑수시아’입니다. 이 ‘엑수시아’라는 단어는 ‘권위’라는 뜻입니다. 그 단어는 어떤 이적 적인 능력이나 힘, 혹은 정치적 권세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분적 격상‘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권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위‘가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엑수시아‘라는 단어는 책임과 의무를 수반하는 단어입니다.

지난번에 제가 갑자기 국무총리로 발탁이 된 어떤 풀 빵 장수 이야기를 해 드렸지요?

그 사람이 풀 빵 장수에서 국무총리가 되면서 국무총리의 ‘권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권위’는 그에게 국무총리다운 삶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래야 그가 그 ‘권위’에 맞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니까요. 그에게는 동시에 ‘크라토스’도 함께 주어지지요. ‘정치적 권세’

그러나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엑수시아’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듀나미스’나 ‘크라토스’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듀나미스’나 ‘크라토스’를 달라고 떼를 쓰지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엑수시아’입니다.

물론 필요에 따라 성도들에게 ‘듀나미스’나 ‘크라토스’가 주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1차 적으로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 신분적 권위 ‘엑수시아’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죄인들에게 빛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만드시기 위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요1: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구절에서 ‘보다’라고 번역이 된 ‘떼아오마이’는 ‘보다, 지각하다, 인식하다, 관찰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올바로 인식하고 지각하고 볼 수 있는 ‘우리‘라고 일컬어지는 어떤 무리가 분명 생겨났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본문 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한다’에서 ‘거한다’‘스케노오’는 ‘장막을 치다’ ‘텐트를 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직역을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회막을 두르셨다‘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장막, 회막’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성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는 것을 ‘회막을 치다, 장막을 치다’라고 표현을 할까요?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그 성막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회막이 담고 있던 내용을 몇 가지만 review하고 넘어가겠습니다.

회막은 항상 이스라엘 진영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회막의 동편에 유다, 잇사갈, 스불론 지파가 자리를 잡았고 남쪽에는 르우벤, 시므온, 갓 지파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레위지파는 그들의 진으로 회막을 둘러싸고 있었고 서쪽에는 에브라임과 므낫세, 베냐민 지파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북쪽에는 언제나 단, 아셀, 납달리 지파가 진을 쳤습니다. 그러니까 회막을 중심에 두고 이스라엘이 빙 둘러서 진을 친 것입니다. 그 것은 이스라엘, 즉 교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막에는 모세의 율법이 간직되어 있던 곳입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그대로 행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의 삶 자체가 율법이었다는 말입니다.

 

(시40:8)

8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요8:29)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막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였습니다. 그 회 막의 언약 궤 위에는 쉐키나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 쉐키나를 성경은 ‘빛’이라고 번역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님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담고 계신 하나님이셨고 ‘빛’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 막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시는 곳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그대로 설명하시는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회 막은 제사가 드려지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제사장으로 제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왜 주님께서 오신 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성 막을 치다, 회 막을 치다’라고 표현을 했는지 아시겠지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육신이 되어 오셨어야 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사9:6)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리고 주님께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을 직접적으로 하시지는 않으셨지만 수차례에 걸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실하게 암시하셨습니다.

 

(요5:17-23)

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 이러라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여기에 보시면 주님께서 당시 고대 사회의 가업 계승을 비유하셔서 당신께서 하나님의 친자이심을 밝히시고 계십니다. 19절과 20절의 내용은 당시 고대 사회에서 아버지가 장자에게 가업을 계승할 때 아버지의 노하우를 장자에게 그대로 전하는 전통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업을 계승할 때 아버지의 일을 아들에게 그대로 보여주면서 아버지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노하우를 자식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빵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는 밀가루의 양과 누룩의 양과 빵 굽는 시간 같은 것들을 꼼꼼하게 자식에게 보여주면서 자식에게 그대로 따라하도록 시켰습니다. 목수인 아버지는 대패와 끌을 쓰는 법, 다림줄을 쓰는 법 등을 자식에게 보여주면서 그대로 따라하도록 시켰지요.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그러한 방식으로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을 그렇게 가르쳐 주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20절을 보시면 그러한 일들은 모두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에 근거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22절에 보시면 심판까지도 그 아들에게 위임하셨다고 하시지요?

 

구약 성경에서 ‘심판’은 누구의 몫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가 심판도 자기에게 위임하셨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선포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말에 유대인들이 그토록 화를 냈을까요?

 

당시 고대 중동 지방에서 쓰였던 아람 어나 헬라어의 ‘…….의아들’이라는 개념은 ‘대권 자, 대리자’라는 뜻이 있었습니다. 고대시대의 서적들을 보면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대권 자로 에덴동산을 다스렸던 ‘아담’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의 왕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대권 자’라는 뜻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시2:7-12)

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이건 우리가 알다시피 메시아의 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시를 이스라엘 왕의 대관식 때 불렀습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리시는 이유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 딸들 중에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은 것’을 들고 있지요?

 

(창6:1-2)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들’도 바로 이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세상 왕’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타락이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 사상’ 다른 말로 ‘메시아사상’ 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 ‘메시아사상’의 출발은 사무엘 하 7장의 나단의 신탁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 나단의 신탁 중 몇 절만 보겠습니다.

 

(삼하7:11-13)

11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이 나단의 신탁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나단의 신탁을 다윗의 후손인 왕 중에서 육 적 이스라엘의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할 자가 나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둘로 갈라지더니 북 이스라엘은 BC72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했고 남 유대는 BC586년에 바벨론에게 망해버렸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에 끌려가서 새로운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단7:9-14)

9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11      그 때에 내가 그 큰 말하는 작은 뿔의 목소리로 인하여 주목하여 보는 사이에 짐승이 죽임을 당하고 그 시체가 상한바 되어 붙는 불에 던진바 되었으며

12      그 남은 모든 짐승은 그 권세를 빼앗겼으나 그 생명은 보존되어 정한 시기가 이르기를 기다리게 되었더라

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바벨론에 끌려간 다니엘이 꿈을 꾸는데 꿈에 네 짐승이 나타났습니다. 사자, 곰, 표범, 그리고 알 수 없는 무서운 짐승이 나타나지요? 그 짐승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요한 계시록에서 이미 공부를 했으니까 넘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이어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인자 같은 이’ ‘a son of man'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인자 같은 이‘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시는데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이며 그 나라는 폐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나단의 신탁에 나오는 그 내용이지요? 그런데 이때는 이미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했을 때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즐겨 읽던 이 다니엘서를 근거로 새로운 이스라엘 즉 처음 야곱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옛 이스라엘이 아닌 ‘새로운 야곱의 후손’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나라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 땅에 회복될 다윗 왕국의 회복이 아니라 이 다니엘서 7장의 말씀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 될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장 51절에서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1:51)

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이 모습은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던 중에 ‘베델‘하나님의 집’에서 겪었던 일이지요? 예수님은 그 야곱의 자리에 새로운 야곱으로 자신을 replace하시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51절강해 할 때 자세하게 다시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렇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창조하실 것을 계속해서 계시하시는데 대인들은 여전히 지금까지도 다윗의 후손으로 와서 다윗 왕국을 회복 할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힘을 가진 왕’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것을 ‘하나님의 아들 사상’ 다른 말로 ‘민속 메시아사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못 생기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나타나서 자꾸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까 이 사람들이 기가 막힌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자꾸 ‘the son of man''인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 말은 ‘다니엘 서 7장의 그 인자가 바로 나다‘라는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화가 나지요. 자기들은 지금 오매불망 화려하고 강력한 왕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서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들의 꿈을 짓밟아 버리니 화가 안 나겠습니까?

 

물론 처음에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을 일으키고 오병 이어로 수 만 명을 먹이시고 하실 때에는 예수님을 붙들고 자기들의 왕을 삼으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자꾸 하시고 자기는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한다고 말씀하시니까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꿈을 짓밟아 버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호산나’를 외친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 말은 ‘save us please'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의 꿈을 무참히 무너뜨려 버리신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혹시나‘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 청년이 진짜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그 십자가에 침을 뱉고 돌아섰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예수께서 그렇게 육신으로 오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표’가 되시고 ‘대신‘이 되셔서 율법을 모두 지키시고 우리가 받을 저주를 다 받아서 죽으셔야 했기 때문에 인간으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고난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을 대표할 수도 없지요? 그리고 만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모습으로 그냥 내려오셨다면 우리 죄인들은 모두 그 분의 거룩 앞에서 죽어 버렸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오셨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 것을 신학에서는 ’내포적 대신‘’inclusive representative'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와 꼭 같은 육신을 입고 오셔서 첫 번째 아담이 실패했던 모든 것들을 지켜내셨습니다. 그렇게 풍성했던 에덴에서도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었던 아담의 실패를 광야에서 40일 금식을 하신 후에도 돌로 떡을 만들어 먹지 않으시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던 것으로 회복하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던 아담의 실패를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순종을 하심으로 완전히 회복시켜 버리신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지금의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상태라고 합니다. 그게 어떤 상태이지요?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은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생명력을 공급받아 존재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 것을 ‘바라크’ ‘복’이라고 부릅니다. 땅의 피조물과 초월이신 하나님은 그렇게 ‘복’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함으로 해서 피조물들과 초월과의 관계가 끊어져 버렸습니다. 피조물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복’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땅에 갇혀 버린 것입니다. 그게 저주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게 저주를 받은 인간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초월이 인간들에게 찾아오시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불교나 힌두교를 비롯한 범신론적 고등 종교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범신론이라는 것은 모든 천지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신의 내재성을 주장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그 범신론에는 초월 신이 없습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저주받은 인간의 상태가 초월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겨서 인간 스스로 이 땅에 갇혀있는 상태라고 했지요? 그런데 인간과 함께 이 땅에 함께 갇혀있는 신이 아무리 많으면 뭐합니까? 인간의 구원은 밖으로부터, 다른 말로 초월로부터 인간에게 와서 인간을 초월과 연결시켜 주는 초월 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범신론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슬람교 같은 이신론은 어떻습니까? 이신론은 신이 만물을 창조해서 어떤 법칙에 의해 그냥 돌아가게 만들어 놓고 전혀 그 세상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이신론입니다. 그래서 이슬람 교인들은 걸핏하면 ‘인샬라’ ‘모든 것이 알라의 뜻이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들은 초월 신을 믿지만 그 초월 신은 인간 세상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인간이 저주를 받아 땅에 갇혀있던 말던 상관이 없는 신입니다. 그래서 그 이신론도 저주받아 땅에 갇혀 있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주받아 땅에 갇혀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초월자이신 하나님께서 밖으로부터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셔야 하는 것입니다.’익스트라 노스 프로노보스‘ ’바깥으로부터 우리를 위해 들어오셔야 한다‘

그래서 구원은 오직 기독교에만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저주의 땅으로 들어오셔서 아버지가 창세전에 선택해 놓으신 아버지의 자녀들의 모든 죄를 홀로 짊어지시고, 아버지의 자녀들이 전부 지켜 내야 하는 아버지의 말씀을 모두 지켜내셔서 그 분의 완벽한 삶과 죽음을 그 자녀들에게 모두 전가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라고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막살아도 됩니까? 네 막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너무나 들어가고 싶었던 대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경천동지 할 일이 일어난대도 자기는 그 대학에 들어갈 실력이 못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대학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당신은 우리 학교에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이유는 묻지 마시고 우리 학교 학생이 되어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얼떨결에 그 학교의 학생이 되었습니다. 당장 ‘엑수시아’ ‘권위’가 생기겠지요?

그런데 총장이 수시로 시험을 봅니다. 그 학교 학생이라면 당연히 100점을 맞아야 할 시험지를 주고 시험을 칩니다. 시험을 보면서 꼭 덧붙이는 이야기가 ‘이 시험 못 본다고 절대 다시 탈락시키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그냥 한번 풀어보세요’합니다. 

워낙 실력이 없던 사람이니까? 처음에는 거의 빵 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습니다. 얼마 있다가 또 시험을 봅니다. 총장이 또 말을 합니다. ‘이 시험 못 본다고 절대 다시 탈락시키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그냥 한번 풀어보세요’

그 사람은 이미 자신의 실력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그 대학의 학생이 되었고 자랑스러운 ‘엑수시아’ ‘권위’도 생겼습니다. 그 학생이 계속해서 ‘난 시험 못 봐도 돼, 어차피 난 이 학교 학생이니까’ 하겠습니까? 자기가 그토록 열망했던 대학의 학생으로서 자격을 갖추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지요? 그에겐 ‘엑수시아’ ‘권위’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진짜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향해 열심히 노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여러분 금방 이런 생각이 안 드세요?’예수님이 나대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다 살아내셨고 십자가도 이미 다 지셨다면서 무슨 십자가를 또 지라는 거야?’

우리는 원리적으로 운명적으로 신분적으로 이미 십자가를 지고 저주를 다 받아 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율법을 다 지켜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땅에서 그 모든 율법을 지켜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추구하며 살도록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처럼 모든 율법을 다 지켜내기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속에 들어있는 인간들이 그 관계가 요구하는 삶을 충실히 살아 내는 'Life style''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충실하고 책임감 있게 살아내는 것이 결국 어떤 삶입니까?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효과적으로 반응하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렇게 효과적인 영광을 발휘하며 살아가는 삶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성품과 공유 적 속성들을 내 삶 속에서 우려내는 삶이지요? 그러니까 율법이라는 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품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이게 바로 나와 함께 사는 자들에게서 나와야 할 선한 삶이란다. 너희도 이렇게 살아 보련’하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경주하는 것입니다. 진짜 그 삶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시간 속에서 깨닫고 가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의 삶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함께 읽고 다 이해가 가셨는지 확인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요1:9-14)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That was the true Light, which lighteth every man that cometh into the world.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