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3 - 증거 하는 자   (요1:6-8)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0:15

3 - 증거 하는 자

 

(요1:6-8)

1:6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요한이었다.

1:7 그 사람은 그 빛을 증언하러 왔으니, 자기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1: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요한은 4절과 5절에서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시며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사람들의 빛이다‘라고 언급을 한 후에 그 빛을 증거 하러 온 어떤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세례 요한입니다. 다른 공관 복음서에는 세례 요한을 지칭할 때 항상 ‘세례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유독 요한복음에서만 그냥 ’요한‘이라고 명명합니다.

그 이유는 다른 공관 복음서는 그 복음서 기자들이 독자들의 이해를 위하여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던 반면에 사도 요한은 이 요한복음이 자신이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이를 구별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요한은 세례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누구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고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이 말은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깊이 개입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보내셨다는 것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보내셨다는 말  이니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어떤 계획과 목적을 가지시고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계신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일을 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작정‘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피조물들 중에 인간과 천사 같은 도덕적인 존재들을 향한 계획과 목적을 ’예정’이라고 부른다고 말씀드렸지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그 분께서 친히 역사에 깊이 개입하셔서 그 분의 계획을 이루어 가고 계시고 있다면 그 분의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  지겠습니까? 아니면 실패할 수도 있겠습니까? 반드시 이루어지지요. 그래서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는 절대 혼자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밀한 간섭으로 이 역사를 운행해 가고 계신 것입니다.

 

예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나만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요즘 예정에 관해 성경 공부를 하면서 하나님의 선택이 ‘타락 전 선택’이냐, 아니면 ‘타락 후 선택‘이냐를 놓고 깊은 토론을 하고 있는 그룹이 있다고 하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을 한 후에 구원 얻을 자들을 예정하셨을까요? 아니면 타락 전에 구원 얻을 자들을 예정하셨을까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이미 구원 얻을 자들이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타락을 할 걸 전혀 모르게 계셨다가 인간이 의외로 타락을 해 버리는 바람에 급하게 구원 할 자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지요.

그런데 우리 청년들이 왜 그렇게 쉬운 이야기를 가지고 설전까지 벌이고 있는가 하면 개혁주의 신학자들 중에 B. B Warfield나 John Standford Weeks, 시카고 대학 신학부 교수인 Brian Gerrish, 그리고 독일의 알렉산더 쉬바이쳐, 뮬러, 막스 샤이베 같은 신학자들이 타락 후 선택설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반대로 타락 전 선택설을 주장하고 있는 분들은 헤르만 바빙크나 루이스 벌콥, 반더발 같은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무엇을 근거로 그러한 견해차를 보이고 있는가 하면 존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해석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는 존 칼빈의 예정론이 그렇게 혼란을 가져올 만큼 부실하지 않은데 어떻게 그런 견해 차이가 발생하게 되었는지 조금 의아합니다. 그의 베드로 전서의 주석을 보면 그가 베드로 전서 1장 20절을 주해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 순전한 상태에 오래 있지 못할 것을 미리 보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선하심에 따라서 그리스도가 상실된 인류를 파괴된 상태로부터 구하시는 구속자가 되도록 정하신 것이다”

우리가 여러 번 찾아서 확인했던 베드로 전서 1장 20절을 찾아보고 가지요.

 

(벧전1:20)

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예수님은 창세전에 이미 구원자로 준비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최초로 예정설을 정리했던 칼빈도 타락 전 선택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예정은 ‘pre-temporal‘'시간 이전 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존 칼빈이 기독교 강요나 다른 주석 집에서 조금 오해가 갈 만한 언급을 한 적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존 칼빈이라는 사람의 신학 전체를 이해한 후에 읽으면 전혀 오해할 소지가 없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도 그 타락 전 선택설을 지지하고 있지요.

 

(잠16:4)

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주께서는 모든 것을 그 쓰임에 알맞게 만드셨으니, 악인은 재앙의 날에 쓰일 것이다.

 

솔로몬은 악인들은 파멸이라는 구체적 목적을 위해서 창조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시간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예정하시고 그들을 통해 영원히 타락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타락 후 선택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잘 사용하는 인용문이 ‘17세기 알매니우스의 사고방식을 배격하며 나온 돌트 신경’의 내용 중 일부인데, 그 내용 중 일부만 인용을 해 드리면 이러합니다.

 

돌트신경

“선택은 하나님의 불변하는 목적이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순전한 은혜로, 당신 자신의 주권 적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시원 적인 바른 상태로부터 그들 자신의 잘못으로 죄와 파멸에로 타락한 인류 전체로부터 일정한 수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택 자들의 중보자와 머리요, 구원의 토대로 정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에로 선택하셨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선택이 ‘타락한 인류 전체로부터’이루어졌다는 대목이 나오지요? 이 문장만 보면 분명 타락 후 선택설이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앞의 내용을 함께 보면 이 돌트 신경의 내용은 타락 후 선택설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분명 이 문장의 서두에 ‘창세전에’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돌트 신경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구원받을 자들을 선택하셨는데 그 선택받은 사람들은 인간이 타락을 한 후에 태어나는 모든 자들 중에서 선택되어지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은 모두 창세전에 일어나는 것인데 그 작정의 순서가 (물론 시간적 순서는 아님) 창조, 타락,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타락 전 선택설이 맞는 것이지요.

 

그러면 인간이 타락하기도 전에 이미 구원과 유기가 결정이 되었다면 하나님은 왜 역사라는 것을 굳이 허락하시고 왜 사람들을 친히 보내시기도 하시며 그 역사에 친히 개입 하실까요?

그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계시다는 것이며, 그 인격 안에서 우리를 설득하고 계시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로봇처럼 억지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순종과 의뢰를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인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내시고, 보내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빛을 비추시고, 그들이 그 빛을 알아볼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하셔서 그들이 빠져있던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백성들을 ‘광명의 나라’로 옮기시는지를 직접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빛을 볼 수 있도록 눈을 뜨게 된 성도들은 이제 요한처럼 자신들이 빛이 되어 세상에 그 빛을 비추는, 다른 말로 ‘증거 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마5:14)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이렇게 성도가 빛을 인식하고 그 빛을 증거 하는 삶을 사는 것을 제가 지난주일 설교 때 ‘효과적 영광’이라는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례 요한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것처럼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 그냥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보내심을 받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오로지 빛을 증거 하다가 죽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 속한 어떤 것을 누리다가 갔습니까? 오로지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만 하다가 참수 당해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보내심을 받은 우리 성도들의 인생의 목적은 세례 요한의 인생처럼 빛을 받은 자로서 빛을 증거 하다가 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너희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만 증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은 세례 요한처럼 증인의 삶, 증거의 삶을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 삶을 위해 우리가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이 무엇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는 결론이 납니까? 물질, 시간, 힘, 고난, 질병, 행복, 기쁨, 슬픔…….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은 전부 세상에 빛을 비추라고 주시는 것들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증거 하는 도구로 주어지는 것들인 것입니다. 부자는 부자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삶으로, 잘생긴 사람은 잘생긴 대로, 못 생긴 사람은 못 생긴 대로, 똑똑한 사람은 똑똑한 대로, 머리가 나쁜 사람은 머리가 나쁜 대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빛을 비추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떡’이 아닌 것입니다.

 

그 삶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가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단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했을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마귀의 세력에게 생명은 ‘떡’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 그 분의 삶에 의도하시고 계획하신 것을 이루는 것이 곧 그 분이 생명으로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요4:34)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이게 바로 그리스도가 살다 가신 삶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삶인 것입니다.

게다가 본문 8절을 보시면 ‘요한은 빛이 아니오,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은 이 역사 속에서 자기가 빛이 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미 예수님보다 더 유명한 선생이었고 제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장차 오실 분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하지 못 한다’고 했습니다. 그게 우리 성도들의 하나님을 향한 자세입니다. 내가 드러나지 않고 나는 자꾸 감추어지는 삶, 그게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요3:26-30)

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 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 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한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허락하신 자리에서 불평 없이 충성을 다한 것입니다. 그는 신랑이신 예수 앞에서 자신은 자꾸 작아지고 볼품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죄에서 건져진 진짜 성도의 삶입니다.

아담의 죄가 뭡니까? 주어진 자리에서 충성하지 못하고 더 높아지고 싶은 자기의 욕심을 따라 주어진 자리에서 이탈한 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께 지음 받은 자기 자리에 만족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잘 살다가 간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만족하며 충성을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영광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입니다. 원래 제사장은 세습제이기 때문에 세례 요한도 제사장이 되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성전에 거하면서 율법에 정한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아름답고 거룩한 제사장의 옷을 입고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성전이 아닌 유대 광야에서 살았고 거룩하고 좋은 옷이 아닌, 부정한 짐승인 ‘약대의 털옷’을 입고 살았으며 좋은 음식이 아닌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그 삶은 이스라엘을 고발하는 삶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옛 언약에 속한 모든 것이 지나갔다는 것을 삶으로 산 것입니다. 성전의 거룩함과 제사장의 거룩함, 그리고 그 것들을 둘러싼 모든 형식적인 것들을 다 부정하는 삶인 것입니다.

‘너희들 자신을 위한 그러한 종교행위는 하나님께 전혀 상달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삶으로 보여 준 것입니다.

그는 죄로 범벅이 된 이스라엘의 문화 와 종교의 밖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외쳤습니다. 그게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세상에서 살고 계시지만 여러분은 세상의 삶의 원리에서 빠져 나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의 원리가 잘 못된 것이라는 것을 입으로 삶으로 힘껏 외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생명을 지닌 사람들이 삶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자면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했던 것들도 잘 떠 올려 보세요)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사람들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고 그들이 사는 삶만이 진짜 살아있는 삶이며, 그 삶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빛으로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 삶을 세례 요한이 살다가 갔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산다는 게 무엇입니까? 태어나서 학교 다니고, 졸업해서 취직하고, 취직해서 집사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아이 키우는 재미로 살다가, 은퇴하고 노인정에서 장기나 두다가 죽는 것을 ‘산다’라고 합니까? 우리보다 앞선 선배들이 다 들 그렇게 살다 갔기에 우리도 그렇게 살다가 가면 되는 것입니까? 세례 요한이 그렇게 삶을 정의하고 안일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일갈을 했는지 마태복음으로 가보겠습니다.

 

(마3:10-12)

10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 우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그냥 산다고 다 사는 것이 아니라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만 사는 것이고 그 삶만이 하나님 앞에 인정이 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냥 일련의 과정을 따라 사는 것을 철학에서는 ‘존재 한다’라고 합니다. ‘존재 한다’라는 것과 ‘산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존재 한다’라고 하는 것은 바위가 10년이 가도 그 자리에 있고 20년이 가도 그 자리에 있다가 결국 풍화 과정을 거치면서 작은 자갈이나 모래나 진흙으로 변해 가는 그러한 것을 ‘존재 한다’라고 합니다. 죄인들은 그렇게 ‘존재’는 할지언정 살지는 못합니다.

산다는 것은 생명이 있는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라는 것은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한 대로 ‘그리스도 안에만’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만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살다간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빛을 발하며 사는,’하나님과 관계있는 삶’만을 ‘산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우리 성도들의 삶은 우리 자신을 위한 삶이어서는 안 되고, 보내심을 받은 자답게 증거자의 삶을 살아야 함을 창조의 목적 안에서 논리 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지난주일 설교 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잠깐 언급을 해 드렸지요?

그 때 성경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세 가지로 나뉘어서 언급이 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본체 적 영광’ 다른 말로 ‘본유적 영광’ 이고 두 번째가 ‘발산적 영광’다른 말로 ‘발로 적 영광’이며 세 번째가 ‘효과적 영광’ 다른 말로 ‘반응적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먼저 본체 적 영광이라는 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본체 적 영광이라는 것은 다른 피조물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 자신 안에 실재하고 있는 탁월한 신성 자체, 다른 말로 본질 적 속성을‘본체 적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그 것은 인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외적인 탁월성과 내적인 완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 것은 도저히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어떻게 존재가 시작도 없고 끝이 없을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유한한 피조물과는 달리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신 분이십니다. 편재를 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일 뿐 아니라 공간 적으로도 무한하신 분이시라 어디에나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은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전부 원인에 의한 결과로 태어나고 존재하게 된 것들이며 그리고 존재하는 순간에도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는 절대 스스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 피조물입니다. 산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나요? 산은 산을 이루고 있는 흙과 바위와 그 안에서 흙을 비옥하게 하는 미생물과 수많은 벌레들의 수고와 흙을 붙들고 있는 나무와 풀의 뿌리와 햇빛과 바람과 비와 같은 다른 피조물과 환경에 의존하여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그렇습니다. 우주의 행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행성들도 다른 행성들과의 인력이나 질량이나 거리나 회전 속도 같은 것에 의해 긴밀한 의존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유독 하나님만이 스스로 존재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탁월성이 외적인 탁월함입니다.

 

그리고 내적인 완전성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성품의 일부가 파편처럼 남아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랑, 자비, 온유, 긍휼, 공의…….’ 타락한 인간들에게서도 그러한 것들이 간혹 나옵니다. 오죽하면 원숭이들도 공정성에 대한 판단력이 있다고 하니까요. 동물학자들에 의하면 원숭이들한테 먹이를 오랜 기간 차별적으로 주면 ‘이 건 불공정 한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그러한 표현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에게도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들이 편린처럼 남아 있는 것들이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 인간들이 조금씩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완전한 것으로 갖고 계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완전한 사랑, 완전한 온유, 완전한 공의, 완전한 용서, 완전한 긍휼……. ‘ 이러한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내적인 완전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만의 속성을 우리가 ‘본체 적 영광’ ‘본유적 영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시29:3)

3        여호와의 소리가 물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위에 계시도다

(엡1:17)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여기에서 쓰인 ‘영광’이 바로 ‘본체 적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발산 적 영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발산 적 영광‘이란 앞서 말씀드린 ‘본체 적 영광‘이 밖으로 흘러 나와 피조물에게 입혀지고 보여 지고 경험되어지고 인식되어 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천지가 창조되고 만물 안에 그 발산적 영광이 입혀져 있었습니다.

 

이 ‘발산 적 영광’이 피조물들에게 경험되게 될 때에 두 가지 방식으로 경험이 됩니다.

보편적으로 경험되기도 하고 개별적으로 경험되어지기도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이 보편 적으로 경험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충만하신 신성이, 그 영광이 만물 안에 보편적으로 충만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을 보면 그러한 보편적인 경험에 대한 반응들이 많이 나옵니다.

 

(시8:1-3)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2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피조물들은 자연과 우주 만물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과 지혜를 보편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것은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의 일입니다. 인간이 타락을 하기 전에는 모든 만물이 하나로 연결된 전등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 전등에 불을 켜는 스위치가 바로 인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스위치에 공급되는 전기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만물에 하나님의 영광을 전달하는 스위치 역할을 하던 인간이 타락을 한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을 하고 그 만물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은 흔적만을 남기고 모두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스위치가 타 버려서 모든 전등에 불이 다 나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이제 만물 속에서 충만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만물 안에 하나님의 영광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남겨 두셔서 죄인들이 거듭나게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지할 수 있는 눈을 뜨게 되면 간혹 그 우주와 자연 앞에서 압도되는 경험을 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맛을 조금 보게 해 주십니다. 여전히 타락한 죄인들은 그 우주와 자연의 웅장함 앞에 압도되어 두려움을 느끼거나 경탄하는 정도에 그치게 되지만 성도들은 그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그의 책 팡세에서 ‘나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저 엄청난 우주의 침묵이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생계에 너무 바빠서 생각하고 사색을 하는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잠깐 씩이라도 우리 인간의 존재와 우주의 광활함과 자연의 웅대함을 생각해 보면 정말 우리 인간들은 그 앞에서 숙연해 질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어떤 과학자는 우주의 끝을 보려면 1초에 30만 km를 달린다는 빛의 속도로 150억 년에서 950억 년을 달려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도 합니다. 우주는 계속해서 폭발을 하며 팽창해 가고 있기 때문에 950 억 년을 걸려 거기까지 간다 해도 이미 우주의 끝은 더 멀어져 있을 거라는 이야기지요. 그 우주를 하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셨습니다. 여러분 그게 믿겨 지시나요? 우리 거듭난 성도들은 밤하늘의 수많은 별과 달과 태양을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조금이나마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설악산을 아주 좋아합니다. 가을 녘에 설악산 정상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수많은 작은 산들이 단풍을 입고 끝 모르는 곳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겨울에는 더 장관이지요. 하얀 산이 적막한 고요를 품고 단아하게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헉’하는 비명만 나옵니다.

그런데 북한에 있는 금강산은 얼마나 좋은지 설악산에 비길 바가 아니랍니다. 금강산을 다녀오신 분이 설악산을 보시고는 ‘설악산은 금강산에 비기면 하나님께서 금강산을 정성스럽게 다 빚으시고 남은 진흙을 휙 던진 것이 설악산이 되었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느낌은 그냥 ‘멋지고 웅장하고 좋다‘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러한 자연 앞에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주와 자연 같은 피조물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조금이나마 보편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발산적 영광의 개별적인 경험이라는 것은 편재하시는 하나님,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께서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사람들에게 강하게 임재 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그 것을 우리가 발산적 영광의 개별적 경험이라고 부릅니다. 이사야를 비롯한 많은 선지자들이 그러한 경험을 했습니다.

 

(사6:3-5)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4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가 성전 안의 스랍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앞에 드러나 버린 자신의 죄 된 모습을 보게 되었지요. 그리고는 곧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외쳤습니다. 이 구절에서 ‘오이’라는 히브리어는 ‘죄인들이 지옥 앞에서 외치는 절규‘를 나타낼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사람에게 그 발산적 영광을 드러내시기도 하십니다.

 

그러한 발산 적 영광을 가리키는 구절이 시편 57편에 나옵니다.

 

(시57:5)

5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왕상8:10-11)

10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11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이게 바로 발산적 영광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효과적 영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효과적 영광이라는 것은 발산적 영광을 경험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행위나 갈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 른 말로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다른 이들이 자신처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데 기여하는 행위나 그렇게 되기를 갈망하는 것을 ‘효과적 영광‘혹은 ’반응 적 영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 혹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라는 말의 ‘영광’이 바로 ‘효과적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상16:25-29)

25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26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27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즐거움이 그 처소에 있도다

28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29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 할지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던 그렇지 않던 간에 하나님의 영광이 빛이 바래거나 더욱 더 빛을 발하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 자체로 완전하며 변함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존재들에게 더 높이거나 낮아지게 할 수는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의 교인 중의 한 사람이 뉴욕으로 이사를 가서 그 곳에 있는 어떤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곳에 가서 참으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말씀에 대한 이해가 올바르며 어떻게 젊은 사람이 저렇게 성실할까? 저 사람은 LA에 있는 모 교회에서 참 잘 배웠구나’ 이렇게 이구동성으로 평가를 했다고 해 보셔요. 그러면 그 사람 때문에 서머나 교회의 이름이 높임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서마나 교회는 뉴욕과 아주 먼 거리에 있는 LA에 있지만 그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올바른 평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뉴욕에서 이사를 와서 우리 교회에 왔는데 이건 말씀에 대한 이해도 완전히 엉터리이고 신앙생활도 너무 게으르고 엉터리이며 형식적이며 삶도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 왔다고 해 보세요. 만일 여러분 가족 중의 한 사람이 뉴욕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이 다니던 교회에 선뜻 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왕이면 그 사람이 다니던 교회는 빼고 딴 데 알아봐라’ 그러시겠지요? 그 사람이 다니던 교회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멀리 LA에서도 나쁜 평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효과적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을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다른 이들에게 삶으로 입으로 자랑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우주 만물에 깃들여 있던 하나님의 영광이 흔적만 겨우 남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그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할 수 없는 영적 소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땅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발산 적 영광을 경험하고, 효과적 영광으로 반응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새 창조를 하시는 것입니다. 새 로운 피조물과 새로운 백성을 만드셔서 다시 원래의 창조 목적대로 그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을 드러내고 아울러 효과적 영광으로 하나님을 자랑하며 찬양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내시는 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새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상태에서 두 가지가 해결이 되어야 하지요?

첫 번째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 버려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피조물들을 회복시키셔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두 번째가 소경이 된 인간들의 눈을 뜨게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첫 번째로 영적 소경이 되어버린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직접 하나님을 설명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배웠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지니고 이 땅에 내려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을 빛이라고 부릅니다.

 

(요1: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히1:3)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의 대표적인 ‘예’인 것입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지 아시겠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본체 적 영광을 지니신 하나님이십니다. 죄인들이 그 하나님의 본체 적 영광 앞에 그대로 노출이 되면 모두 죽습니다. 마치 드라큘라가 햇빛을 보면 녹아 버리듯이 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존재할 수 가 없습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때에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시내 산 가까이 오지 못하시게 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그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감추시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영광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면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그 즉시 사망으로 모두 들어가 버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찬란한 본체 적 영광을 육신 속에 감추시고 말씀으로 오셔서 삶으로 입으로 하나님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모습이 발산적 영광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중에 부활하셔서 영광의 모습으로 바울에게 나타났을 때 바울의 눈이 멀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육체를 입고 오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열심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을 알아 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요1:5)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은 이렇게 ‘모든 자들은 소경 이었다‘에서 출발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 소경 되었던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모두 집어 넣으셔서 죽여 버리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부활 시키셔서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거듭난 사람들이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게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자기 외부의 어떤 것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성과 신앙이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신앙’은 영혼과 관계있는 것이고 ‘이성’은 영혼에서 비롯된 인격의 활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내용은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고 그 분께 자신을 온전히 의존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신앙’이 없으면 이성만으로는 올바른 인식을 할 수 없습니다.

태초의 아담에게도 ‘신앙’이 있었는가?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담도 신앙과 이성을 사용해서 만물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하고 영혼이 죽어 버렸습니다. 인간은 그 즉시 신앙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영혼이 죽어 버리자 영혼에서 비롯되는 인격의 활동인 이성이 뒤틀려 버렸습니다.

마치 연탄불에 들어갔다 나온 안경처럼 인간의 이성이 우그러져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다시 살려 내시지 않는 이상 절대 인간의 신앙이 살아날 수 없고 인간의 이성 또한 제대로 인식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중생’시키시는 것입니다. 새롭게 창조하셔서 영혼을 살리시고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을 볼 수 있도록 그들의 이성이라는 안경을 밝게 펴서 닦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미 승천해 버리신 세대에 사는 성도들은 어떻게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충만하게 계시되었던 발산 적 영광을 볼 수 있지요? 그 발산적 영광이신 예수님을 그대로 글로 옮겨 놓은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발산 적 영광을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크심을 알게 되고 그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이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만물에 깃들어 있던 하나님의 영광이 어떠했는가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여 자신의 지성을 사용해서 추론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 회복된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기형 물고기를 보면서 그 물고기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습득해서 그 물고기의 원형을 찾아 올라가듯이 우리도 그렇게 지성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모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전부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고 그 분에 대해 기록된 말씀으로 계속해서 당신의 영광을 발산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 영광을 알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되고 계시록에 기록된 말씀처럼 ‘태산아 나를 덮어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나를 가리우라’고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발산적 영광의 개별적 경험이 한꺼번에 많은 이들에게 일어나는 것을 우리가 ‘부흥’ ‘revival'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피조물들만 완전하게 회복시키셔서 애초에 의도되었던  창조의 목적대로 돌려놓으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린 피조물들이 완전히 회복되는 것은 세상의 끝 날로 유예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당장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을 볼 수 있는 눈은 떴는데 그 발산적 영광을 담아 낼 피조물들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어디서 그 발산적 영광을 보고 효과적 영광으로 반응을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회복된 피조물의 모형으로 ‘교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회복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내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모형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을 교회에 부으시고 교회는 그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내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 눈을 뜨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교회 안에서 충만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이고 그 발산적 영광에 반응하여 효과적 영광으로 반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효과적 영광들은 다시 다른 이들에게 발산적 영광으로 보여 지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교회는 이 땅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으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그런 곳이라면 우리가 교회를 볼 때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이 충만하게 나타나서 눈이 부셔서 볼 수 가 없어야 하는데, 그런데 어떻게 오늘날의 교회는 눈이 부셔서 못 보는 게 아니라 눈  꼴이 사나워서 못 보는 집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아직 교회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죄의 오염, 다른 말로 죄의 잔재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치 고장 난 전구처럼 불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끔은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이 드러나기도 하지 않습니까? 교회는 지금은 이렇게 실수투성이 이고 실패 투성이 이지만 이 땅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모형으로 잘 지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도 조금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의 모형으로 잘 지어져 가는 삶인가?

우리가 흔히 새 하늘과 새 땅은 ‘죄가 없고 악이 없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일까요? 죄와 악이 사라지고 ‘선’만이 충만한 그 곳은 어떤 곳이겠습니까?

여러분, ‘선’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그러한 것을 ‘선’이라고 하지는 않지요? 그러면 온 천지 만물 중에 선한 것이 있습니까?

 

(막10:18)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주님은 오직 하나님만 선하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시23:6)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렇게 ‘선’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쓰인 곳이 어디인지 아세요?

 

(창1:10)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여기서 ‘좋았더라‘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토브‘가 ’선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창조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잘 지어지고 유지되는 것을 ’선하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선‘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선‘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을 ’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러니까 ‘선’이란 단순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나 공유 적 속성이 피조물에게 나타나고 그 피조물로 말미암아 다른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에 기여하는 삶을 ‘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생 라합이 여리고를 팔아먹은 것을 ‘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자기 시아버지와 통간을 한 것을 ‘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어린 아기와 소, 양까지 몰살시킨 것을 ‘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다른 존재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오게 하는 데에 기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을 경험한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겠습니까?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며 증거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전도이며 그게 선교인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이 어떻게 그렇게 이 땅의 것들을 분토처럼 여기며 하나님의 뜻만을 좇아 살 수 있었는지 아시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발산 적 영광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발산적 영광에 반응하여 효과적 영광을 쏟아내었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천상의 자원의 소중함을 알았기에 이 지상의 자원들을 초개처럼 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을 그리로 초대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