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2 - 말씀과 빛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1:1-5)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0:14

2 - 말씀과 빛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1:1-5)

1: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1:2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1:3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1)창조된 것은 또는 '그의 안에서 창조된 것은 생명이었으니'

1:4 2)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그의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1: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3)이기지 못하였다. '깨닫지' 또는 '받아들이지'로 번역할 수도 있음

 

 

지난주에는 ‘태초에’라는 제목으로 창세기와 요한복음이 어떻게 요한 계시록으로 연결이 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 때 제가 설명해 드리기를 창세기의 첫째 날에 창조되어진 빛은 아직 물리적인 세계 속에서의 발광체가 창조되기 전의 빛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유의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능력으로 밤이 물러가고 낮이 드러나게 되는 역사가 시작됨을 알리는 포효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자꾸 어떤 실체를 추측하시거나 상상하시지 마십시오.

그러면 모세가 창세기의 첫째 날 창조의 시작에 등장시키는 그 빛의 발광체는 무엇일까요?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진정한 발광체이시며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을 ‘빛이 오셨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빛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창세기 첫째 날에서  창세기의 빛이 낮과 어두움을 갈라내었던 것처럼 오늘 본문 요한복음 1장의 빛도 어두움에 비추어집니다. 그 빛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인 인생들에게 인간이 누구이며 하나님은 누구시며 역사는 무엇이며 우주는 무엇이며, 사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에 대해 명확한 조명을 해 줍니다. 그런데 어두움에 속한 죄인들은 빛을 비추는데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은 모두 영적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요1:7-11)

7        저가 증거 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자라

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에게 빛은 증거의 대상이 아닙니다. 빛은 그냥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을 증거 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온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세례 요한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빛을 설명해야 알 수 있는 소경으로 보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마15:14)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요9:39-40)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이렇게 아담 이후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빛이신 하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소경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 중에서 한 무리를 택하시고 그들의 어두움을 몰아내시고 눈을 뜨게 하셔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알아 볼 수 있도록 만드시기 위해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소경 되었던 자들에게 하나님을 설명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빛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능력과 성품이 어떠한 것인지를 육신들에게 육신을 입고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요14:9-11)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그 결과 그 빛을 알아본 자들이 생기게 되었고 그들이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고후4:6)

6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신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빛’과 ‘말씀’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다른 모양의 단어인 것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을 설명하고 표현할 때 쓰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육신을 입은 인간들에게 그들이 육신의 눈으로는 도저히 알아 볼 수 없는 영이신 하나님을 삶으로 인격으로 우리의 수준에 맞게 설명하고 가신 분이십니다. 다른 말로 빛의 삶을 그대로 살아 보여주시고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말씀’이신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로고스‘에 대한 것은 요한 계시록 강해 때 ’말씀이신 하나님‘이라는 설교에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만 오늘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말씀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는 ’로고스‘입니다. 그 ’로고스‘라는 단어는 헬라 철학에서 나온 단어라고 했지요?

당시의 초대 교회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었습니다. 헬라 철학의 대표적인 사상이 이원론이지요. 이원론이라는 것은 현상과 원형을 분리하는 사상입니다.

이 땅에 나타나는 현상과 물질들은 ‘이데아’라는 실체의 투영일 뿐이라는 사상이지요.

그 ‘이데아’라는 실체는 순수하고 순결한 영적 세계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인간‘ 자체도 그러한 이원론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영혼이라는 이데아의 것이 육신이라는 물질 안에 갇혀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헬라철학은 인간의 육신을 빨리 벗어 버려야 할 더러운 것으로 취급했고, 인간이 참 행복을 위해 전력을 다해 추구해야 할 것은, 어서 이 육신을 벗고 영혼의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그러한 이데아와 지상의 현상을 총 망라한 ‘우주의 질서를 만들고 운행하는 힘과 그 힘의 의지‘를 ‘로고스’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당시 헬라 철학에 젖어 있던 사람들은 그 ‘로고스’의 씨가 인간의 영혼 안에 들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영혼 안에 들어 있는 그 로고스의 씨에 의해 우주의 로고스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이치를 터득하여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바로 헬라철학이 말하는 구원관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 ‘로고스’라는 단어를 ‘계시의 수단’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그런데 말씀 드렸다시피 당시 헬라철학은 인간이 그 ‘로고스’가 계시한 것으로 ‘지식’을 얻게 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은 헬라철학에서 ‘구원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지식에 의해 더러운 물질과 육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요한이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 ‘말씀’이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요한은 당시 헬라 사상에 푹 젖어 있던 독자들에게 너희들이 평소 ‘계시의 수단’이요, ‘구원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그 ‘로고스’가 오셨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단순히 헬라 철학만을 염두에 두고 로고스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이‘로고스’라는 단어는 히브리 사람들의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지혜 사상을 나타낼 때도 쓰였던 단어였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십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로고스’는 이렇게 ‘창조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계시하는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설명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면 이스라엘은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나타난 ‘로고스’의 개념도 역시 ‘창조의 수단’이요, ‘계시의 수단’이요, ‘구원의 수단’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헬라의 플라톤 철학이나 스토아 사상에 젖은 이들이 읽어도 이해하기가 쉬웠고 구약의 말씀에 능통한 골수 유대교인들이 읽어도 이해가 쉬운 책이었습니다.

헬라 사상과 유대 사상이 놀랍게 융화(integration)되어 있는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요한복음은 구약과 유대교의 신학적 배경에서 형성된 복음이 헬라 적 개념으로 완벽하게 번역되고 토착화된 가장 좋은 모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의 다른 서신 서에서도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소개하는 것으로 편지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일1:1-2)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말씀’에 관해 간과해서는 안 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 하나님은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지혜서에 보면 천지를 ‘지혜’ ‘호크마’가 창조했다고 합니다.

 

(잠8:12,22-30)

12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23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29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리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그러니까 구약은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를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말씀도 예수 그리스도요, 지혜도 예수 그리스도 시니까요. 그러니까 말씀은 곧 지혜, 다른 말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제가 이런 배경을 깔고 있는지 조금 있으면 아실 겁니다.

그리고 유대 신학은 ‘말씀과 지혜’를 실체화해서 인격화한 표현을 많이 썼습니다. 유대 신학과 유대 문학에서는 하나님의 말씀(dabar/logos)은 남성 명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을 하고 지혜(hokma/sophia)는 여성 명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딸‘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 하나님의 지혜가 하나님의 어좌 앞에서 하나님의 딸로서 재롱을 떠는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보고 만질 수 있으며 그 자체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55:11)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나의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야, 내가 하라고 보낸 일을 성취하고 나서야,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말씀’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단어로 실체이신 예수님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건 유대 신학과 유대 문학의 표현 기법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이라는 단어가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를 계시하시는 분이십니다. 빛을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간혹 ‘감추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그 말은 하나님이 당신을 계시하시고 빛을 비추어도 미련한 죄인들이 그 하나님의 빛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을 감추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돌부처나 다른 우상들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도 당신의 지혜와 계획과 뜻을 모두 담아 놓으셨고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하나님 자신을 설명하셨습니다.

 

(롬1:20)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히1:1-2)

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부터 계속해서 당신을 계시해 오셨던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완벽하게 하나님을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오셔서 하나님을 계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아보지도 못한 자들은 이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변명할 거리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 속에서 태초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지혜, 즉 그 분의 뜻과 계획이 모두 드러난 것이고 아울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하나님의 성품이 모두 드러난 것입니다. 빛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삶은 오직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일관되어져 있습니다. 그 분의 마음과 생각과 말, 행동이 다 하나님을 나타내고 표현할 뿐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분은 사사로이 분노하거나 기뻐하지 않으셨고 어떤 일을 하실 때도 자기 뜻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요12:49-50)

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요6:38-39)

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그렇지요? 그 분은 자신을 비우시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만을 증거 하기 위해 오신 ‘말씀이시요, 지혜’이시기 때문에 그 분은 자신의 뜻을 완전히 비우셨습니다.

 

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에서 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먹고 마시며 어떨 때는 그 분의 품에 안겨 그 분의 숨소리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가진 요한은 절대 영이신 하나님을 보거나 인지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3년 남짓 보내면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이 말씀이시며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라고 확실하게 기록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기록을 한 것입니다.

 

(골1:15-17)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고후4:4)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원수를 위해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용서의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용서의 하나님, 그게 하나님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용서의 하나님이 육신으로 보여 진 것입니다. 그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며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긍휼의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원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주시는 주님을 보면서 희생의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저주받은 죽음을 통해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이 우리성도들에게도 똑같이 말씀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요17:18)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고후3:3)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성경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처럼 빛에 비추임을 받은 우리 성도들도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뜻과 목적을 다 부정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목적과 계획을 위해서만 사셨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의 삶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의 목적과 나의 계획과 나의 뜻과 나의 꿈을 위해 달려왔던 죄인의 삶에서 돌이켜서 내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나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며 살아야 하는 이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긍휼과 온유함과 오래 참으심과 자비와 원수를 사랑하시는 그 크신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을 증거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 그렇게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과 저도 육신이 된 말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이신 하나님의 성품과 그 분의 뜻과 계획을 육신이 되셔서 육신들에게 보이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육신에 영이신 하나님의 성품과 그 분의 뜻과 계획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삶의 현장에서 작은 예수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엡5:8-13)

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1      여러분은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끼어 들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폭로하십시오.

12      그들이 은밀히 하는 일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입니다.

13      빛으로 말미암아 폭로되는 모든 것은, 드러나게 됩니다.

 

(요일2:7-11)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우리가 이렇게 빛을 발하며 살고 하나님을 삶으로 소개하는 삶을 살게 되면 세상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반응이 어두움인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통회 자복 하는 반응입니다.

 

(사6:5)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눅5:8)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그리고는 그 어두움에서 떠나 빛의 삶으로 돌아오게 되는 반응이 있는가 하면

자신들에게 비치는 빛과 말씀을 향해 돌을 들고 공격해 들어오는 반응도 있을 것입니다.

 

(요1:5)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서 ‘깨닫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카탈람바노’는 ‘힘으로 이기다‘’소유하다‘’소각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빛이, 말씀이 다가가면 이기려고 덤벼들고 소유하려고 덤벼들고 소각시켜 버리려 덤벼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말씀이시며,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그렇게 고단했던 것이고 역시 말씀으로 빛으로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삶이 그렇게 힘이 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시적으로는 우리가 당하는 모습으로 비추어질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절대 우리가 지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세상의 종교에게 뭇매를 맞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분명 지는 모습입니다. 세상은 빛이시며 말씀이신 그 분을 향해 돌을 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돌로 그 빛을 짓이겨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물리적 세상 속에서의 패배가 바로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과 인내와 온유와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는 말씀의 삶이며, 승리의 삶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히브리서 기자가 10장 말미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다’라고 해놓고 11장 서두에서 그 믿음의 선진을 누구로부터 시작하는가 하면 아벨서부터 시작합니다. 아벨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사 한번 드리고 가인한테 맞아죽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벨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들은 세상의 힘으로부터 그렇게 당해주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교는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한 가지가 범신론이고 다른 한 가지가 기독교입니다.

왜 제가 기독교 이외의 세상의 모든 종교를 ‘범신론’ 안으로 몰아넣었는가 하면, 범신론은 모든 피조물과 인간의 가능성에 근거한 종교입니다. 인간도 수련을 하고 도를 쌓으면 신이 될 수 있다는 자력 종교의 토대가 바로 범신론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자기의 능력과 가능성을 전면 부인하고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요청하는 완전한 타력종교입니다. 하나님께만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려하는 자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바탕으로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세상 종교에게 늘 맞아 죽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게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사건이고 유대교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건인 것입니다. 거대한 종교 집단인 세상은 항상 하나님의 빛을, 하나님의 말씀을 밟아서 꺼 버리려고 달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도들을 그렇게 세상에게 밟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삶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삶이고 승리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빛이신 예수께서 왜 그렇게 약한 모습으로 오셨는지 아세요?

 

(사53:2-6)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약한 모습은 힘의 논리로 운영되는 세상 사람들이 규정해 놓은 ‘약함‘이지 하나님 나라에서는 바로 그 모습이 ’왕의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자해하시면서 까지 원수를 살려내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모습이 세상에서는 ’약함’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형편없이 못 생기고 약한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삶으로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고전1:26-29)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은 하나님은 가난하고 약하고 미련한 자만 들어서 쓰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약해 보이고 져 주고, 천해 보이고 멸시받는 것처럼 보이는 이 물리적인 세상 속에서의 약함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강함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빛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다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빛의 삶, 말씀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잘 알아야 하겠지요.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인격과 예수님의 삶 전체를 우리는 속속들이 공부해야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으로 기록이 되어 존재하십니다. 말씀이신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가 이제 하늘로 승천하셨고 기록된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기록된 말씀을 예수라는 실체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설명하셨던 그 분의 삶을 우리의 삶 속에서 재현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빛을 보고 말씀을 깨닫게 된 사람들이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요1:4)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생명이 누구 안에 있습니까? 예수 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명이 여러분 안에 있는지 아셨지요? 아니요.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예수 그리스도가 안으로 뚫고 들어와 내주 하시는 사람만이 ‘생명이 있는 자’라고 ‘산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없이 사는 모든 인생은 전부 허깨비 인생인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상관없이 사는 모든 삶이 다 죽은 자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없이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들 하나도 부러워하지 마셔요. 그 건 모두 죽은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전혀 카운트가 되지 않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진심으로 영생에 관심을 두고 계시고 정말 영생을 원하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로서의 삶을 추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만이 진짜 생명의 삶이니까요.

그 예수님이 부를 축적하셨나요? 그 예수님이 세상의 명예를 탐하셨습니까? 그 예수님이 도대체 뭘 하다가 가셨나요? 자신이 손해를 보면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다가 가셨습니다. 그게 생명의 삶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생명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죄인들은 절대 그 삶을 살아내지 못합니다. 여러분 비행기가 나는 것은 새가 나는 것을 보고 흉내를 낸 것입니다. 어떤 물체가 날기 위해서는 양력과 추력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양력은 날개 위의 공기와 날개 아래의 공기의 속도와 힘이 다른 것에서 만들어지는 힘입니다. 날개 위가 곡선으로 되어 있고 날개 아래가 직선으로 되어 있으면 아래로 흐르는 공기는 빠르고 힘이 있지만 위로 흐르는 공기는 상대적으로 느리고 힘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물체가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양력이 생기기 위해서는 추력(추진력)이 필요합니다. 새는 날개를 움직이면서 그 양력과 추력을 동시에 만들어 냅니다. 그게 생명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비행기는 프로펠러를 달아 추력을 만들고 날개의 모양을 통해 양력을 만들어 내서 겨우 뜨는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그 생명의 특징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성도들에게서는 그 생명의 현상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말씀 안에 다 설명되어 있습니다.

 

(요20:30-31)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다른 이들이 나의 삶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하는 그런 삶, 그것이 성도에게 나타나야 하는 생명의 현상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구절이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이 존재하셨으며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이미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세상과 우리의 인생은 그 이미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과 뜻 안에서 움직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그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변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에게 이러한 삶이 요구되는지 우리는 알지 못 합니다. 그냥 순종할 뿐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욥이 갑자기 환난을 만나 고통을 당했을 때 자신의 전과(前過)를 돌이켜 보고 모든 상식을 동원해서 문제의 답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기가 알고 있는 세계 안에서 다른 말로 자기 뜻 안에서는 도저히 그 답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큰 회의와 혼돈 속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욥에게 하나님의 빛이 비치자 욥은 깨달았습니다. 욥은 자기 이전에 자기보다 크고 영원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과 그 뜻은 뜻을 ‘내신 자’가 아닌 ‘나온 자’인 인간으로서는 결코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벗어나서 살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들의 뜻을 좇아 세상의 역사를 운영해 보려고 시도를 합니다. 인간이 그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의 뜻을 좇아 만들어 낸 것들이 절대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 공산주의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잘사는 좋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뜻을 가지고 출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죄인들이 뜻을 품고 만드는 사회는 어떻게 결론이 날 것인지를 너무나 모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의 뜻과 방법에 대해 과도한 확신을 가지고 그들의 생각을 진척시켰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자신들의 이상 즉 사람을 더 행복하고 잘 살게 만드는 이상을 이루는 쪽으로 잘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공산주의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나요? 공산주의는 인간의 행복에는 전혀 기여를 하지 못하고 100년 동안 살인과 폭력과 또 다른 계급만을 만들어 냈을 뿐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인간의 뜻을 앞세워 건설한 거대한 바벨탑이 무너져 내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여기 피아노가 있습니다. 이 피아노는 피아노를 만든 사람의 뜻에 맞게 사용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건반을 쳐서 소리를 연결시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 피아노를 만든 사람이 피아노를 향해 가진 뜻과 계획입니다. 그런데 그 피아노가 ‘난 못을 박는 망치가 될 거야’라고 한다면 얼마나 우습습니까? 그러니까 성도인 여러분을 향한 태초에 정해진 하나님의 계획이 어떤 것인지 잘 배우셔서 그렇게 사시는 것이 시간 낭비하지 않고 보람 있게 여러분의 삶을 사시는 것입니다. 강 아지가 절대로 피아노 만든 이의 피아노를 향한 의미와 뜻을 모르듯이 여러분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여러분 나름대로 세상의 철학과 사상과 유행으로 추측해서 살아낸다면 강아지가 피아노를 보고 ‘저건 망치야’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잘 배우시고 그대로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뜻을 우리는 이미 배웠습니다. 뭐였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빛으로, 그리스도의 편지와 그리스도의 향기로, 한 마디로 여러분의 삶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며 사시는 것입니다. 그게 태초에 계셨던 말씀 안에서의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 즉 그리스도 위에 세우지 않은 인생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심판의 날에 모두 불태워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만일 심판의 날에 여러분의 인생 중에 90% 이상이 쓸데없는 것으로 불태워 진다면 여러분의 기분이 어떠시겠습니까?

주님을 보세요. 주님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법석을 떨 때도 그들에게 몸을 의탁하지 않으셨고 개의치도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사람들이 모두 다 자기를 버리고 떠났을 때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이목을 좇아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평가와 이목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고 그 뜻만을 좇아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정리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설명하러 오신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은 태초부터 존재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우주 만물은 그 말씀이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 계획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가장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은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이름 앞에 항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함으로 모든 피조물들이 그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들의 유익과 자기들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지혜이며 빛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하나님의 택한 자들에게 당신 자신과 당신의 뜻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렇게 빛을 보게 된 자들은 말씀을 통하여 계속해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뜻에 따라 살던 삶에서 돌이켜 그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눈을 뜬 하나님의 성도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탐구하며 묵상하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가고 그들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으로 바꾸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일을 하시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고 마치겠습니다. 다 이해가 가셨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