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분별/영 분별

영지주의(그노시스: gnosticism) (글 이인규)

은바리라이프 2012. 8. 8. 15:26

 



영지주의란 AD 1-3세기에 일어났던 헬라, 로마 세계에서 두드러졌던 철학적, 종교적 운동이다.

영지주의는 여러 전통 종교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주었지만, 초대 기독교에 대해서 가장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이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이전에는 발견되어지지 않음으로 인하여, 기독교 이전부터 독자적으로 존재하던 종교는 아니라고 보여진다.

즉 기독교가 시작되면서, 그 당시에 존재했던 철학과 이방종교적 사상이 기독교와 접목하면서 발생한 혼합적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지주의라는 명칭은 헬라어 '그노스티코스'에서 유래했다. “그노시스”란 “비밀스러운 지식을 소유한 사람”을 의미한다.

즉 영지주의란 특별한 지식을 소유하여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소위 접신론적(接神論的)인 운동을 말하며, 초대교회 당시에 있었던 최초의 기독교 이단이다.


영지주의 사상에 반대하며 비판하는 교부들의 책(이레나이우스, 히폴리투스, 터툴리안, 클레멘트, 오리겐 등)이 소개됨으로서 초대교회에 영지주의가 존재하였음을 알게 되었으며, 또 발견되는 영지주의 저작에 소개되어 있는 영지주의 현상은 신학, 윤리학, 의식 등과 복합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엄격히 분류하기는 어렵다.

또 영지주의는 2세기 이후에는 서로 다른 다양한 형태로 분파되어 발전해 갔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영지주의 분파들은 사도들의 가르침 - 즉 성경적인 교육이나 체험적 관찰이 아닌, 소위 주관적인 신적 계시라고 불리는 특별함에 의해 얻어지는 비밀스런 지식의 구속능력을 공통적으로 강조한 듯하며, 알레고리적인 성경해석과 헬라적 철학의 혼합사상, 육체를 죄악시하는 금욕주의, 혹은 이원론(악한 신과 선한 신의 공존, 혹은 하나님과 물질세계의 분리적인 대립)을 주장하였다. 학자들은 이러한 영지주의의 근원을 네가지의 혼합적인 영향이라고 본다.


1) 헬라철학(프라톤주의, 스토아학파등)

2) 동방종교

3) 유대교

4) 기독교


즉 기독교가 전파되어짐에 따라, 그 당시에 상존하였던 유대교의 율법적인 전통사상과 이교도의 종교적 사상과 철학적 사상등이 기독교와 혼합되어지며 형성되었던 것이다.

영지주의의 핵심교리는 하나님과 물질계 사이의 존재론적 이원론(二元論)에 있으며, 악이 신성의 내적 분열에서 생겼다는 동방종교적인 신화의 근본 개념을 갖고 있다.

또 비록 다양한 형태였지만, 그들 집단의 지도자가 갖은 철학적 사상에 근거한 깨달음, 즉 그들이 신적계시라고 부르는 특별한 지식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였으며, 예수의 성육신을 전혀 다른 개념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성경에서도 그러한 초기형태의 영지주의가 등장한다고 보여지는데, 사도들은 그러한 사상에 대해서 매우 비판하고 있었다.

바울은 영지주의의 혼합적인 거짓교훈에 대해서 경고하였다.

그는 지식으로 교만하게된 고린도교회의 대적들, 비교적(秘敎的)인 지혜를 강조하고, 엘리트 부류(고전2:6-7)로 자처하는 그들에 대해서 편지한다.

지식은 교만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세워주는 사랑이며(고전8:1, 13:8), 부분적으로 폐하게 되는 지혜는 십자가 앞의 어리석음이며(고전1:18, 2:7-8), 참지식은 영적우월주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마음(2:16. 빌2:5)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골로새서에서는 바울도 헬레니즘 철학과 유대교의 혼합사상을 환기시키려고 한다.

초등학문(스토이케이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수단으로서 금욕주의(골2:20-22,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사람의 가르침)를 가르쳤던 곳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자유케 하는 능력을 선포한다(골3:10)


목회서신이라고 불리는 디모데전서에서 유대인의 신화와 족보에 참념케 하는(딤전1:4, 4:7, 딛1:14), 거짓지식(딤전6:20)을 가르치는 율법교사를 비난한다.

그들은 신령한 부활이 이미 실현되었다고 선포하였다(딤후2:18)

또한 식물과 결혼에 대한 금욕주의(딤전4:3, 2:15, 5:14, 딛2:4)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은 후기 금욕주의의 형태인 영지주의자를 반영한다.


특히 요한일서는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그들을 비판하는 내용이며, 특히 사도요한은 거짓교사들의 이원론(빛과 어두움, 요일1:5-6)을 존재론적으로 비판한다.

그들은 성육신을 영적 그리스도로 대체하였고(4:2), 지식을 믿음으로 바꾸었으며(3:23, 5:20), 속죄와 상관없는 것으로 바꾸었다.(2:2, 5:6-10) 

예수 그리스도안의 계시된 사랑의 하나님을 부인하면(4:8) 그들은 적그리스도의 영(3절)과 미혹하는 자(요이1:7)가 된다.


교회사에서는 2세기에 이르러 영지주의가 그 형체를 명확하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전승에 의하면, 최초의 영지주의자가 시몬 마구스(행8:9-24)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초대교부였던 이레니우스(Irenaeus)는 「이단들에 반대함」(Against Heresis)이라는 글에서 시몬 마구스(Simon Magus)를 향해 '모든 이단들의 아버지'라고 공격하였다.

이 사람이 사도행전 8장9절에서 24절에 나오는 인물과 동일한가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이레니우스가 공박한 시몬 마구스라는 자는 사마리아에서 크게 위세를 떨쳐서 주후 150년경에는 큰 집단이 되었다고 한다.

시몬 마구스는 자칭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하면서 초월해 계신 하나님을 부인하였다. 따라서 성경을 거부하였고, 내재하는 영의 성육신을 강조하였다.

구원을 위해서는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천지의 근원을 고요함에서 찾고자 하였다. 마치 신비적인 안개 속을 헤매면서 마음으로 그 속에 있는 진리의 빛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특히 시몬 마구스는 훗날 양태론(Modalism)으로 불려지게 될 신론을 갖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예수님은 인간의 형태를 입은 사람으로서, 구세주가 아니요, 높으신 하나님도 아니다. 하나님과 구세주와(시몬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가 동격이다.


또 어떤 전승에 의하면, 케린투스라는 영지주의자가 사도요한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존재하였다고도 한다.

그는 영이신 그리스도가 예수 안에 강림하였다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의 육체를 떠났다고 주장하였다고 하였다.


또 2세기 이후 가장 탁월한 영지주의 공동체로서, 발렌티누스파가 있었고, 또 말시온이란 영지주의자도 나타났다.

에비온파가 구약적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한 이단이었다면, 그 반대로 말시온주의는 구약을 지나치게 배척한 이단이었다.

말시온은 흑해 남단에 있는 작은 마을 '시노피'(Sinope) 출신이었는데, 선박제조업으로 부를 누리던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비두니아지방의 감독이었는데, 아들 말시온의 부도덕한 행위를 보고 아들을 파문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서 말시온은 140년경에 로마로 이주하여 거액의 헌금을 로마 기독교 공동체에 제공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영지주의자였던 '세르도'(Cerdo)라는 사람의 영향으로 로마교회의 가르침과는 다른 교리들을 전파하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서 그는 로마교회에서 파문당하였다고 전해진다.

144년경부터는 로마 교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이단 집단 말시온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150년경에「변증서」라는 책을 쓴 순교자가 져스틴(Justin Martys)에 따르면 말시온파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고 한다.

이레니우스(Irenaeus)라는 리용의 감독은 150년대와 160년대에 말시온파의 확산이 급속했다고 말했다. 이레니우스에 따르면 서머나교회의 유명한 순교자 감독 폴리캅(Poly carp)이 말시온을 만나서 대화하고는 '사탄의 맏아들'이라고 공박했다고 한다.

말시온은「반대명제」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그 책 자체는 현존하지 않지만, 2세기 말과 3세기 초에 활동한 아프리카의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이「말시온에 대항하여」라는 책에서「반대명제」의 내용을 대부분 수록하여 논박하였다.

말시온은 영지주의자로 불려지지만, 그러나 초기의 영지주의자들과는 차이점도 있기 때문에 독립적인 이단 집단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말시온이 가르침을 받고 영향을 받은 세르도라는 사람은 명백한 영지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말시온의 이단사상은 기본적으로 그의 신관에서 비롯된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도무지 조화될 수 없는 별개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 사상은 '세르도'가 먼저 가르치기 시작한 것인데, 말시온이 더욱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의 「반대명제」는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이 반대되는 점들을 열거한 것이었다.

구약의 신은 복수와 공의의 신이지만 신약의 신은 사랑의 신이라는 것이다. 구약의 신은 열등한 물질계 창조주로서 전지 전능하지 못하지만, 신약의 신은 전지 전능한 신이라는 것이다. 구약의 신은 유대인의 신이지만 신약의 신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로운 신이라는 것이다.

구약의 신은 알려진 신('데미우르게'라는 헬라철학의 신)이지만, 신약의 신은 원래 알려지지 않은 신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약의 신은 구약의 신에게 얽매인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예수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예수의 육신은 참된 육신이 아니라 환상적인 육신으로서 육신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했다(가현설). 구약의 신은 의인들만 받아주었지만, 예수는 모든 죄인들도 받아주고 심지어는 음부에 내려가서 구약의 신을 반대하는 영혼들을 구원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제 물질계를 벗어난 영혼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고 있는데, 구약의 신은 다시 나타나서 지상에 천년왕국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을 대적한다는 것이다.


말시온은 구약을 모두 거부하고 신약에서도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 가운데, 열 개만을 정경으로 보았다. 이 가운데서도 구약의 인용 부분은 삭제해 버렸다. 게다가 자신의 저작인 댓구라는 책을 성경에 포함시켰다.

말시온은 바울을 좋아했고 바울 서신 중 사랑의 신에 대한 구절을 좋아했으며, 금욕주의적인 생활관을 가지고 있었다.

말시온으로 인해서 정통교회는 신약 27권의 정경화를 서둘러 추진하게 되었고,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의 관계를 더욱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게 되었다.

초대교회에서 이러한 이단들의 출현은 상대적으로 정통교회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정리하는 계기가 되어졌다.


영지주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창조교리를 변조시킨 초대교회 시절의 종교적 철학운동이었다. '지식'을 지나치게 숭상한 나머지, 실재에 대해서 이원론으로 치달았다.

영혼과 물질, 정신과 육체, 선과 악, 구약과 신약, 이스라엘과 교회, 하나님과 예수님, 율법과 복음, 심판과 칭의 등의 대립과 대결 속에서 만물이 형성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영적인 권능' 정도로 이해하였고, 물질 세계의 근원자가 될 수 없다고 격하시켰다.

성경과는 정반대로 물질 세계란 전혀 별개의 근원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별개의 근원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펴서 창조론을 거부하였다. 물론 성경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하나님 자신과는 완전하게 별도의 세계에 위치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으며 영원히 창조주이시다. 그리고 세상은 그의 피조물이다. 이러한 구분을 영지주의자들은 부인하였다. 이들은 이 세상을 의미있는 곳으로 볼 수 없었다. 따라서 육체를 죄악시하고 엄격한 금욕주의에서 신앙생활의 이상을 발견하였다.


또 몬타누스라는 자도 있었다.

말시온과 몬타누스는 동일시대의 인물이다. 이들은 모두 안토니우스피우스 황제(Antonius Pius, 138~161 재위) 시대에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몬타누스는 새 예루살렘이 곧 임박했으므로 결혼은 금하고 말세를 준비해야 한다고 서둘렀다.

몬타누스는 자신에 대해 맹종을 요구하면서, "나는 특별한 예언적 은사를 받았다"고 확신시켰다.

자기가 받은 계시에 따르면 새로운 성령이 넘쳐흐르고 있으므로 곧 말세가 온다고 하는 종말론자였다.

몬타누스는 자신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소개하면서, 추종자들은 특별한 지식을 소유한 기독교의 영적 엘리트로 확신을 불어넣었다.

막시밀라와 브리스가라는 두 여제자를 두었고, 소아시아 지방에서 큰 세력을 확보하였다.

막시밀라는 남편으로 하여금 몬타누스를 따르게 하고 자신은 소아시아 프리지아 지방의 페푸자라는 동네에 새 예루살렘이 임한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세속적인 일을 중지하라고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몬타누스가 받았다는 '새로운 계시'의 정체가 차츰 드러나면서 이단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몬타니스트들은 금욕주의적 생활양식과 순교에의 자발적 참여 등으로 인하여 정통교리가 체계화되지 못했던 초대교회 시대에 정통교회들의 반발을 무력화시키는 위세를 발휘하였다.

심지어 한 때 터툴리안 같은 교부마저도 그들과 잠시 관련을 가질만큼 큰 해독을 끼쳤다.


또한 영지주의자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현설(Docetism)을 들고 나와서 육체적, 실제 예수의 존재를 부인하고 영적인 예수만이 있었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 사상은 앞의 시몬 마구스가 선창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 없이 그냥 외형상으로 존재하였으며,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아니요,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마술적 존재라는 것이었다.

가현설은 당시 헬레니즘의 합리적 사고와 부합하여 예수님의 탄생, 고난, 부활 등의 객관적 역사성을 모두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트라얀 황제시대(Trajan, 98~117 재위)에 순교한 안디옥의 아그나시우스가 가현설의 오류를 간파하여 "예수님은 형상만 있던 분이 아니요, 참 사람이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영지주의는 체계적인 기독교의 성경적, 신학적인 변증적 논리에 대해서 3-4세기 이후에는 급격하게 쇠퇴하며 무너지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 역사상 영지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으며, 최근에도 이단이라고 불려지는 곳에 의하여 아직도 계승되어지고 있다.

또 양태론적인 신론은 영지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며, 잘못된 기독론 역시 그 유래를 찾아 계속 올라가 보면,  결국 영지주의적인 영향에서 출발된 것이다.


지금도 신적계시 - 즉 자신들의 주관적이며 특별한 지식을 알아야만 거듭나며 구원을 받는다는 집단은 영지주의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부류의 이단들은 특히 창세기, 계시록등을 독단적으로 해석하면서 그것이 신적계시에 의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인간의 육체를 물질화, 죄악시하여, 오직 영혼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금욕주의와 특별히 사람이 살아서도 육체와 영혼을 분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소위 영혼의 육체이탈설을 주장하는 일련의 주장등은 헬라주의적인 영지주의 견해와 유사하다.

인간은 그가 생명을 갖고 있는 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전인적(全人的)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