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근본주의 논란에 대한 소감
‘그리스도의 사람’30호 권두문(원문 부분수정)
근래 우리 사회에서 종교의 근본주의 문제가 많이 논란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그동안 일부 기독교인들에 의한 불상이나 단군상 훼손, 봉은사‘땅밟기’, 심지어 해외 선교사에 의한 미얀마 불교사원의 ‘땅밟기’논란 등의 행태가 기독교 내부에서조차 지탄을 받아왔는데, 특히 최근에는 기독교계 자체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 기독교 극우 정당 창당을 강행하고 해서 결국 이러한 대부분의 이슈들이 근본주의 신앙과 관련되고 있어 근본주의가 논란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기독교 잡지,「기독교사상」은 2010년 8월호와 금년 11월호에 두 번에 걸쳐 이 문제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나는 이를 통하여 기독교 근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보다 자세히 읽을 기회를 가졌다. 하여, 여기 그 소감을 올린다.
먼저 지면의 제약상 극히 일부분이지만 그들 중 두 분의 글을 소개한다.
종교인이란 자기가 믿는 바의 종교적 가르침을 절대화하려는 유혹에서 자유롭기 어려운 자들이다. 그가 선 자리가 보수든 진보든, 좌든 우든 상관없다. 중간지대를 ‘회색지대’라 비난하며, 타협이나 양보를 ‘변절’이라 매도하면서, 흑 아니면 백, 모 아니면 도, 예 아니면 아니오를 택하라고 강요하는 모든 태도가 근본주의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만의 눈이 있고, 따라서 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시각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 시각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선택이고 그의 자유다. 각자의 시각은 남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존중받아 마땅하다. 나의 시각을 존중받으려면 다른 사람의 시각도 존중할 줄 아는 것이 학인의 자세다....
진리는 스스로의 힘이 있어서 강퍅한 마음을 녹일 뿐만 아니라 사회 안에 쳐진 무수한 칸막이를 무너뜨리는 힘마저 지닌다는 걸 꿰뚫어본 이가 바로 마하트마 간디다. 그의 유명한 ‘샤티하그라하’(眞理把持) 운동은 이런 신념에서 나왔다. 근본진리 앞에서 모든 근본주의자는 자신의 ‘믿는 바’를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게 참다운 종교인이다. 인류 역사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고, 주인과 종도 없고, 남자와 여자도 없다는 근본진리에 철저히 순종한 신앙인, 곧 ‘창조적 소수’에 의해 인도되었다. 앞으로 역사가 갈 방향도 다만 시간이 문제일 뿐, 그 방향일 것은 틀림이 없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칸막이를 허무는 역사의 길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디딤돌인가 아니면 걸림돌인가. 기득권 유지에 눈이 멀어 다른 종교를, 다른 교단을, 다른 신학을 정죄하기에 급급하다면, 역사의 심판대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 다양성은 하나님의 창조원리였다.
(박정신, 숭실대 교수)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로 자처한다. 대중 설교자들과 신학자들은 최소한 자신들이 복음주의 노선에 서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명분이야 무엇이든 중요한 것은 목회와 설교 행태이고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다는 말씀처럼, 비록 복음주의자라는 옷을 걸치고 있어도 근본주의적인 목회와 설교행태를 보이면 그는 근본주의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근본주의자들은 보수를 자처하면서도 실제로는 기독교의 근본을 보수하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근본을 지키겠다면 3-4세기의 교부 신학과 16-17세기의 루터와 칼뱅신학에 철저해야 하고, 교부신학의 집대성이라 할 삼위일체론을 깊이 있게 공부했어야 하는데 그런 설교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단순히 삼위일체라는 용어만을 구구단을 암송하듯이 외칠 뿐, 그 신학의 세계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칼뱅이 말하는‘전가(轉嫁)된 의(義)’개념을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알고 있는 장로교 설교자들을 찾기 힘들다. 이렇게 해서 자신들이 수호해야 할 기독교 진리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으면서 수호해야 한다는 인간적인 열정만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그 열정이 지금 한국교회를 지탱하는 동력이라는 해괴한 사태를 낳고 있는 것이다.
자칭 보수적인, 또는 복음적인 목사라고 한다면 신학적 접근은 둘째 치고 최소한 기독교의 근본적인 전통을 따르려는 노력이라도 기울여야 하는데 예배만 해도 건전한 복음주의 계열의 목사들이 시무하는 교회에서도 예배의 예전과 성서일과와 교회력은 실종되고 청중들의 종교적 감수성에 눈높이를 맞추는 열린 예배와 온갖 흥미 위주의 프로그램이 자행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19세기 자유주의보다 훨씬 강도 높게 인간 중심으로 치우쳤으며 그들의 관심은 복음전도라는 이름은 걸고 있지만 실제로는 청중들을 끌어 모아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상업주의 정신뿐이다....
교회성장 일원론적 목회 패러다임이 오늘날 모든 신학적 담론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되고 말았다. 교회 현장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근본도 없고, 보수도 없고, 복음도 없이, 그리고 근본주의적인 신학도 없고 근본주의적인 목회 실천도 없이 오직 성장론만 절대적인 메커니즘으로 작동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들의 영혼은 마비되고, 부패되고 있다.
(정용섭. 목사, 대구 성서아카데미 원장)
일반적으로 기독교 근본주의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신학사상으로서, 성서 말씀에 대한 문자적인 믿음과 자신의 그 믿음을 절대화하는 신앙입장으로 규정된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의 절대화는 결국 자기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게 되고, 그러다보니 자신이 믿는 그‘근본’을 지켜 내기 위해서는 종종 폭력도 불사하고 정당화 하려 한다는데 그 폐단의 심각성이 있다고 주장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제도 교회 목사들의 방송설교나 인터넷에 올라온 설교문들을 보면 확실히 대다수 한국 교회 목사들과 신자들의 신앙은 근본주의에 속한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니 아마 근본주의 보수신앙을 표방하지 않으면 교회들은 신자 모으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에서 그런 풍조가 지나쳐서“성서를 문자대로 믿는 것”이 근본을 잘 지키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고 그러한 착각이 결국 일부이긴 하나 불상 훼손 등의 행태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의 근본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복음의 무지요, 그러므로 보수를 표방하지만 보수(保守)해내야 할 기독교의 진정한 가치를 저버린 행위인 것이다. 결국은 예수의 복음을 욕보이는 광신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특히 우리의 경우에는 위 한분 필자의 지적처럼 근본주의 보수신앙을 표방하는 목사들 중 상당수가 자신들이 지켜내야 할 기독교의 근본은 저버리고 상업주의적 교회성장주의, 맘몬, 교권숭배의 세속주의에 영혼이 팔려 있는 것이고, 그래서 일반 신자들의 신앙을 오도하고 있다는데 더욱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문제가 되는‘신앙의 절대화’에 대한 비판 속에 예수에 의한 구원신앙의 절대성을 포함시켜, 그런 신앙은 결국은 불가피하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배타와 폭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아니,‘구원은 예수에게만 있다’는 믿음을 필연적으로 타종교에 대한 배타 및 폭력으로 귀결시키는 논리는 광신도들의 기독교 오해만큼이나 예수 유일구원론의 오해에서 나온 생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상적으로 보면 물론‘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하므로 독선으로 보이고 배타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진정 무엇이고 인간이 어떻게 그 신앙에 들어가는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이성적 논리에서 나온 판단일 뿐인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신앙도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위로부터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요6:44)”라는 말씀은, 그 신앙입장이 진보냐 보수냐와 관계없이, 진정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신앙인의 엄숙한 경험적 사실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자신의 신앙이 은혜로 받은 것임을 깊이 인식하는 사람은 불교인도, 회교인도 어떤 타종교인이라 해도 그들이 부도덕과 악을 행하는 집단이 아닌 한, 그들 역시 자신과 전혀 다를 바 없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자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배척하고 말고 하겠는가?
결국 그리스도 유일구원 신앙에서 혹자가 우려하는 독선, 배타의 문제는 오직 그 믿음이 진정한 것이냐 아니냐 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거듭나고 구원을 체험하는 사람은 기독교 구원론의 절대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른 종교나 자신과 다른 믿음의 사람을 배척, 비난, 매도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대신 그는 그러한 사람을 위한 기도와 사랑과 포용하는 영혼의 소유자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그리스도 유일구원’의 신앙을 곧바로 타종교에 대한 배척, 매도의 논리와 연결시키거나 종교 다원주의 논리의 정당화로 귀결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의 절대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아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와 같은 말씀이나,“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와 같이 그리스도 구원의 유일성을 말씀하는 명백한 성서 기록에 대해서도 이를 달리 해석하여 기독교만의 구원의 절대성을 부정하면서 성서 해석상의 차이문제로 돌릴 것이다. 결국 이러한 주장들이 도달하는 종착점은 모든 종교에 다 구원이 있다는 종교 다원주의인 것이다.‘칸막이를 허물라’는 말은 다른 믿음을 관용하라는 것 이상, 결국 종교 다원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으로 들린다. 그러나 나는 이들 성서말씀에서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이들은 비유나 묵시문학의 구절들이 아니다. 명백히 그리스도에 의한 인간구원의 유일성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종교들에 나름의 구원관이 있다고 해서 그 구원론들이 기독교의 구원과 동일한 것이라는데도 결코 동의하지 못한다.
결국 기독교 근본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잘못된 광신주의 비판은 옳다. 그러나 그와 함께 그 비판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인간구원의 유일성을 폐기하라는 논리로 연결되는 것은 경계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기독교의 중심을 흐리는 일로서 종교 다원주의와 맞닿아 있는 주장이 아닌가 생각되었다.‘그리스도 유일 구원론’은 표면상 독선으로 보이지만 그에 의해 거듭난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사랑과 포용과 기도의 마음이요, 타인의 믿음도 자신의 경우처럼, 결과는 그리스도의 은총에 돌리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출처] 기독교 근본주의 논란에 대한 소감 |작성자 cs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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