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프린스턴 신학전통과 메이천 신학
강사: 김길성(총신대학교 부총장 겸 신학대학원장)
(2011년 10월 25일 고려신학교 제4회 종교개혁기념 특별강연 내용 중 결론만 전재합니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구 프린스턴 신학전통의 흐름과 더불어 메이천 박사의 신학과 사상을 고찰했다. 구 프린스턴 신학전통이 재편성의 기로에 선 역사적인 순간에 메이천 박사의 신학과 사상은 교회론의 큰 주제인 ‘교회의 일치와 순결’이라고 하는 축을 따라 형성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의 신학과 사상은 그의 초기 작품들을 형성하는 논문들을 통해,큰 두 주제인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관심과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 복음의 역사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기독교의 기원과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라고 하는 주제는 메이천의 초기 작품들뿐만 아니라 그의 후기 작품들의 주제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메이천의 신학을 그의 사상과 분리하여 그의 사상은 그의 신학과 일치하지 않으며, 재세례파나 독립교회파에 속한다고 하는 비난은 근거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메이천의 사상은 그의 신학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되었으며, 당시 현대주의(Modernism) 또는 신학적 자유주의(Liberalism)라고 하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을 배경으로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런 연유로써 메이천의 신학과 사상 의 특정을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1. 메이천의 사상은 그의 신학과 분리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의 신학과 사상은 자신이 속한 구 프린스턴 신학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메이천의 신학적 시각은 주로 구 프린스턴 신학(Old Princeton Theology)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또한 이 구 프린스턴 신학은 당시 시대의 ‘그 철학’ 이었던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에 의해 강화되었으며, 정통 칼빈주의에 확고히 뿌리박고 있다. 그러나 그가 가졌던 신념은 프린스턴 신학교 전임자들이 세워놓은 규범들을 맹목적으로 반복하거나 모방한 것이 아니었다. 특별히 하나님의 정확무오 한 말씀으로써 성경이 가진 신뢰성과 명료성에 대한 확신을 비롯하여 그의 이 같은 신념은 어릴 적부터 견고하게 형성되어 온 것이며, 나아가 그가 자라온 남부지역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수로 선임되면서 시작한 성경에 대한 자세한 연구와 특히 당시 신약 분야의 학문적 성과를 자세히 살핀 연구 결과를 통해 1915년에 이르러 그 완전한 틀을 갖추게 되었다. 동시에 메이천의 후기 신학과 사상은 바로 그의 초기의 신학과 사상의 기반 위에 형성된 것이며 그의 후기의 저술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신학교와 교단 내에서의 활동은 바로 그의 신학과 사상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신념의 결과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해석이라고 사료된다.
2. 메이천의 신학과 사상에 대한 논의는 기독교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던 당시의 시대적 사상과 조류를 배경으로 검토되어야 한다고 하는 사실이다.
메이천의 신학과 사상에 대한 논의를 그가 재직한 신학교나 그가 속한 교단 안에서의 불화나 갈등 등으로 매도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파괴적인 사상인 현대주의 또는 신학적 자유주의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거나 최소화하고, 메이천 개인의 인격적인 약점들을 최대화함으로써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프린스턴 신학교의 이사회의 재편성과 더불어 종교다원주의를 수용을 대외에 표방한 이후, 메이천을 비롯한 일부 교수들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자, 프린스턴 신학교에 남아 있던 교수들 중에서 자신들의 입장의 옹색함을 학문적으로 변호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관점이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분리된 이후에,메이천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교단에서조차 정직 당하게 되자, 메이천 신학에 대한 연구는 메이천의 입장을 변호하는 몇 교단의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고 오히려 메이천의 입장을 분리주의로 몰고 가는 미국의 주류교단의 저술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뿐만 아니라 학자들에 의해서 조차도 주객이 전도된 이러한 횡포에 의해 메이천 연구는 오히려 곡해되고, 학자들의 관심이 소홀한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평가에 의한 메이천 이해보다는, 종교개혁자들이 즐겨 사용하던 Ad fontes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3. 메이천의 신학과 사상의 큰 주제는 기독교의 역사성 또는 역사적 기독교에 대한 지성적인 변호와, 교회의 일치와 순결이라고 하는 주제로 요약될 수 있다.
메이천은 기본적으로 조직신학자가 아니었다. 그가 프린스턴 신학교 재직 시 워필드의 소천으로 비어 있던 변증학의 교수로 교수회에서 추대된 사실과 그의 후기의 여러 저술들로 말미암아 그는 변증신학자로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메이천이 프린스턴 신학교에 교수로 처음 초빙을 받았을 때부터 그는 신약신학자였다. 찰스 하지는 구약과 동양문헌 교수였고, 벤자민 워필드, 존 머리 교수 등이 신약신학자였다는 것을 아는 것은 별로 신기한 일이 아니다. 메이천의 경우에는,그의 후기의 저술과 교단 내에서의 활동 등으로 인하여 변증신학자로만 알려지게 된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프린스턴 재직 시 정식으로 변증학 교수로 인준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과 그가 후대에 신약신학자라기보다는 변증가 또는 변증신학자로 더 알려져 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여튼, 역사적 기독교에 대한 확신은 메이천의 초기 논문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확신은 당시 자유주의자들의 초자연적인 사건에 대한 부인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메이천에게 기독교는 역사였고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역사였다. 따라서 기독교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교단 내외의 자유주의자들과 타협하는 것이나 이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은 메이천으로서는 학자의 양심에 속하는 심각한 문제였다.
4. 메이천의 신학과 사상의 특징 중 하나는 개혁고백주의에 대한강조이다.
개혁고백주의에 대한 고백은 단지 메이천 만의 강조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장로교 논쟁 중에서 메이천은, 가르침에 종사하는 교회 직분자들 특히 목사와 신학교 교수들은 반드시 그들이 임직 시 서약한 대로 장로교 표준문서들에 “충실하고 정직한 서약’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메이천이 교회를 “자발적인 집회”(voluntary society)로 이해하고 있다고 비난 받기도 하지만, 메이천이 교회를 자발적인 집회로 비유하는 경우에 그는 임직 서약과 관련하여 말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요한 칼빈은 파렐의 권유로 제네바에 남아 제네바 교회들의 1차 개혁(1536년-1538년)을 시작하면서 모든 제네바 시민들에게 제네바 신앙고백에 서약하도록 했으며, 이를 거부하는 경우에는 제네바를 떠나도록 촉구했다. 메이천의 경우에는 교회의 전 교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서 임직 시에 분명하고 명백한 서약을 하고 임직을 받은 목사와 장로들 특히 교회 안에서 가르침에 종사하는 직분자들(목사와 신학교 교수들)이 자신들의 임직서약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때문에 메이천이 장로교 전통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주장이나, 또는 메이천이 분리주의자라고 하는 주장이나 그의 교회론이 계급조직적이라고 하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메이천이 교회의 가르침에 종사하는 직분자들에게 임직서약을 촉구한 것이 분리주의적이라면 제네바 전 시민들에게 제네바 신앙고백을 촉구한 요한 칼빈은 어떻게 불러야 할 것인가? 오늘날 칼빈이 분리주의자로 불리기보다는 종교개혁자로 평가되고 있는 사실로 볼 때 메이천을 비난하는 자들의 주장은 자신들의 입장을 강화시키기 위한 근거 없는 것임을 알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평가에 있어서 어느 한 개인이 칭찬 받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단지 19세기에서 20세기 초로 이어지는 시대의 거대한 조류인 현대주의 또는 신학적 자유주의에 온몸으로 마주서서 그 실체를 파악하여 교회에 경고한 메이천의 공적은 바르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2013년 부산에서 개최하기로 하여 범교회적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 한국총회에 대해서도 단호한 반대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고,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을 지켜온 교회들이 힘을 합쳐 한 목소리를 내야 할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교회의 일치와 연합은 진리 안에서의 연합이어야 한다. 메이천과 더불어 우리는 성경적인 에큐메니즘은 반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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