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성경

구약개론 - 제9장 자료구분의 기준으로서 상이점과 중복

은바리라이프 2012. 2. 13. 16:52


구약개론 - 제9장 자료구분의 기준으로서 상이점과 중복 

제9장 자료구분의 기준으로서 상이점과 중복

1. 여호와와 엘로힘의 상이점

비교종교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스라엘 인근에 있는 이방의 종교문화들이 가장 중요한 신을 오직 하나의 이름으로만 불렀는지 의심스럽다. 바벨론에서는 수메리아의 신들 이름을 악카드어 이름으로 바꾸어 불렀다. 벨은 엘릴이며 누남니르였다. 아눔은 알룸,신은 난나, 에아는 엔키, 우투는 사마쉬, 우쉬타르는 이난나 혹은 텔리툼이었다. 우가릿에서 바알은 알리얀으로, 엘은 랏트판, 코사르 바 하시스는 하임으로 불렀다. 아스트룩과 아이히혼 시대에는 셈계와 애굽의 자료(data)들이 사실상 잘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만약 그렇지만 않았다면 하나님의 이름에 근거한 자료구분 이론이 결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름을 자료구분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맛소라 사본(MT)과 70인역(LXX)에 나타나는 이름의 차이에 근거하여 반박을 할 수 있다. MT가 여호와와 엘로힘을 전수하는데 아무런 오류도 있을 수 없다는데 근거한 이 문서의 분리 관정은 건전하지 않다는 것을 이것이 제시해 준다.

토라 전반에 걸쳐 야훼와 렐로힘이 흩어져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즉, 엘로힘(능력, 강함, 최고를 가리킴)은 하나님께서 자연과 인류 전반에 주가 되시고 전능하사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된다. 따라서 오직 엘로힘만이 창세기 1장에서 적합하게 된다. 그 주제가 창조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여호와는 하나님의 언약 명칭으로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는 상황에서 나타난다. 그 주제가 하나님께서 행위언약을 아담과 하와와 은혜로 맺기 때문이다.

최근에 유럽에 있는 지도적 자유주의 신학자들 중 몇이 벨하우젠의 출애굽기 6:3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포기하였다. “야웨가 여태까지 모세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E의 관점이 아니다. 모세는 그가 자기 백성에게 돌아갔을 때 정말 자기가 보낸 분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결정적> 증거를 요청하고 있다…그 대화 전체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2. 어투와 문체의 차이

출애굽기 8장에서 “그리고 아론”이 나타날 때마다 P에 법규가 만들어질 때까지 발명되지 않은 비역사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서, 밧단-아람(P 이름)이 창세기 31:18(E 문단)에 나타날 때 18절 하반부는 P에 돌리고 나머지 4-45절은 E에 돌려 밧단-아람은 P에만 나타나고 아람-나하림은 J E와 D에서 사용된다는 그들의 가설을 살리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질문 속에 답을 넣고 대답을 이끌어내는 순환논법일 뿐이다.

문서설주의자들은 고대 히브리의 저자들이 표현방법에 있어서 다양성을 띨 수 없었다는 아무 증거도 없이 가정하고 있고 다양성이 나타나면 바로 다른 저작권으로 연결시켜 버린다. 그러나 다른 여러 나라의 문학에서도 숙련된 저술가들이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표현을 쓰고 있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동일 저자가 강조와 신선함을 위해 다양한 표현을 쓸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예로써, 출애굽기에서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이 나가는 것을 거절할 때 세 가지의 다른 동사가 열 재앙 앞에서도 완고한 그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또 다른 경우에는 표현을 달리함으로써 특별히 중요한 것을

강조하거나 부연해 준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을 때나(창 35:8), 라헬이 운명할 때 단순표현으로 처리한다. “그녀가 죽고 장사되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창25:8), 이삭(35:29), 야곱(49:33)과 같은 족장들의 경우에는 그 표현 형식이 더욱 장엄하고 길다. “그는 기운이 진하여 죽고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며 그의 아들들이 그를 장사하였다.”

3. 중복기사와 평행기사

문서설 초기부터 중복기사와 평행기사는 여러 자료가 오경에 있는 것을 증명하는데 사용되었다. 두 개의 창조기사와, 홍수기사가 여러 가지로 얽혀 있는 것과, 이삭의 세 가지 이름 등은 동일한 사건에 대한 다양한 전통을 어설프게 묶은 결과로 여겨졌다. 후대의 편집자가 이 모든 것을 다 하나로 묶었기 때문에 수많은 불일치가 텍스트에 남아있게 되었고, 비평활동을 통해 과학적으로 분산시킬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이런 해부활동은 복합저작권 이론을 따르는 자들에게 호소력 있게 전달되었다.

요셉을 애굽에 판 기사가 두 가지라고 한다. J기사는 이스마엘인이 사고(37:25), E 기사는 미디안인이 그를 데려갔다고 한다(창37:28). 이 두 가지 이름은 저자가 그 시대를 잘 알고 있었음을 오히려 변증해 준다. 즉, 미디안인들은 이스마엘 족속 중 한 지파였다. 사사기 8:24은 미디안의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와 그들의 부하들에 대해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므로 금 귀고리가 있었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원래 미디안은 아브라함이 그두라에게서 낳은 자였지만(창25:2), 이스마엘 족속과 그두라 족속이 둘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었던 관계로 북 아라비아에서 서로 결혼도 하며 살았던 것 같다.

아브라함이 그의 처 사라를 그의 동생으로 소개하고 바로(창12:10-20)와 그랄의 아비멜렉(창 20:1-18)에게 빼앗긴 두 기사가 동일한 전설을 다른 형태로 보존한 것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동일한 실수를 두번 다시 범하지 않고 똑같은 유혹에 단 한번만 빠진다는 가설은 너무나 피상적이다. 특히 아브라함은 두번 다 큰 부를 가지고 나왔던 것을 고려해야 한다.

하갈이 아브라함의 집을 떠난 것이 두번 나타난다. 창세기 16:4-14에 있는 첫째 기사는 J에(이스마엘 낳기 전에 어떻게 나갔느냐 하는 것을 보여줌), 창세기 21:9-21은 E 에(이스마엘이 이미 소년이 되었을 때 집을 나간 기사) 돌려졌다. 사라와 하갈이 수년간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을 고려해 볼 때 이 두 사건이 다른 때, 다른 상황에서 일어난 사실이 아닌가. 역사는 위인들의 생애에 반복적인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여주는가. 아다나시우스 감독은 세 번이나 유형을 당하지 않았는가? (A.D. 335, 339, 356―문서설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것 역시 세 가지 “자료”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편집자가 마지막으로 다양한 전통으로 묶었다고 하지 않을까?).

4. 중복에 대한 하나의 답으로서 히브리어의 문체

중복 이론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히브리어 문체의 성격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알리스는 히브리 저자들이 널리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세 가지의 문체적 특징을 지적하였다. 이 세 가지 특징은 문장구조, 중요사항의 반복, 그리고 평행법이다.

① 평행문장은 종속절, 혹은 독립절을 단순 접속사 그리고( ו, we)로서 연결시키는 특징적인 히브리어 표현구조이다. 창세기 1:14에서 인도-유럽 언어는 목적절로 표현하여 “징조와 계절을 나타내기 위하여(in order to) 하늘의 궁창에 있으리라”로 썼겠지만, 히브리 저자는 “하늘의 궁창에 빛이 있으라…… 그리고 그것들을 징조와 계절이 되어라”로 나타난다. 또한 이사야 6:7을 “볼지어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다 그리고 너의 불의는 제하여졌다. 그리고 너의 죄는 속함을 받았다.”로 직역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사야가 전달하고 싶었던 점은 “보라 너의 불의가 제거되고 너의 죄가 대속되기 위하여(in order that) 이것이 네 입술에 닿았다.”이다.

② 둘째 특징은 중요한 기사를 약간 달리 반복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이 기술에 대한 하나의 예를 홍수기사와 연관하여 이미 제시하였다. 거기에서 3가지 중요한 강조점의 반복이 분할론 자들에 의해 마음대로 요리되었으며, 나머지 기사들은 복합 자료설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있음을 보았다. 이와 약간 유사한 것이 출애굽기에 열 재앙이다. 어떤 경우에는 재앙이 다섯 가지의 특징적 부분으로 충분히 기술되었다. 즉, 경고, 명령, 집행, 중보기도, 끝 이러한 순서로 되었다. 자료 재평가에 있어서 이것들을 하나씩 꾸러미로 만들어 가상적인 저자에게 돌리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작업이다. 이리하여 경고와 끝은 J, 그리고 명령과 집행은 P에게 돌려졌다. 그러나 좀 약한 재앙에 있어서는 그 설명이 짧아서 따른 여러 자료로 나누기가 힘든 경우가 있다. 이 재앙과 악질 재앙은 J와 E에게 돌림이 없이 P에게만 할당되었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배열됨으로써 J는 일곱 재앙을, E는 오직 네 재앙(다섯 번째 것은 경고만 있고 실행이 안되었다)을 알고 있는 격이 된다. 결과적으로 이 자료들 상호간에 재앙의 횟수가 전혀 일치하지 않게 되며, 열 개의 재앙을 알기 위해서는 각 순서가 다른 문서에 있는 정보를 알 필요가 있게 된다.

③ 세 번째 특징은 시적(詩的)평행법(平行法)이다. 평행법이란 평행구절이 균형을 이룰 때 갖는 전문용어이다. 예로써 시편 24:1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진술한다. 여기에서 “땅”은 “세계”와 “충만한 것”과 “그 안에 거하는 자”가 평행을 이루며 동의어를 이루고 있다.

그린은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를 “문서설”로 분석함으로써 이것에 대해 멋진 예증을 제시하였다. 벨하우젠의 기교를 풍자하면서 그는, A자료와 B자료를 나누고 그 둘이 두 아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일치하며, 그 중 한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의 몫을 받아 방탕한 생활을 함으로써 극빈에 빠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A만이 형님과 동생으로 나누며 B는 그들의 나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다. A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 간청을 하여 유산을 받으며 여전히 그 나머지는 아버지가 갖고 있다. B에 따르면 그 아버지는 유산을 먼저 자기 뜻대로 나누어준다. A는 탕자가 아버지의 이웃에 살았으며 방탕한 생활로 빈궁에 빠졌다고 말한다. B에서는 그가 먼 나라로 가서 모든 재산을 써버리지만 어떤 방탕에 빠진 것 같지는 않다. 그린은 드라이버(S.R. Driver)가 한 그대로 따랐으며 A와 B의 특징적 단어들을 골라내고 또 서투른 편집자가 잘못된 장소에 이것들을 집어넣은 것을 지적함으로 끝을 맺는다. 벨하우젠 학파의 방법론을 철저히 통달하고 그는 마치 그 조합의 인준 멤버가 된 것처럼 그의 재료들을 다루면서 그것의 인위성을 드러내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