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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개론 - 제5장 구약성경의 정경

은바리라이프 2012. 2. 13. 16:49

구약개론 - 제5장 구약성경의 정경  


제5장 구약성경의 정경


캐논(canon)이란 똑바른 막대기, 혹은 잣대를 뜻한다. 히브리어 성경에 있어서 유대인들이 정경으로 여겨진 것이 39권이다. 로마교에서는 외경(Apocrypha)을 14권 추가하였다. 이것이 우리에게 문제를 야기시킨다. 구약성경 안에 있는 여러 책들이 언제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하여 정경으로 여겨져 수납되었는가? 먼저 우리는 히브리어 정경에 대하여 삼 구분(율법서, 선지서, 기록)하는데 대해 설명을 듣기로 한다.


1. 히브리어 정경의 구분

헬라어 역본(LXX)의 편집자는 제목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① 율법책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② 역사책 :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역대기 상하, 에스드라서 1,2(첫 권은 외경이고 뒤에 것은 정경 에스라서이다), 느혜미야서, 토비스서, 유딧서, 에스더서.

③ 시가서와 지혜서 :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솔로몬의 지혜서, 시락의 지혜서.

④ 선지서 : 소선지서 ― 호세아서, 아모스서, 미가서, 요엘서, 오바댜서, 요나서, 나훔서, 하박국 서, 스바냐서, 학개서, 스가랴서, 말라기서.

대선지서 ―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바룩서, 애가서, 예레미야의 편지, 에스겔서, 다 니엘서(수산나, 벨과 용, 세 거룩한 아이들의 노래를 포함함).

⑤ 보충적인 역사서 : 마카비 1,2서

맛소라 텍스트에 있는 각 권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⑴ 율법서(혹은 오경)

⑵ 선지서(Nebi’īm) : 전선지서― 여호수아서,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상하 ; 후 선지서(혹은 대선지서) ―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그리고 영어성경에 있는 순서와 같이 12개의 소선지서가 있다.

⑶ 기록들(Kethūbim, 헬라어로는 Hagiographa<거룩한 글들>) : 시가와 지혜서―시편, 잠언, 욥기 (그러나 레닌그라드 사본은 시편, 욥기, 잠언의 순서로 되어 있다)

⑷ 두루마리 혹은 매길로트(Megilloth) : 아가서, 룻기, 애가서, 전도서, 에스더서(그러나 레닌그 라드에서는 룻기, 아가서, 전도서, 애가서, 에스더서 순으로 되어 있다).

⑸ 역사서 : 다니엘서, 에스라서, 느헤미야서, 역대기 상하.

그러나 꼭 언급되어야 할 사실은 MT를 구성하고 있는 각 권들의 순서는 후대의 분류법을 따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는 기독교 변증가들이 구약성경에 호소할 때 더 편리하도록 하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초기의 구분법은 위에 제시한 39권과 동일한 내용을 갖고 있으나 24권으로 배열이 되었다. 즉, 사무엘 상하와 열왕기 상하, 역대기 상하들이 각각 한권으로 계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12권의 소선지서도 한 권으로 간주되고 에스라서와 느혜미야서도 하나의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A.D.1세기 말경에 책을 쓰면서 22권의 성경책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였다. 이것은 룻기를 사사기와, 그리고 예레미야 애가를 예레미야서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어쨌든 본질적으로 볼 때 39권이든, 24권이든, 22권이든 히브리어 정경에 기본적

구분은 동일한 것이다.


2. 안티레고메나

이 시점에서 안티레고메나(Antilegomena, 반대하여 말해진 책)로 불려지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가자. 미쉬나에 따르면 A.D. 2세기에 어떤 유대인들 사이에 아가서, 전도서, 에스더서의 정경성에 대해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어떤 사람들은 잠언에 대해서도 의심을 제기하였다. 게마라(Gemara)에 따르면 에스겔 역시 그 권위에 있어서 토론이 되었고 그 반대설은 A,D, 66년에 마무리 지워졌다. 샴마이의 제자들은 B.C. 1세기에 전도서의 정경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으나 힐렐학파에서는 강력하게 옹호했다고 한다.

에스겔에 관한 문제는 그 책의 마지막 10장에서 후일의 성전과 예배의식이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 사이에 상당한 불일치가 있다는데 있다. 그러나 그 차이들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니고 또 그것들이 스룹바벨이 세운 두 번째 성전이 아닌 아직도 미래의 성전에 속한 것이라는 반박이 있다. 어쨌던 엘리야가 땅에 다시 와서 이 모든 난제들을 믿는 자에게 풀어줄 것이 확실하게 기대되고 있었다.

잠언에 대한 반박은 몇 가지의 모순이 있는 개념들에 대한 것이다. 예로써 26:4-5에 있는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와 같은 것이다.


3. 맛소라 정경에 대한 고대의 증거들

이제 예루살렘에 요세푸스(A.D.37-95)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가 구약성경이 22권으로 구성된다는 것에 대해서 이미 앞에서 암시한 바가 있다. 그의 저서 『앞피온 반박』(Contra Apionem)에서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서로 상충되고 모순되는 수천 권의 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를 다 포함하는 오직 22권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들이 신적인 것임을 우리는 믿는다.” 모세의 책 다섯 권과 선지서 13권, 그리고 나머지 책(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인간의 바른 생활을 위한 교훈을 담은 것)을 언급한 후에 그는 아주 중대한 선언을 하였다. 요세푸스가 진술한 이 말에는 중요한 세 가지 사실이 담겨 있다.


⑴ 요세푸스는 맛소라 사본과 같은 분류방식으로 히브리어 성경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이 세 구분 속에 있는 정경의 총수를 22권으로 제한한다.

⑵ 정경은 크세르크스(B.C.464-424)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스가 통치한 이후에는 쓰여지지 않았다. 즉, 말라기 이후에는 쓰여지지 않았다.

⑶ 중간사 시대(B.C.425-A.D.90)까지는 정경 22권 안에 그 어떤 보충적인 자료도 포함되지 않았다. 합리적인 고등 비평가들은 마지막 두 가지 점은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요세푸스와 같은 오래 전의 저자가 제시한 증거에 대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다니엘서나 에스겔서, 아가서, 시편 중의 많은 것들이 말라기 이후에 쓰여진 것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그것들이 A.D. 1세기의 학식이 풍부한 유대인에게 알려지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만족할 만한 답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 요세푸스가 외경 자료들(에스드라 1서부터 마카비 1서까지)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진술을 비추어 볼 때 그가 그것을 단순한 역사적인 자료로서 사용한 것이지 신적으로 영감 있는 책으로 다루고 있지 않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3세기에 오리겐(254년에 죽음)은 구약성경이 22권으로 구성되었음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는데, 그것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 <6:25>)에 있다. 이것은 요세푸스와 맛소라 사본이 22권으로 분류한 것과 동일한 목록이다. 단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예레미야 서신을 포함한 것인데, 아마 그것이 히브리어로 기록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렇게 한 것이다. 오리겐과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터툴리안(A.D.160-250)은 현존하고 있는 책을 남긴 라틴 교부들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사람이다. 그는 정경이 24권으로 구성된다고 언급하였다. 포이티어 힐라리(Hilary of Poitiers)는 22권으로 계산하고 있다. 제롬은(A.D.340-420) 『갈레아우스 서문』에서와 또 다른 곳에서 오직 22권만이 히브리어로 되어 있으며, 외경들은 2차적인 위치에 놓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 외경의 정경성 문제

로마 교회와 헬라 정교회가 14권으로 된 외경의 정경성을 주장할 뿐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개신교 신학자들도 알렉산드리아 정경이 소위 팔레스틴의 정경으로 불려지는 것과(22권 또는 39권) 동일한 권위를 가진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가진 증거를 살펴볼 때 이 주장을 조심스럽게 검토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외경을 두둔하는 자들은 LXX 안에 있는 외경이 14권의 외경을 포함한 알렉산드리아 정경의 존재를 시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LXX에 있는 모든 책들이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에 의해서 조차 정경적인 것으로 여겨졌는지는 결코 확증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것과 정 반대되는 증거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1세기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종 그는 “팔레스틴 성경”에서 인용하지만 외경에서는 한번도 한 적이 없다. 이것은 만약 우연히 어떤 알렉산드리아 유대인이 이 알렉산드리아 정경을 받아들이는데,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대형의 알렉산드리아 정경 이론과 일치될 수가 없다.


둘째로 아퀼라의 헬라어 역본에 외경을 포함하고 있지 않지만 A.D.2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신빙성이 있는 사실이다. 유추해서 말하자면,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편집할 때 제롬처럼 정경적이라고 여기는 것 뿐 아니라 진리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까지도 그들의 구약성경 판에 포함하도록 작정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 가정을 뒷받침해 주는 또다른 근거가 최근 쿰란 동굴4에서 발견되어졌다. 팔레스타인의 심장부인 그곳에서는 팔레스타인 정경이 권위 있는 것으로 확실히 받아들여졌는 데도 두 개의 외경서, 즉 시락의 지혜서와 토비트서가 발견되었다.


종종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70인역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종종 호소하는 학자들이 있다. 달리 말하자면, 70인역이 외경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신약의 사도들이 그 때 편집되어 있던 모든 LXX의 권위를 다 인정했었다는 말이 된다. 또한 팔레스타인 정경 외의 작품들에 대해 호소하는 학자들이 있다. 윌더보어(Wildeboer)와 토리(Torrey)는 단지 추정적인 것들 몇 개를 포함하여 외경들을 인용한 것이나, 암시하는 모든 가능한 것들을 모아보았다.


외경을 두둔하는 두 번째의 주된 논거는 교부들이 이 책들을 권위 있는 것으로 인용했다는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초대교회의 몇몇 저술가들이 그랬던 같이 보인다. 그러나 또다른 사람들은 아주 명백하게 그것들의 정경성을 반대하고 있다. 지지하는 편에 있는 사람들을 들자면 클레멘트 1서와 바나바 서신의 자자와 그리고 제롬보다 나이가 좀 적은 동시대인이었던 히포의 어거스틴이 유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주장이 단지 표면적이며, 혹은 추정적이라고 수정해서 말해 주어야 한다.


어거스틴이 애매하게 외경을 두둔하고 있는 태도와 대조를 이루는 사람이 아다나시우스(Athanasis, 350년에 소천)이다. 그는 삼위일체 교리를 세우는데 챔피언이었음을 동서 교회가 다 인정한다. 그의 제 99번째 서신에서 그는 “교회에서 수납된 특정 책들과 그 수에 대해”토론을 한다. 제 4항에서 그는 “구약성경은 22권으로 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그 책들을 열거해 간다. 그것은 맛소라 있는 것과 동일한 책들이고 개신교 성경에 있는 것과 거의 순서가 일치하고 있다. 6,7항에서 그는 성경 외의 책들(외경 14권)다루면서 그것들은 “정경에 포함도지 않았으나”단지 “읽도록 지정되었다”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방교회는 외경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콘스탄틴노플에서 692년에 열렸던 제2차 트룰란총회) 서방교회와 일치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권 중 어떤 것에 대해 의심을 가진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헬라 교회에서는 1672년에 예루살렘에 모여 외경 중 4권을 정경으로 줄이게 되었다(지혜서, 시락의 지혜서, 유딧서, 유딧).


5. 정경성의 기준

먼저 최근에 제시된 몇 가지의 부적한한 기준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① 아이히혼(J.G. Eichhorn, 1780)은 세월이 정경성을 시험해 준다고 생각하였다. 말라기서 이후에 쓰여진 모든 책들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 이론은 권위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않던 야살의 책(수 10:13, 삼하 1:18)과 여호와의 전쟁기(민 21:14)와 같은 수 많은 고대의 작품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② 힛지히(F. Hitzig, 약 1850)는 히브리어를 유대인의 정경기준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락의 지혜서, 마카비 1서가 비록 히브리어로 쓰여졌는 데도 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또한 이것은 다니엘서와 에스라서에 있는 아람어 부분들을 어떻게 받을 것이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 준다.

③ 윌더보어(G. Wildeboer)는 토라와 닮은 것을 후대 책들의 정경성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후에 그는 이것을 무효화시키는 다른 기준들을 많이 소개하였다. ⒜ 정경은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쓰여져야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 고대역사를 다루든지(룻기나 역대기같이), 혹은 ⒞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을 말해 주어야 한다(에스라서, 느헤미야서). 혹은 ⒟ 고대의 유명했던 사람, 즉 솔로몬, 사무엘, 다니엘 혹은(아마) 욥과 같은 사람이 쓴 것으로 되어야 한다. 혹은 ⒠ 국민과 서기관의 감정에 완전히 일치해야 한다(에스더). 이 시험의 기준들은 우리를 당혹케 한다. 윌더보어의 원래의 기준을 생각해 볼 때 어덯게 나단 선지자의 말씀(대하 9:29), 이사야가 쓴 웃시야의 행적(대하 26:22), 혹은 예레미야의 요시야 애가(대하 35:25)가 토라에 일치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정경성의 문제에 대해 어떤 다른 타당한 기준을 기대할 수 없음을 지적해야 한다. 만약 정경성이 자유주의 학자들이 의심없이 가정하는 것처럼(로마 교회도 “교회는 성경의 어머니이다”라는 자가모순의 주장에서 이것을 암시하고 있다) 어떤 인간의 결정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면 어느 것이 권위가 있어 받아들이고 어느 것이 없어 배척해야 함을 결정할 수 있는 기계적인 시험과정을 만들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계시의 주도권을 가지시고 인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계시를 영감하여 기록하고 만들었다고 하면 우리는 그 영감된 책 속에 정경성이 내제하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 뿐일 것이다. 어린 아이가 다른 수 많은 성인들로부터 자신의 부모를 구렵해낼 때 그는 어떤 새로운 부모상을 투사해 넣지 않고 이미 존재하고 있던 그 관계를 단지 인정할 뿐이다.


6. 정경의 기원에 대한 자유주의 이론

성경이 스스로 증거하고 있는대로 그것을 하나님의 영감된 계시로 생각하지 않는 자들은 이 책의 기원에 대한 좀더 합리적이고 납득이 갈 만한 설명을 찾아보려고 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구약정경을 셋으로 나눈 것(예: 토라, 선지서, 그리고 케투빔 등 제서)을 여러 책들이 편집되어 가던 세 가지의 각각 단절된 과정의 경과로 본다. 즉, 토라는 B.C. 850년에서 모여지기 시작하여(최초로 기록된 문서), 750년과 650년 사이에 있었던 후대의 문서를 결합하여 요시야의 종교개혁 때 신명기가 오경 가운데서는 정경성을 공인받은 첫 단위가 되어 왕과 백성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왕하 23:장). 바벨론 포로 시대에(587-539년) 예식과 제사 부분이 에스겔의 영향을 받은 레위족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어 그들의 활동이 에스라 시대까지 내려오게 되었다(에스라도 그 일원이었다). (느헤미야 8:1-8은 모드 토라를 “모세의 율법책”으로 여기고 처음으로 회중 앞에서 읽은 기사가 나타난다. 그 “모세의 율법책”이란 것은 일부가 방금 완성된 것이며 대부분의 것은 모세가 죽은지 최소한 500년이 지난 후에 쓰여진 것이다). 어쨌든 에스라의 청중들은 이 혼합되고 위조된 다섯권의 책들을 정말로 모세가 직접 쓰고 또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것으로 믿게 되었다.


두 번째 부분인 선지서는 B.C. 300-200년 사이에 권위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점점 집대성이 되게 되었다. 그 이전일 수가 없는 이유는(고등비평 이론을 따를 것 같으면) 이사야서, 요엘서, 스가랴서, 그리고 몇몇 다른 선지서 어떤 부분들이 B.C. 3세기까지 기록이 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둠(Duhm)과 같은 학자는 이사야서의 어떤 부분이 B.C. 2 세기, 혹은 1세기까지 기록이 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두 번째 부분은 알려지지 않은 상황 하에,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대충 B.C. 200년이라 알려지지 않은 때에 정경적 위치를 획득하게 되었다.


케투빔은 선지서 들을 수집하기 시작할 때까지 모아지지 낳았을 뿐 아니라 대부분이 쓰여지지 않았다. 문서 비평에 따르면 다니엘서는 B.C. 168년 경에 편집이 되었기 때문에 케투빔은 B.C. 150년까지는 거두어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최소한 이 30년이 지나야 정경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 번째 부분을 일차적으로 혹은 잠정적으로 정경화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B.C. 150년 내지 100년 경이었지만 최종적인 인준은 A.D. 90년 잠니아 회의까지 연기되었다. 이상이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계에서 제시하고 있는 정경의 형성 이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