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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다시 왔소?

은바리라이프 2012. 2. 6. 16:24


대체 왜 다시 왔소?  신약읽기 

2012/01/29 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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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절-28절 :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기도란 무엇일까? 욕망의 배출구일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알라딘의 요술 램프에 나오는 거인보다 약간 레벨이 떨어지는 그런 분은 아닐까? 왜? 램프의 거인은 나의 욕망을 즉각 실현시켜 주어서다. 그렇다면 오늘날 하나님은 어디 계실까? 바로 내 지갑 안에 계신다. 돈이 곧 전지전능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때다. 가나안 여자가 미친 듯 소리를 질렀다. 왜? 그녀에게는 예수만 보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하여 체면이고 뭐고 없다. 그녀가 외친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귀신들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동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냉대한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왔다.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 이에 여자가 하는 말이 바로 앞서 읽은 구절이다. 

‘나’라면 어땠을까? 가나안 여자에 나를 대입해 본다. 전적으로 예수님만 의지했을까? ‘개’라는 말로 한 번 내치는 예수님. 그 말에 ‘무슨 예수가 저래?’ 하며 나가떨어지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가나안 여인처럼 끝까지 예수님만 부여잡았을까? 과연 그녀와 같은 믿음이 내게도 있을까?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도 많은 이적을 행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곳에서 어떤 일을 행했는지 성경은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두로와 시돈에 들어가기 전에 만났던 가나안 여인의 일만을 기록했다. 왜 그랬을까? 

이후 예수님은 ‘거기를 떠나서’ 갈릴리 호숫가에 위치한 산에 올라가 앉았다. 언제나 그렇듯 큰 무리가 에워쌌다. 그 면면을 들여다보자. 절뚝발이, 불구자, 소경, 벙어리, 기타 등등. 물론 ‘기타 등등’ 또한 절뚝발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부류였을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이다. ‘나’라면 어땠을까? 과연 예수님을 만나러 갔을까? 가서 구경꾼 노릇을 하지는 않았을까? 왜? 나는 절뚝발이도 불구자도 소경도 벙어리도 기타 등등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내 욕망을 실현시켜 줄 인물이 아니다. 하여 나는 예수님을 만나러 가지 않았을 것만 같다. 예수님은 돈을 벌게 해 줄 그런 인물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떨까? 

신학자 정승우가 쓴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에서 인용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구절을 재인용해 본다.

신의 이름으로 종교 재판이 잔인하게 자행되던 16세기 스페인의 세비야 광장에 돌연 그리스도가 나타난다. 예수는 1600년 전에 갈릴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랑 가득한 손길로 군중을 축복하고 병자를 치유하고 심지어는 죽은 여자 아이를 살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교회 당국자들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한다. 교회의 권위를 무시한 예수의 행동은 자칫 교권의 위계 질서를 해치는 행동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600년 전 예루살렘에서 선고되었던 것과 비슷한 죄목으로 예수는 다시 교회 당국자들에게 체포된다. 그 날 밤, 감옥에 갇힌 예수에게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늙은 종교 심문관이 은밀히 찾아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요? 아니, 그리스도든 아니든 상관없소. 어차피 나는 내일 당신을 이단자로 정죄해서 화형에 처할 작정이니까. 오늘 당신의 발에 입을 맞춘 바로 그자들이 내일이면 내가 손가락만 까딱해도 앞을 다투어 당신의 화형틀에 나뭇가지를 던질 것이오. 대체 왜 다시 왔소? 당신은 모든 권한을 교회에 일임하지 않았소? 우리는 당신이 이미 이전에 말한 것으로 족하오. 이제 다시 새로운 말을 덧붙일 권한이 당신에게는 없는 거요.”

‘대체 왜 다시 왔소?’ 이 말이 그저 늙은 종교 심문관의 말에 불과할까? 나는 이 말을 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착각하지 말자. 내 기도가 나를 위한 기도인가? 주님을 위한 기도인가? 교회라고 예외일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교회인가? 교회의 영광을 위한 교회인가? 오늘날 교회는 충분히 세속화되었다. 해서 나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예수여! 그 치유의 능력으로 우리 돈 좀 버는 게 어떻겠소?” 자본 증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예수, 나는 싫소. 이게 오늘날 교회의 실상 아닐까? ‘교회여! 자본을 뒤엎을 용기가 있는가?’ 다소 엉뚱하고 과격한 이 발언에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 충분히 자본화된 교회권력 앞에서 예수님만 바라보았을 가나안 여인의 시선을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