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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tory] 세계적 작가 제프리 디버, 이언 플레밍의 뒤를 잇다

은바리라이프 2011. 6. 11. 12:26

[j Story] 세계적 작가 제프리 디버, 이언 플레밍의 뒤를 잇다

[중앙일보] 입력 2011.06.11 01:30 / 수정 2011.06.11 01:30

아시아 언론 첫 단독 인터뷰
007 신작 『카르트 블랑슈』 펴낸 제프리 디버
‘내가 그린 21세기의 스파이, 제임스 본드’
“사람들 영화 속 본드만 생각 … 그걸 깨부쉈다”
“ 21세기 제임스 본드 정신적 영웅으로 그렸다 ”

1922년생. 키 1m80㎝. 30대 중반. 영국 비밀정보부 소속 스파이. 주변엔 항상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 ‘젓지 않고 흔든’ 마티니를 즐긴다. 이름을 반복해 말하는 습관이 있다. “내 이름은 본드, 제임스 본드-.” 20세기가 낳은 전설적인 스파이 제임스 본드. 45년간 22편의 007 영화가 나왔고 세계 인구 3분의 1인 20억 명이 관람했다. 성공한 시리즈의 밑바탕엔 튼튼한 원작이 있었다. 영국 작가 이언 플레밍(1908~1964)은 『카지노 로열』(1953년)을 시작으로 이 매력적인 스파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소설은 전 세계 1억 권 이상 팔렸다. 플레밍 사후 몇몇 작가가 도전했던 소설 007. 이번엔 『본 컬렉터』로 유명한 미국 작가 제프리 디버(61)가 시리즈를 이어받아 21세기형 제임스 본드를 탄생시켰다. 본드는 ‘살인 면허’를 넘어서는 무한 권력인 ‘카르트 블랑슈(백지 위임장)’를 손에 쥐었다. 이언 플레밍의 생일을 앞둔 지난달 25, 26일 런던에서 『카르트 블랑슈』 출간 이벤트가 열렸다. 사보이 호텔에서 작가를 만났다.

런던=이경희 기자

●007 시리즈는 어떻게 쓰게 됐나요.

이언 플레밍의 뒤를 이어 ‘007 시리즈’ 바통을 이어받은 미국 스릴러 작가 제프리 디버가 지난달 25일 영국 런던의 세인트 판크라스 역에서 『카르트 블랑슈』 출간을 기념해 모델 체스카 마일스와 모터바이크에 앉았다. [런던 로이터=연합뉴스]

 “5년 전에 쓴 『짐승들의 정원(Garden of Beasts)』으로 ‘이언 플레밍 스틸 대거상’(가장 뛰어난 스릴러 소설에 주는 상)을 받았죠. 수상 소감에서 이언 플레밍이 내 어린 시절 글쓰기에 큰 영향을 미쳤기에, 이 상을 받은 것이 가장 영광스럽다고 밝혔어요. 그 덕인지 이언 플레밍 재단에서 1년8개월 뒤 집필을 의뢰하더군요.”

●본드 소설이 어린 시절에 어떻게 영향을 줬는지.

 “제가 여덟 살 때 아버지의 책을 읽었는데, 표지에 제임스 본드가 그려져 있었죠. 선악의 대결, 권선징악이란 명료하고 심플한 구도가 좋았어요. 결말은 정말 신났고요. 주인공이 여자랑 뽀뽀하는 장면은 그 당시엔 싫어했어요. 나이가 좀 더 들어 다시 읽었지만요. 처음 소설을 쓴 게 열한 살 땐데, 주인공이 영국 비밀요원이었어요. 아마 본드가 제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겠죠. 본드는 언제나 영웅의 원형이었어요.”

●하지만 『본 컬렉터』의 주인공 링컨 라임은 제임스 본드와 완전히 다른 캐릭터인데요. 링컨 라임은 전신마비 환자인 전직 뉴욕 경찰 과학수사국장으로 침대에 누워 범죄를 해결하죠.

 “맞아요. 하지만 둘은 공통점이 있어요. 본드는 링컨 라임처럼 독립심이 강하고, 멍청함이나 실수를 용납하지 않고, 매우 헌신적으로 일하고, 애국자인 데다 약간 삐딱한 유머 감각이 있거든요. 저는 본드라는 인물을 원작에서 꺼내 제 스타일의 소설에 넣었어요.”

●링컨 라임 같은 독특한 인물을 만든 배경은요.

 “저는 새로운 셜록 홈스를 만들고 싶었어요. 악당을 과하다 싶게 때려 부수거나 무술을 할 줄 아는 영웅이 아닌 인물이오. 명석한 정신만을 가진, 몸이 없는 인물. 그래서 오직 정신만으로 악당과 싸우는 인물을 만들고 싶었죠. 우리 모두 신체적으로는 어딘가 부족해요. 그러나 인간은 육체로 존재하기 전에 하나의 정신으로 존재하죠.”

●007 시리즈의 매력은 뭘까요.

 “작가의 의무는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내릴 지하철역을 놓치게 만들어야 하는 거예요. 이언 플레밍은 그렇게 독자가 책에 푹 빠지게 했죠. 그리고 그는 책을 정말 딱 필요한 만큼만 썼어요. 불필요한 정보를 지울 줄 알았죠. 본드걸이나 본드 그 자체, 그 유명한 ‘젓지 말고 흔든 마티니’ 같은 술에 대한 세부적인 정보 등도 독자를 즐겁게 하고요. 이언 플레밍의 철학이란 ‘독자에게 즐거움을 줘야 한다’인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독자는 제 책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저는 그만큼의 즐거움을 돌려줄 의무가 있어요. 독자를 위해 이런저런 장치와 반전을 준비하죠. 꼭 마술사가 되는 기분이랍니다.”

●시리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요.

 “『러시아에서 온 사랑(From Russia with Love)』이오. 아마 제가 ‘내가 세상을 지배할 거야. 핵폭탄을 훔쳐서 서울이나 뉴욕이나 런던에 터뜨릴 거야’라는 식의 악당에게 약간 물렸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는 건 좀 더 작은 종류의 악이에요. 『러시아에서 온 사랑』을 보면 악당들의 목적은 그저 본드를 죽여서 영국 정부를 모욕하는 거였죠. 이런 게 진짜 위협이죠. 그래야 더 와 닿는 것 같아요.”

●가장 좋아하는 007 영화는요.

 “책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 온 사랑’이에요. 작품에서는 본드보다는 나쁜 놈들, 암살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져요. 본드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죠. 당시로서는 상당히 혁신적인 작품이었어요. 그리고 이언 플레밍은 암살자인 레드 그랜트의 심리 연구를 정말 탁월하게 해내죠. 영화가 좋았던 이유는 이러한 원작에 충실했기 때문이에요.”

●영화와 소설의 본드는 좀 다르죠.

 “사람들 머릿속에는 영화 속 본드의 이미지로 가득하죠. 저는 이언 플레밍의 원작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원작의 본드는 굉장히 복잡한 인물이고, 고민도 많이 해요. 아널드 슈워제네거나 멜 깁슨 등이 나오는 전형적인 영화들을 보면 주인공이 나쁜 놈을 죽인 다음에 이상한 말장난 같은 걸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잖아요. 세상에, 방금 사람이 하나 죽었는데 말이에요! 어쨌든 한 사람이 죽었다면, 그로 인한 감정적 여파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예컨대 『골드핑거(Goldfinger)』에서 본드는 자신을 살해하려는 누군가를 본능적으로 죽이게 되는데, 그 죽음이 소설 내내 본드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요. 이언 플레밍은 우리가 실제 상황에서 어떻게 느꼈을지 그려냈어요. 저도 그런 면들을 이번 책에서 보여 주고 싶었어요.”

●본드의 소설에선 여성을 비하하는 듯한 표현도 있었는데요. 가령 『골드핑거』에선 여성 성기를 가리키는 속어인 푸시(pussy)가 여성 캐릭터의 이름으로 쓰였죠.

 “본드의 언행 중에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들이 분명 있어요. 하지만 원작에선 여성이 단순히 성적 대상인 것만은 아니었어요. 같은 맥락에서 본드는 소수자를 존중하기도 했어요. 이언 플레밍은 195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선구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줘요. 본드의 동료가 게이를 폄하하는 발언을 하자 본드가 그 동료를 후려치는 거죠. 정말 통찰력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새 제임스 본드를 만들며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제임스 본드를 오늘날에 맞는 인물로 재탄생시키는 거였어요. 원조 제임스 본드는 담배를 많이 피웠어요. 하지만 저는 본드가 담배를 끊은 것으로 설정했어요. 오늘날 스파이로 활동하려면 담배를 끊을 필요가 있어요. 이제는 과학 수사가 발달해 담뱃재를 남기면 추적당하기 쉽고, 어느 회사의 어느 담배인지 알아낼 수 있고, 담배를 어디서 구매했는지도 알 수 있죠. 담배꽁초에 묻은 DNA를 추적할 수 있는 건 물론이고요. 저는 본드를 매우 영리한 사람으로 그려내고 싶었어요. 말하자면 그를 육체적인 영웅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영웅으로 표현하고 싶었죠. 링컨 라임과 마찬가지로요.”

●본드걸도 많이 바뀐 듯하네요.

 “저는 정말 본드걸들을 사랑해요. 영화가 아닌 원작에서의 여성들은 사실 꽤 강인한 인물들이에요. 몇몇은 킬러고 몇몇은 비밀요원이고, 어떤 본드걸은 본드가 유혹하려 하면 ‘싫어요’라고 말하죠. 본드걸들은 주체적으로 사고할 줄 알았어요. 물론 시대적인 한계는 있었지만요. 제 소설에는 본드걸이랄 수 있는 세 여성이 등장해요. 명석한 비밀요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찰서장, NGO의 수장이죠. 이들은 여성적 매력을 갖춘 동시에 뛰어난 전문가이기도 해요. 현대 여성들이 그런 것처럼요.”

●악당들도 21세기적인데요.

 “현실 같지 않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악당이 등장하는 안 좋은 영화를 우린 너무나 많이 봐왔잖아요? 제 소설의 악당 세브란 하이트는 재활용 사업을 하죠. 누가 악당이 재활용 사업을 한다고 생각이나 하겠어요? 재활용은 좋은 거잖아요, 그렇죠? 글쎄, 하지만 누가 알겠어요? 바로 그런 걸 그려내고 싶었어요. 독자가 무언가를 예상하면 그 예상을 산산조각 내는 거죠.”

●21세기 본드는 스마트폰의 특수 앱을 사용하더군요.

 “맞아요. 약간의 유머가 섞인 최신 기술이 필요하죠. 본드 식의 장비를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영화에서만큼 엄청난 장비를 등장시키는 건 아니에요.”

●본드카로 벤틀리(신형 콘티넨털 GT)를 선택한 이유는요.

 “본드가 영화에선 애스턴 마틴을 몰지만, 원작에선 벤틀리를 몰아요. 저는 원작의 본드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물론 어마어마하게 비싸요. 22만 달러인데 제가 처음 샀던 집보다 비싸요!”

●작품마다 엄청난 지식과 정보가 담겨 있는데, 어떻게 조사하시는지.

 “책 한 권 쓰는 데 보통 1년이 걸리는데, 그중 7~8개월은 자료 조사하고 개요를 짜는 데 투자해요. 스파이들이 어떤 특수 장비를 사용하는지, 어떻게 지문을 감식하는지, 어떻게 소통하는지 등을 알아나가는 게 정말 재미있었어요. 자료 수집은 인터넷이나 책으로 해요. 가끔 인터뷰도 하죠. 이번엔 CIA와 FBI 요원을 만났어요. 하지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면 거기 영향을 받아서 내가 하려던 이야기를 잊어버리곤 해요. 그래서 인터뷰보다는 자료 조사를 선호하죠. 수집한 지식을 남용하지 않고 꼭 필요한 만큼만 이야기에 넣는 게 비법이죠.”

●분단 국가인 한국이야말로 제임스 본드가 필요할 것 같은데.

 “그렇죠. 분명 김정일은 남쪽에 스파이를 보낼 거고, 한국도 아마 그러겠죠. 미디어를 통해 북한 사람들의 실상을 접하곤 마음이 아팠어요. 북한 정권은 실패한 독재의 명맥만 이어가고 있을 뿐이에요. 날것 그대로의 공산주의는 잘될 수가 없어요. 남한이 주도하는 남북 통일이 이뤄졌으면 해요. 보통의 미국인들이 이렇게 생각하죠.”


비극으로 끝난 본드의 첫사랑 『카지노 로열』 … 본드걸 눈으로 본 『나를 사랑한 스파이』

우리나라에서도 007 영화는 만만찮게 히트했다. 그러나 책은 거의 번역되지 않았다. 웅진의 문학브랜드 ‘뿔’은 『카르트 블랑슈』와 함께 이언 플레밍의 원작을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로 출간한다. 1차분 4권이 먼저 나왔다. 영화와는 좀 다른 007 초기 문학을 소개한다.

『카지노 로열』

007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 ‘007’이란 번호를 받기 전, MI6(영국 비밀정보부) 요원으로 활약하던 초창기 모습을 보여준다. 본드는 도박에 빠진 소련 첩보원 르쉬프르를 무력화하기 위해 바카라 게임에서 판돈을 휩쓸어야 한다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본드는 여성 요원 베스퍼 린드와 사랑에 빠지면서 청혼을 결심한다. 그러나 첫사랑은 비극적 종말로 치닫는다. 본드의 여성편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가장 많이 팔린 원작이자, 가장 성공한 007 영화이기도 하다.

『죽느냐 사느냐』

007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본드가 살인면허 ‘00’ 번호를 받고 본격적으로 활약한다. 미국 경제를 파탄 내려는 범죄조직을 일망타진하는 이야기. 아이티의 민속신앙인 부두교를 배경으로 해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1973년 8번째 007 영화로 제작됐다. 영화도 소설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이어받아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소품으로 쓰인 타로 카드의 판화를 만들었고, 주제곡은 폴 매카트니가 불렀다.

『나를 사랑한 스파이』

이 소설의 화자는 독특하게도 여주인공 비비안 미셸이다. 여성의 눈에 비친 본드의 남성적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으로, 일종의 007 번외 편이 되겠다. 미셸은 본드를 이렇게 묘사한다. “어두운 곳에서 봐도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하얗게 도드라져 보이는 왼쪽 뺨의 흉터 때문인지 잔인해 보이기도 했다.”

 1977년 11번째 007 영화로 제작됐다. 영화는 핵전쟁을 일으킨 뒤 해저 왕국을 세우려는 악당에 맞서 싸우는 제임스 본드를 그렸다. 소설에선 제목만 따온 셈이다.

『퀀텀 오브 솔러스』

단편 전집. 단편 ‘퀀텀 오브 솔러스’는 1959년 발표됐다. 이 작품에서 제임스 본드는 주인공이 아닌 청자(聽者)다. 본드는 식민지 관저에서 한 고위 공무원과 그를 배신한 한 여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본드는 행동하기 전에 먼저 분석하는 지적인 인물이자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죽음의 가치를 고뇌하는 인간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22번째 007 영화 ‘퀀텀 오브 솔러스’는 6대 제임스 본드 대니얼 크레이그가 ‘퀀텀’이란 수수께끼의 거대 조직을 물리치는 액션 블록버스터였다.


j 칵테일 >> ‘젓지 않고 흔든다’ … 본드 새 칵테일 ‘카르트

제임스 본드는 술을 사랑했다. 이언 플레밍은 처녀작 『카지노 로열』에서 ‘베스퍼 마티니’라는 제임스 본드 칵테일을 선보였다. 진, 보드카, 키나 릴레이(Kina Lillet)를 3:1:1/2 비율로 섞은 것이다. ‘젓지 않고 흔든(shaken no stirred)’ 본드식 보드카 마티니도 유명하다.

 제프리 디버와 인터뷰한 런던 사보이 호텔의 ‘더 아메리칸 바’는 이언 플레밍의 단골 술집이었다고 한다. 바텐더가 목이 긴 잔에 음료를 따르는 순간 연기가 피어 올랐다. 최신 제임스 본드 칵테일, ‘카르트 블랑슈’였다.

 “크라운 로열(캐나다산 위스키), 얼음 넣어서 더블로, 트리플 섹을 반 정도 넣고, 앙고스투라 비터스 두 방울, 그리고 오렌지 껍질. 오렌지 자른 것 말고.”

 2011년형 본드가 창조한 레시피를 바탕으로 사보이 호텔이 만들어낸 이 쌉싸래한 칵테일에선 스모키한 향이 났다. 마치 방금 발사해 연기가 나는 총(smoking gun)을 연상시키는 듯했다. 이 칵테일 역시 ‘젓지 않고 흔드는’ 것이 권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