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어거스틴

어거스틴(Augustine,354-430,서방교회)-서구신학을 형성한 교부

은바리라이프 2010. 12. 23. 19:45

어거스틴(Augustine,354-430,서방교회)-서구신학을 형성한 교부

 

 



(1)초기생애

어거스틴은 북아프리카 타가스테(Tagaste)에서 출생하였다. 기독교 2천년 역사의 최대 신학자인 그가 흑인이었음은 놀라운 사실이다. 사실 초기 서방신학을 형성한 라틴신학의 교부 대부분은 북아프리카 출신 흑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사납고 방종한 생활을 했고 겨우 세례 받고 죽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경건한 기독교인이었다. 어릴 때 어거스틴은 신앙교훈을 잘 받아 드리는 듯 했으나 차츰 세속적 활동에 관심을 가지며, 기독교 신앙에 재미를 잃어버렸다. 어거스틴이 17세 되던 해에 카르타고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뛰어난 수사학적 웅변가로서의 자질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2)방탕한 삶과 영혼 만족 갈구(마니교-카르타고에서)

그러나 카르타고에서 도시의 충동과 젊음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여 수많은 여자들을 유혹한다. 어머니가 '제발 유부녀만은 손대지 말라'고 할 정도로 어거스틴은 육욕의 노예가 된다. 그는 자기 어머니의 훈계와 교훈을 잊고, 18세가 되었을 때 한 여자와 관계하여 그녀와 13년을 사는 동안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아데오다투스(Adeodatus)라 하였다. 어거스틴은 나중에 "나는 19살부터 28세까지 나 자신을 속이고 남을 유혹했다"고 고백하였다.

어거스틴은 이런 가운데서도 도덕적 생활과 삶의 본질적 문제에 늘 번민의 나날을 보낸다. 물론 육욕적인 본능은 언제나 그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였지만…. 그의 영은 죄를 뼈저리게 느껴 철학을 통하여 그 해결책을 찾아보려고 한다. 그래서 초기에는 시세로(Cicero)의 책을 통해 답을 구했으나 얻지 못하고, 성경을 읽어보았으나 영의 눈이 멀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진리라고 주장하는 마니교(Manicheism)에 심취하게 되었다. 이 마니교는 오랜 동안 기독교와 마지막까지 정면 충돌을 일으킨 가장 위험한 영지주의였다. 어거스틴은 9년간이나 마니교의 열렬한 옹호자요 전파자가 된다. 그러나 나중에 마니교의 허구성을 발견하고 떠났지만, 갈수록 마음은 혼란한 상태에 빠진다.


(3)심각한 죄책과 참된 진리 추구(신플라톤 철학-밀란에서)

어거스틴은 8년간 카르타고에서 수사학교사로 있다가 로마로 가서 성공해 보려고 결심한다. 그곳에서 자기 만족이나 확신을 줄 수 있는 철학사상을 찾다가 회의론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 안에서 진리를 찾을 수 없었다. 채 1년도 못되어 밀란으로 와서 황제의 문서 작성관과 국립수사학 학교의 교수직을 겸한 공채시험에 합격하여 출세의 길이 열린다. 그런데 여기서 위대한 암브로스 감독의 설교를 듣고 크게 감동을 받았으며, 차츰 진리의 빛이 영혼 속에 스며들었지만, 아직 확신에 서지 못했다.

이때 하나님만이 자신의 마음을 채워줄 수 있음을 깨닫고, 좀더 분명한 결의를 보이기 위해 13년간 동거하던 여인과 인연을 끊고, 더욱 진리를 향하여 나아간다. 이 시점에서 어거스틴은 신플라톤 사상에 매력을 느껴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진리란 물질계 이외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성경을 더욱 열심히 연구하는 가운데 기독교에서 최종적인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4)어거스틴의 회심(하나님의 말씀)
이제 성서의 매력과 권위는 어거스틴의 마음과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이때부터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 깊이 참회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이에 어거스틴은 가슴의 통증을 느껴 치료 차 친구의 별장에 갔는데,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여 절규했다
. "오, 나의 주여! 언제까지 하시려나이까? 언제까지 분노하시려나이까? 나의 젊은 날의 죄를 기억하지 말아 주시옵소서! 언제 분노를 거두시려나이까? 내일? 혹은 모래? 어찌 오늘에 거두시지 못하시나이까? 바로 이 시간에 분노를 거두시고 나의 부끄러움을 면케 하실 수 없겠나이까? ".

그가 정원을 거닐며 깊은 번뇌와 불안에 빠져 있을 때, 아이들의 동요소리가 들려왔다: "집어라!"(tole), "읽어라!"(lege) 그는 즉시 성경을 펴니 로마서 13:11-14의 말씀이 나타났다. 이 말씀을 다 읽고 났을 때 그는 변하여 새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밀란에서 386년 4월 25일 부활절 전날 밤에 세례를 받았다(33세). 회심에 관해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주님은 영원 전부터 계시면서도 오히려 새로운 분이신데, 나는 뒤늦게 그를 사랑했다. 그는 언제나 내 안에 계셨는데, 나는 다른 곳에서 주님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어거스틴의 수도생활과 히포의 감독

어거스틴은 세례를 받고 세속적 의미의 출세를 포기하고, 약혼도 파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조용히 수도적 공동체를 구성하여 명상과 수련의 날들을 보내기로 작정한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팔아 자기의 주택과 생활에 필요한 만큼만 남기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준다. 그는 여기서 자기 소유를 친구들과 함께 공동으로 사용했으며, 세상에서 은둔하며 오직 기도와 성경 연구와 명상에 세월을 보낸다. 그는 철저히 금욕생활을 하는데, 의식주는 검소했고 독신생활을 하였다.

391년 히포에 있는 수도원을 방문했다가 연로한 히포의 감독 발렐리우스의 천거로 보조사제로 지명되었다. 처음에는 극구 사양하며 조용히 문필생활을 하겠다고 하였으나 나중에 수락하고, 392년 부활절에 신부로 취임한다. 396년 발렐리우스가 죽자, 그후부터 430년 어거스틴이 죽을 때까지 35년간 히포의 감독으로 봉직하게 된다. 말년에 조국의 불운을 목도하며(반달족에 포위 당함) 우울하게 보내는데, 죽기 10일간은 은퇴하여 회개 시편을 읽으며 명상과 눈물의 기도로 시간을 보내고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그의 저서와 원고는 교회에 바친다.


*어거스틴의 신학논쟁-3가지 논쟁

①마니교 이단에 대항한 어거스틴의 신론(386-395년)

㉠마니교의 영지주의적 이원론에 입각한 선과 악의 분리를 배격하고 어거스틴은 일원론에 입각하여 하나님은 선하신 창조를 했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악은 선의 결핍 혹은 부족으로 설명하였다.
㉡마니교의 역사가 정해졌다고 믿는 '운명론' 혹은 '결정론'을 배격하고, 창조시에 선이나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졌다. 물론 타락 이후 죄짓는 자유만 남았지만. 어거스틴은 이것을 '갇혀진 자유의지'라 부른다.

②도나투스 이단에 대항한 어거스틴의 교회론(395-410년)

㉠어거스틴은 극단적 분리주의를 배격하고 성례전의 효력은 성례전을 집행하는 사람의 신앙과 도덕성에 달려있지 않고 성례전 그 자체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교회 안에는 양가 이리가, 알곡과 가라지가 모여 있으며, 이것을 구별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이런 교회를 '섞여 있는 교회'라 부른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느 특정교회를 보살피지 않으시고 이 지상의 모든 교회를 다스리신다는 '보편적 교회'를 주장하였다.

③펠라기우스 이단에 대항한 어거스틴의 은총론(410-430년)

㉠펠라기우스의 원죄를 부인하고 인간의 전적인 자유의지를 반박하여, 어거스틴은 인간의 전적 타락과 예정에 의한 불가항력적인 구원의 은총(구원 받을 자의 예정)과 하나님이 그들을 끝까지 보존하신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칼빈과 같은 이중 예정은 말하지 않았다.
㉡펠라기우스의 선택의 자유에 의한 인간 구원을 대항하여, 어거스틴은 구원의 전과정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보면서 '선행적 은총'과 '후속적 은총'을 구분하였다. 즉 선행적 은총에 의해서 사람은 죄를 미워하게 되고 교회로 이끌리며, 후속적 은총으로 죄의 사면을 받아 거룩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