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어거스틴

어거스틴의 신비주의 사상

은바리라이프 2010. 12. 23. 19:37

어거스틴의 신비주의 사상

 

 




Ⅰ. 서  론

  지난 20년 동안 기독교 영성의 연구와 실천에 대한 관심이 현저하게 회복되었고, 전통적
으로 영적 순례의 절정으로 이해되는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도 크게 증가했다. 기독교적이고
에큐메니칼한 관점에서 볼 때, 신비주의는 오늘날 중요한 관심의 주제이다. 기독교 안에는
처음부터 신비한 요소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이 분명한 신비주의의 전통으로 탄생한 것은 3
세기에 오리겐이 충분히 기획한 신비주의 이론이 4세기에 수도원주의라는 새로운 현상으로
제도화되면서 부터이다. 어거스틴은 기독교 내의 신비적 요소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인 저
자로서 그 이후의 거의 모든 서방 신비주의자들은 그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Cuthbert Butler
는 어거스틴을 "신비주의자들의 왕"이라고 하였고, John Burnaby는 어거스틴을 '기독교 신
비주의의 아버지'라고 하였다.

어거스틴의 신비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391년 이전에 저술된 어거스틴의 초기 논문들 중 일부가 중요하지만,

그의 논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는 Confessions이다. Confessions는 그가 감독이 된 직후 397년에서 401년 사이에 저술한 책이다. 그의 다섯 권의 주요 저서들 중에서 적어도 세 권이 그의 신비사상을 연구하는 데 중
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Homilies on the Psalms로서, 대략 391년부터 422년 사이에 일부
는 설교되고 일부는 구술된 것이다. 이 설교집은 어거스틴의 저서 중에서 가장 긴 것으로
가장 읽히지 않는 책이지만, 그의 신비주의 이해에는 반드시 필요한 책이다. 15권으로 이루
어진 The Trinity(399-422/426)는 어거스틴이 사변 신학에 주요한 공헌을 한 책인데, 그중
특히 8-15권에 있는 내용은 그의 신비 사상의 중요한 지류들을 형성한다.

  어거스틴의 신비주의의 특징은 관조적 신비주의, 그리스도의 중보와 은혜의 성령을 통한
신비주의, 정감적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 발제문에서는 어거스틴의 The Confessions,
The Teacher, 그리고 The Trinity와 기타 주요 저술을 중심으로 해서 어거스틴의 신비사상
을 분석요약, 정리할 것이며, 결론에 가서 평가할 것이다.


Ⅱ. 분석 요약


  1. 신비주의의 분류와 定義

  신비주의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종교적 신비주의와 세속적 신비주의가 있다. 신
비주의에 관한 대부분의 접근들은 신비주의를 종교의 양태로 다루고 있다. 반면에
Margharita Laski와 R. C. Zaehner 같은 사람들은 공저인 「성스러운 신비주의와 세속적인
신비주의(Mysticism Sacred and Profane)」에서 종교적 신비주의와 세속적 신비주의로 조
심스럽게 구분하고 있는데, 후자는 자연적인 신비주의로서 심미적 경험, 사랑과 자녀 출산
경험, 자기 변화 과정들 따위가 해당된다. 둘째, 종교적 신비주의 안에도 기독교 신비주의
와 이교의 신비주의가 있다. 그리고 셋째, 기독교 신비주의 안에도 협의의 신비주의가 있고
광의의 신비주의가 있다. 엑크하르트, 십자가의 성 요한 등이 전자에 속하고, 어거스틴 등은
후자에 속한다. Bernard McGinn은 신비주의를 광의로 해석하여 어거스틴을 신비주의자들
의 아버지라고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추구하는 것을 신비
주의라고 보았다.

  2. The Confessions에 나오는 신비 체험 : 영혼의 상승

  신비주의의 목표는 하나님과 인간, 무한하신 영과 유한한 인간의 영 사이의 특별한 만남
으로 이해될 수 있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은 신비적 사건으
로(Confessions, 5.6.10)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다고 하였으며(1.1.1) 이러한 영적인
경험은 인간의 기억 등 인간의 본성을 초월하는 것이며(10.17.26) "육신의 감관을 통하여 다
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10.21.30). 이러한 점에서 어거스틴 회심은 신
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비적 체험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과의 연합―하나님과
의 만남, 하나님의 임재 체험 등으로 말할 수도 있겠다―이라 할 수 있는데, 그의 고백록을
읽어 보면 도처에 그의 신비적이고도 영적인 경험이 묘사되고 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향해 상승하는 영혼의 순례이다.

  제1권에서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위한 존재로 창
조하셨기에 주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기까지 우리의 마음은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
다"(1.1.1).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지 않고는, 또한 내가 주님 안에 거하지 않고는 결코 나
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1.2.2). 이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갈망하는 어거스틴의 마음을 잘 표
현해 주고 있다. 제7권에서 어거스틴은 386년 그가 회심하기 전에 밀란에서 자신이 플라톤
주의자들의 글들을 읽으면서 체험한 영혼의 상승과 신적 비전을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세
단계로 설명되는데, 세상 즉 감각적 물질적 세계로부터 물러서서, 내적 자아에로 돌아오는
움직임에 뒤이어, 그 영혼의 위로 상승하여 하나님의 존재에의 비전으로 향하게 된다. 여기
서 어거스틴은 불변적인 빛, 진리 자체를 무매개적으로 인식, 직관하는 신체험을 플라톤주의
에 따라 서술하고 있다. "이제는 나 자신에게로 돌아 가기를 원했고, 당신의 도우심을 얻어
내 심령 가장 깊은 속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나 자신의 깊은 곳으로 돌아가서 연약한
영의 눈을 떴을 때 나는 한 줄기 밝은 주님의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은 변하지 않는 빛
(Immutable Light)이며 육신적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그러한 평범한 빛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새로운 불빛이었습니다"(7.10.16). 그러나 이 때의 체험은 나중(제8권)에
있게 될 체험의 전조에 지나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처음 당신을 알았을 때 내가 반드시 보아야 할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과 여전히 나는 볼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눈부신 빛을
비추심으로 내 눈의 연약함을 물리치셨기에, 나는 사랑과 경이로 두려워 떨었나이
다"(7.10.16). 어거스틴은 이 때 눈이 떠짐으로 그 결과 "주님과 떨어져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7.10.16).

  제8권에서 어거스틴은 영혼의 중생을 체험한다. 발제자가 보기에 어거스틴의 신비주의를
연구하는 많은 연구들이 여기에 초점을 맞추지 아니하고 있는 것은 이상하게 보인다. 내가
보기에, 어거스틴의 신비주의의 핵심은 그의 중생 경험에 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영혼의
비참함 때문에 눈에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리며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때 이웃
집에서 들리는 "집어들고 읽어라. 집어들고 읽으라"는 음성을 듣고 성경을 펴 본 결과 로마
서 13장 13,14절의 말씀을 읽게 되었다. 이 때 어거스틴은 더 읽지를 않았다. 더 읽을 필요
가 없었기 때문이었다(8.12.29): "이 말씀은 광명한 확신의 빛으로 내 마음을 내 마음을 비추
어 내 속에 있던 모든 의심의 어두움을 물리쳐 주었기 때문입니다"(8.12.29). 여기서 어거스
틴은 확실한 하나님의 조명을 체험하게 되었다.

제9권에서 어거스틴은 중생의 달콤함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주님은 나에게서 육체적 소욕을 앗아갔으나 더욱 참되고 위대한 행복
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내 마음 속의 정욕은 사라지고 주께서 내 영혼 속에 좌정하시어 더
욱 달콤한 기쁨을 선사하였습니다. 이 선물은 육체나 혈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혼 깊숙이
자리잡은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모든 빛보다 더 밝은 빛, 깊이 감추인 신비보다 더욱 깊
은 신비, 모든 존귀보다 더욱 높은 존귀와 사랑을 내게 베푸셨나이다"(9.1.1). 여기서 어거스
틴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 속에 좌정하심을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임재 체험이다. 어거
스틴의 신비체험에서 유명한 것은 제9권 끝에 있는 오스티아에서 본 것(Ostia vision)에 대
한 기술이다.

387년 가을에 로마의 항구 오스티아에서 배를 기다리면서, 어거스틴과 모니카
는 성도의 영원한 삶의 본질에 대해서 대화하는 중에 신비한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이
것은 The Confessions 9.10에 감동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들의 영적인 상승과 함께 그들
이 도달한 영적, 신비적 관조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이렇게 묘사한다. "영원히 변치 아니하시
는 '불변자'(시 4:8)이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더욱 강렬하게 불타올라서 지구를 비
추는 해와 달과 모든 별들이 속한 하늘을 포함하여 모든 물질적 수준을 초월하여 주님께로
올라갔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묵상하고, 대화하며, 탄복하는 중에
더욱 높이 올라갔습니다"(9.10.24). 이것은 일종의 영적인 ecstasy이다. 우리는 어거스틴의
갈망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발견하려는 열렬한 탐구를 읽게 된다. 그것은 플로티누스와
상응되는 영혼 상승의 방식을 통해 추구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응답은 오직 하나님이 위
로부터 주시는 "은혜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어거스틴은 The Trinity에서 위로부
터 주시는 지혜로 묘사한다(15.3.5).


  3. The Trinity : 삼위일체의 형상 ― 어거스틴 신비주의의 삼위일체적 기초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개념(창 1:26)은 교부시대뿐만 아니라
중세 시대에도 신학적 인간론의 중심주제였다. 어거스틴은 누구 못지 않게 이 핵심 개념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A. Trap 는 "어거스틴 영성의 근본 과제는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
상의 회복이었다"고 말했다. The Trinity에서의 관심은 인간이 어떠한 점에서 '삼위일체의
형상'(imago trinitas), 즉 세 위격들의 내적 삶에 참여하는 형상인지를 탐구하는 데 있다.
The Trinity의 첫 부분(대략 1-8권)은 삼위일체의 통일성과 동등성을 설명하는데, 곧 그것
을 밝히고 있는 성경 구절들, 그리고 특히 그것과 모순되어 보이는 구절들을 검증하는데 관
심을 갖는다. 그 책의 뒷 부분이 가장 독창적인 내용이다. 풍부하게 심리학적으로 상술하면
서 우리가 그에 근거하여 삼위일체의 본질에 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긴 일련의 유비들을
발전시키고 있다.

  8권의 끝부분에서 어거스틴은 하나님과 삼위일체를 알기 위한 열쇠가 사랑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정신(mind)은 그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을 알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하나
님을 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대가 사랑을 볼 때에 삼위일체를 보는
것이다"(8.8.12).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은 확실히 하나님을 사랑한
다"(8.8.12).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내면적인 눈으로 볼 수 있다"(8.8.12). 어거스틴이
소개하는 첫 번째 삼위일체는 사랑의 삼위일체이다. 사랑에는 마치 삼위일체의 형적처럼 세
가지 면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다는 것과 사랑, 이 셋이 있다. 사랑은 사랑
하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것, 이 둘을 연결하는 또는 연결하려고 하는 생활이 아니고 무엇
인가?"(8.10.14) 어거스틴은 사랑의 삼위일체 논의에서 방향을 틀어 제9권부터는 인간과 피
조물들에서 보이는 삼위일체를 논한다. 제9권에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마음에까지 논의
가 진행된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이 일종의 삼위일체를 발견한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 안
에는 일종의 삼위일체가 있다. "즉, 마음과, 마음이 자체를 아는 지식과, 마음이 그 자체와
자체에 대한 지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 이 셋이다. 그리고 이 셋은 동등하며, 그 본질
(essence)이 하나이다"(9.12.18). 제10권과 제11권에서 어거스틴은 사람의 마음 속에서 기억
과 이해력과 의지라는 더욱 명백한 삼위일체를 발견한다(15.3.5). "그러므로 기억과 이해력과
의지라는 이 셋은 세 생명이 아니라 한 생명이며 세 마음이 아니라 한 마음이다. 따라서 이
것들은 세 실체가 아니라 한 실체이다"(10.11.17). 그러나 여기서 어거스틴은 마음의 삼위일
체의 문제는 뒤로 미루고 신체의 감각으로 볼 수 있는 물체들에서 일종의 삼위일체를 찾음으로써 독자의 주의가 더 분명하게 되도록 단련하려고 한다(15.3.5).

  제12권에서 어거스틴은 지혜와 지식을 구별한다. "영원한 사물에 대한 정신적 인식은 지
혜에 속하며, 무상한 사물에 대한 합리적 인식은 지식에 속한다"(12.15.25). 어거스틴은 "하
나님에 관한 일들에 대한 지식은 지혜라고 부르고 사람에 관한 일들에 대한 것은 지식"이라
고 불렀다(14.1.3). 또 어거스틴은 정관적 지식을 지혜라고 부르며 행동적 지식을 단순히 지
식이라고 불렀다(15.10.17). 어거스틴은 외면적 인간에 속한 것들을 떠나서, 우리와 짐승들에
게 공통된 것들로부터 내면으로 올라감으로 최고의 영원한 정신적 사물에 대한 인식에 도달
하고자 하였다(12.15.25). "나는 앞에서 외면적 인간에게서 삼위일체를 구한 것과 같이, 여기
서는 이를테면 한 걸음씩 올라감으로써 내면적 인간에게서 그 지식과 지혜에서 나름대로의
삼위일체를 구하고자 했다"(13.20.26). 제13권에서 어거스틴은 기독교적 신앙을 추천한다. 왜
냐하면 타락한 인간의 경향을 단절하고 관상에 의해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것은 단지 인간
자신의 힘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성육신에 대한 신앙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신은 정화
를 필요로 하는데, 그 정화는 성육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지식이 정화될 때 이루어
진다. 성육하신 그리스도는 시간적인 지식을 통하여 영원한 지혜에 이르게 하시며, 영원한
사물에 대한 진리를 계시해 주신다(13.19.24).

  제14권에서 어거스틴은 사람의 진정한 지혜를 논한다. 즉 "하나님 자신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 그 지혜이며, 지식과는 구별되는 것이다"(15.3.5). 어거스틴은 하나님
자신이 가장 으뜸가는 지혜시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사람의 지혜라고 하였다(14.1.1).
어거스틴은 영원한 사물에 도달하려면 믿음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저 믿음은 비록 시간적인
것이지만, 영원한 사물에 도달하기 때문이다(14.1.3). 그러나 우리가 이 시간적인 믿음을 품
으며 정관(靜觀)하며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를 만한 삼위일체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14.2.4).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영원한 일로 이루어지며, 시간적인 일로 이루어
진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므로, 사람의 마음이 자체의
믿음을 볼 때에는 영원한 것을 보는 것이 아니기"(14.2.4) 때문이다. 제15장에서 어거스틴은
특별히 성령에 대하여 논한다. "성령과 성부도 모두 지혜시지만,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을 특
히 지혜라고 부르는 것과 같이, 성부와 성자도 모두 사랑이시지만 특히 성령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15.17.31).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묶는 띠이시다(15.19.37).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할 때에는 성령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부에게서 나오시는 성령 하나님은 사
람에게 주어질 때에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불을 그 속에 일으키며 그 자신이 사랑이
시다. 하나님에게서 받지 않으면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할 힘이 없다(15.17.31). 사랑이신
성령에 의하여 삼위일체 전체가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된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신비주의의
핵심이자 극치이다. 어거스틴이 The Trinity를 저술한 목적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삼위
일체를 완전하고 충분히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내적 존재가 지닌 불변하는 삼위일체적 본
성 때문임을 인식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길고 어려운 본문은 이미 우리가 내면의 눈
을 떠서 우리 내면에 현존하여 활동하고 계신 삼위 하나님을 보며, 삼위일체의 형상을 의식
적으로 활용하여 하나님을 보라는 초청이다.


  4. 어거스틴의 신비 체험의 특징


  1) 하나님을 봄 : 관조적 신비주의

  "보이지 않게 하나님을 본다"는 개념은 어거스틴의 신비주의의 중심적인 관심사 중 하나
이다. 413년 경에 파울리나를 위해 쓴 「편지」147, 즉 on Seeing God이라는 논문의 절정
부분에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영이시다(고후 3:1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영이다(고전 6:17). 이런 까닭에 보이지 않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합할 수 있다"(Ep. 147.15.37 PL 33:613)고 말한다. 어거스틴의 관상에 이르는 단
계는 세 단계로 말할 수 있다. 먼저, 감각 세계로부터의 물러남이 있는데, 이것은 종종 우주
의 아름다움에 대한 숙고로부터 시작된다(Confessions, 7.17.23). 다음에 영혼의 깊은 곳을
향한 내적인 진행이 뒤따른다(7.10.16 ; 7.17.23). 마지막으로, 영혼을 넘어서 하나님을 보는
것으로의 진행이 있다(7.10.16 ; 7.17.23).

  2) 그리스도의 중보와 은혜의 성령을 통한 관조

  어거스틴의 신비주의에서 영혼의 상승은 예수 그리스도의 내려오심이 없이는 하나님을 체
험하는 열쇠가 될 수 없다. 말씀의 성육신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의 합일의 가능성을
가진다. 이것은 어거스틴을 신플라톤주의의 배경과 단절시키는 매우 중요한 대조점이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리에 보다 담대히 나아가게 하기 위하여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의 신성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인간성을 취하셔서 이 진리를 확립하였
는데, 이는 사람이 신인(神人)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기 위함이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요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다. 그가 인간임으로 해서 동시에
중보자요 길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길을 가는 자와 그가 향하는 목표 사이에 길이 있다
는 것은 그가 도달할 수 있는 희망이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Trinity, 11.2).
  플로티누스의 견해에 의하면, 타락한 영혼이라도 그 신적 기원 때문에 언제나 스스로를
고양시켜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견해에 의하면, 영혼은 원죄와 개인적
인 죄에 묶여 있는 타락한 피조물이므로 그러한 고양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동하신
결과이다. 모든 가르침은 인간 교사들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
로부터 온다. The Teacher에서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포된 말씀의 진리를 깨
닫기 위해서는 내 속에 내주하시면서 외적인 귀에 선포된 그 말씀들에 대해서 조언해 주실
수 있는 그에게서 반드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Teacher, 14.46) 어거스틴
은 이와 같이 성령으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내적 가르침을 중시하였다. 모든 참된 가르
침은 인간 교사들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부터 온다
(Homilies on John, 96.4). 단순한 가르침의 젖을 먹다가 고등 교리라는 단단한 음식을 먹게
되는 것은(고전 3:2) 그리스도와 그의 성령의 역사이다(Homilies on John, 97). 하나님을 보
려면, 먼저 마음이 치유되어야 한다. 이 치유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
랑이신 성령의 역사이다.

  3) 정감적 신비주의

  어거스틴의 신비주의의 본성을 해석하면서, 터셀은 단순히 그의 신비주의가 신적 관조
(visio Dei)에만 집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위에서 보았듯이 강렬한 열망과 동경이 성격지어
주는 정감적(affective), 의지적 측면에서 그 독특성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은
육체적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영적인 빛에 대해 많이 말하였다(Confessions, 6.16.26). "주님
께서 내게 빛을 비추사 볼 수 없는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10.27.38). 또한, 어거스틴은
영적인 음성에 대해서도 많이 말하였다. "당신에게 나의 귀를 기울이오니 내 영혼에게 말씀
하옵소서. '나는 네 구원이 됨이니라.' 이러한 음성을 듣고 당신에게 의지함으로 행동하게 하
소서"(1.5.5). 어거스틴은 영적인 느낌에 대해서도 많이 말하였다. "내게 꿀송이보다 더 달콤
한 기쁨과 영광과 확신을 주시는 나의 하나님이시여! 주신 선물들로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
리오며 간구하오니 제게 주신 선물들을 잘 보전할 수 있게 하소서"(1.20.31). 오리겐 및 여러
동방의 저자들처럼 영혼의 영적인 감각들에 대한 형식적 이론을 거론함이 없이, 어거스틴은
공감각(共感覺)의 형태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직접적인 의식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풍성
함을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강조함으로써 서구 신비주의 역사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
다.


  5. 플로티누스와 어거스틴의 신비주의


  플로티누스(205-270)가 신비주의자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의 신비주의는 新피타고라
스학파나 그노시스주의자들과 같은 신비적 종파들의 신비주의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것
은 결코 유한한, 그리고 가시적인 세계를 물리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유한하고 가시
적인 세계 속에 무한하고 불가시적인 것이 재림하고 있음을 느끼는 신비주의였다. 그의 주
장에 의하면, 一者는 초월적인 것이다. 그러나 플로티누스는 역시 진지하게 一者는 내재적이
기도 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플로티누스는 현대인들이 신비한 경험이라고 일컫는 것을
경험했음이 분명하다. 그의 제자 포르피리는 스승에 대해 저술한 매력적인 전기에서 이헣게
증거한다. "그 분의 목적과 목표는 만물 위에 있는 神과 연합하는 것, 그에게 다가가는 데
있었다. 그분은 나와 함께 있는 동안 네 차례 그 목표에 도달했다"(Life of Plotonus, 23).

플로티누스 자신도 「엔네아즈」(4.8.1)의 서두 중 몇 곳에서 자전적인 어조로 이렇게 말하
였다. "종종 나는 내 몸 밖으로 나왔다가 자신 안으로 들어갔으며 다른 모든 사물 밖으로
나갔다. 나는 엄청난 아름다움을 보았으며, 내가 대체로 더 좋은 부분에 속했다는 확신을 느
겼다. 나는 실제로 최상의 삶을 살았으며 그 신성과 일치되기에 이르렀다. 그 안에 확고히
자리잡은 나는 그 최고의 현실에 도달했으며, 지성(Intellect)의 영역에 있는 다른 모든 것
위에 자리잡았다. 그 후 신성 안에서 휴식을 취한 후 지성을 떠나  논설적인 추론으로 내려
왔는데, 어떻게 내려왔는지 어리둥절하다"(LC 4:396-97).

  플로티누스의 많은 기본존재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세 가지 있다. 즉 영혼의 단계와
叡智의 단계와 그리고 끝으로 一者 자체인 것이다. 예지의 단계는 一者로부터 유출된 것이
요, 영혼의 단계와 유한한 가시적 세계는 예지의 단계로부터 유출된 것들이다. 그는 영혼이
熟廬를 통해서 예지의 단계로, 그리고 신비적 合一을 통해서 一者 자체 속에 흡수되는 단계
로 올라가는 생활을 구하였다. 플라톤은 이 세계 안에서 이데아에 관한 인식에 의하여 이
루어질 수 있는 성취를 목표로 삼은데 대하여, 플로티누스는 유한한 세계를 전적으로 등지
고 점차 높은 정도의 존재로 올라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덕을 통하여 예지에로, 그리고
지혜를 통하여 一者에로 올라갈 것이다. 신들의 생활이나 신과 같은 축복된 생활이란, 즉 이
속계의 온갖 것으로부터의 해탈, 모든 지상적 쾌락의 唾棄, 그리고 고독한 자가 고독한 자에
로의 비약과 같은 것들이다."

  어거스틴이 플로티누스에게서 사상적 도움을 많이 받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르낙은
어거스틴이 신플라톤주의의 도움으로 마니교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틸리히는
어거스틴이 신플라톤주의로 말미암아 회의주의(skepticism)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그러
나 플로티누스의 신비주의는 어거스틴의 신비주의와 유사한 점이 많으면서도 근본적인 차이
가 많이 발견된다. 역사가는 신플라톤주의가 기독교사상가들―특히 聖어거스틴―에 의하여
이용됨으로써 터무니없는 환상에로의 타락으로부터 구출되었다고 단정하고 있으며, 또 그렇
게 단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플로티누스도 일자가 갑자기 신비가에
게 자신을 나타내는 것(giveness)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이 예기치 않은 신(Supreme)
의 현현은 기독교의 은혜가 의미하는 것과 같지 않다. 이것은 자신의 신성을 일깨우려는 영
혼의 노력에 부수되는 바 위로부터 주어지는 일종의 자동적 반사(automatic reflex)로서, 어
거스틴의 은혜에 대한 견해와 상당히 거리가 멀며, 헬라 교부들에게서 발견되는 신인협력적
인 은혜의 신학들과도 거리가 멀다. 영혼은 피조된 영이 아니라 본래 신적이라고 주장되는
것에서는 은혜에 대한 기독교적 개념이 설 자리를 찾지 못한다. 어거스틴은 the
Enarratio on Psalm 4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I pereive that my God is something
superior to my soul. … If it[my soul] remains within itself, it will see nothing but itself,
and in itself it will not see its God." 이것이 어거스틴과 플로티누스를 갈라놓는 결정적인
차이점 중 하나다. 어거스틴은 Confessions, 7.9.13에서 플라톤 사상의 책을 읽음으로써 요
한복음 초반부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았음을 말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어거스틴은
그 글 속에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없음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또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 1:12)라는 구절
은 빠져 있었습니다"(7.9.13). "그러나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요
1:14)는 말씀은 그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아니했습니다"(7.9.14).


Ⅲ. 평가 및 문제 제기


  1. 어거스틴은 Confessions, 1.17.27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학문의 허무함을 말하고,
또 Confessions, 1.18.29에서는 철자법을 배우는 데는 열심을 내지만 영원한 구원의 언약에
는 관심조차 없는 자들에 대하여 탄식을 하고 있다. 또, Confessions, 4.16.30; 5.5.8에서는 세
상의 작은 학문적 지식은 얻었으나 지식의 근본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세태를 탄식하고
있다. 고백록의 전체 주제가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구원이요,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이
번 연구에서 확인한 어거스틴의 공헌은 첫째, 우리들에게 기독교 신앙에는 신비적 차원이
있음과 영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있는 점이다. 둘째, 과학과 학문
의 차원을 넘어선 신적 조명의 우월성을 말해주고 있다. 세째,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
님의 형상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자료를 주고 있다.

  2. 어거스틴이 지혜와 지식을 구별하면서 고린도전서 12장을 예로 들었는데(Trinity,
12.14.22) 이것은 정확하지 못하다. 어거스틴이 자기의 사상을 표현하려고 지혜와 지식이라
는 용어를 사용하여 구별한 것은 훌륭한 착안이라는 생각이 드나 성경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지식의 말씀의 은사의 구별이 지금 어거스틴이 말하는 구별과
는 사뭇 다르다. 성경에 나오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땅에 속한
것, 저급한 종류의 것, 없어질 것에 대한 지식을 말씀하심이 아니다.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 3:18) 하셨을 때 영적인 지식을 말씀하심이지 땅에 속한 지식을 말씀하심이
아니다. 성경적 용어 사용에 있어서 치밀함이 부족하다.

  3. 하나님께 도달하는 방법이 약간 공로적인 인상을 준다. 어거스틴은 영혼의 상승과 성령
으로 말미암는 지혜를 말하였으나 구체적으로 그 지혜를 얻는 길은 다소 율법주의적 요소를
보여준다. 즉, 내면으로 들어가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경외하라 등. 어거스틴은 이웃 사랑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당신은 아직 하나님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
의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그분 뵙기를 갈망한다. 당신의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당신은 하나님
을 보기 위한 당신의 눈을 정화시키게 된다. … 따라서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라. 그리고 당
신이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주시해보라. 아마도 당신은 하나님을 볼 것이다"(In
Joan Evang., 17.8.; see also De Trin., 8.8.).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하나님께 도달하기 위하
여 믿음의 정화작용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은 어둡고 고질적인 악으로
말미암아 너무나 망가져 있기 때문에 그 변함없는 빛을 품을 수도, 더군다나 그 안에 머무
를 수도 없는 것이며, 그렇게 되기까지는 믿음의 정화 작용을 통해 그런 능력이 생길 수 있
도록 매일매일 새로워져 가야만 한다"(The City of God, 11.2). 여기서 정화라는 용어는 어
거스틴 이후의 서방 신비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전형적인 용어이다. 이로써 어거스틴은 중세
의 신비주의자들의 길과 중세의 공로주의적 선행의 길을 열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은총의
신학자답게 보다 은혜적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도달하는 길을 말할 수는 없었
는가?(참고: 로마서 3:20-24)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율법주의적 선행이나 노력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과
성령의 선물을 받으며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참고: 갈 3:13,14 ; 요 14:16-20). 어거스틴은 하
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따라 주어지는 성령의 주권적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은 강조했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미 베풀어주신 은혜를 깨달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그에 비하여
충분히 강조하지 못했다.


Ⅳ. 결  론


  누구나 어거스틴이 인간의 내면성에 대한 깊은 탐구에 의해 라틴 서방교회의 신비주의적
전통에 그 신학적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가장 큰 영향을 남긴 아버지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Henry Chadwick의 말대로 "모든 서방 신비가들의 열망은 그의 영향을 결코 피하지
못했으며, 무엇보다도 그의 사상에서 하나님 중심성 때문에 그러했다". 그의 모든 책들에
는 일종의 중심 사상으로서 하나님을 향해 가는 영혼의 움직임이 있다. 어거스틴의 신비
체험은 역사상 많은 중요한 교회사의 인물들이 체험한 것과 동일선상에 있다. 우리는 John
Calvin, John Wesley, Jonathan Edwards, George Whitefieid 등 교회사에 우뚝선 위인들의
생애 속에서 어거스틴이 체험한 것과 동일한 체험 ― 즉, 성령 안에서 경험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 ― 이 있음을 본다. 오늘날 현대의 신학연구자들도 이런 점을 배워야 하지 않
을까 생각해 본다.